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 (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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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기원
- 3. 주요 겐지
- 3.1. 사가 겐지(嵯峨源氏)
- 3.2. 닌묘 겐지(仁明源氏)
- 3.3.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 3.4.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 3.5. 요제이 겐지(陽成源氏)
- 3.6. 고코 겐지(光孝源氏)
- 3.7. 우다 겐지(宇多源氏)
- 3.8. 다이고 겐지(醍醐源氏)
- 3.9.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 3.10. 레이제이 겐지(冷泉源氏)
- 3.11. 가잔 겐지(花山源氏)
- 3.12. 산조 겐지(三条源氏)
- 3.13. 고산조 겐지(後三条源氏)
- 3.14. 고시라카와 겐지(後白河源氏)
- 3.15. 준토쿠 겐지(順徳源氏)
- 3.16. 고사가 겐지(後嵯峨源氏)
- 3.17. 고후카쿠사 겐지 (後深草源氏)
- 3.18. 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
- 4. 무가 겐지와 공가 겐지
- 참조
1. 개요
겐지(源氏)는 814년 사가 천황의 황자에게 처음 미나모토(源)라는 가바네가 붙여진 데서 시작된 씨족이다. 황족이 신적강하를 통해 겐지 성을 받으면서 여러 씨족이 생겨났으며, 사가 겐지, 닌묘 겐지, 몬토쿠 겐지, 세이와 겐지, 요제이 겐지, 고코 겐지, 우다 겐지, 다이고 겐지, 무라카미 겐지 등 다양한 겐지 씨족이 존재했다. 이들은 무가와 공가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번성했으며, 특히 세이와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배출하며 무가 겐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겐지는 공가 겐지로 번성하여 많은 도쇼케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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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십일류는 일본 황족에게 하사된 겐지 성씨를 칭하는 여러 가계를 의미하며, 사가 천황부터 오기마치 천황까지의 자손들이 겐지 성을 하사받아 형성되었고, 무가, 공가 화족으로 번영하며 조정에서 활동하거나 지하가 또는 무가로 남기도 했다. - 황별 씨 - 헤이시
헤이시(다이라 씨)는 헤이안 시대 천황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와 함께 무가 사회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으나,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수립한 헤이시 정권은 겐페이 전쟁에서 몰락했고, 그 후손들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헤이케 이야기》와 같은 군담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 황별 씨 - 소가씨
소가 씨는 고대 일본의 유력 씨족으로,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 세력을 형성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을사의 변으로 몰락했다. - 일본의 씨족 - 마쓰다이라씨
마쓰다이라씨는 기원이 불분명하나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하고 가모씨나 스즈키씨의 일족일 가능성도 있으며 미카와국 유래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무가로, 14세기경 미카와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확립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하고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 일본의 씨족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겐지 (씨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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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명 | 겐지 / 미나모토 씨 |
한자 표기 | 源氏 |
가나 표기 | げんじ / みなもとうじ |
씨성 | 미나모토 아손 |
출자 | 천황의 황자 제왕 궁가의 제왕 |
종별 | 황별 |
주요 인물 | |
우다 겐지 | 사사키 도요 노기 마레스케 |
무라카미 겐지 | 미나모토 미치치카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이와쿠라 도모미 |
세이와 겐지 | 미나모토 요리토모(가와치 겐지) 미나모토 요시나카(기소 씨) 미나모토 요시쓰네(가와치 겐지)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씨) 다케다 신겐(다케다 씨) 아케치 미쓰히데(도키 씨) 도쿠가와 이에야스(닛타 씨) (자칭) 호소카와 모리히로(호소카와 씨) 기타: 겐지 인물 목록 참고 |
주요 후손 |
2. 기원
814년에 사가 천황의 황자에게 처음 미나모토라는 가바네가 붙여진 것을 시작으로 한다.[1] 미나모토(源)라는 가바네에는 황실과 조정(원류)을 함께 하라는 명예로운 의미가 담겨 있었는데, 그 밖에도 「물의 근원(水元)」이라는 설도 있다.[1]
헤이시(平氏), 후지와라씨(藤原氏), 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도키쓰(源平藤橘)」(사성四姓)로 불리며, 일본의 대표적인 우지(氏)이다.
흔히 무가 겐지(武家源氏)로 알려진 세이와 겐지는 21개 겐지 유파 중 하나였지만, 무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떨치며 겐지를 대표하는 주요 가계가 되었다. 이들은 세이와 천황의 황자를 시조로 하며, 기나이(畿内)를 비롯한 일본 전국 각지에 토착하였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満仲)의 아들 대에서 셋쓰 겐지(攝津源氏), 야마토 겐지(大和源氏), 가와치 겐지(河内源氏)로 나뉘었다. 이 중 가와치 국(河内國)을 본거지로 한 가와치 겐지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義家)를 주류로 하여, 그 자손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로 대표되는 무가(武家)로 번영을 누렸다. 가와치 겐지는 이시카와 겐지(石川源氏), 가이 겐지(甲斐源氏), 히타치 겐지(常陸源氏), 시모쓰케 겐지(下野源氏, 아시카가 씨(足利氏)), 고즈케 겐지(上野源氏, 닛타 씨(新田氏)) 등으로 분파되었다. 셋쓰 국(摂津国)을 본거지로 한 셋쓰 겐지는 다다 겐지(多田源氏), 미노 겐지(美濃源氏) 등으로 분파했는데, 이들을 모두 세이와 겐지의 일문으로서 「무가 겐지」로 통칭한다.
[1]
서적
日本大百科全書 8
사가 천황에게 있어 황자나 황녀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조정의 재정을 압박하게 되는 계기로 여겨졌기에, 일찌감치 신적강하를 시키는 것이 자손을 번영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친왕(親王)이지만 황위에는 오를 수 없는 황족이 스스로 신적강하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조정에서 일방적으로 황적에서 빼고 신적강하시키는 경우도 있었다.[1]
사가 천황 이후로 많은 천황들이 빈번하게 황족에게 미나모토라는 성씨를 내리며 신적강하를 행했다. 사가 천황의 황자로서 미나모토 성씨를 받고 신적강하된 자들이 스스로 사가 겐지라고 칭한 이래, 미나모토 집안은 각각 자신들의 시조로 추앙되는 천황의 시호를 씨족의 칭호로 삼았다. 닌묘 천황을 시조로 하는 닌묘 겐지, 몬토쿠 천황을 시조로 하는 몬토쿠 겐지, 세이와 천황을 시조로 하는 세이와 겐지, 무라카미 천황을 시조로 하는 무라카미 겐지, 우다 천황을 시조로 하는 우다 겐지, 다이고 천황을 시조로 하는 다이고 겐지 등이 그것이다.[1]
조정에서 황족을 신적강하시킨 것은 황실의 번병(藩塀)으로서 황실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할 수 있는 상급 귀족 세력을 조정에 많이 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3대 이상 상급 귀족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은 수령으로서 부임해 내려간 지방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무사화되거나 중앙에서 후지와라 씨보다도 낮은 중급 귀족의 지위나 유지하면서 근근히 살아남았다.[1]
3. 주요 겐지
사가 천황(嵯峨天皇)에게서 나온 사가 겐지(嵯峨源氏)나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에게서 나온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포함한 21개의 유파가 존재하며 이들을 21류(流)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집안의 품격이 가장 높았던 것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성립 이전까지 미나모토 씨장자(源氏長者)를 배출한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였다.[1]
대부분의 겐지는 1, 2대 만에 조정에서 고위직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무라카미 천황의 자손인 미나모토노 모로후사(나카인류)는 상류 귀족 지위를 유지했다. 겐큐 7년의 정변에서 셋칸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서 남조를 지휘한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메이지 정부의 중진 이와쿠라 토모미 등이 무라카미 겐지 출신이다.
겐지 자손의 일부는 수령·재청관인이 되어 토착, 무사화되었다. 특히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츠네모토의 후손인 가와치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배출했다. 아시카가 씨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를 열면서 무가의 맹주로 인식되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 등도 가와치 겐지의 후예를 칭했다.
대표적인 가문 문장인 '''사사린도'''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문장이라고 한다.
3. 1. 사가 겐지(嵯峨源氏)
사가 천황의 자손으로, 사가 천황은 많은 황자와 황녀에게 겐지 성을 주어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하였다. 이 중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 미나모토노 도키와(源常), 미나모토노 도루(源融)는 사다이진이 되어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조정의 일대 세력이 되었다. 또한, 미나모토노 도루의 계통은 지방에 정착하여 무가가 되었다. 자손으로는 와타나베 씨(渡辺氏), 마쓰우라 씨(松浦氏), 가마치 씨(蒲池氏) 등이 있다.[1]
3. 2. 닌묘 겐지(仁明源氏)
닌묘 천황의 자손을 닌묘 겐지라고 한다. 닌묘 천황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마사루(源多)와 미나모토노 히카루(源光)는 미나모토 성을 받고 우다이진이 되었다.[1]
3. 3.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몬토쿠 천황의 자손 중 사다이진이 된 미나모토노 요시아리(源能有)의 자손으로 북면무사가 된 사카도 씨가 있다.
3. 4.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세이와 천황의 자손.[1] 쓰네모토의 계통은 무가로서 번성했다.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자손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가문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무가동량(武家棟梁, 무가의 우두머리)의 가문이라고 여겨졌다. 아시카가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하여 굉장히 많은 무가가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자칭하였다.
쓰네모토의 후손인 가와치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배출했다. 또한, 가와치 겐지의 흐름을 잇는 유력 씨족 아시카가 씨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열면서 무가의 맹주로 인식되었다.[3]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 등도 가와치 겐지의 후예를 칭하고 있다.
겐지의 후예 중, 수령이나 재청관인으로서 토착하여 무사단을 형성한 자들을 무가 겐지(武家源氏)라고 부른다. 특히 세이와 겐지가 그 대표이며, 겐페이 전쟁 등, 세이와 겐지를 겐지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덴교의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고, 그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는 친주후 쇼군이 되었으며, 그 후예는 셋쓰 겐지, 야마토 겐지, 가와치 겐지로 나뉘었다. 가와치 국을 본거지로 한 가와치 겐지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하치만 타로 요시이에)를 배출하여, 셋칸가의 가신으로서 중앙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수령에도 임명되는 무가 귀족이 되었다. 1180년에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전쟁)이 일어나, 가와치 겐지의 맹주였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5년 정도 걸려 헤이시를 멸망시키고 동일본을 정복하게 되었다. 1192년,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에 최초의 막부(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3] 이후 가와치 겐지는 "무가의 맹주"로 여겨지며, 가와치 겐지에서는 이시카와 겐지(이시카와 씨), 가이 겐지(다케다 씨), 히타치 겐지(사타케 씨), 시모쓰케 겐지(아시카가 씨), 고즈케 겐지(닛타 씨) 등이 분파되었다. 셋쓰 국을 본거지로 한 셋쓰 겐지에서는 다다 겐지, 미노 겐지 등이 분파되었다. 아시카가 씨는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고, 그 일족인 호소카와 씨・하타케야마 씨・야마나 씨 등은 큰 세력을 자랑했다. 전국 시대에는 아시카가 씨 분가의 가계는 거의 쇠퇴했지만, 세이와 겐지 닛타 류를 칭하는 도쿠가와 씨가 에도 막부를 열고, 시마즈 씨・호소카와 씨・사타케 씨 등은 다이묘로서 존속했다.
; 굵은 선은 친자. 가는 선은 양자 (성 없음은 신하로 내려간 겐지・일부 성 없음은 승려).
〈겐지 (세이와 겐지)〉[vol.1 조메이 친왕~사다야스 친왕]
세이와 천황(고레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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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메이 친왕 사다카타 친왕 사다모토 친왕 사다히라 친왕 사다야스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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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토요 카네타다 카네노부 쿠니타다 쿠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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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유키 시게유키
〈겐지 (세이와 겐지) 카와치 겐지〉[vol.2 조준 친왕]
세이와 천황(고레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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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스미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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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네모토 쓰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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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나카 미쓰마사 미쓰스에 미쓰자네 미쓰카이 미쓰오 키미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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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미쓰 요리치카 요리노부 요리히라 요리아키 요리사다 요리노리 켄 타다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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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요시 요리키요 요리스에 요리토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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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이에 요시쓰나 요시미쓰 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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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네 요시치카 요시쿠니 요시타다 요시토키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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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무네 요시노부 요시토시 요시야스 요시유키 타메요시 무네키요 타메요시 츠네쿠니 요시타카 타다무네 요시키요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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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토모 요시카타 요시히로 요리켄 요리나카 타메무네 타메나리 타메토모 타메나카 유키이에 코레요시 토리이 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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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히라 토모나가 요리토모 요시카도 히데요시 노리요리 젠세이 요시엔 요시츠네 보몬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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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이에 사네토모 조교 오히메 오토히메 키보 노리엔 토키모토 요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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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만 구교 에이지쓰 젠교 타케노고쇼
〈겐지 (세이와 겐지)〉[vol.3 조신 친왕~미나모토노 나가요리]
세이와 천황(고레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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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 친왕 조수 친왕 조신 친왕 조라이 친왕 나가후치 나가야스 나가아키 나가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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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메요시 반키 반페이 반코 겐료
〈세이와 겐지 미쓰마사류〉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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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시게 타다타카 타다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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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무네 사이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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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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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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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나오 시게나가 시게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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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시게타카 시게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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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시게나가 시게타카 시게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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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타다
〈세이와 겐지 요리미쓰류 (셋쓰 겐지)〉
요리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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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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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히로 요리스케 요리자네 사네쿠니 요리쓰나 쿠니후사 모로미쓰 로쿠조 사이인 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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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미쓰 스케카네 아키쿠니 나카마사 쿠니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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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쿠니 유키쿠니 쓰네미쓰 요리마사 요리유키 쿠니마사 쿠니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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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키미쓰 요리모리 요리노리 나카쓰나 요리카네 히로쓰나 니조인 사누키 카네쓰나 기슈몬인 탄고 쿠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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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쓰나 토모자네 타카요리 모리쓰나 무네쓰나 아리쓰나 요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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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쓰나 스케쿠니 무네나카
〈세이와 겐지 쿠니후사류 (셋쓰 겐지 지류)〉
쿠니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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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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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노부 미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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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모토 미쓰시게 미쓰나가 미쓰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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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시게 미쓰쓰구 미쓰히라
〈세이와 겐지 요리치카류 (야마토 겐지)〉
요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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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나리 요리후사 요리토 요리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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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토시 아리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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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카제 요리하루 요리카게 모토미쓰 미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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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아스 치카히로 유키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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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자네 치카하루 요리아키 요리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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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쓰 아리하루 요리토 요리모토 요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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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쓰헨 미쓰하루 요리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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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렌 요시하루 요리모토
〈세이와 겐지・카와치 겐지 요시쓰나류〉
요시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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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히로 요시토시 요시아키 요시나카 요시노리 요시키미 요시나오
〈세이와 겐지・카와치 겐지 요시미쓰류〉
요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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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리 사네미쓰 요시키요 모리요시 치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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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요시 요시사다 키요미쓰 모로미쓰 아리요시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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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요시 요시쓰네 요시카네 미쓰나가 노부요시 토오미쓰 요시사다 요시토오 코레요시 토모마사 카게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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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요시아키 타다요리 카네노부 아리요시 노부미쓰 미쓰토모 나가키요 미쓰유키
3. 5. 요제이 겐지(陽成源氏)
요제이 천황의 자손이다. 세이와 겐지의 시조인 미나모토노 쓰네모토가 요제이 천황의 손자라는 설이 있는데, 그 설에 찬성하는 학자도 있으나 학계에서 인정받는 설은 아니다.[1]
3. 6. 고코 겐지(光孝源氏)
고코 천황의 제1황자 고레다타 친황(是忠親王)의 증손 미나모토노 고쇼(源康尚)는 불상 제작 장인의 시조였으며, 그 계통에서 불상 제작공의 각 유파가 배출되었다.
3. 7. 우다 겐지(宇多源氏)
우다 천황의 자손이다. 제8황자 아쓰미 친황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마사노부(源雅信)·미나모토노 시게노부(源重信) 형제는 사다이진이 되었다. 특히 마사노부의 자손이 번창하여 구게로서는 도쇼케(堂上家, 정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가문) 다섯 가문을 배출하였고, 무가로서는 오미 겐지(近江源氏)인 사사키 씨와 그 분파 이즈모 겐지(出雲源氏) 등이 파생하였다.
3. 8. 다이고 겐지(醍醐源氏)
제60대 다이고 천황의 자손이다.[1] 제10황자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源高明)는 사다이진이 되었으나, 안나의 변으로 실각하였다.[1] 다카아키라의 자손으로는 오카모토 씨(岡本氏)·가와지리 씨(河尻氏)가 있다.[1] 그 외에 제1황자 가쓰아키라 친왕(克明親王)의 아들로 아악 연주의 명인으로 유명한 미나모토노 히로마사(源博雅)가 있다.[1]
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미나모토노 가네아키라의 원복은 내리에서 행해졌고, 내장료에서 향연과 인출물이 준비되는 등 일세 겐지의 특수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2]
3. 9.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무라카미 천황의 제7황자 도모히라 친왕의 자손으로,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양자가 된 우다이진 미나모토노 모로후사의 자손이 번창하여 다수의 도쇼케(堂上家)를 배출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의 아시카가 씨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미나모토 씨의 종주 격인 겐지 장자(源氏長者)는 모로후사의 일족이 독점하였다.[1]
미나모토노 모로후사(나카인류)는 상류 귀족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겐큐 7년의 정변에서 셋칸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서 남조를 지휘한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메이지 정부의 중진이 된 이와쿠라 토모미를 배출하였다.
3. 10. 레이제이 겐지(冷泉源氏)
레이제이 천황의 자손으로, 겐지 21류에 포함되지만, 구체적인 자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1]
3. 11. 가잔 겐지(花山源氏)
가잔 천황의 자손으로, 도쇼케인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伯王家)가 되어 진기칸(神祇官)의 수장 자리를 세습하며 신도를 총괄하였다.[1]
3. 12. 산조 겐지(三条源氏)
三条源氏|산조 겐지일본어는 제67대 산조 천황의 제1황자 아쓰아키라 친왕의 자손이다. 적류는 미나모토노 미치스에 이래 오오키미노카미(正親正) 자리를 세습하였다.
3. 13. 고산조 겐지(後三条源氏)
고산조 천황의 셋째 황자인 스케히토 친왕의 자손이다. 스케히토 친왕의 아들 미나모토노 아리히토는 사다이진이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신이자 《헤이케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다시로 노부쓰나는 아리히토의 손자라고 한다.[1]
3. 14. 고시라카와 겐지(後白河源氏)
고시라카와 천황의 제2황자 모치히토 왕은 친왕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1180년(지쇼 4년) 안토쿠 천황과 다이라 정권 타도를 주창하며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거병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고시라카와 법황이 겐지로 강등하여 이름을 미나모토노 모치히토로 개명하고 유배 판결을 내렸다.[1]
3. 15. 준토쿠 겐지(順徳源氏)
준토쿠 천황의 다섯째 황자인 다다나리 왕(忠成王)과 여섯째 황자인 요시무네 친왕(善統親王)의 자손이 준토쿠 겐지에 해당한다.[1]
다다나리 왕의 아들 겐닌의 자손은 에이닌 2년(1294년)에 겐지 성을 받았다. 겐닌의 아들 타다후사는 권중납언, 손자 겐료는 참의에 올랐다.
요시무네 친왕의 자손은 요츠츠지노미야를 칭했지만, 요시무네 친왕의 손자 요시나리는 분와 5년(1356년)에 겐지 성을 받고 요츠지를 가명으로 했다. 요시나리는 혈연관계에 있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지원을 받아 좌대신에 올랐지만, 외아들이 출가하여 후사가 끊어졌다.준토쿠 천황 다다나리 왕 요시무네 친왕 겐닌 요츠츠지노미야 타다후사 요시나리 겐료
3. 16. 고사가 겐지(後嵯峨源氏)
고사가 천황의 손자인 고레야스 친왕의 자손이다. 고사가 천황의 제2황자 무네다카 친왕이 가마쿠라 막부 제6대 쇼군직을 사퇴한 뒤, 그의 아들 중 하나로 제7대 쇼군에 취임한 고레야스에게 미나모토 성을 내려 미나모토노 고레야스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가마쿠라 막부가 고레야스를 교토로 추방하고 그를 대신하여 히사아키 친왕을 쇼군으로 추대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고레야스를 친왕에 임명하여, 고레야스는 황족으로 복귀하였다. 즉, 고사가 겐지는 고레야스 1대로 끝났다.[1]
3. 17. 고후카쿠사 겐지 (後深草源氏)
고후카쿠 천황의 황자로,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쇼군이 된 히사아키라 친왕의 자손이다. 히사아키라 친왕의 아들 모리쿠니 친왕(9대 쇼군)이 미나모토 성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1]
3. 18. 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
오기마치 천황의 자손으로, 처음에는 무가였으나 후에 당상가가 되어 세이가의 히로하타가(広幡家)를 일으켰다.[1]
4. 무가 겐지와 공가 겐지
사가 겐지 중에서는 미나모토노 도루(源融)를 시조로 하는 「도루류(融流) 사가 겐지」가 셋쓰 국을 기반으로 삼았던 와타나베 씨(渡辺氏)와 그 분파인 마쓰우라 씨(松浦氏)를 배출했다. 우다 겐지에서는 오미 국(近江国)을 기반으로 삼았던 오미 겐지(近江源氏, 사사키 겐지(佐佐木源氏))가 나왔는데, 오미 겐지는 이후 사사키 씨(佐々木氏)라는 유력 무사단으로 성장한다.
한편 중앙 귀족으로서 번창했던 겐지로는 무라카미 천황의 황자 도모히라 친왕을 시조로 하는 무라카미 겐지가 있다.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를 시조로 하는 나카인류를 필두로 상류 귀족 지위를 유지했으며, 겐큐 7년의 정변에서 셋칸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서 남조를 지휘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 메이지 정부의 중진이 된 이와쿠라 토모미를 배출했다. 이 외에 우다 겐지, 세이와 겐지, 가잔 겐지 등 일부 가계도 도쇼가(堂上家)로서 존속하고 있다.
같은 겐지라도 구게(公卿, 귀족)로서 번영한 계통이나 무사나 신관이 되는 계통이 나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정세나 신적강하 당시 생모의 세력 및 신분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천황의 친아들이 신적강하하는 것은 "1세의 겐지"라 하여 임관 후에도 크게 우대를 받았지만, 황손에서 신적강하한 '2세 겐지'는 1세 겐지보다 가계적으로 불리했다.
헤이안 시대 후기 이후 황위 계승과는 관계없는 황자나 황녀는 신적강하 대신 승려로 출가하는 관례가 생겨나면서 사성 겐지는 거의 끊어졌고, 에도 시대의 히로하타 가문(広幡家)을 마지막으로 미나모토 씨 사여는 영영 끊어졌다.[1]
4. 1. 무가 겐지
황족이 신적강하(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되는 것)할 때 "겐"의 사성을 받은 것으로, 사가 천황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가 겐지나 세이와 천황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이와 겐지에서 에도 시대에 성립된 오기마치 겐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21개의 계통(21류)이 있다고 여겨진다.
겐지의 자손 일부는 수령·재청관인이 되어 토착하여 무사화했다. 특히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후손인 가와치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배출했다. 또한, 가와치 겐지의 흐름을 잇는 유력 씨족 아시카가 씨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열면서 무가의 맹주로 인식되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미카와마츠다이라 씨 등도 가와치 겐지 후예를 칭하고 있다.
겐지의 후예 중, 수령이나 재청관인으로서 토착하여 무사단을 형성한 자들을 무가 겐지라고 부른다. 특히 세이와 겐지가 그 대표이며, 겐페이 전쟁 등, 세이와 겐지를 겐지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덴교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고, 그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는 친주후 쇼군이 되었으며, 그 후예는 셋쓰 겐지, 야마토 겐지, 가와치 겐지로 나뉘었다. 가와치 국을 본거지로 한 가와치 겐지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하치만 타로 요시이에)를 배출하여, 셋칸가의 가신으로서 중앙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수령에도 임명되는 무가 귀족이 되었다. 1180년에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전쟁)이 일어나, 가와치 겐지의 맹주였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5년 정도 걸려 헤이시를 멸망시키고 동일본을 정복하게 되었다. 1192년,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에 최초의 막부(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3] 이후 가와치 겐지는 "무가의 맹주"로 여겨지며, 이시카와 겐지(이시카와 씨), 가이 겐지(다케다 씨), 히타치 겐지(사타케 씨), 시모쓰케 겐지(아시카가 씨), 고즈케 겐지(닛타 씨) 등이 분파되었다. 셋쓰 국을 본거지로 한 셋쓰 겐지에서는 다다 겐지, 미노 겐지 등이 분파되었다. 아시카가 씨는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고, 호소카와 씨・하타케야마 씨・야마나 씨 등은 큰 세력을 자랑했다. 전국 시대에는 아시카가 씨 분가의 가계는 거의 쇠퇴했지만, 세이와 겐지 닛타류를 칭하는 도쿠가와 씨가 에도 막부를 열고, 시마즈 씨・호소카와 씨・사타케 씨 등은 다이묘로서 존속했다.
사가 겐지의 미나모토노 도루를 시조로 하는 "융류 사가 겐지"는, 셋쓰 국을 기반으로 한 와타나베 씨와 그 분류인 마쓰우라 씨 등을 배출했다. 우다 겐지 중에서 무가로서 오미 국을 기반으로 한 계통은 오미 겐지(사사키 씨)라고 칭해졌고, 사사키 도요가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이 되기도 하여, 롯카쿠 씨・교고쿠 씨는 슈고로서 세력을 구축했다.
4. 2. 공가 겐지
무라카미 천황의 자손인 무라카미 겐지는 상류 귀족 지위를 유지했으며, 미나모토노 모로후사(나카인류)는 겐큐 7년의 정변에서 셋칸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었다.[1]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 남조를 지휘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와 메이지 정부의 중진 이와쿠라 토모미를 배출했다. 이 외에 우다 겐지, 세이와 겐지, 카잔 겐지 등 일부 가계도 도쇼가로서 존속했다.[1]
무라카미 천황의 제7 황자 구헤이 친왕의 아들이자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양자가 된 우다이진(右大臣) 미나모토노 모로후사의 자손은 다수의 공경을 배출하여 번성했다. 모로후사의 아들 미나모토노 도시후사와 미나모토노 아키후사 형제는 각각 사다이진(左大臣)과 우다이진(右大臣)으로 승진했다. 도시후사 계열도 인세이 시대까지 공경을 배출했지만, 이후 쇠퇴했다. 아키후사의 적자 미나모토노 마사자네는 겐지 출신으로 최초의 다이죠 다이진(太政大臣)이 되었고, 그 자손들은 수많은 대신을 배출하여 무라카미 겐지의 적류가 되었으며, 특히 헤이안 시대 말기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유명하다. 무로마치 시대에 아시카가 쇼군가에게 빼앗길 때까지 겐지 쵸자(源氏長者)는 무라카미 겐지가 독점했다. 마사자네 계열에서는 세이카가(清華家) 중 하나인 구게가를 비롯하여 다수의 도쇼가(堂上家)가 분립되었고, 메이지 유신까지 도쇼 공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1]
도쇼 공가로는 구게가 (세이카가), 나카인가 (다이진가(大臣家)), 로쿠조가 (우리인가(羽林家)), 이와쿠라가 (우리인가), 치구사가 (우리인가), 구제가 (우리인가), 히가시쿠제가 (우리인가), 바이케이 (우리인가), 아타고가 (우리인가), 우에마쓰가 (우리인가)가 있으며[1], 씨족으로는 기타바타케 씨 등이 있다.[1]
'''무라카미 겐지(아키후사 계열) 가계도'''
{| class="wikitable"
|-
! 아키후사
|-
|마사자네 아키나카 마사토시 구니노부 노부마사 아키마사 마사카네 조카이 겐시 모로코 아키미치, 묘운 마사사다 타이켄몬인 호리카와 노리토시, 겐카이, 칸가 노부토키 나리아키 마사쓰나, 사다후사 마사미치 마사미치, 사다후사 공인 슌칸 아키노부 무네마사 미치치카 아키카네 무네무네, 미치토모, 미쓰미쓰, 사다미치, 미치카타, 도겐
|}
참조
[2]
서적
律令制と日本古代国家
同成社
2018
[3]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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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宰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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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野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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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務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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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部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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従四位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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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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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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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幡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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従五位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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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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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ノ所謂淸和源氏ハ陽成源氏ニ非サル考-源朝臣經基の出自をめぐつて-
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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