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김동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김동조는 1918년 부산에서 태어나 규슈 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외무부 차관,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 외무부 장관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04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언양 김씨 - 김취려
    김취려는 고려 시대 음관 출신 무신으로, 거란족 침입 격퇴와 반란 평정 등의 공을 세워 판병부사 시중에 이르렀고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계략으로 전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 언양 김씨 - 김천일
    김천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성 수복에 기여한 의병장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열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일본 주재 대한민국 공사 - 신성모
    신성모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군인으로, 임시정부 군사위원,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후 독립운동, 중국 해군 복무, 광복군 활동, 해방 후 대한청년단, 내무부 및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 일본 주재 대한민국 공사 - 이동환 (1916년)
    이동환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 외교관으로, 체신부 우정국장, 서울특별시 내무국장, 내무부 차관,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주오스트레일리아 대한민국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991년에 사망했다.
  • 대한민국의 외무부 차관 - 노재원
    노재원은 1954년 고등고시 합격 후 외무부에서 다양한 요직을 거쳐 주영국 참사관, 주이란 및 주쿠웨이트 대사를 지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활동 경력이 있지만, 외무부 차관, 주캐나다 대사, 초대 주중국 대사를 역임하며 한중 관계 발전에 기여한 외교관이다.
  • 대한민국의 외무부 차관 - 최규하
    최규하는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2·12 군사 반란 등으로 신군부에 권력을 내주고 하야하였으며 재임 기간 실권이 거의 없었다.
김동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동조
한글김동조
한자金東祚
히라가나きん・とうそ
가타카나キム・ドンジョ
인물 정보
국적대한민국
출생일1918년 8월 14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사망일2004년 12월 9일
직업외교관, 정치인
가족 관계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장인정보 없음
학력
학력정보 없음
경력
경력정보 없음
군 복무
군 복무정보 없음
종교
종교정보 없음
정당
정당정보 없음
수상
상훈정보 없음
웹사이트
웹사이트정보 없음

2. 생애

김동조는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을 거쳐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1960년 2월, 한국 정부는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남베트남 등 5개국에 김동조를 단장으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에는 차균희 부흥부 경제계획관, 최광수 외무부 삼등서기관이 포함되었다.[11] 1960년 2월 23일, 친선사절단은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발표했다.[12]

1965년, 재일거류민단, 상공인연합회, 부인회는 공동명의로 김동조 대사의 경질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965년 10월 26일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재일교포와의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고, 이동원 외무부장관도 김동조 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김동조 대사가 교포 보호에 소홀하고, 본부 훈령에 충실하지 못하며, 특정 재벌을 편애한다는 이유로 정부에 해임을 건의했다.[13]

1965년 12월 18일, 한일기본조약 비준서 교환식에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14] 이후 한국 정부가 김동조를 주일 대사로 내정하자, 1965년 12월 23일,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김동조 대사 임명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15][16] 그러나 1965년 12월 24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김동조 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17] 1966년 1월 14일, 주일 초대 대사로 임명된 김동조는 일본 일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18]

1967년 9월 16일, 주미 대사로 임명되었고,[19] 같은 해 11월 9일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20]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75년 3월 초에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와 아마드 리라우덴 외무장관을 만났다.[21]

1966년에는 삼성물산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8] 사사고 가쓰야에 따르면, 김동조는 삼성그룹 대표 이병철의 사병으로 여겨졌으며, 미쓰이물산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협상 과정에서 김동조의 의뢰를 받아 주일 한국 대사 공저를 제공했다. 이 건물은 미쓰이 부동산이 관리하던 산요 특수 제강 (1965년 도산) 도쿄 기숙사였으며, 한국은 1973년경에 1.9억을 지불했다.[9]

이후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고 1981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8년 8월 14일 경상남도 김해군 좌부면 부원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자료에는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중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동환 전 내무차관은 고등상업학교 동기이다.[5]

2. 2. 일제 강점기 활동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한국현대사》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사례로 기술하였다.[22] 191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중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이동환 전 내무차관은 고등상업학교 동기이다. 일본 후생성 보험국, 일본 내무성 산하 교토부 부청 내무국 지방과 및 경찰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5]

주일 대사 부임 당시 신임장 제정식을 위해 황거에 갔을 때, 외무성의전장이었던 후지야마 나라카즈는 김동조에게 "당신은 규슈 제대 출신이니까 일본어로 하겠죠"라고 말했다. 이에 김동조는 "아니요, 저는 영어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제정 후 쇼와 천황과 나눈 대화에서 김동조는 일본어로 "폐하, 조금 더 한국의 을 사주십시오"라는 엉뚱한 주문을 하기도 했다.[6][7]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경력을 들어 김동조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2. 3. 외교관 활동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을 거쳐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1960년 2월, 한국 정부는 동남아 각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남베트남 등 5개국에 김동조를 단장으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친선사절단은 단장 외에 차균희 부흥부 경제계획관, 최광수 외무부 삼등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11] 1960년 2월 23일, 친선사절단은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발표하였다.[12]

1965년 6월, 재일거류민단, 상공인연합회, 부인회는 공동명의로 김동원 대사를 경질해달라고 국회에 진정서를 보냈다. 1965년 10월 26일, 외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그 후 재일교포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교포와 재일교포 사이의 오해에 기인했던 것이고, 그 후 그 오해는 풀렸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김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치 아니한 점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위원장 김동환을 비롯하여 공화당의 변종봉, 민병기, 박현숙, 박준규, 이만섭 의원, 야당의 나용균, 유진산, 강문봉 의원은 위 진정서를 검토한 결과, 김대사가 (1) 교포보호에 소흘하고 (2) 본부의 훈령에 충실치 못하며 (3)특정 재벌을 편애하므로 정부가 김대사를 될수록 조속한 시일 안에 해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정부에 건의하였다.[13]

1965년 12월 18일,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로서 중앙청 제1회의실에 참석했다.[14] 1965년 12월 말, 한국 정부가 주일 대사에 김동조를 내정하자, 12월 23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외무위가 만장일치로 그 해임을 건의했으며 재일교포단체에서도 소환을 건의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를 재임명할 수 있는가"를 추궁했다.[15][16] 그러나, 12월 24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정식으로 김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17] 1966년 1월 14일, 주일 초대 대사 김동조는 일본 일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18]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주 일본 대사를 지냈다.

1967년 9월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김동조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여,[19] 김동조는 1967년 11월 9일,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20]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주 미국 대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외무부장관으로서 김동조는 1975년 3월 초,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와 아마드 리라우덴 외무장관을 만났다.[21]

250px


주일 대사로 부임했을 때, 신임장 제정식을 위해 황거에 갔을 때 외무성의전장이었던 후지야마 나라카즈는 김동조에게 "당신은 규슈 제대 출신이니까 일본어로 하겠죠"라고 말하자, 김동조는 "아니요, 저는 영어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제정이 끝나고 쇼와 천황은 김동조와 대화를 나누었다. 김동조는 일본어로 "폐하, 조금 더 한국의 을 사주십시오"라고 엉뚱한 주문을 했다.[6][7]

부임 다음 해인 1966년, 삼성물산에 의한 한국으로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다.[8] 사사고 가쓰야에 따르면, 김동조는 삼성그룹 대표자(당시)인 이병철의 사병으로 여겨졌으며, 미쓰이물산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협상 과정에서 김동조의 의뢰를 받아 주일 한국 대사 공저를 제공했다. 이것은 미쓰이 부동산이 관리하던 산요 특수 제강 (1965년 도산) 도쿄 기숙사였으며, 한국은 이 대금을 1973년경에 지불했다. 가격은 1.9억이었다.[9]

2. 4. 기업인 및 변호사 활동

1943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한국현대사》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사례로 기술하였다.[22] 일본 후생성|일본어 보험국과 일본 내무성|일본어 산하 교토부 부청 내무국 지방과 및 경찰국에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시켰다.[22]

2. 5. 사망

2004년한국어 12월 9일 숙환으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2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일활동 사항
아내송두만1922년
장녀김영애1945년모건스탠리 부사장. 최융호(1943년~, 제너럴 마리타임 사장)와 결혼.
차녀김영숙1947년손원일의 장남 손명원(1941년~, 현대미포조선·쌍용자동차 사장, 스카이웍스솔루션코리아 고문)과 결혼. 김영숙의 딸은 손정희, 사위는 홍정욱.
장남김대영1948년해오실업 사장. 박봉인(1953년~)과 결혼.
삼녀김영자(金寧慈)1950년 6월 20일허정구의 셋째 아들 허광수(1946년~, 전 GS칼텍스정유 부회장, 현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와 결혼. 첫째 딸 허유정(1974년~)은 방상훈의 아들 방준오(1974년~)와 동명이인과 결혼.
차남김민영1958년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정다미와 결혼.
사녀김영명1959년 9월 13일정몽준과 결혼.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


4. 비판 및 논란

김동조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1966년 삼성물산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8][22]

4. 1. 친일 행적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한국현대사》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사례로 기술하였다.[22] 김동조는 일본 후생성 보험국과 일본 내무성 산하 교토부 부청 내무국 지방과 및 경찰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4. 2.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연루 의혹

1966년 삼성물산이 한국으로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에 김동조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8]。 사사고 가쓰야에 따르면, 김동조는 당시 삼성그룹 대표였던 이병철의 사병처럼 여겨졌으며, 미쓰이물산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협상 과정에서 김동조의 의뢰로 주일 한국 대사 공저를 제공했다. 이 공저는 미쓰이 부동산이 관리하던 산요 특수 제강(1965년 도산)의 도쿄 기숙사였으며, 한국은 1973년경에 이 대금을 지불했다. 가격은 1.9억이었다[9]

5. 평가

1965년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에 대한민국 측 대표로 참여하여 관계 문서에 서명했다.[4] 주일 대사 부임 시절 신임장 제정식에서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답한 일화가 있다. 제정 이후 쇼와 천황에게 한국 을 더 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6][7]

1966년 삼성물산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다.[8]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사병으로 여겨졌으며, 미쓰이물산은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 김동조의 의뢰를 받아 주일 한국 대사 공저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다.[9]

참조

[1] 뉴스 ‘한국외교 산증인’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별세 http://www.hani.co.k[...] 한겨레 2004-12-09
[2] 웹사이트 정몽준 가계도/연애결혼… 김동조 前외무가 장인 https://www.hankooki[...] 2002-09-19
[3] 웹사이트 [CEO스코어TV]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가계도로 본 재계 혼맥 https://www.ceoscore[...] 2019-06-28
[4] 뉴스 日韓条約・協定に調印 中日新聞 1965-06-23
[5] 간행물 「帝国」の大学に学んだ朝鮮人学生 https://catalog.lib.[...]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6] 서적 陛下の御質問 昭和天皇と戦後政治 徳間文庫
[7] 웹사이트 戦後日韓経済関係の形成における両国財界人の役割 - https://web.archive.[...] 日韓文化
[8] 서적 実録 日本汚職史 ちくま文庫
[9] 서적 政治資金 吸収マシーンのからくり 現代教養文庫
[10] 뉴스 ‘한국외교 산증인’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별세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4-12-09
[11] 뉴스 團長에金東祚氏 동아일보 1960-02-12
[12] 뉴스 外交使節을 交換... 韓國․馬來兩國間 合意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60-02-24
[13] 뉴스 金大使解任건의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5-10-26
[14] 뉴스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5-12-18
[15] 뉴스 獨島領有權따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5-12-23
[16] 뉴스 어떻게對處할것인가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5-12-23
[17] 뉴스 金東祚大使任命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5-12-25
[18] 뉴스 日誌1年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6-12-17
[19] 뉴스 12國大使任命의결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7-09-16
[20] 뉴스 金東祚 駐美大使 존슨에信任狀제정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7-11-10
[21] 뉴스 金外務 말聯에 도착...오늘 라자크와 會談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5-03-04
[22] 뉴스 정몽준 장인 김동조 전 외무장관 ‘친일전력’ 논란 http://ilyosisa.co.k[...] 일요시사 2002-09-30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