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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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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이요 제도는 히로시마현과 에히메현 사이에 위치한 수백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제도이다. 동쪽으로는 후쿠야마시 도모노우라와 이마바리항을 잇는 선, 서쪽으로는 노미시마·구라하시섬까지를 범위로 한다. 과거에는 시모카마가리시마부터 오사키카미지마 주변 지역만을 게이요 제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요 산업은 조선, 관광, 감귤류 재배이며, 일본의 주요 조선업, 어업 및 양식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시마나미카이도가 주요 관광 자원이며, 일본유산으로 지정된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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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요 제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게이요 제도
원어 이름芸予諸島
로마자 표기Geiyo Shotō
위치세토 내해
주요 섬노미섬
오사키카미섬
무카이섬
인노섬
오미시마섬
총 섬 수43
길이98km
너비38km
주요 해역히우치나다
아키나다
행정 구역
국가일본
광역 자치 단체히로시마현
에히메현
기초 자치 단체에타지마시
구레시
히가시히로시마시
오사키카미지마초
다케하라시
미하라시
오노미치시
후쿠야마시
이마바리시
가미지마초
마쓰야마시
주민
민족일본인

2. 위치 및 범위

'''게이요 제도'''(芸予諸島)는 히로시마현 본토(혼슈)와 에히메현 본토(시코쿠) 사이, 히로시마현 구레시 동쪽 섬들과 에히메현 구 에치군 도서 지역 및 일부 부속 도서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3]

2. 1. 세부 구역

게이요 제도는 히로시마현 본토(혼슈)와 에히메현 본토(시코쿠) 사이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3] 서쪽에는 방요 제도, 동쪽에는 가사오카 제도가 있다.

면적이 20km2가 넘는 주요 섬들은 다음과 같다.

  • 하카타
  • 이쿠치섬
  • 인노시마
  • 무카이시마
  • 오미시마
  • 오사키카미지마
  • 오시마


그 외 주목할 만한 섬들은 다음과 같다.

  • 니이오시마
  • 오카무라섬
  • 오쿠노시마
  • 오사키시모지마
  • 쓰시마
  • 우오시마


때때로 섬 지역의 넓은 정의에 포함될 수 있는 섬들은 다음과 같다.

  • 에타지마
  • 이쓰쿠시마 (미야지마)
  • 쿠라하시지마
  • 니노시마


과거에는 시모카마가리시마부터 오사키카미지마, 오미시마 주변의 좁은 지역만을 게이요 제도로 부르기도 했다.[3]

범위의 기준은 동쪽 끝은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도모노우라와 에히메현 이마바리항을 잇는 선, 서쪽 끝은 노미시마, 쿠라하시지마까지이다. 하지만 동서 양쪽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서쪽 끝에서는 히로시마만 안쪽은 포함하지 않지만,[3] 만 입구의 섬들은 포함하는 경우가 있으며, 최대 야마구치현과 히로시마현 경계의 코우시마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4] 동쪽 끝은 도모노우라에서 이마바리항을 잇는 선까지로 여겨지지만,[3] 그 바깥쪽에 있는 우오시마 군도나 시사카시마[5], 라이시마 군도의 히키시마[6]를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게이요 제도를 더 자세히 나누면, 서쪽부터 안게 군도(에다시마 주변만), 카마가리 군도, 시모오사키 군도, 카미오사키 군도, 세키젠 제도, 라이시마 군도, 에치 제도, 게이비 군도, 카미시마 제도, 비고 군도로 나뉜다. 참고로, 게이비 군도의 일부와 비고 군도는 엄밀히 말하면 안게쿠니가 아니라 구 비고쿠에 속한다.

3. 사회

게이요 제도는 약 5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인구는 약 17만 명이다. 노미섬, 이노시마, 무코지마, 쿠라하시섬 등 히로시마현의 4개 섬은 인구가 비교적 많아 모두 1만 명이 넘는다. 그 외 오사키카미지마, 이쿠치섬, 오시마, 하카타섬, 오미시마 등 5개 섬은 인구가 5천 명이 넘는다. 201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무코지마(오노미치시 시가지)와 이노시마에 인구집중지역이 있다.[7] 대부분의 섬에서는 본토보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헤이세이 대합병 결과, 게이요 제도를 이루는 많은 시정촌들이 혼슈와 시코쿠 본토를 중심으로 하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오다케시,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등에 편입되었다. 현재 게이요 제도에 시청, 정청·촌청을 두는 자치체는 에타지마시, 오사키카미지마정, 가미지마정이 있다.

게이요 제도 전체도

3. 1. 인구

예로부터 섬은 약 50개, 총인구는 약 17만 명이다. 노미섬(能美島), 이노시마(因島), 무코지마(向島), 쿠라하시마(倉橋島) 등 히로시마현(広島県)의 4개 섬의 인구가 비교적 많으며, 모두 1만 명을 넘는다. 그 외 5천 명을 넘는 섬으로는 히로시마현(広島県)의 오사키카미지마(大崎上島), 나구쿠치지마(生口島), 에히메현(愛媛県)의 오시마(大島), 하쿠호지마(伯方島), 오미시마(大三島) 등 5개 섬이 있다. 201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무코지마(오노미치시 시가지)와 이노시마에 인구집중지역이 존재한다.[7] 대부분의 섬에서는 본토보다 빠른 속도로 과소화와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3. 2. 행정 구역

헤이세이 대합병의 결과, 게이요 제도를 이루는 많은 시정촌들은 혼슈와 시코쿠 본토를 중심으로 하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오다케시,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등에 편입되었다. 현재, 게이요 제도에 시청, 정청·촌청을 두는 자치체는 에타지마시, 오사키카미지마정, 가미지마정이 있다.

4. 자연

게요 제도는 다도해로 알려져 있지만, 섬들은 평야가 좁고 급경사의 산이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8] 생구섬 서부의 관음산은 해발 472.3m로 게이요 제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9]

세토내해식 기후를 띠는 이 지역은 제염과 감귤 재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오늘날 구릉지대에서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은 기후를 활용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지역의 식생은 활엽수가 주를 이루지만, 과거 제염업으로 인해 산림이 황폐화되기도 했다.[37] 이후 번식력이 강한 곰솔을 심어 현재와 같은 식생이 형성되었다.[37] 멧돼지가 서식하며, 섬 사이를 헤엄쳐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감귤류가 풍부하여 멧돼지의 먹이가 된다.[12]

오노미치 수도에는 해양 생물의 회유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鯨島고래의 회유, 이와코지마는 정어리의 회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14] 후쿠야마시에는 일본물개의 기록도 남아 있다.[15] 이마바리시의 노시마와 다이자키지마에는 "고래의 감사 인사"라는 민담이 전해지며,[16] 참돌고래를 비롯한 돌고래고래가 드물게 관찰되기도 한다.[16][17][18][19]

게요 제도에는 잘피밭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22] 다케하라시 연안에는 투구게 서식지인 "하치의 간석지"가 있다.[23] 아와지섬의 "참돌고래 회유 해면",[24] 구레시의 "가마우지 도래 군유 해면", 미하라 수도·유류섬의 "갯민숭달팽이 서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25][26] "하치의 간석지"에서는 흰발농게와 모래갯지렁이 등도 확인되었다.[23] 그러나 아키나다에서 하리마나다에 걸쳐 참돌고래는 현저하게 감소했다.[27][28]

4. 1. 지형

게요 제도는 다도해로 알려져 있지만, 모든 섬은 평야가 좁고 급경사의 산이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8] 게이요 제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생구섬 서부의 관음산으로 해발 472.3m이다.[9]

4. 1. 1. 해협

瀬戸内일본어해는 지형이 복잡하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빠른 조류가 발생했다. 다이쇼 시대의 물리학자이자 문학가였던 寺田寅彦일본어(테라다 토라히코)는 “넓은 灘일본어(나다)과 灘일본어을 연결하는 해협 양쪽의 해수면 높이가 시간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면 수면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닷물이 활발하게 유입되므로 강한 조류가 발생합니다.”라고 기록했다.[37] 특히, 시코쿠와 오시마(에히메현 이마바리시) 사이에 있는 구루시마 해협은 瀬戸内일본어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해협의 폭도 넓기 때문에 현재는 국제 항로로 다양한 선박이 운항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첫째 구루시마 해협, 둘째 나루토 해협, 셋째는 마지막으로 간몬 해협”이라고 노래될 정도로 조류가 빨라 瀬戸内일본어해에서 손꼽히는 난관이었다.[10] 이러한 지형을 능숙한 조선 기술을 가진 자들이 지배권을 쥐게 된다.[37]

한편, 원래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것을 항로로 사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개척한 곳도 있다. 예를 들어, 구레시 본토와 구라하시섬 사이의 해협인 오토노세토에는 일송 무역의 항로로 사용하기 위해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지는 해를 부채로 불러 하루 만에 개척했다는 전승인 “해를 부르는 전설”이 남아 있다(실제로 준설했는지는 불명).[11]

4. 2. 기후

세토나이카이식 기후를 띠며, 이는 제염(소금 생산)과 감귤 재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구릉지대에서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은 기후를 활용한 농업이 전개되고 있다.

4. 2. 1. 식물

이 지역은 활엽수가 주를 이루는 식생을 가지고 있다. 과거 이 지역에서 소금 생산, 즉 제염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의 열원이 필요했다. 따라서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나무를 베어냈고, 이로 인해 산림이 황폐화되었다.[37] 이후 번식력이 강한 곰솔(アカマツ|곰솔일본어)을 심어 현재와 같은 식생이 형성되었다.[37]

4. 2. 2. 동물

멧돼지가 서식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멧돼지가 바다를 헤엄쳐 섬 사이를 이동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고 있다. 게이요 제도에서는 도토리가 적고 논밭이 쉬는 겨울에도 감귤류가 풍부하여 멧돼지가 먹이를 구하기 쉽다. 최근에는 멧돼지가 감귤 껍질을 벗겨 먹은 흔적도 발견되었다.[12]

4. 2. 3. 해양성 동식물

오노미치 수도에는 과거 해양 생물의 정기적인 출현(회유)에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명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미하라시에 속한 두 개의 작은 섬인 鯨島고래(クジラ)의 회유가 관찰되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며, 이노시마에서 포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자료도 남아 있어, 세토내해에 대형 고래류(ヒゲクジラ類)가 널리 회유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자료 중 하나이다.[13] 오노미치시의 이와코지마는 정어리(イワシ)의 회유에 유래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14] 후쿠야마시에는 일본물개(ニホンアシカ)의 기록도 남아 있다.[15]

이마바리시의 노시마와 다이자키지마(鯛崎島)에는 "고래의 감사 인사(クジラのお礼参り)"라는 민담이 있으며,[16] 참돌고래(スナメリ)는 결코 많지는 않지만 최근에도 확인되었고, 현재에도 드물지만 돌고래(イルカ)나 고래(クジラ)가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으며,[16][17][18][19] 단기간이지만 정착한 사례도 존재한다.[20][21]

게이요 제도에는 현대의 세토내해에서도 비교적 많은 잘피(アマモ)의 잘피밭(藻場)이 남아 있다.[22] 다케하라시 연안에는, 투구게(カブトガニ)의 귀중한 서식지인 가모가와(히로시마현) 강어귀의 "하치의 간석지(ハチの干潟)"[23]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아와지마의 "참돌고래(スナメリクジラ) 회유 해면"이 존재한다.[24] 구레시의 "가마우지(アビ) 도래 군유 해면"과 미하라 수도(三原水道)·유류섬의 "갯민숭달팽이(ナメクジウオ) 서식지"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25][26] 상기의 "하치의 간석지"에서는, 흰발농게(ハクセンシオマネキ)와 90년 만의 채취가 보도된 모래갯지렁이(サナダユムシ) 등 주목할 만한 생물종도 확인되었다.[23]

한편, 참돌고래(スナメリ)는 아키나다에서 하리마나다에 걸쳐 현저하게 감소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상기의 천연기념물인 아와지마 주변에서도 최근 확인은 매우 적다.[27][28]

5. 역사

조몬 시대 게이요 제도 유적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염 및 해상 교통과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29]

게이요 제도의 섬들은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은 기후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제염이 성행했다. 초기에는 소형 토기를 이용하여 바닷물과 해조류를 넣고 끓여서 제염을 하였으며, 게이요 제도 근처에서는 마쓰야마시 무쿠노하라시미즈 유적(椋の原清水遺跡)에서 출토된 3세기 말 야요이 시대 중기 말의 제염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30][31]

게이요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제염토기는 마섬 하제가우라 유적(ハゼヶ浦遺跡)과 카메가우라 유적(亀ヶ浦遺跡)에서 출토된 것으로, 야요이 시대 말경(3세기 말)의 유물이다. 하쿠호섬 케사마루 유적(袈裟丸遺跡)에서는 4세기 말경의 제염토기가 출토되었다. 이후 하쿠호섬에서는 적어도 7세기 초까지 제염이 계속되었다. 도요시마, 쓰나미시마 등 현재는 무인도에 가까운 섬에서도 제염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러한 작은 섬에도 야요이 시대 이후 사람이 살면서 제염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29]

게이요 제도와 그 주변 연안 지역에서는 야요이 시대 제염 유적 수는 적지만, 고분 시대 전반(4세기경)이 되면 수많은 유적이 출토된다. 고분 시대 후반(6세기 후반)이 되면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졌다. 소금은 현지와 그 근처뿐만 아니라, 새롭게 성립된 야마토 왕권의 관여 아래 긴키 지방에도 운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와카야마현오사카부 연안 등 긴키 지방 주변부에서는 토기 제염이 쇠퇴하고, 그동안 의존해왔던 후쿠이현효고현 생산량으로도 부족하여, 세토 내해 중부 지역의 “모시오”(藻塩)가 공급되었다.[32][30]

쇼바라시미요시시히가시히로시마시 등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부에서도 제염토기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제염토기는 소금 운반 용기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2]

'''게이요 제도(히로시마현 측) 주요 유적'''[32]

유적 이름위치
우지시마키타노하마 유적(宇治島北の浜遺跡)우지시마
코소시마 I 유적(小細島I遺跡), 코소시마 II 유적(小細島II遺跡), 코소시마 III 유적(小細島III遺跡)코소시마
스쿠네시마 유적(宿祢島遺跡)스쿠네시마
스나미 유적(須波遺跡), 사기시마히가시 유적(佐木島東遺跡)사기시마
키타우라 유적(北浦遺跡), 시미즈다니 유적(清水谷遺跡), 니시타니 유적(西谷遺跡)코사기시마
코마토리 유적(小馬取遺跡), 오마토리 유적(大馬取遺跡), 에나카코 유적(榎迫遺跡), 칸논우라 유적(観音浦遺跡), 츠키노우라 3호 유적(月の浦3号遺跡), 칸네 1호 유적(かんね1号遺跡), 칸네 2호 유적(かんね2号遺跡), 나나야 유적(七谷遺跡), 후쿠우라 2호 유적(福浦2号遺跡), 쿠사노우라 1호 유적(草の浦1号遺跡), 오가네 유적(大がね遺跡)이쿠노시마
우스지마 우시가쿠비 유적(臼島牛ヶ首遺跡)우스지마
오리메시마미나미 유적(折免島南遺跡)오리메시마
나가시마 누노우라 유적(長島布浦遺跡)나가시마
후루에나미 카이즈카(古江波貝塚)무코시마
나가마쓰 유적(長松遺跡), 세이 유적(瀬井遺跡)오사키카미지마
오하마히로하타케 유적(大浜広畠遺跡)이노시마
호소시마 I 유적(細島I遺跡), 호소시마 II 유적(細島II遺跡)호소시마
오키우라 유적(沖浦遺跡)카미카마가리시마
도요다군 도요하마정 사이지마(豊田郡豊浜町斎島)사이지마 유적(斎島遺跡)



게요 제도 거의 중앙에 위치한 오미시마(大三島)에는 오야마쓰미(大山積神) 신을 모시는 오야마즈미 신사(大山祇神社)가 있다. 이 섬은 옛날에는 "미시마(御島)"라고 불렸다.[33] 신사는 물, 산, 바다의 신으로서 항해, 전쟁, 농업, 어업, 주조의 신 등으로 여겨져 역대 천황과 게이요 제도 주변의 신앙 대상이었다.[33][34]

대궁사(大宮司)는 대대로 에치 씨(越智氏), 그리고 에치 씨를 조상으로 하는 오하이리 씨(大祝氏)가 맡았다. 그들은 후에 미시마 수군(三島水軍)이 되었다.[33] 에치 씨를 조상으로 하는 고노 씨(河野氏)가 나타나 고노 수군(河野水軍)이 편성되어 세토 내해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다.[33] 헤이안 시대 말기 (지쇼・주에이 전란)(원평 전쟁)에서 겐지(源氏)에 호응하여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150척이나 되는 수군을 편성하여 승리로 이끌었다.[39] 가마쿠라 시대 원구(元寇)에서는 고노 미치아리가 수군으로 활약하였다.[39]

율령 국가는 육로를 중시했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헤이안쿄(平安京)에서 소비되는 쌀, 소금 등 무거운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해운에 의지하게 되었다. 파도가 잔잔하고 큰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할 수 있는 세토 내해에는 많은 수송선이 왕래했고, 키나이(畿内)의 귀족, 대사찰 등에 의해 쇼엔화가 진행되었다. 국사(国司)나 쇼엔령주(荘園領主)는 징세(徴税)를 강화하여 제염, 해산물 자원을 획득하고 주민의 이동, 유랑을 억제하여 정착화를 도모했다. 이에 반발하는 해운 종사자나 이국에 유랑하는 사람들은 각지에서 분쟁을 일으켜 해적을 낳는 상황을 만들어냈다.[37]

중세 쇼엔 시대에도 소금(塩) 생산이 성행하여 무로마치 시대에는 「비고(備後)」라는 명칭으로 연 9만 석 이상이 키나이로 보내졌다.[36] 무로마치 시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온 송희경(宋希璟)의 『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録)』(1420년)에는 해적들이 세토 내해 각지에 관문(関所)을 설치하여 선박(船舶)으로부터 관전(関銭)을 징수하거나, 선박에 승선하여 수선 안내나 경호의 대가로 금전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37]

이러한 해적들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조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수군이 되었다.[39] 전국 다이묘(戦国大名)는 그들과 대립하거나, “경고중(警固衆)”으로 편에 끌어들이려고 획책해 갔다.[40]

게이요 제도 해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라카미 수군(무라카미 해적)이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 측으로 활약한 무라카미 요시히로가 조상이라고 전해진다.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코노씨 배하에 있었으나 독자 노선을 걸어, 게이요 제도에서 서세토 내해의 해상 교통·해상 운송에 있어서 「독자적인 질서」를 만들어내고, 세토 내해 항로를 종횡으로 막는 연계를 취함으로써 활동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37]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를 섬기고 있던 스에 하루타카(陶晴賢)는 주군을 쓰러뜨려, 세토 내해 교통·운송 루트를 장악했다. 하루타카는 해적들의 질서에 개입하여, 해적들의 경고료 징수를 금지하고, 상인으로부터의 예전을 독점하려고 했다. 무라카미 수군은 이에 반발하여, 하루타카와 모토나리가 충돌한 1555년 잇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코바야카와씨를 매개로 모토나리 쪽에 붙었다. 무라카미 수군을 편에 붙인 모토나리는 잇쿠시마에서 4000명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2만 명의 스에 군을 격파하여 세토 내해 교역로를 장악했다. 이후 모리씨는 중국 지방 패권을 잡게 된다.[37]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해적 정지령(海賊停止令)에 의해 해적들은 사실상 해체되게 된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세토나이카이 일대에는 목면범포가 보급되었고, 벤자이선이 발달하여 항해가 쉬워졌다. 이 지역은 원래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고, 특히 히로시마번 쿠라하시섬에서는 배를 활발하게 만들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했다.[37]

에도 막부는 각지에 해역을 설치했고, 게이요 제도 내에서는 미노세(시모카마가리섬)와 토모노우라가 정비되었다. 1605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왕조에서 조선통신사가 총 12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통신사는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게이요 제도에서 접대를 받았다. 특히 미노세는 평판이 좋았고, 토모노우라에서 바라본 세토나이카이 풍경은 "일본 제일의 경승"이라고 칭찬받았다.[37]

17세기 후반, 가와무라 스이켄에 의해 동회리 항로·서회리 항로가 정비되면서 세토나이카이는 오사카와 에조지, 도호쿠 지방·호쿠리쿠 지방·산인 지방을 잇는 물자 수송의 대동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섬을 따라 외해를 항해하는 “충승”이 발달하고, 미타라이·키에(오오사키카미지마)·하나구리(오오미시마)·이와기·유게 등 세토나이 중앙부 항구 도시는 성장을 이루었다. 게이요 제도에는 “바람 기다림”·“물때 기다림” 배가 입항했다. 미타라이에서는 여관·상가·창고, 배 발착장인 간목과 선번소 등도 생겨 항구 도시로서 정비가 이루어졌고, 처음에는 땔나무·물·연료 공급이 중심이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북쪽 지방 쌀을 중심으로 하는 회선 간 중개·중계적 도매상 상업도 활발해졌다.[37]

근세에서 근대에 걸쳐 소금 만들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에도 시대 중기, 서회리 항로가 확립되면서 소금이 대량으로 취급되었고, 세토나이카이 일대는 일대 염전 지대가 되었다.[47]

에도 시대 후기, 번의 영향력을 넘어 게이요 지역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키의 추다이에서는 소금·면실·담배·돗자리·모시 등 특산품이 많이 수출되었고, 이요 회선을 통해 이요에서 말린 정어리 가루(비료·밀랍·종이 등이 수입되었다. 이 무렵 게이요 제도는 물류 발전에 따라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화폐 경제 침투도가 높았다고 한다.[37]

시타미 기쥬로에 의해 고구마 재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 기범선(機帆船) 등장으로 바람이나 조류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 없어졌고, 철도 등장으로 물류 또한 변화하면서 소규모 중계항은 쇠퇴해갔다.[49]

하지만 기범선에게도 라이시마 해협(来島海峡)은 여전히 항해가 어려운 곳이었다. 항해 속도가 느린 배들은 이곳을 피해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오오미시마(大三島)와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 사이-미하라 앞바다-무코지마(向島)와 이노시마(因島) 사이를 지나는 “미하라 세토 항로”(三原瀬戸航路)를 이용했다.[50]

근대 게이요 제도(芸予諸島)에서는 많은 이민을 배출했다. 평야부가 거의 소금밭으로 경지가 적고 농업 인구가 많았던 점, 에도 시대부터 품팔이가 많았던 점이 원인으로 꼽힌다.[37]

1896년(메이지 29년) 선박 직원법 개정으로 회선 선주는 근대 선박 선장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전문 지식을 배우는 상선학교가 설립되었다.[53] 이는 현재 유게 상선 고등 전문학교(弓削商船高等専門学校)와 히로시마 상선 고등 전문학교(広島商船高等専門学校) 등으로 이어져 많은 선원을 배출하고 있다.

한편, 여성 일로는 오초로부네(おちょろ舟)가 있었다. 이는 항구에 정박하는 배에 대해 육지에서 작은 배로 매춘을 하러 가는 유녀 배로, 선원들 시중과 집안일을 도맡았다.[54][55] 1957년(쇼와(昭和) 32년) 매춘 방지법 시행으로 폐지되었지만, 유곽 흔적 등 당시 모습이 남아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요 제도에는 몇몇 군사 기지가 설치되었다.


  • 해군병학교 - 에타지마. 해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 전신
  • 게이요요새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당시 게이요 제도에도 공습이 있었다. 이노시마에서는 1945년 3월 19일과 7월 28일에 미군 공습으로 조선소 등이 파괴되고 수십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이노시마 공습)[56]. 같은 해 7월 24일에는 에타지마만 안쪽에 피난해 정박 중이던 중순양함 리네를 미군 대편대가 습격하여 승무원과 주변 섬 주민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57].

전후 복구기에 조선업 등, 입지를 살려 발전한 곳도 있었지만, 땅과 수자원이 부족하고 노동력으로서 인구에도 한계가 있는 섬 지역에서는 대규모 공장 입지 여지가 부족하여 성장 어려움이 있었고, 오히려 노동력 공급원이 되었다.

1990년대 초 일본 버블 경제 붕괴가 발생하자 재정이 악화된 일본 정부는 지방 공공 단체 재정 기반을 강화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행정 서비스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정촌 합병을 추진했다. 히로시마현 시정촌 수는 1999년 3월 86개에서 2014년 4월 23개로, 에히메현도 70개에서 20개로 감소했다.[58]

게이요 제도 시정촌들도 헤이세이 대합병에 따라 폐치분합이 이루어졌다. 게이요 제도에 시정촌청을 두고 있던 자치단체 대부분은 쿠레시이마바리시 등, 혼슈・시코쿠 본토에 시청을 두고 있는 자치단체와 합병했다. 한편, '''에타지마시'''・'''오사키카미지마정''' 등, 게이요 제도에 청사를 두는 형태로 합병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59]

5. 1. 선사 시대

조몬 시대의 게이요 제도 유적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염 및 해상 교통과의 관련성도 지적되고 있다.[29]

게이요 제도의 섬들은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은 기후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제염이 성행했다. 초기에는 소형 토기를 이용하여 바닷물과 해조류를 넣고 끓여서 제염을 하였으며, 게이요 제도 근처에서는 마쓰야마시의 무쿠노하라시미즈 유적(椋の原清水遺跡)에서 출토된 3세기 말 야요이 시대 중기 말의 제염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30][31] 제염법이 발명되거나 전파된 경로는 불명확하며, 한 설에는 오카야마현 고지마 지역에서 산요 쪽으로 전해져 게이요 제도의 섬들로 퍼져나갔다고 한다.[30]

게이요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제염토기는 마섬의 하제가우라 유적(ハゼヶ浦遺跡)과 카메가우라 유적(亀ヶ浦遺跡)에서 출토된 것으로, 시기는 야요이 시대 말경(3세기 말)이다. 하쿠호섬의 케사마루 유적(袈裟丸遺跡)에서는 4세기 말경의 제염토기가 출토되었다. 이후 하쿠호섬에서는 적어도 7세기 초까지 제염이 계속되었다. 또한, 도요시마, 쓰나미시마 등 현재는 무인도에 가까운 섬에서도 제염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이러한 작은 섬에도 야요이 시대 이후 사람이 살면서 제염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29]

게이요 제도와 그 주변 연안 지역에서는 야요이 시대의 제염 유적 수는 적지만, 고분 시대 전반(4세기경)이 되면 수많은 유적이 출토된다. 고분 시대 후반(6세기 후반)이 되면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졌다. 소금은 현지와 그 근처뿐만 아니라, 새롭게 성립된 야마토 왕권의 관여 아래 긴키 지방에도 운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와카야마현오사카부 연안 등 긴키 지방 주변부에서는 토기 제염이 쇠퇴하고, 그동안 의존해왔던 후쿠이현효고현의 생산량으로도 부족하여, 세토 내해 중부 지역의 “모시오”(모시오, 藻塩?)가 공급되었다.[32][30] 후지와라쿄헤이조쿄 유적 등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소금과 관련된 것이 많다.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이요(伊予)산 소금도 운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9]

참고로, 쇼바라시미요시시히가시히로시마시 등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부에서도 제염토기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제염토기는 소금 운반 용기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2]

'''게이요 제도(히로시마현 측)의 주요 유적'''[32]

유적 이름위치
우지시마키타노하마 유적(宇治島北の浜遺跡)우지시마
코소시마 I 유적(小細島I遺跡), 코소시마 II 유적(小細島II遺跡), 코소시마 III 유적(小細島III遺跡)코소시마
스쿠네시마 유적(宿祢島遺跡)스쿠네시마
스나미 유적(須波遺跡), 사기시마히가시 유적(佐木島東遺跡)사기시마
키타우라 유적(北浦遺跡), 시미즈다니 유적(清水谷遺跡), 니시타니 유적(西谷遺跡)코사기시마
코마토리 유적(小馬取遺跡), 오마토리 유적(大馬取遺跡), 에나카코 유적(榎迫遺跡), 칸논우라 유적(観音浦遺跡), 츠키노우라 3호 유적(月の浦3号遺跡), 칸네 1호 유적(かんね1号遺跡), 칸네 2호 유적(かんね2号遺跡), 나나야 유적(七谷遺跡), 후쿠우라 2호 유적(福浦2号遺跡), 쿠사노우라 1호 유적(草の浦1号遺跡), 오가네 유적(大がね遺跡)이쿠노시마
우스지마 우시가쿠비 유적(臼島牛ヶ首遺跡)우스지마
오리메시마미나미 유적(折免島南遺跡)오리메시마
나가시마 누노우라 유적(長島布浦遺跡)나가시마
후루에나미 카이즈카(古江波貝塚)무코시마
나가마쓰 유적(長松遺跡), 세이 유적(瀬井遺跡)오사키카미지마
오하마히로하타케 유적(大浜広畠遺跡)이노시마
호소시마 I 유적(細島I遺跡), 호소시마 II 유적(細島II遺跡)호소시마
오키우라 유적(沖浦遺跡)카미카마가리시마
도요다군 도요하마정 사이지마(豊田郡豊浜町斎島)사이지마 유적(斎島遺跡)


5. 2. 오야마즈미 신사와 고노 씨

게요 제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 오미시마(大三島)에는 오야마쓰미(大山積神) 신을 모시는 오야마즈미 신사(大山祇神社)가 있다. 이 섬은 옛날에는 "미시마(御島)"라고 불렸다.[33] 신사는 778년 고닌 천황이 칙사로 모신 것으로 전해지며, 물, 산, 바다의 신으로서 항해, 전쟁, 농업, 어업, 주조의 신 등으로 여겨져 역대 천황과 게이요 제도 주변의 신앙 대상이었다.[33][34]

대궁사(大宮司)는 대대로 에치 씨(越智氏), 그리고 에치 씨를 조상으로 하는 오하이리 씨(大祝氏)가 맡았다. 그들은 후에 미시마 수군(三島水軍)이 되었다.[33] 에치 씨를 조상으로 하는 고노 씨(河野氏)가 나타나 고노 수군(河野水軍)이 편성되어 세토 내해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다.[33] 헤이안 시대 말기 (지쇼・주에이 전란)(원평 전쟁)에서 겐지(源氏)에 호응하여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150척이나 되는 수군을 편성하여 승리로 이끌었다.[39] 가마쿠라 시대 원구(元寇)에서는 고노 미치아리가 수군으로 활약하였다.[39] 오야마즈미 신사의 보물로 검, 갑옷, 활과 화살 등 무기류가 많은 것은 신사를 우지가미로 삼은 고노 씨가 봉납한 때문이다.[33] 후술하는 무라카미 수군(해적)도 형식적으로는 고노 씨의 지휘하에 있었다.

오야마즈미 신사 영지는 미시마령 칠도(三島領七島)라고 불리며, 무로마치 시대 전기에는 이쿠나 섬, 이와키 섬, 오미시마(大三島), 오시모지마(大下島), 오카무라 섬, 미타라이지마(御手洗島)(또는 시모지마, 현재의 오사키시모 섬), 도요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5] 즉, 현재의 히로시마현 측인 오사키시모 섬, 도요 섬, 사이지마는 중세에는 이요 국 측이었다.

5. 3. 수군의 세력 다툼

율령 국가는 육로를 중시했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헤이안쿄(平安京)에서 소비되는 쌀, 소금 등 무거운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해운에 의지하게 되었다. 파도가 잔잔하고 큰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할 수 있는 세토 내해에는 많은 수송선이 왕래했고, 키나이(畿内)의 귀족, 대사찰 등에 의해 쇼엔화가 진행되었다. 국사(国司)나 쇼엔령주(荘園領主)는 징세(徴税)를 강화하여 제염, 해산물 자원을 획득하고 주민의 이동, 유랑을 억제하여 정착화를 도모했다. 이에 반발하는 해운 종사자나 이국에 유랑하는 사람들은 각지에서 분쟁을 일으켜 해적을 낳는 상황을 만들어냈다.[37]

중세 쇼엔 시대에도 소금(塩) 생산이 성행하여 무로마치 시대에는 「비고(備後)」라는 명칭으로 연 9만 석 이상이 키나이로 보내졌다.[36] 무로마치 시대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온 송희경(宋希璟)의 『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録)』(1420년)에는 해적들이 세토 내해 각지에 관문(関所)을 설치하여 선박(船舶)으로부터 관전(関銭)을 징수하거나, 선박에 승선하여 수선 안내나 경호의 대가로 금전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37]

이러한 해적들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조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수군이 되었다.[39] 그리고 전국 다이묘(戦国大名)는 그들과 대립하거나, “경고중(警固衆)”으로 편에 끌어들이려고 획책해 갔다.[40]

게이요 제도의 해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라카미 수군(무라카미 해적)이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 측으로 활약한 무라카미 요시히로가 조상이라고 전해지며, 이 시대에 동사(東寺)규쇼지마(弓削島) 쇼의 근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코노씨 배하였으나 독자 노선을 걸어, 게이요 제도에서 서세토 내해의 해상 교통·해상 운송에 있어서 「독자적인 질서」를 만들어내고, 세토 내해 항로를 종횡으로 막는 연계를 취함으로써 활동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37] 전승에 따르면 원래 같은 집에서 노시마(能島) 무라카미씨, 라이시마(来島) 무라카미씨, 이노시마(因島) 무라카미씨의 3개의 일족으로 분립했다.[37]

선교사(宣教師)루이스 프로이스(ルイス・フロイス)는 무라카미 수군을 “일본 최대의 해적”이라고 평했다.[41]

또 남북조 시대, 북조 측으로 비고 누마다(미하라시)를 거점으로 한 코바야카와씨(小早川氏)가 남하해 온다.[40] 세력을 확대해 온 코바야카와씨는 각 섬에서 경고중(코바야카와 수군(小早川水軍))을 편성하여, 무로마치 시대에 전술한 "비고"라고 불린 소금의 거래와 관련되어 있다.[42]

그리고 서쪽은 남북조 시대에 구라하시지마나 카마카리 군도로 이주한 타가야씨(多賀谷氏)(구라하시 타가야씨·카마카리 타가야씨)가 있고, 현재의 구레시 중심부에는 구레슈라고 불리는 연합 수군이 있어, 전국 시대 중기에는 그것들은 오오우치씨(大内氏) 경고중으로서 활약하고 있다.[44]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를 섬기고 있던 스에 하루타카(陶晴賢)는 주군을 쓰러뜨려, 세토 내해의 교통·운송 루트를 장악했다. 하루타카는 해적들의 질서에 개입하여, 해적들의 경고료 징수를 금지하고, 상인으로부터의 예전을 독점하려고 했다. 무라카미 수군은 이에 반발하여, 하루타카와 모토나리가 충돌한 1555년의 잇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코바야카와씨를 매개로 모토나리 쪽에 붙었다. 무라카미 수군을 편에 붙인 모토나리는 잇쿠시마에서 4000명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2만 명의 스에 군을 격파하여 세토 내해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이후 모리씨는 중국 지방의 패권을 잡게 된다.[37]

다만, 그들 해적들은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해적 정지령(海賊停止令)에 의해 사실상 해체되게 된다.

5. 4. 근세 - 교역로로서의 발전

근세에 접어들면서 세토나이카이 일대에는 목면범포가 보급되었고, 벤자이선이 발달하여 항해가 쉬워졌다. 이 지역은 원래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고, 특히 히로시마번 쿠라하시섬에서는 배를 활발하게 만들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했다.[37]

에도 막부는 각지에 해역을 설치했고, 게이요 제도 내에서는 미노세(시모카마가리섬)와 토모노우라가 정비되었다. 1605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왕조에서 조선통신사가 총 12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통신사는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게이요 제도에서 접대를 받았다. 특히 미노세는 평판이 좋았고, 토모노우라에서 바라본 세토나이카이의 풍경은 "일본 제일의 경승"이라고 칭찬받았다.[37]

17세기 후반, 가와무라 스이켄에 의해 동회리 항로·서회리 항로가 정비되면서 세토나이카이는 오사카와 에조지, 도호쿠 지방·호쿠리쿠 지방·산인 지방을 잇는 물자 수송의 대동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섬을 따라 외해를 항해하는 “충승”이 발달하고, 미타라이·키에(오오사키카미지마)·하나구리(오오미시마)·이와기·유게 등 세토나이 중앙부의 항구 도시는 성장을 이루었다. 게이요 제도에는 “바람 기다림”·“물때 기다림”의 배가 입항했다. 미타라이에서는 여관·상가·창고, 배의 발착장인 간목과 선번소 등도 생겨 항구 도시로서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처음에는 땔나무·물·연료 공급이 중심이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북쪽 지방 쌀을 중심으로 하는 회선 간의 중개·중계적 도매상 상업도 활발해졌다.[37]

근세에서 근대에 걸쳐 소금 만들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에도 시대 중기, 서회리 항로가 확립되면서 소금이 대량으로 취급되었고, 세토나이카이 일대는 일대 염전 지대가 되었다.[47] 상인들에 의해 도서 연안부가 염전으로 정비되면서 “하마단나”라고 불리는 지주·경영자가 탄생했다.[47] 또한 혼슈·시코쿠 쪽에서도 타케하라염전(히로시마번)·마쓰나가염전(비고후쿠야마번)·타키하마염전(사이죠번(西条藩))·하지하마염전(이요마쓰야마번)이 번 주도로 정비되어 번 재정을 풍족하게 했다. 이들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전매제가 되어 정부가 관리하게 되었다.[47][48] 그 이름을 계승하여 현재도 남아 있는 것이 “베쿠후의 소금”이다.

에도 시대 후기, 번의 영향력을 넘어 게이요 지역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키의 추다이에서는 소금·면실·담배·돗자리·모시 등의 특산품이 많이 수출되었고, 이요 회선을 통해 이요에서 말린 정어리 가루(비료·밀랍·종이 등이 수입되었다. 이 무렵 게이요 제도는 물류의 발전에 따라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화폐 경제의 침투도가 높았다고 한다.[37]

시타미 기쥬로에 의해 고구마 재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5. 5. 메이지 이후 - 근대화와 신산업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 기범선(機帆船)의 등장으로 바람이나 조류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 없어졌고, 철도의 등장으로 물류 또한 변화하면서 소규모 중계항은 쇠퇴해갔다.[49] "마치 물에서 꺼낸 잘린 꽃처럼 시들어 버렸다"라고 표현될 정도였다.[49]

하지만 기범선에게도 라이시마 해협(来島海峡)은 여전히 항해가 어려운 곳이었다. 항해 속도가 느린 배들은 이곳을 피해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오오미시마(大三島)와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 사이-미하라 앞바다-무코지마(向島)와 이노시마(因島) 사이를 지나는 “미하라 세토 항로”(三原瀬戸航路)를 이용했다.[50] 라이시마 해협과 미하라 세토 항로는 선박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그 주변에 근대적인 조선소가 생겨나게 되었다.[51]

근대 게이요 제도(芸予諸島)에서는 많은 이민을 배출했다. 평야부가 거의 소금밭으로 경지가 적고 농업 인구가 많았던 점, 에도 시대부터 품팔이가 많았던 점이 원인으로 꼽힌다.[37] 우치우미(内海)(후쿠야마시(福山市))의 타지마(田島)·요코지마(横島) 어민들은 에도 시대부터 서해 포경에 종사했고, 근대 이후에는 어업 이민으로 마닐라 만으로 진출했다.[52]

1896년(메이지 29년) 선박 직원법 개정으로 회선 선주는 근대 선박의 선장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전문 지식을 배우는 상선학교가 설립되었다.[53] 이는 현재 유게 상선 고등 전문학교(弓削商船高等専門学校)와 히로시마 상선 고등 전문학교(広島商船高等専門学校) 등으로 이어져 많은 선원을 배출하고 있다.

한편, 여성의 일로는 오초로부네(おちょろ舟)가 있었다. 이는 항구에 정박하는 배에 대해 육지에서 작은 배로 매춘을 하러 가는 유녀 배로, 선원들의 시중과 집안일을 도맡았다.[54][55] 근세에 沖乗り(오키노리) 항구로 번영했던 오오사키시모지마(大崎下島)의 미타라이(御手洗)와 근대에 석탄 수송의 중계 기지로 번영했던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의 키에(木江)가 유명하며,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사람과 사람 그림자』(人と人影) 등 근대 소설·기행문에도 등장한다. 1957년(쇼와(昭和) 32년) 매춘 방지법 시행으로 폐지되었지만, 유곽 흔적 등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특히 미타라이에서는 그들을 존중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54]

5. 6. 근대의 군사 거점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요 제도에는 몇몇 군사 기지가 설치되었다.

  • 해군병학교 - 에타지마. 해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의 전신
  • 게이요요새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당시 게이요 제도에도 공습이 있었다. 이노시마에서는 1945년 3월 19일과 7월 28일에 미군의 공습으로 조선소 등이 파괴되고 수십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이노시마 공습)[56]. 같은 해 7월 24일에는 에타지마만 안쪽에 피난해 정박 중이던 중순양함 리네를 미군의 대편대가 습격하여 승무원과 주변 섬 주민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57].

5. 7.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후 복구기에 조선업 등, 입지를 살려 발전한 곳도 있었지만, 땅과 수자원이 부족하고 노동력으로서의 인구에도 한계가 있는 섬 지역에서는 대규모 공장 입지 여지가 부족하여 성장의 어려움이 있었고, 오히려 노동력 공급원이 되었다.

5. 8. 헤이세이 대합병

1990년대 초 일본 버블 경제 붕괴가 발생하자 재정이 악화된 일본 정부는 지방 공공 단체의 재정 기반을 강화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행정 서비스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정촌 합병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일본의 시정촌 수는 1999년 3월 3,232개에서 2014년 4월 1,718개로 재편되었다. 히로시마현의 시정촌 수는 같은 기간 86개에서 23개로, 에히메현도 70개에서 20개로 감소했으며, 감소율은 히로시마현이 나가사키현에 이어 전국 2위인 73.3%, 에히메현이 니가타현에 이어 전국 4위인 71.4%였다.[58]

게이요 제도의 시정촌들도 헤이세이 대합병에 따라 폐치분합이 이루어졌다. 게이요 제도에 시정촌청을 두고 있던 자치단체의 대부분은 쿠레시이마바리시 등, 혼슈・시코쿠 본토에 시청을 두고 있는 자치단체와 합병했다. 한편, '''에타지마시'''・'''오사키카미지마정''' 등, 게이요 제도에 청사를 두는 형태로 합병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59]

6. 경제·산업

게이요 제도는 세토 내해의 잔잔하고 깊은 수심 덕분에 일본의 주요 조선업, 어업 및 양식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1] 현재 주요 산업은 조선, 관광, 감귤류 재배이다.

시마나미카이도의 일부인 구루시마 해협 대교

  • '''조선업''': 예로부터 조선업으로 번영했던 게이요 제도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일본 조선업의 주요 거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건조 붐과 그 반동이 반복되었으나,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구조적 불황”으로 쇠퇴하였다.[60] 2000년대에는 중국의 경제 발전에 따른 조선 발주 증가로 특수를 맞이했지만, 한국과 중국의 기술 향상과 저가격화로 치열한 가격 경쟁에 직면해 있다.[60]

  • '''해운업''':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구 하쿠호정의 섬들에서는 해운업이 성행하였으며, '''에히메 방식'''이라는 상관습에 의해 영세 사업자가 선주로서 여러 척의 선박을 보유하는 독특한 경영 방식이 뿌리내리고 있다.[61]

  • '''농업''': 온난한 기후를 활용하여 귤을 비롯한 감귤 재배가 활발하다. 하사쿠는 막말에 이노시마 정토사에서 원목이 발견되었고,[65] 이쿠치시마와 오사키시모시마에서는 레몬(히로시마 레몬) 재배가 성행하며, 이 두 섬만으로 일본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6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피레트린이 완전 합성되어 피레트럼(シロバナムシヨケギク|시로바나무시요케기쿠일본어) 재배 면적이 급격히 감소했다.[67]

  • '''관광''': 게이요 제도 근해는 "일본의 에게 해"라고도 불리며, 여러 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다도해)으로 유명하다. 시마나미카이도는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 있어 자전거 여행을 즐기기에 좋다.[70] 오쿠노시마는 "토끼의 낙원"으로 불릴 만큼 많은 토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구루시마 해협은 일본 3대 급조 중 하나로 빠른 물살로 유명하다.

  • '''기타''': 계도(契島)는 동방아연(東邦亜鉛)에서 은(銀), 구리(銅), 납(鉛)이 생산되고 있으며, 특히 납은 일본 전체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71]


게이요 제도에 본사를 둔 주요 기업은 다음과 같다.

섬 이름기업
에다지마에다지마 버스
구라하시섬구라하시 교통, 에노키 주조
시모카마가리섬히마와리 교통
도요섬사이지마 기선
오사키카미섬사사키 조선
이쿠치섬우치우미 조선
인노섬산코 기선, 만다 발효, 이노시마 가스, 이노시마 운수, 이노시마 기선, 산와 독, 시마나미 해운, 도세 상선, 가로와타 페리 기선
무카이섬무코지마 독, 오도토센, 우타토 운항, 마루젠 제약
오미섬후지와라 조선소, 세토나이카이 교통
하카타섬무라카미 슈조선, 시마나미 조선, 하쿠호 염업 (마쓰야마시와 2본사 체제)


6. 1. 경제권

애히메현 측 도서 지역은 히로시마현 측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 인프라 측면에서도 전역이 중국전력(中国電力)의 전력 송전망에 속해 있으며, 중국신문(中国新聞)을 구독할 수 있다. 특히 상도정(上島町)은 자동차로 시코쿠 쪽으로 직접 건너갈 수단이 없어 일단 페리를 이용해 히로시마현 쪽으로 나간 후 다시 애히메현으로 들어가야 할 뿐만 아니라, 상수도·의료·방재 사업 등 생활 인프라도 일부 히로시마현 측에 의존하고 있다.

6. 2. 조선

게이요 제도는 세토 내해의 잔잔하고 깊은 수심 덕분에 일본의 주요 조선업, 어업, 양식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1]

예로부터 조선업으로 번영했던 芸予諸島|게이요 쇼토일본어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일본 조선업의 주요 거점이었다. 조선업은 파고가 심했고, 전쟁에 따른 특수와 그 반동이 반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건조 붐과 그 반동이 반복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 발생한 오일 쇼크 이후로는 “구조적 불황”으로 인해 조선업이 쇠퇴하였고, 조선업으로 성립되어 있던 이노시마에서는 불황으로 인해 “섬이 가라앉는다”고까지 말해졌다.[60] 그 후, 엔고 불황 등도 겪었고, 2000년대에는 중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 조선 발주가 증가하여 특수를 맞이했다.[60]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건조 기술 향상과 저가격화는 눈부셨고, 그들과의 치열한 가격 경쟁에 직면해 있다.

芸予諸島|게이요 쇼토일본어에 조선소를 두는 주요 기업은 다음과 같다.

  • 내해조선
  • 재팬 마린 유나이티드
  • 삼화독
  • 사사키조선
  • 신라이지마우핀독
  • 무코지마독
  • 아이에스조선
  • 이와키조선
  • 시마나미조선
  • 하쿠호조선
  • 후지와라조선소
  • 무라카미슈조선

6. 3. 해운(선주)

게이요 제도는 세토 내해의 잔잔하고 깊은 수심 덕분에 일본의 주요 조선업, 어업 및 양식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1] 특히,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구 하쿠호정의 섬들에서는 해운업이 성행하였으며, 예로부터 현지 조선소가 선주에게 건조 대금의 분할 지불을 인정하는 '''에히메 방식'''이라는 상관습에 의해, 영세 사업자가 선주로서 여러 척의 선박을 보유하는 독특한 경영 방식이 뿌리내리고 있다.[61] 주로 내항선이었지만, 규모를 확장하여 외항선을 여러 척 소유하는 사업자도 나타났다. 또한 조선·해운업체 주변의 사업자가 모여들어 「해사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6. 4. 농업

게이요 제도에서는 온난한 기후를 활용하여 근대부터 귤을 비롯한 감귤 재배가 시작되었다. 험준한 산 정상까지 계단식 논밭을 조성하고, 무인도에 나가 귤밭을 만드는 출작도 행해졌다.[62] 에히메현에서는 에도 시대 말부터 귤 재배가 시작되어 현재는 일본 최대 산지가 되었다.[63][64]

하사쿠는 막말에 이노시마 정토사에서 원목이 발견되었다.[65] 이쿠치시마와 오사키시모시마에서는 레몬(히로시마 레몬) 재배가 성행하며, 이 두 섬만으로 일본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66]

근대에 번영했던 농업 중 하나로 피레트럼(シロバナムシヨケギク|시로바나무시요케기쿠일본어) 재배가 있었다. 외래종인 피레트럼은 메이지 초기 上山英一郎에 의해 일본에 도입되었다.[8][67] 다이쇼 시대에 보급이 진행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수입 살충제가 중단되면서 피레트럼 수요가 높아졌다.[68]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피레트린이 완전 합성되어 보급되면서 재배 면적이 급격히 감소했다.[67]

6. 4. 1. 감귤류

구릉지대이면서 온난한 기후를 활용하여 근대부터 귤을 비롯한 감귤 재배가 시작되었다. 험준한 산 정상까지 계단식 논밭을 조성하고, 무인도에 나가 귤밭을 만드는 출작도 행해지고 있다.[62] 에히메현에서는 에도 시대 말부터 귤 재배가 시작되어 현재는 일본 최대 산지가 되었다.[63][64]

하사쿠는 막말에 이노시마 다쿠마정(구 이노시마시)의 정토사에서 원목이 발견되었다.[65] 이쿠치시마와 오사키시모시마에서는 레몬(히로시마 레몬) 재배가 성행하며, 이 두 섬만으로 일본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66]

6. 4. 2. 제충국

근대에 번영했던 농업 중 하나로 피레트럼(シロバナムシヨケギク|시로바나무시요케기쿠일본어) 재배가 있었다. 외래종인 피레트럼은 메이지 초기 上山英一郎에 의해 일본에 도입되었다.[8][67] 다이쇼 시대에 보급이 진행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수입 살충제가 중단되면서 피레트럼 수요가 높아졌다.[68]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피레트린이 완전 합성되어 보급되면서 재배 면적이 급격히 감소했다.[67]

6. 5. 관광

게이요 제도 근해는 "일본의 에게 해"라고도 불리며, 여러 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다도해)으로 유명하다. 신선한 해산물과 감귤, 향토 요리 등 다양한 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69]
주요 관광 자원

  • 게이시마 - 섬 전체가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폐허가 된 세계유산 하시마섬(나가사키현)과 비교하여 "살아있는 군함도"라고 불린다.[71]
  • 오쿠노시마 - "토끼의 낙원"으로 불릴 만큼 많은 토끼들이 서식하고 있다.
  • 구루시마 해협 - 일본 3대 급조 중 하나로, 빠른 물살로 유명하다.

6. 5. 1. 본사

芸予諸島에 본사를 둔 기업은 다음과 같다.

섬 이름기업
江田島에다지마 버스
倉橋島구라하시 교통, 에노키 주조
下蒲刈島히마와리 교통
豊島사이지마 기선
大崎上島사사키 조선
生口島우치우미 조선
因島산코 기선, 만다 발효, 이노시마 가스, 이노시마 운수, 이노시마 기선, 산와 독, 시마나미 해운, 도세 상선, 가로와타 페리 기선
向島무코지마 독, 오도토센, 우타토 운항, 마루젠 제약
大三島후지와라 조선소, 세토나이카이 교통
伯方島무라카미 슈조선, 시마나미 조선, 하쿠호 염업 (松山市와 2본사 체제)


6. 5. 2. 기타

게이요 제도에는 기업이나 단체가 섬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 있다.

  • 계도(契島) : 동방아연(東邦亜鉛)에서 은(銀), 구리(銅), 납(鉛)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납은 일본 전체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며, 그 대부분이 자동차배터리에 사용된다.[71]
  • 세자섬(三ツ子島)(히로시마현) : 세자섬부두(三ツ子島埠頭)에서 공업용 소금이 저장되어 있다.
  • 나가시마(長島)(히로시마현) : 원래는 중국전력(中国電力) 오사키발전소(大崎発電所)였다. 현재는 중국전력과 전원개발(電源開発)의 공동 출자로 설립된 오사키쿨젠(大崎クールジェン)에 의해 석탄가스화복합발전용 시험 플랜트가 설치되어 있다.
  • 다쿠노시마(大久野島) : 환경성(環境省) 소유의 휴가촌(休暇村)이 있다.

7. 문화

에도 시대 조선과의 교류(조선통신사)를 통해 게이요 제도 사람들은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경제적 풍요와 간사이 문화 등 각지와의 교류로 게이요 제도의 도시민·민중 문화가 번성했다. 라이산요(頼山陽)는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저술하였고, 말년에 교토 자택 서재를 "산자수명처(山紫水明処)"라 명명했다. "산자수명"(산 그림자는 청자색으로 가라앉고, 해면은 유백색으로 빛나, 순간순간 석양이 깊어지는 풍경)은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의 훌륭한 경관을 전하는 표현이라고 일컬어진다.[72]

히로시마현에히메현 경계에 있는 표주박섬(瓢箪島)은 NHK 인형극 『뿅 하고 나타난 표주박섬(ひょっこりひょうたん島)』(1964년 방송 시작)의 모델이라는 견해도 있다.[72]

7. 1. 일본유산

2016년 4월 25일 "일본 최대의 해적"의 근거지: 게이요 제도 ― 되살아나는 무라카미 해적 “Murakami KAIZOKU”의 기억 ― 로서 일본유산 제2기 19곳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총 42항목 중 이마바리시 본토(7곳)와 오노미치시 본토(3곳) 및 아래 섬들 중 30곳이 대상이다.[41] 참고로 이쿠치섬(이쿠치씨)이나 표주박섬과 무라카미 씨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 이마바리 측: 오오미시마(3곳), 후루시오지마, 하쿠후쿠지마, 노시마, 미치카지마, 오오시마(5곳), 무시지마·나카와타리지마, 라이지마, 코지마, 케이지마
  • 오노미치 측: 이노시마(8곳), 무코지마(2곳), 이쿠치섬(2곳), 표주박섬, 햐쿠시마

7. 2. 조전마

노젓는 배는 일반적으로 노로 젓는 도선을 가리키며, 특히 신사의 행사에서 신여행 때 어좌선을 예인하는 배(예인선)를 의미한다.[73] 기원은 중세 수군이 사용했던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소조(小早)"라는 배에 있다고 한다.[73]

芸予諸島에 산재한 이쓰쿠시마 신사 분사 또는 스미요시 신사 분사에서는 노젓는 배를 이용한 예제가 행해졌다. 그것이 발전하여 지역마다 노젓는 배를 경주하는 축제, 그리고 관광용 축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고령화로 인해 노를 젓는 사람이 부족해져서 사라진 곳도 있다.[74]

노젓는 배 축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지역축제
大三島미시마 수군 츠루히메 축제 츠루히메 레이스, 소가타 하치만 신사 노젓는 배
大崎上島오사키카미시마 노젓는 배 경주
因島이노시마 수군 축제 바다 축제
高根島・生口島호란에
上蒲刈島히다카 신사 예제
豊島무로하라 신사 야코 행렬


8. 교통

게이요 제도는 섬들이 밀집해 있고 해협이 좁은 곳도 있어, 교량 건설을 통한 도서 지역 고립 해소가 큰 정치·행정 과제였다.

남북 방향으로는 세토나이 시마나미 해도(오노미치-이마바리 노선)가 건설되어 혼슈시코쿠를 연결하고 있다. 섬들을 잇는 동서 방향으로는 히로시마현이 적극적으로 교량 건설을 추진하여, 아게나다 쇼토 렌라쿠카쿄(安芸灘諸島連絡架橋)의 일부인 아게나다 토비시마 카이도(安芸灘とびしま海道)를 통해 시모가마카리시마(下蒲刈島) 등 여러 섬들을 연결하였다.

개별적으로 에다지마(江田島)·쿠라하시지마(倉橋島) 등도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어,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를 제외한 대형 섬들은 섬(離島) 지정이 해제되었다.

하지만 에히메현 측은 시마나미카이도를 제외하면 교량 건설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카미시마 쇼토(上島諸島)의 교량 건설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본토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과거에는 혼슈, 시코쿠와 게이요 제도 섬들을 연결하는 많은 여객선페리 항로가 있었으나, 인구 감소, 교량 건설로 인한 육로 이동 증가 등의 영향으로 항로 휴·폐지 및 운항 감축이 계속되고 있다. 주요 페리 회사는 다음과 같다.

주요 페리 회사
오미시마 블루라인
사이시마 기선
시마나미 해운
산요 상선
오사키 기선
아키쓰 페리
산코 기선
세토우치 크루징
하부 상선
이마바리 시영 페리
게요 기선
가로토 페리 기선
오노미치 도선
우타토 운항


8. 1. 가교

섬들이 밀집해 있고 해협에는 좁은 곳도 있어서, 교량 건설을 통한 도서 지역 고립 해소가 큰 정치·행정 과제가 되고 있다.

남북 방향의 축인 세토나이 시마나미 해도(오노미치-이마바리 노선) 외에, 섬들을 잇는 동서 방향의 축으로 히로시마현 측에서는 현의 적극적인 교량 건설이 이루어졌다. 아게나다 쇼토 렌라쿠카쿄(安芸灘諸島連絡架橋)의 일부인 아게나다 토비시마 카이도(安芸灘とびしま海道)를 통해 시모가마카리시마(下蒲刈島)-카미가마카리시마(上蒲刈島)-토요시마-오오사키시모시마(大崎下島)-히라와시마(平羅島)-나카노시마(이상 히로시마현)-오카무라지마(岡村島)(에히메현)까지 연결되어 있다.

개별적으로 에다지마(江田島)·쿠라하시지마(倉橋島) 등도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를 제외한 대형 섬들은 섬(離島)이 아니게 되어 섬 지역 진흥법(離島振興法)상의 섬 지정이 해제되었다.

한편, 에히메현 측은 시마나미카이도를 제외하면 뒤처졌다. 카미시마 쇼토(上島諸島)의 교량 건설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본토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또, 구·세키젠촌(関前村)의 오오시모시마(大下島) 등은 여전히 섬 상태이며, 섬 고립 해소의 전망은 서 있지 않다. 참고로, 위에서 설명한 대로 구·세키젠촌 최서단의 섬인 오카무라지마(岡村島)는 시코쿠 측이 아니라 본토 측에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8. 1. 1. 본토 시코쿠 연락교 오노미치·이마바리 노선

섬들이 밀집해 있고 해협에는 좁은 곳도 있어서, 교량 건설을 통한 도서 지역 고립 해소가 큰 정치·행정 과제가 되고 있으며, 본토(혼슈)와 시코쿠를 잇는 세토나이 시마나미 해도로 결실을 맺었다. 이 노선은 구상 단계에서는 오노미치-이마바리 노선[75]이라고 불렸으며, 본토(혼슈)-무코지마-이노시마(因島)-나구쿠치지마(生口島)-오오미시마(大三島)-하쿠호지마(伯方島)-미치카지마(見近島)-오오시마-우마지마-시코쿠((구) 이마바리시)를 잇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8. 1. 2. 아게나다 제도 연락 가교

섬들이 밀집해 있고 해협에는 좁은 곳도 있어서, 교량 건설을 통한 도서 지역 고립 해소가 큰 정치·행정 과제가 되고 있다. 혼슈시코쿠를 잇는 세토나이 시마나미 해도가 건설되었는데, 구상 단계에서는 오노미치-이마바리 노선[75]이라고 불렸다. 이 노선은 무코지마-이노시마(因島)-나구쿠치지마(生口島)-오오미시마(大三島)-하쿠호지마(伯方島)-미치카지마(見近島)-오오시마-우마지마-시코쿠(구 이마바리시)를 잇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이것을 남북 방향의 축으로 하고, 섬들을 잇는 동서 방향의 축으로 하면, 히로시마현 측에서는 현의 적극적인 교량 건설로, 아게나다 쇼토 렌라쿠카쿄(安芸灘諸島連絡架橋)의 일부인 아게나다 토비시마 카이도(安芸灘とびしま海道)를 통해 시모가마카리시마(下蒲刈島)-카미가마카리시마(上蒲刈島)-토요시마-오오사키시모시마(大崎下島)-히라와시마(平羅島)-나카노시마(이상 히로시마현)-오카무라지마(岡村島)(에히메현)까지 연결되어 있다. 전체 구상으로는 오오사키카미시마(大崎上島)까지의 노선, 또 다른 구상으로 오카무라지마(岡村島)에서 동쪽으로 섬들을 따라 오오미시마(大三島)까지의 노선도 있다.

8. 2. 해상 여객·차량 수송

과거에는 혼슈, 시코쿠와 그 사이의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섬들을 연결하는 많은 여객선페리항로가 존재했으나, 과소화 및 인구 감소, 교량 건설로 인한 육로 이동 증가 등의 영향으로 항로 휴·폐지 및 운항 감축이 계속되고 있다.

주요 페리 회사는 다음과 같다.

주요 페리 회사
오미시마 블루라인
사이시마 기선
시마나미 해운
산요 상선
오사키 기선
아키쓰 페리
산코 기선
세토우치 크루징
하부 상선
이마바리 시영 페리
게요 기선
가로토 페리 기선
오노미치 도선
우타토 운항


9. 각 섬의 개요

이름시정촌연결 다리면적 (km²)인구비고
오쿠로카미섬(大黒神島)에타지마시(江田島市)7.310
오키노섬(沖野島)오키노시마 다리(沖野島橋)0.754
노미섬(能美島)
(에타지마(江田島))
오키노시마 다리(沖野島橋)・하야세오하시(早瀬大橋)91.5327027과거에는 노미섬과 에타지마로 나뉘어 있었다.
구라하시섬(倉橋島)구레시(呉市)하야세오하시(早瀬大橋)・오토오하시(音戸大橋)・
제2오토오하시・호리키리바시(堀切橋)・
가시마오하시(鹿島大橋)
69.5918628호리키리바시(堀切橋)에 의해 연결되는 가로와타(鹿老渡)섬을 포함한다.
미쓰코섬(三ツ子島)0.100공업용 소금 저장에 사용되고 있다.
가시마(鹿島)가시마오하시(鹿島大橋)2.64324
조지마(情島)0.6910
시모카마가리섬(下蒲刈島)아키나다오하시(安芸灘大橋)・가마가리오하시(蒲刈大橋)8.001635
가미카마가리섬(上蒲刈島)가마가리오하시(蒲刈大橋)・도요시마오하시(豊島大橋)18.912060
야쿠히섬(屋久比島)0.660
도요시마(豊島)도요시마오하시(豊島大橋)・도요하마오하시(豊浜大橋)5.671373
이쓰키섬(斎島)0.7021
산가쿠섬(三角島)0.5834
오사키시모섬(大崎下島)도요하마오하시(豊浜大橋)・헤라바시(平羅橋)17.482572
헤라섬(平羅島)헤라바시(平羅橋)・나카노세토오하시(中の瀬戸大橋)0.150
나카노시마(中ノ島)나카노세토오하시(中の瀬戸大橋)・오카무라오하시(岡村大橋)0.180
오시바섬(大芝島)히가시히로시마시(東広島市)오시바오하시(大芝大橋)1.70169
오사키카미섬(大崎上島)오사키카미지마정(大崎上島町)나가시마오하시(長島大橋)30.388160
나가시마(長島)나가시마오하시(長島大橋)1.0617
지기리섬(契島)0.0942섬 전체가 도호아연(東邦亜鉛)의 사유지(私有地)이다. 소위 군함섬(軍艦島)
이쿠노섬(生野島)2.2623
오쿠노섬(大久野島)다케하라시(竹原市)0.726많은 토끼(ウサギ)가 서식한다.
사키섬(佐木島)미하라시(三原市)8.73841
고사키섬(小佐木島)0.522인구는 2000년 기준
다카네섬(高根島)오노미치시(尾道市)다카네오하시(高根大橋)5.57550
이쿠치섬(生口島)다카네오하시(高根大橋)・이쿠치바시(生口橋)・다타라오하시(多々羅大橋)31.069674
인노섬(因島)인노시마오하시(因島大橋)・이쿠치바시(生口橋)34.9823953구 비고국. 게이요 제도의 중심적인 섬. 조선이 성행한다.
호소시마(細島)0.7653구 비고국
이와코섬(岩子島)무카이시마오하시(向島大橋)2.45649구 비고국
무카이섬(向島)신오노미치오하시(新尾道大橋)・오노미치오하시(尾道大橋)・무카이시마오하시(向島大橋)22.2323510구 비고국
햐쿠시마(百島)3.08584구 비고국
도사키(戸崎)히로시마현도 365호선・시도구 비고국. 인접한 구 에비시마와의 사이는 매립되어 좁은 해협이 되어 있다.
다지마(田島)후쿠야마시(福山市)우치우미오하시(内海大橋)・무쓰바시(睦橋)8.591630구 비고국
요코시마(横島)무쓰바시(睦橋)4.051207구 비고국



이름시정촌교량면적 (km²)인구비고
오미섬(大三島)이마바리시(今治市)오미시마바시(大三島橋)・다타라오하시(多々羅大橋)64.5656752015년 기준 인구
오시마(大島)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오시마오하시(大島大橋) (에히메현)・구루시마카이쿄 제1대교(来島海峡第一大橋)41.8960312015년 기준 인구
하카타섬(伯方島)하카타바시(伯方橋)・오미시마바시(大三島橋)20.8563592015년 기준 인구
오카무라섬(岡村島)오카무라오하시(岡村大橋)3.136482000년 기준 인구
오시모섬(大下島)1.7587
쓰시마(津島) (이마바리시)1.4918
고오시모섬(小大下島)0.9932
구루시마(来島)0.9923
우시마(鵜島) (이마바리시)0.9933
고지마(小島) (에히메현)0.9925
마시마(馬島) (에히메현)구루시마카이쿄 제2대교(来島海峡第二大橋)・구루시마카이쿄 제3대교(来島海峡第三大橋)0.9932
히키지마(比岐島)0.993
미치카지마(見近島)오시마오하시(大島大橋) (에히메현)・하카타바시(伯方橋)0.9902000년 기준 인구
이와키섬(岩城島)가미지마정(上島町)이와키바시(岩城橋)8.9520332015년 기준 인구
사시마(佐島) (가미시마쇼토)유게오하시(弓削大橋)・이쿠나바시(生名橋)2.674892015년 기준 인구
유게섬(弓削島)유게오하시(弓削大橋)8.6628352015년 기준 인구
이쿠나섬(生名島)이쿠나바시(生名橋)・이와키바시(岩城橋)3.6815822015년 기준 인구
아카호네지마(赤穂根島)2.092쇼와 20년대부터 유인도와 무인도를 반복함
우오섬(魚島)1.37190
다카이가미섬(高井神島)1.3438
도요섬(豊島) (에히메현)0.9902010년대에 무인도화
햐칸섬(百貫島) (에히메현)0.9902000년 기준 인구
아주섬(安居島)마쓰야마시(松山市)0.3202015년 기준 인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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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厳密には広島県の東部は備後国に属し、芸予諸島と位置付けられる島々のうち、備後に属していた島・地域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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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서 애히메현측에서는 이마바리 오노미치 루트라고 부른다. 약칭 「이마오 루트」. 「세토나이카이 오오하시」라는 명칭도 사용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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