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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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로빈슨은 1944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법학자이자 정치인, 외교관이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1969년 아일랜드 상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유주의적 개혁을 옹호하며, 1990년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했으며,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퇴임 후에는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을 역임하며 국제적으로 인권 증진에 힘썼고, 현재는 '더 엘더스'의 의장으로 활동하며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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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빈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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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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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
출생 이름 | 메리 테레즈 위니프레드 버크 |
출생일 | 1944년 5월 21일 |
출생지 | 아일랜드 메이요주 밸리나 |
거주지 | 취리히, 스위스 더블린, 아일랜드 |
배우자 | 니컬러스 로빈슨 (1970년 결혼) |
자녀 | 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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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모교 |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하버드 대학교 킹스 인스 |
직업 | 변호사 정치인 외교관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1977년 이전, 1985년–현재) |
과거 소속 정당 | 노동당 (1977년–1985년) |
상원 의원 | 임기 시작: 1969년 11월 5일 임기 종료: 1989년 7월 5일 |
선거구 | 더블린 대학교 |
아일랜드 대통령 | |
대수 | 7대 |
임기 시작 | 1990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997년 9월 12일 |
수상 | 찰스 호히 앨버트 레이놀즈 존 브루턴 버티 아헌 |
이전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다음 대통령 | 메리 매컬리스 |
국제 연합 인권 고등 판무관 | |
임기 시작 | 1997년 9월 12일 |
임기 종료 | 2002년 9월 12일 |
사무총장 | 코피 아난 |
이전 판무관 | 호세 아얄라 라소 |
다음 판무관 |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
수상 | |
수상 내역 | 오토 한 평화 메달 (2003년) 칼데론 상 (2005년)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2006년) 대통령 자유 훈장 (2009년) 자유 기사상 (2017년) 큐 국제 메달 (2018년) 탕 상 (2024년) |
음성 |
2. 초기 생애와 배경 (1944-1969)
메리 로빈슨(혼전 성씨: 버크)은 1944년 메이요주 밸리나에서 두 의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13세기부터 메이요주에서 살아온 히베르노-노르만족 버크 가문으로, "아일랜드인 자신들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으로 불릴 정도로 아일랜드에 동화된 가문이었다. 로빈슨의 가족은 아일랜드 국토 연맹,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활동,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삼촌,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와 아일랜드 성공회 신자 등 아일랜드의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흐름과 연관되어 있었다.
더블린 마운트 앤빌 중학교를 거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녀는 1967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킹스 인에서 수학하여 아일랜드 변호사 협회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에서 1968년 법학 석사(LL.M) 학위를 받았다. 20대 시절에 트리니티 칼리지 법학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매우 명예로운 임명이었다. 훗날 이 직함을 맡은 사람들 중에는 로빈슨의 후임 대통령이 된 메리 매컬리스 등이 있었다.
1970년, 그녀는 개신교 신자인 니컬러스 로빈슨과 결혼했다.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의 결혼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로 인해 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부부는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2. 1. 가문과 유년 시절
'''메리 테리즈 위니프리드 버크'''(Mary Therese Winifred Bourke)는 1944년 메이요주 밸리나에서 의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브리 버크는 밸리나 출신이었고, 어머니 테사 버크는 도네갈 주 이네쇼언 출신이었다. 메리는 오빠들과 함께 밸리나 중심부에 있는 부모님 집인 빅토리아 하우스(빅토리아 테라스 1, 2번지)에서 자랐다.[3]버크 가문은 히베르노-노르만족으로 13세기부터 메이요주에 살았다. 이들은 노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아일랜드에 온 많은 이들처럼 "아일랜드인 자신들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이 되었다. 버크 가문은 아일랜드의 다양한 정치적 흐름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 조상은 메이요의 아일랜드 민족 토지 연맹과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의 주요 활동가였고, 삼촌인 파제트 존 버크 경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식민지 봉사 판사 경력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 다른 친척은 가톨릭 교회 수녀였다. 가족의 일부는 성공회 아일랜드 교회 신자였고, 다른 가족은 가톨릭 신자였다. 더 먼 친척으로는 윌리엄 리아스 드 버크, 티보트 맥월터 키타 버크, 찰스 버크 등이 있었다.[4]
메리 버크는 더블린 마운트 앤빌 중학교를 졸업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1965년에 장학생으로 선출). 당시 가톨릭교회가 트리니티에 가톨릭 신도 입학을 금지했기 때문에, 부모는 먼저 맥퀘이드 대주교에게 입학 허가를 요청해야 했다. 그녀는 트리니티에서 같은 반 세 명의 여성 중 한 명이었으며, 1967년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67년 더블린 대학교 법학회 감사 취임 연설에서 아일랜드 헌법의 이혼 금지 조항 삭제, 피임 기구 사용 금지 조항 폐지, 동성애와 자살 비범죄화를 옹호하며 가톨릭 교회 가르침을 비판했다. 킹스 인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1967년 아일랜드 변호사 협회에 등록했다. 하버드 로스쿨 펠로우십을 받아 1968년에 법학 석사(LL.M) 학위를 받았다.[30] 25세에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형법 강사(교육)#고등교육|강사]]가 되었다.
1970년, 개신교 신자인 니컬러스 로빈슨과 결혼했다. 아일랜드교회와 가까운 가톨릭 집안이었던 친가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반대가 심했다. 부부는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2. 2. 학창 시절과 법조인의 길
메리 로빈슨은 1944년 메이요주 밸리나에서 두 의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13세기부터 메이요주에서 살아온 히베르노-노르만족 버크 가문으로, "아일랜드인 자신들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으로 불릴 정도로 아일랜드에 깊이 뿌리내린 가문이었다. 로빈슨의 가족은 아일랜드의 다양한 정치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한 조상은 아일랜드 국토 연맹과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에서 활동했고, 삼촌 패짓 존 버크 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한 가족 구성원 중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도 있었으며, 아일랜드 성공회 신자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빈슨은 반역자와 왕실의 하인으로 얽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가족에게서 태어났다.메리 버크는 더블린의 마운트 앤빌 중학교를 거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1967년 트리니티 칼리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킹스 인에서 공부하여 1967년 아일랜드 변호사 협회에 등록되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펠로우십으로 1968년에 법학 석사(LL.M) 학위를 취득하였다. 20대 시절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매우 명예로운 임명으로 여겨졌다. 훗날 이 직함을 맡은 사람들 중에는 로빈슨의 후임 대통령이 된 메리 매컬리스 등이 있었다.
1970년, 메리 버크는 니컬러스 로빈슨과 결혼했다. 그녀는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지만, 개신교 신자인 니컬러스와의 결혼으로 인해 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부부는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3. 정치 경력
메리 로빈슨은 1979년 더블린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83년까지 활동했고, 1969년에는 무소속으로 사너드 에런(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 3인 중 한 명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권익 신장에 힘썼으며, 상원 의원으로서 여성의 배심원 참여 권리, 피임의 합법화 등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30]
1970년대 중반 아일랜드 노동당에 입당하였으나, 달 에런(하원) 진출에는 실패했다. 1982년 아일랜드 노동당이 피너 게일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면서 피터 서덜랜드가 유럽 공동체 위원장으로 임명되자, 노동당은 법무 장관 자리를 요구했지만 존 로저스가 임명되었다. 얼마 후 로빈슨은 개릿 피츠제럴드 정부가 마거릿 대처의 영국 정부와 맺은 영국-아일랜드 협정에 항의하며 당을 떠났다. 로빈슨은 북아일랜드 연합주의자들이 권력 분점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협상 과정에서 그들과 협의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89년까지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1년 후, 아일랜드 노동당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제안했고, 로빈슨은 딕 스프링 당수가 제안한 정책을 검토한 후 출마를 결심했다.
3. 1. 사너드 에런 의원 (1969-1989)
로빈슨은 1969년 무소속 후보로 사너드 에런 의원으로 처음 선출되어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3명 중 한 명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연장 남성 교수들만이 상원 후보로 지명된 것에 대해 동료들에게 논평한 후, 자신의 입후보를 발표하였다. 여성의 권리와 권한 부여는 변호사, 정치인, 국제 공무원으로서 경력의 대장지삭이었다. 상원 의원으로서 여성 배심원 권리, 피임의 법적 가용성 등 자유주의 문제들에 대해 운동을 벌였다.[30]이러한 운동은 많은 반대자들을 만들었다. 콘돔과 다른 피임 용품들이 상원에 우편으로 보내졌고, 헤이스, 코닝엄 로빈슨 약국 체인이 가족 소유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다. 로빈슨이 상원에 피임 자유화 법안을 처음 발의했을 때,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고, 다른 의원들이 발의권에 찬성하지 않아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로빈슨은 상원 의원으로서 다음과 같은 국회 의원회에서 활동했다.
위원회 | 기간 | 직책 |
---|---|---|
EC 이차 합법에 합동 위원회 | 1973 ~ 1989 | |
1977 ~ 1987 | 사회 문제 소위원회 의장 | |
1987 ~ 1989 | 법무 위원회 의장 | |
결혼 고장에 합동 위원회 | 1983 ~ 1985 |
오랜 기간 동안 로빈슨은 훗날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 상원 의원 데이비드 노리스와 함께 동성애자 법률 개혁 운동의 법률 고문으로 일했다. 로빈슨은 메리 매컬리스를 동성애자 법률 개혁 운동에서 대체하였는데, 매컬리스는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직에서 로빈슨을 대체하고 대통령직을 계승한 인물이다.
로빈슨은 초기에는 무소속 상원 의원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 아일랜드 노동당에 입당했다. 이후 달 에런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실패했고, 더블린 시의회 의원 선거에도 실패했다.
수십만 명의 다른 아일랜드 국민들과 함께, 로빈슨은 더블린 시의회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바이킹 유적지 중 하나인 우드 퀘이에 새 행정 본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로빈슨과 과거에는 간첩 한 원인이 없었을 수도 있던 사람들이 결사적인 투쟁을 벌였지만, 우드 퀘이는 결국 불도저로 밀리고 콘크리트로 덮여 논란이 많은 시민 사무소가 건설되었다.
1982년 아일랜드 노동당은 피너 게일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피터 서덜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의 유럽 공동체 위원장으로 임명되자, 아일랜드 노동당은 법무 장관직을 요구했다. 많은 이들이 로빈슨을 예상했지만, 당수는 대신 존 로저스라는 새로운 상급 조언자를 선택했다. 얼마 후, 로빈슨은 개릿 피츠제럴드 아래 연립 정부가 마거릿 대처의 영국 정부와 체결한 영국-아일랜드 협정에 항의하여 당에서 탈당했다. 로빈슨은 북아일랜드의 노동 조합원 정치인들이 권력 분담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의 일부로 협의를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로빈슨은 자신이 운동을 벌여온 많은 문제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4년 더 사너드 에런에 남아 있었다. 피임은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합법화되었고, 여성들은 배심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공무원직에서의 결혼 금지 조항이 폐지되었다. 1989년 상원 재선에 출마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30]
3. 2. 더블린 시의원 (1979-1983)
로빈슨은 1979년 더블린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83년까지 재직하였다.[30] 이 시기 로빈슨은 더블린 시 자치제와 갈등을 겪었는데, 더블린 시 자치제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바이킹 유적 중 하나인 우드 퀘이에 새로운 행정부 본부를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로빈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유적 보존을 위해 투쟁했지만, 결국 우드 퀘이는 불도저로 파헤쳐지고 콘크리트로 덮여 논란이 된 시민 사무소가 건설되었다.4. 1990년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
로빈슨은 아일랜드 노동당 후보로, 피너 게일의 오스틴 큐리, 피어너 팔의 브라이언 레니헌과 경쟁했다. 당시 타나이스타(부총리)이자 아일랜드 국방부 장관이었던 레니헌은 30년간의 정치 경력으로 인기를 얻어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로빈슨은 더블린과 코크에서 노동당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노동자 계층의 표를 얻는 데 성공했다.
피너 게일과 노동당은 총선에서 서로를 선호하는 파트너였기 때문에 표 이동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피너 게일의 큐리는 대중매체가 로빈슨의 선거 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고, 개인적으로 로빈슨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 거래에 불만을 느꼈다. 큐리는 레니헌이 자신의 친구였으며, 레니헌을 꺾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지지해야 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1]
선거 운동 기간 중, 레니헌이 1982년 당시 야당이었던 피어너 팔이 패트릭 힐러리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던 사건에 대해 자신의 공개 진술과 다른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레니헌은 압력을 부인했지만, 인터뷰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결국 레니헌은 찰스 호히 총리에 의해 해임되었고, 그의 성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로빈슨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부 장관 파드라그 플린은 로빈슨에게 개인적인 공격을 가했고,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많은 여성 유권자들이 로빈슨에게 투표하게 만들었다. 레니헌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결국 로빈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로빈슨은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경쟁 선거에서 승리한 최초의 비 피어너 팔 후보였다.
4. 1. 노동당 후보 지명
로빈슨은 전 아일랜드 보건부 장관 노엘 브라운을 상대로 노동당 후보 지명에서 4:1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 그녀는 선거에 처음으로 지명된 후보(그리고 최초의 여성 후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많은 회의, 공개 연설 및 인터뷰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재적 지지자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또한 ''아이리시 타임스'' 신문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4. 2. 선거 운동과 경쟁
로빈슨은 주요 야당인 피너 게일의 조직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선거 운동을 펼쳤다. 전 총리 개릿 피츠제럴드가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피너 게일은 이전에 출마 의사를 밝혔던 또 다른 유력 인물 피터 배리에게 접근했으나, 그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피너 게일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북아일랜드에서 브라이언 포크너의 권력 공유 행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민권 운동가 오스틴 큐리를 후보로 지명했다. 큐리는 아일랜드 공화국 정치 경험이 부족했고, 다른 후보가 없을 때 지명된 마지막 선택으로 여겨졌다. 피어너 팔은 정부 차장이자 국방부 장관인 브라이언 레니헌을 선택했다. 레니헌은 인기 있고 유머러스하며 지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주장했으며,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유일한 의문은 로빈슨이 큐리를 제치고 2위를 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하지만 선거 운동이 진행되면서 레니헌의 승리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고, 로빈슨이 강력한 경쟁자임이 분명해졌다. 그녀의 매력에 결정적인 것은 당시 찰스 호히 총리에 대한 깊은 반감과 아일랜드 노동당 당수 딕 스프링의 인기 상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너 팔은 마지막 몇 주 동안 지방 순회 운동을 하는 데 레니헌에게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빈슨이 후보 지명 과정에서 먼저 시작했고, 피너 게일 후보가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사실은 로빈슨이 투표에서 2위를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피너 게일이 보통 선거 결과의 25%를 받는 상황에서 3위로 떨어진 것은 로빈슨에게는 큰 성과였다. 로빈슨은 두 경쟁 후보보다 뛰어난 미디어 기술을 보여주었고, 이제 피어너 팔의 선거 조직과 경쟁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피너 게일과 아일랜드 노동당은 총선에서 서로를 선호하는 파트너였기 때문에 두 당 사이에 표 이동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피너 게일 후보는 대중매체가 로빈슨의 선거 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고, 개인적으로 로빈슨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 거래에 불만을 느꼈다. 큐리는 후에 레니헌이 자신의 개인적인 친구였으며, 레니헌을 꺾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지지해야 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웠다고 언급했다. 표 이동의 가능성은 레니헌이 더 약화될 수 있다면 로빈슨의 기회를 증가시켰다.
선거 운동 중 레니헌이 친구들에게 한 말이 당시 총리 개릿 피츠제럴드에게 국회 해산을 거부하도록 패트릭 힐러리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던 1982년의 논란에 대한 그의 공개 발언과 모순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힐러리는 단호하게 압력을 거부했었다.
레니헌은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이전 5월 대학원생들에게 한 인터뷰 테이프가 공개되었는데, 그 인터뷰에서 그는 압력을 가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솔직하게 논의했다. 레니헌은 "성숙한 기억"에 따르면 자신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았으며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혼란스러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부 붕괴로 이어질 뻔했다.
며칠 안에, 무적의 후보였던 레니헌은 정부 차장 및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국가 최고위직에 대한 레니헌의 성실성은 심각하게 의문시되었다. 1982년 사건에서 레니헌의 역할은 그가 호히의 지시를 받을 수 있고, 레니한을 선출하는 것이 논란이 많은 호히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빈슨을 약화시키기 위한 헛된 노력으로, 정부 장관이자 호히의 동맹인 파드라그 플린은 로빈슨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가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비난하는 개인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더 논란이 많게도 플린은 사적으로 로빈슨이 "아라스 ''[대통령 관저]''를 레드 카우 인 ''[더블린의 펍]''으로 바꿀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플린의 공격은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당시 레니헌의 캠페인을 지지했던 진보 민주당의 고위 관계자인 마이클 맥도웰에 의해 라디오에서 공격을 받았다. 로빈슨이 나중에 한 식당에서 맥도웰을 만났을 때, 그녀는 "맥도웰 같은 적이 있는데, 친구가 필요하겠어요?"라고 덧붙였다. 플린의 공격은 레니헌 캠페인에 치명타를 입혀 레니헌을 지지하는 많은 여성 지지자들이 지지 의사를 표명하며 로빈슨에게 투표하게 만들었다.
레니헌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고, 호히는 선거가 거의 패배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호히는 레니헌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는데, 호히의 리더십에 대한 피어너 팔 조직 내의 불안감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로스커먼의 피어너 팔 당원들이 호히의 리더십과 인격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시사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하지만 레니헌의 개인적인 자신감은 무너졌고, 캠페인 말기에 여론 조사에서 다소 회복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레니헌은 첫 번째 선호 득표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틴 큐리의 표 이동은 결정적이었고, 예상대로 대부분 피어너 팔에 반대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레니헌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최초의 피어너 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로빈슨은 이제 대통령이 되었다.
로빈슨은 대통령직을 놓고 경쟁한 대통령 선거 역사상 최초의 아일랜드 노동당 후보, 최초의 여성, 그리고 피어너 팔 소속이 아닌 최초의 후보가 되었다. 아일랜드 라디오-텔레비전은 삼종 기도보다 승리 연설을 방송했다.
4. 3. 당선과 의의
1990년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당 후보로 추대되어 당선되었다. 이는 노동당 최초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같은 해 12월 3일, 아일랜드 공화국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30]선거 운동 중, 피아나 페일당의 브라이언 레니한 시니어가 힐러리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던 1982년의 논란에 대해 사적으로 한 말이 공개 발언과 배치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레니한은 압력을 부인했지만, 그가 대학원생에게 했던 인터뷰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압력 시도에 대해 솔직하게 논의한 사실이 밝혀졌다. 레니한은 "성숙한 기억"에 따르면 혼란스러웠다고 주장했지만, 이 문제는 정부 붕괴로 이어질 뻔했다.
진보 민주당의 압력으로 호히는 레니한을 해임했다. 레니한의 청렴성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1982년 사건에서 레니한의 역할은 그가 호히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고, 이는 레니한을 선출하는 것이 호히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을 유발했다.
패드릭 플린은 로빈슨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가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공격했다. 이에 마이클 맥도웰은 플린의 비난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로빈슨은 맥도웰에게 "맥도웰 같은 적이 있는데, 친구가 필요하겠어요?"라고 말했다. 플린의 공격은 레니한 캠페인에 치명타를 입혀 많은 여성 지지자들이 로빈슨에게 투표하게 만들었다.
결국 레니한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고, 호히는 레니한을 해임했다. 이는 호히의 리더십에 대한 불안감을 증가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레니한의 개인적인 자신감은 무너졌고, 여론 조사에서 다소 회복되었지만, 첫 번째 선호 득표율에서 44%를 얻는 데 그쳤고, 로빈슨은 39%를 얻었다. 커리의 표 이동이 결정적이었고, 예상대로 대부분이 피아나 페일에 반대하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레니한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최초의 피아나 페일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로빈슨은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첫 번째 선호 득표율에서 2위를 기록하고 대통령이 된 최초의 후보가 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노동당 후보, 첫 번째 여성, 그리고 경쟁이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초의 피아나 페일이 아닌 후보였다. RTÉ는 그녀의 승리 연설을 디 엔젤러스 대신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대통령 당선인으로서의 첫 번째 텔레비전 인터뷰는 레이 다시, 지그 앤 자그, 그리고 더스틴 더 터키와 함께 RTÉ 어린이 텔레비전 쇼 The Den에서 진행되었다.
5. 아일랜드 대통령 재임 (1990-1997)
메리 로빈슨은 1990년 12월 3일부터 1997년 9월 12일까지 아일랜드의 7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변호사 및 상원 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아일랜드의 위상을 높이고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빈슨은 아일랜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디아스포라"로 지칭하며 이들과의 유대 강화에 힘썼고,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하고 찰스 왕세자를 대통령 관저로 초청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보였다. 1992년 소말리아와 1994년 르완다를 방문하여 UN에 인권 문제를 호소하는 등 국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내적으로는 피임 자유화, 동성애 비범죄화, 이혼 합법화 등 사회 개혁 법안에 서명하여 아일랜드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교계와의 소통에도 힘썼다.
1997년 9월,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면서 대통령직을 조기 사임했다.
5. 1. 취임과 초기 활동
1990년 12월 3일,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의 일곱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녀는 놀랍도록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으며, 5년 후 사망하기 전에 브라이언 레니한(Brian Lenihan)으로부터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칭찬을 받았다.[6]로빈슨은 대통령직에 법적 지식, 깊은 지성과 정치적 경험을 가져왔다. 아일랜드인 이주자들과 아일랜드계 주민들을 나타내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영국-아일랜드 관계의 국면을 바꾸어, 영국을 방문하고 버킹검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방문하는 첫 아일랜드 대통령이 되었다. 찰스 왕세자를 대통령 관저로 맞이하는 등 영국의 왕족들의 방문을 환영하였다.
로빈슨은 논쟁적으로 벨파스트로 여행을 떠나 신 페인의 회장이자 지방 국회의원 제리 애덤스를 만났다. 이전 공식적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연결들을 가진 아일랜드 노동당의 당수였던 외무장관 딕 스프링스는 지방적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이전의 연결들을 가진 당의 애덤스를 만나지 않도록 그녀를 충고하였다. 그러나 로빈슨은 자신의 방문 동안 지방 국회의원을 만나지 않을 국가원수로서 자신을 위하여 그런 공식적인 조언의 결석에서 그것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느끼고 그와 악수하는 모습이 공개적으로 사진에 찍혔다. 북아일랜드로 다양한 방문 동안 얼스터 연합당의 데이비드 트림블과 사회민주노동당의 존 흄을 포함한 정치인들을 정규적으로 만났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불찬성한 자유주의를 구현함으로서 자신을 본 비평가들의 놀라움에 교회와 함께 가까운 업무 관계를 가졌다. 아일랜드의 수녀와 성직자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하였고, 기독교 형제단을 위한 관저의 환영식을 개최하는 데 첫 대통령이 되었다. 로마로 업무 여행을 떠날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접견을 요청하여 승인되었다.
5. 2. 국내 정책
1990년 12월 3일 아일랜드의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메리 로빈슨은 재임 기간 동안 국내 정책에서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였다.[6] 대통령직에 법률 지식, 지성, 정치 경험을 더했으며, 아일랜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디아스포라"로 지칭하며 이 문제 해결에 힘썼다.로빈슨은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여 버킹검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한 최초의 아일랜드 대통령이 되었고, 찰스 왕세자를 대통령 관저로 초청하기도 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찰스 호히 총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나, 후임 총리들인 앨버트 레이놀즈, 존 브루턴, 버티 어헌은 로빈슨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브루턴과 어헌 정부는 로빈슨이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직을 맡도록 적극 지원했다.
로빈슨은 아일랜드 의회에서 두 차례 연설을 하였는데, 이는 1916년 부활절 봉기 50주년 기념 에이먼 데 발레라 대통령의 연설 이후 52년 만의 일이었다. 또한 유엔 운영 검토 위원회 의장직을 제안받았으나, 아일랜드 정부의 우려로 인해 고사하였다.
논란이 된 행보 중 하나는 벨파스트를 방문하여 신 페인 당 대표이자 북아일랜드 의회 의원인 제리 애덤스와 만난 것이다. 당시 외무장관 딕 스프링스는 아일랜드 공화국군과의 연관성을 이유로 만남을 반대했으나, 로빈슨은 애덤스와 악수하는 사진을 공개하며 만남을 강행했다. 로빈슨은 북아일랜드를 방문할 때마다 얼스터 연합당의 데이비드 트림블, 사회민주노동당의 존 흄 등 다양한 정치인들을 만났다.
로빈슨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유주의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일랜드의 수녀와 성직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기독교 형제단을 위한 환영 행사를 개최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로마 방문 시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을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다만, 이 방문에서 로빈슨의 복장이 바티칸 복장 규정을 어겼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바티칸은 이를 부인했다.
5. 3. 국제 관계 및 외교 활동
1990년대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빈슨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92년 소말리아 위기 직후, 현장을 방문하여 UN에 그 참상을 보고했고, 1994년에는 대량 학살이 벌어진 르완다를 방문하여 인권 문제를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31]1993년, 로빈슨은 아일랜드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여 버킹검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났다. 이는 영국-아일랜드 관계 개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찰스 3세를 비롯한 영국 왕족 고위 인사들의 아일랜드 방문을 환영하며 양국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같은 해, 로빈슨은 벨파스트에서 신 페인 대표 게리 애덤스와 악수했는데, 이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31] 당시 타나이스타이자 외무부 장관이었던 딕 스프링은 임시 IRA와의 연관성을 이유로 애덤스와의 만남을 반대했지만,[31] 로빈슨은 결국 애덤스와 만남을 강행했다. 북아일랜드 방문 중에는 얼스터 연합당의 데이비드 트림블, 사회민주노동당의 존 흄 등 다양한 정치인들을 만나며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1995년에는 더블린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맞이했다.

5. 4. 종교와의 관계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불찬성한 자유주의를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비평가들의 예상과 달리, 로빈슨은 교회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해외에 있는 아일랜드 수녀와 성직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했으며, 기독교 형제단을 위한 관저 환영식을 주최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로마로 공식 방문했을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을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그러나 아이리시 타임스는 로빈슨의 복장이 바티칸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고 보도했고, 논쟁적인 최연소 성직자 데이비드 오핸런 수도사는 그녀의 복장을 비난했다. 하지만 바티칸은 오핸런 수도사의 주장에 반박하며,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초기에 복장 규정이 변경되었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주교들 역시 바티칸의 입장에 동의하며 오핸런 수도사와 거리를 두었다.[2]로빈슨은 산아제한과 가부장제를 이유로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지만, 예수 성심 수녀회에서 받은 초기 교육을 통해 개발과 빈곤 감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16세 때 존경하던 큰 이모가 수녀원장이었고, 자신도 수녀가 될 준비를 했었다. 로빈슨은 대부분의 종교가 남녀 평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보편적 가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은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교조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가족 계획 합법화 운동을 벌일 때 설교단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데스먼드 투투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며 그가 양육 방식에서 여성과 협력하는 자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여성의 권한 부여가 전 세계 개발 수준을 높이는 최선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5. 5. 주요 법안 서명
대통령으로서 그녀는 정치 경력 동안 옹호해 온 두 가지 중요한 법안에 서명했다. 하나는 피임의 이용에 관한 법률을 완전히 자유화하는 법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성애를 완전히 비범죄화하는 법안이었는데, 당시 세계 많은 지역의 법률과는 달리 완전한 동등 성관계 가능 연령을 규정했다. 1996년에는 이혼 합법화 법안에도 서명했다.5. 6. 퇴임
로빈슨은 1997년 9월 12일에 사임을 발표했고, 이는 아일랜드 의회에 효력을 발생시켰다. 아헌 총리는 성명을 통해 그녀의 사임이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모든 성공을 기원"했다. 로빈슨은 유엔 인권 최고대표로 임명되기 위해 사임했다. 그녀의 사임으로 1997년 9월 12일부터 11월 11일까지 대통령 위원회가 대통령직을 대행했고, 이후 메리 맥알리스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로빈슨은 임기를 3개월 남겨두고 퇴임한 것에 대해 후회를 표명하며, 최고대표직 수락을 연기할 수도 있었음을 시사했다.[7]6.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1997-2002)
1997년 9월 12일, 로빈슨은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이 되었으며,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행정적 역할이 아닌 인권 옹호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영입되었다.[8]
1997년 11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권 실현"이라는 주제로 로마네스 강연을 했다.[9]
1998년 티베트를 방문한 첫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이었다. 재임 기간 동안, 비유럽 연합 이민자들을 위한 아일랜드의 허가 시스템과 미국의 사형 제도를 비판했다.
200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2001년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를 주재하였으나, 이 회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로빈슨의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임기는 2002년에 종료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인해 그녀가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 1. 주요 활동
1990년, 로빈슨은 노동당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당선되었고, 같은 해 12월 3일, 아일랜드 공화국 제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0년대부터 영국이 통치하는 북아일랜드를 둘러싸고 IRA 임시파가 활발한 테러 활동을 전개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도 런던에서 종종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평화적 통합을 목표로 테러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영국 정부와 협력하여, 1993년 12월에 영국과의 평화 협정을 성립시켰고, 1994년 8월에 IRA 임시파도 휴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이 정체되자 다시 테러가 시작되었고, 1997년 7월부터 평화 협상을 재개했다. 로빈슨 대통령의 임기는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에 집중되었다.동시에, 1992년에는 소말리아 위기 직후 소말리아를 방문했으며, 1994년에는 대량 학살이 있었던 르완다를 방문하여 UN 등에서 인권을 호소했다. 아일랜드 대통령은 실질적인 권한이 거의 없는 명예직이지만, 로빈슨은 해외 순방과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자세, 연설을 통해 국내외에서 매우 호감을 얻었고, 국민 지지율은 90%를 넘었으며,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1997년 9월, 로빈슨은 예정보다 3개월 일찍 아일랜드 대통령을 퇴임하고, 9월 12일에 국제 연합 인권 최고 대표에 취임하여 2002년까지 5년간 재임했다.
유엔 인권 최고대표가 되면서, 이전의 실행 및 합의 구축 모델이 아닌 원칙을 제시하는 대중 운동가가 되도록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영입되었다. 당시 이 직책이 일반적인 원칙을 대변하는 역할을 잃고 주로 관료주의적으로 변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로빈슨의 역할은 조직 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인권 의제를 설정하고, 그 호소력을 재조명하는 것이었다.[8]

1997년 11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권 실현"이라는 주제로 로마네스 강연을 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엄청난 도전"과 그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강연을 황금 가지의 문구로 마무리했다.[9]
로빈슨은 1998년에 티베트를 방문한 최초의 인권 최고대표였다. 재임 기간 동안, 비EU 이민자에 대한 아일랜드의 허가 시스템을 "노예 노동"과 유사하다고 비판했고, 미국의 사형 집행을 비판했다.
2001년,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유대인 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와 바하이 국제 공동체 대표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란 측이 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여성에게 머리 스카프를 착용하도록 강제하는 칙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회의에서 머리 스카프를 착용했다.
처음에는 4년 임기를 수행할 의사를 밝혔지만, 아난의 요청에 따라 임기를 1년 연장하여 2001년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를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사무총장으로 주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회의는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로빈슨의 인권 최고대표 임기는 2002년에 끝났다. 이는 미국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 결과 그녀가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인권 침해를 비판했고,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는 그 회의에서 인식된 반유대주의로 인해 미국에서 널리 비난을 받았다.
2006년 11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국제 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국제 인권법에 의해 권리 보호를 위해 채택된 족자카르타 원칙의 29명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10]

2013년 3월, 로빈슨은 콩고 민주 공화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평화 협정 이행을 감독하도록 선택되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의해 특별 사절로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임명되어 2013년 2월 말 11개 아프리카 국가가 서명한 UN 초안의 평화 협정 이행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 그녀가 특별 사절로 재임하는 동안 3월 23일 운동과 다른 무장 반군 단체들이 콩고 정부에 항복했다.[18]
2014년 7월, 반기문은 그녀를 기후 변화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2014년 2014년 UN 기후 정상 회담에 앞서 뉴욕에서 열리는 정상 회담에서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도록 했다. 그녀의 임명 한 달 후인 2014년 8월, 그녀는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 특별 사절에서 물러났다.[18] 2015년 3월, 그녀는 화석 연료 매각을 지지했다.
2016년 초, 개발 원조 위원회 의장인 에릭 솔하임에 의해 개발 원조 위원회의 미래에 대한 고위급 패널을 이끌도록 임명되었다.
2016년 5월, 반기문은 로빈슨과 마차리아 카마우를 엘니뇨와 기후에 관한 사무총장 특별 사절로 임명했다.
2016년 9월, 영양 개선 운동의 리드 그룹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12월, 두바이의 셰이카 라티파의 실종 및 탈출 시도에 대한 발언으로 인권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9] 2021년 2월, 로빈슨은 2018년 성명을 철회하고 BBC의 ''파노라마'' 프로그램에서 자신과 라티파의 계모인 하야 공주가 모두 당시 두바이 별장에서 강제 구금되어 있던 라티파의 건강과 안정에 대해 오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20] 로빈슨은 2021년 2월 26일 ''레이트 레이트 쇼''에서 이 사건을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언급했다.[21][22]
2020년, 아킨우미 아데시나, 아프리카 개발 은행 총재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보고서를 자체적으로 조사했다.[23][24][25]
6. 2. 퇴임
1997년 9월 12일, 로빈슨은 유엔 인권 최고대표가 되었고, 이 직책을 맡기 위해 몇 주 일찍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 의해 행정적 역할이 아닌 옹호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즉 이전의 실행 및 합의 구축 모델이 아닌 원칙을 제시하는 대중 운동가가 되도록 영입되었다. 당시 이 직책이 일반적인 원칙을 대변하는 역할을 잃고 주로 관료주의적으로 변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로빈슨의 역할은 조직 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인권 의제를 설정하고, 그 호소력을 재조명하는 것이었다.[8]1997년 11월,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권 실현"이라는 주제로 로마네스 강연을 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엄청난 도전"과 그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강연을 황금 가지의 문구로 마무리했다. "운명이 당신을 불렀다면, 가지는 저절로 쉽게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힘을 모아도, 그것을 꺾거나 가장 강한 칼날로 베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9]
로빈슨은 1998년에 방문하면서 티베트를 방문한 최초의 인권 최고대표였다. 재임 기간 동안, 그녀는 비EU 이민자에 대한 아일랜드의 허가 시스템을 "노예 노동"과 유사하다고 비판했고, 미국의 사형 집행을 비판했다.
2001년, 그녀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및 관련 불관용에 대한 아시아 지역 준비 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유대인 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와 바하이 국제 공동체 대표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란 측이 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여성에게 머리 스카프를 착용하도록 강제하는 칙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회의에서 머리 스카프를 착용했다. 그것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은 비판을 받았고, 로빈슨은 그것이 "종교 보수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났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4년 임기를 수행할 의사를 밝혔지만, 아난의 요청에 따라 임기를 1년 연장하여 그녀가 2001년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를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사무총장으로 주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회의는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전 미국 하원 의원 톰 랜토스는 "더반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재앙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회의 사무총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회의를 제대로 이끌어갈 리더십을 제공하지 못한 유엔 인권 최고대표 메리 로빈슨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로빈슨의 인권 최고대표 임기는 2002년에 끝났다. 이는 미국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 결과 그녀가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인권 침해를 비판했고, 세계 인종차별 반대 회의는 그 회의에서 인식된 반유대주의로 인해 미국에서 널리 비난을 받았다. 마이클 루빈 (역사가)는 심지어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지적 포그롬"을 주재한 것에 대해 그녀를 전쟁 범죄로 재판해야 한다고 풍자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2006년 11월 9일, 그녀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국제 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국제 인권법에 의해 권리 보호를 위해 채택된 족자카르타 원칙의 29명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10]
7. 퇴임 이후 활동 (2002-현재)
메리 로빈슨은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퇴임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2년 9월에는 회고록 ''Everybody Matters''를 출판했다.
2013년 3월,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로빈슨을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콩고 민주 공화국 안정화를 위한 평화 협정 이행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3월 23일 운동을 비롯한 무장 반군 단체들이 콩고 정부에 항복했다.[18] 2014년 7월에는 기후 변화 특별 사절로 임명되어 2014년 UN 기후 정상 회담에서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2015년 3월에는 화석 연료 매각을 지지하며 "오염 에너지 회사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거의 실사 요구 사항이다"라고 언급했다.
2016년, 로빈슨은 개발 원조 위원회 의장 에릭 솔하임에 의해 개발 원조 위원회의 미래에 대한 고위급 패널을 이끌도록 임명되었고, 같은 해 5월, 반기문은 로빈슨과 마차리아 카마우를 엘니뇨와 기후에 관한 사무총장 특별 사절로 임명했다. 9월에는 영양 개선 운동의 리드 그룹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12월, 로빈슨은 두바이의 셰이카 라티파 실종 사건과 관련하여 인권 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로빈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라티파를 "고뇌하는 젊은 여성"이라고 묘사했으나, 이후 2021년 2월 BBC ''파노라마'' 프로그램에서 자신과 하야 공주가 오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2018년 성명을 철회했다.[20]
2020년, 로빈슨은 아킨우미 아데시나 아프리카 개발 은행 총재의 비위 의혹 보고서를 자체 조사했다.[23][24][25]
또한, 로빈슨은 다음과 같은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 아프리카 유럽 재단(Africa Europe Foundation, AEF), 아프리카-유럽 관계 고위급 인사 그룹 회원 (2020년~)
- 인권 및 비즈니스 연구소(Institute for Human Rights & Business, IHRB), 후원자
- 마드리드 클럽, 회원 및 전 회장
- 오로라상, 선정 위원회 위원 (2015년~)
- 아랍 민주주의 재단, 이사회 창립 멤버 (2007년~)
- 청정 조리 연합, 리더십 위원회 위원
- 유럽 기후 재단, 이사
- 국제 법률가 위원회, 대표 (2009년~)
- 영양 개선 운동(Scaling Up Nutrition Movement), 리드 그룹 위원 (2016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에 의해 임명)
- B 팀, 멤버
- 세계 정의 프로젝트, 명예 공동 의장
- 아프리카와 함께하는 유럽 의회 의원 협회(AWEPA), 저명 자문 위원회 위원
- 모 이브라힘 재단, 이사
- 발명의 어머니 (팟캐스트), 공동 진행자 (2018년~)
2016년 10월, 로빈슨은 자신의 기록 보관소를 메이오 주 의회에 기증하여 메리 로빈슨 센터를 설립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기증으로 인해 200만유로 이상의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후 로빈슨은 계획을 철회하고 서류를 골웨이 국립 대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으며, 세금 공제는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7. 1. 더블린 대학교 총장
로빈슨은 24대 더블린 대학교 총장이자 첫 여성이었다. 20년 동안 상원에서 대학을 대표하였고, 법학 의장을 보유하였다. 그녀는 아일랜드 대통령으로서 그녀의 뒤를 이었던 메리 맥알리스에게 총장직을 물려주었다.7. 2. "디 엘더스" (The Elders) 활동
넬슨 만델라, 그라사 마셸, 데스몬드 투투 등과 함께 로빈슨은 세계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 지도자 그룹인 "더 엘더스"의 창립 멤버였다. 그녀는 더 엘더스 대표단과 함께 코트디부아르, 한반도, 에티오피아, 인도, 남수단, 중동을 방문했다.2014년 8월, 지미 카터와 함께 2014년 이스라엘-가자 분쟁 동안 ''외교 정책'' 잡지에 기고하여, 하마스를 합법적인 정치 행위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는 하마스가 파타와 최근 단결 합의를 통해 폭력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며, 과거 합의를 준수하기로 동의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로빈슨과 카터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가자 지구의 비인도적인 상황에 대해 조치를 취하고, 가자 지구 봉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2014년 10월 16일, 더블린에서 열린 원 영 월드 정상 회담에 참석했다. 코피 아난과의 세션에서 191개국에서 온 1,300명의 젊은 리더들에게 지구 온난화와 같은 세대 간 문제와 지금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원 영 월드 개막식 기조 연설자로, 젊은이들이 미래를 결정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8년 11월 1일, 로빈슨은 그 해 초에 사망한 코피 아난의 뒤를 이어 더 엘더스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7. 3. 기후 변화 대응 활동
2016년 원 영 월드 서밋에서 로빈슨은 육류 섭취 줄이기를 위한 노력을 공개적으로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거나 완전히 채식 식단을 채택하여 기후 변화에 대처하도록 권장했다. 로빈슨의 제안에 박수가 쏟아졌지만, 그녀의 조치를 따르는 것이 농업 및 육류 산업 종사자에게 의도치 않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비판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지역 의회로부터 발언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2018년 서밋에서 그녀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육류 소비를 줄일 것을 요구했다.[11][12] 2019년 로빈슨은 기후 변화 대응을 우리 삶의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것을 믿으며, 이 때문에 더 친환경적인 페스카테리안 식단을 선호하여 육류 섭취를 중단했다고 발표했다.[13]7. 4. 기타 활동
2007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넬슨 만델라, 그라사 마셸과 데즈먼드 투투는 세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혜, 독립적인 리더십,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성실성을 기여하는 단체인 "디 엘더스"(The Elders, 원로들)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11]투투 대주교는 원로공의 의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창립 회원으로는 그라사 마셸, 코피 아난, 엘라 바트, 그로 할렘 브룬틀란, 지미 카터, 리자오싱, 무함마드 유누스도 포함되었다.
만델라는 "단체는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고,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장막 뒤와 공개적으로 모두 일할 것이다."라며 "우리는 공포가 있는 곳에 용기를 북돋우고, 분쟁이 있는 곳에 합의를 위탁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원로공은 리처드 브랜슨, 피터 가브리엘, 에이미 로빈스와 유엔 재단 등을 포함한 창립자들의 단체에 의해 독립적으로 기금을 지원받았다.

2012년 9월, 로빈슨의 회고록 ''Everybody Matters''가 호더 앤 스토튼에서 출판되었다.
2016년 원 영 월드 서밋에서 로빈슨은 육류 섭취 줄이기 위한 노력을 공개적으로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거나 완전히 채식 식단을 채택하여 기후 변화에 대처하도록 권장했다. 로빈슨의 제안에 박수가 쏟아졌지만, 그녀의 조치를 따르는 것이 농업 및 육류 산업 종사자에게 의도치 않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비판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지역 의회로부터 발언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2018년 서밋에서 그녀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육류 소비를 줄일 것을 요구했다.[12] 2019년 로빈슨은 기후 변화 대응을 우리 삶의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것을 믿으며, 이 때문에 더 친환경적인 페스카테리안 식단을 선호하여 육류 섭취를 중단했다고 발표했다.[13]
2016년 10월, 언론에서는 메리 로빈슨이 자신의 기록 보관소를 메이오 주 의회에 기증하여 메리 로빈슨 센터를 개발할 계획이며, 1997년 조세 통합법에 따라 기록 보관소를 지정받아 개인 서류 기증으로 인해 200만유로 이상의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신청했다고 밝혔다. 센터로 사용될 예정인 집은 로빈슨의 형제로부터 665000EUR에 구매할 예정이었다.
메리 로빈슨 센터 웹사이트에는 제안된 기록 보관소(2500000EUR 상당)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열되어 있다.
"법률 및 인권 관련 서적 2,000권, 정기간행물 3,800권, 1990년 12월부터 1997년 9월까지 대통령의 활동에 대한 마스터 파일,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아라스 안 우아흐타란 창문에 켜두었던 상징적인 불빛, 1967년부터 1990년까지,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로빈슨의 개인 일기, 아카이브 카톤 325개...스크랩북, 카세트 테이프." 이 서류들은 로빈슨의 거의 50년에 걸친 경력과 관련되어 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 상원의원 및 변호사 시절, 대통령직과 관련된 개인 서류, 그리고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으로 활동했던 대통령 퇴임 이후의 중요한 서류들을 포함한다.
전체 프로젝트는 역사학자 디어무이드 페리터에 의해 "사치스러운 허영심 사업"으로 비난받았다. 센터 기금 모금 위원회 위원은 "발리나는 더블린에서 발리나까지의 거리와 더블린에서 발리나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주장했다. 메이오 주 의회 최고 책임자 피터 하인스(메리 로빈슨 센터 이사)는 로빈슨이 "정치인으로서의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센터는 발리나와 서부에 상당한 학문적, 관광, 교육 및 경제적 기회를 가져오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했다. 하인스는 또한 "서부 해안 도시(발리나)는 그녀의 뛰어난 경력과 지속적인 글로벌 리더십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제안된 센터를 글로벌 관심을 집중시키고 골웨이 국립 대학교와 협력하여 근본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한 대화를 계속할 살아있는 기관으로 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잠재적인 200만유로의 횡재에 대한 보도가 있은 후, 로빈슨은 기록 보관소를 발리나에 "기증"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신 서류를 "골웨이 국립 대학교에 기증하고, 메이오 주 의회는 발리나 센터의 사명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컬렉션의 모든 부분에 완전한 접근 권한을 갖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기증에 대한 세금 공제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 아프리카 유럽 재단(Africa Europe Foundation, AEF), 아프리카-유럽 관계 고위급 인사 그룹 회원 (2020년~)
- 인권 및 비즈니스 연구소(Institute for Human Rights & Business, IHRB), 후원자
- 마드리드 클럽, 회원 및 전 회장
- 오로라상, 선정 위원회 위원 (2015년~)
- 아랍 민주주의 재단, 이사회 창립 멤버 (2007년~)
- 청정 조리 연합, 리더십 위원회 위원
- 유럽 기후 재단, 이사
- 국제 법률가 위원회, 대표 (2009년~)
- 영양 개선 운동(Scaling Up Nutrition Movement), 리드 그룹 위원 (2016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에 의해 임명)
- B 팀, 멤버
- 세계 정의 프로젝트, 명예 공동 의장
- 아프리카와 함께하는 유럽 의회 의원 협회(AWEPA), 저명 자문 위원회 위원
- 모 이브라힘 재단, 이사
- 발명의 어머니 (팟캐스트), 공동 진행자 (2018년~)
2013년 3월, 로빈슨은 콩고 민주 공화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평화 협정 이행을 감독하도록 선택되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의해 특별 사절로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임명되어 2013년 2월 말 11개 아프리카 국가가 서명한 UN 초안의 평화 협정 이행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 그녀가 특별 사절로 재임하는 동안 3월 23일 운동과 다른 무장 반군 단체들이 콩고 정부에 항복했다.[18]
2014년 7월, 반기문은 그녀를 기후 변화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2014년 UN 기후 정상 회담에 앞서 뉴욕에서 열리는 정상 회담에서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도록 했다. 사무총장은 2015년에 합의를 마무리하기 위한 정치적 약속을 이끌어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임명 한 달 후인 2014년 8월, 그녀는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 특별 사절에서 물러났다.[18] 2015년 3월, 그녀는 "오염 에너지 회사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거의 실사 요구 사항이다"라고 언급하며 화석 연료 매각을 지지했다.
2016년 초, 그녀는 개발 원조 위원회 의장인 에릭 솔하임에 의해 개발 원조 위원회의 미래에 대한 고위급 패널을 이끌도록 임명되었다.
2016년 5월, 반기문은 로빈슨과 마차리아 카마우를 엘니뇨와 기후에 관한 사무총장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심각한 엘니뇨 관련 가뭄과 기후 영향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미래 기후 변화에 대한 대비를 고려한 통합된 대응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2016년 9월, 그녀는 반기문에 의해 영양 개선 운동의 리드 그룹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12월, 그녀는 두바이의 셰이카 라티파의 실종 및 탈출 시도에 대한 발언으로 인권 단체인 Detained International과 Guernica 37 International Justice Chambers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두바이 왕족의 초청으로 라티파와 가족 식사를 한 후 로빈슨은 BBC에 라티파를 두바이에서 감금되고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전 비디오를 후회하는 "고뇌하는 젊은 여성"이라고 묘사했다. Detained International의 대표인 데이비드 헤이그는 전 UN 커미셔너가 두바이의 공식적인 사건 버전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가족의 사랑스러운 보살핌"을 반복하고, 2018년 2월 라티파의 두바이 탈출 시도를 묵살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19] 2021년 2월, 로빈슨은 2018년 성명을 철회하고 BBC의 ''파노라마'' 프로그램에서 자신과 라티파의 계모인 하야 공주가 모두 당시 두바이 별장에서 강제 구금되어 있던 라티파의 건강과 안정에 대해 오해를 받았고, 로빈슨은 라티파의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에 대한 국제적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생존 증명 논란에 휘말렸다고 주장했다.[20] 로빈슨은 2021년 2월 26일 ''레이트 레이트 쇼''에서 이 사건을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언급하며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21][22]
2020년, 그녀는 아킨우미 아데시나, 아프리카 개발 은행 총재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보고서를 자체적으로 조사했다.[23][24][25]
8. 수상 및 영예
연도 | 수상 및 영예 |
---|---|
1993년 | 뉴질랜드 참정권 100주년 기념 메달 |
1997년 | 북남 공로상 |
1998년 | 자유 메달 |
4개의 자유상 | |
1999년 | 에라스무스상 |
미국 철학 학회 회원[26] | |
2000년 | 유네스코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평화상 |
인디라 간디상 | |
2001년 | 앨버트 메달 |
2002년 | 시드니 평화상 |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 | |
제임스 파크스 모튼 종교간 상 | |
2003년 | 독일 유엔 협회의 금메달 오토 한 평화 메달 |
2004년 | 국제 앰네스티 양심대사상 |
2005년 | 칼데론 상 |
대화를 위한 잭 P. 블레이니 상[27] | |
국제 게이 레즈비언 인권 위원회(IGLHRC) "아웃스포큰" 상 | |
2006년 | 아스투리아스 공작 사회 과학상 |
2009년 |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 이나모리 윤리상 |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오바마 대통령은 "아일랜드에서 여성과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투사였던 메리 로빈슨은 유엔 인권 최고 대표로 임명되기 전에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 오늘날 굶주린 자, 사냥당하는 자, 잊혀진 자, 무시받는 자들을 위한 옹호자로서 메리 로빈슨은 인간의 고통에 빛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세계의 더 나은 미래를 밝혀주었습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 |
2017년 | 자유 기사 훈장 |
2018년 | 큐 국제 메달 |
티퍼러 국제 평화상 | |
2024년 | 탕상 법의 지배 부문[28] |
2010년 9월 29일 더블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예루살렘 군사 및 병원 성 라자루스 기사단으로부터 데임 작위를 받았다. 전직 국가 원수로서 인권에 대한 그녀의 중요한 기여를 인정하여 공로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1991년과 2001년, 로빈슨은 브라운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리버풀 대학교, 리스본 신대학교(Universidade Nova de Lisboa)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1월 22일, 그녀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법학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그녀는 맥길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2009년, 그녀는 배스 대학교에서 법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배스 앤드 웰스 교구 1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권리 실현: 미래의 인권에서 종교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 -|]]|버락 오바마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는 로빈슨]]
로빈슨의 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은 미국 및 유럽 유대인 단체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다른 단체들은 지지를 보냈다. 반대 단체에는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명예훼손 방지 연맹(Anti-Defamation League), 유럽 유대인 회의, 전 유엔 미국 대사인 존 볼턴 등이 있었다. 반면, 이스라엘 인권 단체들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일부 유대인 단체 및 논평가들의 항의에 대해 로빈슨은 "놀랍고 실망스럽다"며 "이것은 오래된, 재탕된, 사실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워치(UN Watch)의 이사인 힐렐 노이어는 로빈슨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로빈슨이 드르반에서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받거나 괴롭힘을 당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반대에 대한 질문에 로버트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으며, 우리는 그녀를 아일랜드와 전 세계의 여성 권리를 위한 저명한 투사로 존경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 상원 원내 부대표 딕 더빈, 그리고 다른 입법자들은 로빈슨의 수상을 환영했다. 옥스팜 ,여성 세계 지도자 협의회, 샴팔리마우드 재단, 그리고 이매진네이션스 그룹(ImagineNations Group) 또한 로빈슨의 수상을 환영했다.
국제 게이 레즈비언 인권 위원회는 로빈슨에게 축하를 보냈으며, 그녀가 "아일랜드 대통령 및 유엔 인권 최고 대표로서 LGBT 사람들의 인권 인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으며, 그녀는 고문, 박해, 그리고 전 세계 LGBT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열정적인 외침을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9. 유산과 평가
로빈슨은 대통령 관저로 보통 초대되지 않은 단체들을 초대했다. 여기에는 아일랜드 전역의 학교들을 운영했지만 지도자들이 관저에 초청받지 못했던 기독교 형제단,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등권 조직망 G. L. E. N. 등이 포함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녀와 성직자들을 방문하고, 국제 스포츠 이벤트들에 참석하고, 교황을 만났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격노에도 불구하고 14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로빈슨은 세계에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대통령 관저 부엌 창문에 특별한 빛을 놓아 대중에게 보이게 했다. 이 상징적인 빛은 국가의 아들과 딸들을 생각하는 아일랜드의 인정된 기호가 되었다. 르완다를 방문하여 내전의 영향으로 고통받는 국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방문 후 기자 회견에서 감정을 드러냈는데, 변호사로서 훈련받은 그녀의 격렬한 감정은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이전에는 대통령직 아이디어를 비웃던 대중매체 비평가들도 이제 그녀를 칭찬했다. 대통령직 임기 중반에 인기율은 93%에 달했다.[1]
대통령으로서 에러크터스에 의해 통과된 법안에 서명하는 역할 중, 자신의 정치 경력 동안 싸워온 두 가지 중요한 법안에 서명하게 되었다. 피임의 유효성에 관한 법을 완전히 자유화하는 법안과 당시 영국 및 세계 대부분과 달리 동성애를 완전히 비범죄화하는 법은 동의 연령을 완전히 동등하게 하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똑같이 대우하도록 규정했다.[1]
1997년 노스-사우스 상 수상자 2명 중 한 명이었다.[1]
2002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으로서의 현저한 업적으로 시드니 평화상을 받았고, 2003년 베를린에서 유엔 독일 협회의 오토 한 평화 금메달을 수상했다.[1]
2005년 3월, 샌디에이고 대학교 조앤 B. 크록 연구소에서 "인권과 윤리적인 세계화"를 강의했다.[1]
같은 해 5월, 국제 성소수자 인권 위원회로부터 첫 "솔직함" 상을 수상했다.[1]
2006년 10월, 아스투리아스 공 사회과학상을 수상했다. 배심원은 "말을 못하거나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 비순응적이고 용감하며 멀리 도달하는 음성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같은 달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법학 대학원에서 주최한 국제 형사 사법의 미래 토론회에서 주요 연설자로 "도전의 시간에 법과 국제 인권의 규칙"에 관해 연설했다.[1]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1]
아일랜드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서 로빈슨의 선거는 역사에 기록되었다. 대통령 임기는 포용적인 사회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과 교육에 대한 집중으로 특징지어진다. 전 대학 교수로서 자신의 정치 경력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디아스포라의 아일랜드인들과 국제 형사 사법 및 인권에 대한 관심은 항상 전 세계에 퍼져 있었다. 아일랜드 대통령직을 발판으로 삼아 국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으로서 전 세계에 인권과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통령 당선은 여성 권리 옹호를 실천으로 옮긴 것이며, 메리 매컬리스가 아일랜드의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이자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여성을 대체하는 역사상 첫 여성이 되는 길을 열었다. 윤리적 세계 발의권을 통해 "보건, 안정, 평등의 기본적인 필요와 인권의 보편적 원칙의 타당성을 증진하고, 모든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공동 책임과 공유 가치를 강조하며,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필요에 보편적 원칙"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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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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