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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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총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18세에 관직에 오른 후 조조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그는 조홍 휘하 장수의 약탈을 처벌하고, 양표의 사건에서 공정함을 보였으며, 여남 태수로 재임하며 원소 세력을 숙청했다. 번성 전투에서 관우를 물리치는 데 기여했고, 조비가 위를 건국한 후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예주 자사를 겸임했으며, 합비에서 제갈근을 격퇴했다. 만총은 노환으로 태위가 되었으며, 사후 경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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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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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만총 |
원어 이름 | 滿寵 |
로마자 표기 | Man Chong |
자 | 백녕(伯寧) |
시호 | 경후(景侯) |
출생 | 175년 이전 |
출생지 | 산둥성 진샹 현 |
사망 | 242년 4월 또는 5월 |
작위 | 창읍후(昌邑侯) |
배우자 | 사마간의 아내 |
자녀 | 만위 만빙 사마간의 아내 이름 미상의 아들 1명 |
관직 경력 | |
소속 국가 | 조위 |
주요 직위 | 허현 현령 (許令) 여남태수 (汝南太守) 분위장군 (奮威將軍, 대행) 양무장군 (揚武將軍) 복파장군 (伏波將軍) 전장군 (前將軍) 예주자사 (豫州刺史) 정동장군 (征東將軍) 태위 (太尉) |
주요 활동 시기 | 196년 ~ 242년 |
섬긴 군주 | 헌제 조조 조비 조예 조방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사마의 강기 사마간 |
2. 생애
만총은 18세에 군의 독우(督郵)에 임명되었다가 고평령(高平令)을 대행하였다. 192년 유엽의 천거로 조조에게 발탁되었고, 196년 헌제가 허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허령(許令)에 임명되었다.
만총은 조홍의 빈객이 죄를 범하자 투옥시켰다. 조홍이 사정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조홍은 조조에게 탄원하게 된다. 이를 알아챈 만총은 식객을 즉각 사형시켰다.
199년, 여남태수에 임명되자 친 원소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208년, 형주 정벌에 참여했고, 손권이 계속 국경을 침범해오자 여남태수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양양성(襄陽城)을 공격했을 때 조인과 함께 물리쳐 칭찬을 받았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하자 공격하려는 조조를 설득시켜 사마의의 의견을 따르도록 권하고, 조인의 참모가 되어 번성에 주둔했다. 관우의 공격에 조인이 도망가려 하자, 만총은 조인을 설득하여 끝까지 번성을 지키게 했다.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를 건국한 후 전장군에 임명되었고, 220년 동오를 격파하고 신야에 주둔했으며, 228년 예주자사를 겸했다.
230년, 동오 손포의 거짓 항복을 밝혀내고 기습을 방어하였다. 234년, 합비(合肥)로 쳐들어온 제갈근을 기습하고 신성에서 손권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238년, 노환으로 조정에 소환되어 태위가 되었다. 242년 3월에 죽으니, 시호를 경후(景侯)라 하였고, 아들 만위가 작위를 이었다.[48]
2. 1. 초기 생애와 경력
192년 유엽의 천거로 조조에게 발탁되기 전, 만총은 18세에 군의 독우(督郵)에 임명되었다가 고평령(高平令)을 대행하였다. 미산현의 현령을 대행했을 때, 독우 장포(장비의 아들과는 다른 인물)의 횡포를 보고 그를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고경(拷問致死)한 뒤, 그대로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는 일화가 있다.196년, 조조의 보호를 받은 헌제가 허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허령(許令)에 임명되었다.
만총은 우금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하고 법에 엄격했지만, 오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다. 조홍 휘하의 장수가 조씨의 권세를 믿고 약탈을 자행했을 때, 만총은 즉시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 조홍으로부터 조조에게 탄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처형했다. 이 행위는 조조에게 크게 칭찬받았다.
양표가 체포되었을 때, 순욱이나 공융에게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만총은 규칙대로(주에 따르면, 태형) 신문한 다음, 조조에게 "처벌하려면 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라고 직언했다. 이 때문에 조조는 양표를 사면했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192년, 유엽의 천거로 조조에게 발탁되었다. 만총은 신장이 8척(약 190cm)이었다고 전해진다. 18세 때 산양군의 관리(독우(督郵))가 되었다. 군내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난폭하게 굴던 이삭(李朔)이라는 인물은, 다시는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고 한다. 미산현의 현령을 대행했을 때, 독우 장포(장비의 아들과는 다른 인물)의 횡포를 보고 그를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고경(拷問致死)한 뒤, 그대로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196년, 조조의 보호를 받은 헌제가 허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허령(許令)에 임명되었다. 이는 조조가 조정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으로 민감한 임명이었으며, 서른 살이 채 안 된 만총은 그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는 다소 젊었다.[5]
조홍의 빈객이 죄를 범하자 투옥시켰다. 조홍이 사정하는 것을 만총이 들어주지 않았고 조홍은 조조에게 다시 탄원하게 된다. 이를 알아챈 만총은 식객을 즉각 사형시켰다. 이 행위는 조조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양표가 체포되었을 때, 순욱이나 공융에게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만총은 규칙대로(주에 따르면, 태형) 신문한 다음, 조조에게 "처벌하려면 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라고 직언했다. 이 때문에 조조는 양표를 사면했다. 楊彪|양표중국어는 동한 왕조에 반기를 든 군벌이었던 원술과 공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만총은 동료인 순욱과 공융으로부터 존경받는 학자 양표를 심문하는 동안 고문을 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만총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규정대로 처리했다. 며칠 후 만총은 조조에게 보고했다. "양표는 심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처형하기 전에 먼저 그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고 대중에게 보여야 합니다. 양표는 평판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가 유죄임을 보여줄 충분한 증거 없이 그를 처형하면 백성들은 우리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부디 이 결정을 신중하게 재고하시고 양표의 처형을 너무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양표를 석방했다. 순욱과 공융은 처음에는 만총이 심문 과정에서 양표를 고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조조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은 후 그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일들에서 알 수 있듯이, 만총은 우금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하고 법에 엄격했지만, 오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다.
199년, 여남태수에 임명되자 친 원소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관도 전투 시기에는 원소의 향리인 여남군 태수를 맡아 원씨 일파의 군대를 멸하고 농경에 종사하게 했다. 200년, 관도 전투가 조조와 그의 경쟁자인 원소 사이에 발발했는데, 원소 가족의 고향은 후한 시대 당시 여남군(汝南郡; 현재의 허난성 동남부와 안후이성 북서부 일부를 포함)에 있었다. 원소는 여남군을 통제하지 못했지만, 그곳에는 소규모 무장 집단을 이끌고 군 전역에 요새를 둔 그의 가신들을 통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조조는 그들이 관도에서 전선에 있는 동안 허현에 있는 자신의 기지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만총을 여남군 태수(太守)로 임명하여 원소의 가신들을 처리하게 했다. 만총은 취임 후 500명의 추종자를 모아 20개 이상의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한 다음, 가신 지도자들을 외교 회담에 초대하여 그 중 10명 이상을 살해했다.[12] 재임 기간 동안 만총은 2만 가구를 통제하고 약 2,000명을 징병하여 군 복무를 시켰으며, 군에서 둔전제 정책을 시행했다.
208년, 형주를 정벌하고 당양에 주둔했으나 손권이 계속 국경을 침범해오자 여남태수에 임명되었다. 조조의 형주 정벌에 종군하여, 조조가 귀환하자 분위장군을 겸임하며 당양현에 주둔했다. 손권이 국경을 침략하자, 조조는 만총을 소환하여 다시 여남 태수로 삼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조조는 208~209년 겨울 적벽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북쪽으로 후퇴한 후 만총을 분위장군(奮威將軍) 대행으로 임명하고 당양을 방어하기 위해 형주에 남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가 손권의 군대에 강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만총에게 당양을 버리고 여남군으로 돌아가 이전 직책을 맡도록 명령했다. 한나라 황실은 만총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칭호를 수여했다.
관우가 양양성(襄陽城)을 공격해오자 양양성 싸움에서 조인과 함께 물리쳐 칭찬을 받았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하자 공격하려는 조조를 설득시켜 사마의의 의견을 따르도록 권하고 조인의 참모가 되어 번성에 임한다. 이후, 조인의 참모로서 번성에 주둔했다. 유비 군의 관우가 쳐들어왔을 때, 구원에 온 우금 등 칠군이 홍수로 괴멸하고, 번성도 수몰되어 붕괴 직전에 놓였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만총은 "산의 물은 빨리 빠지니,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조인은 만총의 의견을 따랐다. 서황의 원군을 얻어 관우가 격퇴되자, 만총은 안창정후로 진봉되었다. 관우는 병력을 이끌고 조조의 사촌이자 신뢰받는 장수인 조인이 지키는 번성(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판청 구)을 공격했다. 만총은 조인을 돕기 위해 번성으로 병력을 이끌고 가서 관우의 공격에 맞섰다. 폭우로 인해 이 지역에 홍수가 발생하고 번성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는 조조의 장수 우금이 이끄는 지원군을 궤멸시켰고, 우금은 적에게 항복했다. 관우는 그동안 번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이는 조인에게 아직 관우의 군대가 번성을 완전히 포위하지 않았으니, 시간이 있을 때 번성을 포기하고 도망치라고 제안했다. 만총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홍수는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우는 이미 군대에서 별동대를 보내 허난성, 자현에 주둔하게 했습니다. 이미 쉬현 이남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많은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관우는 그의 근거지(남부 형주)가 공격받을 것을 우려하여 감히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번성을 포기하고 떠난다면, 우리는 강 남쪽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될 것입니다. 경은 이곳을 계속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조인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만총은 말을 익사시키고 번성의 병사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했다.
2. 3. 조비, 조예 시대의 활약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를 건국한 후, 만총은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220년, 동오를 격파하고 신야에 주둔했으며, 228년에는 예주자사를 겸했다.220년에서 222년 사이, 만총은 동오와의 두 차례 전투에 참여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강릉(현재의 징저우시 일대)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복파장군으로 승진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위나라 군대의 선봉대를 이끌고 정호에 진지를 구축, 적의 야습을 예측하고 격퇴하여 향후(南鄉侯)로 승진했다. 222년, 조비는 만총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고 의례용 도끼를 하사했으며, 2년 후 전장군으로 승진시켰다.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만총을 창읍후(昌邑侯중국어)로 승격시켰다. 228년, 예주의 자사(刺史중국어)로 임명했다. 같은 해, 주방의 거짓 투항을 간파하고 조휴에게 경고했으나, 조휴는 석정 전투에서 패배했다. 조휴 사후, 만총은 양주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게 되었고, 여남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230년, 조예는 만총을 정동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손권의 합비 공격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했으나, 손권은 공격을 중단했다. 만총은 손권이 다시 공격할 것을 예측했고, 실제로 10일 후 손권이 공격해 왔으나 합비는 방어가 잘 되어 있어 격퇴했다.
231년, 손포의 거짓 투항을 간파하고 왕릉에게 경고했으나, 왕릉은 손포에게 병사를 보냈다가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만총은 왕릉과의 불화로 소환되었으나, 조예는 만총이 건재함을 확인하고 복귀시켰다.
232년, 육손의 여강군(현재 안칭시 일대) 공격에 대해 만총은 즉각적인 구원 대신 적을 유인하는 전략을 택했고, 오나라 군대는 퇴각했다.
233년, 만총은 합비 방어 강화를 위해 합비신성 건설을 제안했고, 장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자의 지지로 조예의 승인을 얻었다.[37] 그해 늦게 손권이 합비신성을 공격했으나, 만총은 복병을 이용해 오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수백 명을 죽였다.[39]
234년, 손권은 제갈량과 연계하여 합비를 공격했다.[40] 만총은 공성병기를 불태우고 손태를 사살하는 등 활약했고, 손권은 철수했다.[44][45][46]
235년, 만총은 둔전 중인 오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요새를 파괴하고 농작물을 불태웠다.[47]
2. 4. 말년
238년, 노환으로 조정에 소환되어 태위가 되었다.[48]242년 3월에 사망하였고, 시호는 경후(景侯)이다. 아들 만위가 작위를 이었다.[48]
만총은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 재산을 모으지 않아 노년에는 매우 가난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만총의 충성과 헌신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려 그에게 10경의 토지, 500석의 곡식, 그리고 을 하사했다. 만총의 식읍에 있는 과세 대상 가구 수는 여러 해에 걸쳐 9,600호에 달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과 손자 중 한 명은 향후(마키스)로 봉해졌다.[48]
3. 《삼국지연의》 속 만총
192년에 유엽의 추천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후, 대체로 그의 삶은 대부분 유사하며 마지막으로 손권이 합비신성을 공격하였을 때 참전하였고, 그 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엽의 추천을 받아 조조의 가신이 되었으며, 양봉 휘하에 있던 옛 친구 서황을 조조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는 등, 이야기 초반에는 변설가로 묘사된다.
4.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만총을 두고 "뜻이 크고, 결단력이 있으며,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51]
5. 가족 관계
이름 | 자 | 추가 정보 |
---|---|---|
만병(滿炳) | 공염(公琰) | 별부사마(別部司馬) 역임.[74] |
만위(滿偉) | 공형(公衡) | 아버지 만총의 작위와 창읍후(昌邑侯) 봉작 상속. 조위(曹魏)에서 위위(衞尉) 역임. |
만창무(滿長武) | 만위의 장남. 사마소의 보좌관. 제갈탄의 반란 진압 중 무단 이탈, 사마소에게 처형.[55] | |
(이름 미상) | 만위보다 어린 아들.[62] | |
만분(滿奮) | 무추(武秋) | 만총의 아들(이름 미상)의 아들.[61] 서진에서 상서령(尚書令)과 사예교위(司隷校尉) 역임. 300년 2월, 폐태자 사마유 지지자 체포 관여.[65] 301년 2월, 사마륜에게 옥새 전달.[66] 304년, 상관이(上官已) 살해 음모 연루, 피살.[68] |
(이름 미상) | 사마소의 동생 사마간과 결혼.[60] |
참조
[5]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08-18
[12]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08-18
[36]
역사서
Sanguozhi vol. 26
[37]
역사서
Sanguozhi vol. 26
[38]
역사서
Sanguozhi vol. 26
[39]
역사서
Sanguozhi vol. 26
[40]
역사서
Sanguozhi vol. 47
[41]
역사서
Sanguozhi vol. 26
[42]
역사서
Sanguozhi vol.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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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
[44]
역사서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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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Zizhi Tongjian year 234
[46]
역사서
Sanguozhi vol. 47
[47]
역사서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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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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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Sanguozhi vol. 4
[50]
역사서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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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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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3]
역사서
Sanguozhi vol. 26
[54]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5]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6]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7]
문서
If both annotations are correct, Man Changwu must have died after Cao Mao's attempted coup.
[58]
역사서
Jia Bizhi's Shangong Biao Zhu annotation in Wen Xuan vol. 42
[59]
문서
璩白:昨者不遗,猥见照临,虽昔侯生纳顾于夷门,毛公受眷于逆旅,无以过也。外嘉郎君谦下之德,内幸顽才见诚知己,欢欣踊跃,情有无量。是以奔骋御仆,宣命周求,阳书喻于詹何,杨倩说于范武。故使鲜鱼出于潜渊,芳旨发自幽巷,繁俎绮错,羽爵飞腾,牙旷高徽,义渠哀激。当此之时,仲孺不辞同产之服,孟公不顾尚书之期。徒恨宴乐始酣,白日倾夕,骊驹就驾,意不宣展,追惟耿介,迄于明发。适欲遣书,会承来命,知诸君子复有漳渠之会。夫漳渠西有伯阳之馆,北有旷野之望,高树翳朝云,文禽蔽绿水,沙场夷敞,清风肃穆,是京台之乐也,得无流而不反乎?适有事务,须自经营,不获侍坐,良增邑邑。因白不悉。璩白。
[60]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26
[61]
역사서
Yiyuan, vol. 10
[62]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63]
역사서
Xun Chuo's Jizho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64]
역사서
Jin Zhu Gong Z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65]
역사서
Zizhi Tongjian, vol.83
[66]
역사서
Jin Shu, vol.59
[67]
문서
His name is sometimes written as "Si" (巳).
[68]
역사서
Zizhi Tongjian, vol.85
[69]
문서
「満寵伝」では、満寵は228年の時点で豫州刺史を兼任し、[[229年]]春に孫権が国境を伺ったのを西陽において防ぎ、続く秋の呉征伐で、曹休とともに二方面から出陣を命じられている。この時、満寵は曹休に戦の経験があまりないため敗退するであろう旨の上奏をし、実際その通りになった。曹休は[[朱霊]]に救援され窮地を脱したことになっている。
[70]
서적
『方輿紀要』『四庫全書』
[71]
서적
世語
[72]
문서
三少帝紀
[73]
서적
文選 (書物)
[74]
서적
산공표주(山公表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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