하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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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 씨는 진나라 진 시황제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기원은 불분명하며 백제, 신라, 후진 등 다양한 기원설이 존재한다. 일본으로 건너와 6~7세기에 교토 분지에서 번성했으며, 양잠 및 직조 기술을 도입하여 재정에 능숙했다. 마쓰오 타이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등을 씨신으로 모셨으며, 가모 신사와 함께 야마시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를 창건했다.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고레무네 씨, 시마즈 씨 등이 후예를 자처한다. 유대인 기원설이 제기되었으나, 현대 DNA 분석 결과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현대에도 하타 씨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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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씨 (제번) - 고류지
고류지는 7세기 전반에 창건되어 미륵보살을 모셨으나 약사여래를 모시는 사찰로 바뀌었으며, 쇼토쿠 태자 신앙의 중심지이자 국보 미륵보살반가상 등을 소장하고 있는 일본 교토의 사찰이다. - 도래인계 씨족 - 제번
제번은 특정한 체계에 따라 건물이나 토지 등에 붙이는 번호이며, 주소 체계의 일부로 사용되어 위치를 식별하고 찾기 쉽게 한다. - 도래인계 씨족 - 고마씨
고마 씨는 7세기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고마노 고시키 잣코를 중심으로 고마 신사를 세워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신관을 맡으며 일본 사회와 무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하타씨 | |
---|---|
개요 | |
![]() | |
일본어 | 秦氏 (Hata-uji) |
문자 그대로 | 진나라 씨족 |
중국어 | 秦 (Qín) |
가문 정보 | |
부모 가문 | 진나라 |
작위 | 다양함 |
창시자 | 우즈마사노키미 스쿠네 |
설립 연도 | 기원전 2세기 |
해체 연도 | 9세기? |
분가 | |
분가 목록 | 조소카베 씨 가와카쓰 씨 진보 씨 고레무네 씨 |
추가 정보 | |
씨성 | 하타노 기미 하타노 미야쓰코 하타노 이미키 |
시조 (자칭) | 유즈키노 기미 (弓月君) |
시조 (주장) | 진시황의 후예 |
종별 | 제번 |
본관 | 부젠국 이즈모국 이요국 아와국 기비 국 하리마국 야마시로국 가도군 야마시로국 기이군 야마토국 가와치국 사사라군 단바국 구와다군 미노국 가모군 사가미국 오스미군 등 |
주요 인물 | 하타노 가와카쓰 |
후손 | 고레무네 씨 도기 가문 (지하가) 오바타 가문 (지하가) 세오 가문 (지하가) 도야마 가문 (지하가) 미카미 가문 (지하가) 조시 가문 (지하가) 후지키 가문 (지하가) 마쓰무로 가문 (지하가) 히라타 가문 (지하가) 이시카와 가문 (지하가) 오이시 가문 (지하가) 마쓰오 가문 (샤케) 히가시 가문 (샤케) 미나미 가문 (샤케) 니시오지 가문 (샤케) 오니시 가문 (샤케) 하쿠라 가문 (샤케) 니가타 가문 (샤케) 가와카쓰 씨 (무가) 오쿠라 씨 (무가) 마쓰시타 씨 (무가) 시마즈 씨 (무가) 소 씨 (무가) 등 |
2. 역사
하타 씨는 중국 낙랑군을 거쳐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 치세 때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신라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나에서 씨족 120명을 만난 후, 283년에 "자신의 땅 120개 지역"에서 온 씨족 구성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보석, 이국적인 직물, 은과 금 등 막대한 보물을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2]
하타 씨는 재정에 능숙했고 일본에 비단 사육과 직조 기술을 도입했다. 닌토쿠 천황(313–399) 시대에 씨족 구성원들은 양잠 지식과 실습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보내졌고, 야마토 조정의 재정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즈모와 산요 지방에 상륙하여 정착한 하타 씨는 이후 교토 등 주요 도시에 정착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마츠노오 타이샤, 코류지 등 신사와 사찰 건립에 기여했다.
유랴쿠 천황은 471년에 사케노 기미의 공로를 기려 우즈마사라는 성을 하사했고, 이후 미야츠코, 이마키(忌寸) 등의 카바네를 받았다. 덴무 천황 14년(685년) 야쿠사노 카바네에서는 이마키(忌寸) 성을 받았으나, 공(公)·스쿠네(宿禰) 등을 칭하는 가계도 있었다.
헤이안 천도에 즈음하여 가도노 군 진씨의 재력·기술력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헤이안 시대에는 고레무네 씨를 칭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진씨를 칭하는 가계(악가 토기 가 등)도 남았다. 토기 가, 난카 가 등은 마츠오타이샤의 사가, 하타 가, 니시오지 가, 오니시 가, 모리 가 등은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사가가 되었다.
가쓰라기 소쓰히코의 지원을 받아 가쓰라기 씨 본거지인 가쓰라기에 살았다.[17] 야마토국 외에 야마시로국가도노군 (현재 교토시우쿄구우즈마사), 기이군 (현재 교토시 후시미구후카쿠사), 가와치국사라군 (현재 오사카부네야가와시 우즈마사), 셋쓰국 도요시마군, 하리마국 (현재 효고현), 아와국, 이요국 등 각지에 정착하여 토목, 양잠, 기직 등 기술을 발휘했다.
마쓰오 타이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등을 씨신으로 모셨고, 가모 씨가 창건한 가모 신사와 함께 야마시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가 되었으며, 진씨 후예는 이들의 사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18]
유랴쿠 천황 시대 진 사케노키미는 진씨 반조로서 각지 진부·진인을 통솔, 공의 성을 받았다. 긴메이 천황 시대 기이군후카쿠사 리 진 오쓰치는 반조가 되어 오쿠라노후비토에 임명되었다. 스이코 천황 30년 진노 카와카쓰가 고류지를 건립, 고교쿠 천황 시대 쇼토쿠 태자 소유 후카쿠사 둔전을 진씨가 관리했다.
덴지 천황은 진씨에 의한 야마시로국 개척(천도)을 진행했지만 미개척 상태로 남았다. 텐오 원년 칸무 천황 즉위로 재개척, 엔랴쿠 3년(784년) 나가오카쿄 조영, 엔랴쿠 13년(794년) 와케노 기요마로·후지와라노 오구로마로 제언으로 헤이안쿄 천도가 이루어졌다.
초소카베 씨족, 가와카츠 씨족, 진보 씨족 등 여러 사무라이 씨족이 하타 씨족 후손을 자처했다. 오사카부 네야가와에는 하타 씨족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2. 1. 기원 및 도래
하타 씨는 중국 낙랑군을 거쳐,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전해진다.[1] 현재의 평양 근처에 위치했던 낙랑군은, 위만조선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정복 이후 중국 한 무제에 의해 설치된 한사군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중국 문화와 기술을 이식하면서, 중국인의 한반도 이주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하타 씨가 백제가 아닌 신라 또는 가야 연맹에서 왔다고 주장한다.『일본서기』에 따르면 응신 천황 14년(283년)에 백제에서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귀화했다고 기록된 궁월군[10]을 하타 씨의 시조로 본다.[11] 헤이안 시대 초기의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진씨는 진 시황제의 후예"라는 의미의 기재가 있지만,[12]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 출자 또한 명확하지 않다. 이는 하타 씨 스스로가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조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13][14][15] 「궁월」의 조선어 음훈과 훈독(쿤달)이 "백제"의 와훈인 "구다라"와 거의 동음이라는 점에서 백제 계통이라는 설 등이 있다.[16]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오진 14년(283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씨족으로, 진의 진 시황제의 후예라고 묘사된 궁월군(융통왕)이 중심 인물로 여겨진다.[19]
하타 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신라계 도래 씨족 설: 쇼토쿠 태자를 섬긴 하타노 카와카츠는 신라 불교 계통을 신봉했는데, 이는 소씨와 한씨가 백제 불교를 신봉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또한, 방위에서 동남동을 의미하는 "진"의 진한은 중국 왕조에서는 진한으로 불렸기 때문에 진나라의 후예가 아닌가 여겨졌다.
- 백제계 도래 씨족 설: "궁월"의 한국어 음훈이 백제의 훈독인 "구다라"와 동음・동의어이기 때문에, "궁월군"="백제군"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 나오는 궁월군이 백제의 120현의 백성을 이끌고 귀화했다는 전승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하타(옛날에는 하다)라는 읽기에 대해서는 한국어의 파다(바다)에 따른다는 설 외에도, 기계 직조, 신라의 파단이라는 지명과 결부시키는 설[22]이 있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중국에서 강족이 일으킨 후진에 유래한다는 설.
- 경교(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도의 유대인이 조상이라는 설이 사에키 요시로에 의해 제창되었다.[28]
2. 2. 일본 정착 및 활동
유즈키노키미(弓月君)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이주하기를 원했지만, 신라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임나에서 씨족 120명을 만난 후, 오진 천황 치세 때인 283년에 "자신의 땅 120개 지역"에서 온 씨족 구성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보석, 이국적인 직물, 은과 금 등 막대한 보물을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1][2] 하타 씨는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유즈키노키미의 후손으로, 6세기와 7세기에 교토 분지의 가장 저명한 거주민이었다.[3]하타 씨는 재정에 능숙했고 일본에 비단 사육과 직조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닌토쿠 천황(313–399) 시대에 씨족 구성원들은 양잠 지식과 실습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보내졌고, 수세기 동안 야마토 조정의 재정 고문으로 활동했다. 원래 이즈모와 산요 지방에 상륙하여 정착한 하타 씨는 결국 현재 일본의 가장 중요한 도시 지역에 정착했다. 헤이안쿄(오늘날의 교토)와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마츠노오 타이샤, 코류지를 포함한 많은 신토 신사와 불교 사찰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랴쿠 천황은 471년에 사케노 기미가 양잠 전파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씨족에게 우즈마사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그들은 미야츠코의 지위 (''카바네'')를 얻을 권한을 받았고 나중에는 이미키의 지위를 받았다.
야마토국뿐만 아니라, 야마시로국가도노군 (현재의 교토시우쿄구우즈마사), 기이군 (현재의 교토시 후시미구후카쿠사), 가와치국사라군 (현재의 오사카부네야가와시 우즈마사), 셋쓰국 도요시마군, 하리마국 (현재의 효고현), 아와국, 이요국 등 각지에 정착하여, 토목, 양잠, 기직 등의 기술을 발휘하여 번성했다. 단바국소다군 (현재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는 습지대 개척 등을 했다.[17]
진씨는 마쓰오 타이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등을 씨신으로 모셨으며, 가모 씨가 창건한 가모 신사와 함께 야마시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가 되었으며, 진씨의 후예는 이들의 사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18]
유랴쿠 천황 시대에는 진 사케노키미가 진씨의 반조로서 각지의 진부·진인을 통솔하여 공의 성을 받았다. 긴메이 천황 시대에는 기이군후카쿠사 리의 진 오쓰치가 반조가 되어 오쿠라노후비토에 임명되었다. 스이코 천황 30년에는 진노 카와카쓰가 고류지를 건립했다. 고교쿠 천황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 소유의 후카쿠사 둔전을 진씨가 관리 경영했다.
2. 3. 분파 및 후예
하타 씨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지에서 활동했다.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30][31][32][33][34][35][36][37]분파 | 거점 및 주요 인물 |
---|---|
도요젠노쿠니 진씨 | 가미미케군(현재의 쓰쿠이군)의 카지쿠야리, 토리와 나카쓰군(현재의 후쿠오카현 유쿠하시시・미야코정 부근)의 쵸리에 진부나 씨명이 있었다. |
카도노 진씨 | 야마시로국카도노군우즈마사를 거점으로, 나가오카쿄, 헤이안쿄 천도에 관여. 진주공, 진하카쓰, 진기공 아시나가, 우즈마사공 기공 택수 등. |
후카쿠사 진씨 | 야마시로국키이군후카쿠사를 거점으로, 쇼토쿠 태자 소유의 후카쿠사 둔전을 관리. 진오쓰치, 진이로구 등. |
하리마 진씨 | 하리마국아코군을 거점으로, 헤이조궁 출토 목간에 기록. 진하카쓰는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짐. 다이히 신사가 효고현 내에 다수 존재. |
미마사카・비젠 진씨 | 하리마국 서부의 진씨와 관련되어 미마사카국과 비젠국에도 진씨가 존재. 진다이형, 진조 국족, 진부 국인, 진승 소국 등 기록. |
오미 이치 진씨 | 오미국아이치군 등 비와호 주변을 거점으로, 악사 등을 많이 배출. 타이진 시마마로, 악가로서 번성한 동의, 임, 오카, 소노가 등. |
와카사 진씨 | 와카사국은 현재의 후쿠이현으로, 소금이나 해산물을 조정에 많이 헌상. |
에치젠 진씨 | 사카이, 단생, 아시바의 에치젠 북부를 기반. |
동일본 진씨 | 스루가국, 가이국, 사가미국하타노 등 동일본의 진씨를 통칭. |
시나노 진씨 | 시나노국의 국사 등을 맡아, 사라시나군을 거점. |
진씨의 후예를 자처하는 씨족은 60개 정도라고 한다.[46] 주요 씨족은 다음과 같다.[43][44][45][46][47][48]
씨족 | 비고 |
---|---|
진수, 진공, 진인, 진자, 진관, 진성 | |
쇼시, 이마기미 씨, 베 씨 | |
보쿠시 하타 씨(에치하타) | |
나이조 씨, 오쿠라아손 | |
아사하라 씨, 우즈마사 씨, 초조 씨, 오사다 씨 | |
고레무네 씨 | |
사쓰마 시마즈 씨 | 고레무네아손에서 파생. |
소 씨 | 고레무네 씨에서 파생. |
지후인 씨 (가고시마 씨) | |
진보 씨, 아키 씨, 이치키 씨, 가와하라 씨, 가와마타 씨 | |
초소카베 씨 | |
가와카쓰 씨 | |
아카마쓰 씨 | |
토기 가 | |
마쓰시타 씨 | |
마쓰오 씨 |
3. 주요 인물
; 헤이조쿄 유적 출토 목간에 기술된 진씨
이름 | 출신 |
---|---|
진노인 | 비젠 국 |
진인산 | 비젠 국 |
진대환 | 비젠 국 |
진승소국 | 비젠 국 |
진부득환 | 비젠 국 |
진부(견)양 | 비젠 국 |
진부득만려 | 비젠 국 |
; 쇼소인 문서에 기술된 진씨
- 진추정(진상추정)
- 진유주(진기촌유주)
- 진동인(진전동인 - "소초위상 진전동인")
- 진가주(진부가가주 - "대초위하 진부가주") - 진가주(하타노 야카누시)는 746년(덴표 18년)부터 771년(보구 2년)까지, 조동대사사사경소에서 활동한 것이 쇼소인 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 전현고실에 기술된 진씨
이름 | 권 |
---|---|
진주공(하타노 사케노키미) | 제1권 |
진하승(하타노 가와카쓰) | 제1권 |
진부총성녀 (하타베노 후사나리의 무스메) | 제4권 |
진풍영(하타노 도요나가) | 제4권 |
진무문(하타노 다케분) | 제9권 |
4. 유대인 기원설
일본-유대 공통 조상 설에 따르면, 하타씨가 유대교 네스토리우스파 부족이라는 가설은 1908년 사에키 요시로에 의해 제기되었다. 사에키는 1879년 노먼 맥클라우드가 제기한 것과 "다소 유사"한 이론을 발전시켰다.[5]
1879년, 스코틀랜드 사업가 노먼 맥클라우드는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잃어버린 이스라엘 부족''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일본인을 잃어버린 열 지파의 후손으로 규정했다. 30여 년 후인 1908년, 와세다 대학교 교수이자 기독교인이자 중국 네스토리우스파 전문가였던 사에키 요시로(1872-1965)는 하타 씨가 유대-네스토리우스파 부족이라는 이론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사에키의 저술은 일본에서 "일본인과 유대인의 공통 조상"(''일-유 동조론'')에 대한 이론을 퍼뜨렸으며, 이 이론은 일부 기독교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5]
하지만 현대 DNA 분석을 포함하여 이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연구는 사에키가 제시한 계보적 연결을 뒷받침하지 않는다.[6] 연구자이자 작가인 존 엔타인은 DNA 증거가 일본인과 유대인 사이의 상당한 연관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강조한다.[7]
5. 현대의 진씨
현대에도 진씨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코 낭사 중 오이시 구라노스케 등 전 아코 번 무사 47명 중에는 하리마 하타 씨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49] 하타(はた)가는 하타 씨의 후손으로 전해지는데, 하네다 사다요시, 하네다 타케시로, 하네다 츠토무, 하네다 유이치로, 하네다 지로로 이어진다.[49] 국학자 하타 노카는 사가의 하쿠라가 출신이다. 츠노다 지로는 하타 씨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만화 『뒤쪽의 시황제』를 발표했다. 아키만은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만화가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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