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막시밀리앙 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시밀리앙 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은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 공주의 아들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외손자이자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자이다. 그는 바이에른 기병 연대 사령관과 울란 연대 대령을 역임했으며, 1839년 러시아 여대공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와 결혼하여 러시아 황실과 인연을 맺었다. 러시아에서 그는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예술 아카데미 회장을 지냈고, 산업 분야에도 기여하여 최초의 러시아 기관차 제작 공장을 설립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 외젠 드 보아르네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의붓아들로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역임하고 군사적 활약을 펼쳤으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지위를 받았고,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폰 바이에른과 결혼하여 뮌헨에서 사망했다.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아들로,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사망했으며, 여러 훈장을 받았지만 자녀는 없었다.
  • 러시아 제국의 공작 - 일리아 차브차바제
    일리야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러시아 제국 시대에 조지아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문화 부흥을 이끌었으며, 조지아어 부활과 문학 육성, 교육 진흥을 통해 조지아 사회의 근대화를 추구한 "근대 조지아 국가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작가, 시인, 언론인,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다.
  • 러시아 제국의 공작 - 바클라이 드 톨리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군을 이끌며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워 파리 점령에 공헌, 원수 지휘봉을 받은 러시아 제국의 육군 원수이다.
  • 보아르네가 - 마리아 2세
    마리아 2세는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미겔 1세의 왕위 찬탈 후 망명 생활을 겪었으나 복위하여 교육 개혁에 힘썼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 통치하다 출산 중 사망하였다.
  • 보아르네가 - 외젠 드 보아르네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의붓아들로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역임하고 군사적 활약을 펼쳤으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지위를 받았고,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폰 바이에른과 결혼하여 뮌헨에서 사망했다.
막시밀리앙 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를 브륄로프의 초상화, 1849년
카를 브륄로프 그림, 1849년
본명막시밀리안 조제프 외젠 오귀스트 나폴레옹 드 보아르네
출생1817년 10월 2일
출생지뮌헨, 바이에른 왕국
사망1852년 11월 1일
사망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배우자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1839년 결혼)
자녀알렉산드라 공주
마리아, 바덴 공자 루이스 빌헬름의 아내
니콜라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에브게니야, 올덴부르크 공작 알렉산더의 아내
에브게니,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세르게이 공자
게오르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아버지외젠 드 보아르네
어머니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타
가문보아르네 가문
작위
로이히텐베르크 공작1835년 3월 28일 – 1852년 11월 1일
전임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토
후임니콜라이 막시밀리아노비치

2. 가계 및 초기 생애

막시밀리앙은 1817년 뮌헨에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양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였다. 프랑스 제1제국 몰락 후 아버지 외젠이 바이에른의 처가에 의탁하면서 그의 가족은 뮌헨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1]

그의 형제자매 중에는 스웨덴 왕비가 된 조제핀, 브라질 황후가 된 아멜리 등이 있다. 형 오귀스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여왕의 부군이었으나 일찍 사망했고, 막시밀리앙은 1835년 형의 뒤를 이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 되었다.

1839년 막시밀리앙은 러시아니콜라이 1세 황제의 딸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1세는 그에게 '전하(Imperial Highness)' 칭호를 부여하고 러시아 황족으로 인정했다. 그는 결혼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마린스키궁에서 살다가 1852년 사망했다.

2. 1. 가계

1836년 프란츠 나폴레옹 하이겔이 그린 막시밀리안 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의 초상화.


막시밀리앙은 1817년 뮌헨에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테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정식 이름은 막시밀리앙 조제프 외젠 오귀스트 나폴레옹(Maximilian Joseph Eugene Auguste Napoleon)이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양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였다. 외할머니는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타 빌헬미네 공주였다.

프랑스 제1제국이 몰락하고 1814년 파리에서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아버지 외젠은 프랑스를 떠나 뮌헨에 있는 아내의 가족에게 의탁했다.[1] 보아르네 가문은 비텔스바흐 가문보다 낮은 신분으로 여겨지는 등 바이에른 궁정 내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외젠 공의 재산을 기반으로 뮌헨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과 스위스 투르가우의 영지 등을 구입하며 물질적으로는 안정된 망명 생활을 누렸다. 막시밀리앙과 형제자매들은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 작품에 둘러싸여 성장했다.[1]

아버지 외젠 공은 1824년 사망했고, 막시밀리앙은 주로 어머니 아우구스타의 보살핌 아래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1] 그는 당시 귀족 남성들처럼 군인의 길을 걸었다. 어린 나이에 외조부로부터 바이에른 기병 제6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숙부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에 의해 울란 연대 대령으로 진급했다.[1]

막시밀리앙의 형제자매들은 유럽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름배우자비고
조제핀스웨덴-노르웨이 국왕 오스카르 1세스웨덴-노르웨이 왕비
외제니호엔촐레른-헤힝겐 공작 콘스탄틴
아우구스트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결혼 직후 사망, 제2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아멜리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브라질 황후
테오델린데우라흐 공작 빌헬름 1세



1817년, 외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아버지 외젠에게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와 아이히슈테트 후령을 하사했다. 막시밀리앙은 '로이히텐베르크 공자'였으며, 형 아우구스트에 이어 공위 계승 서열 2위였다. 1835년, 형 아우구스트가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후사 없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막시밀리앙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839년 7월 2일, 막시밀리앙은 러시아의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했다. 마리아는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장녀였다. 두 사람의 종교가 다르고, 러시아 황녀에 비해 막시밀리앙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는 사위에게 '전하(Imperial Highness)' 칭호를 부여하고 러시아 황족 및 핀란드 대공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나폴레옹 가문과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양자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1세가 정치적 판단 하에 황족으로 대우한 이례적인 조치였다.

결혼 후 막시밀리앙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마린스키궁에서 거주했으며, 1852년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2. 2. 초기 생애



막시밀리앙은 1817년 뮌헨에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정식 이름은 Maximilian Joseph Eugene Auguste Napoleon프랑스어이었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이었다. 외할머니는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타 빌헬미네 공주였다.

프랑스 제1제국이 몰락하고 1814년 파리에서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아버지 외젠은 프랑스를 떠나 뮌헨에 있는 아내의 가족에게 의탁했다.[1]

1817년 11월 14일, 외조부인 막시밀리안 1세는 외젠에게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와 아이히슈테트 후령을 하사했다. 이로써 막시밀리앙은 '로이히텐베르크 공자'가 되었고, 형 아우구스트에 이어 공위 계승 서열 2위였다.

보아르네 가족은 뮌헨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만, 외젠 공의 재산을 바탕으로 로이히텐베르크 궁전과 스위스 투르가우의 영지 등을 구입하며 물질적으로는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외젠 공은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을 다시 모았고, 막시밀리앙을 포함한 자녀들은 예술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1] 바이에른 궁정에서는 비텔스바흐 가문보다 낮은 신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

1824년 2월 21일, 아버지 외젠 공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막시밀리앙은 주로 어머니 아우구스타의 손에서 자라며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1] 당시 형 아우구스트가 공위를 계승했고, 막시밀리앙은 형의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유럽 여러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큰누나 조제핀은 스웨덴의 오스카르 1세 왕비가 되었고(1823년), 누나 외제니는 호엔촐레른-헤힝겐 공자와 결혼했으며(1826년), 셋째 누이 아멜리는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의 황후가 되었고(1829년), 형 아우구스트는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의 부군이 되었으며(1834년), 누나 테오델린데는 우라흐 공작과 결혼했다(1841년).[1]

당시 귀족 남성들처럼 막시밀리앙도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외조부로부터 바이에른 기병 제6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숙부인 바이에른의 루이 1세 국왕에 의해 울란 연대 대령으로 진급했다.[1]

3.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앙의 외할아버지인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1817년 11월 14일, 막시밀리앙의 아버지 외젠 드 보아르네를 초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작위와 함께 아이히슈테트 공국(현재 독일 바이에른주)의 통치권도 주어졌다. 이로써 막시밀리앙은 '로이히텐베르크 공자' 칭호를 얻었고, 형 오귀스트에 이어 공작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1824년 2월 21일 아버지 외젠이 사망하자 형 오귀스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당시 오귀스트는 자녀가 없었기에 막시밀리앙이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오귀스트는 1835년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지만, 결혼한 지 불과 2개월 만인 1835년 3월 28일에 폐결핵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 이에 따라 막시밀리앙이 제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4. 러시아 황실과의 결혼

형 오귀스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를 계승한 막시밀리앙은 1837년 러시아 제국 방문 중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1] 두 사람은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1839년 7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막시밀리앙은 러시아에 정착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마린스키궁 등에서 거주하다 1852년 사망했다.

4. 1. 러시아 황실과의 인연

형 오귀스트가 1835년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일찍 사망하자, 막시밀리앙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839년 7월 2일, 막시밀리앙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장녀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대공녀와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종교가 다르고, 러시아 황제의 딸인 마리야 대공녀에 비해 막시밀리앙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그는 바이에른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인인 니콜라이 1세는 사위 막시밀리앙에게 '전하(Imperial Highness,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ысочества|임페라토르스코고 비소체스트바ru)'라는 공식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러시아 황족 및 핀란드 대공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이는 막시밀리앙의 아버지 외젠 드 보아르네나폴레옹 1세의 양자였기에 가능한 조치였으나, 실제 혈연관계는 없었다.

결혼 후 막시밀리앙은 아내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및 자녀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마린스키궁에서 거주했으며, 1852년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4. 2. 결혼 과정과 반대

1837년 막시밀리앙은 러시아 제국을 방문하여 차르 니콜라이 1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만났다.[1] 이 방문은 1836년 러시아 대공 미하일 파블로비치가 뮌헨을 방문하여 막시밀리앙의 어머니 아우구스타 공주와 가족들을 만난 후, 니콜라이 1세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에게 그의 조카인 막시밀리앙을 러시아 군사 훈련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루어졌다.

방문 기간 동안 막시밀리앙과 차르의 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 사이에 로맨스가 시작되었다.[1] 니콜라이 1세는 막시밀리앙을 마음에 들어 했으나, 결혼 조건으로 막시밀리앙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황실 군대에 복무하고, 자녀들을 정교회 신앙으로 양육하며 러시아 공작으로 만들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막시밀리앙은 어머니와 상의 후 이 조건을 수락했고, 1838년 12월 5일 마리아와의 약혼이 공식 발표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앙은 잠시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문제를 정리했다.

두 사람은 1839년 7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5일간의 축제가 이어졌지만,[2] 이 결혼은 여러 반대에 부딪혔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러시아 황제의 딸이었지만, 막시밀리앙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귀족이었고 종교도 달랐다. 또한, 1812년 조국 전쟁 당시 막시밀리앙의 아버지 외젠 드 보아르네나폴레옹 군대의 일원으로 모스크바 점령에 참여했던 역사 때문에 모스크바 시민들 사이에서도 반감이 있었다.

이러한 반대를 해결하기 위해 니콜라이 1세는 1839년 7월 14일 사위 막시밀리앙에게 '황실 전하'(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ысочества|임페라토르스코고 비소체스트바ru) 칭호를 부여하고 러시아 황족으로 인정했다. 이는 막시밀리앙이 나폴레옹 1세의 양자인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로서, 확장된 황실 가문의 일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니콜라이 1세는 막시밀리앙을 러시아 육군 소장으로 임명하고 연간 10만러시아 루블의 수입을 보장했으며, 딸 마리아에게도 70만러시아 루블의 수입과 200만러시아 루블 상당의 재무 채권을 지참금으로 지급하고 부부를 위한 궁전(마린스키궁)을 마련해주었다.[1] 새 거처가 완공될 때까지 부부는 겨울 궁전에서 지냈다.[1]

4. 3. 니콜라이 1세의 결단

막시밀리앙은 1839년 7월 2일, 러시아 제국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장녀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대공녀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는데,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황녀와 가톨릭 신자인 막시밀리앙 사이의 종교적 차이뿐만 아니라, 신분 차이도 큰 문제였다. 마리야는 러시아 제국의 황녀였지만, 막시밀리앙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은 외국의 공작에 불과했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니콜라이 1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사위가 된 막시밀리앙에게 러시아 황족 및 핀란드 대공 가문의 일원으로서 '전하(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ысочества|임페라토르스코고 비소체스트바ru)'라는 공식 칭호를 수여했다. 이는 나폴레옹 1세의 후손이라는 점을 고려한 조치였는데 (엄밀히 말해 막시밀리앙의 아버지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양자였으므로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었지만, 니콜라이 1세는 이를 확대 해석하여) 사위의 지위를 격상시켜 결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4. 4. 결혼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 안톤 하니쉬 그림(C. 로버트슨 모작, 1853년)


1836년, 러시아 대공 미하일 파블로비치가 뮌헨을 공식 방문하여 막시밀리앙의 어머니 아우구스타 공주와 그녀의 가족을 만났다. 이후 러시아니콜라이 1세 황제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 국왕에게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러시아 군사 훈련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라이 1세는 오랫동안 러시아 대공녀와 바이에른 왕자 간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었다. 그러나 황제는 계속해서 요청했고, 특히 조카인 막시밀리앙 공자를 지목했다. 루트비히 1세는 막시밀리앙의 누이들과 상의한 후, 러시아 방문이 가져올 이점을 고려하여 조카에게 바이에른을 대표하여 러시아로 갈 것을 요청했다.

막시밀리앙은 1837년 러시아를 방문하여 제국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았고, 니콜라이 1세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황제의 자녀들도 만났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막시밀리앙과 니콜라이 1세의 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1] 니콜라이 1세는 막시밀리앙을 마음에 들어 했고 딸에게 적합한 배필이라고 여겨 결혼을 허락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막시밀리앙은 결혼 후 러시아에 거주하며 황실 군대에서 복무해야 했고, 자녀들을 정교회 신앙으로 양육하며 러시아 공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앙은 어머니와 상의 후 이 조건을 수락했고, 1838년 12월 5일 마리아와의 약혼이 공식 발표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만족하며 미래의 사위에게 거의 모든 러시아 및 폴란드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막시밀리앙은 잠시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문제를 정리했다.

두 사람은 1839년 7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축제는 15일간 이어졌지만,[2] 모스크바 시민들은 1812년 조국 전쟁 당시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던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과 황제의 딸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나타냈다. 또한 러시아 황녀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에 비해 막시밀리앙의 지위가 낮다는 점 때문에 주변의 반대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니콜라이 1세는 1839년 7월 14일 사위에게 러시아와 핀란드의 황실 전하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ысочества|임페라토르스코고 비소체스트바ru 칭호를 부여하고 러시아 황족으로 인정했다. 이는 나폴레옹 1세의 양자였던 외젠의 아들로서, 막시밀리앙을 나폴레옹 가문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확대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막시밀리앙은 러시아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키예프 후사르 연대의 최고 연대장이 되었으며, 연간 10만러시아 루블의 수입을 보장받았다. 니콜라이 1세는 딸 마리아에게도 70만 루블의 수입과 4% 재무 채권으로 지불되는 200만러시아 루블의 현금을 주었다. 또한 부부가 거주할 궁전 두 채(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교)를 자신의 비용으로 짓고 가구를 마련해주었다.[1]

새로운 거처인 마린스키 궁전이 완공될 때까지 막시밀리앙 부부는 겨울 궁전에서 지냈다. 1845년까지 그곳에 머물며 첫 네 자녀인 알렉산드라, 마리아, 니콜라이, 외제니를 낳았다. 이후 마린스키 궁전으로 이주하면서 막시밀리앙은 자신의 그림, 무기, 광물 컬렉션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이 컬렉션의 상당수는 현재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1]

결혼 초기 막시밀리앙과 마리아의 관계는 행복했고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45년경 마리아 대공녀가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과 불륜 관계를 시작하면서 부부 사이는 악화되었다. 많은 역사가는 스트로가노프 백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로이히텐베르크의 외젠, 세르게이, 게오르기 공자는 막시밀리앙의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편, 막시밀리앙 역시 모범적인 남편은 아니어서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고 도박에 빠졌다.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부담이었는데, 아내의 남편 이상의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1]

5. 러시아에서의 활동

막시밀리앙은 러시아에서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예술과 과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제국 가문 최초의 기업가로서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여러 자선 단체를 후원하는 활동도 병행했다.[1]

5. 1. 군 경력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한 막시밀리앙은 수도를 떠나 장기간을 보냈다. 평생 외국인으로 여겨졌기에, 그는 부차적인 임무에만 투입되었고, 이는 그의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또한, 그는 바이에른 군대보다 훨씬 더 엄격한 러시아식 규율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5. 2. 과학 및 예술 활동

막시밀리앙은 예술과 과학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회화, 광물, 무기 컬렉션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그는 뛰어난 지식인으로 인정받아 차르로부터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 및 제국 예술 아카데미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막시밀리앙은 제국 가문 최초의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개인적인 친구였던 모리츠 폰 야코비와 함께 전기도금술 및 전자기학을 연구했으며, 이러한 기술을 산업적으로 활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847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기관차를 제작하는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막시밀리앙은 여러 자선 단체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특히 빈곤층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는 막시밀리앙 클리닉의 건립을 지원했다.[1]

5. 3. 산업 분야 기여

막시밀리앙은 제국 가문에서 처음으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물리학자 모리츠 폰 야코비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며 전기도금술과 전자기학을 함께 연구했다. 특히 이러한 과학 기술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847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기관차를 제작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러시아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

5. 4. 자선 활동

막시밀리앙은 여러 자선 단체를 후원했으며, 특히 빈곤층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는 막시밀리앙 클리닉의 건립을 지원했다.[1]

6. 질병과 죽음

1845년부터 1846년까지 막시밀리앙은 우랄 산맥에서 광물 탐사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그는 폐렴에 걸렸고, 이는 급속도로 결핵으로 악화되었다. 병으로 심하게 고통받은 공작은 에스토니아, 그리고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요양해야 했다. 그러나 1847년 이후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절망적이며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공작은 1852년 11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장인 니콜라이 1세는 제국 가문의 다른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3개월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7. 자녀

막시밀리앙과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대공녀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알렉산드라 막시밀리아노브나 공주 (1840년 – 1843년): 유아기에 사망.
  • 마리아 막시밀리아노브나 공주 (1841년 – 1914년): 빌헬름 폰 바덴과 결혼.
  • 니콜라이 막시밀리아노비치 (1843년 – 1891년): 제4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나데즈다 안넨코바와 결혼.
  • 예브게니야 막시밀리아노브나 공주 (1845년 – 1925년): 알렉산더 페트로비치 폰 올덴부르크 공작과 결혼.
  • 예브겐 막시밀리아노비치 (1847년 – 1901년): 제5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다리아 오포치니나와 결혼하였고, 사별 후 지나이다 스코벨레바와 재혼.
  • 세르게이 막시밀리아노비치, 로이히텐베르크 공자 (1849년 –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전사.
  •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1852년 – 1912년): 제6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올덴부르크의 테레제 페트로브나 공녀[10]와 결혼하여 아들 알렉산드르를 낳았다. 사별 후 1889년 몬테네그로의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공주와 재혼하여 아들 세르게이와 딸 엘레나를 낳았다.

8. 후손

이름생몰년비고
알렉산드라1840년 ~ 1843년요절
마리아1841년 ~ 1914년바덴 대공자비,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어머니
니콜라이1843년 ~ 1891년제4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에브게니야1845년 ~ 1925년올덴부르크의 알렉산더 페트로비치 공작과 결혼
에브게니1847년 ~ 1901년제5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세르게이1849년 ~ 1877년
게오르기1852년 ~ 1912년제6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앙은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 중 일부는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차녀 마리아 (1841–1914)를 통해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총리를 지낸 막시밀리안 폰 바덴 (1867–1929)의 할아버지가 된다. 또한 안할트 공작 부인이었던 바덴의 마리 공주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 삼녀 에브게니야 (1845–1925)는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더 페트로비치 공작 (1844–1932)과 결혼했다. 에브게니야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막내 여동생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 (1882–1960)의 첫 남편이었던 올덴부르크의 페터 알렉산드로비치 공작 (1868–1924)의 어머니이다.
  • 차남 에브게니 (1847–1901)의 딸인 다리야 드 보아르네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소비에트 연방 국적을 유지하며 러시아에 남았으나,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 기간 동안 비극적으로 처형되었다.

참조

[1] 서적 Honour and fidelity : The Russian Dukes of Leuchtenberg Logos Publisher
[2] 서적 Grand Duchess Maria Nikolayevna and Her Palace in St.Petersburg Hazar Publishing
[3] 웹사이트 Russian Imperial Army - Duke of Leuchtenberg Maximilian-Eugene-Joseph-August-Napoleon http://regiment.ru/b[...]
[4]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47 https://books.google[...] Landesamt
[5] 간행물 "Liste der Ritter des Königlich Preußischen Hohen Ordens vom Schwarzen Adler" https://www.digitale[...]
[6] 간행물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https://zs.thulb.uni[...]
[7]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45 https://books.google[...] Heinrich
[8] 서적 Kungliga Serafimerorden: 1748–1998
[9] 문서 Imperial Highness
[10] 문서 에フゲニ야
[11] 웹사이트 Russian Imperial Army - Duke of Leuchtenberg Maximilian-Eugene-Joseph-August-Napoleon http://regiment.ru/b[...]
[12]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47 https://books.google[...] Landesamt
[13] 간행물 "Liste der Ritter des Königlich Preußischen Hohen Ordens vom Schwarzen Adler" https://reader.digit[...]
[14] 간행물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https://zs.thulb.uni[...]
[15]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45 https://books.google[...] Heinrich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