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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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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황은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이다. 하동군 양현 출신으로, 황건적의 난 당시 양봉 휘하에서 활약하며 기병했다. 조조에게 귀순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특히 관우의 번성 포위 당시 조인을 구원하여 명성을 떨쳤다. 조비 시대에는 우장군에 임명되었고, 조예 대에는 무군대장군을 거쳐 장후의 시호를 받았다. 《삼국지》에서는 대부(大斧)를 사용하는 맹장으로 묘사되며, 번성 전투에서 관우와 80합을 겨루는 등 활약했으나 상용 전투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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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서황 초상화
청나라 시대의 서황 삽화
이름서황
로마자 표기Seo Hwang
본관허둥군 양현 (산시성 훙둥현)
공명 (公明)
시호장후 (壯侯)
사망 년도227년
관직
주요 직위기도위
비장군
편장군
횡야장군
평구장군
우장군
봉작도정후
녹향후
양후
양평후
섬긴 세력
주군양봉
조조
조비
조예
가족 관계
자녀서개
주요 참여 전투

2. 생애

서황은 후한하동군 양현(지금의 산시성 훙퉁현 남동쪽)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군청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다.[3] 이후 황건적의 난 당시 백파적 출신으로 한나라 중앙 정부의 장군이 된 양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에 임명되었다.[4]

195년(흥평 2년),[61] 이각곽사의 내전으로 수도 장안이 혼란에 휩싸이자,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자고 진언하였다. 헌제 일행은 황하를 건너 안읍현(지금의 산시성 샤현 서쪽)에 당도했고, 서황은 도정후에 봉해졌다.[5]

196년(건안 원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후, 한섬동승 사이에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서황은 양봉에게 군벌 조조를 낙양으로 불러 이 위기를 해결하고 황제를 보호하도록 설득했다.[6]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빼돌렸고, 양봉은 조조와 격돌했으나 패하고 원술에게 달아났다. 서황은 조조에게 귀순했다.[7] 이후 하남윤 권현(卷縣)과 원무현(原武縣)을 평정하고 비장군(裨將軍)을 받았다.[8]

204년 조조가 포위해두고 한단현(邯鄲縣)을 함락하였다. 역양현령(易陽―) 한범(韓範)은 항복했다가 다시 무기를 들었다. 서황은 편지를 단 화살을 날려 한범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그리고 조조에게 “원담원상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많은 들이 추세에 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역양을 밀어버린다면 다른 성들은 죽음을 불사할 것이고, 항복을 허락한다면 우러러보지 않는 성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여 조조의 승인을 받았다. 이어서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毛城)도 접수하였다.[12][13]

207년 백랑산에서 답돈을 정벌할 때도 따라가 횡야장군(橫野―)에 임명되었다.[14] 208년 형주 정벌을 수행하여 중려(中廬), 임저(臨沮, 지금의 후베이성 위안안 현), 의성(宜城) 방면을 정리하였다. 만총과 한진(漢津)에서 관우를 물리치고 조인과 더불어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방어했으나 주유에게 패하였다.[15]

215년 장로 정벌에 종군하였다. 별도로 독(櫝), 구이(仇夷)의 저족들을 깨트리고 평구장군(平寇―)으로 옮겼다.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고 진복(陳福) 등 30여 둔을 격파하였다. 하후연 밑에 남아서 한중을 수비하였다. 유비가 진식 등 10여 영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확보하려는 것을 분쇄하였다. 조조는 그 잔도는 한중의 험하고 중요한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며 크게 칭찬하였다.[24][26]

211년, 태원군 대릉현(大陵縣)에서 상요(商曜)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연의 지휘 아래[63] 이를 진압하고 상요를 처형했다. 조조군이 한중으로 진군하자, 한수마초관중 지역 세력들이 동관으로 진격해왔다. 서황은 분음현(汾陰縣, 지금의 산시성 완룽현)에 주둔하며 하동군을 안정시켰다. 7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동관 앞에 주둔하자, 관중군은 황하 서쪽을 비우고 남쪽에 병력을 집중했다. 서황은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황하 서쪽을 확보하겠다고 요청했고, 조조는 이를 승낙했다.

주령과 함께 보병, 기병 4,000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해자와 울짱을 완성하기도 전에, 양흥이 5,000명을 이끌고 기습했지만, 서황은 이를 격퇴했다. 이후 하후연과 함께 우부풍 유미(隃麋, 지금의 산시성 첸양현)·견현(汧縣, 지금의 산시성 룽현)의 저족을 평정하고, 안정(安定)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섣달에 조조는 업으로 돌아갔고, 서황은 하후연 등과 함께 장안에 남았다. 212년에는 부(鄜), 하양(夏陽)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양흥을 처형했다.

220년(연강 원년) 조비조조를 이어 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정남장군(征南―) 하후상, 건무장군(建武―)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다.[66]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다.[67] 222년 남정을 개시하여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68]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됐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撫軍―)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69]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다.[43]

서황의 아들 서개(徐蓋)는 아버지의 후작 작위를 이어받아 양평후가 되었다. 서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서패(徐霸)가 다음 양평후로 계승했다. 조예는 나중에 그들의 후작령을 나누어 서황의 두 후손에게 후작 작위를 수여했다.[44]

2. 1. 초기 생애와 양봉 휘하

서황은 후한하동군 양현(지금의 산시성 훙퉁현 남동쪽)[3]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군청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다.[4] 이후 황건적의 난 당시 백파적 출신으로 한나라 중앙 정부의 장군이 된 양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에 임명되었다.[4]

195년(흥평 2년)[61] 이각곽사의 내전으로 수도 장안이 혼란에 휩싸이자,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자고 진언하였다. 헌제 일행은 황하를 건너 안읍현(지금의 산시성 샤현 서쪽)에 당도했고, 서황은 도정후에 봉해졌다.[5]

196년(건안 원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후, 한섬동승 사이에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서황은 양봉에게 군벌 조조를 낙양으로 불러 이 위기를 해결하고 황제를 보호하도록 설득했다.[6]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빼돌렸고, 양봉은 조조와 격돌했으나 패하고 원술에게 달아났다. 서황은 조조에게 귀순했다.[7]

2. 2. 조조 휘하

192년에서 195년 사이, 이각곽사가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헌제를 수도 장안에 인질로 잡았다. 195년, 이각과 곽사 사이의 내분으로 장안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서황은 양봉과 함께 이각의 부하였다. 서황은 양봉을 설득하여 헌제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호송하게 했다. 헌제가 안읍현에 도착한 후, 서황은 도정후 작위를 받았다.[5]

헌제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온 후, 헌제를 호송했던 장군들 중 한섬동승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서황은 양봉에게 조조를 낙양으로 불러 이 위기를 해결하고 황제를 보호하도록 설득했다. 1996년 초, 조조와 그의 군대가 낙양에 나타나 헌제를 허창으로 데려갔고, 그곳이 새로운 한나라 황제가 되었다. 양봉은 서황의 제안에 따라 조조에게 합류하려 했지만, 결국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갔다. 서황은 그를 따랐다.[6]

1996년 말, 조조가 양국(현재 허난성 상추 주변)에서 양봉을 격파한 후, 서황은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7] 이후 하남윤 권현(卷縣)과 원무현(原武縣)을 평정하고 비장군(裨將軍)을 받았다.[8]

204년 조조가 포위해두고 한단현(邯鄲縣)을 함락하였다. 역양현령(易陽―) 한범(韓範)은 항복했다가 다시 무기를 들었다. 서황은 편지를 단 화살을 날려 한범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그리고 조조에게 “원담원상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많은 들이 추세에 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역양을 밀어버린다면 다른 성들은 죽음을 불사할 것이고, 항복을 허락한다면 우러러보지 않는 성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여 조조의 승인을 받았다. 이어서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毛城)도 접수하였다.[12][13]

207년 백랑산(白狼山)에서 답돈정벌할 때도 따라가 횡야장군(橫野―)에 임명되었다.[14] 208년 형주 정벌을 수행하여 중려(中廬), 임저(臨沮, 지금의 후베이성 위안안 현), 의성(宜城) 방면을 정리하였다. 만총과 한진(漢津)에서 관우를 물리치고 조인과 더불어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방어했으나 주유에게 패하였다.[15]

215년 장로 정벌에 종군하였다. 별도로 독(櫝), 구이(仇夷)의 저족들을 깨트리고 평구장군(平寇―)으로 옮겼다.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고 진복(陳福) 등 30여 둔을 격파하였다. 이번에도 하후연 밑에 남아서 한중을 수비하였다. 유비가 진식 등 10여 영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확보하려는 것을 분쇄하였다. 조조는 그 잔도는 한중의 험하고 중요한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며 크게 칭찬하였다.[24][26]

2. 2. 1. 주요 전투


  • 198년 여포를 토벌하는데 참여하여 항복시켰다.
  • 199년 사환, 조인과 함께 하내군수고를 쳐부수고 죽였다.
  • 200년 관도 전투
  • 백마에서 원소의 선봉장 안량을 격파.
  • 연진에서 문추를 격파.
  • 유벽, 유비 등이 여남군 은강현 등 허도 근방을 교란하자 조홍과 함께 가서 축비를 격파.
  • 순유한순[62]의 운송대를 습격할 적임자로 서황을 추천, 사환과 함께 가서 그 물자들을 태움.
  • 204년 업을 포위하고 한단현(邯鄲縣)을 함락.
  • 역양현(易陽―) 현령(韓範)에게 편지를 단 화살을 날려 설득하여 항복시킴.
  •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毛城)도 점령.
  • 205년 남피에서 원담을 격멸하는데 공을 세우고 평원국의 잔당들도 소탕.
  • 207년 백랑산에서 답돈을 정벌.
  • 208년 형주 정벌을 수행하여 중려(中廬), 임저(臨沮, 지금의 후베이성 위안안 현), 의성(宜城) 방면을 정리.
  • 만총과 한진(漢津)에서 관우를 격파.
  • 조인과 더불어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방어했으나 주유에게 패배.
  • 215년 양평 전투에서 장로를 상대로 승리.
  • 유비의 공격으로부터 한중군을 방어.
  • 진식이 군대를 이끌고 한중의 주요 통신선인 마명각(馬鳴閣)에서 하후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서황은 별동대를 이끌고 진식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해 격파.[25]
  • 219년 번성조인을 지원.
  • 한수우금군은 수몰당하고 번성과 양양성은 관우에게 포위됨.
  • 양릉피(陽陵陂)에 진을 쳐놓고 조인에게 원병이 왔다는 사실만 알림.
  • 조엄이 열흘 안에 증원군이 올 것이니 그 후에 안팎에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함.
  • 조조가 서상(徐商)·여건 등을 보내와 병마가 전부 집결하면 전진하라고 함.
  • 은서(殷署)·주개(朱蓋) 등의 열두 영이 도착했고, 동소의 조언을 채택한 조조의 지시에 따라 손권이 강릉과 공안(公安)으로 진격한다는 것까지 조인과 관우에게 알림.[65]
  • 거짓으로 해자를 파며 언성(偃城)의 뒤를 끊는 척하여 언성의 관우군이 진지를 불태우고 철수.
  • 관우군의 포위망에 3장(丈) 거리까지 다다랐다. 관우군은 위두(圍頭)와 사총(四冢)에 진영이 있었으나 서황은 사총을 강타하여 격파.

2. 2. 2. 관서에서의 활약

211년, 태원군 대릉현(大陵縣)에서 상요(商曜)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연의 지휘 아래[63] 이를 진압하고 상요를 처형했다. 조조군이 한중으로 진군하자, 한수마초관중 지역 세력들이 동관으로 진격해왔다. 서황은 분음현(汾陰縣, 지금의 산시성 완룽현)에 주둔하며 하동군을 안정시켰다. 7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동관 앞에 주둔하자, 관중군은 황하 서쪽을 비우고 남쪽에 병력을 집중했다. 서황은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황하 서쪽을 확보하겠다고 요청했고, 조조는 이를 승낙했다.

주령과 함께 보병, 기병 4,000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해자와 울짱을 완성하기도 전에, 양흥이 5,000명을 이끌고 기습했지만, 서황은 이를 격퇴했다. 이후 하후연과 함께 우부풍 유미(隃麋, 지금의 산시성 첸양현)·견현(汧縣, 지금의 산시성 룽현)의 저족을 평정하고, 안정(安定)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섣달에 조조는 업으로 돌아갔고, 서황은 하후연 등과 함께 장안에 남았다. 212년에는 부(鄜), 하양(夏陽)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양흥을 처형했다.

210년, 서황은 군대를 이끌고 태원군(太原郡; 현재 산시성타이위안 부근)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대릉현(大陵縣; 현재 산시성 원수이현 북동쪽)에서 격파하고 반란 지도자 상요(商曜)를 죽였다.[16]

211년, 한수마초가 연합하여 서북 지방의 군벌들을 이끌고 량주(현재 산시성간쑤성 일부를 포함)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서황에게 분음현(汾陰縣; 현재 산시성 완룽현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하동군의 백성들을 안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서황에게 소와 술을 하사하고 그의 조상들의 묘를 수리하고 정돈하도록 허락했다.[17]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가서 연합군과 교전하게 되었을 때, 위수를 건너 적을 공격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하여 서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서황은 조조에게 자신을 북쪽으로 보내어 위수의 서쪽에서 포판(蒲阪)의 나루를 통해 황하를 건너 동관을 우회할 것을 제안했다.[19]

조조는 서황의 계획을 승인하고 그와 주령에게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도록 했다. 그들은 포판을 건너 진영을 치기 시작했지만, 방어 시설이 완공되기 전에 연합군의 일원인 양흥(梁興)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약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했다. 서황과 주령은 양흥을 막아내고 조조와 그의 나머지 군대가 강을 건너도록 했다.[20]

조조가 동관에서 승리한 후, 서황과 하후연을 보내 유미현(隃麋縣; 현재 산시성 쳰양현 동쪽)과 쳰현(汧縣; 현재 산시성 룽현 남쪽)에 있는 여러 적 부족을 안정시켰다. 서황과 하후연은 나중에 안정군(安定郡; 현재 간쑤성 전위안현 부근)에서 조조의 주력 부대와 합류했다. 조조가 예 (현재 허베이성한단)로 돌아간 후, 서황과 하후연을 보내 부현(鄜縣; 현재 산시성 황링현 남서쪽)과 하양현(夏陽縣; 현재 산시성 한청 남서쪽)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그곳에서 양흥을 격파하고 약 3,000 가구의 민간인을 복종시켰다.[21]

건안 16년(211년), 마초, 한수가 관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서황에게 명하여 분음에 주둔하여 하동을 진무시키고 동시에 소와 술을 주어 서황의 선조의 묘를 제사하게 했다. 조조는 동관까지 왔지만, 황하를 건너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서황은 포반진을 건너 적의 배후에 진지를 구축하는 계책을 제안하고, 정예병을 빌려 임무에 착수할 것을 요청했다. 서황은 4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55] 포반진을 건너 진지를 구축하고,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5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야습을 가해 온 양흥을 격파했다. 조조는 황하를 건너 마초 등을 토벌할 수 있었다(동관 전투). 서황은 하후연 등과 함께 유미, 견의 족을 토벌하고 조조와 안정에서 만났다.

건안 17년(212년), 하후연 등과 함께 부와 하양의 반란 잔당을 토벌했다. 양흥을 참하고 3000여 호를 항복시켰다.

2. 3. 조비, 조예 시대

220년(연강 원년) 조비조조를 이어 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정남장군(征南―) 하후상, 건무장군(建武―)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다.[66]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다.[67] 222년 남정을 개시하여 서황도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68]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됐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撫軍―)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69]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다.[43]

서황의 아들 서개(徐蓋)는 아버지의 후작 작위를 이어받아 양평후가 되었다. 서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서패(徐霸)가 다음 양평후로 계승했다. 조예는 나중에 그들의 후작령을 나누어 서황의 두 후손에게 후작 작위를 수여했다.[44]

3. 성품과 평가

서황은 검약하고 언행을 조심히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명군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자신은 다행히 조조를 받들게 됐으니 그저 공을 세우는 데 진력할 뿐 사사로운 영예가 무슨 필요냐"며 파벌을 넓히지 않았다. 공과 사를 구분하여 평소 존경하던 관우머리나라의 일이라며 스스럼없이 상을 내걸기도 하였다.[70] 군을 이끌 때는 항상 멀리까지 적정을 살펴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싸우지 않고 기다렸다가 싸웠으며, 승세를 타 추격하면 장병들에게 먹을 틈도 주지 않았다. 군중에서 '식사 시간조차 없는 것은 다 서황 때문이다.'라며 불평할 정도였는데, 서황은 웃으며 “내가 너희들의 이라도 깨부쉈느냐.”고 받아치고는 했다.[71]

관우를 격파했을 때 조조는 “나의 30년 용병 인생과 역사 속의 용병술을 통틀어 봐도 멀리까지 달려가 바로 여러 겹의 포위망 속으로 냅다 뛰어들어 붕괴시킨 이는 없었다. 게다가 번성과 양양성이 겪은 포위는 거성(莒城)과 즉묵성(即墨城)이 악의에게 당한 것보다도 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와 전양저를 뛰어넘는다.”고 칭찬하였다. 또 집결한 여러 군대를 둘러보면서 서황의 군영만이 정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는 "서황은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할 만하다."며 감탄하였다.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이라고 평가하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서황 열전을 결론내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황은 겸손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으며, 매우 자제력이 강했다. 전투에 임하여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는 부하들을 격려하여 영광을 추구하며 계속 싸우도록 하였고, 승리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탄식하곤 했다. '옛 사람들은 현명한 군주를 만나 섬길 기회가 없다고 한탄했다. 이제 나는 운 좋게도 그런 분을 만났으니, 개인적인 명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는 평생 동안 넓은 사교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45]

4. 삼국지연의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서황은 큰 도끼를 주 무기로 사용한다. 헌제가 장안벗어나 곽사에게 습격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양봉의 부하로서 곽사의 부장 최용을 단 1합 만에 쓰러뜨리며 처음 등장한다. 이후 헌제를 배신한 이락도 1합 만에 제압한다. 만총의 설득으로 조조에게 귀순하지만, 양봉과 한섬을 살해하자는 제안은 의롭지 못하다며 거절하여 의사로 칭송받는다.[46]

백마 전투에서는 안량에게 20여 합 만에 패배한다. 여양 전투에서는 원담의 부하 왕소를, 업 전투에서는 심배를 사로잡는다. 남피 전투에서는 팽안을 베는 등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적벽 대전에서 패배한 조조를 장료, 장합, 허저 등과 함께 필사적으로 지켜낸다. 동작대 완공 기념 행사에서는 조휴, 문빙, 조홍, 장합, 하후연과 함께 솜씨를 선보인다.

동관 전투에서는 조홍과 함께 마초를 막지만, 조홍의 경솔함으로 동관을 잃는다. 이후 포판진을 건너 황하 서쪽을 점거하고 관중군을 협공한다.

한중 전투에서는 부장 왕평의 조언을 무시하고 한수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패한다. 왕평은 패전 책임을 서황에게 돌리며 유비에게 투항한다. 번성 전투에서는 양동, 유인, 복병을 활용하여 관평요화를 몰아내고 언성과 사총을 점령한다. 직접 나선 관우와 80여 합을 겨루어 승리하고 번성을 구원한다.

상용 전투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맹달이 쏜 화살이마를 맞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47]

5. 가계


  • 아들 : 서개
  • * 손자 : 서패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7
[2] 서적 Sanguozhi vol. 17
[3] 서적 Sanguozhi vol. 17
[4] 서적 Sanguozhi vol. 17
[5] 서적 Sanguozhi vol. 17
[6] 서적 Sanguozhi vol. 17
[7] 서적 Sanguozhi vol. 17
[8] 서적 Sanguozhi vol. 17
[9] 서적 Sanguozhi vol. 17
[10] 서적 Sanguozhi vol. 17
[11] 서적 Sanguozhi vol. 17
[12] 서적 Sanguozhi vol. 17
[13] 서적 Sanguozhi vol. 17
[14] 서적 Sanguozhi vol. 17
[15] 서적 Sanguozhi vol. 17
[16] 서적 Sanguozhi vol. 17
[17] 서적 Sanguozhi vol. 17
[18] 서적 Sanguozhi vol. 17
[19] 서적 Sanguozhi vol. 17
[20] 서적 Sanguozhi vol. 17
[21] 서적 Sanguozhi vol. 17
[22] 서적 Sanguozhi vol. 17
[23] 서적 Sanguozhi vol. 17
[24] 서적 Sanguozhi vol. 17
[25] 서적 Sanguozhi vol. 17
[26] 서적 Sanguozhi vol. 17
[27] 서적 Sanguozhi vol. 17
[28] 서적 Sanguozhi vol. 17
[29] 서적 Sanguozhi vol. 17
[30] 서적 Sanguozhi vol. 17
[31] 서적 Sanguozhi vol. 17
[32] 서적 Sanguozhi vol. 17
[33] 서적 Sanguozhi vol. 17
[34] 서적 Sanguozhi vol. 17
[35] 서적 Sanguozhi vol. 17
[36]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6
[37] 서적 Sanguozhi vol. 17
[38] 서적 Sanguozhi vol. 17
[39] 서적 Sanguozhi vol. 17
[40] 서적 Sanguozhi vol. 17
[41] 서적 Sanguozhi vol. 17
[42] 서적 Sanguozhi vol. 17
[43] 서적 Sanguozhi vol. 17
[44] 서적 Sanguozhi vol. 17
[45] 서적 Sanguozhi vol. 17
[46] 서적 Sanguo Yanyi ch. 13
[47] 서적 Sanguo Yanyi ch. 94
[48] 서적 武帝紀 1999-04
[49] 서적 武帝紀 2000-01
[50] 서적 武帝紀 2000-02
[51] 서적 武帝紀 2000-02
[52] 문서 本来の文字は「氵」+「隱」
[53] 서적 武帝紀 2000-08
[54] 서적 夏侯淵伝
[55] 서적 武帝紀 2010-07
[56] 서적 趙儼伝
[57] 서적 武帝紀 2019-08
[58] 서적 董昭伝
[59] 서적 蜀志「関羽伝」が引く『蜀記』
[60] 서적 曹仁伝
[61] 서적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흥평 2년
[62] 서적 《삼국지》10권 위서 제10 순유
[63] 서적 《삼국지》9권 위서 제9 하후연
[64] 서적 《삼국지》23권 위서 제23 조엄
[65] 서적 《삼국지》14권 위서 제14 동소
[66] 서적 《삼국지》40권 촉서 제10 유봉
[67] 서적 《삼국지》9권 위서 제9 조인
[68] 서적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69] 서적 《삼국지》3권 위서 제3 명제 조예
[70] 서적 《촉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우에서 인용
[71] 서적 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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