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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마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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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혼마쓰번은 센고쿠 시대에 니혼마쓰 가문이 지배했으나 다테 마사무네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 가모 씨족, 가토 씨족, 니와 씨족이 번주로 통치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다.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니와 나가쿠니가 요네자와 번으로 도주하고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현이 되었다가 후쿠시마 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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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마쓰번
개요
이름니혼마쓰 번 (二本松藩)
위치니혼마쓰 성
좌표37.599642 140.427986
현재 위치후쿠시마 현 일부
역사
성립1627년, 아이즈 번에서 분할
소멸1871년
시대에도 시대
역대 번주
1627년마쓰시타 씨(마쓰시타 시게쓰나)
1628년가토 씨(가토 요시아키)
1641년니와 씨(니와 미쓰시게)

2. 번의 역사

니혼마쓰 지역은 센고쿠 시대에 하타케야마 씨가 지배하였으나, 다테 마사무네에 의해 멸망한 후 센다이번아이즈번 세력의 영향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 이후 가모 가문, 우에스기 가문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히데유키와 그의 아들 타다사토가 통치했다. 그러나 가모 가문 시대에는 자연재해와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영지가 피폐해졌고, 1627년 타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아이즈 영지는 막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이후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40만 석 영주가 되면서, 그의 사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1627년 니혼마쓰 5만 석 영지를 받아 니혼마쓰 번을 처음 세웠다. 하지만 시게쓰나는 같은 해 사망했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는 1년 만인 1628년 미하루번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가토 아키토시가 번주가 되었으나, 가혹한 통치와 흉작 등으로 민심을 잃고 1643년 영지를 몰수당했다.

1643년,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가 10만 700석의 다이묘로 니혼마쓰에 들어오면서 니와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니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의 후손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높은 고쿠다카를 인정받았다. 니와 가문은 번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니혼마쓰 성을 개수하는 등 안정에 힘썼으나,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역 부담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등 거듭된 재해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번정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등 막부의 동원에 응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1868년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다. 나가쿠니는 항복 후 은거하였고, 양자 니와 나가히로가 뒤를 이었으나 영지는 5만 700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1869년 판적봉환을 거쳐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었고, 니혼마쓰 현으로 개편되었다가 이후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니혼마쓰 지역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와 무로마치 시대 동안 하타케야마 씨족의 영지였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 덴쇼 14년(1586년), 다테 마사무네가 하타케야마 씨족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덴쇼 18년(1590년) 7월, 오다와라 정벌에서 호조 우지나오를 항복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같은 해 8월 아이즈에 진입하여 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오슈 지역 영지 재분배)를 단행했다. 이 조치로 니혼마쓰는 아이즈의 새로운 영주가 된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우지사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였으며, 이전에는 이세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모 씨족의 통치 시기,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덴쇼분로쿠 연간에 검지(토지 조사)가 실시되어 가모 씨족의 영지 규모는 91만 9,320석으로 정해졌다.

분로쿠 4년(1595년) 2월, 우지사토가 급사하자 그의 아들 가모 히데유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이즈의 구로카와성, 시라카와성, 니혼마쓰성을 제외한 영내 대부분의 성이 아사노 나가마사와 아사노 유키나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히데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딸 후리히메와 혼인했으나, 게이초 3년(1598년) 1월 시모쓰케의 우쓰노미야 18만 석으로 영지가 축소되어 이봉되었다.

가모 씨족을 대신하여 아이즈에는 에치고 가스가야마 성 성주였던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입성했다. 그는 기존 가모 씨족의 영지에 데와의 쇼나이 지방과 사도를 더하여 총 120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가게카츠는 니혼마쓰가 속한 세키타츠(仙北) 지방의 요충지에 야스다 요시모토(安田能元), 시모조 타다치카(下条忠親), 아키야마 사다쓰나(秋山定綱), 야마우라 가게쿠니(山浦景国), 이치카와 후사쓰나(市川房綱) 등을 배치하여 방비를 강화했다.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여 서군이 패배하자, 가게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게이초 6년(1601년) 8월 90만 석이 감봉되어 데와의 요네자와 번 3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그 대신 우쓰노미야로 옮겨갔던 가모 히데유키가 6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 다시 아이즈로 돌아왔고, 니혼마쓰 역시 다시 가모 씨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히데유키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흉작, 기근, 대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으며, 과도한 연공(세금) 징수와 무거운 노역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의 도망이 잇따랐다. 게이초 17년(1612년) 5월, 히데유키는 3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타다사토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선대부터 이어진 가문 내의 분쟁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고, 간에이 4년(1627년) 1월 타다사토마저 후사 없이 요절하자 막부는 아이즈 영지 60만 석을 개역(영지 몰수)하였다. 다만 가모 가문의 명맥 자체는 이요 마쓰야마 번에서 존속하게 되었다.

2. 2.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까지 니혼마쓰 지역은 하타케야마 씨의 영지였다. 덴쇼 14년(1586년), 다테 마사무네가 하타케야마 씨를 멸망시키고 이곳을 다테 가문의 영토로 편입했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아이즈에 들어와 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오슈 지역 영지 재분배)를 단행했다. 이 조치로 니혼마쓰는 새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우지사토 시대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검지(検地, 토지 조사)가 실시되어 가모 가문 전체 영지는 91만 9320석으로 평가되었다. 히데요시는 이후 잠시 가모 씨족의 영지를 축소하여 니혼마쓰와 주변 지역을 아사노 나가마사에게 주기도 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분로쿠 4년(1595년) 우지사토가 급사하자 아들 가모 히데유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유키는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18만 석으로 영지가 축소되어 이봉되었다.

히데유키 대신 아이즈에는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데와 쇼나이, 사도를 더한 120만 석의 영주로 들어왔으며, 니혼마쓰도 그의 지배하에 놓였다. 가게카츠는 니혼마쓰를 포함한 요충지에 가신들을 배치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속한 서군이 패배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게이초 6년(1601년) 가게카츠의 영지를 대폭 삭감하여 데와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이봉시켰다. 대신 우쓰노미야로 옮겨갔던 가모 히데유키가 다시 아이즈 60만 석 영주로 복귀하여 니혼마쓰를 통치하게 되었다.

히데유키 시대에는 흉작, 기근, 대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가 잇따랐고, 무거운 연공(세금)과 부역 부담으로 백성들이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 게이초 17년(1612년) 히데유키가 사망하고 아들 타다사토가 뒤를 이었으나, 선대부터 이어진 가문 내분 등이 이어지다 간에이 4년(1627년) 타다사토마저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이에 막부는 가모 가문의 아이즈 영지 60만 석을 개역(改易, 영지 몰수)하고 가모 가문을 시코쿠의 이요 마쓰야마 번으로 이봉시켰다. 이로써 센고쿠 시대부터 이어진 니혼마쓰 지역의 지배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2. 3. 에도 시대

니혼마쓰 지방은 센고쿠 시대까지 하타케야마 씨가 지배했으나, 1586년 다테 마사무네에게 멸망당한 뒤 다테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과 오슈 시오키를 거치며 가모 우지사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이 지배하는 아이즈번의 일부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히데유키와 그의 아들 가모 다다사토 시대에는 흉작과 재해, 과도한 세금으로 영지가 피폐해졌다.

1627년,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아이즈 영지가 몰수되자, 이요 마쓰야마 번주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40만 석 영지를 받았다. 이때 요시아키의 사위이자 카라스야마 번주였던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5만 석 영지를 받아 니혼마쓰에 입번하면서 니혼마쓰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그러나 시게쓰나는 입번한 해에 사망했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는 1년 만인 1628년 미하루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마쓰시타 가문을 이어 니혼마쓰 번주가 된 것은 가토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가토 아키토시였다. 가토 가문은 새로운 농지 개발과 세금 증수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 했으나, 과도한 부담과 흉작으로 영지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사회 불안이 커졌다. 결국 1643년, 가토 가문은 악정을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가토 가문 대신 니혼마쓰에 들어온 것은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였다. 그는 10만 700석의 다이묘가 되었는데, 이는 미쓰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니와 나가히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높은 고쿠다카와 준고쿠슈(国主|고쿠슈일본어)의 격식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니와 가문은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니혼마쓰를 통치하게 된다. 니와 가문은 번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니혼마쓰 성을 개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사 부담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등 거듭된 재해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번정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등 막부의 명령에 동원되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니혼마쓰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1868년 7월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다. 번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였고, 은거하는 조건으로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때 영지는 5만 700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가히로는 니혼마쓰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에 따라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어 니혼마쓰 현이 되었다. 이후 니혼마쓰 현은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니혼마쓰 마지막 번주 니와 나가히로

2. 3. 1. 마쓰시타 가문 시대 (1627년 ~ 1628년)

1627년, 아이즈번의 번주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영지가 몰수되자, 이요 마쓰야마 번의 번주였던 가토 요시아키가 기존 영지의 두 배인 40만 석을 받아 아이즈에 들어왔다.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혔던 무장이다.

이때 요시아키의 사위였던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요리키 다이묘로서 시모쓰케국 카라스야마 번의 2만 8천 석 영지에 2만 2천 석을 추가로 받아 총 5만 석의 영지로 니혼마쓰에 들어오면서 니혼마쓰 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시게쓰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젊은 시절 주군으로 섬겼던 마쓰시타 유키쓰나의 아들이었다. 마쓰시타 가문의 영지는 동쪽 아다치군 18개 촌과 서쪽 아다치군 28개 촌을 포함했다.

그러나 시게쓰나는 니혼마쓰에 입번한 같은 해 10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지만, 1628년 1월,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쓰나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영지를 2만 석 감봉하여 3만 석으로 만들고 무쓰국 미하루번으로 이봉시켰다. 이로써 마쓰시타 가문의 짧은 니혼마쓰 지배는 1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2. 3. 2. 가토 가문 시대 (1628년 ~ 1643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입번한 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1628년 미하루번으로 이봉되면서, 아이즈번가토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인 가토 아키토시가 니혼마쓰 번주가 되었다. 아키토시는 전 해에 아버지가 아이즈에 들어왔을 때 미하루 번 3만 석을 받았다.

1631년 9월, 아버지 요시아키가 사망하고 형 아키나리가 아이즈 번주 자리를 계승하자, 가토 가문은 아이즈와 니혼마쓰 영지 모두에서 가혹한 토지 조사(検地)를 실시했다. 이는 기존 영지였던 시코쿠에 비해 기후가 춥고 농업적으로 낙후된 아이즈와 니혼마쓰로 옮겨오면서 영지 규모(고쿠다카)는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그에 따른 막부의 군역과 부역 부담이 커져 재정난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가토 가문은 신전 개발(新田開発)을 추진하는 동시에 세금(年貢) 징수를 늘렸고, 니혼마쓰 영지민들은 가혹한 통치에 시달렸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오우 마쓰마에 순견사(奥羽松前巡見使)를 파견했을 때, 세키타쓰 지방(信達地方)의 영민들은 가토 가문의 폭정을 호소하는 소장(訴状)을 제출하려 했으나, 가토 가문의 방해로 실패했다. 순견 이후 가토 가문은 주모자들을 색출하여 1635년 처형했다.

니혼마쓰 영지에서는 연공 외의 잡세(小物成) 징수도 가혹했으며, 아이즈와카마쓰성 수축과 에도성 부역에 따른 노역 부담도 무거워 영민들이 몸을 팔거나 도망치는 일이 잇따랐다. 특히 1642년에는 연이은 세금 증수와 흉작이 겹쳐 영민들의 도망이 절정에 달했다.

결국 번의 통치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1643년 3월 아키토시는 사망했다. 같은 해 5월, 가토 가문의 본가인 아이즈 번주 아키나리가 가신들의 소동과 악정을 이유로 개역(영지 몰수)당하자, 아키토시의 뒤를 이은 아들 아키카쓰 역시 죽은 아버지 아키토시의 생전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니혼마쓰 번 3만 석 영지를 개역(영지 몰수)당했다. 이로써 가토 가문의 니혼마쓰 지배는 막을 내렸다.

2. 3. 3. 니와 가문 시대 (1643년 ~ 1871년)

1643년 가토 아키토시가 영지를 몰수당한 후,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가 10만 700석의 다이묘로 니혼마쓰에 들어왔다. 고쿠다카가 높고 준고쿠슈(国主)의 격식을 갖춘 것은 미쓰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니와 나가히데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니와 가문은 미쓰시게의 아버지 니와 나가시게 대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중재와 나가시게의 부인(호온인)이 노부나가의 딸이자 히데타다의 부인(스겐인)과 사촌 관계였던 점 등이 작용하여 다이묘 지위를 회복한 바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니와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니혼마쓰 성 아래에 히데타다와 도쿠가와 이에미쓰 부자의 묘소를 조성하고, 막부의 명에 따른 도카이도 등지의 하천 공사나 닛코 도쇼구, 조조지의 수리 공사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초대 번주 미쓰시게 시대에 번의 통치 체제가 대부분 확립되었다. 그는 니혼마쓰 성과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법제를 정비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러나 2대 번주 니와 나가쓰구 시대부터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사 부담(공역)이 커지면서 번의 재정은 점차 어려워졌다. 역대 번주들은 이러한 부담에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재정난은 심화되었다. 5대 번주 니와 다카히로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이와이타 사쿠히를 등용하여 교호 개혁을 모델로 한 번정 개혁을 시도했다. 6대 번주 니와 다카야스 역시 이와이타를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갓난이 성장법'을 발표하기도 했다. 간엔 연간(1748년~1751년)에는 영내에서 농민 봉기(잇키)가 발생하여, 연공(세금) 절반 감면을 약속하고 진정시켰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흉작으로 4만 2천 석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7대 번주 니와 나가요시 시대에는 메이와 연간(1764년~1772년)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덴메이 대기근(1782년~1788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응하여 간세이 개혁을 단행, 의료 구호령과 양로법 등을 제정했으나, 막부의 명에 따른 미노국이세국의 하천 공사 부담 등으로 재정은 계속 악화되었다.

9대 번주 니와 나가토미번교인 게이가칸(稽古館)을 설립하고, 가로(家老) 니와 기아키를 등용하여 번정 쇄신을 꾀했다. 분세이 연간(1818년~1830년)에는 직접 영지를 순찰하며 농촌 부흥책을 추진했다. 신년반 촌장 제도를 도입하고, 총액 3,400냥의 구호금을 지급했으며, 25인조 제도와 검약령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나가토미 치세 후반에는 사치 풍조가 만연하고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 게다가 덴포 대기근(1833년~1839년)으로 니혼마쓰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막부의 공역 부담까지 겹쳐 번 재정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안세이 연간(1854년~1860년)에는 번 병력의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교토 경비, 덴구토의 난 진압 등에 동원되어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다. 1868년 7월 28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피신했고, 다음 날 니혼마쓰 성은 함락되었다. 9월에 나가쿠니는 신정부군에 항복했으며, 은거하는 조건으로 사위이자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나리노리의 아들)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때 영지는 기존 10만 700석에서 5만 700석으로 감봉되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가히로는 니혼마쓰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어 니혼마쓰현이 되었다가 이후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니와 가문 통치 시기 니혼마쓰 번에서는 세쓰분 때 콩을 뿌리며 외치는 구호인 "오니와 소토(鬼は外, 오니는 밖으로)"가 번주 가문의 성씨인 '니와(丹羽)'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 여겨, '하(は)'를 빼고 "오니 소토(鬼外)"라고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역대 번주 (니와 가문) ===

이름 (원문 한자)재임 기간비고
1대니와 미쓰시게 (丹羽光重)1643년 ~ 1679년초대 번주. 번정 기초 확립. 예술 후원.
2대니와 나가쓰구 (丹羽長次)1679년 ~ 1698년미쓰시게의 장남. 재임 기간 평탄. 후사 없음.
3대니와 나가유키 (丹羽長之)1698년 ~ 1700년나가쓰구의 동생.
4대니와 히데노부 (丹羽秀延)1701년 ~ 1728년나가유키의 장남. 후사 없이 사망.
5대니와 다카히로 (丹羽高寛)1728년 ~ 1745년양자 (나가히데 후손). 교호 개혁 시도.
6대니와 다카야스 (丹羽高庸)1745년 ~ 1766년다카히로의 장남. 호레키 치수 사업 참여.
7대니와 나가요시 (丹羽長貴)1766년 ~ 1796년다카야스의 서자. 덴메이 대기근 발생. 간세이 개혁 시도.
8대니와 나가아키라 (丹羽長祥)1796년 ~ 1813년나가요시의 장남. (원문 長貴는 7대와 중복되어 長祥으로 추정되나 확인 필요)
9대니와 나가토미 (丹羽長富)1813년 ~ 1858년나가아키라의 장남. 번교 게이가칸 설립. 분세이 개혁 시도. 덴포 대기근 발생.
10대니와 나가쿠니 (丹羽長国)1858년 ~ 1868년나가토미의 6남. 막부 말 활동. 보신 전쟁 참전 및 패배.
11대니와 나가히로 (丹羽長裕)1868년 ~ 1871년나가쿠니의 양자 (우에스기 나리노리 아들). 감봉(5만 7백 석). 마지막 번주.


2. 4.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막부 말기에 니혼마쓰 번은 에도 만 경비 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맞섰다. 그러나 니혼마쓰 번 군대는 삿초 동맹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고, 결국 니혼마쓰성은 함락되어 불탔다.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도주했다가 결국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나가쿠니는 자신이 은거하는 조건으로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때 니혼마쓰 번의 고쿠다카는 기존 10만 700석에서 5만 700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이후 1869년 판적봉환을 거쳐 1871년 7월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었다. 폐지 후 니혼마쓰 현이 잠시 설치되었으나, 곧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3. 역대 번주

니혼마쓰번은 에도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 가문이 통치했다.



초대 번주 마쓰시타 시게쓰나1627년 입봉했으나 곧 사망하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가 뒤를 이었지만 1628년 전봉되었다. 이후 가토 아키토시가 번주가 되었으나 1641년 영지를 몰수당했다. 1643년부터는 니와 미쓰시게가 입봉하여 메이지 유신까지 니와 가문이 니혼마쓰번을 다스렸다. 니와 가문 시대에 번의 고쿠다카는 10만 700석으로 크게 늘었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5만 700석으로 감봉되었다. 각 가문과 번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3. 1. 마쓰시타 가문 (도자마, 3만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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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석고비고
-- 마쓰시타 씨 (도자마) 1627년 ~ 1628년
1마쓰시타 시게쓰나 松下重綱|마쓰시타 시게쓰나일본어1627년이와미노카미 (石見守)종5위하(従五位下)3만 고쿠가라스야마 번에서 전봉
2마쓰시타 나가쓰나 松下長綱|마쓰시타 나가쓰나일본어1627년 ~ 1628년이와미노카미 (石見守)종5위하(従五位下)3만 고쿠미하루 번으로 전봉


3. 2. 가토 가문 (도자마, 3만 석)

(加藤明利|가토 아키토시일본어)1628년 ~ 1641년민부다이후 (民部大輔)종5위하 (従五位下)3만 석미하루 번에서 전봉


3. 3. 니와 가문 (도자마, 10만 700석 → 5만 700석)

가토 가문이 영지를 몰수당한 후, 1643년 8월 2일 무쓰국 시라카와번의 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니와 나가히데의 손자)가 10만 700석으로 니혼마쓰번에 들어왔다. 미쓰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명문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국주급의 대우를 받았다.

니와 가문은 미쓰시게의 아버지 니와 나가시게 대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선과 나가시게의 정실 호온인(오다 노부나가의 딸이자 히데타다의 정실 스겐인과 사촌)의 관계로 인해 다시 10만 석의 다이묘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니와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삼아, 니혼마쓰 성 아래에 히데타다와 이에미쓰 부자의 묘소를 조성하고, 도카이도 등지의 하천 공사, 닛코 도쇼구조조지 수리 등 막부의 명령에 따른 공역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번의 행정 체계는 초대 번주 미쓰시게 시대에 대부분 확립되었다. 그는 니혼마쓰성과 무사 저택, 성하 마을을 정비하고 법제를 확립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러나 2대 번주 니와 나가쓰구 시대부터 막부의 공역 부담이 점차 커졌고, 역대 번주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니혼마쓰번의 재정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5대 번주 니와 다카히로는 이와이타 사쿠히를 등용하여 교호 연간에 번정 개혁을 실시했다. 6대 번주 니와 다카쓰네 역시 이와이타를 기용하여 번정 개혁을 추진하고, 영아 양육을 장려하는 법을 발표했다. 하지만 간엔 연간(1748년~1751년)에는 영내에서 잇키(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연공 감면을 약속했으나 후에 철회하기도 했으며, 같은 시기 흉작으로 4만 2000석의 피해를 입었다. 7대 번주 니와 나가타카 시대에는 메이와 연간(1764년~1772년)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덴메이 대기근(1782년~1788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나가타카는 간세이 연간(1789년~1801년)에 번정 개혁을 단행하여 의료 구호령과 양로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막부의 명령에 따른 미노국이세국의 하천 공사 부담 등으로 재정은 계속 악화되었다.

9대 번주 니와 나가토미번교인 게이가칸(敬学館)을 설립하고, 가로 니와 기아키를 등용하여 번정 쇄신을 꾀했다. 분세이 연간(1818년~1830년)에는 영내를 순찰하며 농촌 부흥을 위해 신년반 촌장 제도를 마련하고, 총액 3400의 구호금을 지급했으며, 25인조 제도 제정과 검약령을 내렸다. 그러나 나가토미 치세 후반부터 사치가 심해지고 번 내에 뇌물 정치가 만연했으며, 덴포 대기근(1833년~1837년)으로 큰 피해를 입고 막부의 공사 부담까지 겹쳐 번 재정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안세이 연간(1854년~1860년)에는 번 병력의 훈련이 실시되었다.

막말 시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교토 경비, 덴구토의 난 진압 등에서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각지에서 패배했다. 1868년 7월 28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도주했고 다음 날 니혼마쓰 성은 함락되었다. 9월에 나가쿠니는 항복했고, 자신의 은거를 조건으로 양자 니와 나가히로(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나리노리의 아들)가 뒤를 잇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때 니혼마쓰번의 고쿠다카는 5만 700석으로 감봉되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가히로는 니혼마쓰 지번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번은 폐지되어 니혼마쓰현이 되었다가 이후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니와 가문 통치 하의 니혼마쓰번에서는 세쓰분 때 액운을 쫓는 구호인 "오니와 소토"(鬼は外, 오니는 밖으로)가 번주 가문의 성씨인 "오니와"(お丹羽)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 여겨, "오니 소토"(鬼外)라고 '와'(は)를 빼고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고쿠다카비고
-- 니와 가문 (도자마) 1643년–1871년
1니와 미쓰시게 丹羽光重일본어1643년–1679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지주(侍従)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시라카와번에서 전봉
2니와 나가쓰구 丹羽長次일본어1679년–1698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
3니와 나가유키 丹羽長之일본어1698년–1700년에치젠노카미(越前守)종5위하(従五位下)10만 700 석
4니와 히데노부 丹羽秀延일본어1701년–1728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
5니와 다카히로 丹羽高寛일본어1728년–1745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
6니와 다카쓰네 丹羽高庸일본어1745년–1765년와카사노카미(若狭守)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원문 표기 다카야스다카쓰네의 오기일 수 있음. 통상 高庸다카쓰네로 읽음.
7니와 나가타카 丹羽長貴일본어1766년–1796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지주(侍従)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원문 표기 나가요시나가타카의 오기일 수 있음. 통상 長貴나가타카로 읽음.
8니와 나가아키 丹羽長祥일본어1796년–1813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원문 표기 나가아키라나가아키의 오기일 수 있음. 통상 長祥나가아키로 읽음.
9니와 나가토미 丹羽長富일본어1813년–1858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지주(侍従)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석
10니와 나가쿠니 丹羽長国일본어1858년–1868년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지주(侍従)종4위하(従四位下)10만 700 → 5만 700 석보신 전쟁 패배로 감봉
11니와 나가히로 丹羽長裕일본어1868년–1871년-종5위(五位)5만 700 석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됨


4. 경제

대부분의 과 마찬가지로, 니혼마쓰번은 주기적인 검지(検地)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에 따라 운영되었다.[1][2] 번의 영지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니혼마쓰번 영지 분포
지역속한 군촌 수
무츠국 (이와시로국)아다치군74개 촌
무츠국 (이와시로국)시노부군42개 촌
무츠국 (이와시로국)아사카군37개 촌



니혼마쓰는 농업 환경이 좋지 않은 추운 지역이었다. 이전 가모 가문(90만 석, 60만 석)과 우에스기 가문(120만 석)의 대규모 영지 지배를 받던 시절부터 그 규모에 맞는 군역과 봉공을 부담해야 했다. 이 때문에 당시부터 연공률(세금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가토 가문 시대에는 세금 징수가 더욱 심해졌다. 연공의 부가세인 구치마이(口米)와 구치센(口銭)은 가모 가문 시절보다 2배나 늘어나는 등 가혹했다. 소물성(小物成)이라는 잡세 종류를 늘려 징수했고, 성 쌓기 등 노역 부담도 컸다. 잡세로 지정된 납(蝋)이나 옻(漆)은 유통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 시기 새로운 농경지 개발(新田開発)도 이루어졌지만, 토지 조사는 매우 엄격했다. 밭에 뿌리는 종자 양만으로 수확량을 추정해 등급을 매기거나, 경작지나 경작자가 없는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있어 백성들은 "미혹된 석고", "토지 없는 석고"라 부르며 원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엄격한 검지는 겐로쿠 7년(1694년)에야 폐지되었다. 가혹한 통치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팔거나 도망치는 백성들이 잇따랐으며, 간에이 19년(1642년)에는 전년도 흉작과 계속되는 세금 증수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대규모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니혼마쓰 가토 가문이 개역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니와 가문은 가토 가문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는지, 메이레키 원년(1655년)부터 정면법(定免法)을 채택했다. 세율도 오공오민(五公五民, 수확의 50%를 세금으로)에서 육공사민(六公四民, 수확의 60%를 세금으로) 수준으로 억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니와 가문의 번 재정은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니혼마쓰성 개축과 조카마치(城下町, 성 아랫마을) 정비 확대, 쇼호 연간의 큰 가뭄, 그리고 막부의 명령에 따른 부역 부담 등이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니혼마쓰번은 흉작이나 자연재해로 인한 손실이 매우 컸고, 번 재정은 덴메이 시대(1781년~1789년)에 이미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니혼마쓰에서는 막부의 군역이나 슈쿠바(宿場, 역참) 운영 등 교통 정책상 필요 때문에 말 생산이 장려되고 통제되었다. 말은 농민들에게도 경작, 운반, 부업 수단으로 중요했다. 번에서는 정원 2명의 코마 부교(駒奉行, 말 담당 관리)를 두었고, 보조 역할로 코마츠키(駒付)라는 관리 겸 중개인을 임명했다. 번은 모든 사육마를 철저히 조사하고 관리했으며, 양질의 종마를 모리오카번에서 구입하거나 암말 구입 자금을 빌려주는 등 다양한 장려책을 시행했다. 막부도 니혼마쓰번의 말 생산에 주목하여, 교호 연간(1716년~1736년)에는 막부 로주 토다 타다자네의 명령으로 말을 헌상하기도 했다. 니혼마쓰에서는 수말을 코마(駒), 암말을 다바(駄馬, 원래 코마는 승용마, 다바는 짐 운반용 말을 의미)라고 불렀다. 다만, 말 생산 외의 축산은 부진하여, 소 사육은 분세이 12년(1829년) 기준으로 37마리에 불과했고, 그 외에는 양계 정도만 이루어졌다.

현재도 니혼마쓰에서 활발한 양조업은 에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연공미 확보와 쌀값 안정을 위해 번에서 엄격하게 규제했다. 번은 술 제조 허가증인 사케후다(酒札)를 발행하여, 이를 소지한 사람만 술 제조를 허용했다. 양잠업다테군과 시노부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막말에는 남다쓰(南達) 지방에서도 번성했다. 공업 생산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지만, 주물(히와타 주물, 鋳物) 등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메이지 시대에 쇠퇴). 또한 탈곡 도구인 토마찰구(稲扱き千刃, 중국에서 전래)가 니혼마쓰에서 활발하게 제조되었다. 이는 만석통(万石通)이나 센바코키(千歯扱き) 같은 도구가 도호쿠 지방에서는 부유층에게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기술 향상으로 연간 2,500대가 제조되었고,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도 가능해져 판로가 아이즈번 등 도호쿠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5. 사회

니혼마쓰번은 세금이 엄격하여 농민들이 도망가거나 신분을 사고파는 일이 발생했다. 번주 측은 세금 확보를 위해 5인조 제도를 강화한 25인조 제도를 도입하여 토지에 대한 지역 연대 책임을 지게 했다. 25인조 제도는 에도 시대 후기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과중한 연공뿐만 아니라, 잇따른 천재지변과 노역 부담으로 인해 농촌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생산 능력을 상실하면서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니혼마쓰번 농촌 인구 변화
연도 (일본 연호)연도 (서기)인구 수
엔포 5년1677년79,894명
조쿄 원년1684년83,853명
겐로쿠 11년1698년(감소 시작)
엔쿄 원년1744년72,589명
덴메이 대기근 이후-62,821명
덴포 대기근 이후-62,413명 (최저)



니와 가문은 겐로쿠 연간 이후 연공 수탈을 강화했으며, 노역 부담, 천재지변, 화폐 경제의 발달 등이 겹치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결국 간엔 연간에는 니혼마쓰번에서 유일한 농민 봉기(잇키)가 발생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상석 가로 아래에 군사를 담당하는 반방(番方)이 설치되었다. 막부 말기 동란기에 접어들면서 안세이 연간에는 농민을 징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으나, 그 내용은 센고쿠 시대 말기의 장비나 진법 등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고, 농사일과 병행해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게이오 연간에는 서양식 총을 구매하는 등 군제 개혁이 추진되어 안세이 시대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니와 가문이 본래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으로서 센고쿠 시대에 무용을 떨쳤던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상급 번사 대부분이 서양식 총보다는 센고쿠 시대 말기의 진법과 무기에 집착하여 개혁에 소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심각한 농촌 인구 감소 문제에 직면한 니와 가문은 1745년 8월, 막부나 다른 번보다 앞서 독자적인 "아기 양육법(赤子養育法)"을 제정했다. 이는 번사였던 유학자 타네바시 나리아키(種橋成章)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 법은 13세 이하 자녀가 3명 있는 상태에서 넷째 아이를 출산하면 연간 쌀 3섬을, 6세 이하 자녀가 2명 있는 상태에서 셋째 아이를 출산하면 연간 쌀 1섬을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번은 육아 담당 관리와 성육 재판인(成育吟味役)을 두어 임산부 및 출생 검사를 실시하고, 임신 사실은 번 상층부까지 보고되어 마비키(間引き, 아이 솎아내기)를 방지하도록 했다. 마비키를 한 경우에는 촌팔분(村八分)이라는 사회적 제재를 가했다. 또한, 가난하더라도 자녀가 많으면 조합의 책임 하에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덴메이 대기근 이전까지 약 3,900명의 인구 증가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덴메이 대기근으로 니혼마쓰번은 1만 2천 명의 인구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고, 1786년 3월에는 "개정 육아 수법(改正育手当方)"을 제정했다. 개정된 법은 10세 이하 자녀가 1명 있을 경우, 둘째 아이부터는 5되들이 쌀 1섬을 지급하고, 셋째와 넷째 아이에게는 현미를 2년간, 다섯째 아이 이상에게는 현미를 3년간 지급하도록 했다. 임신 사실을 모르고 타지로 봉공을 나갔다가 출산하여 양육이 어려운 경우에도 3년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이 개정법 시행 이후 덴메이 말기부터 간세이에 걸쳐 인구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1802년 9월에는 육아법이 다시 개정되어 기존의 쌀 지급 방식이 금전 지급으로 변경되었다. 둘째 아이에게는 금 2푼, 셋째 아이에게는 2냥 2푼, 다섯째 아이에게는 3냥, 쌍둥이의 경우에는 18냥을 여러 차례 나누어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후 간척 사업이 성행하면서 인구 증가세는 둔화되었고, 번 재정 부담으로 인해 지급액이 삭감되는 등 제도 자체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급 방식도 금전에서 쌀로(1814년), 다시 쌀에서 금전으로(1832년) 변경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6. 문화

니혼마쓰 번에서 학교가 설립된 것은 6대 번주인 타카츠네 때로, 호레키 연간에 에도 번저에 문무학교를 설립하여 가신들에게 한학과 오노파 일도류를 수련하게 했다. 이후의 번주들도 재정난으로 인해 번정 개혁에 착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뛰어난 학자나 무술가를 초빙하여 문무의 흥륭에 힘썼다. 9대 번주 나가토미 때, 번교 게이가칸이 설립되었다(분카 14년(1817년)). 또한 초대 미츠시게, 5대 타카히로 등 번주의 다수가 문화인이었기 때문에 니혼마쓰에서는 회화와 서도도 진보하여 많은 화가·명서가를 배출했다. 또한 니혼마쓰에서는 농민·상인 계층에서 마츠모토 시게히코, 오누마 유키히코, 스즈키 히로시 등 뛰어난 국학자를 배출하고 있다.

7. 종교

니혼마쓰번은 도요토미 시대 영주였던 가모 우지사토기리시탄 다이묘였기 때문에, 도호쿠 지방 기리시탄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바테렌 추방령에도 막부가 게이초 18년(1613년)에 내린 전국적인 금교령을 계기로 엄격한 기리시탄 탄압이 시작되었다.

니혼마쓰에서도 간에이 9년(1632년) 2월 8일, 막부의 명령으로 기리시탄 5명이 화형에 처해지고 9명이 참수당하는 등 총 14명이 순교(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시기 아이즈번에서는 42명, 시라카와번에서는 13명이 처형되었다. 이때 니혼마쓰에서 처형된 기리시탄 중에는 전 영주 가모 우지사토의 손자인 가모 다다사토(忠郷)의 옛 신하나, 겐나(元和) 연간(1615년~1624년)에 나가사키에서의 탄압을 피해 니혼마쓰로 도망 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포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기리시탄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다. 니혼마쓰번의 번주 니와 가문간세이(寛政) 원년(1789년) 막부에 제출한 陸奥国二本松領切支丹類族存命帳|무쓰국 니혼마쓰령 기리시탄 류족 존명장일본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간에이(1624년~1644년)부터 쇼호 연간(1644년~1648년) 사이에 적발된 기리시탄 18명의 후손들을 증손, 현손, 내손(현손의 자식) 대에 이르기까지 분류하여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참조

[1]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2]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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