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코묘 천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코묘 천황은 고미즈노 천황의 넷째 아들로, 1643년 11세의 나이에 이복 누나 메이쇼 천황으로부터 양위받아 즉위한 일본의 천황이다.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치세에 재위했으며, 반막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유학을 장려하고, 조정 의례 부활에 힘썼으나, 1654년 천연두로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미즈노오 천황의 자녀 - 메이쇼 천황
메이쇼 천황은 1629년 즉위하여 1643년 퇴위한 일본의 109대 천황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진, 조선 사절 방문, 시마바라의 난 등의 사건을 겪었고, 1696년 사망했다. - 고미즈노오 천황의 자녀 - 레이겐 천황
레이겐 천황은 에도 시대의 제112대 일본 천황으로, 고사이 천황으로부터 양위받아 즉위하여 황실 재흥을 목표로 하였으며 히가시야마 천황에게 양위 후 법황이 되었다. - 17세기 일본의 군주 - 고미즈노오 천황
고미즈노오 천황은 1596년에 태어나 1611년 즉위하여 1629년 양위한 일본의 108대 천황으로, 막부의 통제 속에서 권위 실추를 겪었으며 도후쿠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고 저서를 남겼다. - 17세기 일본의 군주 - 히가시야마 천황
히가시야마 천황은 레이겐 천황의 아들로 1687년부터 1709년까지 재위하며 겐로쿠 문화의 전성기와 조정과 막부의 원만한 관계, 황실 재정 안정 등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후 천연두로 사망했다. - 에도 시대의 천황 - 고미즈노오 천황
고미즈노오 천황은 1596년에 태어나 1611년 즉위하여 1629년 양위한 일본의 108대 천황으로, 막부의 통제 속에서 권위 실추를 겪었으며 도후쿠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고 저서를 남겼다. - 에도 시대의 천황 - 히가시야마 천황
히가시야마 천황은 레이겐 천황의 아들로 1687년부터 1709년까지 재위하며 겐로쿠 문화의 전성기와 조정과 막부의 원만한 관계, 황실 재정 안정 등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후 천연두로 사망했다.
고코묘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휘 | 쇼닌(紹仁) |
칭호 | 소가노미야(素鵞宮) |
추호 | 고코묘인(後光明院) 또는 고코묘 천황(後光明天皇) |
재위 기간 | 1643년 11월 14일 ~ 1654년 10월 30일 |
일본식 재위 기간 | 간에이 20년 10월 3일 ~ 쇼오 3년 9월 20일 |
즉위례 | 1643년 12월 2일 (간에이 20년 10월 21일) |
출생일 | 1633년 4월 20일 |
일본식 출생일 | 간에이 10년 3월 12일 |
사망일 | 1654년 10월 30일 |
일본식 사망일 | 쇼오 3년 9월 20일 |
능묘 | 쓰키노와노미사사기(月輪陵) |
정치 | |
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
섭정 | 니조 야스미치 → 구조 미치후사 → 이치조 아키요시 |
간파쿠 | 이치조 아키요시 → 고노에 히사쓰구 → 니조 미쓰히라 |
가계 | |
아버지 | 고미즈노오 천황 |
어머니 | 소노 미쓰코 |
배우자 | 니와타 히데코 |
자녀 | 다카코 내친왕 (레이세이몬인) |
기타 | |
칭호 | 레이세이몬인 |
2. 약력
고코묘 천황은 고미즈노 천황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노 모토타다(園基任, 후지와라노 모토타다)의 딸인 소노 미쓰코(園光子)이다.[23] 1633년 3월 12일에 태어나, 1642년 9월 2일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12월 15일에 친왕선하를 받았다.[23] 1643년 10월 3일, 11세의 나이로 이복 누나 메이쇼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23]
고코묘 천황의 재위 기간은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서 4대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치세와 겹친다. 도쿠가와 마사코(德川和子)가 천황의 양모였기에 쇼군 가문과는 형식적으로 외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천황은 반막부적 태도를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23]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고코묘 천황은 유학과 한학을 존중하였다. 처음에는 후시하라 가타타다(伏原賢忠)에게서 《주역》을 배웠고, 이후 성리학에 경도되어 아사야마 쇼신(朝山素心)에게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23] 1651년 9월에는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공적을 칭송하며 그의 문집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23] 이는 서민의 글에 천황이 직접 서문을 쓴 최초의 사례였다.[23] 한편, 와카나 일본 고전은 유약하다며 깔보았다고 전해진다.[23]
고코묘 천황은 재위 중 조정 의례 부활에 힘썼다. 1646년에는 이세 신궁에 폐백을 바치는 의식을 부활시켰고, 유교적 의식인 석전(釈奠)과 궁중의 대학료(大学寮)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으며, 복제 개혁에도 뜻을 보였으나, 이른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23]
1654년 9월 20일, 고코묘 천황은 천연두로 인해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3][6] 사망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으며, 막내동생 아테노미야(훗날의 레이겐 천황)를 양자로 삼을 뜻을 보였다.[24] 고코묘 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막부에 의한 독살설을 낳기도 했다.[23]
고코묘 천황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쓰키노와노 미사사기에 안치되어 있다.[11]
- '''1633년''' 4월 20일: 훗날 고코묘 천황이 되는 황태자가 탄생했다.[8]
- '''1645년''' (쇼호 2년, 4월 23일): 쇼군이 사다이진으로 승격되었다.[5]
- '''1649년''' (게이안 2년, 2월 20일): 에도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5]
- '''1651년''' (게이안 4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쇼군으로 선포되었다.[5]
- '''1652년''' (게이안 5년, 5월): 사카이 다다카쓰의 후원으로 니혼 오다이 이치란이 교토에서 처음 출판되었다.[5]
- '''1653년''' (조오 2년, 8월 12일): 화재로 황궁과 인근 사찰이 파괴되었다.[5]
- '''1654년''' (조오 3년, 7월 6일): 불교 승려 인겐이 중국에서 나가사키에 도착했다.[5]
3. 생애
고코묘 천황은 고미즈노 천황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곤노다이나곤 소노 모토타다(후지와라노 모토타다)의 딸이자 미부노인(壬生院)의 원호를 받은 젠시(典侍) 소노 미쓰코(1602년~1636년)이다.[23] 간에이 10년(1633년) 3월 12일에 태어나,[8] 1642년 9월 2일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2월 15일에 친왕선하를 받았다. 1643년 10월 3일, 11세의 나이로 이복 누나 메이쇼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7][9]
고코묘 천황의 재위는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서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치세와 겹친다. 도후쿠몬인(東福門院) 도쿠가와 마사코가 천황의 양모였기에 쇼군 도쿠가와 집안과는 형식적으로나마 외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황은 반막부적 태도가 강한 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다.[23]
격렬한 성격에 검술을 좋아했던 한편으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유학과 한학을 존중하였다. 처음에는 명경가(明経家)로 알려진 후시하라 가타타다에게서 《주역》을 배웠고, 뒤에 성리학에 경도되어 니조 야스미치의 추천으로 민간에서 불려온 아사야마 쇼신에게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게이안 4년(1651년) 9월에는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공적을 칭송하며 그의 문집에 몸소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는 일개 서민에 불과한 후지와라 세이카의 글에 천황이 직접 서문을 지어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또한 한시문(漢詩文) 짓기도 좋아해 한시집 《봉제집》(鳳啼集)을 남기기도 했다.
와카나 《이세 이야기》, 《겐지모노가타리》 같은 일본의 고전을 유약하다며 깔보았다고 하는데, 재위 중에는 조정의 의례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뜻을 강하게 비치며 쇼호 3년(1646년)에 이세 신궁에 폐백 바치는 의식을 부활시켰다. 유교적 의식인 석전(釈奠)이나 궁중의 대학료(大学寮)를 다시 일으켰고, 복제(服制) 개혁에도 뜻을 보였으나, 모두 천황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1645년 쇼군은 ''사다이진''의 지위로 승격되었고,[5] 1649년에는 에도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5] 1651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쇼군으로 선포되었으며,[5] 1652년에는 니혼 오다이 이치란이 와카사국오바마 번의 영주인 다이로 사카이 다다카쓰의 후원으로 교토에서 처음 출판되었다.[5] 1653년에는 격렬한 화재로 황궁의 상당 부분과 인근의 많은 사찰이 파괴되었다.[5] 1654년에는 불교 승려 인겐이 중국에서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일본 불교의 관행을 개혁하고자 하였다.[5]
재위 12년 만인 조오 3년(1654년) 9월 20일, 천연두로 인해 22세로 사망하였다.[6][8] 다음 달 15일에 고코묘인(後光明院)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10] 평소 보였던 반막부적 태도나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막부에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23] 이미 사망 전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던 고코묘 천황은 막내동생 아테노미야(훗날의 레이겐 천황)가 태어나자마자 만일에 대비해 그를 양자로 삼을 뜻을 보였다. 구게 나카미카도 노부즈미의 일기 《센슌공기》에 따르면, 고토노 나이시를 통해 막부에서 파견되어 있던 긴리즈키 다카키 모리히사와 상담하자 다카키는 쇼군(이에쓰나)은 "천황께서 잘 알아서 하실 일"이라며 막부에 칙사를 보내는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회답했다고 한다.[24]
고코묘 천황은 교토시히가시야마구의 센뉴지에 있는 황실 능묘인 ''쓰키노와노 미사사기''에 안치되어 있다.[11]
4. 연호
고코묘 천황의 치세는 하나 이상의 연호(''넨고'')로 더 구체적으로 식별된다.[5]
5. 평가
고코묘 천황은 유학에 경도되어 전례를 중요시하며 조참 부흥을 목표로 했다. 무예를 배우는 등 격렬하고 직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반 막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도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특히 유학과 한학을 존중하여 이를 장려했다. 처음에는 명경가인 후시하라 겐츄에게서 『주역』을 전수받고, 후에 주자학파에 경도되자, 니조 야스미치의 추천으로 민간인인 아사야마 소신을 초빙하여 진강을 받았다.
게이안 4년 (1651년) 9월에는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공적을 기려 그의 문집에 칙서를 내렸다. 천황이 서민의 서에 서문을 하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한시문의 시 짓기를 좋아하여 어집(御集)에 『봉제집(鳳啼集)』이 있다. 와카나 『이세 이야기』, 『겐지 이야기』 등의 고전을 유약하다고 배척하는 풍조도 있었지만, 재위 중에는 조참 부흥에 마음을 쏟았으며 쇼호 3년 (1646년)에 신궁 례폐의 의식을 부흥시켰다. 석전이나 대학료의 부흥, 복제의 개혁도 의도했지만, 이는 붕어(崩御)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6. 가족 관계
6. 1. 계보
고코묘 천황은 후궁인 젠시 고이치조노 쓰보네(小一条局) 니와타 히데코/庭田秀子일본어(미나모토노 히데코)에게서 제1황녀 다카코 내친왕(孝子內親王)을 얻었으나, 아들은 없었다. 다카코 내친왕은 1725년 8월 4일에 향년 75세로 사망하였으며, 사후 레이세이몬인(礼成門院)의 원호를 받았다.[6][12]고미즈노 천황의 넷째 아들로,[9] 어머니는 좌대신(사다이진)의 딸인 후지와라노 미쓰코였지만, 도후쿠몬인의 아들처럼 길러졌다.[9] 메이쇼 천황은 그의 이복 누나였다.[9]
고코묘 천황이 천황에 즉위하기 전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름'')은 쓰구히토/紹仁일본어였으며,[4] 즉위 전의 칭호는 스가노미야/素鵞宮일본어였다.[5]
7. 일화
고코묘 천황은 유교와 주자학에 심취하여 불교를 혐오하였으며, 삼종신기가 담긴 궤짝을 열어보고 불사리를 뜰에 내팽개쳤다는 일화가 《고코묘 천황외기》(後光明天皇外記)에 전해진다.[21] 또한 와카와 《겐지모노가타리》를 조정 쇠퇴의 원인으로 여겨 멀리했으나, 한시는 즐겨 지었다.[16][17]
격렬한 성격으로 평소 검술을 즐겼으며, 술을 좋아하여 구게 도쿠다이지 기미노부(徳大寺公信)가 간언하자 검을 빼들었으나, 이후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고 기미노부에게 검을 하사하며 술을 끊겠다고 약속했다.[28][20]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이타쿠라 시게무네(板倉重宗)가 천황의 검술을 만류하며 할복하겠다고 하자, 천황은 나덴(南殿) 앞에 단을 쌓아 할복하라고 명하기도 했다.[25][15]
아버지 고미즈노인이 병에 걸렸을 때, 교토 쇼시다이 시게무네가 궁 밖 행차는 막부에 고해야 한다며 문안을 막자, 천황은 황궁 남동쪽 모퉁이에서 인노고쇼(院御所) 북서쪽 모퉁이까지 높은 회랑을 짓게 하고 "궁 안에서의 행차는 늘 있는 것이니 막부에 고할 필요 없다"며 회랑을 통해 문안을 가기도 했다.[19]
8. 사후
고코묘 천황의 능(미사사기)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 이즈미야마정에 있는 센뉴지 내의 '''월륜릉(つきのわのみささぎ)'''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상의 형식은 석조 구중탑이다.
조오 3년(1654년) 9월 25일 입관하였고, 10월 15일 센뉴지에서 봉장되었다. 능은 석조 구중탑이다. 이 대장례 때, 금중에 출입하던 생선 가게 오쿠 하치베에의 진언에 의해, 종래의 화장(다비)을 고쳐 토장의 제도를 채용했다. 그 후, 쇼와 천황에 이르기까지, 역대 천황은 토장되었다.
또한 황거에서는, 황령전 (궁중삼전의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영이 모셔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Imperial Household Agency
http://www.kunaicho.[...]
[2]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4]
서적
[5]
서적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서적
https://books.google[...]
[8]
서적
Japans Kaiserhof in der Edo-Zeit
https://books.google[...]
1999
[9]
서적
[10]
서적
https://books.google[...]
[1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12]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13]
문서
宣順公記
承応3年10月17日
[14]
서적
鳩巣小説
1715-05-06
[15]
서적
尚斎先生雑談録
[16]
서적
鳩巣小説
[17]
서적
漢詩人 大正天皇 - その風雅の心
[18]
문서
槐記
1722-08-09
[19]
문서
槐記
1722-09-12
[20]
문서
承応遺事
[21]
문서
後光明天皇外記
[22]
뉴스
歴代の天皇、3分の1は火葬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3-11-15
[23]
서적
규소소세쓰
1715-05-06
[24]
문서
센슌공기
承応3年10月17日
[25]
서적
쇼사이 선생 잡담록
[26]
서적
규소소세쓰
[27]
문서
가이키
1722-08-09
[28]
문서
조오유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