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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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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1848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통일을 목표로 결성된 의회이다. 1848년 5월 프랑크푸르트 파울 교회에서 개회하여 자유주의적 헌법 제정과 독일 통일을 추진했다. 하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의 대립, 프로이센 국왕의 황제 거부 등으로 인해 1849년 해산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실패는 독일 통일이 프로이센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독일 역사에 자유주의의 좌절과 권위주의적 국민 통합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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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프랑크푸르트 파울교회에 모인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프랑크푸르트 파울교회에 모인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국가독일 연방
존속 기간1848년 5월 18일 ~ 1849년 6월 19일
위치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파울교회
의회 구성
의원 수585명 (1848년 5월)
선출 방식간접 선거
임기제한 없음
역사적 배경
이전독일 연방
이후독일 연방 복구
주요 인물
의장하인리히 폰 가게른 (1848년 5월 19일 ~ 1848년 12월 16일)
에두아르트 폰 심존 (1848년 12월 16일 ~ 1849년 5월 20일)
테오도어 레너 (1849년 5월 20일 ~ 1849년 6월 19일)
관련 사건
주요 사건1848년 독일 혁명
프랑크푸르트 헌법 제정
제국 헌법 운동
기타
관련 법률프랑크푸르트 헌법
대체 의회프로이센 국민 의회

2. 성립 배경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프랑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졌고, 곧 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1848년 혁명]).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빈 3월 혁명이,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베를린 3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빈 체제를 지탱했던 메테르니히는 망명길에 올랐고(이는 빈 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약속하는 등, 각지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3]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일 연방 각 방국은 (서로 다른) 선거법에 따라 성인 남성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 64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1848년 5월 18일에 소집하였다.

2. 1.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연방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독일 연방( Deutscher Bundde )이 성립되었다. 이 연방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주도 하에 여러 독립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형태였다. 해방 전쟁(Befreiungskriegede)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통일된 민족 국가를 기대했지만, 독일 연방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독일을 분할된 상태로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시민권 허용 요구가 높아졌다. 19세기 초, 일부 독일 국가들은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시민권을 도입했고, 독일 연방 성립 후에도 몇몇 국가들은 새 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 이후 반동적인 조치로 인해 이러한 자유주의적 움직임은 억압받았다. 프랑스 7월 혁명의 결과로 잠시 시민권 확대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1832년 함바흐 축제(Hambacher Festde)와 1833년 프랑크푸르트 경비대 습격(Frankfurter Wachensturmde) 이후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2. 2. 1840년대의 위기와 혁명 분위기 고조

1840년대 중반, 독일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국내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1], 라슈타트울름의 연방요새(1815년 이후 독일 연방이 건설한 요새) 건설은 독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흉작으로 인한 기근과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긴장도 심화되었다.[2]

바덴 대공국과 같이 개혁 지향적인 국가에서는 활발한 결사체가 설립되어 구체제에 대한 대중적 반대 운동의 조직적 중추를 형성했다. 특히 남서부 독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면서 반대 운동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노선 차이도 나타났다.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1847년 9월 10일 오펜부르크 집회에서 현 상태 전복을 주장했다.[3] 반면 중산 시민 계층 중심의 온건파는 의회를 통한 개혁을 추구했다. 1847년 10월 10일 헤펜하임 집회에서는 독일 지역 여러 국가 출신의 자유주의 성향 의원 18명이 모여 독일 민족국가에 대한 공동 발의를 논의했다.[4]

이러한 국내정치적 긴장은 1847년에서 1848년 사이 국외정치적 현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스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언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반동 정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5] 독일 연방에서도 1848년 3월 13일 의 시민 봉기를 시작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헝가리, 보헤미아, 북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자치권과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는 혁명이 심해지자 실각했다.[6]

2. 3. 3월 혁명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프랑스 제2공화국을 이끌었고, 곧 혁명의 흐름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1848년 혁명]).[3] 3월 초, 바덴을 시작으로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독일 여러 지역에서 항의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같은 해 3월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빈 3월 혁명, 프로이센에서 베를린 3월 혁명이 일어났으며, 한때 빈 체제를 지탱했던 메테르니히가 망명을 가게 되고(빈 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프로이센 국왕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약속하는 등, 각지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높아졌다.

이러한 압력은 각국 제후들이 기존의 보수적 정권들을 해임하고 자유주의적 위원회들을 통해 소위 3월 정권(Märzregierung|메르츠레기룽de)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1848년 3월 10일 독일 연방의 연방의회는 17인 위원회(Siebzehnerausschuss|지프첸에어아우스슈스de)를 소집해 헌법 초안 작성을 하도록 하였고, 3월 20일에는 당시까지 독일 연방의 영역 외부에 놓여있던 프로이센 지방을 포함하여 독일 연방의 국가들에게 제헌 의회의 날짜를 결정하기 위한 투표를 하도록 재촉했다.[3] 프로이센에서는 유혈 시가전이 벌어진 후 국왕이 굴복하여 자유주의적 내각을 구성하고 프로이센 왕국의 헌법을 만들도록 프로이센 국민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848년 3월 5일 반대파 정치가들과 의원들은 독일 공통의 헌법과 하나의 국민대표기관이 있는 하나의 독일 민족국가 성립을 논의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회합을 열었다.[3] 여기서 그들은 제헌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준비하도록 예비의회(Vorparlament|포어팔라멘트de)의 설치를 결의했다.[4] 이 모임에서 결정된 7인 위원회(Siebenerausschuss|지베너아우스슈스de)는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에 약 500명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비의회를 소집했다.

성인 남성에 의한 선거 (단, 독일 연방을 구성하는 각 방국에 따라 실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달랐다)에 기초하여, 정원 649명으로 구성된 의회가 5월 18일부터 개최되었다.

3. 국민의회 조직

5월 17일, 300명이 넘는 의원들이 프랑크푸르트 뢰머에 모여, 국민의회가 로베르트 몰이 제안한 50인 위원회가 아닌 나이순 의장을 통해 개회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며칠 동안 뢰머에서 다시 모여 70대의 프리드리히 랑을 나이순 의장으로 지명하고(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은 아니었음에도), 참석자 중 가장 어린 여덟 명을 "나이순 서기(Alterssekretär|알터스제크레테어de)"로 지명했다. 약 350명의 의원들은 함께 파울 교회로 이동했다.[1] 첫 회의는 매우 혼란스럽고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2] 하인리히 폰 가게른 의장 선거 때인 5월 19일에는, 가게른이라는 이름의 의원이 하인리히 폰 가게른 외에도 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등 여러 명 있었음에도, 몇몇 의원이 투표용지에 '가게른'이라고만 쓰는 일도 있었다. 하인리히 폰 가게른은 초기의 혼란을 신속하게 없앴다.

5월 29일 의사규칙에 따라, 출석 의원의 절대다수가 국민의회의 의장과 두 명의 부의장을 선출했다. 4주마다 재선거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의장석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는 몰의 개혁안이었다. 의장은 원내 규칙을 유지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며 의회를 이끌었다. 총지도부에는 여덟 명의 기록담당관(서기)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상대다수에 의한 공동 투표로 회기 전체를 위해 선출되었다.[1]

총지도부는 의회 직원(사무처, Kanzlei|칸츨라이de)을 임명했다. 1848년 11월, 사무처에는 대표 1명, 기록담당자 1명, 조수 11명, 서기보좌관 8명이 있었다. 속기 부서는 프란츠 야코프 비가르트 의원을 대표로 하여 속기사 12명과 사무원 13명이 일했다. 전령과 하인도 직원에 포함되었다.[1]

국민의회는 총 17개의 상임위원회와 10개의 임시위원회를 설치했다. 각 의원은 최소 하나의 위원회에 소속되어야 했다. 위원회 공석이 생기면, 해당 위원회에서 3명 의원을 추천하고 본회의에서 그중 한 명을 선출했다. 회의는 비공개였지만, 의장은 모든 위원회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본회의의 명시적 동의 없이도 증인과 전문가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1]

1848년은 독일에서 정치적 조직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혁명 참여 세력들은 각자의 정치적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클럽, 협회, 결사체 등 집단을 조직해 대립했다. 이는 국민의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회 회의는 혼란스러웠고 의원들도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무질서하게 앉았지만, 곧 질서 잡힌 의회 작업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가톨릭주의자, 민주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의원들은 각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회 밖 토론 모임인 클럽을 만들었고, 이는 정치적 다수 형성에 필수적인 당파 형성으로 이어졌다. 의원들에게 당파 활동은 필요악이었지만, 그 결과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정당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국민의회 당파들은 클럽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보통 모임 장소에 따라 이름 지어졌고, 전반적으로 매우 유동적이었다.

3. 1. 의원 선출 및 구성

파울 교회로 의원들이 입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당대의 그림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파울 교회에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처음으로 개회되었다. 의원들은 독일 연방 각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5만 명당 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체코인이 다수인 보헤미아모라바의 일부 선거구는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오스트로-슬라비즘에 따라 선거를 거부하여, 총 649명의 의원 정원 중 585명만이 선출되었다.[7]

의원들은 대부분 교육받은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의원들의 95%가 아비투어(대학입학시험)를 통과했고, 81.7% 이상이 대학 졸업자였으며, 그중 절반은 법학을 전공했다.[8] 직업별로는 대학교수, 법률가, 고위 행정관 등 국가공무원이 과반수를 차지했고,[4] 변호사, 의사, 언론인 등 자유직 종사자도 상당수였다.[8] 경제 부르주아 계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였으며, 수공업자나 농업 대표자는 매우 드물었다.[8]

선거는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고, '자립성' 여부에 따라 투표 자격에 차등을 두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하층 계급의 참여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많은 의원들이 개별 영방국가의 의원직이나 정부 관료직을 겸임하고 있어, 실제 프랑크푸르트에 상주하는 의원 수는 400~450명 정도였다.[7]

의원들의 사회적 출신은 매우 동질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국민의회는 '교수 의회'(Professorenparlament|프로페소렌파를라멘트de)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11]

국가선거구 수의원 수[7]
오스트리아132186
프로이센200280
바이에른7191
하노버/올덴부르크3141
뷔르템베르크3042
작센 (왕국)2436
튀링겐 지방 국가들1423
바덴1921
헤센 지방 국가들3236
한자 도시들37
메클렌부르크-슈베린79
홀슈타인/라우엔부르크78
슐레스비히56
브라운슈바이크45
안할트계 국가들35
림부르크22
룩셈부르크14
리페11
샤움부르크-리페11
리히텐슈타인11


3. 2. 의장단 및 위원회

국민의회의 총지도부. 가운데 위쪽이 하인리히 폰 가게른 의장이고, 그 아래에 두 명의 부의장인 알렉산더 폰 조이론과 빅토르 프란츠 폰 안드리안-배어부르크가 있다. 좌측 열 아래에서 두 번째에 있는 에두아르트 폰 짐손은 1848년 12월에 가게른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되었다.


1848년 5월 29일 의사규칙에 따라, 출석 의원 절대다수가 국민의회의 의장과 두 명의 부의장을 선출했다. 4주마다 재선거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의장석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는 몰의 개혁안을 반영한 것이었다. 의장은 원내 규칙을 유지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며 의회를 이끌었다. 총지도부에는 여덟 명의 기록담당관(서기)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상대다수에 의한 공동 투표로 회기 전체를 위해 선출되었다.[1]

의장들은 다음과 같다.

  • 프리드리히 랑(Friedrich Lang): 나이순 의장 (1848년 5월 18일 ~ 1848년 5월 19일)
  • 하인리히 폰 가게른(Heinrich von Gagern) (1848년 5월 19일 ~ 1848년 12월 16일)
  • 에두아르트 폰 짐손(Eduard von Simson) (1848년 12월 18일 ~ 1849년 5월 11일)
  • 야코프 루트비히 테오도르 레(Jacob Ludwig Theodor Reh) (1849년 5월 12일 ~ 1849년 5월 30일)
  • 빌헬름 뢰베(Friedrich Wilhelm Löwe): 슈투트가르트 잔부의회 의장 (1849년 6월 6일 ~ 1849년 6월 18일)


총지도부는 의회 직원(사무처, Kanzlei|칸츨라이de)을 임명했다. 1848년 11월, 사무처에는 대표 1명, 기록담당자 1명, 조수 11명, 서기보좌관 8명이 있었다. 속기 부서는 대표 1명(프란츠 야코프 비가르트 의원) 아래 속기사 12명과 사무원 13명이 일했다. 전령과 하인도 직원에 포함되었다.[1]

국민의회는 총 17개의 상임위원회와 10개의 임시위원회를 설치했다. 의원은 최소 하나의 위원회에 소속되어야 했다. 위원회에 공석이 생기면, 해당 위원회에서 3명의 의원을 추천하고 본회의에서 그중 한 명을 선출했다. 회의는 비공개였지만, 의장은 모든 위원회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본회의의 명시적 동의 없이도 증인과 전문가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1]

프랑크푸르트 제국헌법 작성을 맡았던 중요한 헌법위원회의 구성원들


위원회 목록은 다음과 같다.[2]

위원회설치 기간
국민의회 설립을 위한 준비위임위원회 (Vorbereitungskommission für die Einrichtung der Nationalversammlung|포어베라이퉁스코미시온 퓌어 디 아이ന്റി히퉁 데어 나치오날페어잠룽de)1848년 5월 18일 ~ 1848년 6월 17일
준비위임위원회가 체결한 조약에 대한 예비협의 개정위임위원회 (Revisionskommission zur Vorberatung über die von der vorbereitenden Kommission abgeschlossenen Verträge|레비지온스코미시온 추어 포어베라퉁 위버 디 폰 데어 포어베라이텐덴 코미시온 압게슐로세넨 페어트레게de)1848년 5월 19일 ~ 1848년 6월 16일
의사규칙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Geschäftsordnung|아우스슈스 퓌어 디 게셰프츠오르트눙de)1848년 5월 19일 이후
의정서 교정 위임위원회 (Redaktionskommission für die Protokolle|레닥치온스코미시온 퓌어 디 프로토콜레de)1848년 5월 22일 ~ 1848년 6월 16일
라보 제안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en Raveaux'schen Antrag|아우스슈스 퓌어 덴 라보셴 안트라크de)1848년 5월 22일 이후
검표 중앙위원회 (Zentralausschuß für die Prüfung der Wahlen|첸트랄아우스슈스 퓌어 디 프뤼풍 데어 발렌de)1848년 5월 23일 이후
제국헌법 초안을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en Entwurf der Reichsverfassung|아우스슈스 퓌어 덴 엔트부르프 데어 라이히스페어파숭de, 헌법위원회)1848년 5월 24일 이후
노동자, 기업가, 상인 관계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Arbeiter-, Gewerbe- und Handelsverhältnisse|아우스슈스 퓌어 아르바이터-, 게베르베- 운트 한델스페어헬트니세de, 경제위원회)1848년 5월 24일 이후
청원과 제안의 우선순위를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Priorität der Petitionen und Anträge|아우스슈스 퓌어 디 프리오리테트 데어 페티치오넨 운트 안트레게de)1848년 5월 24일 이후
해군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Marine|아우스슈스 퓌어 디 마리네de)1848년 5월 26일 이후
국제법과 국제문제를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völkerrechtliche und internationale Fragen|아우스슈스 퓌어 푈커레히틀리헤 운트 인터나치오날레 프라겐de)1848년 5월 29일 이후
임시 중앙권력에 관한 제안의 검토를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Prüfung der Anträge in bezug auf die provisorische Zentralgewalt|아우스슈스 퓌어 디 프뤼풍 데어 안트레게 인 베추크 아우프 디 프로비조리셰 첸트랄게발트de)1848년 6월 3일 이후
국민무장과 군제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Volksbewaffnung und Heerwesen|아우스슈스 퓌어 폴크스베바프눙 운트 헤어베젠de)1848년 6월 5일 이후
오스트리아-슬라브 문제 조사 위원회 (Ausschuß zur Begutachtung der österreichisch-slavischen Frage|아우스슈스 추어 베구타흐퉁 데어 외스터라이히슈-슬라비셴 프라게de)1848년 6월 5일 이후
입법 위원회 (Ausschuß für Gesetzgebung|아우스슈스 퓌어 게제츠게붕de)1848년 6월 17일 이후
틴겐과 콘스탄츠 선거 조사 위원회 (Ausschuß für Begutachtung der Wahlen in Thiengen und Konstanz|아우스슈스 퓌어 베구타흐퉁 데어 발렌 인 팅엔 운트 콘스탄츠de)1848년 7월 1일 이후
장관책임법 초안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Entwerfung des Gesetzes über die Ministerverantwortlichkeit|아우스슈스 퓌어 디 엔트베어풍 데스 게제체스 위버 디 미니스테어페어안트보르틀리히카이트de)1848년 7월 1일 이후
교회, 학교 사무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Kirchen- und Schulangelegenheiten|아우스슈스 퓌어 디 키르헨- 운트 슐안겔레겐하이텐de, 수업과 양육제도를 위한 위임위원회)1848년 7월 7일 이후
학제 부문을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Sektion für das Volksschulwesen|아우스슈스 퓌어 젝치온 퓌어 다스 폴크스슐베젠de)
제국섭정 추천 준비를 위한 위임위원회 (Kommission für Vorbereitung des Empfangs des Reichsverwesers|코미시온 퓌어 포어베라이퉁 데스 엠팡스 데스 라이히스페어베저스de)1848년 7월 10일 이후
재정위원회 (Finanzausschuss|피난차우스슈스de)1848년 8월 25일 이후
국민의회 선포 초안을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Entwerfung einer Proklamation der Nationalversammlung|아우스슈스 퓌어 디 엔트베어풍 아이너 프로클라마치온 데어 나치오날페어잠룽de)1848년 9월 20일 이후 (9월폭동에 대하여)
슈미트-비스너 제안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en Schmidt-Wiesnerschen Antrag|아우스슈스 퓌어 덴 슈미트-비스너셴 안트라크de)1848년 10월 5일 이후
로베르트 블룸 의원과 요한 게오르크 귄터 의원 조사 개시를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Einleitung der Untersuchung gegen die Abgeordneten Robert Blum und Johann Georg Günther|아우스슈스 퓌어 디 아인라이퉁 데어 운터주훙 게겐 디 압게오르트네텐 로베르트 블룸 운트 요한 게오르크 귄터de)1848년 10월 5일 이후
오스트리아 문제에 대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österreichischen Angelegenheiten|아우스슈스 퓌어 디 외스터라이히셴 안겔레겐하이텐de)1848년 10월 17일 이후
개별 국가들과 중앙권력간 관계에 관한 제안을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Anträge über das Verhältnis der Zentralgewalt zu den Einzelstaaten|아우스슈스 퓌어 안트레게 위버 다스 페어헬트니스 데어 첸트랄게발트 추 덴 아인첼슈타텐de)1848년 11월 7일 이후
로베르트 블룸 의원의 장례식 정리를 위한 위임위원회 (Kommission für die Anordnungen zur Totenfeier für den Abgeordneten Robert Blum|코미시온 퓌어 디 아노르트눙엔 추어 토텐파이어 퓌어 덴 압게오르트네텐 로베르트 블룸de)1848년 11월 23일 이후
독일 국가들의 연방국가 형성에 있어 오스트리아 관계에 대한 제국내각의 표본에 대한 조사와 보고를 위한 위원회 (Ausschuß zur Begutachtung und Berichterstattung über die Vorlage des Reichsministeriums über das österreichische Verhältnis zur Bildung eines Bundesstaates der deutschen Länder|아우스슈스 추어 베구타흐퉁 운트 베리히터슈타퉁 위버 디 포를라게 데스 라이히스미니스테리움스 위버 다스 외스터라이히셰 페어헬트니스 추어 빌둥 아이네스 분데스슈타테스 데어 도이췬 렌더de)1848년 12월 18일 이후
제국헌법 실행을 위한 위원회 (Ausschuß für die Durchführung der Reichsverfassung|아우스슈스 퓌어 디 두르히퓌룽 데어 라이히스페어파숭de, 30인위원회)1849년 4월 11일 이후
15인위원회 (Fünfzehnerausschuß|퓐프첸어아우스슈스de)1849년 6월 8일 이후


3. 3. 정파

국민의회 내에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의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주로 모임 장소에 따라 이름 붙여진 여러 정파로 나뉘었다. 1848년 10월 기준, 주요 정파는 다음과 같다.[12]

  • '''민주주의자 (좌파)'''(Demokratische Linke|데모크라티셰 링크de): 당시 은어로 '전체파'(Ganzen|간첸de)라고도 불렸으며, 급진 좌파와 온건 좌파로 구성되었다.
  • * 독일 궁정파(Deutscher Hof)[13] 및 나중의 분파들인 도너스베르크(Donnersberg)[13], 뉘른베르크 궁정파(Nürnberger Hof)
  • '''자유주의자 (중도파)'''(Liberale Mitte|리베랄레 미테de): 소위 '절반파'(Halben|할벤de)로서, 좌우파의 중도로 구성되었다.
  • * '''의회 자유주의자 (중도좌파)'''(Parlamentarisch-liberales linkes Zentrum|팔라멘타리슈-리베랄레스 링케스 첸트룸de)
  • ** 뷔르템베르크 궁정파(Württemberger Hof)[14], 베스텐트할(Westendhall)[15]
  • * '''입헌 자유주의자 (중도우파)'''(Konstitutionell-liberales rechtes Zentrum|콘스티투치오넬-리베랄레스 레히테스 첸트룸de)
  • ** 카지노(Casino) 및 나중의 분파들인 아우크스부르크 궁정파(Augsburger Hof)[15], 란츠베르크(Landsberg)[14], 파리 궁정파(Pariser Hof)
  • '''보수주의자 (우파)'''(Konservative Rechte|콘저바티베 레히테de): 개신교도와 보수주의자로 구성되었다.
  • * 나중에 모임 장소가 바뀌면서 카페 밀라니파(Café Milani)로 이름이 변경된 석조전파(Steinernes Haus)


이들 중 수적으로 가장 많은 당파는 카지노, 뷔르템베르크 궁정파였으며, 1849년부터는 중앙 3월협회(Zentralmärzverein|첸트랄메르츠페어라인de)로 대표되는 연맹 좌파가 주요 세력이었다.[14] 제국 헌법 운동을 주도한 3월협회는 대략 950개의 클럽과 50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한편, 의원 중 약 3분의 1은 특정 당파에 속하지 않았다.

의원 로베르트 폰 몰(Robert von Mohl)은 자신의 회고록(Lebenserinnerungen|레벤스에어인네룽엔de)에서 클럽의 형성과 작동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6]



원래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형성된 4개의 서로 다른 클럽이 있었다. [...] 주요 문제(예: 오스트리아 참여, 황제 선출)에서는 클럽 간 분열이 일시적으로 없어지고, 좌파 연합, 슈뢰더 호텔(Hotel Schröder)의 대독일주의자, Weidenbusche|바이덴부셰de 호텔의 황제파와 같은 거대한 공동 연합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당 회의는 프랑크푸르트의 정치적 삶에서 매우 특이한 부분이었으며,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 모두에 결정적이었다. 클럽은 정치적 동지, 그리고 많은 이들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클럽은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조언과 결정을 가능하게 했고, 어쩌면 전체 회의에서의 성공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4. 주요 쟁점과 활동



이러한 정당회의는 확실히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의 정치적 삶에서 매우 특이한 부분이었으며, 좋은 결과에,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쁜 결과에도 결정적이었다. 클럽은 정치적 동지와 같이 있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진짜 친구가 되었다. 클럽은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살아 있는 충고, 즉석 결정, 그리고 그 결과로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전체 회의에서의 성공도 허용하였다.

로베르트 폰 몰, 《회고록(Lebenserinnerungen)》[16]





국민의회는 독일 연방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적 정당성이 부족했다. 프랑스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은 국민의회를 승인하지 않았다.프랑크푸르트 의회를 공식 승인한 국가는 미국과 벨기에뿐이었다. 좌파는 혁명적 의회 내각을 요구했지만, 1848년 6월 28일, 국민의회는 "독일 임시 중앙 권력 도입에 대한 제국 법률"을 가결하여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요한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이 제국 섭정으로 선출되었고,[2] 카를 추 라이닝겐이 총리로 임명되어 첫 내각을 소집했다.[2] 그러나 임시 중앙 권력은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강제력이 없어 무력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1848년 혁명]).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났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망명하면서 빈 체제가 붕괴되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약속하는 등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성인 남성에 의한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 파울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의원은 고급 관리, 대학교수, 부르주아지 등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교수 의회"라고 조롱받았다.

자유주의적인 독일 통일에는 거의 합의했지만, 그 외에는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이 섭정으로 선출되어 헌법 제정이 진행되었지만, 통일 독일의 범위를 둘러싸고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논쟁이 전개되었다. 10월 27일, 대독일주의 방침이 의결되었지만,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보수화, 자유주의 흐름의 부정으로 인해 논의는 공중에 떴다.

1848년 12월 27일, 독일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제국 법률이 공포되었다. 1849년 3월 27일, 독일 제국 헌법(파울 교회 헌법)이 채택되었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선출했지만, 그는 황제 취임을 거부했다.

국민 의회는 구심력을 잃었고, 오스트리아 의원 철수를 시작으로 주요 방국 대표가 의원을 철수시켰다. 일부 잔존 의원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람프 의회를 소집했지만, 6월 18일 활동을 종료했다.

4. 1.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정치적 상황은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갈등이 많았다. 두 공국은 1460년 리펜 조약(Ribebrevetda, Vertrag von Ripende)을 통해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se bliwen tosamende up ewig ungedeltda)[2] 일체성을 가진 하나의 지방이어야 했고, 둘 다 덴마크동군연합 상태였지만, 홀슈타인만 독일 연방의 일부였고, 슐레스비히 공국은 독일 연방이 아니었다. 1848년 3월 혁명의 여파로 민족주의가 발흥하자, 독일 민족자유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를 독일 연방으로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덴마크 민족자유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합병하고자 했다.[18]

이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독일 연방의 위임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했다.[18] 그러나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은 1848년 8월 26일 덴마크와 말뫼 조약을 체결했다.[18] 조약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모든 군인을 철수하고, 이 지역을 공동 관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프로이센이 독자적으로 체결한 말뫼 조약을 1848년 9월 5일 거부했다. 그 결과, 카를 추 라이닝겐 총리가 사임했고, 안톤 폰 슈메어링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1848년 9월 16일, 국민의회는 현실을 수용하여 평화 조약을 비준했다. 이 조약은 독일 민족주의에 반하는 것이었고, 이 조약의 승인은 국민의회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9월 혁명(Septemberrevolutionde)이 일어났고, 펠릭스 퓌르스트 리흐노브스키와 한스 아돌프 에르트만 폰 아우어스발트 의원이 살해당했다.[19] 국민의회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방 군대를 마인츠의 연방 요새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국민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독일 연방의 여러 국가들에서 독자적인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 구스타프 슈트루베는 9월 21일 뢰르라흐(Lörrachde)에서 독일 공화국(die deutsche Republikde)을 선언하며 바덴에서 두 번째 민주 봉기를 시작했다. 헝가리에서의 민족주의 소요는 10월부터 으로 퍼져나가 빈 10월 봉기(Wiener Oktoberaufstandde)로 이어졌고, 이는 국민의회의 활동을 더욱 방해했다.[18]

4. 2.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

독일 문제의 핵심은 통일 독일의 국경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였다. 여기에는 슐레스비히 포함 여부와 같은 작은 문제뿐만 아니라, 독일 연방의 양대 강국인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독일어 사용권 밖에 있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지역들을 독일 국가에 포함시킬지는 단순한 민족 정체성 문제가 아니라, 독일 내 국가들 간의 세력 다툼이기도 했다.[22]

미래의 독일 국민국가 국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주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하고 통일을 이루는 방안이었다. 이는 다민족국가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통일을 주장했다. 다만 대독일주의자들 중에서도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합하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일부였고, 대다수는 오스트리아를 분할하여 독일인 거주 지역만 독일국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선호했다.[22]

급진 좌파는 대체로 대독일주의를 지지했다. 카를 포크트는 이를 "동부의 야만인들에 대한 서부의 문화적 성전"[23]이라 칭하며, 폴란드헝가리에 대한 투쟁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진보적 중도파는 실용적인 접근을 선호했다. 1848년 10월 27일, 국민의회는 "오스트리아의 독일 지방"만을 포함하는 대독일주의 통일 방안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프랑크푸르트식 대독일주의에 반대하며,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가 통일 독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식 대독일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후계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국의 분할을 원치 않았다. 1848년 11월 27일, 총리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불가분성을 천명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결국 국민의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는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해법이었다. 국민의회는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로 분열되었다. 1849년 3월, 슈바르첸베르크가 다시 오스트리아 전체를 포함시키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1848년 12월에 오스트리아 출신 총리 안톤 폰 슈메어링이 사퇴하면서 대세는 소독일주의로 기울어졌다. 후임 총리 하인리히 폰 가게른은 프로이센 왕을 통일 제국의 세습 황제로 추대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국민국가의 성립에 대한 풍자화. 왼쪽부터 하인리히 폰 가게른, 알렉산더 폰 조이론, 카를 테오도르 벨커, 프리드리히 다니엘 바서만.

4. 3. 헌법 제정과 기본권

1848년 12월 28일, 제국법률공보(Reichsgesetzblatt)에 "독일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제국 법률"(Reichsgesetz betreffend die Grundrechte des deutschen Volkes)이 공포되었다.[25] 이 법률은 기본권이 즉각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적용될 것을 명확히 하였다.

기본권의 내용에는 거주·이전의 자유와 전 독일의 모든 독일인의 평등권뿐 아니라, 계급 특권과 중세적 조세의 폐지, 신앙과 양심의 자유, 사형의 폐지, 학문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경찰의 대우와 재판절차와 관련된 기본권, 주거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재판관의 독립성, 그리고 직업과 주거의 자유가 포함되었다.

길고 논란이 많은 논의 끝에 의회는 1849년 3월 28일 완전한 제국헌법을 가결했다. 이 헌법은 세습되는 국가원수직을 규정하였는데, 이는 하인리히 폰 가게른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세습군주제파’가 원래는 세습군주제에 반대했던 하인리히 지몬 중심의 베스텐트할 파의 지원을 얻어 3월 27일 투표에서 267 대 263으로 다수를 차지해 이긴 결과였다. 이 연합은 헌법 초안의 첫 독회가 각하됨에 따라 나온 해결책이었다. 여론 변화의 주된 이유는, 대안으로 제시된 선출군주제나 임기제 의장이 있는 집정부제와 같은 다른 모든 방안이 훨씬 실현 가능성이 없었고, 급진 좌파가 미국을 모델로 요구한 공화국만큼이나 별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대표는 제국헌법에 따라서 양원으로 구성될 것이었으며, 이는 직접 선출되는 국민원(Volkshaus)과 독일 연방 내 국가들이 대표를 파견하는 연방원(Staatenhaus)이었다. 연방원의 의원은 절반은 그 때의 각국 정부들에 의해서 파견되고, 나머지 절반은 각국 의회에 의해서 선출되었다.[26] 연방원 의원들은 6년마다 선출되었으나, 국민원 의원들은 3년마다 선출되었다. 통일 독일의 수도는 프랑크푸르트로 정하였다.

1848년 12월 27일, 자유주의 헌법의 조항(독일 국민의 기본적 권리)이 공포되었다. 훗날 바이마르 헌법이나 본 기본법에 영향을 준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동시대적으로는 이미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1849년 3월 27일, "독일 제국 헌법(파울 교회 헌법)"이 채택되었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통일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출했다. 그러나, 당시 군주 주권이었던 프로이센의 국왕이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받아들일 리가 없고, 대 오스트리아 외교를 고려해도, 국제적인 승인조차 없는 의회의 제안을 승낙할 수는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 제국의 황제 취임을 거부했다.

5. 국민의회의 실패와 해산

블룸의 처형 장면. 카를 콘스탄틴 하인리히 슈테프페크(Carl Constantin Heinrich Steffeck)의 그림. 1848/49년작.


1848년 빈에서 10월 봉기가 확대되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피난가자, 국민의회는 좌파 의원들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정부와 봉기 혁명가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는 봉기를 유혈 진압하였고, 이와 동시에 오스트리아에 파견됐던 의원이자 민주적 좌파의 거두 로베르트 블룸이 체포되어 11월 9일 면책특권도 없이 즉결 총살당했다.[20] 이 사건으로 국민의회는 동력을 상실했으며, 독일 연방 내 개별 국가 정부들의 호의에 기대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52년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빈과 베를린에서의 혁명의 운명이 결정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존재에는 가장 작은 주목조차 하지 않고 이 두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문제가 끝나버렸다는 사실 - 이 사실만으로도 이 단체가 단순한 토론 클럽에 불과했으며, 순진한 멍청이들을 모아 만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에 충분하다. 이들은 자신들을 정부의 의회 꼭두각시로 남용되게 하였으며, 이것은 작은 국가와 도시들의 소상인과 수공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연극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 놓기 위해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한에서만 제공되었을 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20]





블룸의 처형은 1848년 가을에 3월 혁명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다른 영방국가들에서도 보수 세력들이 같은 전철을 밟았고, 3월 정부들의 힘은 약화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3월 혁명으로 구성된 프로이센 국민의회가 11월에 무력으로 해산당했고, 헌법제안안은 거부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반혁명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혁명의 불씨는 사그라졌다.

소독일주의 해법과 입헌군주제 국가형태 채택에 따라 프로이센 왕이 세습 국가원수로 선출되었는데, 찬성 290표, 반대(좌파, 남독일, 오스트리아 출신 의원) 248표였다. 다만 의원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작업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 하노버 등과 달리, 첫 독회 이후 헌법초안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임시 중앙 권력의 대표는 프로이센 정부와의 연합을 시도했으며, 특히 급진 좌파에 대항한 공동 전선을 형성하려 노력하며 왕조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입헌의회 군주제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잔부의회의 첫 회의장소였던 슈투트가르트 의사당의 반월홀. 구스타프 렌츠(Gustav Renz)의 석판화.


1849년 6월 18일 슈투트가르트의 잔부의회 해산 장면. 뷔르템베르크 기마병들이 입장이 거부된 의원들이 시위하자 해산시키고 있다. (1893년 책의 삽화)


결국, 자유주의적인 독일 통일에는 거의 합의를 이루었지만, 그 외의 진행 방향은 거의 정해지지 않았다. 또한, 당시 주요 국가로부터 국민 의회의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했던 점도 있어, 국민 의회의 행보는 불확실했다.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이 섭정으로 선출되어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목표로 의사가 진행되었으나,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논의는 부상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보수화, 자유주의적 흐름의 부정 속에서 공중에 떴다.

5. 1. 프로이센 왕의 황제 즉위 거부

1849년 4월 3일, 국민의회는 에두아르트 폰 짐손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Kaiserdeputationde)을 파견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황제가 되어 달라고 제의했다.[27] 그러나 그는 지위나 관직은 제후들과 자유시들의 찬성 없이는 받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고, '혁명의 썩은내'(Ludergeruch der Revolutionde)[28]가 나는 왕관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국민의회의 헌법 제정은 실패하였고, 독일의 3월 혁명도 좌절되었다. 황제 즉위 거부는 다른 독일 제후들에게 정치적 힘의 관계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는 신호였다.

5. 2. 잔부 의회와 혁명 진압

프로이센 왕이 독일 제국의 황제 취임을 거부하면서 국민 의회는 구심력을 잃어갔다.[20] 오스트리아 의원들이 모국으로 철수한 것을 시작으로, 주요 방국의 대표들이 의원을 철수시켰다. 극히 일부 잔존한 의원들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잔부 의회(Rumpfparlamentde)를 소집하여 활동을 계속했지만, 이마저도 1849년 6월 18일에 뷔르템베르크 군대에 의해 해산되며 완전히 종료되었다.[30]

1849년 4월 5일, 모든 오스트리아 의원들이 프랑크푸르트를 떠났고, 5월 14일에는 프로이센 의원들도 의석을 포기했다. 새로운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고, 국민 의회는 계속해서 쇠퇴했다. 보수, 부르주아 자유주의 의원들 대부분이 의회를 떠났다.[4] 남은 좌파 세력은 제국헌법 운동(Reichsverfassungskampagnede)을 통해 저항을 호소했지만, 시민 계급과 '절반파' 당파의 주도적 자유주의 정치가들은 새로운 혁명을 거부하고 국민 의회에서 손을 뗐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센에서는 5월 봉기가,[20] 바이에른 팔츠에서는 팔츠 봉기가 일어났고,[20] 바덴에서는 바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20] 로렌츠 브렌타노가 혁명정부의 수장이 되었고,[20] 이들은 루트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 예하의 군대를 편성했다.[20] 그러나 프로이센 군이 독일 연방의 위탁을 받아 혁명군을 진압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5월 26일, 국민 의회는 의결 정족수를 100명으로 낮춰야 했다. 5월 31일, 남은 의원들은 뷔르템베르크 의원 프리드리히 폰 뢰머의 주도로 의회를 슈투트가르트로 이전했다.[4] 1849년 6월 6일부터 잔부 의회가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되었다.

임시 중앙 권력과 제국 섭정이 잔부 의회를 인정하지 않자, 이들은 불신임되었고 새로운 제국 섭정부가 선포되었다. 잔부 의회는 조세 저항과 군사적 반항을 호소했지만, 뷔르템베르크 정부는 잔부 의회를 멀리했다.

6월 17일, 뢰머는 뷔르템베르크 정부가 잔부 의회와 제국 섭정부의 기능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30] 6월 18일, 뷔르템베르크 군대가 회의 장소를 점령했고, 의원들의 시위 행렬은 해산되었다. 뷔르템베르크 대의원 이외의 의원들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6. 역사적 의의와 영향

프로이센은 국민의회 해산 후 요제프 폰 라도비츠가 고안한 연합정치(Unionspolitikde)를 시작했는데, 이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결론을 프로이센 왕가의 입장에서 '위로부터' 변형시킨 것으로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 연방 성립이 목적이었다.[31] 연합정치는 프로이센과 작센, 하노버의 3왕동맹(Dreikönigsbündnis)을 근간으로 하였다. 하인리히 폰 가게른 중심의 '세습황제파' 등 자유주의-보수주의적 의원들은 고타 후속 의회(Gothaer Nachparlamentde)와 에어푸르트 연합의회(Erfurter Unionsparlamentde)에서 이 정치를 지지하였다. 에어푸르트 연합의회 의원 중 20%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출신이었다. 그러나 1850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압력 때문에 올뮈츠 협약(Olmützer Punktatiode)으로 독일 연방을 재건하고 연합정치를 성과 없이 포기해야 했다.[31][32]

6. 1. 독일 역사에 미친 영향

3월 혁명은 프로이센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혁명 진압 과정에서 프로이센은 독일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중소 제후국들에게 그 힘을 과시했다. 또한, 프로이센은 전략적으로 더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는데, 예를 들어 바덴 대공국은 프로이센에 감사를 표했고, 이는 프로이센이 남독일에서 처음으로 더 큰 동맹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회 이후, 독일 전역에서 소독일주의 통일 방안이 더 선호되었다.[31] 이러한 상황은 1866년 보오전쟁으로 이어졌고, 프로이센의 승리로 북독일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는 1870-71년 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승리한 후, 프로이센 주도의 국가 통일로 이어져 1871년 독일 제국 선포로 완성되었다.

'좌절된 혁명'은 독일 자유주의의 패배를 의미했다.[27]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신망을 잃고 소외되었으며, 실현되지 못한 국민 국가에 대한 그리움만 남았다. 입헌 국가와 국민 국가 형성을 동시에 추구했던 1848/49년 혁명의 실패는 자유와 통일을 분리시켰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존더베크(독일의 특수한 길)의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33]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좌절로 통일은 자유주의적 이상 대신 군사력과 같은 현실정치적 수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독일 제국은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국민의회의 업적과 3월 혁명은 이후 수십 년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루트비히 호이서와 같은 급진 민주 좌파의 생각은 무책임하고 순진한 망상으로 여겨졌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역시 신망을 잃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혁명 실패 후, 혁명은 독일사의 잘못된 길이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국민의회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후 동독과 서독에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민주적 유산을 서로 자국 특유의 전통으로 보여주려고 경쟁하면서 인정받게 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고조된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은 실패했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른바 "철혈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언론과 다수결에 의한 독일 통일 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때문에 1860년대부터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위로부터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통일 후의 독일에서는 자유주의적 수단이 아닌 권위주의적인 국민 통합이 추진되었다.

6. 2. 한국 역사와의 비교 및 교훈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실패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 민주적 개혁의 좌절과 유사한 측면을 보여준다. 1848년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이상은 이후 역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국 이념과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권 조항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경험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조화,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 그리고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과 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지만, 외세의 개입, 내부 분열, 시대적 한계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는 한국 근대사에서도 일제강점기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해 유사하게 나타난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경험은 민주주의와 민족 통합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과 국민적 합의, 국제사회의 지지가 필요하며,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6. 3. 평가와 논쟁

지만(Siemann)은 국민의회와 당대의 다른 의회들이 "의회주의 발전의 조짐들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통치 방식은 의회적이었고, 당파들은 이익을 모았으며, 효과적인 위원회 작업은 국민의회 외부의 혼란을 이겨냈다. 시민 계급은 민주적 기관의 정치 권력을 다루면서 의회적 타협에서 성숙하고 유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기본권과 "제국 헌법의 균형 잡힌 구성"으로 나타났다.[1]

한(Hahn)과 베르딩(Berding)은 정치화된 사회가 의원들에게 제기했던 결사체, 신문, 이익 집단, 청원에 대한 수많은 요구를 언급한다. "대표 기관으로서 의회와 자유로워진 민중들 간의 상호작용이 혁명을 통해 가능해지면서, 파울 교회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 공론장이 되었다."[2]

프랑크 로렌츠 뮐러(Frank Lorenz Müller)는 국민의회의 제헌, 입법 과정에서의 주목할 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고 실용적으로 행동하는 단체"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했으며, 너무 전문적이고 철학적으로 남았다고 평가한다.[3] 베른하르트 만(Bernhard Mann)은 국민의회가 1848년 5월과 6월에 그들의 유리한 상황을 지나치게 자극했으며, 정부 없이 헌법을 만들어 그들의 지위가 불안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국민의회는 의회주의와 정당 형성이 독일 전체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완전히 종속된 중앙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다만, 근대 정당 제도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점과 의회주의에 대한 경험이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매우 적었고 프로이센 정치가들은 아예 없었다는 점은 덧붙여야 정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4]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비스마르크-독일제국을 탄생시킨 현실정치가 https://terms.naver.[...] 살림
[3] 서적
[4] 웹사이트 독일사 https://terms.naver.[...] 미래엔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Vorrede zur deutschen Ausgabe des »Manifestes der Kommunistischen Partei« von 1872 Reclam Verlag
[10] 서적
[11] 서적
[12] 웹사이트 맑스사전 https://terms.naver.[...] 도서출판 b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Lebenserinnerungen(회고록) Deutsche Verlags-Anstalt
[17] 서적
[18] 서적
[19] 전단지 1848년 6월 전단지(Flugblatt vom Juni 1848)
[20] 서적 선집(Werke) http://www.mlwerke.d[...] Dietz
[21] 웹사이트 Zur Polendebatte in der Paulskirche(파울 교회에서의 폴란드 논쟁에 관하여) http://www.deutsche-[...]
[22] 서적
[23] 웹사이트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의 독일 제헌 국민의회에 대한 속기 보고(Stenographischer Bericht über die Verhandlungen der deutschen constituierenden Nationalversammlung zu Frankfurt am Main) http://daten.digital[...]
[24] 웹사이트 독일국 헌법(Verfassung des Deutschen Reiches) http://www.documenta[...]
[25] 서적
[26] 백과사전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한 뷔르템베르크 법무부 장관 뢰머가 의장 뢰베에게 쓴 서한(Schreiben des württembergischen Justizministers Römer an den Präsidenten des Parlaments, Löwe)
[31]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32] 서적 16일간의 세계사 여행 북로드
[33] 서적 유럽중심주의 비판과 주변의 재인식 미다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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