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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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호산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고, 중국 공산당 활동을 거쳐 한국 전쟁에 참전한 북한의 군인이다.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시작했으며,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서 활동하고, 국공 내전에 참전했다. 1949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제6사단 초대 사단장을 역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한강을 최초로 도하하고 충청도와 호남 지역을 점령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1950년 제5군단장에 임명되었으나, 1959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으며, 뛰어난 중국어 및 러시아어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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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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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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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방호산 |
한자 표기 | 方虎山 |
로마자 표기 | Bang Ho-san |
출생 | 1916년 |
출생지 | 간쿄쿠호쿠도(함경북도), 한국, 일본 통치 시대 |
사망 | 미상 |
소속 정당 | 중국 공산당 조선로동당 |
충성 | 중국 공산당 |
최종 계급 | 대장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1940년 – 1951년 |
소속 군 | 팔로군 중국 인민해방군 |
주요 참전 | 한국 독립 운동 만주국 토벌 국공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폭풍 작전 개성-문산 전투 고랑포 전투 옹진 전투 김포반도 전투 봉일천 전투 오류동 전투 신사동-과천 전투 시흥-안양-수원 전투 제1차, 2차 원주 전투 마산 전투 남강 전투 노치 전투 하동 매복 배틀 마운틴 전투 부산 방어선 전투 하만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
중국 인민해방군 시절 정보 | |
소속 부대 |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 |
조선인민군 시절 정보 | |
소속 부대 | 조선인민군 제6사단 |
최종 계급 | 조선인민군 육군 상장 |
훈장 | 공화국2중영웅 |
2. 생애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10][1] 이명은 '''이천부'''(李天夫)이다. 만주사변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유격대에 합류하여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10]
1939년 연안으로 이동하여 항일군정대학을 수료하고 팔로군 등에서 활동했으며, 1945년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지도원을 맡았다.[10] 광복 후에는 만주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며 국공 내전에 참전했다.[10][1]
1949년 7월,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을 이끌고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제6사단을 창설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제6사단을 지휘하여 한강을 최초로 도하하고 호남 지역을 석권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으나, 점령 과정에서 양민 학살에 관여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1][12] 그의 부대는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도 하동 전투, 마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대를 이끌고 성공적으로 북으로 후퇴했다. 이러한 공로로 국기훈장 제1급과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2][1]
1950년 10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했으며, 특히 피의 능선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후 작전 방침을 두고 김일성과 마찰을 빚어 군단장직에서 해임되고 군사대학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후 군사대학 학장으로 활동하던 중, 현리 전투 교재 편찬 문제와 관련하여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54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지방 광산으로 좌천되었다. 결국 1959년 연안파 숙청 사건인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1]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나 시점은 불분명하다.
2. 1. 초기 생애 및 항일 무장 투쟁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10][1] 이명은 '''이천부'''(李天夫)이다. 만주사변 직후 중국에서 헤이룽장성 미산현 유격대(동북항일연군 제4군의 전신)에 합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3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식민지반식민지이익연구학원)에서 공부했다.[10]1939년 연안으로 이동한 뒤 1940년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 과정을 수료했다.[10] 이후 팔로군 제359여단에 배속되었고, 중공 중앙 해외사업위원회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1942년에는 중공 중앙 해외위원회 연구반 조선조에서 근무했다.
1943년부터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활동했고, 1945년 2월 정식 개교 시에는 제1구대 지도원(협리원)을 맡았다.[10]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 제1지대(지대장 김웅)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 증강과 조선인 보호 활동 등을 벌였다.[10] 제1지대는 이후 동북야전군 독립 제4사(사단장 최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사단장 류자이)로 개편되었고, 방호산은 계속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국공 내전에 참전하였다.[10]
2. 2. 중국 국공 내전 참전 및 북한 귀국
1945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지대장: 김웅)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를 증강하고 조선인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제1지대는 이후 동북야전군 독립 제4사(사단장: 최자인)를 거쳐 1948년에는 제166사(사단장: 류자이)로 개편되었으며, 방호산은 이 과정에서 계속 정치위원을 맡았다.[1]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 국공 내전에 참전하였다.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군대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1949년 3월 18일에 체결된 중조비밀군사협정에 따라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부대들이 북한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7월, 방호산은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서 부대를 이끌고 신의주시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북한으로 귀국한 제166사단은 북한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방호산은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이 부대는 국공 내전을 통해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계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합류는 북한군의 전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2. 3. 한국 전쟁 참전
1949년 7월,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단장으로서 휘하의 조선족 병력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방호산은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제6사단을 지휘하여 김포반도를 통해 한강을 가장 먼저 건넜다. 이후 충청남도와 호남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휘하 부대와 빨치산을 동원하여 점령 지역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했다는 비판이 있다.[11][12] 제6사단은 진주, 마산까지 진격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근위사단' 칭호를 받았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지금까지 한국 전쟁에서 최고의 기동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3]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도 제6사단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동 전투에서는 미국 육군 제29연대 제3대대를 교묘한 매복으로 격파했으며, 이 전투에서 당시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이 전사했다. 미군은 이 매복 공격을 '하동의 함정'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또한 마산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화력의 미 제25사단(킨 특수임무부대)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고, 봉암리에서는 야간 기습으로 미군 포병대대에 큰 피해를 입혀 '피의 계곡', '포병의 무덤'이라는 별칭을 남겼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대부분의 북한군 부대가 와해되었으나, 방호산의 제6사단은 부대 편제를 유지하며 오히려 흩어진 병력을 흡수했다. 이들은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산악로를 통해 북쪽으로 성공적으로 후퇴하여 1950년 11월 초 자강도에서 중국인민지원군과 합류했다. 이러한 공로로 방호산은 조선인민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2]
1950년 10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했다.[13] 제5군단장으로서 1951년 정월 공세, 현리 전투 등에 참전했다. 특히 1951년 여름과 가을, 미 제10군단의 공세에 맞서 피의 능선 전투 (Bloody Ridge영어)와 단장의 능선 전투 (Heartbreak Ridge영어)에서 완강하게 저항하여 유엔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3][4][5] 그러나 이 전투들로 제5군단 역시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이후 작전 방침을 놓고 김일성과 대립하다가 군단장직에서 해임되어 군사대학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그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투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6월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1]
2. 4. 숙청
한국 전쟁 이후 작전 문제를 놓고 김일성과 의견 대립을 보였다. 방호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투 방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로 인해 제5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군사대학 원장으로 임명되었다.[10][1][3][4][5]1953년, 김일성의 이름을 딴 군사대학이 설립되자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한국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 이론 교재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1951년 5월의 현리 전투를 주제로 선정했다. 작전전술학 강좌장인 김동수 대령에게 교재 제작을 맡겼고, 김동수는 당시 작전국장 유성철, 지휘관이었던 김웅, 방호산, 최아립 등을 직접 만나 상세한 자료를 수집하여 교재를 완성했다. 이 교재는 총참모부의 심사와 총참모장 김광협, 민족보위상 최용건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1954년 여름, 군사대학에 대한 집중 검열 과정에서 현리 전투 교재에 김일성의 지도적 역할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김동수는 당에서 쫓겨나고 군적을 박탈당한 채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방호산은 김동수에 대한 처벌이 부당하다고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김동수가 아오지로 떠나기 전날, 방호산과 동료들은 그를 위해 송별회를 열어 위로했다.
이 송별회 사실이 상부에 보고되면서 방호산은 당 중앙위원회에 불려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동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당시 당의 잘못된 풍조를 비판하며 김일성의 방침을 따를 수 없다고 발언했다. 결국 방호산은 학장직에서 해임되고 군적마저 박탈당했으며, 함경남도 단천군의 검덕 광산 후방부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떠날 때 장교와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그의 이임을 막으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후 그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여정은 1955년 여름, 평양에서 열린 중공업 회의에 참석하러 온 방호산을 만났다고 증언했다.
최종적으로 방호산은 1959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1]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설[1], 박일우, 김강과 함께 비밀리에 처형되었다는 설, 또는 병 치료를 핑계로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설 등이 존재하지만,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1]
3. 평가
방호산은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6] 미국 정보기관 및 동료들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부하들을 아끼는 지휘관이었으며[7] 중국어와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8] 연안파 동료 여정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중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비판과 함께, 전후 북한의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1]
3. 1. 긍정적 평가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6]미국 정보부 및 극동군 정보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매우 조용하고 공정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부하들을 세심하게 보살펴 그들로부터 높은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7] 인민군 최고의 군단장이자 일류 전략가로 평가받았으며, 부하들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가이자 사령관으로 여겨졌다. 침투, 후방 공격, 야간 기습과 같은 중국식 전술에 능숙했고, 백병전을 선호하면서도 무모한 인해전술은 피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또한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다.[8]
제6사단 정치보위부 책임 장교였던 최태환은 방호산이 무관보다는 문관의 향기가 풍기는 선비형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연안파 동료였던 여정은 그를 '조국해방전쟁(한국 전쟁)의 실질적인 최고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방호산이 지휘했던 제5군단은 지휘관들이 굳게 단결했고, 장교와 병사 간의 관계가 마치 친형제처럼 끈끈했다고 전해진다. 군단장 방호산을 비롯해 군사위원 윤공흠, 김강, 참모장 심청, 포병사령관 조세걸, 후방 부사령관 박민, 군사 부사령관 이방남, 근위 제6사단장 홍림, 안동 제12사단장 최아립 등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출신의 중견 간부들이었으며, 중하급 지휘관과 병사들 역시 국공내전 참전 경험이 풍부한 인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5군단은 당시 인민군 내부에 만연했던 경직되고 형식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혁명군다운 동지애가 넘치는 부대 분위기를 유지했다고 평가받는다.
3. 2. 부정적 평가
한국 전쟁 중 제6사단을 이끌면서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비판이 있다. 방호산의 지휘 아래 있던 제6사단과 유격대는 충청남도와 호남 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전쟁 중 발생한 심각한 반인륜적 행위로 평가된다.전쟁 이후 북한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1958년 8월 육군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반당 혐의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1] 이는 당시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과 숙청 과정에서 희생된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1]
4. 기타
한국 전쟁 당시 미 육군 워커 장군은 방호산이 이끈 제6사단의 기동을 높이 평가하며 "지금까지 한국 전쟁에서 최고의 기동이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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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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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6·25 ⑬공산군의 패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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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김포 6.25 전쟁 비사:증언으로 본 김포현대사 명암
김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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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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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6·25 징비록>-43 '김일성의 평양 집무실 가보니, 김일성은 달아나고 서류만 어지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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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 to November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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