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너스 아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보너스 아미는 1932년 대공황 시기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정부가 약속한 보너스 조기 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 D.C.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참전 용사들은 1924년 제정된 법에 따라 20년 만기 서비스 증서를 받았으나, 대공황으로 인해 즉각적인 현금 지급을 원했다. 시위는 1932년 6월 상원에서 보너스 지급 법안이 부결된 후 격화되었고,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참전 용사 지원 법안 통과와 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지원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32년 7월 - 1932년 하계 올림픽
1932년 하계 올림픽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올림픽으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올림픽 선수촌과 승리 시상대 도입, 사진 판독 장치 사용 등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 1932년 7월 - 프로이센 쿠데타
프로이센 쿠데타는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수상의 주도로 프로이센 자유주의 주 정부가 강제 해산된 사건으로, 중앙 정부 권력 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 쇠퇴, 나치당 권력 장악에 영향을 미쳤다.
보너스 아미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명칭 | 보너스 아미 분쟁 |
주요 원인 | 대공황으로 인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의 경제적 어려움 |
목표 | 퇴역 군인 예치금의 조기 지급 (패트먼 보너스 법안) 실현 |
방식 | 시위 |
결과 | 보너스 아미 해산 요구 거부 허버트 후버의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패배 |
시위 정보 | |
날짜 | 1932년 7월 28일 |
장소 | 워싱턴 D.C. |
구글 지도 검색어 | 워싱턴 D.C. |
원인 | 대공황으로 인한 제1차 세계 대전 퇴역 군인의 빈곤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보너스 아미 |
교전 세력 2 | 미국 육군 워싱턴 D.C. 경찰 |
지휘관 및 지도자 | |
보너스 아미 | 월터 W. 워터스 (퇴역 부사관) |
미국 육군 | 허버트 후버 더글러스 맥아더 조지 S. 패튼 |
병력 규모 | |
보너스 아미 | 퇴역 군인 17,000명, 기타 26,000명 |
미국 육군 | 보병 500명 기병 500명 M1917 경전차 6대 경찰 800명 |
피해 규모 | |
보너스 아미 | 첫날 2명 사망, 55명 부상, 총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음 |
미국 육군 | 경찰 최소 69명 부상 |
이미지 | |
![]() |
2. 배경
미국 역사에서 참전 군인에 대한 보상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미국 독립전쟁 직후인 1781년, 많은 대륙군 병사들이 급여를 받지 못한 채 제대했다. 2년 뒤인 1783년에는 수백 명의 펜실베이니아 참전 용사들이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로 행진하여 의회 의사당을 포위하고 미지급된 급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의회는 프린스턴으로 피신했고, 몇 주 후 미국 육군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55][2]
전쟁 참전 용사에게 복무 기간 동안의 급여와 민간에서 일했을 경우 벌었을 소득의 차액을 보상하는 '보너스' 제도는 177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장애 퇴역 군인 지원 및 복무 중인 군인 보상을 규정한 영국 법률에서 유래한 것으로[2], 독립 전쟁 중 조지 워싱턴의 지지를 받으며 점차 확대되었다.[2] 초기에는 토지와 현금으로 보상이 이루어졌으나, 가용 토지 부족 문제로 점차 현금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용사들은 이러한 보너스를 받지 못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는 초기에 60USD의 보너스만 지급되면서[3] 보상 문제가 다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1919년 설립된 미국 재향 군인회(American Legion)는 참전 용사들에 대한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정치 운동을 주도했다.[4]
1924년, 의회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 추가 보너스를 지급하는 내용의 '조정된 복무 증서 법(Adjusted Service Certificate Law)' 또는 '제1차 세계 대전 보상법(World War Adjusted Compensation Act)'을 제정했다.[5] 당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애국심... 사고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라며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의회는 이를 무효화했다.[5] 이 법은 참전 용사들에게 복무 기간과 장소에 따라 계산된 금액을 증서 형태로 지급하고, 1945년에 현금으로 상환하기로 약속했다.[6]
하지만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극심한 침체에 빠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수많은 참전 용사들이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게 되자, 1945년까지 기다리지 않고 약속된 보너스를 즉시 현금으로 지급해 달라는 요구가 거세졌다.[7] 해외 참전 용사회(Veterans of Foreign Wars) 등 참전 용사 단체들은 연방 정부에 조기 현금화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9] 그러나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의원들은 즉시 지급에 필요한 재원 마련이 경제 회복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8]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참전 용사들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이는 결국 보너스 아미 시위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932년 1월에는 펜실베이니아의 실업자 25,000명이 워싱턴 D.C.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10] 보너스 아미 시위 이전에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보상 문제

미국에서는 1776년부터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군 복무 기간 동안의 보수와 민간에서 일했을 경우 벌 수 있었던 소득의 차액을 보상하는 보너스 제도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용사들은 이러한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는 초기에 60USD만이 지급되어 정치적 논란이 되었다.[3] 1919년 설립된 미국 재향 군인회는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4]
1924년 5월 15일,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법안에 대해 "애국심... 사고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5] 하지만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하고 '조정된 복무 증서 법(Adjusted Service Certificate Law)' 또는 '제1차 세계 대전 보상법(World War Adjusted Compensation Act)'으로 알려진 법안을 통과시켰다.[5] 이 법에 따라 참전 용사들은 국내 복무일 하루당 1USD(최대 500USD), 해외 복무일 하루당 1.25USD(최대 625USD)에 해당하는 금액을 증서 형태로 받게 되었다.[5][6] 50USD 이하의 금액은 즉시 지급되었으나, 그 외 금액은 1945년에 만기가 되는 '조정 복무 증서'로 발행되었다.[6]
총 3,662,374장의 증서가 발행되었으며, 총액은 약 36.4억달러에 달했다.[6] 의회는 이 금액을 1945년에 지급하기 위해 연간 1.12억달러를 적립하는 신탁 기금을 설립했다. 참전 용사들은 증서 액면가의 최대 22.5%까지 기금에서 대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여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7] 1931년 의회는 대출 한도를 액면가의 50%까지 인상했다.[7]
대공황 속에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던 많은 참전 용사들은 증서의 즉각적인 현금 상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해외 참전 용사회(Veterans of Foreign Wars) 역시 연방 정부에 조기 현금화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9] 그러나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의원들은 즉시 지급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한 세금 인상이 경제 회복을 저해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8]
2. 2. 대공황과 경제 위기
1924년, 쿨리지 대통령 시기에 "세계 대전 조정 보상법"(World War Adjusted Compensation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복무 기간에 따라 계산된 보너스를 병역 인증서 형태로 지급하고, 일정 기간 후인 1945년에 현금으로 상환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55] 당시 쿨리지 대통령은 국가에 대한 봉사를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것에 반대하며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하고 법안을 통과시켰다.[55] 이에 따라 약 3,662,374장의 병역 인증서가 참전 용사들에게 발급되었으며, 그 가치는 약 36.379999999999995억달러에 달했다.[55]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 경제를 깊은 침체에 빠뜨렸고,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다.[55] 실업과 빈곤에 직면한 많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은 당장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에 받기로 약속된 보너스를 즉시 현금으로 지급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55] 1931년, 경제 위기가 심화되자 의회는 참전 용사들이 병역 인증서를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 한도를 인증서 액면가의 22.5%에서 50%로 상향 조정했다.[55] 하지만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의원들은 보너스의 즉각적인 전액 현금 상환에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은 보너스 지급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할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55]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참전 용사들은 점차 조직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32년 3월, 실업 상태였던 퇴역 군인 월터 W. 워터스(Walter W. Waters)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출발하여 수도 워싱턴 D.C.로 향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 파병되었던 미국 해외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AEF)에 빗대어 보너스 원정군(Bonus Expeditionary Force, BEF)이라고 칭했다.[55] 이들은 화물 열차를 무임승차하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동쪽으로 행진했으며,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각지에서 수많은 퇴역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55] 특히, 두 차례나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Butler) 해병대 퇴역 소장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지지 연설을 하면서 이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55]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들은 연방 정부 소유의 빈 건물이나 아나코스티아 강변의 공터 등에 임시 캠프를 설치하고 농성 시위를 벌였으며, 그 규모는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최대 15,000명에 달했다.[55]
3. 보너스 아미의 행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의 보너스 조기 지급을 위한 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이 1932년 6월 15일 하원을 통과하자, '보너스 아미'라 불리는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은 상원의 결정을 압박하기 위해 워싱턴 D.C.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해소를 바라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주로 아나코스티아강 건너편에 임시 캠프를 마련했다.
그러나 6월 17일, 상원은 62대 18이라는 큰 표 차이로 법안을 부결시켰다.[18] 법안 부결 후에도 많은 참전 용사들은 워싱턴 D.C.에 남아 시위를 계속했으며, 의회의 귀향 비용 지급 제안에도 불구하고 해산을 거부했다.
시위가 장기화되던 7월 28일, 워싱턴 D.C. 경찰이 연방 정부 소유 부지에 남아있던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다 충돌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참전 용사 두 명이 사망했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가 경찰에 맞서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경찰은 철수했고, 워싱턴 D.C. 행정위원회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치안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 투입을 명령하여 보너스 아미를 해산시키도록 지시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 아래 군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7월 28일 오후, 조지 S. 패튼 소령이 이끄는 제3기병대와 제12보병연대 병력이 M1917 경전차 5대의 지원을 받으며 펜실베이니아 가에 집결했다. 처음 군대의 등장을 환영했던 참전 용사들은 곧 기병대의 돌격과 마주했다.[33]
이어서 고정 총검을 장착하고 최루 가스(아담사이트 포함)를 사용하는 보병대가 투입되어 참전 용사들과 가족들을 강제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총격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55명의 참전 용사가 부상을 입고 135명이 체포되었다.[20] 한 참전 용사의 아내가 유산했으며, 생후 12주 된 아기 버나드 마이어스가 최루 가스 노출 후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정부 조사에서는 아기의 사인을 장염으로 발표했지만, 병원 측은 최루 가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34]
후버 대통령은 군대가 아나코스티아 강을 건너 본 캠프까지 진입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으나,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38] (명령 전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39][40]) 보너스 행진을 '미국 정부 전복 시도'로 규정하며 진압 작전을 강행했다. 군대는 아나코스티아 캠프까지 진입했고, 판잣집들은 화염에 휩싸였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의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은 참모총장이 직접 국내 시위 진압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으나,[36] 결과적으로 맥아더의 행동을 지지하는 육군 공식 보고서를 작성했다.[37] 이 강경 진압은 참전 용사들에 대한 국가의 폭력적인 대응으로 기록되었으며, 후버 행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1. 워싱턴 D.C.로의 집결
1932년 6월 17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의 연금(보너스) 조기 지급을 위한 '패트먼 보너스 법안'의 상원 표결일에 맞춰 수많은 참전 용사들이 워싱턴 D.C.에 집결했다. 이들은 '보너스 아미'라고 불렸다. 이 법안은 이미 6월 15일에 하원을 통과한 상태였다.[32]대공황으로 인해 많은 참전 용사들이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고, 이들은 보너스의 즉시 지급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워싱턴 D.C. 중심부에서 아나코스티아강을 건너야 다다를 수 있는, 진흙과 풀이 무성한 '아나코스티아 플랫' 지역에 후버빌과 같은 임시 야영지를 마련했다. 야영지는 근처 쓰레기 더미에서 가져온 폐품들로 지어졌으며, 참가자들은 자체적으로 통로를 정비하고 위생 시설을 관리하는 등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야영지에 머물기 위해서는 명예 전역 증명과 등록 절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6월 17일, 상원은 62대 18이라는 큰 표 차이로 법안을 부결시켰다. 법안 부결 소식에 실망한 참전 용사들은 미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형태로 시위를 이어갔다. 의회는 귀향하는 참가자들에게 여비를 지급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했고, 일부는 이를 받아들여 해산했다. 하지만 다수의 참가자들은 워싱턴 D.C.에 남아 시위를 계속했다.
7월 28일, 워싱턴 D.C. 경찰이 연방 정부 소유의 건물 부지에 남아 있던 보너스 아미 참가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참전 용사 두 명이 치명상을 입었고, 이에 분노한 시위대가 둔기를 들고 경찰에게 맞서면서 여러 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경찰은 현장에서 철수했고, 워싱턴 D.C. 행정위원회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더 이상 치안 유지가 어렵다고 보고했다. 이에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 투입을 명령하여 보너스 아미를 해산시키도록 지시했다.
3. 2. 캠프 설치와 생활

대부분의 보너스 아미 참가자들은 워싱턴 D.C. 중심부에서 아나코스티아 강 건너편에 위치한 아나코스티아 플랫(현재 아나코스티아 공원의 C 구역)에 후버빌 형태의 캠프를 설치했다. 이곳은 당시 진흙과 풀이 무성한 늪지대였다. 일부 참전 용사들은 펜실베이니아 가의 제3번가 SW 근처 부분적으로 파괴된 건물에 머물기도 했다.[11][12]
아나코스티아 플랫 점령은 연방 법에 위배되었으나, 당시 워싱턴 D.C. 경찰 서장이었던 펠햄 D. 글래스포드는 수도 공공 건물 및 공원 국장 율리시스 S. 그랜트 3세 소장으로부터 비공식적 허가를 받아 캠프 설치를 묵인했다.[13] 캠프 부지는 역사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거주 지역 인근이었으며, 근처에는 테니스 코트와 야구장이 있어 캠프 어린이들이 이용하기도 했다.[14]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은 근처 쓰레기 더미에서 가져온 오래된 목재, 포장 상자, 폐철 등을 이용해 임시 거처인 판잣집을 지었다. 지붕은 짚으로 덮기도 했다.[15] 이 판자촌은 우호적이었던 경찰 대장 S.J. 마크스(S.J. Marks)의 이름을 따 캠프 마크스(Camp Marks)로 불렸다.
캠프 마크스는 참전 용사들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거리를 만들고, 위생 시설을 건설했으며, 자체 경찰력을 설치하고 매일 가두 행진(퍼레이드)을 열었다. 캠프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등록 절차를 거쳐야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사실과 명예 제대를 증명하거나 보너스 증서를 제시해야 회원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13]
캠프 내에는 종교 시설을 포함한 여러 구역을 중심으로 활기찬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곳에서 참전 용사들은 대공황 속에서도 인내와 신앙을 다지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감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대출 도서관과 임시 우체국도 설치되었는데, 참전 용사들은 이곳에서 집으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당시 우표는 담배보다 구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16] D.C. 경찰 서장 펠햄 D. 글래스포드는 캠프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음식과 물품 공급을 도왔다.
이들이 워싱턴 D.C.에 모여 캠프를 설치하고 생활한 주된 이유는 미국 하원을 통과(1932년 6월 15일, 211-176표)한 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의 미국 상원 통과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17] 이 법안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 약속된 보너스를 조기에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 17일, 미국 상원은 해당 법안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다.
4. 정부의 대응과 강제 해산
대공황 시기 워싱턴 D.C.에서 벌어진 보너스 아미의 시위는 장기화되면서 허버트 후버 행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정부는 초기에 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의 상원 부결 이후 귀향 여비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시위대의 자진 해산을 유도하려 했으나, 많은 참전용사들은 요구 관철을 위해 워싱턴 D.C.에 남았다.
시위가 지속되고 1932년 7월, 경찰과 참전용사들 간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후버 행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선회했다. 결국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 투입을 승인하였고,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 아래 군대는 최루 가스와 총검을 동원하여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야영지가 불타고 다수의 부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군대를 동원한 강경 진압은 국내외적으로 거센 비판 여론에 직면했으며, 특히 인도주의적 문제와 참전용사들에 대한 대우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후버 대통령의 정치적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게 패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4. 1. 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
보너스 아미 참가자들은 상원에서 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The Patman Bonus Bill)이 표결에 부쳐지는 1932년 6월 17일에 맞춰 워싱턴 D.C.에 집결했다. 이 법안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에게 약속된 보너스를 예정보다 앞당겨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가자 대부분은 대공황으로 인해 직업을 잃은 상태였고, 즉각적인 보너스 지급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들은 워싱턴 D.C. 중심부에서 아나코스티아 강 건너편에 위치한 후버빌의 하나인 아나코스티아 플랫츠(Anacostia Flats)의 습하고 진흙 많은 땅에 야영지를 마련했다.라이트 패트먼 보너스 법안은 1932년 6월 15일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는 부결되었다. 법안이 부결된 후, 의회는 시위 참가자들이 해산하고 귀향할 경우 여비를 지급하기 위한 특별 기금을 마련했으며, 일부 참가자들은 이를 수용하여 워싱턴 D.C.를 떠났다. 하지만 상당수의 참전 용사들은 요구 관철을 위해 워싱턴 D.C.에 남아 시위를 계속했다.
4. 2. 경찰과의 충돌과 유혈 사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은 워싱턴 D.C.의 야영지에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자신들을 위해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라며 시위를 이어갔다.
1932년 7월 28일,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압력을 받은 워싱턴 D.C. 위원회는 경찰에게 야영지의 참전용사들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19][20] 이전까지 경찰 책임자였던 펠햄 D. 글래스포드는 시위대를 내버려 두라고 권고했었으나, 이 명령으로 상황은 급변했다.[19] 경찰이 해산을 시도하자 참전용사들과 충돌이 발생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참전용사들이 경찰 두 명을 잠시 붙잡기도 했다.[56][57] 이 과정에서 경찰관 조지 시나울트(George Shinault)가 권총을 발포하여 참전용사 두 명이 총에 맞았다.[19][20]
이 총격으로 참전용사 '''윌리엄 허시카'''(William Hushka)와 '''에릭 칼슨'''(Eric Carlson)이 사망했다.[19][20]
- '''윌리엄 허시카'''(1895–1932)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였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세인트루이스에서 운영하던 정육점을 팔고 입대했다. 전쟁 후에는 시카고에서 거주했으며,[20] 사망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21][22]
- '''에릭 칼슨'''(1894–1932)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출신의 참전용사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다.[20][23][24] 그 역시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25]
이 사건으로 인해 워싱턴 D.C. 행정위원회는 치안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백악관에 연방군 파견을 요청했고, 후버 대통령은 이를 승인하여 패트릭 J. 헐리 전쟁부 장관에게 전달했다. 헐리 장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에게 시위대 해산을 지시하게 된다.[26]
4. 3. 연방군의 개입과 강제 진압
7월 28일, 워싱턴 D.C. 경찰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압력으로 연방 정부 건물 부지에 남아있던 보너스 아미 참전 용사들을 해산시키려 시도했다.[19][20] 이 과정에서 경찰관 조지 시나울트가 발포하여 참전 용사 윌리엄 후스카와 에릭 칼슨이 총에 맞았고, 이들은 나중에 사망했다.[19][20] 윌리엄 후스카(1895–1932)는 리투아니아 이민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세인트루이스의 정육점을 팔고 입대했으며, 전쟁 후 시카고에서 살았다.[20] 그는 사망 일주일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21][22] 에릭 칼슨(1894–1932)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출신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으며,[20][23][24] 그 역시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25]경찰 총격 사건과 이어진 충돌 이후, 워싱턴 D.C. 행정위원회는 백악관에 연방군 파견을 요청했다. 후버 대통령은 이 요청을 패트릭 J. 헐리 전쟁 장관에게 전달했고, 헐리 장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에게 시위대 해산을 명령했다.[26]
오후 4시 45분,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제12보병연대와 조지 S. 패튼 소령이 이끄는 제3기병연대는 5대의 경전차 지원을 받으며[33]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집결했다. 퇴근하던 수천 명의 공무원들이 길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보너스 아미 참가자들은 군대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행진하는 것이라 믿고 환호했지만, 패튼 소령은 기병대에게 이들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33]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Shame! Shame!)라고 외치며 항의했다.
기병대의 돌격 이후, 고정식 총검을 장착하고 최루 가스(아담사이트, 비소성 구토제)로 무장한 보병대가 캠프에 진입하여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 지지자들을 강제로 몰아냈다.[57] 총격은 없었으나, 참전 용사들은 아나코스티아 강을 건너 가장 큰 캠프가 있는 아나코스티아 플랫츠로 후퇴했다. 후버 대통령은 아나코스티아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을 원치 않아 공격 중단을 명령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보너스 행진을 미국 정부 전복 시도로 간주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한 채 새로운 공격을 명령했다.[57] 이 과정에서 55명의 참전 용사가 부상을 입고 135명이 체포되었다.[20][57] 한 참전 용사의 아내는 유산하는 비극을 겪었다. 최루 가스 공격에 노출된 생후 12주 된 아기 버나드 마이어스가 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정부 조사에서는 아이가 장염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으나, 병원 대변인은 최루 가스가 아이의 상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34]
맥아더의 부관 중 한 명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은 육군 최고위 장교가 동료 미국 참전 용사들을 상대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맥아더에게 현장에 나가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35] 아이젠하워는 훗날 "내가 그 멍청한 놈(맥아더)한테 그곳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그곳은 참모총장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라고 회고했다.[61][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육군 보고서를 작성했다.[62][37]
후버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아나코스티아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지시를 두 번 보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는 논란이 있다. 맥아더의 참모장 조지 반 혼 모즐리는 맥아더가 명령을 불복했다고 주장했지만, 아이젠하워, F. 트루비 데이비슨 공군 담당 차관, 페리 마일스 준장 등은 명령이 맥아더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모즐리가 이를 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39][40] 이후 아나코스티아 캠프의 판잣집들은 불에 탔는데,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보고는 군대가 불을 질렀다고 하지만, 다른 보고는 일부 참전 용사들이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뫼즈-아르곤 공세에서 패튼의 목숨을 구했던 전쟁 영웅 조 앤젤로가 다음 날 패튼을 찾아가 설득하려 했으나 냉담하게 외면당한 일화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는 실망한 충성스러운 군인(앤젤로)과 과거의 충성에 무심한 정부 관료(패튼)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41]
보너스 아미 강제 진압 사건은 관련 군 장교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가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2] 당시 경찰 서장이었던 펠햄 D. 글래스포드는 군대 개입 결정에 불만을 품고 경찰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믿었으며, 사건 직후 서장직에서 사임했다.
5. 여파와 영향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영화사는 1933년 《가브리엘 오버 더 화이트 하우스》라는 영화를 개봉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구상한 이 영화는 가상의 대통령 하몬드를 묘사하는데, 영화 초반 하몬드는 실업 상태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경제가 회복될 때까지 공공사업에 투입하는 '구성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3] 이는 보너스 아미 사건이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너스 아미 사건의 여파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참전 용사들에 대한 강경 진압은 대중의 비판을 받았고, 이는 결국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패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64]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2년 대선 공약 당시에는 참전 용사들에 대한 보너스 지급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65] 그러나 1933년 5월, 참전 용사들이 다시 워싱턴 D.C.에서 시위를 벌이자 후버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였다. 그는 시위대의 입장을 경청하고 인도적인 지원을 제공했으며, 특히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직접 보내 참전 용사들과 소통하게 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참전 용사들과 식사하고 노래를 들으며 그들의 처지에 공감했고, 새로 만들어진 시민 보존군(CCC) 일자리를 제안했다. 이러한 대응은 "후버는 군대를 보냈지만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후버의 강경 대응과 대조를 이루었다.
결국 민주당이 다수를 점한 의회는 여론의 압력 속에서 1936년, 보상법을 개정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 약속되었던 20억달러의 보너스를 조기에 지급하기로 결정했다.[66] 이 법안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67][68]
5. 1. 후버 대통령의 재선 실패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육군 대장의 지휘 아래 미국 제12보병연대와 조지 S. 패튼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제3기병연대는 보너스 아미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들의 야영지를 파괴했다. 당시 워싱턴 D.C.는 연방 의회의 직할지였기 때문에, 국내 치안 유지를 위한 군대 동원을 제한하는 민병대법(Posse Comitatus Act)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의 참모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이 작전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27] 군 부대는 총검을 장착하고 최루탄을 사용하여 보너스 아미 야영지로 진격했다. 후버 대통령은 군대가 아나코스티아 강 건너편의 최대 야영지까지 진격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맥아더는 보너스 아미를 정부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간주하고 자신의 권한을 넘어 진격을 강행했다.이 강경 진압 과정에서 윌리엄 하슈카와 에릭 칼슨을 포함한 여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으며, 한 퇴역 군인의 아내는 유산하는 비극을 겪었다. 과거 조국을 위해 싸웠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상대로 무장한 현역 군인이 대치하는 모습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결국 참전 용사 구제를 위한 논의를 촉발하고 훗날 미국 퇴역군인부의 전신인 퇴역 군인국 설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보너스 아미 해산 과정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피해는 다음과 같다.
피해 내용 | 상세 |
---|---|
사망자 | 참전 용사 2명 사망 |
영아 피해 | 11주 된 신생아 가스 노출로 중태, 유아 2명 가스 질식사 |
부상자 | 11세 소년 최루 가스로 일부 실명, 구경꾼 1명 총상, 참전 용사 1명 귀 절단, 참전 용사 1명 총검 자상 |
경찰 부상 | 최소 12명 부상 |
가스 피해 | 경찰, 언론인, 구급차 운전사 등 1,000명 이상 워싱턴 D.C. 거주자 최루 가스 노출 |
연방군 부대가 보너스 아미의 텐트와 오두막을 불태웠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일부 참전 용사들이 군대 도착 전에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스스로 불을 질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태 이후 후버 대통령은 보너스 군 문제 발생의 책임을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범죄자에게 돌리려 했다. 그는 "행진자들 중 범죄자, 공산주의자, 비참전용사 요소의 특이한 비율이 국회에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가진 수천 명의 정직하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이들이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28] 그의 1952년 회고록에서는 보너스 군의 최소 900명이 "전과자이자 공산주의자"였다고 재차 언급하기도 했다.[29]
그러나 과거 동료였던 참전 용사들을 향한 군대 동원이라는 충격적인 사건과, 재정 문제를 이유로 퇴역 군인에 대한 연금 지급을 반대했던 후버 대통령의 입장은 그의 재선 가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결국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패배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33년 이후에도 보너스 아미와 유사한 성격의 집단들이 워싱턴 D.C.에 모여 새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표명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5. 2. 루스벨트 정부의 대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2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참전 용사들의 보너스 즉시 지급 요구에는 반대 입장을 보였다.[44][65] 그러나 1933년 3월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같은 해 5월 참전 용사들이 두 번째 시위를 위해 워싱턴 D.C.로 모였을 때, 그는 전임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들을 대우했다.[45]루스벨트 행정부는 시위대의 보너스 요구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행정부는 버지니아주 포트 헌트에 특별 야영지를 마련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제공하는 40개의 야전 주방을 운영했으며, 수도 워싱턴 D.C.까지 왕복하는 버스 교통편과 군악대 연주 등 오락을 제공했다.[46] 이는 이전 후버 행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측근인 루이스 하우는 시위를 평화롭게 마무리하기 위해 협상을 주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를 직접 시위 현장에 보내 참전 용사들과 소통하도록 했다.[43] 엘리너 여사는 참전 용사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기억을 나누었다. 그녀는 참전 용사들에게 새로 창설된 시민 보존군(CCC)에서의 일자리를 약속할 수 있었다.[43] 이러한 루스벨트 부부의 행보에 대해 한 참전 용사는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루즈벨트는 아내를 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엘리너 여사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참전 용사들을 공산주의자나 범죄자로 몰아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중했으며 자신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하며 시위대를 옹호했다.[43]
1933년 5월 11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25,000명의 참전 용사들을 CCC에 등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는 CCC 지원자의 일반적인 자격 요건(미혼, 25세 미만)을 면제해주는 특별 조치였다.[47][48] 많은 참전 용사들이 CCC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플로리다 키스 제도의 오버시즈 하이웨이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1935년 9월 2일 발생한 강력한 허리케인(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일하던 259명의 참전 용사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참전 용사 문제에 대한 대중의 동정심을 크게 자극했다.
결국 1936년,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조정 보상 지불법을 통과시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에게 20억달러의 보너스를 즉시 지급하도록 결정했다.[49][66] 하원에서는 324 대 61,[50][68] 상원에서는 76 대 19로[51][67]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4년에는 1944년 복원병 원호법(GI Bill)이 제정되어 참전 군인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포괄적인 지원책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보너스 아미 시위에 참여했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제대로 받지 못했던 혜택이었다.
5. 3. 보너스 지급 법안 통과와 참전 용사 지원
루스벨트 대통령은 보너스의 조기 지급에는 반대했지만, 다시 워싱턴으로 행진한 참전 용사들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다. 그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보내 참전 용사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게 했다. 또한, 많은 참전 용사들을 설득하여 플로리다 키스 제도의 오버시즈 하이웨이(미국 국도 1호선)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그러나 1935년 9월 2일, '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en)으로 알려진 강력한 허리케인이 플로리다 키스 제도를 강타하여 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참전 용사 259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뉴스 영화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참전 용사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크게 일었고, 1936년 선거를 앞둔 의회는 더 이상 보너스 지급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의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통과시켜 보너스 지급이 현실화되었다.[2]
이후 1944년에는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데 필요한 연방 정부 차원의 교육, 주택, 취업 지원 등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포괄적인 지원은 보너스 아미에 참가했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은 거의 받지 못했던 혜택이었다.
참조
[1]
뉴스
"'Take Job in the Forest or Go Home' Is Alternative Given to Bonus Boys"
Middlesboro (Kentucky) Daily News
1933-05-17
[2]
웹사이트
Pension Acts An Overview of Revolutionary War Pension and Bounty-Land Legislation and the Southern Campaigns Pension Transcription Project
http://revwarapps.or[...]
2017-11-29
[3]
웹사이트
Education and Training
https://www.benefits[...]
2013-11-21
[4]
서적
Calvin Coolidge
Henry Holt
2006
[5]
서적
Calvin Coolidge: The American Presidents Series
Times Books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논문
"The 'New Deal' for Veterans: The Economy Act, the Veterans of Foreign Wars, and the Origins of the New Deal,"
2006
[10]
문서
[11]
웹사이트
The Last Time the U.S. Army Cleared Demonstrators From Pennsylvania Avenue
https://www.politico[...]
2021-12-08
[12]
웹사이트
HEROES: Battle of Washington
https://content.time[...]
1932-08-08
[13]
서적
The Bonus March: An Episode of the Great Depression
Praeger
[14]
서적
The Bonus Army: An American Epic
https://www.worldcat[...]
Dover Publications
2020
[15]
웹사이트
The Bonus Army
http://www.eyewitnes[...]
2021-12-08
[16]
서적
The Bonus March and the New Deal
M.A. Donohue & Company
[17]
웹사이트
House passes bonus bill for WWI veterans, June 15, 1932
http://www.politico.[...]
2009
[18]
뉴스
Senate Defeats Bonus Despite 10,000 Veterans Massed Around Capitol
https://timesmachine[...]
1932-06-18
[19]
뉴스
Veteran dies of wounds
https://www.nytimes.[...]
1932-08-02
[20]
간행물
Heroes: Battle of Washington
https://content.time[...]
1932-08-08
[21]
웹사이트
William Hushka
http://mallhistory.o[...]
2020-10-20
[22]
웹사이트
William Hushka
http://mallhistory.o[...]
2020-10-20
[23]
Youtube
"The March of the Bonus Army" video
http://www.answers.c[...]
2011-02-04
[24]
웹사이트
Bonus Army Spectacle, U.S. Capital, 1932: What Really Happened. Section VI. Two Shootings at Glassford Camp
http://www.semp.us/p[...]
2009-07-18
[25]
웹사이트
Bonus Expeditionary Force Martyrs Hushka & Carlson (1932)
http://www.community[...]
[26]
백과사전
The Bonus Army
https://www.encyclop[...]
[27]
논문
“A Blunder Becomes Catastrophe: Hoover, the Legion, and the Bonus Army.”
1967
[28]
웹사이트
Statement on the Justice Department Investigation of the Bonus Army
https://www.presiden[...]
1932-09-10
[29]
서적
The Memoirs of Herbert Hoover: The Great Depression, 1929–1941
Read Books
2011
[30]
서적
The Whole of Their Lives: Communism in America—A Personal History and Intimate Portrayal of Its Leaders
https://archive.org/[...]
Charles Scribner's Sons
1948
[31]
웹사이트
"#6: Hoover's Attack on the Bonus Army (Top 10 Mistakes by U.S. Presidents)"
http://blogs.britann[...]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9-01-16
[32]
서적
Eisenhower in War and Peace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서적
Eisenhower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1-06-15
[37]
서적
Eisenhower: A Soldier's Life
https://books.google[...]
Henry Holt & Co.
2011-06-15
[38]
서적
Eisenhower in War and Peace
Random House
2012
[39]
뉴스
FOR THE RECORD : From "My Search for Douglas MacArthur" by Geoffrey Perret in the February/March issue of American Heritage
https://www.washingt[...]
2021-12-08
[40]
웹사이트
My Search For Douglas MacArthur
https://www.american[...]
2021-12-08
[41]
서적
General Patton
Harper Collins Publishers
[42]
웹사이트
The 'Bonus Army' War in Washington
http://www.historyne[...]
2018-01-31
[43]
서적
Eleanor Roosevelt
Viking
[44]
뉴스
Governor Lays Plans for Trip
https://www.nytimes.[...]
2010-12-18
[45]
뉴스
New Bonus March Starts Tomorrow
https://timesmachine[...]
1933-05-09
[46]
뉴스
Bonus Army Row Finally Adjusted
https://timesmachine[...]
1933-05-15
[47]
서적
The Civilian Conservation Corps, 1933–1942
https://www.nps.gov/[...]
Duke University Press
[48]
서적
Traitor to His Class: The Privileged Life and Radical Presidency of Franklin Delano Roosevelt
Knopf Doubleday Publishing
[49]
뉴스
Bonus Bill Becomes Law
https://www.nytimes.[...]
2010-12-20
[50]
뉴스
House Swiftly Overrides Bonus Veto by Roosevelt
https://www.nytimes.[...]
2011-09-03
[51]
뉴스
Bonus Bill Becomes Law
https://www.nytimes.[...]
2011-09-03
[52]
웹사이트
Barbara Kingsolver's
http://www.annarbor.[...]
2022-05-29
[53]
서적
Maverick Marine: General Smedley D. Butler and the Contradictions of American Military History
U. Press of Kentucky
[54]
뉴스
"'Take Job in the Forest or Go Home' Is Alternative Given to Bonus Boys"
1933-05-17
[55]
문서
U.S. Constitution, Article One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Section 8: Powers of Congress|Article I. Section 8. Clause 17)
[56]
뉴스
"Veteran dies of wounds,"
http://select.nytime[...]
2011-08-30
[57]
뉴스
"Heroes: Battle of Washington,"
http://www.time.com/[...]
2011-08-30
[58]
웹사이트
"The March of the Bonus Army" video
http://www.answers.c[...]
2011-02-04
[59]
웹사이트
"Bonus Army Spectacle, U.S. Capital, 1932: What Really Happened," Section VI. Two Shootings at Glassford Camp
http://www.semp.us/p[...]
2011-02-08
[60]
웹사이트
Bonus Expeditionary Force Martyrs Hushka & Carlson (1932), DC Labor Map
http://www.community[...]
2011-02-08
[61]
서적
Eisenhower
http://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1-06-15
[62]
서적
Eisenhower: A Soldier's Life
http://books.google.[...]
Henry Holt & Co.
2011-06-15
[63]
웹사이트
Gabriel Over the White House (1933)
https://www.imdb.com[...]
2010-12-15
[64]
서적
Eleanor Roosevelt
Viking
[65]
뉴스
"Governor Lays Plans for Trip,"
http://select.nytime[...]
2010-12-18
[66]
뉴스
"Bonus Bill Becomes Law,"
http://select.nytime[...]
2010-12-20
[67]
뉴스
"Bonus Bill Becomes Law,"
http://select.nytime[...]
2011-09-03
[68]
뉴스
"House Swiftly Overrides Bonus Veto by Roosevelt,"
http://select.nytime[...]
2011-09-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