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 가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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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테 가도 전투는 1940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고립된 소련 제163 소총 사단과 지원을 위해 투입된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을 핀란드군이 라테 도로에서 포위하여 격파했다.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양의 소련군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으며, 소련군 사령관은 패배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오늘날 라테 가도 전투 지역에는 양측의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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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 가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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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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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 라테 가도 전투 |
일부 | 겨울 전쟁 |
날짜 | 1940년 1월 1일 – 1940년 1월 7일 |
장소 | 핀란드 동부 |
좌표 | https://www.wikidata.org/wiki/Q2660577 |
결과 | 핀란드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핀란드 |
교전국 2 | 소비에트 연방 |
지휘관 | |
핀란드 | 얄마르 실라스부오 |
소련 |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 (처형) |
병력 규모 | |
핀란드 | 6,000명 |
소련 | 13,962–25,000명 (소련 스타브카 공식 보고서) |
피해 규모 | |
핀란드 | 사망 310명 |
소련 | 사상자 4,674명 (소련 측 기록) |
2. 배경
겨울 전쟁 중 1939년 12월 7일, 소련군 제163 저격 사단은 수오무살미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군의 보급선을 길게 늘려 고립시키려는 핀란드군의 작전이었다. 수오무살미 전투가 진행되면서 핀란드군은 1939년 12월 11일에 라테 도로를 차단하여 수오무살미 마을에 주둔한 소련 제163 소총 사단으로 향하는 남쪽 보급로를 막았다.[5] 이어 12월 13일에는 북쪽 보급로마저 차단했고, 이로 인해 소련군은 키안타얘르비 호수를 통해 새로운 보급로를 열어야만 했다.[6] 제163사단은 거의 포위된 상태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라테 가도 전투는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 제163사단을 격파한 핀란드 제9사단이, 라테 가도에 고립된 소련 제44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실라스부오(Siilasvuo)가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1940년 1월 초 소련 제44사단을 포위 공격했다. 핀란드군은 스키 부대의 기동성과 지형을 활용하여 긴 행렬로 늘어선 소련군을 여러 조각으로 분단시키고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12월 20일 제163사단 사령관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수오무살미에서의 철수를 붉은 군대 본부에 요청했다. 이에 대응하여 본부는 제163사단을 구출하고 지원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을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제44사단의 일부 병력인 제305 소총 연대 제1대대와 제662 소총 연대 제3대대가 먼저 수오무살미 인근의 제163사단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러나 붉은 군대 본부는 제44사단 전체가 라테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젤렌초프 사령관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7] 한편, 훈련이 잘 된 소련 제81 산악 소총 연대는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8]
라테 가도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야르마 시라스부오가 지휘하는 핀란드 제9 사단은 이미 소련 제163 사단을 거의 붕괴시킨 상태였다. 이후 핀란드군은 라테 가도에 도착한 제44 사단을 상대로 총공세를 준비했다. 대부분의 군사 역사가들은 라테 가도 전투의 주요 기간을 1940년 1월 1일부터 1월 7일까지로 보지만,[9] 실제로는 겨울 전쟁 기간 내내 라테 도로는 전장이었다. 제44사단과의 주요 전투 이전에도 핀란드군은 라테 도로에서 제163사단의 일부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렀고, 겨울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도 국경 근처 동쪽 도로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9] 핀란드군의 제44 사단에 대한 총공격은 1940년 1월 5일에 시작되었다.
3. 전투 경과
소련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핀란드군의 로드블록(roadblock, 도로 차단 지점)을 돌파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큰 손실을 입었다. 1월 6일 밤, 제44사단 사단장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Alexei Vinogradov)는 뒤늦게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10], 이미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북쪽 키안타예르비 호수(Lake Kiantajärvi)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방한 장비나 보급품이 없었던 많은 소련군 병사들이 혹한 속에서 얼어 죽거나 핀란드군의 추격과 소탕 작전에 의해 사살 또는 포로로 잡혔다.[11]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소총, 기관총, 야포, 전차 등 막대한 양의 소련군 물자를 노획했다.[12] 노획품 중에는 소련군이 승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핀란드 점령 후 열릴 승리 기념 행진을 위해 가져온 군악대의 악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13] 전투는 1월 7일경 핀란드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으며, 소련 제44사단은 사실상 괴멸되는 참패를 겪었다.
3. 1. 핀란드군의 포위 작전 (1939년 12월)
라테 가도 전투가 시작될 무렵, 얄마르 실라스부오가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이미 소련 제163사단을 격파한 상태였다. 이후 제9사단은 수오무살미(Suomussalmi)에서 12km 떨어진 하우킬라(Haukila) 근처 도로에서 저지된 소련 제44사단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핀란드 제9사단은 각 지휘관의 이름을 딴 4개의 분대(만델린(Mandelin), 매키니에미(Mäkiniemi), 카리(Kari), 파게르네스(Fagernäs) 분대)로 나뉘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940년 1월 5일 08시 30분에 시작하도록 명령되었다.
전투는 소련군 병력이 가장 많이 주둔한 하우킬라에 집중되었으며, 이곳은 "만델린" 분대와 "매키니에미" 분대가 공격을 맡았다. "매키니에미" 분대는 공식적인 공격 명령이 내려지기 며칠 전부터 하우킬라 방면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 배치된 제3 내무인민위원회(NKVD) 국경 경비 연대가 소련 제44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었다. 1월 6일 아침까지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열 한가운데 여러 지점에 지뢰를 매설하고 강력한 방어 거점을 확보하여 소련군을 여러 조각으로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1월 6일 하루 동안 라테 가도(Raate Road) 전체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핀란드군은 계속해서 소련군을 더 작은 단위로 분쇄했다. 소련군은 장갑차를 이용하여 핀란드군의 로드블록(roadblock, 도로 차단 지점)을 돌파하려 했으나, 정면 공격에서 수많은 전차를 잃고 실패했다. 마침내 1월 6일 21시 30분, 제44사단 사단장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Alexei Vinogradov)는 뒤늦게 자신의 사단에게 소련 국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10]
절망에 빠진 소련군은 키안타예르비 호수(Lake Kiantajärvi)를 넘어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방한복이나 보급품이 없었던 많은 병사들이 혹한 속에서 얼어 죽었다. 소련군 잔존 부대 중 일부는 동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카리" 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동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파게르네스" 분대가 잠시 전략적 교량을 통제하지 못했으나, 1월 7일 다시 교량을 탈환했고, 정오가 되기 전에 모든 소련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제압되었다. 이후 이틀 동안 잔여 병력 소탕 작전이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핀란드군은 수백 명의 굶주리고 얼어붙은 소련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제44사단의 다른 잔존 병력들은 핀란드군의 추격을 받으며 북부 숲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여 여러 소규모 그룹으로 국경에 도착했다.[11]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엄청난 양의 물자(materiel)를 노획했다.[12] 소련군은 승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핀란드 점령 후 열릴 승리 기념 행진을 위해 악기, 깃발, 악보를 갖춘 군악대까지 제44사단과 함께 이동시켰다. 핀란드군은 노획된 물자 중에서 이 군악대의 악기들을 발견했다.[13]
핀란드 통계 | 소련 통계 |
---|---|
소총 4,822정 | 소총 4,340정 |
기관총 106정 | 기관총 97정 |
경기관총 190정 | 경기관총 252정 |
야포 71문 | 야포 55문 |
대전차포 29문 | 대전차포 30문 |
대전차 소총 14정 | 대전차 소총 12정 |
전차 43대 | 전차 37대 |
장갑차 10대 | |
트럭 260대 | |
트랙터 20대 | |
승용차 2대 | |
군마 1,170필 |
3. 2. 소련 제44사단의 투입과 핀란드군의 반격 (1940년 1월 초)
핀란드 제9사단은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 제163사단을 격파한 후, 수오무살미에서 12km 떨어진 하우킬라(Haukila) 근처 도로에서 저지된 소련 제44사단을 격멸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실라스부오(Siilasvuo)가 지휘하는 제9사단은 각 지휘관의 이름을 딴 4개의 분대(만델린(Mandelin), 매키니에미(Mäkiniemi), 카리(Kari), 파게르네스(Fagernäs))로 나뉘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940년 1월 5일 08시 30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전투는 소련군 병력이 가장 많이 주둔한 하우킬라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이곳은 "만델린" 분대와 "매키니에미" 분대가 공격을 담당했다. "매키니에미" 분대는 공식적인 공격 개시 며칠 전부터 하우킬라 방면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 배치된 제3 내무인민위원회(NKVD) 국경 경비 연대가 소련 제44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었다.
1월 6일 아침까지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열 한가운데 여러 지점에 지뢰를 매설하는 등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며 소련군을 여러 조각으로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날 라테 가도(Raate Road) 전체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핀란드군은 계속해서 소련군을 더 작은 단위로 분쇄해 나갔다. 소련군은 장갑차를 이용하여 핀란드군의 로드블록(roadblock, 도로 차단)을 돌파하려 했으나, 정면 공격에서 수많은 전차를 잃고 실패했다. 결국 1월 6일 21시 30분, 사단장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Alexei Vinogradov)는 뒤늦게 자신의 사단에게 소련 국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
퇴각 명령을 받은 소련군은 혼란에 빠져 키안타예르비 호수(Lake Kiantajärvi)를 건너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방한복이나 보급품이 없었던 많은 병사들이 혹한 속에서 얼어 죽었다. 일부 소련군 잔존 부대는 동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카리" 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동쪽 더 먼 곳에서는 "파게르네스" 분대가 처음에는 전략적 교량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1월 7일에 교량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정오 무렵에는 모든 소련군의 저항이 제압되었다. 이후 이틀 동안 핀란드군은 잔여 병력 소탕 작전을 벌여 수백 명의 굶주리고 얼어붙은 소련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제44사단의 살아남은 다른 병력들은 핀란드군의 추격을 피해 북부 숲을 통해 여러 소규모 그룹으로 흩어져 간신히 국경에 도착했다.[11]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양의 물자(materiel)를 노획했다.[12] 소련군은 승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점령지에서 열릴 승리 기념 행진을 위해 악기, 깃발, 악보를 갖춘 군악대까지 제44사단과 함께 이동시켰다. 핀란드군은 노획된 물자 중에서 이 군악대의 악기들을 발견하기도 했다.[13]
핀란드 통계 | 소련 통계 |
---|---|
소총 4,822정 | 소총 4,340정 |
기관총 106정 | 기관총 97정 |
경기관총 190정 | 경기관총 252정 |
야포 71문 | 야포 55문 |
대전차포 29문 | 대전차포 30문 |
대전차 소총 14정 | 대전차 소총 12정 |
전차 43대 | 전차 37대 |
장갑차 10대 | |
트럭 260대 | |
트랙터 20대 | |
승용차 2대 | |
군마 1,170필 |
3. 3. 소련군의 패퇴 (1940년 1월 6일 ~ 7일)
겨울 전쟁 중 라테 가도 전투가 시작될 무렵, 실라스부오(Siilasvuo)가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이미 소련 제163사단을 격파한 상태였다. 이들은 수오무살미(Suomussalmi)에서 12km 떨어진 하우킬라(Haukila) 근처 도로에서 저지된 소련 제44소총사단을 섬멸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제9사단은 각 지휘관의 이름을 딴 4개의 분대("만델린", "매키니에미", "카리", "파게르네스")로 나뉘었다. 결정적인 전투 개시 시각은 1940년 1월 5일 08:30으로 정해졌다.
전투는 소련군 병력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던 하우킬라에 집중되었으며, 이곳은 "만델린"(Mandelin) 분대와 "매키니에미"(Mäkiniemi) 분대가 공격을 담당했다. "매키니에미" 분대는 공식적인 공격 개시 며칠 전부터 하우킬라 방면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 배치된 제3 NKVD 국경 경비 연대가 제44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었다.
1월 6일 아침까지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긴 행군 대열 여러 지점에 지뢰를 매설하고 강력한 방어 거점을 구축하여 소련군을 효과적으로 분단시켰다. 이날 하루 동안 라테 가도(Raate Road) 전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더 작은 단위로 계속해서 분쇄해 나갔다. 소련군은 장갑차를 동원하여 핀란드군의 로드블록(roadblock)을 돌파하려 했으나, 정면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수많은 전차를 손실했다. 마침내 1월 6일 21:30, 제44사단장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Alexei Vinogradov)는 뒤늦게 사단 병력에게 소련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
퇴각 명령을 받은 소련군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북쪽의 키안타예르비 호수(Lake Kiantajärvi)를 건너 도주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방한 장비나 보급품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혹한 속에서 얼어 죽었다. 일부 소련군 잔존 부대는 동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이미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카리"(Kari) 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동쪽 더 먼 곳에서는 "파게르네스"(Fagernäs) 분대가 처음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1월 7일에는 이 교량을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같은 날 정오 무렵에는 모든 소련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분쇄되었다. 이후 이틀간 핀란드군은 잔적 소탕 작전을 벌여 수백 명의 굶주리고 얼어붙은 소련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제44사단의 살아남은 다른 병력들은 핀란드군의 추격을 피해 북쪽의 숲을 통해 소규모 그룹으로 흩어져 간신히 국경을 넘었다.[11]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양의 물자(materiel)를 노획했다.[12] 소련군은 승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점령지에서 열릴 승리 기념 행진을 위해 악기, 깃발, 악보 등을 갖춘 군악대까지 제44사단과 함께 이동시켰다. 핀란드군은 노획한 물자 속에서 이 군악대의 악기들을 발견하기도 했다.[13]
핀란드 측 통계 | 소련 측 통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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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 4,822정 | 소총 4,340정 |
기관총 106정 | 기관총 97정 |
경기관총 190정 | 경기관총 252정 |
야포 71문 | 야포 55문 |
대전차포 29문 | 대전차포 30문 |
대전차 소총 14정 | 대전차 소총 12정 |
전차 43대 | 전차 37대 |
장갑차 10대 | |
트럭 260대 | |
트랙터 20대 | |
승용차 2대 | |
군마 1,170필 |
4. 결과
라테 가도 전투 이후 해당 지역에서는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만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 제163 저격 사단과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이 큰 피해를 입어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소련은 전열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한편, 핀란드군은 탄약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 전투를 통해 전차, 포, 기관총 등 다수의 무기와 장비, 군마, 소총 등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은 소련군 사령관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휘하 장교 두 명은 소련 국경으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옛 전장터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도로변에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남아 있다.
4. 1. 핀란드의 승리
소련군 제163 저격 사단과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이 사실상 괴멸하면서, 소련군은 전열을 재정비해야만 했다.탄약과 장비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양의 군수품을 노획했다. 주요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휘하 장교 두 명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4일 후 소련 국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야전 취사소 55개를 파괴했다는 혐의와 함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라테 가도 전투 이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몇 차례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다.
오늘날, 옛 전장터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의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도로변에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남아 있다.
4. 2. 소련군의 피해

오랫동안 핀란드 역사가들은 소련군의 손실 규모를 약 17,000명으로 추산해왔다. 이는 1월 초에 잡힌 포로 심문 결과에 근거한 것으로, 소련군 제27보병연대 장교들은 사상자 비율이 70%에 달한다고 진술했으며, 핀란드군은 제44사단의 병력을 20,00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14] 서방 역사가들 역시 핀란드의 추정치를 따랐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사상자 수를 즉각 부인하며, 동상으로 인한 손실을 포함해도 900명 정도이며 오히려 핀란드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15] 이후 핀란드에서는 전투 중 소련군 사상자 수를 확인하기 위한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고, 가장 최근의 연구에서는 소련군 손실을 최소 7,000명에서 9,000명 사이로 보고 있다.[16]
러시아 역사가 유리 킬린은 1940년 1월 스타프카(소련군 최고사령부)가 설치한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다른 수치를 제시했다. 이 위원회는 총 4,674명의 사상자(사망 1,001명, 부상 1,430명, 실종 2,243명)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44사단은 전투 전 병력이 13,962명이었으나 전투 후 9,288명으로 줄었다.[3] 또한 제305소총연대의 2개 대대가 다른 곳에 배치되어 사단 병력이 부족했다고 언급되었다. 킬린은 보고서 작성 이후 일부 병력이 복귀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실제 실종자 수는 더 적을 수 있다고 보았다. 우크라이나 역사가 올레그 보즈코 역시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유사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16] 하지만 스타프카 보고서는 겨울 전쟁 중인 1940년 1월에 발표되었고, 통계는 1월 1일부터 시작되어 이미 2주간 발생했던 심각한 손실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라테 도로에서 제44사단 외 다른 부대가 입은 사상자는 언급되지 않았다.[19]
핀란드군은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소련군 전사자들을 신속하게 매장했다. 집단 매장지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고 십자가나 기둥으로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들은 나중에 사라졌다. 부활절 무렵 소련 측은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여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청했다. 핀란드군은 적군 관계자들의 국경 통과를 불허하고, 라테 마을 근처에서 약 300구의 시신만 소련 측에 인도했다.[17] 계속 전쟁 이후 소련 지도부는 전사자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라테 도로 지역을 점령하고 전쟁 잔해를 수거했지만, 시신은 그대로 방치했다. 제44사단의 비극적인 운명은 수십 년간 소련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18]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막대한 양의 소련군 장비를 노획했다. 이는 탄약과 장비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노획한 주요 장비는 다음과 같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련 제44사단 사령관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휘하 장교 두 명은 4일 만에 소련 국경에 도착했지만,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야전 취사소 55개를 파괴했다는 혐의와 함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처럼 소련군은 라테 가도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지휘관에게 가혹한 책임을 물었다.
라테 가도 전투 이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몇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 옛 전장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 모든 전사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도로변에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럿 남아 있다.
4. 3. 정치적, 군사적 영향
라테 가도 전투 이후 해당 지역에서는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만 벌어졌다. 전투에 파견되었던 소련군 제163 저격 사단과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이 사실상 괴멸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었다.이 전투에서 핀란드는 상당한 양의 군사 장비를 노획했다. 당시 탄약과 장비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에게 이는 큰 도움이 되었다. 주요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휘하 장교 두 명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4일 후 소련 국경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야전 취사소 55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파괴되도록 방치했다는 혐의와 함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는 전투 패배에 대한 소련 지휘부의 엄격한 책임 추궁을 보여준다.
오늘날, 과거 전장터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도로변에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남아 있다.
4. 4. 전후 처리
전투 이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다.[20]소비에트 지휘관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주요 장교 두 명인 볼코프, 파호모프는 전투 중 후퇴했다. 스타프카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후퇴는 병사들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4일 후 소비에트 전선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결과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이 선고되었고, 즉시 집행되었다.[20]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55개의 야전 취사소를 파괴한 혐의로도 고발되었다고 한다. 제163 저격 사단과 제44 기계화 저격 사단 양측이 사실상 괴멸하면서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고 부대 재정비가 불가피해졌다.
우크라이나 출신 참전 용사 표트르 안드레비치 모로조프 하사는 1991년 핀란드 작가 레오 카르티모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21] 모로조프에 따르면, 핀란드군은 전투 후 소련군 전쟁 포로들을 돌려보냈으나, 1940년 여름 소비에트 비밀경찰 NKVD가 이들을 모두 처형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22]
한편, 탄약과 장비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양의 소련군 장비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획한 주요 물품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옛 전장터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도로변에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남아 있다.
4. 5. 소련군 사상자 규모 논쟁
오랫동안 핀란드 역사가들은 소련군의 손실 규모를 약 17,000명으로 추산해왔다. 이는 전투 직후인 1월 초에 잡힌 소련군 포로를 심문한 결과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소련군 제27보병연대 장교들은 사상자 비율이 70%에 달한다고 진술했다. 핀란드군은 제44사단의 전체 병력을 20,00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14] 서방 역사가들 역시 이러한 핀란드의 추정치를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소련은 즉각적으로 이러한 사상자 수치를 반박하며, 동상으로 인한 손실은 900명 정도에 불과하며 오히려 핀란드군 사망자가 2,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15] 이후 핀란드 역사가들은 전투에서 발생한 소련군 사상자 수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가장 최근의 핀란드 연구에서는 소련군 손실이 최소 7,000명에서 9,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16] 핀란드군은 전투 중 5,000정 이상의 소총을 노획했고, 북핀란드 그룹은 노획한 신형 소련 소총 1,200정으로 구식 소총을 교체하기도 했다.
핀란드군은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전염병 확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련군 전사자들을 서둘러 매장했다. 집단 매장지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고 십자가나 기둥으로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들은 나중에 사라졌다. 부활절 무렵 소련 측이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여 본국으로 송환하겠다고 요청하자, 핀란드군은 적군 관계자들의 국경 통과를 불허하고 라테 마을 근처에서 수습한 시신 300구를 소련 측에 인도했다.[17] 계속 전쟁 이후, 소련 지도부는 전사자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적군은 라테 가도 지역을 점령하고 전쟁 잔해물들을 수거했지만, 전사자 유해는 그대로 방치했다. 제44사단의 비극적인 운명은 수십 년간 소련 역사 기록에서 언급되지 않았다.[18]
한편, 러시아 역사가 유리 킬린은 1940년 1월 스타프카(소련군 최고사령부)가 사상자 규모를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총 4,674명의 사상자(사망 1,001명, 부상 1,430명, 실종 2,243명)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투 전 제44사단의 병력은 13,962명이었으나 전투 후에는 9,288명으로 줄었다.[3] 킬린은 보고서 작성 이후 일부 병력이 부대로 복귀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실제 실종자 수는 더 적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역사가 올레그 보즈코 역시 동일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사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16] 그러나 스타프카의 보고서는 겨울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월에 작성되었으며, 통계가 1월 1일부터 시작되어 그 이전에 사단이 입었던 심각한 손실은 포함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제44사단 외에 라테 가도에서 작전 중이던 다른 부대가 입은 사상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9]
4. 6. 전쟁 포로 문제
라테 가도 전투에 참전했던 우크라이나 출신 표트르 안드레비치 모로조프 하사는 1991년 핀란드의 논픽션 작가 레오 카르티모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21] 모로조프 하사에 따르면, 핀란드군은 전투 중 포로가 된 소련군 병사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냈으나, 1940년 여름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가 송환된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여 결국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22]5. 기념
옛 라테 가도 전장터에는 겨울 전쟁 당시 양측에서 사망한 모든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겨울 전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6] 또한, 도로변에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줄지어 있다.
5. 1. 겨울 전쟁 기념비

오늘날 옛 라테 가도 전장터에는 Erkki Pullinen|에르키 풀리넨fin이 설계한 겨울 전쟁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전투에서 사망한 양측의 모든 병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비 부지에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을 상징하는 수천 개의 돌이 놓여 있다.
러시아 측 기념비는 1994년 9월에, 우크라이나 측 기념비는 1998년 봄에 각각 설치되었다.[16] 도로변에는 이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병사들의 묘가 여러 개 줄지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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