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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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순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하여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홍문관 등에서 활동하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공조참판, 대사헌, 형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연산군 시대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으나,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517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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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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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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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문화(文化) |
자 | 자명(子明) |
호 | 저헌(樗軒) |
생애 | |
출생 | 1439년 |
사망 | 1518년 |
관력 | |
주요 관직 | 대사헌 이조판서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 영중추부사 |
가족 | |
아버지 | 류자환 |
어머니 | 정부인 남양 홍씨 |
배우자 | 정부인 청주 한씨 |
2. 생애
1484년(성종 15)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오랫동안 관기 확립에 힘썼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87년(성종 18)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호조참판·형조참판·공조참판·병조참판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 뒤 개성유수, 개성부 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산역을 다스렸고, 1495년(연산군 1) 형조판서로 옮겨 대제학·산릉도감제조·동지경연사·판의금부사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도총관을 겸임한 뒤 우참찬·좌참찬·호조판서·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치다가 1498년(연산군 4) 한성부판윤이 되고, 같은 해에 『성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압록강 연안에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계획이 있자 신수근과 함께 때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논해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호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502년(연산군 8)에는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아,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05년(연산군 11) 65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수상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수차례 사임을 요청했지만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09년(중종 4) 연산조의 총신이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본인이 다시 사임을 요청, 마침내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514년(중종 9) 다시 영의정을 제수받아 국정을 총괄하다가 3년 뒤에 77세로 졸했다.
자학(字學)에 매우 정밀하고 의학·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441-1478)
류순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일찍이 『금릉사(金陵詞)』를 지었는데, 의미가 장중하고 건실해 널리 회자되었다.1459년(세조 5) 생원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1462년(세조 8) 식년 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으며, 1466년(세조 12) 문과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1478년(성종 9)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서 도승지를 거쳐 시강관(侍講官)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시문에 능해 성종의 총애가 돈독하였다.
2. 2. 성종 대의 활동 (1478-1494)
1478년(성종 9)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도승지, 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성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1484년(성종 15)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오랫동안 관기 확립에 힘썼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87년(성종 18)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 호조참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후 개성유수,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2. 3. 연산군 대의 활동과 중종반정 (1494-1509)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장례를 주관하였고, 1495년(연산군 1)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여 대제학, 산릉도감제조, 동지경연사, 판의금부사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이후 이조판서(吏曹判書), 도총관(都摠官)을 겸임한 뒤 우참찬, 좌참찬, 호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1498년(연산군 4)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고, 같은 해에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9년(연산군 5) 형조판서 재직 시 압록강 연안의 여진족 정벌 계획에 대해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반대하여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左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했으며, 1502년(연산군 8)에는 시문에 능한 10인 중 한 명으로 뽑혀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이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1505년(연산군 11)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류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반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4. 중종 대의 활동과 사망 (1509-1517)
1509년(중종 4) 류순은 연산군 시절 총신이었다는 이유로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다시 사임을 요청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1514년(중종 9)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3년 뒤인 1517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평가
류순은 성종 대부터 중종 대까지 5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문장과 학문에 능하여 조선 전기 학풍 진작에 기여하였으며, 관료로서도 청렴하고 강직한 자세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대에 적극적으로 폭정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4. 가계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 류씨 가문 출신이다. 고조할아버지 류만수는 조선 개국 원종 공신, 증조할아버지 류원지는 상의중추원사, 할아버지 류종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아버지는 류사공이며 세마 벼슬을 지냈고, 어머니는 홍상직의 딸이다. 본처는 압해 정씨로 정윤희의 딸이며, 슬하에 아들 류응룡과 손자 류경장을 두었다. 후처는 남양 홍씨로 홍일민의 딸이다.
4. 1. 가계도
관계 | 이름 | 비고 |
---|---|---|
10대조 | 류공권 | 문간공(文簡公) |
9대조 | 류택 | 상서우복야, 한림학사승지 |
8대조 | 류경 | 문정공(文正公) |
7대조 | 류승 | 정신공(貞愼公), 홍진의 사위, 홍규의 매부 |
6대조 | 류돈 | 장경공(章景公) |
5대조 | 류총 | 권한공의 사위 |
고조부 | 류만수 | 조선 개국원종공신 |
고조모 | 남양 홍씨 | 홍주의 딸, 홍언박의 조카 |
증조부 | 류원지 | 상의중추원사 |
조부 | 류종 | 한성부 판관 |
부 | 류사공 | 세마 |
모 | 남양 홍씨 | 홍상직의 딸 |
처 | 압해 정씨 | 정윤희(丁胤禧)의 딸 |
아들 | 류응룡 | |
손자 | 류경장 | |
후처 | 남양 홍씨 | 홍일민(洪逸民)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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