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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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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중앙당은 1870년 창당된 독일의 정당으로,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되었으나,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등장으로 지지 기반을 상실했고, 1957년 연방 의회에서 의석을 잃었다. 이후 지역 정치에 집중하며, 1988년 우익 분리, 2003년 독일 기독교당 합류 등의 변화를 겪었다. 2022년 연방 의회 의석을 잠시 확보하기도 했다. 이념적으로 기독교 민주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며, 사회 시장 경제와 법과 질서 강화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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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앙당
기본 정보
이름독일 중앙당
원어 이름Deutsche Zentrumspartei
로마자 표기Doiche Jenteureumspartei
약칭Zentrum
창립자요제프 괴레스
창립일1870년 12월 13일 (원래 형태), 1945년 (현재 형태)
본부 위치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도르마겐
당원 수약 600명 (2022년 추정)
이념 및 정치 성향
정치 이념기독교 민주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
정치 성향중도우파
종교가톨릭교회
의회 및 정부
지도부
당수크리스티안 오테
의장요아힘 비텐베르크
과거
준군사 조직(1924–1930)
상징
색상검은색
흰색
파란색
관련 정보
공식 웹사이트www.zentrumspartei.de

2. 역사

독일 중앙당은 1870년 프로이센 왕국 의회 의원 48명에 의해 창설되었다.[49]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후에는 독일 제국 제국의회에서 63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구성원 대다수는 가톨릭교회 신자였지만, 창당 당시부터 소수이지만 프로테스탄트도 있었다. 강령상으로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는 정당으로 명시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의 반가톨릭 공세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를 수호하고, 가톨릭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창설된 정당이었다.[49]

당명 "중앙(Zentrum)"은 보수파와 자유주의파의 중간에 선다는 의미였다. 제정기의 중앙당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자주 입장을 바꿨기 때문에 "기회주의 정당"이라고도 불렸다. 중앙당은 가톨릭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함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에서 가톨릭은 열세였고, 문화투쟁 시기에는 격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체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체제 지지적인 태도를 보여 가톨릭의 약점을 보완해야 했다.

중앙당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혼합된 사상을 가졌다. 개인과 소수파의 권리를 옹호하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적이었지만, 초기에는 입헌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중에 입헌주의가 소수파 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입헌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가톨릭의 생활 신조는 전통과 권위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특히 독일 가톨릭은 낭만주의와 결합하여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보수적인 반역을 시도했다. 중앙당은 반부르주아적인 고도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그 시각은 중세주의와 종교의 정신적 성격이라는 전통주의에 기반했다. 이처럼 중앙당은 다원적이고 이질적인 정당이었지만, 가톨릭교회의 이익 아래에서 통일하려는 정당이었다.

중앙당 결성으로 가톨릭의 전독일적인 정치적 결집체가 형성되자, 자유주의 세력 및 제국 정부와의 대립이 뚜렷해졌다. 또한, 가톨릭이 강세였던 남독일과 남서독일의 방국(邦國)을 중심으로 반프로이센적 방국분립주의와 반제국 정부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주로 농민, 수공업자, 기능공이었고,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 발전으로 불이익을 받는 입장이었기에 정부의 공업화 추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가톨릭의 반정부 활동과 반정부 세력이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는 것을 우려하여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에게 격렬한 탄압을 가했다(문화투쟁).[50] 비스마르크가 가톨릭 탄압을 결심한 계기 중 하나는 중앙당의 결성이었다.[50] 가톨릭 교회 탄압 법률이 잇따라 제정되는 가운데, 1876년까지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 전원이 체포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1880년까지 가톨릭 사제 4600명 중 1100명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50]

가톨릭 신자들의 저항 운동은 교회와 중앙당이 주도했다. 중앙당의 결속력은 강해졌고,[51] 가톨릭 신자의 80%가 중앙당에 투표했으며,[51] 1873년 프로이센 왕국 의회 하원 선거와 독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중앙당은 약진했다.[50]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의 부상으로 1870년대 후반부터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과의 화해를 모색하여 탄압을 완화했다. 그 결과, 정부와 가톨릭의 격렬한 적대 관계는 종식되었고, 중앙당의 결속력도 느슨해지면서 1880년대 중반부터 득표율이 크게 감소했다.[51]

1887년에는 교황과 비스마르크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었다. 중앙당은 문화투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요구했지만, 교황은 독일 정부가 가톨릭 성직자의 양성과 임명에 개입하는 5월법(May Laws)의 폐지만을 요구했고, 비스마르크는 이에 응했다.[50] 화해 방식을 둘러싸고 중앙당과 교황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지만, 이는 중앙당이 완전한 가톨릭 교회의 종속 정당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49] 중앙당은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사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했고, 중앙당 지도부는 교회와는 별개의 의회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앙당은 처음에는 “승리의 평화”를 지지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점차 “화해의 평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1917년 7월 19일, 사회민주당, 중앙당, 진보인민당은 강제 합병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안을 제국 의회에서 채택시켰다. 1918년 10월, 막시밀리안 폰 바덴을 총리로 하는 바덴 내각이 탄생했다. 이 내각은 사회민주당, 중앙당, 진보인민당으로 구성된 독일 역사상 최초의 정당 내각이었다. 중앙당은 에르츠베르거의 지도하에 의회 정치 도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된 후, 중앙당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임시 정부에서 이차적인 역할에 그쳤지만,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 숲에서 이루어진 휴전 협정에 독일 대표로 에르츠베르거가 참가했다.

1919년 선거에서 중앙당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중앙당은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DDP)과 협력하여 바이마르 헌법을 작성, 독일 가톨릭의 평등과 가톨릭 교회의 자치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학교 문제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중앙당은 실용적인 원칙에 따라 군주제와 공화제를 모두 지지할 수 있었으며, 주요 정당 중 하나였다. 사회민주당(SPD), 독일민주당(DDP)과 바이마르 연정을 통해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 연정은 1920년 선거에서 다수당 지위를 상실했다. 중앙당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요제프 비르트와 같은 공화주의자와 프란츠 폰 파펜과 같은 우익 인사를 모두 포함했다. 당의 유연성 덕분에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좌우 연정을 통해 모든 정부에 참여했다. 중앙당은 주로 재무, 노동 장관과 총리(4회)를 배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연성은 공화국의 모든 갈등, 문제, 실패와 중앙당이 연관되게 만들어 당의 전망을 해쳤다.

1928년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고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KPD)이 승리했다. 1923년 대연정이 부활, BVP 포함, 사회민주당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동안 당의 가톨릭 성격 논쟁은 지속되었다. 1928년 9월 당내 갈등 중재, 주교 유대 강화 위해 요제프 요스, 아담 슈테거발트 대신 성직자 루트비히 카스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19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 정권이 붕괴된 후, 중앙당 중심의 연립 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소당 분립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연립 내각이 전제였고, 중도의 중앙당은 좌우 연립이 가능했다. 특히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과 연립하여 중도좌파 자유주의 여당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 정부에서는 우익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하기도 했지만, 프로이센 주에서는 일관되게 바이마르 연합에서 여당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사민당과 함께 가장 많은 총리를 배출, 역대 정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콘스탄틴 페어렌바흐(1920년 6월-1921년 5월), 요제프 비르트(1921년 5월-1922년 11월), 빌헬름 마르크스(1923년 11월-1924년 12월, 1926년 5월-1928년 6월), 하인리히 브뤼닝(1930년 3월-1932년 5월) 4명이 중앙당 소속이었다.[60] 프란츠 폰 파펜도 원래 중앙당 소속이었지만, 내각 구성 요청을 어기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에 임명되어 중앙당은 파펜을 제명하고 이후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1928년 가톨릭 고위 성직자인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에 취임한 후, 1933년 히틀러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수권법 통과에 찬성하여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합법적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 수권법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률로, 히틀러는 중앙당을 위협하여 지지를 이끌어냈다.[80] 중앙당의 고위직은 이 법의 통과를 적극 지지했으며, 중앙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 법은 통과할 수 없었고 히틀러의 집권도 없었을 것이다.

1933년 3월,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이 공동으로 수권법을 제출하자, 사회당과 공산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 공산당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체포수배령이 내려져 출석하지 못했고, 사민당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중앙당은 73석 중 72표를 찬성하여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다.[81] 이후 나치와 바티칸의 정교협약을 맺은 뒤, 중앙당은 바티칸의 압력으로 1933년 7월 5일 해산했다. 7월 14일, 새로운 정치단체 조직 금지법이 발표되고 나치당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정당으로 선포되었다.[82]

1933년 국회의사당에서 수권법 지지를 연설하는 히틀러.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크롤 오페라 하우스에서 진행되었다.


중앙당은 권한법 문제로 분열되었다. 카스 의장은 정부의 보장(대통령실 거부권 유지, 종교 자유, 문화, 학교 및 교육에 대한 중앙당의 참여, 독일 주들이 체결한 콘코르다트, 중앙당의 존재 등)을 조건으로 법안 지지를 옹호했다. 히틀러는 긍정적으로 답변했지만 서면 합의서 서명을 미루었다. 카스는 이러한 보장의 불확실성을 알면서도, 1933년 3월 23일 중앙당이 투표를 결정하기 위해 모였을 때, 당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당원들에게 법안을 지지할 것을 권고했다.[19]

하지만 중앙당은 1933년 2월 말 이후 받은 엄청난 협박 때문에 콘코르다트를 원했다. 1933년 3월 5일 선거 운동 중 중앙당 회의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 가톨릭 평신도 단체들의 강제 폐쇄, 가톨릭 언론인과 신문 편집인들의 체포, 저명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학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앙당은 콘코르다트를 대가로 자체 해산에 동의했다.[20]

전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을 포함한 상당수의 의원들이 의장의 방침에 반대했다. 브뤼닝은 이 법안을 "의회에 요구된 가장 끔찍한 결의안"이라고 불렀다. 반대파는 가톨릭 사회 교리가 혁명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중앙당 의원 대다수가 카스의 제안을 지지했고, 브뤼닝과 그의 추종자들은 당의 규율을 존중하여 법안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중앙당은 계획대로 권한법에 찬성했고, SPD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도 그렇게 했다. 이 법안은 1933년 3월 23일에 통과되었다.

수권법 통과는 중앙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중앙당은 당원들의 대규모 탈당, 공무원과 다른 가톨릭 단체의 충실한 당원들에 대한 보복, 나치즘에 대한 반대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당국과의 협력 금지를 수정한 독일 주교들의 선언으로 타격을 입었다.[21][22] 카스의 로마 체류가 길어지면서, 1933년 5월 5일 카스는 그의 직책에서 사임했고, 당은 브뤼닝을 그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당은 총통원칙의 완화된 버전을 채택했지만, 획일화 과정의 여파로 당과 다른 당들이 직면한 증가하는 압력을 완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저명한 당원들이 자주 체포되고 구타당했고, 중앙당 지지 공무원들은 해고되었다. 1933년 여름, 프란츠 폰 파펜을 포함한 여러 정부 관리들은 중앙당의 해산을 요구했다.

1933년 7월, 중앙당은 명목상으로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일한 비나치 정당이었다. 7월 1일, 파펜과 카스는 콘코르다트의 일환으로 독일 사제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당은 7월 5일 해산되었는데, 이는 카르디날 파체리의 불만을 샀다. 그는 당이 최소한 협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정부는 새로운 정당의 결성을 금지하는 법률을 발표하여 NSDAP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정당으로 만들었다.

전후 중앙당은 재건되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기독교 정당으로 새롭게 결성된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등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콘라트 아데나워와 같은 많은 전 중앙당 정치인들이 CDU의 창립 멤버가 되었거나 CDU에 합류했고, 쾰른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이 신생 정당을 지지함에 따라, 중앙당은 가톨릭 인구의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14] 그러나 한동안 중앙당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지역 거점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945년 루돌프 아멜룬크센이 신생 주의 초대 주지사가 되었고, 1958년 주 의회를 떠날 때까지 주 정부에 참여했다. 1959년까지 중앙당은 니더작센주 주 의회에도 진출해 있었다.[23]

전국적으로는 1949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 제1번째 분데스탁(Bundestag)에서 10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1953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지역 CDU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석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1957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그 해 CDU의 압도적인 승리로 인해 분데스탁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2022년까지 복귀하지 못했다.[23]

이러한 몰락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헬레네 베셀 때문이다. 1949년 그녀는 분데스탁에서 중앙당 대표 중 한 명이었으며, 독일 정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으로 당수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1년 그녀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독 재군비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전 내무장관인 CDU의 구스타프 하이네만과 힘을 합쳤다. 두 사람은 재군비를 막기 위한 이니셔티브인 "유럽 평화 구출을 위한 비상 공동체"를 결성했다. 베셀은 당수직에서 사퇴했고, 1952년 11월 당을 탈당했다.[23] 곧이어 베셀과 하이네만은 "비상 공동체"를 전독일인민당(GVP)이라는 정당으로 만들었지만, 1953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1957년 GVP는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당원들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합류했다.[23]

한편, 중앙당의 생존자들은 실망한 CDU/CSU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기독교적 성향의 소규모 정당 연합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바이에른당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두 정당은 1951년부터 의회에서, 그리고 1957년 총선에서 연방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23] 1988년, 당의 우익이 분리되어 "기독교 중앙당"을 결성했다. 2003년 복음주의계 "독일 기독교당"이 중앙당에 합류했다.[23]

전국적 수준에서의 몰락 이후, 중앙당은 전후 시대와 같은 입장을 유지하면서 지역 정치에 집중하고 있다.[23] 중앙당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작센안할트주의 일부 시의회에 진출해 있다. 미미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은 때때로 자신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라고 부르며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한다. 당헌에 따르면, 당의 공식 명칭은 "독일 중앙당 - 1870년 창당 독일 최고령 정당"이다.[23] 현재 당 대표는 클라우스 브랄이다.[23] 이 당은 유럽 기독교 정치 운동에 가맹되어 있다.[23]

2022년, 전 독일을 위한 대안(AfD) 당원 우베 비트가 연방의회 의석을 유지한 채 이 당에 합류했다. 1957년 이후로 이 당이 연방의회 의석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다.[24] 비트는 같은 해 8월 당에서 탈당했다.[25] 이 당은 또한 2022년 6월 10일 전 독일을 위한 대안(AfD) 공동 대표 외르크 모이텐이 합류하면서 유럽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했다.[26] 그러나 모이텐은 2023년 9월 당을 떠났다.[27]

2. 1. 초기 역사 (~1870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9세기 초 정치적 가톨릭주의 사상이 등장하면서 독일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국가 사이에 발생한 최초의 큰 충돌은 프로이센 정부가 이종교간 결혼 및 어린이의 종교적 믿음에 간섭하면서 발생한 "콜로니아 교회 분쟁"이었다. 이 분쟁은 쾰른 대주교가 체포되면서 라인란트, 베스트팔렌의 가톨릭교도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당시 정치적 가톨릭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요셉 괴레스는 가톨릭교도들이 "종교적 자유 및 교단의 정치적, 시민적 평등"이라는 목표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충돌은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1848년 혁명은 독일 가톨릭교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10월에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40년 만에 주교 회의가 열렸고, 마인츠의 지역 "가톨릭 조직"들이 모여 "독일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 독일 헌법 제정을 위해 소집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가톨릭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포괄적인 정당은 아니었지만, 미래 독일의 가톨릭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모인 느슨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으로, "종교 자유 비호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국민의회가 붕괴되면서 정치 가톨릭주의는 큰 타격을 받았다.

페터 라이헨슈페르거


죄스트 전경


1870년부터 1933년까지 중앙당의 공식 깃발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개정된 1850년 헌법이 부분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보다 나은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나 2년 후, 문화 장관 라우머는 주로 예수회를 겨냥한 법령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 선거에서 가톨릭 대표자의 수가 두 배로 늘었고, 프로이센 지방 의회에 가톨릭 클럽이 결성되었다. 1858년 빌헬름 1세의 "신시대" 정부가 관대한 정책을 채택하자, 클럽은 비가톨릭 신자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중앙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이름은 지방 의회에서 가톨릭 대표들이 우익 보수파와 좌익 자유주의파 사이 중앙에 앉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군사 및 헌법 문제에 대한 교회의 명확한 입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 단체는 곧 해체되었고 1867년 이후 의회에서 사라졌다.

증가하는 반가톨릭 정서와 프로이센의 모든 수도원 해산 계획을 포함한 정책들은 가톨릭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1850년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보장하며, 신흥 국가에 이들을 편입시키기 위해 그룹의 재편성이 시급함을 보여주었다.

1870년 6월, 페터 라이헨슈페르거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단결을 촉구했고, 10월에 사제들, 가톨릭 연합 대표들, 그리고 가톨릭 귀족들은 죄스트에서 만나 선거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헌법에 따라 인정된 교회의 자율성과 권리 보장. 교회 단체의 독립, 종교 생활 발전, 그리고 기독교 자선 실천에 대한 어떤 공격으로부터의 방어.
인정된 종교 단체에 대한 실질적인 동등성 보장.
결혼의 비기독교화 시도 거부.
종파 학교의 보존 또는 설립.



더 일반적인 요구 사항으로는 더욱 연방적이고 분권화된 국가, 국가 지출 제한, 공정한 세금 분배, 중산층의 재정 강화, 그리고 "근로자를 도덕적 또는 신체적 파멸로 위협하는 그러한 악한 상태를 법적으로 제거"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선언으로 프로이센 의회에서 가톨릭 대표의 수가 상당히 증가했다. 1870년 12월, 그들은 헌법적 자유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헌법당"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중앙" 파벌을 결성했다.

1871년 초, 새로운 국회인 라이히스타크의 가톨릭 대표들도 "중앙" ''파벌''을 구성했다. 이 당은 교회의 자유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대의 정부와 일반적인 소수자 권리, 특히 독일 폴란드인, 알자스인, 하노버인의 권리를 지지했다. 중앙당의 주요 지도자는 하노버 변호사 루트비히 빈트호르스트였고, 다른 주요 인물로는 칼 프리드리히 폰 자비니, 헤르만 폰 말린크로트, 부르크하르트 프리히어 폰 쇼를레머-알스트, 형제 아우구스트 라이헨슈페르거와 페터 라이헨슈페르거, 프란츠 폰 발레스트렘, 그리고 게오르크 백작 헤르틀링이 있었다. 이 당은 국회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좌익 자유주의자들과 우익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앉았기 때문에 중앙당이라고 명명되었는데, 현대적 의미의 중도주의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독일 주들에서도 가톨릭 정당이 결성되어 라이히스타크에서 프로이센 중앙당과 협력했다.


  • 바이에른에서는 1887년 "바이에른 중앙당"으로 개명된 특수주의적 보수 성향의 "바이에른 애국당"이 있었다.
  • 가톨릭 국민당은 1869년 바덴 대공국에서 결성되었고, 1888년 중앙당과 합병되었다.

2. 2. 중앙당 창당과 문화투쟁 (1870~1890년)

1870년 12월 13일, 프로이센 왕국 의회 의원 48명에 의해 중앙당이 창설되었다. 독일 제국 성립 후 새로운 독일 제국 제국의회에서는 1871년 3월 3일 63명의 의원에 의해 결성되었다. 구성원 대다수는 가톨릭교회 신자였으며, 가톨릭 정당의 측면이 강했지만, 창설 당시부터 소수이지만 프로테스탄트도 있었다. 강령상으로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는 정당으로 명시되어 있었을 뿐 어떤 종파를 옹호한다는 내용은 없었다.[49]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의 반가톨릭 공세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를 수호하고, 가톨릭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창설된 정당이었다.

당명 "중앙(Zentrum)"은 보수파와 자유주의파의 중간에 선다는 의미였다. 제정기의 중앙당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기회주의 정당"이라고도 불렸다.

중앙당이 그러한 입장에 선 것은, 첫째로 가톨릭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 결합한 정당이었고, 당원에게는 기업가와 대지주부터 수공업자,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 상황에 따라 어떤 계층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 둘째로 프로테스탄트 국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제국에서 가톨릭은 열악한 위치에 있었고, 문화투쟁기에는 격렬한 박해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체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체제 지지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가톨릭의 약점을 메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도 중앙당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혼합물이었다. 국가의 불필요한 간섭에 반대하고 개인·소수파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의에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입헌주의가 다수파에 대항하여 소수파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입헌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한편 가톨릭의 생활 신조는 전통과 권위에 뿌리를 둔 것이며, 특히 독일 가톨릭의 경우에는 낭만주의와 결합되어 있었다. 낭만주의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이며, 근대 합리주의에 대해 보수적인 반역을 행했다. 중앙당은 반부르주아적인 고도 자본주의에 적대하는 견해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시각도 어디까지나 중세주의와 종교의 정신적 성격이라는 전통주의에 있었다. 이와 같이 중앙당은 조화되지 않는 여러 요소와 여러 흐름을 겸비한 다원적·다면적인 동시에 이질적인 정당이었지만, 정당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조화·균형시키려고 했다. 좌우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좌우 양쪽의 유권자를 흡수하고, 가톨릭교회의 이익 아래에서 통일시키려는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당 결성으로 가톨릭의 전독일적인 정치적 결집체가 형성되자, 자유주의 세력 및 이와 연계된 제국 정부와의 대립이 뚜렷해졌다. 또한 반프로이센적 방국분립주의(邦國分立主義)와 반제국 정부 의식이 고조되었다. 가톨릭이 반프로이센 의식이 강한 남독일·남서독일의 방국(邦國)에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지역의 가톨릭 신자는 농민, 수공업자, 기능공이 많았고,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으로 불이익을 받는 입장이었기에 정부의 공업화 추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가톨릭의 반정부 활동, 그리고 가톨릭을 매개로 반정부 세력이 프랑스오스트리아와 결탁하는 것을 우려하여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에게 격렬한 탄압을 가했다(문화투쟁).[50] 비스마르크가 가톨릭 탄압을 결심한 계기 중 하나는 중앙당의 결성이었다.[50]

가톨릭 교회 탄압 법률이 잇따라 제정되는 가운데, 1876년까지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 전원이 관헌에 체포되거나 국외 추방되었다. 마찬가지로 1880년까지 가톨릭 사제 4600명 중 1100명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50]

가톨릭 신자들의 저항 운동은 교회와 중앙당이 주도했다. 프로테스탄트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해 중앙당의 결속력은 강해졌다.[51] 가톨릭 신자의 80%가 중앙당에 투표했고,[51] 1873년 프로이센 왕국 의회 하원 선거와 독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중앙당이 약진했다.[50] 그러나 가톨릭보다 더 골치 아픈 사회주의 세력의 부상으로 1870년대 후반부터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과의 화해를 모색하여 탄압을 완화했다. 결과적으로 정부와 가톨릭의 격렬한 적대 관계가 종식을 향해 나아갔고, 중앙당의 결속력도 느슨해지면서 1880년대 중반부터 득표율이 크게 감소했다.[51]

1872년부터 중앙당은 문화투쟁에 완강히 저항했다.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교단이 장악했던 학교의 감독권은 물론, 성직자의 임명감독권까지 국가에 넘기도록 했다. 또한 1872년 제국 의회에서 가결된 예수회법을 통해 수도공동체들인 예수회와 대속회, 라자로회가 제국에서 추방당했고, 이들 소속의 수도회들은 해산되었다. 독일 태생 예수회원들은 시민권을 제한받았으며, 외국 태생 예수회원인 경우에는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해 12월 독일은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중앙당은 이에 대해 반정부 팜플렛 제작과 불복종 운동 등을 펼치며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1871-81년 사이 라인란트 지역 내 가톨릭 신문의 수는 30개에서 65개로 증가하고 구독자 또한 약 70,000명에서 170,000명으로 늘어나는 등, 문화투쟁 기간 동안 가톨릭 언론매체는 오히려 급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1874년 선거에서 중앙당은 이전의 두 배의 득표율을 얻어, 의회 내 91석을 확보하였다. 당시 중앙당은 제국의회 선거에서, 전체 가톨릭 신자들의 83% 라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78년 2월 7일 교황 비오 9세가 사망한 후 레오 13세가 교황직을 승계하자, 제국과의 협상을 통해 문화투쟁을 종결시키고자 했다. 그는 독일 제국 황제에게 타협과 화해를 바라는 서신을 보냈고, 중앙당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문화투쟁을 지속할 의향이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78]

1887년에는 교황과 비스마르크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었다. 중앙당은 문화투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요구했지만, 교황은 독일 정부가 가톨릭 성직자의 양성과 임명에 개입하는 5월법(May Laws)의 폐지만을 요구했고, 이에 응한 비스마르크와 교황 사이에 화해가 성립된 것이다.[50] 화해 방식을 둘러싸고 중앙당과 교황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당은 완전한 가톨릭 교회의 종속 정당은 아니었다.[49] 이는 중앙당이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사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중앙당 지도부는 교회와는 별개의 의회 전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에서 "소수파"에 속하는 세력은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었지만, 중앙당은 이들 세력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종교를 공적 생활에서 분리하여 사적 생활에 밀어넣으려 했지만, 중앙당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49] 이러한 사람들에게 중앙당은 성모 마리아(무염시태) 신앙, 오류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 교황 무류설 등의 "비합리성", "퇴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51]

2. 3. 빌헬름 시대 (1890~1918년)

문화투쟁이 끝날 무렵, 당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1906년 율리우스 바켐이 "우리는 탑에서 나와야 한다!(We must get out of the tower!)"라는 기사를 발표한 후 중앙당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가톨릭 정치인들에게 빈트호르스트의 말을 이행하고 의회 내 대표자 수를 늘리기 위한 노력을 통해 지속적인 소수의 위치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했다. 그의 제안은 특히 기독교 노동조합과 다른 가톨릭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대중의 대부분으로부터 열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회민주당은 “화해의 평화”를 주장했다. 중앙당은 처음에는 보수 세력이 주장한 “승리의 평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황 악화로 점차 “승리의 평화”론에서 벗어나, 1916년 7월 초 제국 의회에서는 에르츠베르거가 해군 비판을 가했다.[57]

1916년 말부터 1917년 초 겨울에 독일은 물질적 궁핍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그 때문에 이후, 굶주림에 시달리는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항의 활동이 곳곳에서 빈발하게 되었다. 독일 국내의 위기적 상황은 의회 주류파의 움직임도 자극했다. 에르츠베르거의 주도하에 중앙당도 “화해의 평화” 사상에 편승하게 되어, 1917년 7월 19일에는 사회민주당, 중앙당, 진보인민당의 삼당이 강제 합병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안을 제국 의회에서 채택시켰다. 다만 당초 목표했던 무배상·무병합 원칙은 국민자유당 등 부르주아 정당의 반발이 강했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총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가 “내가 해석하는” 결의 취지에 노력한다는 제한을 붙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1918년 10월 3일에는 연합국과의 강화 준비 내각으로 연합국으로부터 자유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을 총리로 하는 바덴 내각이 탄생했다. 이 내각의 각료는 사회민주당, 중앙당, 진보인민당의 삼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으로 의회 과반수를 넘었기 때문에, 독일 역사상 최초의 정당 내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바덴 내각 하의 10월 22일부터 26일 제국 의회에서 정치적 민주화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논의 속에서 중앙당은 에르츠베르거의 강력한 지도에 의해 의회 정치 도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1월 6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4개조 평화 원칙”에 기초한 강화에 응할 준비가 있다고 표명하자 빌헬름 그뢰너 참모차장의 추천에 의해 바덴은 중앙당의 에르츠베르거를 강화 조약 체결의 독일 정부 대표로 지명했다.[58]

11월 9일에는 사회민주당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총리가 되고,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했다. 11월 10일에는 사회민주당과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이 3명씩 위원을 내는 임시 정부 “인민 대표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중앙당은 정권에서 제외되어 이차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쳤지만, 11월 11일 파리 콩피에뉴 숲에서 이루어진 휴전 협정에 독일 대표로 참가한 것은 에르츠베르거였다.

2. 4.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1919~1933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이 참전하면서, 중앙당은 전쟁 채권 논쟁을 이용하여 반(反)예수회법 잔재를 폐지하려 했다. 1916년, 국회는 중앙당 제안 결의안을 채택, 정부가 잠수함 사용에 대한 ''최고군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 OHL)''의 권고를 따르도록 했다. 최고군사령부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는 전쟁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는 목적이었으나, 미국 참전을 야기했다.[8] 전쟁 중,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 등 중앙당 좌익 지도자들은 협상을 통한 해결을 지지했고, 에르츠베르거는 1917년 국회 평화 결의안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중앙당의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Georg von Hertling) (바이에른 주총리 역임)이 총리에 임명되었으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군부 지도력을 극복하지 못했다. 1918년 10월 의회 정부 도입 후, 막스 폰 바덴 총리는 중앙당, 사회민주당, 좌파 자유주의자들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몰락한 후, 중앙당과 사회민주당 정부 간 갈등이 발생했다. 프리드리히 폰 호프만(Adolph Hoffmann) 프로이센 자유국 문화부 장관은 학교에서 종교를 제거하는 완전한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시도했다. 이는 가톨릭계의 반발을 불러왔고, 주교, 가톨릭 단체, 중앙당은 연합하여 "적색 위험"에 맞섰다. 이 갈등은 당내 긴장을 해소하고 혁명 속에서도 당의 존재를 확보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지부가 분리되어 바이에른 인민당(Bavarian People's Party, BVP)을 결성, 주 자치권을 강조하고 보수 노선을 취하며 당은 약화되었다.[9]

1919년 선거에서 중앙당은 91석을 얻어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중앙당 콘스탄틴 페어렌바흐(Constantin Fehrenbach)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당은 사회민주당, 좌파 자유주의 독일 민주당(Deutsche Demokratische Partei, DDP)과 협력하여 바이마르 헌법을 작성, 독일 가톨릭의 평등과 가톨릭 교회의 자치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학교 문제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종교 교육은 대부분 학교에서 일반 과목으로 유지되었지만, 종교를 초월한 포괄적인 학교가 기본이 되었다.

중앙당(Zentrum)은 실용적 원칙으로 군주제와 공화제를 모두 지지할 수 있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주요 정당 중 하나였다. 사회민주당(SPD), 독일민주당(DDP)과 바이마르 연정을 통해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 연정은 1920년 선거에서 다수당 지위를 상실했다. 1920년 5월 라인란트에 새로운 기독교인민당이 결성되자 중앙당 지도부는 우려를 표명했다. 전쟁 말기 중앙당의 좌경화로 보수 가톨릭 인사들이 이탈하자, 아담 슈테거발트(Adam Stegerwald)는 독일을 "기독교적, 민주적, 독일적, 사회적"으로 만들겠다는 약속과 광범위한 기독교 정당 구성을 담은 "에센 프로그램"[10](1920년 9월)을 제시했다.

중앙당은 가톨릭 정치인들의 이념적 연합체였으며,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 요제프 비르트(Joseph Wirth) 같은 공화주의자와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같은 우익 인사를 모두 포함했다. 당의 유연성 덕에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좌우 연정을 통해 모든 정부에 참여했다. 중앙당은 주로 재무, 노동 장관과 총리(4회)를 배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연성은 공화국의 모든 갈등, 문제, 실패와 중앙당이 연관되게 만들어 당의 전망을 해쳤다. 중앙당은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비난, 특히 우익의 1차 대전 패배 책임론(돌격대 신화(Stab-in-the-back myth)), 베르사유 조약 및 배상금으로 인한 수치심을 공유했다. 휴전 협정에 서명한 에르츠베르거는 1921년 우익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 독일 총리 (1923-1925, 1926-1928)


1927년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 총리 내각


바이마르 연정(사회민주당, 중앙당, 독일민주당(DDP))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기반이었으나 192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잃었다. 이후 바이마르 연정과 국민자유당(DVP) 지지가 필요했기에 과반수 정부는 드물었다. 사회민주당과 DVP는 경제 정책 합의에 어려움을 겪었고, 사회민주당은 종교 학교, 교황청과의 콘코르다트(Concordat) 등에서 중앙당과 의견이 달랐다.

1920년 선거 후 중앙당 콘스탄틴 페렌바흐(Constantin Fehrenbach)는 DDP, DVP와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1921년 5월 바이마르 연정은 중앙당 요제프 비르트(Joseph Wirth)를 총리로 다시 연합했으나, 1922년 11월 붕괴했다. 이후 중앙당은 자유주의 양당, 바이에른인민당(BVP)과 함께 빌헬름 쿠노(Wilhelm Cuno)의 "경제 정부"에 참여했다.

1923년 8월 DVP 구스타프 스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은 중앙당, 자유주의 양당, 사회민주당으로 대연정을 구성, 11월까지 지속되었다(사회민주당 탈퇴 후 중앙당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가 총리). 1925년 1월 한스 루터(Hans Luther)가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당, 자유주의 양당, BVP, 우익 독일국민인민당(DNVP)과 연정했다. 중앙당, BVP, DNVP는 종교 학교 확장 법안을 공동 지지했다.

같은 해 빌헬름 마르크스는 대통령 선거 중앙당 후보였다. 2차 투표에서 바이마르 연정 정당 지지를 얻어 45.3% 득표, 우익 후보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48.3%)에게 근소하게 패했다. 1926년 5월 루터 총리 사임 후 마르크스가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28년 6월 총선에서 여당 패배,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승리했다. 1923년 대연정이 부활, BVP 포함, 사회민주당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동안 당의 가톨릭 성격 논쟁은 지속되었다. 에르츠베르거, 비르트의 좌익은 요제프 요스(Joseph Joos)의 가톨릭 노동자 협회와 긴밀했다.[11] 하인리히 브라운스(Heinrich Brauns),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등 당 우익 일부는 우경화, 국민 운동 협력을 주장했다.[12] 중도는 교회 충성심을 강조, 양극단을 거부했다. 1928년 9월 당내 갈등 중재, 주교 유대 강화 위해 요제프 요스(Joseph Joos), 아담 슈테거발트(Adam Stegerwald) 대신 성직자 루트비히 카스(Ludwig Kaas)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중앙당은 1918년 6월 30일 강령에서 “강력한 군주제 유지”를 내걸어 공화주의 정당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 혁명으로 상황이 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교회 공격 심화, 기독교와 가톨릭 신념, 교회 권리 위기로 중앙당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방지를 위해 국민의회 소집, 발판 마련 인식을 강화했다. 특히 에르츠베르거는 레테 독재(국민의회 소집 부정)를 노리는 독립사민당에 대항, 사민당과 협력하여 국민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에르츠베르거의 사민당 친화 행동은 “혁명 동맹”, “사회주의 심연 추락”, “중앙당 원칙 부정” 비판도 받았지만, 국가 질서 구제를 위해 사민당 연대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가톨릭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1918년 12월 24일 독립사회민주당이 임시 정부 “인민위원회”에서 하야하자, 사민당 정권과 에르츠베르거 연대는 깊어지고, 국민의회 소집 결정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30일 프랑크푸르트 중앙당 전국위원회는 “신질서는 주어진 사실 위에 만들어져야 한다. 군주제 붕괴 후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민주적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방침을 결의했다. 1919년2월 13일 국민의회 정강 연설에서 중앙당 의원단 대표는 “어떤 공권력이든, 군주주의적이든 공화주의적이든, 모두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중앙당은 교권주의만이 공통 원칙이었고, 특정 국가 형태에 고집하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부르주아 정당 중 공화제 반발이 가장 적었다.[59]

국민의회에서 바이마르 헌법 채택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중앙당은 기독교 가치관이 위협받지 않는 한 공화국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20년 6월 6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 정권 붕괴 후, 중앙당 중심 연립 정권 시대가 시작된다. 소당 분립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연립 내각이 전제였고, 중도 중앙당은 좌우 연립이 가능했다. 특히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과 연립, 중도좌파 자유주의 여당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 정부에서는 우익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하기도 했지만, 프로이센 주에서는 일관되게 바이마르 연합에서 여당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사민당과 함께 가장 많은 총리를 배출, 역대 정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콘스탄틴 페어렌바흐(1920년 6월-1921년 5월), 요제프 비르트(1921년 5월-1922년 11월), 빌헬름 마르크스(1923년 11월-1924년 12월, 1926년 5월-1928년 6월), 하인리히 브뤼닝(1930년 3월-1932년 5월) 4명이 중앙당 소속이었다.[60] 프란츠 폰 파펜도 원래 중앙당 소속이었지만, 내각 구성 요청을 어기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에 임명되어 중앙당은 파펜을 제명, 이후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중앙당은 항상 정권 여당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정치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특히 3회 총리 마르크스, 장기간 노동 장관 존재로 정책 일관성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내에는 공화국 지지 세력과 공화국 체제 잠정 세력 대립이 있었다. 1920년 바이에른 지부 독립, 바이에른 인민당 설립. 1928년 당내 대립 심화, 성직자 루트비히 카스 당수로 조정 시도했다.

2. 5. 브뤼닝 정부와 나치당의 부상 (1930~1933년)

1928년 가톨릭 고위 성직자인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추구하였고, 1930년 3월 총리에 취임한 장교 출신인 하인리히 브뤼닝과 협력하여 당을 우익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브뤼닝의 후임으로 총리에 오른 프란츠 폰 파펜과 함께 1933년 7월 교황청과 나치 사이에 정교협약(Reichskonkordat)를 체결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나치 정권을 국제관계에서 최초로 승인해 줌으로써 나치당의 위세를 상승시켜 주었다.[79] 이후 히틀러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수권법 통과에도 찬성 몰표를 던져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합법적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 히틀러는 공산당에 긴급령을 사용했던 것처럼 중앙당을 위협함으로써 중앙당의 지지를 이끌어냈다.[80] 가톨릭 중앙당의 고위직은 이 법의 통과를 적극 지지했다. 결국 가톨릭 중앙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 법은 통과할 수도 없었고 히틀러의 집권도 없었다.

1933년 3월, 제1당인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의 공동 법안 형식으로 수권법이 제출되자 제2당 사회당과 제3당 공산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 공산당은 2월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수배령이 내려져 출석도 못했고, 사민당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독일 중앙당은 당시 73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72표의 찬성표를 던져 히틀러의 집권을 도와준다.[81] 이후 나치와 바티칸의 정교협약을 맺은 후, 중앙당은 바티칸의 압력으로 1933년 7월 5일 해산한다. 그리하여 7월 14일 새로운 정치단체 조직 금지법이 발표되고 나치당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정당임이 선포되었다.[82]

가톨릭 교회가 히틀러의 수권법에 몰표를 던져 집권을 도와준 배경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집권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역시 이탈리아 가톨릭 정당인 스트루초의 이탈리아 민중당 (1919년)의 도움으로 아체르보 법을 통과시켜 권력을 장악한 바 있다.[83]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감과 파펜 내각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중앙당과 나치당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1933년 히틀러 내각이 출범하고 독일의 치안 권력이 나치당에 의해 장악된 후, 카이스와 중앙당은 전권위임법에 대한 찬성을 강요받았다. 중앙당 간부회는 거부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내에서 예비 투표가 실시되었지만, 반대자는 12명 정도였으며, 다수결 원칙에 따라 당원 전원이 전권위임법 찬성 투표를 하게 되었다. 전권위임법이 한시적 입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도 정권 측의 양보로 보고 중도 정당으로서 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히틀러 독재가 결정적이었다.

전권위임법 성립 직후, 파펜과 카이스가 함께 바티칸을 방문하여 독일과 바티칸의 정교조약 체결 협상을 진행했다(라이히스콘코르다트). 중앙당은 카이스를 배신자로 비난하고 5월 6일에 브뤼닝을 당수로 삼았지만 당내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7월 5일에 당은 자진 해산했다. 라이히스콘코르다트에는 성직자가 정당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존재하여 성직자를 많은 당원으로 두고 있던 중앙당에게는 당의 성립 기반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2. 6. 히틀러 집권과 중앙당의 해산 (1933년)

1928년 가톨릭 고위 성직자인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에 취임한 후, 1933년 히틀러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수권법 통과에 찬성하여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합법적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 수권법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률로, 히틀러는 중앙당을 위협하여 지지를 이끌어냈다.[80] 중앙당의 고위직은 이 법의 통과를 적극 지지했으며, 중앙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 법은 통과할 수 없었고 히틀러의 집권도 없었을 것이다.

1933년 3월,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이 공동으로 수권법을 제출하자, 사회당과 공산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 공산당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체포수배령이 내려져 출석하지 못했고, 사민당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중앙당은 73석 중 72표를 찬성하여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다.[81] 이후 나치와 바티칸의 정교협약을 맺은 뒤, 중앙당은 바티칸의 압력으로 1933년 7월 5일 해산했다. 7월 14일, 새로운 정치단체 조직 금지법이 발표되고 나치당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정당으로 선포되었다.[82]

중앙당은 권한법 문제로 분열되었다. 카스 의장은 정부의 보장(대통령실 거부권 유지, 종교 자유, 문화, 학교 및 교육에 대한 중앙당의 참여, 독일 주들이 체결한 콘코르다트, 중앙당의 존재 등)을 조건으로 법안 지지를 옹호했다. 히틀러는 긍정적으로 답변했지만 서면 합의서 서명을 미루었다.

카스는 이러한 보장의 불확실성을 알면서도, 1933년 3월 23일 중앙당이 투표를 결정하기 위해 모였을 때, 당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당원들에게 법안을 지지할 것을 권고했다.[19]

하지만 중앙당은 1933년 2월 말 이후 받은 엄청난 협박 때문에 콘코르다트를 원했다. 1933년 3월 5일 선거 운동 중 중앙당 회의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 가톨릭 평신도 단체들의 강제 폐쇄, 가톨릭 언론인과 신문 편집인들의 체포, 저명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학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앙당은 콘코르다트를 대가로 자체 해산에 동의했다.[20]

전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을 포함한 상당수의 의원들이 의장의 방침에 반대했다. 브뤼닝은 이 법안을 "의회에 요구된 가장 끔찍한 결의안"이라고 불렀다. 반대파는 가톨릭 사회 교리가 혁명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중앙당 의원 대다수가 카스의 제안을 지지했고, 브뤼닝과 그의 추종자들은 당의 규율을 존중하여 법안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중앙당은 계획대로 권한법에 찬성했고, SPD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도 그렇게 했다. 이 법안은 1933년 3월 23일에 통과되었다.

수권법 통과는 중앙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중앙당은 당원들의 대규모 탈당, 공무원과 다른 가톨릭 단체의 충실한 당원들에 대한 보복, 나치즘에 대한 반대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당국과의 협력 금지를 수정한 독일 주교들의 선언으로 타격을 입었다.[21][22]

카스의 로마 체류가 길어지면서, 1933년 5월 5일 카스는 그의 직책에서 사임했고, 당은 브뤼닝을 그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당은 총통원칙의 완화된 버전을 채택했지만, 획일화 과정의 여파로 당과 다른 당들이 직면한 증가하는 압력을 완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저명한 당원들이 자주 체포되고 구타당했고, 중앙당 지지 공무원들은 해고되었다. 1933년 여름, 프란츠 폰 파펜을 포함한 여러 정부 관리들은 중앙당의 해산을 요구했다.

1933년 7월, 중앙당은 명목상으로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일한 비나치 정당이었다. 7월 1일, 파펜과 카스는 콘코르다트의 일환으로 독일 사제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당은 7월 5일 해산되었는데, 이는 카르디날 파체리의 불만을 샀다. 그는 당이 최소한 협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정부는 새로운 정당의 결성을 금지하는 법률을 발표하여 NSDAP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정당으로 만들었다.

2. 7. 수권법과 중앙당의 몰락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에 취임한 이후, 중앙당은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와 협력하여 우경화되었다. 이들은 프란츠 폰 파펜과 함께 1933년 7월 나치 정권과 정교협약을 체결하도록 이끌었는데, 이는 나치 정권을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와 나치당의 위세를 높였다.[79]

이후 중앙당은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 통과에 찬성표를 던져 나치 정권의 독재를 합법화하는 데 기여했다. 중앙당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공산당이 탄압받고, 사회민주당만이 유일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73석 중 72표를 찬성하여 수권법 통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1] 히틀러는 중앙당을 압박하여 지지를 얻어냈으며, 가톨릭 중앙당 고위직은 수권법 통과를 적극 지지했다. 수권법 통과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기에 중앙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법안 통과는 불가능했다.[80]

1933년 권한법(Enabling Act of 1933)은 새로 선출된 국회에 4년간 입법권을 정부에 위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은 통과되려면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고, 연립 여당은 과반수를 조금 넘는 의석만 차지했기에 다른 정당의 지지가 필요했다.[18]

중앙당은 권한법 문제로 분열되었으나, 카스 의장은 정부의 보장을 조건으로 법안 지지를 옹호했다. 히틀러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서면 합의는 미루었다. 카스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당의 "위태로운 상황"을 이유로 법안 지지를 권고했다.[19]

그러나 중앙당이 협박 때문에 권한법에 찬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33년 6월, 바이에른 인민당 의원들이 구금되고, 가톨릭 노동조합이 해산되었으며, 가톨릭 공무원들은 해고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중앙당 의원들은 나치의 집권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20] 리처드 J. 에번스(Richard J. Evans)는 중앙당이 콘코르다트를 대가로 자체 해산에 동의한 주요 동기가 가톨릭 평신도 단체의 파괴와 가톨릭 평신도들이 이룬 진보가 역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인리히 브뤼닝 등 일부 의원들은 법안에 반대했지만, 결국 당의 규율을 존중하여 찬성 투표를 했다. 격동적인 상황 속에서 국회가 소집되었고, SA 대원들의 위협 속에 공산당원과 일부 사회민주당원들은 투옥되어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중앙당은 권한법에 찬성했고, SPD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도 찬성하여 1933년 3월 23일에 법안이 통과되었다.

나치와 바티칸의 정교협약을 맺은 이후, 중앙당은 바티칸의 압력으로 1933년 7월 5일 해산되었다. 7월 14일에는 새로운 정치단체 조직 금지법이 발표되어 나치당만이 유일한 정당으로 남게 되었다.[82]

가톨릭 교회가 히틀러의 수권법에 몰표를 던진 배경에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민중당의 도움으로 아체르보 법을 통과시켜 권력을 장악한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83]

2. 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후 중앙당은 재건되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기독교 정당으로 새롭게 결성된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등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콘라트 아데나워와 같은 많은 전 중앙당 정치인들이 CDU의 창립 멤버가 되었거나 CDU에 합류했고, 쾰른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이 신생 정당을 지지함에 따라, 중앙당은 가톨릭 인구의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14] 그러나 한동안 중앙당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지역 거점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945년 루돌프 아멜룬크센이 신생 주의 초대 주지사가 되었고, 1958년 주 의회를 떠날 때까지 주 정부에 참여했다. 1959년까지 중앙당은 니더작센주 주 의회에도 진출해 있었다.[23]

전국적으로는 1949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 제1번째 분데스탁(Bundestag)에서 10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1953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지역 CDU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석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1957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그 해 CDU의 압도적인 승리로 인해 분데스탁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2022년까지 복귀하지 못했다.[23]

이러한 몰락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헬레네 베셀 때문이다. 1949년 그녀는 분데스탁에서 중앙당 대표 중 한 명이었으며, 독일 정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으로 당수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1년 그녀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독 재군비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전 내무장관인 CDU의 구스타프 하이네만과 힘을 합쳤다. 두 사람은 재군비를 막기 위한 이니셔티브인 "유럽 평화 구출을 위한 비상 공동체"를 결성했다. 베셀은 당수직에서 사퇴했고, 1952년 11월 당을 탈당했다.[23] 곧이어 베셀과 하이네만은 "비상 공동체"를 전독일인민당(GVP)이라는 정당으로 만들었지만, 1953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1957년 GVP는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당원들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합류했다.[23]

한편, 중앙당의 생존자들은 실망한 CDU/CSU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기독교적 성향의 소규모 정당 연합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바이에른당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두 정당은 1951년부터 의회에서, 그리고 1957년 총선에서 연방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23]

1988년, 당의 우익이 분리되어 "기독교 중앙당"을 결성했다. 2003년 복음주의계 "독일 기독교당"이 중앙당에 합류했다.[23]

전국적 수준에서의 몰락 이후, 중앙당은 전후 시대와 같은 입장을 유지하면서 지역 정치에 집중하고 있다.[23] 중앙당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작센안할트주의 일부 시의회에 진출해 있다. 미미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은 때때로 자신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라고 부르며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한다. 당헌에 따르면, 당의 공식 명칭은 "독일 중앙당 - 1870년 창당 독일 최고령 정당"이다.[23] 현재 당 대표는 클라우스 브랄이다.[23] 이 당은 유럽 기독교 정치 운동에 가맹되어 있다.[23]

2022년, 전 독일을 위한 대안(AfD) 당원 우베 비트가 연방의회 의석을 유지한 채 이 당에 합류했다. 1957년 이후로 이 당이 연방의회 의석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다.[24] 비트는 같은 해 8월 당에서 탈당했다.[25]

이 당은 또한 2022년 6월 10일 전 독일을 위한 대안(AfD) 공동 대표 외르크 모이텐이 합류하면서 유럽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했다.[26] 그러나 모이텐은 2023년 9월 당을 떠났다.[27]

3. 이념 및 정책

중앙당의 이념은 존속 기간 동안 변화했지만, 일관되게 기독교 민주주의적이고 정치적으로 가톨릭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1920년대까지는 정치 중도로 여겨졌지만,[28] 1920년대 말 우익 정체성을 채택하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보수주의 운동으로 자처했다. 2008년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여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을 거부하고 기독교 원칙과 독일 연방공화국 기본법에 따라 "가치 지향적인" 플랫폼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중앙당은 전통적인 가족 단위를 지지하며 일반적으로 낙태에 반대한다. 또한 독일의 "생명권" 운동을 지지해 왔다.[29][30]

바이마르 시대 동안 중앙당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질적이었으며 공화주의자와 군주제 지지자를 포함한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이해관계의 집단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바이마르 가톨릭 사회의 전체 "정치적 축소판"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업 노동자와 소작농, 광범위한 중산층(농촌과 도시 중산층 모두 포함), 기업가, 공무원, 성직자, 그리고 소규모이지만 영향력 있는 가톨릭 귀족 집단까지 포함했다. 중앙당의 여러 파벌을 하나로 묶는 요소는 정치적 가톨릭에 대한 헌신이었다.[32] 중앙당에는 콘스탄틴 페렌바흐,[33]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요제프 비르트와 같은 정치인들과 가톨릭 노동자 협회 및 가톨릭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좌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아담 슈테거발트와 같은 중앙당의 노동 정치인들이 이끌었다.[34]

중앙당의 좌파는 공화주의에 전념했고 젠트룸(Zentrum)이 공화당으로 자처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중앙당은 대신 어떤 형태의 정부든 "모든 합법적인 정부와 협력할 준비가 된" "헌법 당"이라는 모호한 명칭을 채택했다.[31] 중앙당의 좌파는 SPD와의 협력을 증진하고 바이마르 가톨릭 신자들에게 라이히스바너에 가입할 것을 권고했으며, 일부 좌파 중앙당 파벌은 실용적인 이유로 우익 민족주의 노동조합과의 협력도 지지했다.[34] 당의 "공화-민주주의" 계파와 함께 중앙당에는 사회주의 계파도 있었다. 하인리히 메르텐스와 비투스 헬러와 같은 정치인들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가톨릭 사회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사회주의의 무신론이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일시적인 단계일 뿐"이라고 믿었던 가톨릭 사제 빌헬름 호호프가 가톨릭 사회주의를 홍보했다. 중앙당의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은 교황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에 기초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증진하거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세속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강력한 종교적 성격을 가진 경제적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등 다양한 입장을 제시했다.[35]

중앙당의 친의회주의적이고 친공화주의적인 파벌과는 대조적으로, 세속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반가톨릭적 가치를 바이마르 민주주의가 증진한다고 주장하는 반공화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파벌도 있었다. 중앙당의 우익은 추기경 미하엘 폰 파울하버나 헤르만 포트와 같은 인물들이 대표했으며, 보수 정당과의 협력을 추구했다. 당의 극심한 이념적 이질성 때문에 지역 수준에서는 친공화주의적 연합과 반공화주의적 연합에 동시에 참여했다.[36] 내부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당은 당 내 특정 이해관계 집단과 관련된 비성직자 정치인들과는 달리 성직자들을 주요 직책에 점점 더 많이 임명했다.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1928년 루트비히 카스와 같은 인물이 임명되었다.[37] 그 후 중앙당은 대공황과 바이마르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1920년대 후반 바이마르 사회의 우경화라는 더 넓은 변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가톨릭 집단도 포함했다.[38]

2022년에 업데이트된 정책 강령에서 중앙당은 "유럽의 기독교-유대교 뿌리를 보호하고 독일 연방공화국 기본법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한다. 중앙당은 사회시장경제를 지지하며 국가 부채를 낮추고 강력한 사회보장 제도를 유지한다. 중앙당은 독일 국적을 보호하고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에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문화를 이해하며 가치관 테스트를 받도록 하는 의무 법률을 보장하면서 독일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통합을 지지한다. 또한 폭력 범죄와 테러와 싸우기 위해 강력한 법과 질서 및 국가 안보 정책을 촉구하고 NATO에 대한 독일의 회원 자격을 지지한다.[39]

4. 역대 선거 결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나치 독일 시대까지 중앙당의 국회 의석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선거일득표수득표율획득 의석(총 의석수)의석 순위
1919년 1월 19일5,980,216표19.7%91석(421석)제2당
1920년 6월 6일3,845,001표13.6%67석(459석)제5당
1924년 5월 4일3,914,379표13.4%65석(472석)제3당
1924년 12월 7일4,118,849표13.6%69석(493석)제3당
1928년 5월 20일3,712,152표12.1%61석(491석)제3당
1930년 9월 14일4,127,000표11.8%68석(577석)제4당
1932년 7월 31일4,589,430표12.4%75석(608석)제4당
1932년 11월 6일4,230,545표11.9%70석(584석)제4당
1933년 3월 5일4,424,905표11.3%73석(647석)제4당
출처: [http://www.gonschior.de/weimar/Deutschland/Uebersicht_RTW.html Gonschior.de]



1933년 선거 이후, 나치당은 독일 중앙당을 강제 해산했다.

단치히 자유시 의회에서의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 연도득표수득표율획득 의석수증감
1920년21,26213.88%17석17
1923년21,11412.81%15석2
1927년26,09614.27%18석3
1930년30,23015.28%11석7
1933년31,33614.63%10석1
1935년31,52213.41%10석



자르 보호령 의회에서의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 연도득표수득표율획득 의석수증감
1922년92,25247.7%16석
1924년3,246,511[40]42.8%14석2
1928년129,16246.4%14석
1932년156,61543.2%14석


4. 1. 독일 제국 의회 (1871~1912년)

1871~1912 독일 제국 의회 선거 지지율
년도지지율확보 의석
1871년18.6%63석
1874년27.9%91석
1877년24.8%93석
1878년23.1%94석
1881년23.2%100석
1884년22.6%99석
1887년20.1%98석
1890년18.6%106석
1893년19.1%96석
1898년18.8%102석
1903년19.8%100석
1907년19.4%105석
1912년16.4%91석



독일 제국 시대 제국 의회에서 중앙당의 의석 수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제였다.[66]
  • : 인구를 무시하고 농촌의 비중을 크게 하는 보수 정당에 매우 유리한 선거구 획정이었다. 그 때문에 중앙당은 득표수보다 4배나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67]
  • 선거권은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주어졌다.[66]


독일 제국 의회 선거 결과 (1871년 ~ 1912년)
선거일득표수득표율득표 순위획득 의석 (총 의석)의석 점유율의석 순위
1871년 3월 3일724,000표18.6%제2당63석 (382석)15.7%제2당
1874년 1월 10일1,446,000표27.9%제2당91석 (397석)22.9%제2당
1877년 1월 10일1,341,300표24.8%제2당93석 (397석)23.4%제2당
1878년 7월 30일1,328,100표23.1%제2당94석 (397석)23.7%제2당
1881년 10월 27일1,182,900표23.2%제1당100석 (397석)25.2%제1당
1884년 10월 28일1,282,000표22.6%제1당99석 (397석)24.9%제1당
1887년 2월 21일1,516,200표20.1%제2당98석 (397석)24.7%제2당
1890년 2월 20일1,342,100표18.6%제2당106석 (397석)26.7%제1당
1893년 6월 15일1,468,500표19.1%제2당96석 (397석)24.2%제1당
1898년 6월 16일1,455,100표18.8%제2당102석 (397석)25.7%제1당
1903년 6월 16일1,875,300표19.7%제2당100석 (397석)25.2%제1당
1907년 1월 25일2,179,800표19.4%제2당105석 (397석)26.4%제1당
1912년 1월 12일1,996,800표16.4%제2당91석 (397석)22.9%제2당
출전: Nohlen & Stöver


4. 2.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 (1919~1933년)

독일 중앙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국회(Reichstag)에서 꾸준히 의석을 확보했다. 다음은 해당 기간 동안 중앙당의 선거 결과이다.

년도지지율의석
1919년19.7%91석
1920년13.6%64석
1924년 5월13.4%65석
1924년 12월13.6%69석
1928년12.1%61석
1930년11.8%68석
1932년 7월12.4%75석
1932년 11월11.9%70석
1933년 3월11.3%73석



1919년 선거에서는 19.7%의 지지율로 91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으나, 이후 지지율이 점차 감소하여 1933년 선거에서는 11.3%의 지지율로 73석을 얻는 데 그쳤다.[66]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독일 중앙당은 해산되었다.

4. 3. 독일 연방 공화국 연방의회 (1949~1957년)

년도지지율의석
1949년3.1%10석
1953년0.8%3석
1957년0.9%0석



1949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중앙당은 3.1%의 지지율로 10석을 획득했으나, 1953년 선거에서는 0.8%의 지지율로 3석으로 줄었고, 1957년 선거에서는 0.9%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의석을 얻지 못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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