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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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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등애는 의양군 출신의 위나라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농업 기술을 겸비했다. 그는 사마의의 눈에 띄어 관직에 진출하여 농업과 관개 사업에 기여했으며, 강유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263년 촉나라 정벌에서 음평 길을 통해 성도를 함락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종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모함을 받아 아들 등충과 함께 살해당했다. 사후 억울함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64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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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등애 청나라 초상화
청나라 시대의 등애 삽화
이름등애
본명등범
사재
출생197년
출생지허난성 신예현
사망264년 3월 (66세)
사망지쓰촨성 몐주
직업장군, 정치가
작위등후 (鄧侯)
묘호없음
관직 경력
태위임기 시작: 264년 2월 8일
임기 종료: 264년 3월
군주: 조환
이전: 고유
이후: 왕상
정서장군임기 시작: 257년
임기 종료: 264년 2월 8일
군주: 조모, 조환
진서장군임기 시작: 256년
임기 종료: 257년
군주: 조모
안서장군임기 시작: 255년 10월 9일
임기 종료: 256년
군주: 조모
가족 관계
자녀등충
최소 한 명 이상의 아들
기타 정보
관련 사건종회지란

2. 생애

등애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조조형주를 정벌했을 때 여남군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2] 12세 때 영천군에 있는 진식의 묘비를 보고 감명받아 이름을 바꾸려 했으나, 명명 금기에 따라 바꿀 수 없었다.[2] 이후 상성현(襄城縣) 현령 아래에서 학사가 되었으나, 말더듬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고 농업 관리로 일했다.[3] 가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3] 산과 호수를 보며 군대 야영지 배치 구상을 즐겨했으나, 비웃음을 샀다.[3] 훗날 농업 생산 기록을 관리하는 서기로 승진했고,[3] 석포라는 친구와 함께 곽현신이라는 인물과 교류하며 그의 인정을 받았다.[4] 235년에서 239년 사이, 낙양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사마의를 만나 상서랑으로 발탁되었다.[5]

등애는 사마의에게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바쳐 운하 건설을 건의했고, 이는 받아들여져 수해 감소와 군량 수송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촉한과 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식량을 비축할 계획을 세웠으며, 진(陳)현과 향(項)군(오늘날의 저우커우, 허난) 동쪽 지역에서 수춘(壽春, 오늘날의 수현, 안후이)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조사하여 농업에 적합한지 평가했다. 그는 그 땅이 비옥하지만 수분이 부족하여 완전히 활용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관개 용수로를 파서 토지를 관개하고 수로를 개설하여 물길로 물품을 운송할 것을 제안했다.[6] 241년 농업 사업이 완료되자 위와 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위군은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고 물길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10]

조모 즉위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으며, 251년에는 남흉노 세력 분할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5] 255년,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연주자사였던 등애는 군사를 이끌고 문흠을 유인하여 사마사의 대군과 함께 격파하고 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23] 이 공로로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고 방성향후(方城鄕侯)가 되었다.

249년 강유(姜維)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자, 등애는 곽회(郭淮)의 지시대로 성 부근의 물줄기를 끊어 촉군이 항복하게 만들었다.[12] [13]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가 이끈 촉군을 무찔렀다. 이 공으로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14]

255년 강유왕경을 대패시키고 적도(狄道)를 포위하자, 등애는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가 풀어지게 한 공으로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었다. 등애는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가 얼마 후 쳐들어온 강유를 상대로 단곡(段谷)에서 승리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를 등후(鄧侯)로 봉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를 겸하게 했다. 이후 강유257년262년에도 쳐들어왔으나 등애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31]

263년, 정서장군(征西將軍) 등애는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는 제갈서(諸葛緖)와 함께 각각 군대를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다. 등애는 강유를 격파했으나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37]

종회가 검각에서 강유의 저항에 막히자, 등애는 음평(陰平)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위협하고자 했다.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고,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 장수 마막(馬邈)은 항복하였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저항했으나, 등애는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張遵) 등을 죽였다.[42]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자 유선(劉禪)은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멸망했으며, 조정에서는 등애를 태위(太尉)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등애는 약탈을 금지하고,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생업을 회복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사마소에게 글을 올려 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건의했으나, 사마소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재차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44]

종회위관, 호열 등과 함께 등애를 모함하고,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낸 글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보냈다. 등애를 의심하게 된 사마소는 264년 1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다. 등애는 아들 등충과 함께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54] 종회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자, 등애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등애를 구출했다. 그러나 위관은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속을 보내 등애 부자를 죽였다.[57] 전속은 과거 강유에서 진격을 늦춘 일로 등애에게 처형당할 뻔했으나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위관은 전속에게 옛 원한을 갚을 기회라며 부추겼다.[56]

등애는 촉나라 정복에 대해 자만하게 되었다. 그는 전 촉나라 관리들에게 "여러분 모두 나를 만나 운이 좋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오한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파멸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또한, "강유는 그 나름대로 당대의 영웅이지만, 저와 조우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식견 있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발언을 조소했다고 한다.[45]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과 옛 촉나라의 신하였던 번건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등애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조조형주를 정벌했을 때 여남군으로 이주하여 소를 기르며 농사를 지었다.[2] 12세 때 어머니와 함께 영천군에 있는 진식의 묘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이름을 '범', 자를 '사칙'으로 바꾸려 했으나, 친족 중에 이미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 명명 금기에 따라 이름을 바꿀 수 없었다.[2]

이후 상성현(襄城縣) 현령 아래에서 학사가 되었으나, 말더듬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고 곡물과 사료를 담당하는 농업 관리로 일했다.[3] 가난한 환경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3] 산과 호수를 보며 군대 야영지 배치 구상을 즐겨했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3] 훗날 농업 생산 기록을 관리하는 서기 직책으로 승진했고,[3] 석포라는 친구와 함께 곽현신이라는 인물과 교류하며 그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4] 235년에서 239년 사이, 낙양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사마의를 만나 그의 눈에 띄어 상서랑으로 발탁되었다.[5]

등애는 사마의에게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바쳐 운하 건설을 건의했고, 이는 받아들여져 수해 감소와 군량 수송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조모 즉위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으며, 251년에는 남흉노 세력 분할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5]

255년,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연주자사였던 등애는 군사를 이끌고 문흠을 유인하여 사마사의 대군과 함께 격파하고 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70][71] 이 공로로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고 방성향후(方城鄕侯)가 되었다.

2. 2. 농업 및 관개 사업

등애는 촉한과 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식량을 비축할 계획을 세웠다. 등애는 진(陳)현과 향(項)군(오늘날의 저우커우, 허난) 동쪽 지역에서 수춘(壽春, 오늘날의 수현, 안후이)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조사하여 농업에 적합한지 평가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그 땅이 비옥하지만 수분이 부족하여 완전히 활용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관개 용수로를 파서 토지를 관개하고 수로를 개설하여 물길로 물품을 운송할 것을 제안했다.[6]

등애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 ''제하론''(濟河論; ''강에 대한 논의'')이라는 제안서를 작성했고, 사마의는 등애의 제안에 동의하여 그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7][9]

241년, 농업 사업이 완료되었다. 위와 오 사이에 동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위군은 상류에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고 물길을 유리하게 활용하여 회하 지역으로 강을 따라 적에게 맞설 수 있었다. 등애는 그의 제안으로 공을 인정받았다.[10]

2. 3. 강유의 북벌 방어

249년 강유(姜維)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등애는 곽회(郭淮)의 지시대로 성 부근의 물줄기를 끊어 성 안의 촉군이 항복하게 만들었다.[12] [13]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가 이끈 촉군을 무찔렀다. 이 공으로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14]

255년 강유왕경(王經)을 대패시키고 적도(狄道)를 포위하자, 등애는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가 풀어지게 한 공으로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등애는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가 얼마 후 쳐들어온 강유를 상대로 단곡(段谷)에서 승리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를 등후(鄧侯)로 봉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를 겸하게 했다.

이후 강유257년262년에도 쳐들어왔으나 등애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82]

2. 4. 촉나라 정벌

263년,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던 등애는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을 거느리고 정면에서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諸葛緖)는 강유의 퇴로를 끊었다. 등애는 강유를 격파했으나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37]

한편, 10만 군사를 이끌고 있던 종회가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자, 등애는 촉나라의 후방을 위협하여 강유 군을 물리고, 종회의 진군 통로를 열어주고자 음평(陰平)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위협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갈서가 종회에게로 가, 등애는 홀로 음평 길로 나아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다.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 장수 마막(馬邈)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나타나자 항복하였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張遵) 등을 죽였다.[37]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자 유선(劉禪)은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멸망했으며, 조정에서는 등애를 태위(太尉)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등애는 장사들을 조사하여 약탈을 금지하고,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생업을 회복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아울러 사마소에게 글을 올려 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건의했다. 사마소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재차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37]

같은 해 가을, 위(魏) 황실 정부는 촉(蜀)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마소는 이 원정을 감독하며, 등애에게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33] 타중(沓中, 현재의 주거현 북서쪽, 간쑤성)으로 가서 강유를 괴롭히고 그를 묶어두게 했다. 한편, 옹주 자사 제갈서는 군대를 이끌고 강유가 촉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도록 했다.[34] 등애는 촉을 공격하기 전에 자신이 물이 흐르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꿈을 꿨다. 그는 ''주역''에 능통한 관료 원소(爰邵중국어)에게 꿈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소는 그에게 촉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등애는 이 말을 듣고 우울해했다.[35]

등애는 왕기(王頎중국어)에게 군대를 이끌고 강유의 진영을 직접 공격하게 하고, 전홍에게 다른 부대를 이끌고 길을 개척하게 했으며, 양흠(楊欣)에게 감송(甘松, 현재의 송판현 부근, 쓰촨성)의 적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36]

강유는 종회가 이끄는 또 다른 위군이 한중군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타중에서 촉 영토 안으로 군대를 이끌고 후퇴했지만, 양흠에게 강천구(彊川口, 백룡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추격당하여 패배했다. 강유는 제갈서가 음평의 다리에서 자신의 퇴로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한곡(孔函谷, 현재의 시구구 남쪽, 란저우, 간쑤성)을 통과하여 북쪽 길로 가서 제갈서의 위치를 우회하려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30 리 뒤로 물러났다. 그 무렵, 강유와 그의 군대는 북쪽 길에서 약 30리 정도 이동했을 때 제갈서가 다리에서 봉쇄를 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유는 자신의 군대에게 재빨리 돌아서 다리를 건너라고 명령했다. 제갈서는 다시 돌아서 강유를 막으려 했지만, 다리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다리를 건넌 후 강유는 검문관의 산길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했다. 종회는 검문에서 강유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방어를 뚫지 못했다.[37]

2. 5. 촉나라 통치와 죽음

종회는 부하 장수 위관, 호열 등과 함께 등애를 모함하고,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낸 글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보냈다. 결국 등애를 의심하게 된 사마소는 264년 1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다. 등애는 새벽녘에 아들 등충과 함께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44]

종회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자, 등애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등애를 구출했다. 그러나 위관은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호군 전속을 보내 등애 부자를 죽였다.[44] 전속은 과거 강유에서 진격을 늦춘 일로 등애에게 처형당할 뻔했으나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위관은 전속에게 옛 원한을 갚을 기회라며 부추겼다.[56]

등애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 유선은 스스로 결박하고 60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끌고 항복했다. 등애는 유선의 결박을 풀고 그를 친절하게 대했으며,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지하고 도시의 일상을 평소대로 재개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전 촉나라 관리들은 등애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에게 복종했고, 촉나라 백성들 또한 등애의 관대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등애는 위나라 정부로부터 받은 황제 대행 권한을 사용하여 유선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하고, 많은 전 촉나라 귀족과 관료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다.[44]

등애는 촉나라 정복의 업적에 대해 자만하게 되었다. 그는 전 촉나라 관리들에게 "여러분 모두 나를 만나 운이 좋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오한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파멸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또한, "강유는 그 나름대로 당대의 영웅이지만, 저와 조우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식견 있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발언을 조소했다고 한다.[45]

264년 2월 8일, 위나라 조정은 등애의 촉나라 정복을 칭찬하며 백기, 한신, 오한, 주아부와 같은 명장들과 비교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등애는 태위(太尉)로 승진하고, 그의 후작령에 과세 대상 가구가 20,000가구 증가했다. 그의 두 아들은 정후(亭侯)로 봉해졌으며, 각자 후작령에서 1,000가구의 과세 대상 가구를 받았다.[46]

등애는 사마소에게 편지를 써서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동오를 상대로 한 향후 원정을 준비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유선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사치품을 제공하여 오나라 황제 손휴를 유인하여 항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7] 그러나 사마소는 등애의 제안이 시행되기 전에 위 황실에 제출되어 추가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답했다.[48] 등애는 조급해하며 황실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춘추''와 ''손자병법''의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행동이 위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암시했다.[49]

종회, 호열, 사찬 등은 등애가 위나라 조정에 불경을 표했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50] 《석어(釋語)》에 따르면, 종회는 다른 사람의 필체를 모방하는 데 능숙하여 등애의 편지를 수정하고 사마소가 보낸 편지를 파기하여 사마소가 등애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었다.[51]

264년 2월 말 또는 3월 초, 위나라 조정은 등애를 체포하여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위관과 종회는 등애의 진영으로 가서 사마소의 편지를 이용하여 등애의 부하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등애는 체포되어 죄수 호송 수레에 실려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체포 당시 등애는 "나는 충신인데, 이런 운명을 맞이하다니! 과거 백기에게 일어났던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났다."라고 외쳤다.[54]

등애가 호송된 후, 종회는 264년 3월 1일 성도에서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종회의 죽음 이후, 등애의 부하들은 그들의 장군을 구출하고 성도로 데려갔다. 위관은 이 소식을 듣고 전속에게 군대를 이끌고 등애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55] 전속과 그의 군인들은 면죽 서쪽에서 등애를 가로막아 그와 그의 아들 등충, 그리고 사찬을 살해했다.[57] 등애가 죽은 후, 낙양에 있던 그의 다른 아들들도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서역으로 유배되었다.[58]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과 옛 촉나라의 신하였던 번건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3. 평가

등애는 강직하고 굳센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숨겨진 함정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해 결국 몰락했다. 제갈각에게 일어날 일을 예견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은 예측하지 못했다. 이는 옛 사람들이 말하는 '자기 인식 부족과 편협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65]

서진 건국 후, 사마염(진 무제)은 등애가 오만함과 대담함 때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지만, 체포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후손들을 사면하고 유배에서 돌아오도록 허락했다.[60]

등애가 옹주양주에 주둔했을 때 건설한 요새는 훗날 강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주었다.[61]

단탁(段灼)은 상주를 올려 등애가 위나라에 기여한 공로와 반역 의도가 없었음을 주장하며 그를 변호했다. 그는 등애가 고령이었고, 거칠고 무례한 행동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언급하며, 백기오자서에 비유했다.[66] 등애 휘하에서 복무했던 장군 범진(樊震)은 황제에게 등애가 위나라에 매우 충성스러운 신하였다고 회상했다.[67]

진수는 저서 『삼국지』에서 등애를 "강한 의지로 공적을 세웠지만, 재앙을 막는 데는 소홀했다"라고 평했다.

농정관에서 시작하여 이름을 떨친 등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았고, 사후 오랫동안 많은 등애 사당이 세워졌으며, 일부는 현존하고 있다. 또한 현재에도 말더듬이였던 등애가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사람들을 격려하는 예시로 언급하기도 한다. 촉한의 인물이 호의적으로 묘사되는 『삼국지연의』의 영향이 큰 중국에서, 위의 인물이 긍정적인 비유로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당나라 사관이 선정한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에 선정되었다(무묘육십사장). 위나라에서 선정된 인물은 그와 장료뿐이다.

4. 등애의 친족 관계

등애는 적어도 두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한 명은 등충(鄧忠)으로, 아버지와 함께 촉한 정벌에 참여했다. 등충은 향후(鄕侯) 작위를 받았고 1,000호의 가구를 다스리는 식읍을 받았다. 그러나 등충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다.[62] 등애의 다른 아들들은 낙양에 있었는데, 아버지 사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62]

등애의 생존한 가족들은 유배되었다가 진 무제가 진나라에서 그들을 사면하는 조서를 내린 266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62]

273년, 무제는 등애의 손자인 등랑(鄧朗)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63] 등랑은 단수현(丹水縣; 현재의 허난성 시촨현 일대)과 정릉현(定陵縣; 현재의 안후이성 칭양현 일대)의 현령을 지냈다. 그는 적어도 한 아들 등도(鄧韜)를 두었다. 진 회제 재위 시절인 영가 연간(307-313)에 등랑은 신도군(新都郡; 현재의 쓰촨성 광한시 일대)의 태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양양군에서 일어난 화재로 어머니, 아내, 아이들과 함께 사망했다. 등도(鄧韜)의 아들인 그의 손자 등행(鄧行)만이 화재에서 살아남았다.

등애의 또 다른 손자인 등천추(鄧千秋)는 왕융에게 등용되어 진나라의 중요한 관료로 일했다. 그는 등랑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그의 두 아들 또한 양양 화재로 사망했다.[64]

참조

[1] 문서 Vol.04 of ''Sanguozhi'' and vol.02 of ''Jin Shu'' both indicated that Deng Ai was arrested in the 1st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Xianxi'' era. The month corresponds to 15 Feb to 14 Mar 264 in the Julian calendar. Volume 78 of ''Zizhi Tongjian'' dated Deng Ai's arrest to the ''renchen'' day of that month, but there is no ''renchen'' day in that month. The next ''renchen'' day is in the 2nd month, and corresponds to 16 Mar 264 in the Julian calendar. All sources agree that Deng Ai died after [[Zhong Hui]], who died on 3 Mar 264.
[2] 서적 Public Memory i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Brill 2020
[3] 문서 (為都尉學士,以口吃,不得作幹佐。為稻田守叢草吏。同郡吏父怜其家貧,資給甚厚,艾初不稱謝。每見高山大澤,輙規度指畫軍營處所,時人多笑焉。後將典農綱紀,上計吏, ...) ''Sanguozhi'' vol. 28.
[4] 문서 (世語曰:鄧艾少為襄城典農部民,與石苞皆年十二三。謁者陽翟郭玄信,武帝監軍郭誕元弈之子。建安中,少府吉本起兵許都,玄信坐被刑在家,從典農司馬求入御,以艾、苞與御,行十餘里,與語,恱之,謂二人皆當遠至為佐相。艾後為典農功曹,奉使詣宣王,由此見知,遂被拔擢。)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 문서 (... 因使見太尉司馬宣王。宣王奇之,辟之為掾,遷尚書郎。) ''Sanguozhi'' vol. 28.
[6] 문서 (時欲廣田畜糓,為滅賊資,使艾行陳、項已東至壽春。艾以為「田良水少,不足以盡地利,宜開河渠,可以引水澆溉,大積軍糧,又通運漕之道。」) ''Sanguozhi'' vol. 28.
[7] 문서 (乃著濟河論以喻其指。) ''Sanguozhi'' vol. 28.
[8] 문서 (又以為「昔破黃巾,因為屯田,積穀於許都以制四方。今三隅已定,事在淮南,每大軍征舉,運兵過半,功費巨億,以為大役。陳、蔡之間,土下田良,可省許昌左右諸稻田,并水東下。令淮北屯二萬人,淮南三萬人,十二分休,常有四萬人,且田且守。水豐常收三倍於西,計除衆費,歲完五百萬斛以為軍資。六七年間,可積三千萬斛於淮上,此則十萬之衆五年食也。以此乘吳,無往而不克矣。」) ''Sanguozhi'' vol. 28.
[9] 문서 (宣王善之,事皆施行。) ''Sanguozhi'' vol. 28.
[10] 문서 (正始二年,乃開廣漕渠,每東南有事,大軍興衆,汎舟而下,達于江、淮,資食有儲而無水害,艾所建也。) ''Sanguozhi'' vol. 28.
[11] 문서 (出參征西軍事,遷南安太守。嘉平元年,與征西將軍郭淮拒蜀偏將軍姜維。維退,淮因西擊羌。艾曰:「賊去未遠,或能復還,宜分諸軍以備不虞。」) ''Sanguozhi'' vol. 28.
[12] 문서 (淮從泰計,使泰率討蜀護軍徐質、南安太守鄧艾等進兵圍之,斷其運道及城外流水。安等挑戰,不許,將士困窘,分糧聚雪以稽日月。維果來救,出自牛頭山,與泰相對。泰曰:「兵法貴在不戰而屈人。今絕牛頭,維無反道,則我之禽也。」勑諸軍各堅壘勿與戰,遣使白淮,欲自南渡白水,循水而東,使淮趣牛頭,截其還路,可并取維,不惟安等而已。淮善其策,進率諸軍軍洮水。維懼,遁走,安等孤縣,遂皆降。) ''Sanguozhi'' vol. 22.
[13] 문서 (淮乃使泰率討蜀護軍徐質、南安太守鄧艾進兵圍麴城,斷其運道及城外流水。安等挑戰,不許,將士困窘,分糧聚雪以引日月。維引兵救之,出自牛頭山,與泰相對。泰曰:「兵法貴在不戰而屈人。今絕牛頭,維無反道,則我之禽也。」敕諸軍各堅壘勿與戰,遣使白淮,使淮趣牛頭截其還路。淮從之,進軍洮水。) ''Zizhi Tongjian'' vol. 75.
[14] 문서 (於是留艾屯白水北。三日,維遣廖化自白水南向艾結營。艾謂諸將曰:「維今卒還,吾軍人少,法當來渡而不作橋。此維使化持吾,令不得還。維必自東襲取洮城。」洮城在水北,去艾屯六十里。艾即夜潛軍徑到,維果來渡,而艾先至據城,得以不敗。賜爵關內侯,加討寇將軍,後遷城陽太守。) ''Sanguozhi'' vol. 28.
[15] 문서 (是時并州右賢王劉豹并為一部, ...) ''Sanguozhi'' vol. 28.
[16] 문서 (... 艾上言曰:「戎狄獸心,不以義親,彊則侵暴,弱則內附,故周宣有玁狁之寇,漢祖有平城之困。每匈奴一盛,為前代重患。自單于在外,莫能牽制長卑。誘而致之,使來入侍。由是羌夷失統,合散無主。以單于在內,萬里順軌。今單于之尊日疏,外土之威寖重,則胡虜不可不深備也。聞劉豹部有叛胡,可因叛割為二國,以分其勢。去卑功顯前朝,而子不繼業,宜加其子顯號,使居鴈門。離國弱寇,追錄舊勳,此御邊長計也。」) ''Sanguozhi'' vol. 28.
[17] 문서 (又陳:「羌胡與民同處者,宜以漸出之,使居民表崇廉恥之教,塞姦宄之路。」大將軍司馬景王新輔政,多納用焉。遷汝南太守,至則尋求昔所厚己吏父,乆已死,遣吏祭之,重遺其母,舉其子與計吏。艾所在,荒野開闢,軍民並豐。) ''Sanguozhi'' vol. 28.
[18] 문서 (諸葛恪圍合肥新城,不克,退歸。艾言景王曰: ...) ''Sanguozhi'' vol. 28.
[19] 문서 (... 「孫權已沒,大臣未附,吳名宗大族,皆有部曲,阻兵仗勢,足以建命。恪新秉國政,而內無其主,不念撫恤上下以立根基,競於外事,虐用其民,悉國之衆,頓於堅城,死者萬數,載禍而歸,此恪獲罪之日也。昔子胥、吳起、商鞅、樂毅皆見任時君,主沒而敗。况恪才非四賢,而不慮大患,其亡可待也。」) ''Sanguozhi'' vol. 28.
[20] 문서 (恪歸,果見誅。) ''Sanguozhi'' vol. 28.
[21] 문서 (遷兖州刺史,加振威將軍。上言曰: ...) ''Sanguozhi'' vol. 28.
[22] 문서 (... 「國之所急,惟農與戰,國富則兵彊,兵彊則戰勝。然農者,勝之本也。孔子曰『足食足兵』,食在兵前也。上無設爵之勸,則下無財畜之功。今使考績之賞,在於積粟富民,則交游之路絕,浮華之原塞矣。」) ''Sanguozhi'' vol. 28.
[23] 문서 (高貴鄉公即尊位,進封方城亭侯。毌丘儉作亂,遣健步齎書,欲疑惑大衆,艾斬之,兼道進軍,先趣樂嘉城,作浮橋。司馬景王至,遂據之。文欽以後大軍破敗於城下,艾追之至丘頭。欽奔吳。) ''Sanguozhi'' vol. 28.
[24] 문서 (吳大將軍孫峻等號十萬衆,將渡江,鎮東將軍諸葛誕遣艾據肥陽,艾以與賊勢相遠,非要害之地,輒移屯附亭,遣泰山太守諸葛緒等於黎漿拒戰,遂走之。) ''Sanguozhi'' vol. 28.
[25] 문서 (其年徵拜長水校尉。以破欽等功,進封方城鄉侯,行安西將軍。) ''Sanguozhi'' vol. 28.
[26] 문서 (解雍州刺史王經圍於狄道,姜維退駐鍾提,乃以艾為安西將軍,假節、領護東羌校尉。議者多以為維力已竭,未能更出。) ''Sanguozhi'' vol. 28.
[27] 문서 (艾曰:「洮西之敗,非小失也;破軍殺將,倉廩空虛,百姓流離,幾於危亡。今以策言之,彼有乘勝之勢,我有虛弱之實,一也。彼上下相習,五兵犀利,我將易兵新,器杖未復,二也。彼以船行,吾以陸軍,勞逸不同,三也。狄道、隴西、南安、祁山,各當有守,彼專為一,我分為四,四也。從南安、隴西,因食羌穀,若趣祁山,熟麥千頃,為之縣餌,五也。賊有黠數,其來必矣。」) ''Sanguozhi'' vol. 28.
[28] 문서 (頃之,維果向祁山,聞艾已有備,乃回從董亭趣南安,艾據武城山以相持。維與艾爭險,不克,其夜,渡渭東行,緣山趣上邽,艾與戰於段谷,大破之。) ''Sanguozhi'' vol. 28.
[29] 문서 (甘露元年詔曰:「逆賊姜維連年狡黠,民夷騷動,西土不寧。艾籌畫有方,忠勇奮發,斬將十數,馘首千計;國威震於巴、蜀,武聲揚於江、岷。今以艾為鎮西將軍、都督隴右諸軍事,進封鄧侯。分五百戶封子忠為亭侯。」) ''Sanguozhi'' vol. 28.
[30] 서적 The Talent of Shu Qiao Zhou and the Intellectual World of Early Medieval Sichuan https://books.googl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8
[31] 서적 河南年鉴 https://books.google[...] 《河南年鉴》编辑部 ("Henan Yearbook" editorial department) 2008
[32] 문서 (二年,拒姜維於長城,維退還。遷征西將軍,前後增邑凡六千六百戶。景元三年,又破維於侯和,維却保沓中。) ''Sanguozhi'' vol. 28.
[33] 문서 (四年秋,乃下詔使鄧艾、諸葛緒各統諸軍三萬餘人, ...) ''Sanguozhi'' vol. 28.
[34] 문서 (四年秋,詔諸軍征蜀,大將軍司馬文王皆指授節度,使艾與維相綴連;雍州刺史諸葛緒要維,令不得歸。) ''Sanguozhi'' vol. 28.
[35] 문서 (初,艾當伐蜀,夢坐山上而有流水,以問殄虜護軍爰邵。邵曰:「按易卦,山上有水曰蹇。蹇繇曰:『蹇利西南,不利東北。』孔子曰:『蹇利西南,往有功也;不利東北,其道窮也。』往必克蜀,殆不還乎!」艾憮然不樂。) ''Sanguozhi'' vol. 28.
[36] 서적 Sanguozhi vol. 28
[37] 서적 Sanguozhi vol. 28
[38] 서적 Sanguozhi vol. 28
[39] 서적 Sanguozhi vol. 28
[40] 서적 Sanguozhi vol. 28
[41] 서적 Sanguozhi vol. 28
[42] 서적 Sanguozhi vol. 28
[43] 서적 Sanguozhi vol. 28
[44] 서적 Sanguozhi vol. 28
[45] 서적 Sanguozhi vol. 28
[46] 서적 Sanguozhi vol. 28
[47] 서적 Sanguozhi vol. 28
[48] 서적 Sanguozhi vol. 28
[49] 서적 Sanguozhi vol. 28
[50] 서적 Sanguozhi vol. 28
[51]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2] 서적 Zizhi Tongjian vol. 78
[53] 서적 Sanguozhi vol. 28
[54] 서적 Wei Sh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5] 서적 Sanguozhi vol. 28
[56]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7]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8] 서적 Sanguozhi vol. 28
[59]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60] 서적 Sanguozhi vol. 28
[61] 서적 Sanguozhi vol. 28
[62] 문서
[63] 서적 Sanguozhi vol. 28
[64]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65] 서적 Sanguozhi vol. 28
[66] 서적 Sanguozhi vol. 28
[67]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68] 문서 西晉泰始九年,議郎段灼疏司馬炎武帝中指鄧艾:「七十老公,反欲何求!」(都已經是七十歲老人家了,還做反做什麼!)載《三國志·魏書·卷二十八·王毌丘諸葛鄧鍾傳》
[69] 문서 鐘会之乱
[70] 웹사이트 三國志/卷28 鄧艾伝 https://zh.wikisourc[...]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2023-07-25
[71] 서적 世語
[72] 문서 後に鄧艾は汝南太守となると、亡くなっていたその役人の父を祭り、その役人の母に贈り物を与え、その役人の子を計吏に推挙した。
[73] 서적 晋諸公賛
[74] 문서
[75] 문서
[76] 문서
[77] 문서
[78] 서적 漢晋春秋
[79] 서적 幽明録
[80] 문서
[81] 서적 이십육사대사전
[82] 서적 위서 등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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