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마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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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혼마쓰번은 센고쿠 시대에 니혼마쓰 가문이 지배했으나 다테 마사무네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 가모 씨족, 가토 씨족, 니와 씨족이 번주로 통치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다.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니와 나가쿠니가 요네자와 번으로 도주하고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현이 되었다가 후쿠시마 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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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혼마쓰번 - 니혼마쓰성
니혼마쓰성은 후쿠시마현 니혼마쓰시에 있는 사다리꼴식 평산성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요새로 건설되어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 마사무네와 니혼마쓰 가문의 갈등지였으며, 에도 시대 성주가 여러 번 바뀌었고 보신 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복원되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 현재는 공원으로 활용된다. - 마쓰시타씨 - 고바리번
고바리 번은 에도 시대 히타치국에 존재했던 번으로, 센고쿠 시대 격전지였던 이곳에 1603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입봉하며 처음 성립되었다가 1623년 폐지, 1679년 마쓰다이라 노리마사가 들어오며 재건되었으나 1682년 고모로번으로 이봉되며 완전히 폐지되었다. - 마쓰시타씨 - 미하루번
미하루 번은 에도 시대 무쓰국 다무라군(현재 후쿠시마현 미하루마치)에 있던 번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다무라 씨의 본거지였으나 오다와라 전투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영지를 잃었고, 가모 씨, 가토 씨, 마쓰시타 씨를 거쳐 1645년부터 아키타 씨가 메이지 유신까지 통치했으며,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다가 신정부군에 항복하여 영지를 보전 후 폐번치현을 거쳐 후쿠시마 현에 편입되었다.
| 니혼마쓰번 | |
|---|---|
| 개요 | |
| 이름 | 니혼마쓰 번 (二本松藩) |
| 위치 | 니혼마쓰 성 |
| 좌표 | 37.599642 140.427986 |
| 현재 위치 | 후쿠시마 현 일부 |
| 역사 | |
| 성립 | 1627년, 아이즈 번에서 분할 |
| 소멸 | 1871년 |
| 시대 | 에도 시대 |
| 역대 번주 | |
| 1627년 | 마쓰시타 씨(마쓰시타 시게쓰나) |
| 1628년 | 가토 씨(가토 요시아키) |
| 1641년 | 니와 씨(니와 미쓰시게) |
2. 번의 역사
니혼마쓰 지역은 센고쿠 시대에 하타케야마 씨가 지배하였으나, 다테 마사무네에 의해 멸망한 후 센다이번과 아이즈번 세력의 영향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 이후 가모 가문, 우에스기 가문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히데유키와 그의 아들 타다사토가 통치했다. 그러나 가모 가문 시대에는 자연재해와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영지가 피폐해졌고, 1627년 타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아이즈 영지는 막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이후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40만 석 영주가 되면서, 그의 사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1627년 니혼마쓰 5만 석 영지를 받아 니혼마쓰 번을 처음 세웠다. 하지만 시게쓰나는 같은 해 사망했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는 1년 만인 1628년 미하루번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가토 아키토시가 번주가 되었으나, 가혹한 통치와 흉작 등으로 민심을 잃고 1643년 영지를 몰수당했다.
1643년,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가 10만 700석의 다이묘로 니혼마쓰에 들어오면서 니와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니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의 후손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높은 고쿠다카를 인정받았다. 니와 가문은 번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니혼마쓰 성을 개수하는 등 안정에 힘썼으나,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역 부담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등 거듭된 재해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번정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등 막부의 동원에 응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1868년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다. 나가쿠니는 항복 후 은거하였고, 양자 니와 나가히로가 뒤를 이었으나 영지는 5만 700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1869년 판적봉환을 거쳐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었고, 니혼마쓰 현으로 개편되었다가 이후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니혼마쓰 지역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와 무로마치 시대 동안 하타케야마 씨족의 영지였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 덴쇼 14년(1586년), 다테 마사무네가 하타케야마 씨족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덴쇼 18년(1590년) 7월, 오다와라 정벌에서 호조 우지나오를 항복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같은 해 8월 아이즈에 진입하여 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오슈 지역 영지 재분배)를 단행했다. 이 조치로 니혼마쓰는 아이즈의 새로운 영주가 된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우지사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였으며, 이전에는 이세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모 씨족의 통치 시기,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덴쇼 및 분로쿠 연간에 검지(토지 조사)가 실시되어 가모 씨족의 영지 규모는 91만 9,320석으로 정해졌다.
분로쿠 4년(1595년) 2월, 우지사토가 급사하자 그의 아들 가모 히데유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이즈의 구로카와성, 시라카와성, 니혼마쓰성을 제외한 영내 대부분의 성이 아사노 나가마사와 아사노 유키나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히데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딸 후리히메와 혼인했으나, 게이초 3년(1598년) 1월 시모쓰케의 우쓰노미야 18만 석으로 영지가 축소되어 이봉되었다.
가모 씨족을 대신하여 아이즈에는 에치고 가스가야마 성 성주였던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입성했다. 그는 기존 가모 씨족의 영지에 데와의 쇼나이 지방과 사도를 더하여 총 120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가게카츠는 니혼마쓰가 속한 세키타츠(仙北) 지방의 요충지에 야스다 요시모토(安田能元), 시모조 타다치카(下条忠親), 아키야마 사다쓰나(秋山定綱), 야마우라 가게쿠니(山浦景国), 이치카와 후사쓰나(市川房綱) 등을 배치하여 방비를 강화했다.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여 서군이 패배하자, 가게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게이초 6년(1601년) 8월 90만 석이 감봉되어 데와의 요네자와 번 3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그 대신 우쓰노미야로 옮겨갔던 가모 히데유키가 6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 다시 아이즈로 돌아왔고, 니혼마쓰 역시 다시 가모 씨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히데유키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흉작, 기근, 대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으며, 과도한 연공(세금) 징수와 무거운 노역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의 도망이 잇따랐다. 게이초 17년(1612년) 5월, 히데유키는 3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타다사토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선대부터 이어진 가문 내의 분쟁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고, 간에이 4년(1627년) 1월 타다사토마저 후사 없이 요절하자 막부는 아이즈 영지 60만 석을 개역(영지 몰수)하였다. 다만 가모 가문의 명맥 자체는 이요 마쓰야마 번에서 존속하게 되었다.
2. 2.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까지 니혼마쓰 지역은 하타케야마 씨의 영지였다. 덴쇼 14년(1586년), 다테 마사무네가 하타케야마 씨를 멸망시키고 이곳을 다테 가문의 영토로 편입했다.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이즈에 들어와 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오슈 지역 영지 재분배)를 단행했다. 이 조치로 니혼마쓰는 새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우지사토 시대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검지(検地, 토지 조사)가 실시되어 가모 가문 전체 영지는 91만 9320석으로 평가되었다. 히데요시는 이후 잠시 가모 씨족의 영지를 축소하여 니혼마쓰와 주변 지역을 아사노 나가마사에게 주기도 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분로쿠 4년(1595년) 우지사토가 급사하자 아들 가모 히데유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유키는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18만 석으로 영지가 축소되어 이봉되었다.
히데유키 대신 아이즈에는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데와 쇼나이, 사도를 더한 120만 석의 영주로 들어왔으며, 니혼마쓰도 그의 지배하에 놓였다. 가게카츠는 니혼마쓰를 포함한 요충지에 가신들을 배치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속한 서군이 패배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게이초 6년(1601년) 가게카츠의 영지를 대폭 삭감하여 데와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이봉시켰다. 대신 우쓰노미야로 옮겨갔던 가모 히데유키가 다시 아이즈 60만 석 영주로 복귀하여 니혼마쓰를 통치하게 되었다.
히데유키 시대에는 흉작, 기근, 대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가 잇따랐고, 무거운 연공(세금)과 부역 부담으로 백성들이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 게이초 17년(1612년) 히데유키가 사망하고 아들 타다사토가 뒤를 이었으나, 선대부터 이어진 가문 내분 등이 이어지다 간에이 4년(1627년) 타다사토마저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이에 막부는 가모 가문의 아이즈 영지 60만 석을 개역(改易, 영지 몰수)하고 가모 가문을 시코쿠의 이요 마쓰야마 번으로 이봉시켰다. 이로써 센고쿠 시대부터 이어진 니혼마쓰 지역의 지배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2. 3. 에도 시대
니혼마쓰 지방은 센고쿠 시대까지 하타케야마 씨가 지배했으나, 1586년 다테 마사무네에게 멸망당한 뒤 다테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과 오슈 시오키를 거치며 가모 우지사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이 지배하는 아이즈번의 일부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시 아이즈 영주가 된 가모 히데유키와 그의 아들 가모 다다사토 시대에는 흉작과 재해, 과도한 세금으로 영지가 피폐해졌다.1627년,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아이즈 영지가 몰수되자, 이요 마쓰야마 번주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40만 석 영지를 받았다. 이때 요시아키의 사위이자 카라스야마 번주였던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5만 석 영지를 받아 니혼마쓰에 입번하면서 니혼마쓰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그러나 시게쓰나는 입번한 해에 사망했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는 1년 만인 1628년 미하루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마쓰시타 가문을 이어 니혼마쓰 번주가 된 것은 가토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가토 아키토시였다. 가토 가문은 새로운 농지 개발과 세금 증수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 했으나, 과도한 부담과 흉작으로 영지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사회 불안이 커졌다. 결국 1643년, 가토 가문은 악정을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가토 가문 대신 니혼마쓰에 들어온 것은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였다. 그는 10만 700석의 다이묘가 되었는데, 이는 미쓰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니와 나가히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높은 고쿠다카와 준고쿠슈(国主|고쿠슈일본어)의 격식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니와 가문은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니혼마쓰를 통치하게 된다. 니와 가문은 번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니혼마쓰 성을 개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사 부담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등 거듭된 재해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번정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등 막부의 명령에 동원되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니혼마쓰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1868년 7월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었다. 번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였고, 은거하는 조건으로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때 영지는 5만 700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가히로는 니혼마쓰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에 따라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어 니혼마쓰 현이 되었다. 이후 니혼마쓰 현은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2. 3. 1. 마쓰시타 가문 시대 (1627년 ~ 1628년)
1627년, 아이즈번의 번주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영지가 몰수되자, 이요 마쓰야마 번의 번주였던 가토 요시아키가 기존 영지의 두 배인 40만 석을 받아 아이즈에 들어왔다.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혔던 무장이다.이때 요시아키의 사위였던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요리키 다이묘로서 시모쓰케국 카라스야마 번의 2만 8천 석 영지에 2만 2천 석을 추가로 받아 총 5만 석의 영지로 니혼마쓰에 들어오면서 니혼마쓰 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시게쓰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젊은 시절 주군으로 섬겼던 마쓰시타 유키쓰나의 아들이었다. 마쓰시타 가문의 영지는 동쪽 아다치군 18개 촌과 서쪽 아다치군 28개 촌을 포함했다.
그러나 시게쓰나는 니혼마쓰에 입번한 같은 해 10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지만, 1628년 1월,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쓰나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영지를 2만 석 감봉하여 3만 석으로 만들고 무쓰국 미하루번으로 이봉시켰다. 이로써 마쓰시타 가문의 짧은 니혼마쓰 지배는 1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2. 3. 2. 가토 가문 시대 (1628년 ~ 1643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입번한 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가 1628년 미하루번으로 이봉되면서, 아이즈번주 가토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인 가토 아키토시가 니혼마쓰 번주가 되었다. 아키토시는 전 해에 아버지가 아이즈에 들어왔을 때 미하루 번 3만 석을 받았다.1631년 9월, 아버지 요시아키가 사망하고 형 아키나리가 아이즈 번주 자리를 계승하자, 가토 가문은 아이즈와 니혼마쓰 영지 모두에서 가혹한 토지 조사(検地)를 실시했다. 이는 기존 영지였던 시코쿠에 비해 기후가 춥고 농업적으로 낙후된 아이즈와 니혼마쓰로 옮겨오면서 영지 규모(고쿠다카)는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그에 따른 막부의 군역과 부역 부담이 커져 재정난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가토 가문은 신전 개발(新田開発)을 추진하는 동시에 세금(年貢) 징수를 늘렸고, 니혼마쓰 영지민들은 가혹한 통치에 시달렸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오우 마쓰마에 순견사(奥羽松前巡見使)를 파견했을 때, 세키타쓰 지방(信達地方)의 영민들은 가토 가문의 폭정을 호소하는 소장(訴状)을 제출하려 했으나, 가토 가문의 방해로 실패했다. 순견 이후 가토 가문은 주모자들을 색출하여 1635년 처형했다.
니혼마쓰 영지에서는 연공 외의 잡세(小物成) 징수도 가혹했으며, 아이즈와카마쓰성 수축과 에도성 부역에 따른 노역 부담도 무거워 영민들이 몸을 팔거나 도망치는 일이 잇따랐다. 특히 1642년에는 연이은 세금 증수와 흉작이 겹쳐 영민들의 도망이 절정에 달했다.
결국 번의 통치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1643년 3월 아키토시는 사망했다. 같은 해 5월, 가토 가문의 본가인 아이즈 번주 아키나리가 가신들의 소동과 악정을 이유로 개역(영지 몰수)당하자, 아키토시의 뒤를 이은 아들 아키카쓰 역시 죽은 아버지 아키토시의 생전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니혼마쓰 번 3만 석 영지를 개역(영지 몰수)당했다. 이로써 가토 가문의 니혼마쓰 지배는 막을 내렸다.
2. 3. 3. 니와 가문 시대 (1643년 ~ 1871년)
1643년 가토 아키토시가 영지를 몰수당한 후, 시라카와번주였던 니와 미쓰시게가 10만 700석의 다이묘로 니혼마쓰에 들어왔다. 고쿠다카가 높고 준고쿠슈(国主)의 격식을 갖춘 것은 미쓰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니와 나가히데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니와 가문은 미쓰시게의 아버지 니와 나가시게 대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중재와 나가시게의 부인(호온인)이 노부나가의 딸이자 히데타다의 부인(스겐인)과 사촌 관계였던 점 등이 작용하여 다이묘 지위를 회복한 바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니와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니혼마쓰 성 아래에 히데타다와 도쿠가와 이에미쓰 부자의 묘소를 조성하고, 막부의 명에 따른 도카이도 등지의 하천 공사나 닛코 도쇼구, 조조지의 수리 공사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초대 번주 미쓰시게 시대에 번의 통치 체제가 대부분 확립되었다. 그는 니혼마쓰 성과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법제를 정비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러나 2대 번주 니와 나가쓰구 시대부터 막부가 부과하는 각종 공사 부담(공역)이 커지면서 번의 재정은 점차 어려워졌다. 역대 번주들은 이러한 부담에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재정난은 심화되었다. 5대 번주 니와 다카히로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이와이타 사쿠히를 등용하여 교호 개혁을 모델로 한 번정 개혁을 시도했다. 6대 번주 니와 다카야스 역시 이와이타를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갓난이 성장법'을 발표하기도 했다. 간엔 연간(1748년~1751년)에는 영내에서 농민 봉기(잇키)가 발생하여, 연공(세금) 절반 감면을 약속하고 진정시켰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흉작으로 4만 2천 석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7대 번주 니와 나가요시 시대에는 메이와 연간(1764년~1772년)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덴메이 대기근(1782년~1788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응하여 간세이 개혁을 단행, 의료 구호령과 양로법 등을 제정했으나, 막부의 명에 따른 미노국과 이세국의 하천 공사 부담 등으로 재정은 계속 악화되었다.
9대 번주 니와 나가토미는 번교인 게이가칸(稽古館)을 설립하고, 가로(家老) 니와 기아키를 등용하여 번정 쇄신을 꾀했다. 분세이 연간(1818년~1830년)에는 직접 영지를 순찰하며 농촌 부흥책을 추진했다. 신년반 촌장 제도를 도입하고, 총액 3,400냥의 구호금을 지급했으며, 25인조 제도와 검약령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나가토미 치세 후반에는 사치 풍조가 만연하고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 게다가 덴포 대기근(1833년~1839년)으로 니혼마쓰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막부의 공역 부담까지 겹쳐 번 재정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안세이 연간(1854년~1860년)에는 번 병력의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막부 말기, 10대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에도 만 경비, 교토 경비, 덴구토의 난 진압 등에 동원되어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다. 1868년 7월 28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피신했고, 다음 날 니혼마쓰 성은 함락되었다. 9월에 나가쿠니는 신정부군에 항복했으며, 은거하는 조건으로 사위이자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나리노리의 아들)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때 영지는 기존 10만 700석에서 5만 700석으로 감봉되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가히로는 니혼마쓰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어 니혼마쓰현이 되었다가 이후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니와 가문 통치 시기 니혼마쓰 번에서는 세쓰분 때 콩을 뿌리며 외치는 구호인 "오니와 소토(鬼は外, 오니는 밖으로)"가 번주 가문의 성씨인 '니와(丹羽)'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 여겨, '하(は)'를 빼고 "오니 소토(鬼外)"라고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역대 번주 (니와 가문) ===
| 대 | 이름 (원문 한자) | 재임 기간 | 비고 |
|---|---|---|---|
| 1대 | 니와 미쓰시게 (丹羽光重) | 1643년 ~ 1679년 | 초대 번주. 번정 기초 확립. 예술 후원. |
| 2대 | 니와 나가쓰구 (丹羽長次) | 1679년 ~ 1698년 | 미쓰시게의 장남. 재임 기간 평탄. 후사 없음. |
| 3대 | 니와 나가유키 (丹羽長之) | 1698년 ~ 1700년 | 나가쓰구의 동생. |
| 4대 | 니와 히데노부 (丹羽秀延) | 1701년 ~ 1728년 | 나가유키의 장남. 후사 없이 사망. |
| 5대 | 니와 다카히로 (丹羽高寛) | 1728년 ~ 1745년 | 양자 (나가히데 후손). 교호 개혁 시도. |
| 6대 | 니와 다카야스 (丹羽高庸) | 1745년 ~ 1766년 | 다카히로의 장남. 호레키 치수 사업 참여. |
| 7대 | 니와 나가요시 (丹羽長貴) | 1766년 ~ 1796년 | 다카야스의 서자. 덴메이 대기근 발생. 간세이 개혁 시도. |
| 8대 | 니와 나가아키라 (丹羽長祥) | 1796년 ~ 1813년 | 나가요시의 장남. (원문 長貴는 7대와 중복되어 長祥으로 추정되나 확인 필요) |
| 9대 | 니와 나가토미 (丹羽長富) | 1813년 ~ 1858년 | 나가아키라의 장남. 번교 게이가칸 설립. 분세이 개혁 시도. 덴포 대기근 발생. |
| 10대 | 니와 나가쿠니 (丹羽長国) | 1858년 ~ 1868년 | 나가토미의 6남. 막부 말 활동. 보신 전쟁 참전 및 패배. |
| 11대 | 니와 나가히로 (丹羽長裕) | 1868년 ~ 1871년 | 나가쿠니의 양자 (우에스기 나리노리 아들). 감봉(5만 7백 석). 마지막 번주. |
2. 4.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막부 말기에 니혼마쓰 번은 에도 만 경비 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번주 니와 나가쿠니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맞섰다. 그러나 니혼마쓰 번 군대는 삿초 동맹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고, 결국 니혼마쓰성은 함락되어 불탔다. 나가쿠니는 요네자와번으로 도주했다가 결국 신정부군에 항복했다.나가쿠니는 자신이 은거하는 조건으로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가 번주 자리를 잇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때 니혼마쓰 번의 고쿠다카는 기존 10만 700석에서 5만 700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이후 1869년 판적봉환을 거쳐 1871년 7월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니혼마쓰 번은 폐지되었다. 폐지 후 니혼마쓰 현이 잠시 설치되었으나, 곧 후쿠시마현에 편입되었다.
3. 역대 번주
니혼마쓰번은 에도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 가문이 통치했다.
- '''마쓰시타 가문''' (도자마, 3만 고쿠다카): 1627년 ~ 1628년
- '''가토 가문''' (도자마, 3만 고쿠다카): 1628년 ~ 1641년
- '''니와 가문''' (도자마, 10만 700고쿠다카 → 5만 700고쿠다카): 1643년 ~ 1871년
초대 번주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1627년 입봉했으나 곧 사망하고 아들 마쓰시타 나가쓰나가 뒤를 이었지만 1628년 전봉되었다. 이후 가토 아키토시가 번주가 되었으나 1641년 영지를 몰수당했다. 1643년부터는 니와 미쓰시게가 입봉하여 메이지 유신까지 니와 가문이 니혼마쓰번을 다스렸다. 니와 가문 시대에 번의 고쿠다카는 10만 700석으로 크게 늘었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5만 700석으로 감봉되었다. 각 가문과 번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3. 1. 마쓰시타 가문 (도자마, 3만 석)
wikitext|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석고 | 비고 |
|---|---|---|---|---|---|---|
| -- 마쓰시타 씨 (도자마) 1627년 ~ 1628년 | ||||||
| 1 | 마쓰시타 시게쓰나 松下重綱|마쓰시타 시게쓰나일본어 | 1627년 | 이와미노카미 (石見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만 고쿠 | 가라스야마 번에서 전봉 |
| 2 | 마쓰시타 나가쓰나 松下長綱|마쓰시타 나가쓰나일본어 | 1627년 ~ 1628년 | 이와미노카미 (石見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만 고쿠 | 미하루 번으로 전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