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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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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JP연합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과 김종필이 대선 승리를 위해 결성한 정치 연합이다.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호남 지역에 갇힌 상황에서, 김대중 측은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을 모색했다.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 또한 연합을 고려하게 만들었다. 박태준의 자유민주연합 합류와 김대중-김종필의 정치 연합 공식 결정으로 연합이 구체화되었으며,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출마와 김종필의 국무총리직, 의원내각제 개헌 등이 합의되었다. DJP연합은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기여했고, 충청과 대구·경북 지역의 지지 확대를 이끌었으나, 이후 갈등과 2000년 총선 패배, 내각제 개헌 무산 등을 겪으며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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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DJP연합
로마자 표기DJP yeonhap
약칭DJP (비공식)
국가대한민국
창립1997년 11월 3일
해산2001년 9월 3일
지도자김대중
성향빅텐트
참여 정당

2. 배경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는 299석 중 76석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50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들 의석 대부분은 호남과 호서 지역에 집중되어 전국적인 지지 기반이 약했다.[1][3]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은 1997년 대선 승리를 위해, 김종필은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97년 8월 박태준이 자민련에 합류하여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연합 구상은 탄력을 받았다.[1][3] 1997년 11월 3일, 김대중김종필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조건으로 하는 정치 연합에 공식 합의했다. 이들은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김종필국무총리로 하는 권력 분점에 합의했다.[4][3][1]

2. 1. 1996년 총선과 김대중의 위기

1996년 4월 11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태재단의 상임고문인 이강래는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김종필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했다. 김대중 총재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96년 중순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하기에 이른다.[1]

2. 2. 김대중의 전략과 자민련과의 연합 모색

1996년 4월 11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태재단의 상임고문인 이강래는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김종필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했다. 김대중 총재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96년 중순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하기에 이른다.[1]

19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299석 중 76석만을 획득하는 참패를 당하고, 그나마 확보한 대부분의 의석이 호남 지역에 집중되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1] 김대중의 정치 참모 이강래는 대선 승리를 위해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을 제안했다.[3]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으로 분류되었으나, 299석 중 50석을 호서 지역에서 확보하는 데 그쳤다.[3]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 또한 그에게 다른 대안을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3]

2. 3. 자민련의 상황과 DJP 연합의 필요성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299석 중 76석만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그나마 확보한 의석 대부분이 호남 지역에 집중되었다.[1] 이로 인해 이듬해인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1] 김대중의 정치 참모였던 이강태는 대선 승리를 위해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을 제안했다.[3]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총선에서 299석 중 50석을 호서 지역에서 확보하며 승리한 정당으로 분류되었으나,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은 그에게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3]

3. DJP 연합의 전개 과정

19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NCNP)는 299석 중 76석을 얻는 데 그쳤고, 그나마 확보한 의석 대부분이 호남 지역에 집중되었다.[1] 이듬해인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1] 김대중의 정치 참모 이강태는 자유민주연합(ULD)과의 연합을 제안했다.[3]

자유민주연합은 총선에서 299석 중 50석을 호서 지역에서 확보하며 승리했지만,[3]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은 다른 대안을 고려하게 만들었다.[3]

이러한 연합 구상은 1997년 8월 박태준이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고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탄력을 받았다.[1][3] 11월 3일, 김대중김종필은 공식적으로 정치 연합을 결정했다.[4][3] 연합 조건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당선 시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었으며,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에도 합의했다.[1]

이 연합으로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1][5] 호남뿐 아니라 호서 지역에서도 승리했다.[3] 1998년 지방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그러나 이후 갈등이 발생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당내 반대파 문제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연합은 총선에서 패배했고, 제1야당인 한나라당(GNP)이 과반 미달의 의석을 확보했다.[7]

자유민주연합은 273석 중 17석만을 얻어 국회 의석 확보에 필요한 최소 20석에 미치지 못했다.[7]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당(MDP) 국회의원 3명이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변경했다.[8] 그러나 여전히 과반 정부 구성에는 실패했고, 결국 새천년민주당(DNP)과 연정을 구성했다.[9]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해체되었다.[10]

3. 1. 이론적 근거 연구

DJP연합은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 아닌 정치적 성향이 상반되었던 김대중-김종필의 연합이었기에 많은 이론적 연구가 수반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이를 위해 영국의 거국내각, 독일의 신호등 연정 등 다양한 사례를 조사하여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다.

3. 2. 자민련 내부의 갈등과 박태준의 합류

자민련은 표면적으로는 김종필 총재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3개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김종필 총재의 친위 세력인 충청계, 김영삼 대통령의 견제로 탈당한 TK(대구-경북) 민정계, 그리고 중립파였다. 충청계 수장은 김용환 부총재, TK 민정계 수장은 박철언 의원, 중립파 수장은 한영수 부총재였다. 중립파와 충청계 대부분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TK 민정계는 DJP연합에 매우 찬성했고, 박철언 의원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7년 8월, 김대중 총재와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 일본에서 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박태준은 자민련에 합류했다.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은 김대중의 열세 지역이었던 대구, 경북으로 지지세가 확산되는 데 일조했다.

3. 3. 김대중 총재의 양보와 DJP 연합 타결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이 김대중 총재 비자금 사건을 터뜨리자 국민회의는 비상이 걸렸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김종필 총재에게 대대적인 정치적 양보를 하게 되고, 김종필 총재는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대가로 대선 후보 자리를 양보하고 충청표를 몰아주기로 약속한다.

1996년 총선(1996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의(NCNP)가 299석 중 76석만을 획득하는 참패를 당하고, 그나마 확보한 대부분의 의석이 호남 지역에 집중되면서,[1] 이듬해인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1] 김대중의 정치 참모 이강태는 대선 승리를 위해 자유민주연합(ULD)과의 연합을 제안했다.[3]

자유민주연합은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으로 분류되었으나, 299석 중 50석을 호서 지역에서 확보하는 데 그쳤고,[3]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 또한 그에게 다른 대안을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3]

이 연합 구상은 1997년 8월 박태준이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고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탄력을 받았다.[1][3] 11월 3일, 김대중김종필은 정치 연합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4][3] 연합의 조건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당선 시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었으며,[1]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에도 합의했다.[1]

4. DJP 연합의 내용

5. 1997년 대선과 DJP 연합의 역할

19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299석 중 76석만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확보한 의석 대부분이 호남 지역에 집중되었다.[1] இதனால்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1] 김대중의 정치 참모 이강태는 대선 승리를 위해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을 제안했다.[3]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299석 중 50석을 호서 지역에서 확보하는 데 그쳤다.[3] 김종필의 낮은 지지율 또한 그에게 다른 대안을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3]

단순한 제안이었던 이 연합 구상은 1997년 8월 박태준이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고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탄력을 받았다.[1][3] 11월 3일, 김대중과 김종필은 정치 연합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4][3] 연합의 조건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당선 시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었다.[1] 또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에도 합의했다.[1]

이 연합은 김대중의 대선 승리로 이어졌고,[1][5] 호남뿐 아니라 호서 지역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3] 1998년 지방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하지만 이후 갈등이 발생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당내 반대파 문제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이 연합은 총선에서 패배했고,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 미달의 의석을 확보했다.[7]

자유민주연합의 패배는 더욱 심각하여, 273석 중 17석만을 얻어 국회 의석 확보에 필요한 최소 20석에 미치지 못했다.[7]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당의 국회의원 3명이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변경했다.[8]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반 정부 구성에는 실패했고,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했다.[9]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연합은 해체되었다.[10]

5. 1. DJP 연합의 효과


  • 김종필-박태준과의 연합으로 그동안 김대중을 괴롭혔던 색깔론 시비를 차단할 수 있었다.[1]
  • 호남 외에는 표의 확장성이 떨어졌던 김대중에게 충청대구, 경상북도에서 엄청난 표의 확장을 불러왔다.[2]
  • 주요 거점이었던 충청을 선점함으로써 대권 가도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3]

5. 2. 선거 결과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얻은 804만 표에 228만 표를 더하여 이회창 후보보다 39만 표 앞선 총 1032만 표를 얻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승리에는 492만 표를 얻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가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열세 지역이었던 대구·경북에서 14대 대선보다 5% 많은 13%의 득표를 기록하여 반(反) DJ 감정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충청 지역에서 43만 표 차이를 벌려 영남 몰표를 어느 정도 상쇄하는 데 성공했다.[1]

선거후보득표수득표율결과
1997년김대중10,326,27540.27%당선



선거지도자득표수%의석 수순위상태
지역구비례대표합계
2000년김대중8,639,95645.71108241322위소수 정부 (2000–2001)
민주당-자민련 연정 (2001)


6. 대선 이후와 DJP 연합의 해체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와 1998년 지방 선거 압승으로 DJP연합은 순항하는 듯 보였다.[1][5][3][6] 그러나 이후 갈등이 발생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당내 반대파 문제에 직면하며 위기를 맞았다.[7]

2000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은 273석 중 17석을 얻는데 그쳐 원내 교섭단체 구성 요건(20석)을 채우지 못했다.[7] 새천년민주당은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돕기 위해 소속 의원 3명을 자민련으로 당적 변경했지만,[8]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다시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9]

하지만 DJP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10]

6. 1. 국민의 정부 출범과 공동 정부 구성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1]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을 획득, 단독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자 새천년민주당은 의원직 꿔주기를 하여 당적을 옮겨주기도 했다.[1] 내각제 개헌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1] 이후 지나친 김종필의 내각 내 장관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DJP연합은 파국을 맞게 된다.[1]

1997년 11월 3일, 김대중김종필은 정치 연합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3][4] 연합의 조건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당선 시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었다.[1] 또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에도 합의했다.[1]

이 연합은 김대중의 대선 승리로 이어졌고,[1][5] 호남뿐 아니라 호서 지역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3] 1998년 지방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하지만 이후 갈등이 발생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당내 반대파 문제에 직면했다.[7] 결과적으로 이 연합은 총선에서 패배했고,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 미달의 의석을 확보했다.[7]

자유민주연합의 패배는 더욱 심각하여, 273석 중 17석만을 얻어 국회 의석 확보에 필요한 최소 20석에 미치지 못했다.[7]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당의 국회의원 3명이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변경했다.[8]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반 정부 구성에는 실패했고,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했다.[9]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연합은 해체되었다.[10]

6. 2. 갈등과 내각제 개헌 무산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을 획득하여 단독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자 새천년민주당은 의원직 꿔주기를 통해 당적을 옮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김종필의 과도한 내각 내 장관 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DJP연합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1]

2000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은 273석 중 17석만을 얻어 국회 의석 확보에 필요한 최소 20석에 미치지 못했다.[7]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3명이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변경했다.[8]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반 정부 구성에는 실패했고,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했다.[9]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연합은 해체되었다.[10]

6. 3. 2000년 총선과 연정 붕괴

2000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은 17석을 획득하여 단독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게 되었다.[7] 이에 새천년민주당은 교섭단체 구성을 돕기 위해 소속 의원 3명의 당적을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기도록 했다.[8]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고,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다시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9]

하지만, DJP연합 당시 약속되었던 내각제 개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김종필의 지나친 내각 내 장관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정적으로 2001년 9월 3일, 자유민주연합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연정은 붕괴되었다.[10]

선거지도자득표수%지역구비례대표합계순위상태
2000년김대중8,639,95645.712위소수 정부 (2000–2001)
colspan=8 |민주당-자민련 연정 (2001)


참조

[1] 뉴스 [어땠을까] 덧셈정치의 역사…해야 이긴다? http://www.sisaon.co[...] 2019-08-11
[2] 뉴스 [이슈2]문재인 정부 운명 가를 2019년, ‘魔의 41.08%’ 지킬까 http://www.polinews.[...] 2019-08-11
[3] 뉴스 [그날] YS-JP 막전막후 지원(협력) DJ정권 탄생 비화 http://www.mhj21.com[...] 2019-08-11
[4] 뉴스 대선 3각구도 재편 https://newslibrary.[...] 2019-08-11
[5] 뉴스 DJ 정신과 호남팔이 http://www.sisaon.co[...] 2019-08-11
[6] 뉴스 국민회의6 자민련4 한나라6명 https://newslibrary.[...] 2019-08-11
[7] 뉴스 16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 원내 제1당 유지[조동엽] http://imnews.imbc.c[...] 2019-08-11
[8] 뉴스 [만물상] 꼼수 국회 http://news.chosun.c[...] 2019-08-11
[9] 뉴스 [개각]3당 연합 개각 단행[박성호] http://imnews.imbc.c[...] 2019-08-11
[10] 뉴스 자민련/민주당, 3년 반만에 공조 붕괴[도인태] http://imnews.imbc.c[...] 201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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