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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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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고에성은 1457년 오타 도칸에 의해 축성된 일본의 성이다. 교토쿠의 난 당시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경계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이후 호조 가문의 지배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로 함락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다이묘의 거성으로 사용되었으며, 1639년 마쓰다이라 노부쓰나가 가와고에 번을 다스리면서 성하 마을이 번성했다. 1870년 무렵 건조물이 파각되었고, 1924년 사이타마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혼마루 어전 등 일부 건조물이 남아 있으며,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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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가와고에성
종류일본의 성
위치사이타마현가와고에시
소유가와고에 씨족, 호조 씨족, 우에스기 씨족
개방 여부개방
상태해체, 이전됨. 일부 건물은 원래 부지 또는 근처에 남아 있음.
건설1457년
건설자오타 도시 , 오타 도칸
사용 기간1457년 – 1870년경
해체1870년
전투가와고에 전투(1545년-1546년)
좌표35°55′28.25″N 139°29′29.41″E
명칭
다른 이름가와고에조, 하쓰카리조, 기리가쿠레조
로마자 표기Kawagoe-jō
한자 표기川越城
별칭河越城 (가가와고에조)
初雁城 (하쓰카리조)
霧隠城 (기리가쿠레조)
구조
유형평산성
망루 구조대용 (후지미 망루) (2중 2층)
건축가오타 도신, 도칸 부자
건설 연도1457년(조로쿠 원년)
재건축다이도지 마사시게,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마쓰다이라 나리쓰네
통치자오기가야쓰 우에스기 씨, 고호조 씨, 사카이 씨, 홋타 씨,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 외
폐성 연도1869년(메이지 2년)
유적해자, 토루, 어전 일부, 이축 건물 3동
문화재사이타마현 유형 문화재 (혼마루 어전)
사이타마현 사적
지휘관
현재 지휘관알 수 없음
과거 지휘관알 수 없음
주둔군
주둔군알 수 없음
점령
점령알 수 없음

2. 역사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간토 지방에서는 교토쿠의 난(1455년 ~ 1483년)이 발발했다. 이는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 관령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모살한 것이 발단이었다. 1457년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우에스기 모치토모는 가신 오타 미치자네, 오타 도칸 부자에게 명해 이와쓰키 성, 에도 성과 함께 가와고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후 1537년 호조 우지쓰나가 가와고에 성을 탈취하고, 호조 쓰나시게에게 관리를 맡겼다. 1546년 호조 우지야스는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무사시 국을 장악했다. 그 후, 성은 고호조 가문의 가신 다이도지 마사시게가 관리하며 확장 개축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는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마에다 도시이에 군세에 함락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된 후, 가신 사카이 시게타다에게 가와고에 1만 석을 주었다. 이후 홋타 가문, 나가사와·오코치 마쓰다이라 가문, 야나기사와 가문, 아키모토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마쓰이 마쓰다이라 가문 등 여러 가문이 성주를 역임했다.

1639년 시마바라의 난 진압 공로로 이봉된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는 성 주변 마을과 하천을 정비하고 농업을 진흥시켜 번의 기초를 다졌다. 성하 마을에도와 비슷하여 〈소 에도〉로 불렸다. 1653년부터 성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고, 1848년에는 혼마루 어전이 건립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1870년 무렵부터 가와고에 성 건물이 파각되기 시작했다. 1924년 가와고에 성터가 사이타마현 사적으로, 1967년에는 혼마루 어전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현재 성터 대부분은 시가지로 변했지만, 혼마루 어전 일부와 후지미 망루 터, 해자 터 등이 남아있다.

2. 1.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1455년부터 1483년까지 교토쿠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는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간토 관령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원인이었다. 1457년,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우에스기 모치토모는 가신 오타 미치자네와 오타 도칸 부자에게 명하여 가와고에 성, 이와쓰키 성, 에도 성을 축성하고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경계했다.[11]

난이 종식된 후, 야마노우치와 오기가야쓰 두 우에스기 가문이 대립하였고, 이 틈을 타 고호조 가문이 간토로 진출해 왔다. 1537년 호조 우지쓰나가 가와고에 성을 탈취하고, 호조 쓰나시게에게 성을 관리하게 하였다. 1545년 간토에서 고호조 가문을 축출하기 위해 두 우에스기 가문 및 고가 구보 아시카가 가문이 연합하여 가와고에 성을 포위하였다. 이 연합군의 군세는 8만에 달했다고 한다. 1546년 호조 우지야스가 가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끌고 연합군을 기습공격했으며, 이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성을 지킬 수 있었고, 사실상 무사시 국은 고호조 가문이 장악했다.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 때, 마에다 도시이에 군세에 의해 가와고에 성이 함락되었다.[11]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명으로 간토로 이봉된 후, 이에야스는 자신의 가신 사카이 시게타다에게 가와고에 1만 석을 주었다. 1601년 시게타다가 고즈케국 마에바시 번으로 전봉된 후, 8년 뒤인 1609년 시게타다의 동생 다다토시가 스루가국 다나카 번에서 가와고에 번으로 이봉되어 입성한다.

이후, 홋타 가문(1635년 ~ 1638년), 나가사와·오코치 마쓰다이라 가문(1639년 ~ 1694년), 야나기사와 가문(1694년 ~ 1704년), 아키모토 가문(1704년 ~ 1767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1767년 ~ 1867년), 마쓰이 마쓰다이라 가문(1867년 ~ 1871년)이 성주로 역임하였다. 이들은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거성이었으며 도합 7가문 21명이 성주로 역임했다.

그중 1639년 시마바라의 난 진압 공로로 무사시국 오시 번에서 가와고에 번으로 이봉된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는 성 주변 마을, 하천 치수 및 농업 진흥에 힘써 번의 기초를 다졌다. 성하 마을에도와 비슷하다 하여 〈소 에도〉로 불렸다.

1653년 성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간분 연간(1661년 ~ 1672년) 무렵 마무리되었다. 1846년 니노마루 어전이 소실되자, 1848년 마쓰다이라 나리쓰네 대에 비어있던 혼마루에 어전을 건립하였다. 이 혼마루 어전은 고치성 외에는 남아 있는 곳이 드문 귀중한 유산이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1868년(메이지 원년), 마쓰이 마쓰다이라 가문과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메이지 정부에 항복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해자를 메웠다.[1] 1869년(메이지 2년) 가와고에 번은 신정부에 가와고에 성의 노후된 건물을 철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여 성의 부분적인 철거가 시작되었다. 1870년에는 성 해체가 본격화되어, 일부 건물들은 가와고에와 인근 도시로 이전되었다.[1]

1873년(메이지 6년) 폐성령에 따라 가와고에 성 내의 불필요한 건물 및 훼손된 건물의 입찰 및 매각이 이루어졌다.[1] 1924년(다이쇼 13년)에는 가와고에 성터가 사이타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1967년(쇼와 42년), 혼마루 어전이 사이타마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1991년에는 가로 츠메쇼(家老詰所)가 구내로 옮겨졌지만, 원래 위치는 아니다.

1989년(헤이세이 원년) 가와고에 성 주요부(13.5ha)를 복원하고 성터 공원을 확장한다는 초안 공원 정비 기본 구상이 수립되었으나, 버블 붕괴와 함께 좌절되어 계획은 공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28년 후인 2017년에 그 존재가 밝혀졌고, 초안은 축소되어 부활했다. 초안 야구장을 이전하고 성터 공원을 확장한다고 발표했다.[1]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19번)으로 선정되었다.[1]

2019년 3월, 공원 정비를 추진하는 새로운 기본 계획으로서 「가와고에시 첫 번째 기러기 공원 기본 계획」의 책정을 공표했다. 성터에 건설된 첫 번째 기러기 야구장과 수영장을 2032년경을 목표로 이전할 방침을 굳히고 있다.[3]

현재 성터 대부분은 시가지가 되어 당시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혼마루 어전 일부(대강당과 현관)가 현존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혼마루 어전 대강당이 현존하는 곳은 일본에서 가와고에 성 외에 고치성뿐이며, 성곽 어전 전체로 봐도 니조 성과 가케가와 성뿐이라는 극히 귀중한 유구이다. 혼마루 어전 남쪽에는 후지미 망루 터, 서쪽에는 중노문 부근의 해자 터가 현존하고 있다.

3. 남아있는 건조물

1848년 마쓰다이라 나리쓰네 대에 건립된 혼마루 어전은 당시 16개 동, 약 3,388m2 규모였다.[12] 19세기 후반 건물이 해체되어 현관, 오히로마, 가로 쓰메쇼(家老詰所)[13]만 남아있다. 혼마루 어전의 오히로마는 고치성 외에는 존재하지 않아 귀중한 유산이다. 현관과 오히로마는 이루마 현 청사, 이루마 군 공회소, 연초 전매국 요도하시 지국 가와고에 분 공장으로 전용되었고, 1933년 가와고에 무도장려회의 수련도장이 되어 하쓰카리 무덕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태평양 전쟁 후 가와고에 시립 제2 중학교(현재 하쓰카리 중학교) 교사와 실내 운동장으로 사용되었지만, 1967년 현 지정 유형문화재가 되었다. 가로 쓰메쇼는 해체 후 후지미노시 민가에 이축되었다가 1988년 원래 자리로 이축되었고, 1991년 현 지정 유형문화재로 추가 지정되었다.

혼마루 남서쪽에는 3층 망루였던 후지미 망루 터가 있다. 가와고에성에는 천수가 없었기 때문에 후지미 망루가 천수 역할을 했다.[1] 현재는 조그마한 사당만 세워져 있다.

성 루(櫓) 일부가 현존하며, 가와고에 시내 나리타산카와고에 별원, 가조시 무예관, 히가시마쓰야마시 민가에 성문 3개 동이 이축되어 있다. 가조 시에 이축된 문은 해체되어 현존하지 않으며, 히가시마쓰야마 시에 이축된 문은 성 안쪽에 있었던 2층 나가야 문으로, 길이 24칸, 폭 3칸 반, 문 부위는 2칸 반 규모이다. 가와고에 시립 박물관에는 가와고에 성에서 온 것이라는 문이 보존되어 있지만,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성 근처 기타인에는 에도 성 건물 일부가 이축되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태어났다는 방, 가스가노 쓰보네가 머물던 방 등이 있으며, 에도 시대 초기 건축 양식(기타인)과 말기 건축 양식(혼마루 어전)을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기타인은 가와고에 성의 외성 역할도 했다.

4. 민속자료

가와고에 성에는 여러 민속자료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민속자료는 성의 역사와 함께 가와고에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전승으로는 첫 기러기와 관련된 삼나무, 안개가 깔린 우물, 산제물이 된 오타 도칸의 딸, 반쪽 잎만 남은 갈대, 요나 강의 자갈, 천신이 발을 씻었던 우물, 성안의 편자 소리 등이 있다.

4. 1. 전승


  • '''첫 기러기의 삼나무''': 미요시노 신사에 있는 큰 삼나무. 옛날 북쪽에서 온 첫 기러기가 이 지역에 머물렀으며, 남쪽으로 날아갈 때 삼나무 주변을 맴돌면서 3번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 인해 가와고에 성은 하쓰카리 성(初雁城)으로도 불린다.
  • '''안개가 깔린 우물''': 전쟁 시 우물 뚜껑을 열면 안개가 피어 올라 성을 덮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적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 우물은 현재 농업센터 앞에 있다. 가와고에 성은 기리가쿠레 성(霧隠城)으로도 불린다.
  • '''산제물이 된 아이''': 가와고에 성 축성 시 습지 조성으로 난항을 겪자, 오타 도칸의 딸이 용왕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산제물이 되어 늪에 빠졌다는 전설이 있다.
  • '''반잎의 갈대''': 영주의 딸이 저습지에서 물에 빠진 후, 갈대이 한쪽만 나온 채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는 그녀가 물속에서 갈대 잎 한쪽을 잡고 나오려다 다시 가라앉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요나 강의 자갈 공양''': 가와고에 성주와 결혼한 농민의 딸 요네가 강에 몸을 던져 죽은 후, 강에 자갈을 던지면 기포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 '''천신이 발을 씻었던 우물 물''': 오타 도칸이 해자에 채울 물을 찾던 중, 천신이 발을 씻는 것을 보고 수원지를 발견했다는 전설이 있다. 도칸은 이 우물 물을 덴신미타라시의 세이스이(天神洗足の井水:천신세족의 우물 물)로 명명하고 신성시하였다.
  • '''성안의 편자 소리''': 에도 시대 초기 성주인 사카이 시게타다가 밤마다 활소리와 말의 편자소리에 잠을 설치자, 호리카와 야간 전투[14]를 그린 병풍을 요주인에 봉납한 후 숙면을 취했다는 전설이 있다.

5. 관광

가와고에 성은 일본 100명성(19번)에 선정되었으며, 성터 대부분은 시가지로 변했지만 본성 어전의 일부(대강당과 현관)가 현존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3] 본성 어전 대강당이 현존하는 곳은 일본에서 고치성 뿐이며, 성곽 어전 전체로 봐도 니조 성과 가케가와 성 뿐인 귀중한 유적이다.

1924년 (다이쇼 13년) 가와고에 성터가 사이타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67년 (쇼와 42년)에는 혼마루 어전이 현 지정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성 어전 남쪽에는 후지미 망루 터, 서쪽에는 중노문 부근의 해자 터가 남아있다. 사이타마 현립 가와고에 고등학교 남쪽에 있는 삼의 둥근 언덕은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에 3층의 후지미 망루가 있었다.[4] 우쓰노미야 성의 세이메이다이 망루와 마찬가지로 후지미 망루가 천수를 대신했다. 게이오 2년(1866년)의 기록에 따르면, 길이 8칸 3척(약 15미터), 너비 8칸(약 14미터)이었다고 한다. 후지미 망루라는 이름은 후지 산을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는 아사마 신사와 미타케 신사가 세워져 있다.[5]

1989년 (헤이세이 원년) 가와고에 성 주요부 (13.5ha)를 복원하고 성터 공원을 확장한다는 초안 공원 정비 기본 구상이 수립되었으나, 버블 붕괴와 함께 좌절되었다. 하지만 28년 후인 2017년에 그 존재가 밝혀졌고, 2019년 3월에 공원 정비를 추진하는 새로운 기본 계획으로서 「가와고에시 첫 번째 기러기 공원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성터에 건설된 첫 번째 기러기 야구장과 수영장을 2032년경을 목표로 이전할 방침이다.[3]

가와고에성과 에도성은 축성 초기부터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와고에성 남쪽의 기타인에는 에도성의 건물이 이전되어 현존하고 있다. 객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 탄생의 방이라고 전해지는 방이 있으며,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쓰보네의 방을 포함한 서원, 고리도 이전되었다 (모두 국가의 중요문화재).

시내의 히카와 신사에는 1637년 (간에이 14년)에 이에미츠가 에도성 니노마루에 건립한 도쇼구가 이전되어 있다. 에도성 내의 종교적 건조물로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가와고에성의 마을 배치는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십개정 사문전정"에 향분·성부를 설치한 합리적인 것이었다. 삼면이 저지대와 하천으로 둘러싸인 방어에 최적인 대지의 형상에 맞춰 성과 성하 마을이 배치되었다. 성의 정문인 니시오테몬(현재의 시청) 앞은 전마 도매상이 있던 에도정으로, 그곳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가와고에 가도가 에도까지 뻗어 있었다. 니시오테몬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고찰장인 "찰의 츠지"가 설치되었다. 이곳을 축으로 세로 23개, 가로 78개의 대략 바둑판 모양으로 마을 배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주머니 골목, 갈고리 길, 칠굽이, 정자 길 등 성하 마을 특유의 가로가 만들어졌다.

5. 1. 교통편

JR 동일본 가와고에역 또는 세이부 철도 혼카와고에 역에서 하차 후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회사노선승차역하차 정류장소요 시간비고
도부 버스아게오역 서쪽출구〉, 〈사이타마 의대〉, 〈가와고에 운동공원〉행가와고에역 또는 혼카와고에 역〈시청앞〉버스 10분, 도보 5분
이글 버스〈소 에도 순환버스〉가와고에역 또는 혼카와고에 역〈혼마루 어전〉버스 15분
도부 버스아게오역 서쪽 출구 행, 사이타마 의과대학 행, 가와고에 운동공원 행가와고에역 동쪽 출구 또는 혼카와고에역시청 앞버스 10분, 도보 10분
이글 버스코에도 순회 버스, 아구렛슈 가와고에 행가와고에역 서쪽 출구 또는 혼카와고에역박물관·미술관버스 15분, 도보 2분


5. 2. 주변 문화시설 및 관광명소


  • 기타인 - 덴카이가 주지였던 천태종 사찰이다. 가와고에성 남쪽에 있으며, 에도성의 건물이 이전되어 현존하고 있다. 객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 탄생의 방이라고 전해지는 방이 있으며,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쓰보네의 방을 포함한 서원, 고리도 이전되었다.
  • 도키노 가네 - 사카이 다다카쓰가 세운 루이다.
  • 렌게이지 - 다이도지 마사시게가 개원한 정토종 사찰이다.
  • 미요시노 신사 - 가와고에 성내에 위치한다.
  • 센바 동조궁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사당이다. 가와고에 성 남쪽에 광대한 사령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군사적 배치이기도 했다.
  • 히카와 신사 - 혼마루 어전에서 북쪽으로 약 400미터 거리에 있으며, 1637년 (간에이 14년)에 이에미쓰가 에도성 니노마루에 건립한 도쇼구가 이전되어 있다. 에도성 내의 종교적 건조물로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 가와고에 시립박물관

5. 3. 주소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 구루와 정 2-13-1

참조

[1] 문서
[2] 문서
[3] 웹사이트 川越市ホームページ内「川越市初雁公園基本計画」.pdf資料一括版119頁 https://www.city.kaw[...]
[4] 문서
[5] 문서
[6] 뉴스 川越城堀跡 市が公園に 読売新聞 2008-03-06
[7] 웹사이트 KOEDO Net(川越城中ノ門堀跡完成) http://www.koedo.org[...]
[8] 서적
[9] 서적
[10] 간행물 本丸御殿 溝の謎 広報川越 2011-07-25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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