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능통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능통은 오군 여항현 출신으로, 아버지 능조가 사망한 후 손권에게 발탁되어 군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산적 토벌, 하구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합비 전투에서 손권을 구출하는 공을 세워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능통은 산월족을 회유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28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충성심, 용감함, 의리를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감녕과 화해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년 출생 - 게타 (황제)
    게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이자 카라칼라의 동생으로, 공동 황제였으나 형과의 불화로 암살당하고 기억말살형을 당했다.
  • 189년 출생 - 제갈균
    제갈균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이자 제갈량의 동생으로, 형이 유비에게 등용될 때 촉한에 출사하여 장수교위를 지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그를 제갈량으로 착각하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 217년 사망 - 카라칼라
    카라칼라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로서 권력을 누렸으나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으며,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지만 폭정과 잔혹 행위로 암살당한 로마 황제이다.
  • 217년 사망 - 왕찬
    후한 말기의 문인이자 관료인 왕찬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기억력으로 이름을 떨치며 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 동오의 장군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동오의 장군 - 미방
    미방은 유비 휘하에서 활약하다 관우와의 불화로 손권에게 투항하여 오나라 장수가 되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항복하려다 처형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능통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능통
본관오군 여항
출생189년
사망217년 (29세)
사인병사
자(字)공적(公績)
관직
초기 관직별부사마
주요 관직승렬도위
교위
탕구중랑장 겸 패국상
편장군
소속
소속 세력후한
주군손권
가족 관계
아버지능조
자녀능렬
능봉
관련 전투
주요 전투강하 전투
남군 전투
소요진 전투
기타 정보
적대 인물감녕

2. 생애

능통은 오군 여항현(현재의 항저우시 위항구) 출신으로, 아버지 능조손책 휘하의 군사였다. 능조는 203년 하구 전투에서 황조의 부하 감녕에게 전사했다.[6] 손권은 능조의 헌신을 기려 15세의 능통을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하고, 아버지의 직위인 파적교위(破賊校尉)를 대행하게 했다.[7]

능통은 오나라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산적 토벌전에 참여하여 상관인 진근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으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죄를 사면받았다.[8][9] 208년, 손권의 강하군 공격에 선봉으로 참전하여 황조의 부하 장수 장삭을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고,[10] 이후 적벽 대전과 강릉 전투에 참전하여 교위(校尉)로 승진했다.[14][17]

그 후, 능통은 완현 공격과 유비와의 형주 영토 분쟁에 참여했다. 소요진 전투에서는 장료의 기습으로 위기에 처한 손권을 구출하고 중상을 입었으나, 손권의 간호로 살아남아 편장군(偏將軍)으로 진급했다.[20][24]

능통은 산월을 회유하는 정책을 제안하여 수만 명을 귀순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26] 그는 고향 방문길에 28세(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1] 손권은 장승에게 비문을 쓰도록 명령했다.[27]

2. 1. 아버지의 죽음과 복수

203년 하구 전투에서 아버지 능조감녕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35] 15세의 나이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다. 손권은 능조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을 기려 능통을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파적도위(破賊都尉)를 겸하게 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맡겼다.[7]

206년(건안 11년),[36] 손권을 따라 보둔(保屯)과 마둔(麻屯)의 산적을 토벌하였다. 손권이 보둔을 함락한 후, 능통은 장이 등과 함께 1만 명을 이끌고 마둔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전투 전날, 능통은 연회에서 진근의 무례함에 항의하다가 진근에게 욕설을 듣고, 심지어 아버지 능조까지 모욕당했다. 능통은 눈물을 흘리며 참았으나, 연회가 끝난 후에도 모욕이 이어지자 결국 진근을 칼로 상해했고, 진근은 며칠 후 사망했다. 능통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마둔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큰 승리를 거둔 후 자수했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죄를 사면했다.[8][9]

208년, 손권이 다시 강하를 공격했을 때, 능통은 동습과 함께 결사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황조의 장수 장석(張碩)을 베고 닻줄을 끊어 손권군의 승리에 기여했다.[37]

2. 2. 쌓이는 무공

208년, 손권은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우한시 신주 구 부근, 후베이성)의 황조를 다시 공격했다. 능통은 선봉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십 명의 측근만을 데리고 주력 부대보다 훨씬 앞서 배를 타고 나아가, 황조의 부하 장수인 장삭(張碩)을 죽이고 장삭의 선원들을 소규모 병력으로 모두 사로잡아 첫 번째 교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손권에게 보고하고 다시 적을 공격하여 육지와 물길 모두에서 진격했다.[10]

장삭이 죽고 1차 방어선이 붕괴된 것을 알게 된 황조는 그의 가장 큰 맹총 2척을 침몰시켜 면수의 요충지 입구를 막고, 그곳에 쇠뇌병을 배치하여 접근하는 적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또한, 황조는 강 옆 절벽 꼭대기에 강한 병사와 궁수를 매복시켜 돌과 불타는 잔해를 던지게 했다. 손권의 군대는 처음에는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능통과 동습은 100명의 "특공대"와 함께 갑옷을 두 겹으로 착용하고 절벽에서 쏟아지는 돌과 화살, 배에서 쏟아지는 총탄 세례에도 불구하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두 척의 배 사이의 연결을 끊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손권의 군대가 돌파하여 면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더욱이, 맹총의 파괴는 손권 군대의 투지를 자극했고, 다음 전투에서 여몽이 황조의 해군을 격파하는 동안 능통, 동습 등이 강하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승리했다. 손권은 능통을 승렬도위(承烈都尉)로 임명했다.[11][12]

같은 해 말, 북쪽의 군벌 조조는 중국 남부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유표의 뒤를 이어 형주의 자사가 된 유총을 압박하여 항복시켰다. 몇 달 후, 조조는 수많은 군함과 무기가 비축된 강릉현에 80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손권을 위협하여 저항을 포기하라고 사신을 보냈다.[13] 노숙주유가 손권을 설득한 후, 손권은 결국 조조와 전쟁을 벌이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이후 또 다른 군벌인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에 저항했다. 주유의 지휘하에 있던 능통은 적벽 대전에 참전했으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조조의 거대한 함대를 오림에서 대파했다.[14]

적벽 대전 이후, 주유는 남군(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 일대)을 공격하기 위해 손권의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곳은 조조의 장수 조인이 방어하고 있었다. 주유는 감녕을 보내 이릉(夷陵; 현재의 이창, 후베이성 일대)을 지키게 했으나, 조인은 나중에 부하들에게 이릉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감녕은 포위되었고, 주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며, 주유는 여몽의 계획에 따라 능통을 남겨 그들의 위치를 방어하게 하고, 주유와 다른 장수들이 감녕을 돕기 위해 증원군을 이끌었다.[15][16] 능통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약 10일 동안 홀로 적과 교전했지만,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내며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결국 조인은 남군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결과 남군은 손권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능통은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교위(校尉)로 승진했다.[17]

이후 능통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여몽, 감녕과 함께 완현(皖縣;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에 주둔한 조조의 병력을 공격했다. 그들은 점령에 성공했다. 그는 탕구중랑장(蕩寇中郎將)으로 승진했으며, 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215년, 능통은 여몽과 함께 유비의 세 군인 창사, 영릉, 계양을 점령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그들은 잃어버린 군을 되찾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하는 유비의 장군 관우가 이끄는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익양으로 돌아왔다.[18] 손권과 유비가 각각의 영토를 상강을 따라 형주를 나누기로 합의하면서 영토 분쟁은 결국 해결되었다.

2. 3. 손권 구출

합비 전투에서 손권이 철수하면서 소요진 북쪽에 가장 늦게까지 남았을 때, 장료 등이 기습하였다.[41] 능통은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난전 속으로 뛰어들어 손권을 구출하였다. 장료군이 교량마저 끊어놔서 손권은 어렵사리 그 잔해를 밟고 을 세차게 몰아 간신히 넘어갔다. 능통은 뒤를 지켜 수십 명을 죽였지만 자신도 좌우를 모두 잃고 심한 부상을 당했다. 손권이 안전해지자 갑옷을 입은 채 자맥질해서 돌아왔다. 배에 타고 있던 손권은 능통을 보고 놀라고도 기뻐하였다. 능통은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데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몹시 애통해했다. 손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며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데 공적은 아직 살아있으니 어찌 근심하겠소?”라고 위로했다. 그 후 편장군에 임명되고 병사를 배로 받았다.

215년, 손권유비에게 형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응하지 않았고, 여몽 등과 함께 형남 삼군(장사군·계양군·영릉군)을 공격했다.

이후 합비 전투에서 능통은 우부독이 되어 장료의 기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손권을 구출하기 위해, 복심 부하 300명을 이끌고 분전했다. 손권이 퇴각에 성공하는 것을 확인하자, 능통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적병 수십 명을 참살했다. 퇴각하려 했을 때 다리가 부서져 갑옷을 입은 채 헤엄쳐 돌아왔다. 손권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빈사 상태였던 능통을 정성껏 간호하게 했다. 능통은 부하가 모두 돌아오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손권은 자신의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공적(능통), 죽은 자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네가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라고 위로했다. 이 공로로 편장군으로 승진하고, 이전의 2배의 병력을 받았다.

2. 4. 산월 회유

능통은 한나라 시대 중국의 오월 지역에 뿌리를 둔 부족 집단인 산월을 다루기 위해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했다. 그는 손권이 순전히 군사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억압하는 대신 산월족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동화시키려고 시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만약 그들이 손권의 행정력의 위엄과 잠재적 보상에 감명받는다면, 산월족은 유혈 사태 없이 그들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추론했다.[26]

그는 필요할 때 현(縣)에서 물자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후, 화려한 무기와 갑옷을 갖춘 부대를 이끌고 그의 대규모 전술을 시작했다. 산월족은 손권의 군대가 이미 그들의 영토 깊숙이 진입한 것을 발견했을 때, 능통의 부대에 실제로 충격을 받았고, 능통이 나와 손권의 군대에 합류하면 상당한 보상이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능통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어 수만 명의 산월족이 집에서 나와 그에게 합류했다. 그는 그 후 10,000명의 건장한 남자를 선발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돌아왔다.[26]

이 무렵 오나라는 항상 인구 부족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능통은 손권에게 "동쪽의 산악 지대에는 용맹한 인재가 많고, 위엄과 은혜로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진언해 산월의 평정·징병을 요청했다.

2. 5. 죽음

능통은 산월 지역으로 가는 길에 고향을 지나 잠시 들렀다. 명성과 영예를 얻었음에도 그는 마을 사람들을 지극히 존경하고 겸손하게 대했다. 귀향길에 병으로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손권은 능통의 죽음을 듣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겼다. 손권은 능통이 통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장승에게 능통의 비문을 쓰도록 명령했다.[27]

역할을 마치고 임지를 떠나려던 찰나에 병사했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으며, 장승에게 묘뢰를 짓게 했다. 배하의 병력은 낙통이 이어받았다.[33] 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손권이 가장 걱정한 사람은 여몽·능통이었다고 한다.[34]

『삼국지』 오지 능통전에는 능통이 49세에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르면 몰년은 가화 6년(237년)이 된다. 그러나 『삼국지』 오지 낙통전에는 능통 사후, 휘하의 병사를 낙통이 이어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낙통의 몰년은 황무 7년(228년)이므로, 이 경우 능통은 40세 전후에 사망한 것이 되어 두 전의 기술에 모순이 생긴다.

삼국지』에는 건안 20년(215년) 이후의 능통에 관한 기록이 없고, 말에 편찬된 『북당서초』 권133 복식부(牀15)는 『오지』(『삼국지』 오지)를 인용하여 "능통이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29세였다"라고 하였으며, 『영락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대에 쓰여진 『건강실록』에는 능통이 건안 22년(217년)에 29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삼국지』의 주석서인 노필의 『삼국지집해』, 양장거의 『삼국지방증』 모두, 능통의 몰년을 29세가 옳다고 주석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 『삼국지』의 "49"는 "29"의 오류이며 실제 몰년은 건안 22년(217년)으로 생각된다.

3. 성품

능통은 군대에 몸담았어도 현인이나 선비들을 아끼고 존경했으며, 그들 또한 능통을 존경하며 따랐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여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녔다고 평가받았다.[3][4][29] 성섬이 능통보다 낫다는 추천을 받고 밤에 도착하자, 잠자리에 들었던 능통은 바로 옷을 갖춰 입고 나가 성섬을 맞이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지녔다.[30]

또한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인물이었다. 마둔 공략전 중 연회에서 술을 관리하는 진근(陳勤)이 사람들을 업신여기자 능통은 불쾌함을 표현했다. 진근이 능통과 능조를 모욕하자, 능통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응수하지 않았다. 연회 후 진근이 술에 취해 다시 능통을 욕하자,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진근을 베었다. 며칠 후 진근이 죽자, 능통은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와 스스로 군정(軍正)에게 결박되었다. 손권은 능통의 용기와 의연함을 칭찬하며 공을 세워 죄를 면하게 해주었다.[8][9] 소요진 전투에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손권을 구하기도 했다.

여몽남군 전투에서 감녕을 구하러 가자고 주유에게 건의하면서, 능통이라면 본진을 10일은 능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47] 손권은 성섬을 추천한 자에게 "능통만 하다면 족하다"고 답했고, 능통이 병에 걸렸을 때는 여몽에게 한 것만큼이나 마음을 썼다고 한다.[48] 훗날 좌장군이 된 유찬은 능통의 추천으로 등용된 인물이다.

3. 1. 감녕과의 갈등

능통은 아버지 능조를 죽게 한 감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손권은 능통에게 감녕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였고, 감녕은 항상 능통을 경계하며 만남을 피하려 했다.[35][19]

일찍이 여몽이 연회를 열어 한창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능통이 칼을 추며 감녕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 감녕도 일어나 자신도 쌍을 들고 춤을 출 수 있다고 하자, 여몽이 "자네는 춤을 잘 출지 몰라도, 나만큼은 못하지."라고 말하며 칼과 방패를 들고 나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35][19]

능통의 마음을 아는 손권감녕을 반주(半州)에 주둔하게 했다.[35][19]

4. 가족



능통의 두 아들인 능렬과 능봉은 아버지 능통이 사망했을 때 매우 어렸다. 손권은 그들을 자신의 궁궐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손권은 손님들이 찾아오면 능통의 아들들을 가리키며 "저들은 나의 호랑이 아이들이다."라고 말했다. 능통의 아들들이 일곱 살이나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손권은 갈광에게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10일에 한 번씩 승마 훈련을 시키도록 명했다. 능렬이 성장하자 손권은 그의 아버지 능통의 공을 기려 그에게 정후의 작위를 내리고, 그의 아버지가 지휘했던 부대를 맡도록 했다. 능렬은 나중에 죄를 지어 후작위를 잃고 면직되었으며, 작위와 군직은 능봉에게 넘어갔다.[1] [2]

5. 평가

능통은 사대부 출신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군인이었지만 그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는 수용력이 뛰어나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바쁜 와중에도 항상 방문객을 맞이할 시간을 냈다. 그는 의리와 충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으며, 부를 하찮게 여겼다.[3][4] 이러한 점 때문에 진수는 그를 "국사"로 칭송했다.[29] 한번은 손권의 신하들이 명망 높은 인재인 성현을 추천했을 때, 능통은 성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일어나 그를 맞이하고 손을 잡고 손권에게 데려갔다.[30]

능통은 강한 의리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군 전투에서 주유감녕에게 이릉(夷陵; 현재 후베이성이창시 일대)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조인은 군대를 보내 감녕을 포위했다. 감녕이 급히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다른 장군들은 병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여몽은 능통이 남아서 조인을 견제하는 동안 감녕을 지원하러 가자고 제안했고, 능통은 혼자 조인의 공격을 막아내어 감녕을 구출할 시간을 벌었다.[15][16]

능통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용감했으며, 자신의 행동에 맹렬한 결의를 보였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과 아버지를 모욕한 상관 진진을 쳐서 죽였고, "죽음만이 자신의 깊은 죄책감을 씻어낼 수 있다"고 외치며 전투에서 무모하게 싸웠다. 승리 후 그는 스스로를 묶어 처벌을 기다렸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기려 사면하고 더 높은 군직으로 승진시켰다.[8][9]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능통은 아버지 능조를 죽인 감녕과의 갈등이 극적으로 묘사된다. 완현 전투 승전 연회에서 여몽이 감녕을 칭찬하자 질투심을 느껴 검무로 감녕을 죽이려 했으나, 여몽과 손권의 제지로 실패한다.[1]

소요진 전투에서 악진과 싸우던 중 조휴의 화살에 맞아 낙마하여 죽을 뻔했으나, 감녕이 활을 쏴 악진을 맞혀 목숨을 구한다. 이를 계기로 감녕에게 용서를 구하고 둘은 생사지교를 맺는 절친한 친구가 된다.[1]

216년 유수구 전투에서는 장료와 50합을 겨루었고, 다음 날 악진과 겨루던 중 조휴의 화살에 맞았으나 감녕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감녕과 굳건한 친교를 맺었다.[1]

이릉 전투에서는 후비(後備)를 맡아 참전했으나, 그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5
[2] 서적 Sanguozhi vol. 57
[3] 서적 Sanguozhi vol. 55
[4] 서적 Sanguozhi vol. 55
[5] 서적 Sanguozhi vol. 56
[6] 서적 Sanguozhi vol. 55
[7] 서적 Sanguozhi vol. 55
[8] 서적 Sanguozhi vol. 55
[9] 서적 Sanguozhi vol. 55
[10] 서적 Sanguozhi vol. 55
[11] 서적 Sanguozhi vol. 55
[12] 서적 Sanguozhi vol. 47
[13] 서적 Zizhi Tongjian vol. 65
[14] 서적 Sanguozhi vol. 55
[15] 서적 Sanguozhi vol. 54
[16] 서적 Sanguozhi vol. 54
[17] 서적 Sanguozhi vol. 55
[18] 서적 Sanguozhi vol. 55
[19]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5
[20] 서적 Sanguozhi vol. 55
[21]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22] 서적 Sanguozhi vol. 55
[23]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5
[24] 서적 Sanguozhi vol. 55
[25] 서적 Sanguozhi vol. 64
[26] 서적 Sanguozhi vol. 55
[27] 서적 Sanguozhi vol. 55
[28] 서적 Sanguozhi vol. 55
[29] 웹사이트 Dictionary definition of 國士 http://www.zdic.net/[...]
[30] 서적 Sanguozhi vol. 55
[31] 서적 Sanguo Yanyi ch. 67
[32] 서적 Sanguo Yanyi ch. 68
[33] 서적 三国志 (歴史書)
[34] 서적 三国志
[35] 서적 오서
[36] 서적 삼국지 51권 오서 제6 손정 손유, 삼국지 54권 오서 제9 주유
[37] 서적 삼국지 55권 오서 제10 동습
[38] 서적 삼국지 54권 오서 제9 주유
[39] 서적 삼국지 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40] 서적 삼국지 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41] 서적 삼국지 55권 오서 제10 감녕
[42] 서적 자치통감고이 3권
[43] 서적 태평어람 488권 인사부 제129 체(涕)
[44] 서적 건강실록 1권 오 태조上
[45] 서적 삼국지 57권 오서 제12 낙통
[46] 서적 삼국지집해
[47] 서적 삼국지 54권 오서 제9 여몽
[48] 서적 삼국지 56권 오서 제11 주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