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노노 도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노노 도후는 9세기 말부터 10세기 중반에 걸쳐 활약한 일본 헤이안 시대의 관료, 시인, 서예가이다. 그는 다이고, 스자쿠, 무라카미 천황 3대에 걸쳐 서예 서비스를 제공하며 명성을 얻었고, 특히 일본식 서예인 와요(和様)의 기초를 다졌다. 대표 작품으로는 지증대사 시호 칙서, 병풍 도대 등이 있으며, 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는 모습을 보고 서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94년 출생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는 세이와 겐지의 시조이며, 무사시노스케로 부임하여 호족과의 갈등을 겪고,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평정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진수부장군을 역임하고 신적강하를 명받았다.
  • 오노씨 - 오노노 고마치
    오노노 고마치는 헤이안 시대의 일본 여류 시인이자 《고금와카집》의 대표 시인 중 한 명으로, 와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그녀의 삶과 관련된 설화와 전설은 후대 문학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오노씨 - 오노노 다카무라
    오노노 다카무라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귀족, 학자, 시인으로, 사가 천황과의 불화로 유배를 겪었으나 학문과 예술적 재능으로 복귀하여 중용되었고, 율령 해석서 편찬에 참여했으며, 한시와 와카에 능해 여러 시가집에 작품이 실렸고, 설화 속에서는 염라대왕을 보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 967년 사망 - 무라카미 천황
    무라카미 천황은 헤이안 시대의 제62대 일본 천황으로, 재정 및 물가 안정과 문예 부흥을 통해 '덴랴쿠의 치'로 칭송받았으나 후지와라 씨 섭정 강화와 잦은 재난, 그리고 그의 후손인 무라카미 겐지의 궁정 정치 영향력 확대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
  • 967년 사망 - 이성 (당나라)
    이성은 오대 십국 시대부터 북송 초기에 활동한 화가로, 징하오와 관퉁에게 그림을 배워 독자적인 수묵 산수화풍을 발전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곽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오노노 도후
기본 정보
오노노 미치카제 초상
오노노 미치카제 (전 라이주 필, 가마쿠라 시대, 산노마루쇼조칸 소장)
시대헤이안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간표 6년 (894년)
사망고호 3년 12월 27일 (967년2월 9일)
관위정4위하・내장두
주군다이고 천황스자쿠 천황무라카미 천황 → 레이제이 천황
씨족오노 씨
부모아버지: 오노노 가즈라오
형제요시후루, 미치카제
자녀호토키, 나가노리, 호타다, 호묘, 기미토키
특기 사항일설에는 오노노 코마치의 종제

2. 생애

小野 道風|오노노 미치카제일본어(통칭 오노노 도후)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뛰어난 서예가이자 관료, 시인이었다. 그는 궁정 시인 오노노 다카무라의 손자로, 현재의 아이치현 가스가이시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미치카제는 다이고 천황, 스자쿠 천황, 무라카미 천황 세 명의 천황 재위 기간 동안 궁정에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27세의 젊은 나이에 황실의 주요 건물인 세이료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의 서예는 일본을 넘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는데, 927년 다이고 천황은 승려 칸켄이 중국으로 갈 때 미치카제의 작품 두루마리 두 점을 주어 그의 서예를 널리 알리도록 권하기도 했다[19].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궁정 내 다양한 서예 관련 업무를 수행했지만, 때로는 직무 태만이나 절차 미준수로 인해 벌금을 내거나[21] 관직을 박탈당하는[22]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안질(노인성 백내장으로 추정)로 인해 시력이 크게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10] 서예가로서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

코호 3년(966년) 12월 27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최종 관위는 正四位下行内蔵権頭|정4위하 행 내장권두일본어였다.

2. 1. 출생과 가계

오노노 미치카제(道風, 도후)는 현재의 아이치현 가스가이시에서 궁정 시인이었던 오노노 다카무라의 손자로 태어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후가 오와리국 카스가이군 카미조(현재의 아이치현 카스가이시 마츠카와도)에 머물던 중, 그곳의 촌녀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는 전승도 있다.[2] 이 이야기는 사료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에도 시대인 18세기에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2]

아버지는 오노노 구즈히로(小野 葛紘)이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오노노 다카무라
아버지오노노 구즈히로
어머니오와리국의 촌녀 (전승)[2]
아들오노노 무네토키
아들오노노 나가노리
아들오노노 무네타다
아들오노노 무네아키
아들오노노 기미토키


2. 2. 관직 생활과 서예 활동

오노노 미치카제는 궁정 시인이었던 오노노 다카무라의 손자로, 현재의 아이치현 가스가이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관료이자 시인, 서예가로서 다이고 천황(재위 897년 ~ 930년), 스자쿠 천황(재위 930년 ~ 946년), 무라카미 천황(재위 946년 ~ 967년) 세 명의 천황에게 봉사했다. 그의 서예 실력은 뛰어나 27세에는 황실 거처인 세이료덴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한편, 오노노 도후가 오와리국 카스가이군 카미조(현재의 아이치현 카스가이시 마츠카와도)에 머물 때, 그곳의 여성을 어머니로 하여 도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전승도 있다[2]. 이는 사료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에도 시대인 18세기에는 이미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이다.

=== 다이고 천황 시대 ===

다이고 천황 시대인 엔기 5년(905년), 12세의 나이로 다이조에의 병풍에 쓰일 글씨(색지형)를 쓰며 공식적인 서예 활동을 시작했다[3]. 엔기 20년(920년)에는 뛰어난 서예가(능서)로 선발되어 히구로도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엔기 21년(921년)에는 우효에노쇼조가 되었다. 엔초 3년(925년) 쇼나이키가 되었으며, 같은 해 간슈지에서 열린 다이고 천황의 생모 후지와라 타네코의 법요에서 공양 원문인 법화경의 청서를 맡으며 궁정 내 서예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19].

엔초 4년(926년), 고후쿠지의 승려 칸켄이 당나라로 갈 때, 일본의 문예 수준을 알리기 위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등의 한시와 함께 도후가 쓴 행서초서 각 1권을 가져갔다[19]. 이는 그가 이미 일본을 대표하는 서예가였음을 보여준다. 다이고 천황 시대의 주요 서예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엔초 5년(927년) 2월: 다이나곤 후지와라 키요츠라의 60세 축하연에서 오노 타다노리와 함께 금은니 그림 색지에 『법화경』, 『약사경』 등을 씀[4].
  • 엔초 5년(927년): 다이고 천황은 도후의 뛰어난 서예 실력을 인정하여 그의 작품 두루마리 두 개를 승려 간켄에게 주며 중국으로 가져가 소개하도록 함.
  • 엔초 5년(927년) 12월: 엔친에게 지쇼다이시 시호를 내리는 칙서를 정서(지쇼다이시 시호 칙서).
  • 엔초 6년(928년) 6월: 세이료덴 남쪽 벽에 나라와 당나라 명군들의 덕행을 휘호[5].
  • 엔초 6년(928년) 12월: 내리의 병풍 6첩에 오에노 아사츠나의 한시를 정서[6]. 이는 『병풍토대』로 알려져 있다.
  • 엔초 6년(928년): 다이고지의 서대문과 동대문 액자를 휘호. 남대문에는 도후의 초서를 걸었는데, 자신의 특기인 초서를 선택한 다이고 천황의 안목에 도후는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엔초 7년(929년) 9월: 시신덴 장지의 현신상 명칭을 고쳐 씀[7].


=== 스자쿠 천황 시대 ===

스자쿠 천황 시대에는 종5위하에 서임되고 내장권조와 우에몬사를 역임했다. 이 시기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조헤이 2년(932년) 11월: 다이조사이에서 병풍 글씨를 휘호[8].
  • 조헤이 3년(933년) 8월: 코우시 내친왕의 모착(성인식)에서 병풍 글씨를 휘호.
  • 텐케이 2년(939년) 11월: 『지카쿠다이시전』을 서사.
  • 텐케이 5년(942년) 4월: 다이고지 석가당의 문액을 휘호.


=== 무라카미 천황 시대 ===

무라카미 천황 시대에 들어선 텐케이 9년(946년), 우에몬후의 관리가 직무 태만으로 카이쇼몬을 열지 않아 처벌받을 때, 우에몬사였던 도후도 연대 책임을 물어 속동 2근의 벌금을 내게 되었다[21]. 다음 해인 텐랴쿠 원년(947년)에는 병가를 알리지 않고 행사에 불참하여 관직을 박탈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2]. 이후 활동은 다음과 같다.

  • 텐랴쿠 3년(949년) 11월: 병풍 색지에 『곤겐록』의 시 20수를 씀.
  • 텐랴쿠 7년(953년) 8월: 스자쿠인 어주기 공양에서 『목록 외 26권』을 분담 집필.
  • 텐랴쿠 8년(954년) 8월: 문장박사 타치바나노 나오모토가 민부대보 겸임을 청하는 글을 정서.
  • 텐토쿠 원년(957년): 우대신 후지와라 모로스케의 향연(다이쿄)에서 병풍 글씨를 씀.


텐토쿠 2년(958년) 정월, 도후는 야마시로노카미나 오미곤노카미 임관을 청하는 글을 무라카미 천황에게 올렸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글은 헤이안 시대 대표 시문집 『본조문수』에 실렸다[9]. 같은 해 3월, 새로운 화폐(겐겐다이호) 주조 시 글씨를 써야 했으나, 안질(노인성 백내장으로 추정)이 심해져 세자를 쓰기 어려워졌다[10].

그럼에도 서예가로서의 명성은 여전하여, 텐토쿠 3년(959년) 5월에는 조벽문 액자를 휘호했다. 8월 세이료덴 시합에서는 관례를 깨고 무라카미 천황의 명으로 좌우 양측의 시를 모두 도후가 정서하게 되었다. 우방의 시는 우효에노카미 미나모토노 노부미츠가 억지로 술을 대접하며 쓰게 했다고 전해지나, 이때의 글씨 역시 "능서의 극치", "의의 재생"이라는 극찬을 받았다[11].

텐토쿠 4년(960년) 9월, 내리화재가 발생했다[12]. 무라카미 천황은 도후가 쓴 타치바나노 나오모토의 글을 아껴 화재 속에서도 "나오모토의 글은 꺼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내리 재건 계획이 세워지자, 목공두(모쿠료노카미)였던 도후는 건강 악화로 격무를 감당하기 어려워 10월 초 나이조곤노카미로 전임되었다[13]. 오와 원년(961년)에는 재건된 내리의 쇼묘몬 액자 등을 휘호했다[13].

코호 3년(966년) 12월 27일, 73세의 향년으로 졸거했다. 최종 관위는 정4위하 행 내장권두였다. 사망할 무렵에는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 관직 경력 ===

중규자(中圭子)의 「오노노 도후」(小野道風)에 따른 주요 관직 경력은 다음과 같다[19].

연도날짜내용
엔기 20년 (920년)5월 5일비장인, 승전 허가
시기 불명정7위 하 서임
엔기 21년 (921년)3월 13일우효에노쇼조 임관
시기 불명정7위 상 승진
엔초 3년 (925년)8월쇼나이키 임관
시기 불명종5위 하 서임
텐교 2년 (939년)날짜 불명나이조곤노스케 임관
텐교 4년 (941년)3월 28일우에몬노사 임관?[20]
시기 불명종5위 상 승진
텐교 9년 (946년)8월 7일속동 2근 처벌[21]
시기 불명지주 겸임
텐랴쿠 원년 (947년)12월 20일관직 박탈(해관)[22]
텐토쿠 원년 (957년)1월 18일모쿠료노카미 겸임
텐토쿠 2년 (958년)1월 11일종4위 하 승진[23]
텐토쿠 4년 (960년)날짜 불명정4위 하 승진
텐토쿠 4년 (960년)10월 9일나이조곤노토 전임
코호 3년 (966년)12월 27일졸거 (최종 관위: 정4위 하 행 내장곤노토) (일본기략 기록 기준. 일차기사는 11월 15일로 기록)


2. 3. 사망

오노노 도후는 사망할 무렵 시력을 많이 잃었다. 고호 3년(966년) 12월 27일 졸거하였다. 향년 73세였으며, 최종 관위는 정사위하행내장권두였다.

3. 업적과 작품

오노노 미치카제(小野 道風|오노노 미치카제일본어)는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중국 동진왕희지, 왕헌지 등의 서풍을 기반으로 일본적인 감각을 더해 독자적인 와요(和様) 서풍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서체는 중국 서예의 기법을 따르면서도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이는 후대 일본 서예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치카제의 서예는 생전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 "왕희지의 재림"으로 칭송받았다. 『겐지 이야기』에서도 그의 글씨를 "당대의 유행에 맞고 아름다워 눈부시게 보인다"고 묘사할 정도였다.[14] 사후에는 '서도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일본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은 일부 한자 서예 작품들이며, 이 외에도 여러 작품이 그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그는 칙찬 가인으로서 『고센 와카슈』에 와카 5수가 실려 있기도 하다.[18] 그의 서풍과 업적은 후지와라노 스케마사,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등 후대의 명필들에게 계승되어 와요 서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 1. 와요(和様) 서풍의 확립

병풍에 새겨질 비문 초고


옥천장 서두


오노노 미치카제(小野 道風일본어)는 5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서예를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발전시키는 첫걸음을 내디딘 인물이다. 그의 서체는 동진 시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왕헌지("이왕")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진나라 서풍의 부드러움과 당나라 서풍의 웅장함을 결합한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고전적인 필법을 엄격하게 따르기보다는 개별 글자 안에서 획 굵기의 변화를 줄여, 보다 온화하고 조화로운 느낌을 주는 독자적인 행서 필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미치카제의 서풍은 일본식 서예, 즉 '와요'(和様일본어)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는 중국식 서예인 '가라요'(唐様일본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와요 서풍은 이후 후지와라노 스케마사(藤原佐理)와 후지와라노 유키나리(藤原行成)와 같은 뛰어난 서예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순수한 일본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았고, 19세기 중반까지 그 명맥을 이어갔다.

미치카제가 쓴 가나 서예 작품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수의 한자 작품이 그의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하게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확실한 증거는 부족한 예로는 도쿄 황실 소장품인 병풍 비문 초고(屏風土代일본어)가 있다. 이 초고는 행서체로 쓰여졌으며, 동시대 문인인 오에노 아사츠나(大江朝綱)가 지은 시 10편을 담고 있다.

같은 소장품에는 당나라 시인의 시를 담은 '옥천장'(玉泉帖일본어) 두루마리 등 그의 다른 걸작들도 포함되어 있다. 미치카제는 또한 헤이안 시대의 여러 유명 서예 작품 모음인 고필절(古筆切) 제작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는 초기 헤이안 시대의 시집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제12권 '사랑의 시' 부분에 수록된 와카 49수를 담은 두루마리가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11통의 편지가 전해지며, 그중 한 편지에서는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뛰어난 서예가로서 미치카제의 명성은 생전부터 매우 높았다. 당시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를 "왕희지의 재림"이라 칭송했다. 『겐지 이야기』에서도 그의 글씨에 대해 "당대의 유행에 맞고 아름다워 눈부시게 보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14] 사후에는 그 평가가 더욱 높아져 '서도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한편, 미치카제는 동시대의 고승이자 서예가인 구카이가 쓴 현판 글씨에 대해 "미후쿠몬(美福門)은 밭이 넓고, 주자쿠몬(朱雀門)은 쌀 참새 문, 다이코쿠덴(大極殿)은 불 극전"이라고 비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5] 이는 구카이가 힘찬 필력과 기세를 중시한 반면, 미치카제는 글자 모양의 정돈과 조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예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글씨가 천황과 귀족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도 해석된다.[16]

만년에는 건강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17] 중풍으로 고생했으며, 65세 무렵부터는 시력이 나빠지고 67세 무렵에는 언어 구사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이후 미치카제의 글씨는 젊은 시절의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필선과는 다른, 다소 위축되고 떨리는 듯한 특징을 보이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도후의 낡은 붓"(道風の枯れ筆일본어)이라 부른다.

칙찬 가인(勅撰歌人)으로서 『고센 와카슈』(後撰和歌集)에 그의 와카 5수가 수록되어 있다.[18]

3. 2. 주요 작품



오노노 미치카제(小野道風|오노노 미치카제일본어)는 5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서예를 일본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동진(東晉)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왕헌지 부자(이왕)의 서체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미치카제의 행서(行書)는 진(晉)나라 서풍의 부드러움과 당(唐)나라 서풍의 웅장함을 결합하면서도, 고전적인 필법에 엄격하게 얽매이지 않아 획 굵기의 변화가 덜 역동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일본 고유의 서예 양식인 '와요(和様)'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후지와라노 스케마사와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와 같은 대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와요는 순수한 일본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아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미치카제의 가나 서예 작품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수의 한자 작품이 그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확실하게 그의 작품으로 증명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것 중 하나는 도쿄 황실 소장품인 병풍 비문 초고이다. 이는 행서체로 쓰였으며, 동시대 인물인 오에노 아사쓰나가 지은 시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소장품에는 당나라 시인의 시를 담은 '옥천첩(玉泉帖)' 두루마리 등 다른 걸작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헤이안 시대의 여러 유명 서예 작품 모음인 고필절(古筆切) 중 일부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시집인 『고킨와카슈』 제12권 '사랑의 시'에 수록된 와카 49수를 담은 두루마리도 포함된다. 그의 말년 작품으로는 11통의 편지가 있으며, 그중 한 편지에서는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치카제의 작품은 웅혼하고 풍부하며 온화하고 뛰어난 특징을 지닌다. 특히 그의 초서는 상쾌하고 절묘함이 극치에 달해 그 필적을 '야적(野跡)'이라고 부른다. 다이고 천황은 그의 서예를 깊이 아껴 다이고지의 방과 행초 법첩 각 1권을 쓰게 하기도 했다.

=== 주요 작품 목록 ===

작품명소장처특징비고
삼체 백씨 시권 (三体白氏詩巻)마사키 미술관백씨문집의 시 6수를 해서, 행서, 초서 세 가지 서체로 쓴 작품. 현재 8장이 한 권으로 남아 있으며, 각 서체별로 2수씩 구성되어 있다. 후시미노미야 사다아쓰 친왕의 기록(1529년)에 따르면 당시 이미 현재의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국보
지증대사 시호 칙서 (智証大師諡号勅書)도쿄 국립 박물관891년에 입적한 엔랴쿠지 제5대 좌주 엔친에게 927년 지증대사라는 시호를 내리는 칙서. 글은 식부대보 후지와라노 히로후미가 짓고, 미치카제가 34세 때 썼다. 남색 단지(檀紙)에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굵고 탄력 있는 글씨가 특징이다.국보
병풍 도대 (屏風土代)산노마루 쇼조칸도대는 밑그림을 의미하며, 궁중 내리(内裏)에 장식할 병풍에 쓸 한시의 초고이다. 928년 미치카제가 35세 때 칙명을 받아 쓴 것으로, 오에노 아사쓰나가 지은 율시 8수와 절구 3수가 담겨 있다. 헤이안 시대 말기의 서예가 후지와라노 사다노부가 미치카제의 진품임을 확인했다. 권자본 형식의 행서 시권으로, 저지(楮紙)에 쓰였다. 글자 옆에 작게 쓴 글씨들은 글자체를 다양하게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서풍은 화려하고 온화하며 장중하고 필력이 넘친다.
옥천첩(玉泉帖)산노마루 쇼조칸백씨문집의 시를 미치카제가 흥에 겨워 쓴 권자본. 권의 시작 부분이 "옥천남간화기괴(玉泉南澗花奇怪)" 구절로 시작되어 이 이름이 붙었다. 해서, 행서, 초서를 섞어 썼으며, 글자 크기와 굵기 변화가 풍부하다.
견지절 (巻子切)도쿄 국립 박물관 외 분장미치카제의 작품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 전승 필자 작품 ===

다음 작품들은 예로부터 미치카제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으나, 현대 연구에서는 그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 '''계색지(継色紙)'''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기노 쓰라유키 필 전승인 촌송암색지 및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필 전승인 승색지와 함께 '''삼색지'''로 불리며, 가나 고필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색지 형태의 종이 두 장을 이어 붙인 것에 옛 노래 한 수를 흘려 쓴 형태이다. 자색, 남색, 주색, 녹색 등으로 물들인 종이에 흰색도 섞인 점엽본(粘葉本)의 일부이다.
  • '''추국첩 (秋萩帖)'''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아키하기노(安幾破起乃)..."라는 구절로 시작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초가나(草仮名)의 대표적인 명품으로, 히라가나로 변화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0세기 말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국보)
  • 혼아미 절 (本阿弥切)
  • 아이치 절 (愛知切)
  • 아야지 절 (綾地切)
  • 코지마 절 (小島切)
  • 오치 절 (越智切)
  • 하치만 절 (八幡切)

4. 일화

능서(能書, 뛰어난 서예가)로서 도후의 명성은 생존 당시부터 높았으며, 당시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희지의 부활"이라고 칭송받았다. 『겐지 이야기』에서는 도후의 글씨를 "당대의 유행에 맞고 아름다워 눈부시게 보인다"라고 평하기도 했다.[14] 사후에는 그 평가가 더욱 높아져 '서도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만년에는 건강이 나빠져 고생했는데,[17] 중풍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65세 무렵부터는 눈이 나빠지고, 67세 무렵에는 언어 사용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이후 도후의 글씨는 이전의 시원하게 뻗는 선 대신 다른 특징을 보이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도후의 낡은 붓"이라고 부른다.

칙찬 가인(勅撰歌人, 천황의 명으로 와카집에 작품을 수록한 시인)으로서, 그의 와카 5수가 『고센 와카슈』(後撰和歌集)에 실려 있다.[18]

4. 1. 개구리와 버드나무

오노노 도후(小野道風)가 자신의 재능 부족을 느끼며 서예를 그만두려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어느 오는 날, 산책을 나갔다가 버들나무에 뛰어오르려고 애쓰는 개구리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개구리는 계속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뛰어올랐다. 도후는 처음에는 "저렇게 높은 가지에 닿을 리가 없는데, 어리석은 개구리로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버드나무 가지가 휘어졌고, 개구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침내 버드나무 가지 위로 뛰어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 광경을 본 도후는 "정작 어리석었던 것은 나 자신이구나. 저 개구리는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기회를 만들어냈는데, 나는 그동안 저 개구리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라고 깊이 반성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도후는 다시 서예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중기의 조루리 작품인 『오노노 도후 아오야기 스즈리』(小野道風青柳硯, 1754년)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의 국정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고,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전후 도덕 교육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회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특히 화투의 패 중 하나인 '버드나무에 오노노 도후'(비광)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다. 화투에 오노노 도후 그림이 사용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로 추정된다. 현대에는 도메이 고속도로와 나고야 제2 환상 자동차도가 지나는 아이치현 가스가이시의 카운티 사인에도 이 그림이 사용되고 있다.

4. 2. 구카이(空海)와의 비교

오노노 도후가 구카이가 쓴 현판 글씨에 대해 "미후쿠몬은 밭이 넓고, 주자쿠몬은 쌀 참새 문, 다이코쿠덴은 불 극전"이라고 비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5] 이는 구카이가 필력과 필세를 중시한 반면, 도후는 글자 모양의 정돈과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예에 대한 자세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글씨가 천황과 귀족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도후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6]

5. 평가와 영향

능서로서 오노노 도후의 명성은 생존 당시부터 높았으며, 당시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희지의 부활"이라고 칭송받았다. 『겐지 이야기』에서는 도후의 글씨를 평하여 "당대의 유행에 맞고 아름다워 눈부시게 보인다" (의역)라고 말하고 있다[14]. 사후 그 평가는 더욱 높아져 '서도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구카이가 쓴 현판 글씨에 대해 "미후쿠몬은 밭이 넓고, 주자쿠몬은 쌀 참새 문, 다이코쿠덴은 불 극전"이라고 비판했다는 일화가 있다[15]. 이는 구카이가 필력과 필세를 중시한 반면, 도후는 글자 모양의 정돈과 조화를 중요시했다는 서예에 대한 자세의 차이, 그리고 도후의 글씨가 천황과 귀족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았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16].

만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매우 고생했다[17]. 중풍으로 고생한 듯하며, 65세쯤부터 눈이 나빠지고, 67세쯤에는 언어까지 불편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도후의 글씨는 시원하게 뻗는 선이 아니라, 후세에는 이를 "도후의 낡은 붓"이라고 부른다.

칙찬 가인으로서 『고센 와카슈』에 5수의 와카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18].

교토에는 그의 영혼을 기리는 신사가 있는데, 그의 신성한 영혼은 그 지역의 여성들을 출산 중에 보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후다 카드에는 11월에 해당하는 카드에 미치카제가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미치카제는 '아메시코(雨四光)' "비 오는 4개의 빛" '''야쿠'''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 2000년 10월 20일에는 미치카제가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80JPY짜리 "버드나무와 개구리" 우표가 발행되었다.

6. 유적

오노노 도후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몇 군데 있다.

7. 기타


  • 2000년 10월 20일에는 오노노 도후가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80JPY짜리 "버드나무와 개구리" 우표가 발행되었다.
  • 하나후다 카드 중 11월에 해당하는 카드에는 오노노 도후가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카드는 '아메시코(雨四光)' 즉 "비 오는 네 개의 빛"이라는 야쿠(役)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
  • 교토에는 그의 영혼을 기리는 신사가 있으며, 이곳의 신성한 영혼은 그 지역 여성들의 순산을 돕는다고 여겨진다.
  • 《집고랑화첩》(道風의 소식을 모아 목판으로 모각하여 간행한 것)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Ono no Michikaze • . A History . .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2-03-25
[2] 서적 『麟麟抄』巻6
[3] 논문 中[1990: 5]
[4] 서적 『扶桑略記』延長5年2月25日条
[5] 서적 『日本紀略』延長6年6月21日条
[6] 서적 『日本紀略』延長6年12月条
[7] 서적 『日本紀略』延長7年9月条
[8] 서적 『帝王編年紀』
[9] 서적 『本朝文粋』巻第六
[10] 서적 『日本紀略』天徳2年4月7日条
[11] 서적 『天徳三年八月十六日闘詩行事略記』
[12] 서적 『日本紀略』天徳4年9月28日条
[13] 서적 『扶桑略記』
[14] 서적 『源氏物語』絵合
[15] 서적 『古今著聞集』『源平盛衰記』『太平記』
[16] 논문 中[1990: 10]
[17] 서적 『集古浪華帖』
[18] 서적 『勅撰作者部類』
[19] 논문 中[1990: 6]
[20] 서적 『衛門府補任』
[21] 서적 『政事要略』巻82
[22] 서적 『九暦』
[23] 서적 『本朝文粋』巻第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