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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19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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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순덕은 1921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피해를 입은 생존자이다. 1937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위안소에서 3년간 생활했으며, 1940년 귀향 후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나, 위안부 피해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1992년부터 나눔의 집에 거주하며 예술 치료를 통해 그림을 그렸고, 2004년 사망했다. 그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예술 작품을 통해 피해를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다. 그의 그림 《못다핀 꽃》은 소녀상에 영감을 주었으며, 작품들은 국가기록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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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192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인 정보
이름김순덕
원어 이름金順德
출생일1921년 5월 26일
출생지경상남도 의령군
사망일2004년 6월 30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국적대한민국
사회 활동
관련 활동수요집회
경력나눔의집

2. 생애

김순덕은 1921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고 2004년 사망하기까지의 생애를 다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가난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겪은 고통과 해방 이후의 삶, 나눔의 집에서의 생활과 예술 활동 등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다.

1940년 4월경 합천군 삼가면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온 김순덕은 서울로 상경한 후에도 일본군 장교 이즈미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6·25 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었다.[13] 이후 서울에서 대한민국 철도청 직원과 결혼하여 아들 넷을 낳았으나 한 명은 사망하였다.[19] 가방 공장이나 구멍 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 등에 시달렸다.[13][18]

1992년부터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며 예술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렸고, 《못다핀 꽃》, 《끌려감》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18] 2004년 6월 30일, 수요집회가 열리던 수요일 아침 서울아산병원에서 사망하였다.[13]

2. 1. 어린 시절과 위안부 피해

1921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서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16][17] 아버지는 어렸을 때 사망하였다. 상투를 자르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요구를 거부한 아버지 때문에, 지리산 자락의 산청군 삼장면이나 합천군 삼가면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13][19] 열두 살 때부터 어머니와 네 남매의 생계를 위해 가정부로 일했다.[15]

1937년, 김순덕은 자신을 일본으로 보내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남자의 말에 속아[16][19] 30여 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갔다.[15][16] 그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했고, 이후 난징을 거쳐 1940년까지 3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20]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김순덕은 똑똑하고 외모도 준수했다.[21] 난징에서는 고위 장교들을 상대하기 위해 차를 타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50대 일본군 고위 장교인 이즈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아버지, 남편, 가족처럼 의지하게 되었다.[13][15] 1940년경 이즈미의 도움으로 다른 여성 4명과 함께 위안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22] 이즈미는 현금 100JPY과 함께 기차 등에서 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귀향증을 만들어 주었다.[13][15]

2. 2. 일본군 장교와의 만남과 귀향

김순덕은 난징에서 일본군 고위 장교들을 상대하기 위해 차를 타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50대 일본군 고위 장교인 이즈미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아버지이자 남편, 가족처럼 의지하게 되었다.[13][15] 1940년경 이즈미의 도움과 관심 덕분에 다른 여성 4명과 함께 위안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22] 이즈미는 현금 100JPY과 함께 기차 등에서 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귀향증을 만들어 주었다.[13][15] 1940년 4월경 합천군 삼가면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왔다.[13]

서울로 상경한 후에도 이즈미와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으나, 6·25 전쟁 중 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13]

2. 3. 해방 이후의 삶

해방 후 김순덕은 서울에서 대한민국 철도청 직원이었던 남편과 만나 결혼하였다.[13] 아들 넷을 낳았으나 한 명은 사망하였다.[19] 가방 공장이나 구멍 가게에서 일하기도 하였으며,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 등의 지병에 시달렸다.[13][18]

서울로 이사한 후에도 이즈미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6·25 전쟁 중에 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13]

1992년부터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나눔의집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18] 예술 치료의 일환으로 그린 작품이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못다핀 꽃》, 《끌려감》 등이 있다.[18]

2004년 6월 30일, 수요집회가 열리던 수요일 아침 서울아산병원에서 사망하였다.[13]

2. 4. 나눔의 집 생활과 예술 활동

1992년부터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18] 예술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못다핀 꽃》, 《끌려감》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18]

1990년대 초, 생존한 '위안부'들은 임대 주택에서 함께 살았다. 불교 단체들은 1992년 나눔의 집을 설립하기 위해 기금을 모금했고, 김순덕은 친구 박두리와 함께 나눔의 집으로 이사했다. 박두리는 종종 김순덕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했다.[6] 1996년 2월, 나눔의 집은 주거 시설, 휴게실, 불교 사찰, 교육 및 훈련 활동, 그리고 1998년 8월에 개관한 최초의 "한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으로 구성된 새로운 공식 시설로 이전했다.[7]

3.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참여

김순덕은 199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활동하며 수요 시위에 참여하고, 해외 강연을 통해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예술 작품을 통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전쟁의 비극을 알리는 데 힘썼다.[9]

3. 1. 수요집회와 증언 활동

김순덕은 199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활동했으며, 정대협은 서울에서 매주 시위를 조직했다.[9] 그녀는 1992년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서울 주재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시위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다.[7] 김순덕은 증언과 예술 작품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식을 높이기 위해 해외 강연 투어를 다녔다.[9] 그녀와 강덕경은 '위안부'의 삶과 이야기를 묘사한 독특하고 생생한 그림으로 운동 초기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10]

2000년, 샌프란시스코 예술 위원회 갤러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에서 자신의 전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공유했다.

> 김순덕은 그들이 도착한 날, 비명과 혼란을 기억한다. "수천 명의 군인이 양쪽에 헌병을 세운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떤 소녀들은 기절했고, 그들은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

> 그 경험은 너무 끔찍해서 "나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김순덕은 말했으며, 나중에는 난징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녀는 내출혈로 병이 나 집으로 보내질 때까지 3년 동안 성 노예로 지냈다.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보고 싶은 강한 열망이 나를 버티게 했다."[11]

김순덕은 그녀의 예술 작품이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 [일본 정부에] 아직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죽고 고통을 받았다. 나의 가장 큰 메시지는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이다.[11]

나눔의 집에는 김순덕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다. 나눔의 집은 또한 그녀의 그림을 통해 대중에게 그녀의 경험을 알리는 투어를 조직한다. 그녀의 유명한 그림인 ''피지 못한 꽃''은 나눔의 집 부지 중앙에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12]

3. 2. 예술을 통한 피해 증언

김순덕은 199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활동했으며, 정대협은 서울에서 매주 시위를 조직했다.[9] 그녀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 시위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다.[7] 또한 증언과 예술 작품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식을 높이기 위해 해외 강연 투어를 다녔다.[9] 그녀와 강덕경은 '위안부'의 삶과 이야기를 묘사한 독특하고 생생한 그림으로 운동 초기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10]

2000년, 샌프란시스코 예술 위원회 갤러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에서 김순덕은 일본군이 도착한 날의 비명과 혼란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수천 명의 군인이 양쪽에 헌병을 세운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떤 소녀들은 기절했고, 그들은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김순덕은 그 경험이 너무 끔찍해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으며, 나중에는 난징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녀는 내출혈로 병이 나 집으로 보내질 때까지 3년 동안 성 노예로 지냈다.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보고 싶은 강한 열망이 나를 버티게 했다."[11] 김순덕은 그녀의 예술 작품이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촉구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이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죽고 고통을 받았다. 나의 가장 큰 메시지는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11]

나눔의 집에는 김순덕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다. 나눔의 집은 또한 그녀의 그림을 통해 대중에게 그녀의 경험을 알리는 투어를 조직한다. 그녀의 유명한 그림인 ''피지 못한 꽃''은 나눔의 집 부지 중앙에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12]

4. 사후

김순덕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사후 그의 작품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2013년 국가기록원은 김순덕의 그림을 포함한 여러 위안부 자료를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하였다.[23] 2020년에는 윤미향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에 대해 김순덕의 큰아들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24]

4. 1. 국가기록물 지정

2013년, 당시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김순덕의 그림을 포함한 여러 위안부 자료를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하였다.[23]

4. 2. 윤미향 논란에 대한 비판

2020년에 윤미향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이 발생하자, 김순덕의 큰아들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어머니와 다른 기가 센 할머니들 계셨으면 당장 쫓아가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라며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24]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지방에 있는 할머니들을 "낡은 봉고차"에 태워 수요집회에 참석하게 했다면서, 어머니가 "집회 갈 때 좋은 차, 관광버스 좀 타고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24] 또한,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한 것에 대해, 정대협의 사람들이 위선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4]

5. 영향과 유산

김순덕의 그림 〈끌려감〉은 2001년 가수 루이스의 헌정 음반 《Tribute to 위안부 할머니》 4번 트랙의 주제가 되었고,[25][26] 2016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있는 임옥상의 작품 《대지의 눈》에 벽화로 새겨졌으나,[27] 임옥상의 성추행 논란으로 2023년경 철거되었다.[28]

5. 1. 예술 작품을 통한 기억

2001년 가수 루이스가 발매한 헌정 음반 《Tribute to 위안부 할머니》의 4번 트랙 〈끌려감〉은 김순덕의 동명의 그림을 주제로 한 것이다.[25][26]

2016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에 개장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설치된 작품 중 하나인 《대지의 눈》에는 《끌려감》이 벽화로 새겨져 있었다.[27] 그러나 작가 임옥상의 성추행 논란으로 2023년경 서울시에 의해 다른 작품인 《세상의 배꼽》과 함께 철거되었다.[28]

김순덕은 자신의 예술 작품이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메시지를 보내는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11]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경험을 알리는 투어를 조직하기도 했다.[12]

나눔의 집에는 김순덕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으며, 그녀의 유명한 그림인 ''피지 못한 꽃''은 나눔의 집 부지 중앙에 서 있는 소녀상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12]

5. 2. 지속적인 추모와 계승

2001년 가수 루이스가 헌정 음반 《Tribute to 위안부 할머니》를 발매했고, 이 음반의 4번 트랙 〈끌려감〉은 김순덕의 동명 그림을 주제로 한 것이다.[25][26]

2016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개장되었고, 설치된 작품 중 하나인 임옥상의 《대지의 눈》에는 《끌려감》이 벽화로 새겨져 있었다.[27] 그러나 임옥상의 성추행 논란으로 인해 2023년경 서울시에서 《대지의 눈》은 다른 작품인 《세상의 배꼽》과 함께 철거되었다.[28]

6. 작품 목록

김순덕은 그림과 책을 출판했다.

6. 1. 책

김순덕은 2018년에 My Name Is Not Comfort Woman, I Am Kim Soon-deok|내 이름은 위안부가 아닙니다, 나는 김순덕입니다영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29]

6. 2. 그림


  • 《만남》(1995)[30]
  • 《못다핀 꽃》(1995)[31]
  • 《끌려감》(1995)[31]
  • 《버섯공출》(1995)[30][32]
  • 《씨앗공출》(1995)[30]
  • 《절에 가는 길(입춘대길)》[33]

참조

[1] 서적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서적 Hearts of Pine: Songs in the Lives of Three Korean Survivors of the Japanese "Comfort Women" Oxford University Press
[3] 뉴스 A Korean comfort woman and a Japanese officer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18-03-13
[4] 서적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웹사이트 ahorbinski {{!}} Book review: The Comfort Women https://ahorbinski.d[...] 2021-03-28
[6] 서적 Hearts of Pine: Songs in the Lives of Three Korean Survivors of the Japanese "Comfort Women" Ox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 서적 Hearts of Pine: Songs in the Lives of Three Korean Survivors of the Japanese "Comfort Women" Oxford University Press
[9] 뉴스 The NI Interview https://newint.org/f[...] New Internationalist 2018-03-13
[10] 서적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1] 웹사이트 The Worst of Times / The pain of Korean women forced into sexual slavery emanates from art show https://www.sfgate.c[...] 2021-03-28
[12] 서적 Hearts of Pine: Songs in the Lives of Three Korean Survivors of the Japanese "Comfort Women" Oxford University Press
[13] 웹인용 부고-김순덕(金順德)할머님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www.nanum.org[...] 나눔의집 2004-06-30
[14] 뉴스 (4) 엄마여서 미안해,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https://weekly.khan.[...] 주간경향 2019-11-04
[15] 서적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https://archive.org/[...]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6] 웹인용 김순덕 할머니 프로필 http://www.nanum.org[...] 나눔의집 2011-05-24
[17] 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 운명 https://vop.co.kr/A0[...] 민중의소리 2004-06-30
[18] 웹인용 김순덕 할머니 오늘 오후 별세 https://www.ohmynews[...] 2004-06-30
[19] 웹인용 2002년 (김순덕) 입으로만 용서해달라는 걸 바라는게 아니야 https://www.archive8[...]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02-12-27
[20] 웹인용 김순덕 https://archives.wom[...] 2024-12-27
[21] 뉴스 A Korean comfort woman and a Japanese officer https://www.koreatim[...] 코리아타임스 2018-03-13
[22] 웹인용 김순덕 https://archives.wom[...] 2024-12-27
[23] 뉴스 위안부 할머니 그림 영구보존 된다 https://www.hani.co.[...] 한겨레 2013-12-30
[24] 뉴스 김순덕 할머니 아들 “어머니 계셨다면 윤미향 멱살 잡을 것”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5-20
[25] 뉴스 위안부 할머니 위한 헌정 앨범 발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1-08-03
[26] 웹인용 앨범 소개 http://www.louis.co.[...] 2001
[27] 웹인용 '[여행에세이]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https://kyeol.kr/ko/[...] 2021-08-27
[28] 뉴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결국 사라졌다… 임옥상 작품 2점 철거 https://www.womennew[...] 여성신문 2023-09-05
[29] 뉴스 ‘내 이름은 위안부가 아닙니다, 나는 김순덕입니다’ https://www.kmib.co.[...] 국민일보 2018-08-08
[30] 웹인용 정홍원 총리, 3.1절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특별전」 관람 https://www.opm.go.k[...] 대한민국 국무총리비서실 2014-03-01
[31] 웹인용 제8호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https://theme.archiv[...] 2024-12-27
[32] 웹인용 버섯공출 https://story.asiae.[...] 2024-12-27
[33] 웹인용 절에 가는 길(입춘대길) https://story.asiae.[...]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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