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쓰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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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로, 세이와 겐지의 시조이다. 그는 무사시노스케로 부임하여 현지 호족과의 갈등을 겪고, 다이라노 마사카도와의 연루로 무고죄를 받아 좌위문부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평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여러 구니의 고쿠시를 역임하며 진수부장군까지 올랐다. 말년에는 신적강하를 명받았으며, 그의 적자 미나모토노 미쓰나카는 로쿠손오 신사를 세웠다. 쓰네모토는 계보와 생몰년, 모미지 전설과의 관계 등 여러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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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쓰네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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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겐지(源氏) (세이와 겐지(淸和源氏)) |
이명 | 로쿠손노(六孫王) |
신호 | 로쿠손노 대권현(六孫王大権現) |
묘소 | 교토부(京都府) 교토시(京都市) 미나미구(南区) 로쿠손노 신사(六孫王神社) |
생애 | |
시대 |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중기 |
출생 | 미상 |
사망 | 오와(應和) 원년 11월 10일 (961년 12월 20일) |
관직 | |
관위 | 무사시노스케(武蔵介) 정4위상(正四位上)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증 정1위(贈正一位) |
가계 | |
부모 | 아버지: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 어머니: 미나모토노 요시아리(源能有)의 딸 미나모토노 쓰네코(源柄子) |
형제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経基) 미나모토노 쓰네오(経生) |
아내 | 다치바나노 시게후루(橘繁古)의 딸 또는 후지와라노 도시유키(藤原敏有)의 딸 |
자녀 |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満仲) 미나모토노 미쓰마사(満政) 미나모토노 미쓰스에(満季) 미나모토노 미쓰자네(満実) 미나모토노 미쓰요시(満快) 미나모토노 미쓰유키(満生) 미나모토노 미쓰시게(満重) 미나모토노 미쓰요리(満頼) |
기타 | |
특징 | 쓰네모토류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초대 |
![]() |
2. 생애
조헤이(承平) 8년(938년) 무사시노스케(武蔵介)로 부임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과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진압에 관여했다. 이후 무사시, 시나노, 지쿠젠, 다지마, 이요의 고쿠시(国司)를 역임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까지 올랐다.
쓰네모토는 칙선 가인(勅撰歌人)으로 《슈이와카슈(拾遺和歌集)》에 그가 지은 와카(和歌) 두 수가 채록되어 있다.[7] 그의 적자(嫡子)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가 지금의 교토시 미나미 구에 세운 로쿠손오 신사(六孫王神社)가 아직 남아있으며, 1701년에는 정일위(正一位)를 증위(贈位)받았다.
쓰네모토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나, 『존비분맥』에는 오와 원년(961년)에 45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역산하면 엔기(延喜) 17년(917년)생이 된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조헤이(承平) 8년(938년) 무사시노스케(武蔵介)로 현지에 부임하였다. 함께 부임한 무사시노곤노카미(武蔵権守) 오키요 왕과 함께 부임 초부터 검주(検注)를 실시했는데[18], 현지 호족인 아다치 군수(足立郡司, 아다치노군지) 판대관(判代官) 무사시노 다케시바가 정식 고쿠시(国司)가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검주를 하는 전례는 없다며 검주를 거부했고, 쓰네모토 등은 병사를 풀어 다케시바의 집을 습격해 약탈하기에 이른다.이 이야기를 들은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가 자신의 병사를 거느리고 다케시바를 도우러 나섰고, 쓰네모토 등은 처자를 거느리고 군비를 갖춘 채로 히나이 군(比企郡)의 협복산(狭服山)에 올라 농성했지만, 그 뒤 오키요 왕이 산을 내려가 무사시의 고쿠후에서 마사카도와 다케시바를 회견할 때에도 쓰네모토는 경계하며 산을 내려가지 않고 남았다. 양측 간의 화해가 성립되고 연회까지 벌어졌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쓰네모토의 처소를 포위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쓰네모토는 마사카도 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공포에 급히 교토로 달아났다.
덴교(天慶) 2년(939년) 11월, 마사카도가 히타치의 고쿠후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인근의 고쿠후를 습격해 점령하면서, 12월에는 고즈케국(上野国)에서 「신황(新皇)」을 칭하며 반도(坂東) 여러 구니(国)에 대한 관리 임명을 행하는 등 이전의 무고가 현실이 되면서 쓰네모토도 방면되고, 그것을 알린 공을 인정받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9]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나, 『존비분맥』에는 오와 원년(961년)에 45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역산하면 엔기(延喜) 17년(917년)생이 된다.
2. 2.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조헤이(承平) 8년(938년),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무사시노스케(武蔵介)로 현지에 부임하였다. 그는 함께 부임한 무사시노곤노카미(武蔵権守) 오키요 왕과 함께 부임 초부터 검주(検注)를 실시했다.[18] 그러나 현지 호족인 아다치 군수(足立郡司) 판대관(判代官) 무사시노 다케시바는 정식 고쿠시(国司)가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검주를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반발했다. 이에 쓰네모토 등은 병사를 풀어 다케시바의 집을 습격해 약탈했다. (《쇼몬키》에는 오키요 왕과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두 사람의 부정을 한 쌍의 젓가락으로까지 비유하고 있을 정도이다).이 소식을 들은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는 자신의 병사를 거느리고 다케시바를 도우러 나섰다. 쓰네모토 등은 처자를 거느리고 군비를 갖춘 채로 히나이 군(比企郡)의 협복산(狭服山)에 올라 농성했다. 그 뒤 오키요 왕이 산을 내려가 무사시의 고쿠후에서 마사카도와 다케시바를 회견할 때에도 쓰네모토는 경계하며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양측간의 화해가 성립되고 연회까지 벌어졌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쓰네모토의 처소를 포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쓰네모토는 마사카도 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공포에 급히 교토로 달아났다. (《쇼몬키》에도 스케 쓰네모토가 군사적인 재능에 미숙했다고 하는 등, 훗날 무가 겐지의 우두머리가 될 세이와 겐지의 시조 쓰네모토는 군사 경험이 일천한 모습이었다.) 그는 마사카도, 오키요 왕, 다케시바가 공모하여 모반하고 있다고 조정에 무고했다.
그러나 마사카도 등은 조헤이 9년 5월 2일자로 히타치, 시모우사, 시모쓰케, 무사시, 고즈케의 다섯 구니의 고쿠후(国府)에서 「마사카도의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증명서를 태정대신(太政大臣)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앞으로 보내왔다. 결국 마사카도 등의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거꾸로 쓰네모토는 무고죄를 받아 좌위문부(左衛門府)에 구금되었다.
덴교(天慶) 2년(939년) 11월, 마사카도가 히타치의 고쿠후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인근의 고쿠후를 습격해 점령했다. 12월에는 고즈케국(上野国)에서 「신황」(新皇)을 칭하며 반도(坂東) 여러 구니(国)에 대한 관리 임명을 행하는 등 이전의 무고가 현실이 되었다. 쓰네모토는 방면되었고, 그 사실을 알린 공을 인정받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9] 그 뒤 세이이타이쇼군(征東大將軍)이 된 후지와라노 다다후미의 부장(副將)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마사카도의 난을 평정하러 향했지만, 이미 마사카도가 다이라노 사다모리,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등에게 평정되었으므로 수도로 돌아왔다.
2. 3.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조헤이(承平) 8년(938년),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무사시노스케(武蔵介)로 현지에 부임하였다. 그는 함께 부임한 무사시노곤노카미(武蔵権守) 오키요 왕과 함께 부임 초부터 검주(検注)를 실시했다.[18] 그러나 현지 호족인 아다치 군수(足立郡司) 판대관(判代官) 무사시노 다케시바는 정식 고쿠시(国司)가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검주를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반발했다. 이에 쓰네모토 등은 병사를 풀어 다케시바의 집을 습격하고 약탈했다.이 소식을 들은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는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다케시바를 도우러 나섰다. 쓰네모토 등은 처자를 거느리고 히나이 군(比企郡)의 협복산(狭服山)에 올라 농성했다. 이후 오키요 왕이 산을 내려가 무사시의 고쿠후에서 마사카도와 다케시바를 만났지만, 쓰네모토는 경계하며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양측 간의 화해가 성립되고 연회까지 열렸지만, 다케시바의 군사가 쓰네모토의 처소를 포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쓰네모토는 마사카도 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공포에 급히 교토로 달아나, 마사카도, 오키요 왕, 다케시바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조정에 무고했다.
하지만 마사카도 등은 조헤이 9년(939년) 5월 2일자로 히타치, 시모우사, 시모쓰케, 무사시, 고즈케 5개국 고쿠후에서 "마사카도의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증명서를 태정대신(太政大臣)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냈다. 결국 마사카도 등의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쓰네모토는 무고죄로 좌위문부(左衛門府)에 구금되었다.
덴교(天慶) 2년(939년) 11월, 마사카도가 히타치의 고쿠후를 점령하고, 12월에는 고즈케국(上野国)에서 "신황(新皇)"을 칭하며 반도(坂東) 여러 구니(国)에 대한 관리 임명을 하는 등 이전의 무고가 현실이 되자, 쓰네모토는 방면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린 공을 인정받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9]
덴교 4년(941년), 쓰네모토는 추포흉적사(追捕凶賊使)가 되어 오노노 요시후루와 함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평정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미 요시후루가 난을 진압한 뒤였고, 쓰네모토는 스미토모의 가신(家来) 구와바라 고레유키를 체포하는 데 그쳤다.
2. 4. 만년
덴교(天慶) 2년(939년) 11월,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히타치의 고쿠후(国府)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인근의 고쿠후를 습격해 점령하고, 같은 해 12월에 고즈케국(上野国)에서 「신황(新皇)」을 칭하며 반도(坂東) 여러 구니(国)에 대한 관리 임명을 행하는 등 이전의 무고가 현실이 되면서 쓰네모토는 방면되고, 그 사실을 알린 공을 인정받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9] 그 뒤 세이이타이쇼군(征東大將軍)이 된 후지와라노 다다후미(藤原忠文)의 부장(副將)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마사카도의 난을 평정하러 향했지만, 이미 마사카도가 다이라노 사다모리(平貞盛),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 등에게 평정되었으므로 수도로 돌아왔다.덴교 4년(941년)에는 추포흉적사(追捕凶賊使)로서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와 함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난을 평정하러 향하지만, 이번에도 이미 요시후루에 의해 난은 진압된 뒤였고, 스미토모의 가신(家臣)이었던 구와바라 고레유키(桑原生行)를 잡았을 뿐이다. 이후 무사시 ・ 시나노 ・ 지쿠젠 ・ 다지마 ・ 이요의 고쿠시(国司)를 역임하며, 최종적으로는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까지 올랐다.
말년에 쓰네모토는 신적강하(臣籍降下)를 명받고 몹시 분개했다고 전해지는데, 후지와라노 다다히라(藤原忠平)의 일기인 《정신공기(貞信公記)》 덴교(天慶) 2년(939년) 3월 3일자에 「미나모토노 쓰네모토가 무사시의 일을 고하였다」고 하여 그의 이름이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쓰네모토라는 인물이 정말 왕족이었던 시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시되고 있으며, 《정신공기》의 이 기술에 대해서는 다다히라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実頼)가 초록할 즈음에 미나모토라는 가바네(姓)를 기입해 넣은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6]
칙선 가인(勅撰歌人)으로 《슈이와카슈(拾遺和歌集)》에는 그가 지은 와카(和歌) 두 수가 채록되어 있다.[7]
그의 적자(嫡子)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가 지금의 교토시 미나미 구에 세운 로쿠손오 신사(六孫王神社)가 아직 남아있다. 1701년에는 정일위(正一位)를 증위(贈位)받았다.
3. 계보
- 아버지: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
- 어머니: 미나모토노 요시아리(源能有)의 딸
- 아내: 다치바나노 무네후루(橘繁古)의 딸 혹은 후지와라노 도시아리(藤原敏有)의 딸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 - 다다 미쓰나카(多田満仲)[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마사(源満政) - 하치시마 다이후(八島大夫), 무라오카 다이후(村岡大夫)[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스에(源満季)[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자네(源満実)[15]
- 생모 불명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요시(源満快) - 시나노 겐지(信濃源氏)의 시조[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유키(源満生)[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시게(源満重) - 미나모토노 미쓰나리(源満成)[15]
-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요리(源満頼) - 미쓰스에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15]
- 딸: 미나모토노 모토미쓰(源元亮)의 아내, 미나모토노 다카미치(源孝道) 등의 어머니[15]
- 딸: 후지와라노 고레타케(藤原惟岳)의 아내, 후지와라노 도모야스(藤原倫寧) 등의 어머니[15]
4. 계보를 둘러싼 의문
《존비분맥》 등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요리노부가 호다 하치만구에 바쳤다는 고문(願文)의 사본이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다나카가 문서 속에 남아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요리노부는 하치만 다이보사쓰(오진 천황)을 자신의 "22세 씨조"라고 칭하며, 자신의 조상들을 열거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쓰네모토의 아버지는 세이와 천황의 황자 사다즈미 친왕이 아니라 요제이 천황의 황자 모토히라 친왕이 된다.
메이지 30년대에 이 문서가 발견되면서, 호시노 히사시는 이른바 "세이와 겐지"는 사실 "요제이 겐지"가 아닌가 하는 설을 제기하였다. 호시노의 설은 그 뒤 묵살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지만, 쇼와 40년에 다케우치 리조가 지지하면서 부활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사본이며, 고문의 뒷면에 교정했다는 기록이 있어 후세의 위작으로 판명되었다.
아카사카 쓰네아키는 "세이와 출자설을 부정하려는 호시노 히사시의 사료 비판 방법이나 논의 전개에는 오늘날의 연구 관점에서 보면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고문의 내용은 가와치 이시카와 장원의 상속 순서에 불과하다는 설이나, 쓰네모토가 젊어서 아버지 사다즈미 친왕이 훙거했기 때문에 백부인 요제이 상황의 유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2세기 초에 쓰여진 《오카가미》가 무가 겐지를 세이와 천황의 후손으로 하고 있는 점도 있어, 여전히 구설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 "요제이 겐지설"을 지지하고 있는 학자는, 호시노처럼 황당무계한 사료 비판이나 논의 전개를 하거나(《오카가미》나 《고금와카집》에 세이와 천황의 후예라고 되어 있는 것을 후세의 개찬이라고 추측하는 등), 다케우치처럼 고문만을 사실로 하여 적극적으로 세이와 겐지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역사 학회상을 수상한 후지타 요시키의 논문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출자와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고문'"("일본 역사" 2015년 6월호)은,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고문"이 후세의 위작이라고 하여, 쓰네모토는 사다즈미 친왕의 아들이며, 그 동생에 쓰네타다가 있다고 했다.
아카사카 쓰네아키는 쓰네모토와 그 자손이 "정관 어후", 즉 세이와 천황의 후예라고 동시대에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증명했다.
4. 1. 생몰년에 대한 의문
経基王|쓰네모토 왕일본어의 출생년은 여러 설이 분분하다. 《존비분맥》에는 오와 원년(961년)에 45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역산하면 엔기 17년(917년)생이 된다. 그러나 《칙선작가부류》에는 덴토쿠 2년(958년)에 45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엔기 14년(914년)생으로 추정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장남 미나모토노 미쓰나카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 되어 모순된다.[4]《계도찬요》에는 간페이 9년(897년) 2월 12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15세에 미쓰나카를 낳은 것이 되어 이치에 맞지만, 2세 겐지이면서 40세가 넘도록 5위 관위조차 받지 못한 점이 부자연스럽다. 또한 이 책은 막부 말기에 편찬된 것으로, 단순한 모순을 깨달은 계보 제작자들이 손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어, 통상적인 역사학의 방법으로는 이를 근거로 채택하기 어렵다.[4]
《스와가보》에는 간페이 2년(890년) 2월 13일생, 《1본 다케다 계도》에는 간페이 5년(893년) 6월 10일생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이와 겐지의 시조이면서 역사 무대에 등장한 기간이 불과 7, 8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쓰네모토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4]
한편, 미나모토노 요리노부가 와다 하치만구(誉田八幡宮)에 봉납했다는 고문(告文)의 필사본(이와시미즈 하치만구 다다 가 문서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고문안源頼信告文案」 고사古寫)이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의 다다 가(田中家) 문서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요리노부는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 즉 오진 천황을 자신의 「22세(世) 씨조(氏祖)」라고 부르며, 자신의 조상들을 열거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쓰네모토의 아버지는 세이와 천황의 황자 사다즈미 친왕이 아니라 요제이 천황의 황자 모토히라 친왕이 된다.[4]
이 문서가 메이지 30년대에 발견되면서, 호시노 히사시(星野恒)는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는 사실 「요제이 겐지」(陽成源氏)가 아니냐는 설을 제창했다. 호시노의 설은 묵살에 가깝게 외면받았지만, 쇼와 40년에 다케우치 리조(竹内理三)가 지지하면서 부활했고, 현재에도 호시노의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가 많다. 그러나 이 문서는 필사본으로서 뒷면에 후대에 누군가 교정한 것으로 보이는 단서가 남아 있어 그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고문의 내용도 가와치 이시카와 장원(石川庄)의 상속 순서에 불과하다는 설, 쓰네모토가 젊었을 때 아버지 사다즈미 친왕이 요절하는 바람에 숙부인 요제이 상황(陽成上皇)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12세기 초에 기록된 《오카가미(大鏡)》에서는 무가 겐지를 세이와 천황의 후예로 보는 설도 있다.[4]
후지타 요시키(藤田佳希)는 사다야스 친왕(貞保親王)의 사망년과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의 출생년으로부터 늦어도 엔기 원년(901년)에는 태어났다고 계산했다.[4]
5. 모미지 전설과의 관계
신슈(信州) 도가쿠시(戸隠)와 기나사(鬼無里, 지금의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시), 벳쇼온천(別所温泉) 등에 전해지는 전설 속의 여주인공 귀녀(鬼女)의 이름인 모미지(紅葉, 일본어로 단풍이라는 뜻)를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은 다이라노 고레모치(平維茂, 《태평기》에는 모미지를 토벌한 것이 다이라노 고레모치가 아닌 미나모토노 미쓰나카로 나온다)가 모미지와 싸워 그녀를 죽였다고 하는 이 전설에서 쓰네모토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죠헤이 7년(937년)에 모미지는 아이즈에 살던 도모노사사마루(伴笹丸)와 기쿠요(菊世) 부부의 딸로 태어나 구레하(呉葉)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였지만 부유한 농민의 아들에게 억지로 시집가게 되자, 비술로 자신과 닮은 미녀를 만들어 대신 시집보냈다. 가짜 구레하는 농민의 아들과 한동안 화목하게 지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실의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그때는 이미 구레하의 가족도 달아난 뒤였다. 구레하와 그녀의 양친은 교토로 상경했고, 여기서 구레하는 처음 모미지(단풍)라는 이름을 쓰면서 처음에는 고토(琴)를 가르쳤는데,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부인에게 불려가 그 시녀가 되고 곧 쓰보네(局)가 되었다. 쓰네모토의 아이까지 갖게 된 그녀였지만 이 무렵 쓰네모토의 부인이 앓던 병의 원인으로 히에이 산의 고승에 의해 모미지가 지목되면서 결국 쓰네모토는 모미지를 신슈의 도가쿠시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덴랴쿠(天暦) 10년(956년) 가을, 마침 단풍이 만발한 시기에 모미지는 미나세(水無瀬, 기나사의 옛 이름)에 당도했고, 임신한 몸에 교토의 문물에도 통달해 있었던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선망을 받으면서도 늘 교토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쓰네모토의 이름을 따서 쓰네와카마루(経若丸)라 짓고, 마을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교토의 지명에서 딴 이름을 마을 곳곳에 붙였다(이 지명들은 오늘날까지 기나사 땅에 남아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모미지는 차츰 마음이 거칠어져갔고, 교토로 가기 위한 군자금을 모으며, 무리를 모아 도가쿠시 산(戸隠山, 아라쿠라 산荒倉山)으로 들어가, 밤마다 다른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도가쿠시의 귀녀(鬼女)'라 불리게 된 그녀의 악명은 교토에까지 전해졌고, 모미지 토벌을 맡게 된 다이라노 고레모치는 사사다이라(笹平)에 진을 치고 출격했지만 모미지의 요술에 곤경을 치렀다. 신불에 매달린 고레모치는 관음보살에게 참배한 지 17일째 되던 날 꿈에 나타난 백발의 노승으로부터 항마(降魔)의 검을 받았고, 이번에는 귀녀를 토벌할 수 있다고 사기가 오른 고레모치의 군 앞에 모미지는 결국 목을 잃고 말았다. 구레하, 즉 모미지의 나이 33세 되던 때의 늦가을이었다.
6. 등장 작품
-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197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스게노 타다히코)
- 음양사(2020년, TV 아사히 계열, 배우: 오쿠다 타츠시)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문서
尊卑分脈
[3]
문서
[4]
문서
将門記
[5]
문서
貞信公記, 日本紀略
[6]
간행물
シンポジウム「日本歴史」5『中世社会の形成』
[7]
문서
勅撰作者部類
[8]
문서
将門記
[9]
문서
日本紀略
[10]
문서
園太歴
연문5년正月1日
[11]
문서
将門記
[12]
문서
扶桑略記
[13]
문서
帝王編年記
[14]
문서
貞信公記抄
[15]
서적
蜻蛉日記の研究
明治書院
1972
[16]
논문
"世ノ所謂淸和源氏ハ陽成源氏ニ非サル考-源朝臣經基の出自をめぐつて-"
聖学院大学総合研究所紀要
2003-01
[17]
웹사이트
経基射鹿事
https://dl.ndl.go.jp[...]
早稲田大学出版部
明45-大2
[1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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