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부부인은 신라 후기부터 사용된 국대부인에서 기원하여, 조선 시대에 대군의 처나 왕비의 어머니에게 수여된 외명부 작위이다. 조선 태조는 어머니 최씨를 국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태종은 외조모와 장모를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했다. 세종 14년, 국대부인의 국(國)이 부(府)로 변경되면서 부부인으로 개칭되었으며, 대군의 처와 정궁의 어머니는 정1품 부부인으로 봉해졌다. 이후 선조는 생모를 하동부부인으로 추증했고, 영조 때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잘못 불리면서 부대부인 작위가 등장했다. 철종 이후 왕의 생모는 부대부인으로 봉해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부부인이라는 작위는 세종 14년(1432년)에 기존의 국대부인(國大夫人) 작위를 개칭하면서 유래하였다. 당시 신하의 처가 국호(國號)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의와 함께, 종주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4] 제후국의 봉작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국대부인의 '국(國)' 자를 조선의 행정 단위인 '부(府)'로 낮추고 '대(大)' 자를 생략하여 부부인(府夫人)으로 개칭하였다.[5] 개칭 후 부부인 작위는 정1품으로서 대군의 처와 왕비의 어머니에게 동등하게 봉작되었다.
2. 유래
2. 1. 국대부인
국대부인(國大夫人·國太夫人)이라는 작위는 신라 후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기원은 당나라에서 1품 이상 관원(황족 포함)의 어머니나 부인에게 봉작하던 국부인(國夫人)에서 찾을 수 있다.[1] 오대십국 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개국왕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국부인에 '태(太)' 자를 더한 국태부인으로 봉했다. 고려 시대에는 왕후의 어머니와 특별한 공적을 세운 신하의 어머니를 국태부인 또는 국대부인으로 삼았다.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에서도 황후의 어머니를 국태부인으로 봉작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자신의 어머니 최씨(의혜왕후로 추존)를 의비(懿妃)로 추존하면서, 어머니의 3대조(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를 모두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삼았다.[2] 이후 태종은 자신의 외할머니를 삼한국대부인으로 추증하고, 장모인 송씨(원경왕후의 어머니) 역시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했다. 태종 17년에는 명부(命婦)의 작위를 재조정하여 다음과 같이 정했다.[3]
대상 | 작위 | 품계 |
---|---|---|
대군의 처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 외명부 의친처 정1품 상(上) |
왕비(王妃)의 어머니 (생모·법모) | ○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 (변한·진한·마한 중 국호 사용) | 정1품 하(下) |
후궁 소생 제군(諸君)의 처 | ○한국부인(某韓國夫人) | 종1품 |
정1품 좌·우의정 부원군(左右議政府院君)의 처 | ○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 | 외명부 공신처 정1품 상(上) |
제부원군(諸府院君)의 처 | ○한국부인(某韓國夫人) | 정1품 하(下) |
이처럼 공신의 처에게도 국대부인과 국부인 작위를 사용하여 일반 대신의 처와 차별을 두었으나, 왕족 여성보다는 한 등급 낮추었다.
세종 14년, 신하(공신)의 처가 국호(國號)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작위 제도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이는 태종 즉위 이후 '제후국의 봉작은 종주국보다 2등급 낮춘다'[4]는 원칙에 따라 작위를 조정해 온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상정소(詳定所)에서는 종친의 처 작위도 함께 개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로 인해 국대부인의 '국(國)' 자가 조선의 최고 행정 단위인 '부(府)'로 낮추어지고 '대(大)' 자가 생략된 부부인(府夫人)으로 개칭되었다. 대군의 처와 왕비의 어머니는 동등하게 정1품 부부인으로 봉작되었으며, 작위 앞에는 도호부 단위의 고을 이름을 붙여 조선의 제후임을 나타냈다(이후 본관이나 연고지로 변경된다). 국부인으로 봉작되던 제군(왕의 서자)의 처는 부(府) 아래 행정 단위인 '군(郡)'을 사용한 군부인(郡夫人)으로 조정되었고, 역시 국호 대신 군(고을) 이름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신의 처는 문무대신의 처와 구별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동등하게 정(正)·경(敬)·숙(淑) 등을 붙인 작위를 받게 되었다.[5] 다만, 종실·공신·문무 2품 이상의 관리 중 수절(守節)한 적모(嫡母)로서 아들의 지위에 따라 작위를 받는 경우에는 특별히 작위에 '대(大)' 자를 더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훗날 부대부인 작위가 생겨나는 배경이 되었다.[6] 외명부 작위 개칭이 이루어진 지 보름 후인 음력 2월 1일, 세종은 이미 사망했거나 남편이 사망한 부인의 작위는 개정하지 않고 기존 작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신들을 설득했다.[7] 이 때문에 세조 시대까지 일부 여성이 국대부인으로 불린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2. 2. 조선 초기 국대부인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어머니 의혜왕후 최씨의 3대조를 추증하면서, 의혜왕후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모두에게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 작위를 부여했다.[2] 이후 태종은 즉위하여 자신의 외조모를 삼한국대부인으로 추증했으며, 장모인 원경왕후의 어머니 송씨에게도 삼한국대부인 작위를 주었다.태종 17년(1417년)에는 외명부의 작위를 재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군의 부인은 외명부 의친처 정1품 상(上)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정하고, 왕비의 어머니(생모·법모)는 정1품 하(下)인 ○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으로 정하여 변한, 진한, 마한 중 하나의 국호를 쓰도록 하였다. 후궁 소생 왕자들의 부인은 종1품 ○한국부인(某韓國夫人)으로 정해졌다. 또한 공신의 부인에게도 특별히 국대부인과 국부인 작위를 사용하여 일반 대신의 부인과 차이를 두었는데, 이는 왕족 여성보다는 한 등급 낮은 기준이었다. 정1품인 좌의정, 우의정 부원군의 부인은 외명부 공신처 정1품 상(上)인 ○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으로, 그 외 제부원군(諸府院君)의 부인은 정1품 하(下)인 ○한국부인(某韓國夫人)으로 봉작되었다.[3]
3. 부부인
부부인(府夫人)은 조선 시대 외명부 정1품 작위로, 그 유래는 신라 후기부터 사용된 국대부인(國大夫人·國太夫人) 작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대부인은 당나라에서 1품 이상 관원의 어머니나 아내에게 주던 국부인(國夫人) 작위에서 비롯되었다.[1] 고려 시대에는 왕후의 어머니나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의 어머니를 국대부인으로 삼았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어머니 최씨(의혜왕후)를 의비(懿妃)로 추존하며 그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모두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삼았다.[2] 태종은 즉위 후 자신의 외할머니와 장모 송씨(원경왕후의 어머니)를 삼한국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태종 17년(1417년)에는 명부(命婦) 제도를 정비하여, 대군(大君)의 아내는 정1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왕비의 어머니는 정1품으로 삼한 중 하나의 국호를 딴 ○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으로 삼았다. 후궁 소생 왕자인 제군(諸君)의 아내는 종1품 ○한국부인(某韓國夫人)으로 정했다. 공신의 아내에게도 국대부인이나 국부인 작위를 사용하여 일반 대신의 아내와 구별하였는데, 정1품 좌·우의정 부원군(府院君)의 아내는 ○한국대부인, 그 외 부원군의 아내는 ○한국부인으로 삼았다.[3]
세종 14년(1432년), 신하의 아내가 국호(國號)를 사용하는 것이 종주국과의 관계 및 조선의 제후국 지위를 고려할 때 적절치 않다는 논의가 있었고, '제후국의 봉작은 종주국보다 2등급 낮춘다'는 원칙[4]에 따라 작위 제도를 개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대부인은 부부인(府夫人)으로, 국부인은 군부인(郡夫人)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작위 앞에 조선의 행정 단위인 부(府)나 군(郡)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군의 아내와 왕비의 어머니는 동등하게 정1품 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공신의 아내에 대한 작위는 일반 문무대신 아내의 작위 체계로 통합되었다.[5] (자세한 개칭 과정과 내용은 #부부인으로의 개칭 문단 참고)
3. 1. 부부인으로의 개칭
조선 세종 14년(1432년), 신하(공신)의 아내가 국호(國號)를 작호에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작위 제도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상정소(詳定所)에서는 종친의 아내에 대한 작위 역시 함께 개정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태종 즉위 이후 '제후국의 봉작은 종주국보다 2등급 낮춘다'는 원칙[4]에 따라 작위를 조정해 온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이 개정으로 기존의 국대부인(國大夫人) 작위에서 '국(國)' 자가 조선의 최고 지방 행정 단위인 '부(府)'로 변경되고 '대(大)' 자가 생략되어 부부인(府夫人)으로 바뀌었다. 대군(大君)의 아내와 왕비의 어머니는 모두 정1품 부부인으로 봉작되었으며, 작위 앞에는 도호부(都護府) 단위의 고을 이름을 붙여 조선이 제후국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 고을 이름은 이후 본관이나 연고지로 대체되었다. 왕의 서자인 제군(諸君)의 아내에게 주어지던 국부인(國夫人) 작위는 부(府)보다 낮은 행정 단위인 군(郡)을 사용하여 군부인(郡夫人)으로 조정되었고, 마찬가지로 국호 대신 고을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공신의 아내에 대해서는 기존에 문무대신의 아내와 차등을 두던 제도를 폐지하고, 동등하게 정(正), 경(敬), 숙(淑) 등의 호칭이 붙는 작위를 내렸다.[5]
다만, 종실, 공신, 문무 2품 이상 관리의 적모(嫡母)로서 남편 사후 수절하며 아들의 관직 덕분에 작위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특별히 작위에 '대(大)' 자를 더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훗날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는 작위가 생겨나는 배경이 되었다.[6] 외명부 작위 개정이 이루어진 지 보름 후인 음력 2월 1일, 세종은 이미 사망했거나 남편이 사망한 부인의 경우에는 기존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대신들을 설득하였다.[7] 이러한 조치로 인해 세조 시대까지 일부 여성이 여전히 국대부인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3. 2. 하동부부인과 하동부대부인
명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한 선조는 예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이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대원군(大院君)으로, 이는 공신 정1품 작위이자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던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것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여 하동부부인으로 삼았다.《조선왕조실록》 선조 총서에는 "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드님이다. 모친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인조 12권, 4년(1626년) 3월 2일 기록에는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 발인 때에는 선조께서 궐문 밖에서 곡송하려고 하였으나 예조가 아뢰어 대내의 뜰 아래에서 망곡(望哭)만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같은 해 7월 27일 기록에도 "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라는 언급이 있어 당시 공식 작호가 하동부부인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를 전례로 삼아 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8],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영조 즉위년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숭을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보고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이는 이진검 개인의 착오라기보다 경종 2년(172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숭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주장을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지만, 예조판서로서 기본적인 사실 확인 없이 보고했다는 점에서 경종의 충신이었던 그가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일로 인해 정씨의 작위는 이후 본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했으나,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 등으로 혼용되어 불리게 되었다.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 자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 14년(1432년)의 법령[11]과 이미 부대부인 작호를 사용한 전례[12]에 비추어 볼 때,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봉했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이 오류였음을 뒤늦게 인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철종 즉위 후 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13], 이후 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지면서, 왕족 출신으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았다. 현대 국어사전에서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私親)'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4. 부대부인
철종이 즉위한 후, 그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봉해졌다.[13] 이후 고종의 생모인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지면서, 왕족 부인으로서 왕의 생모가 된 여성에게 부대부인 작위를 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의 국어사전에서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私親, 생모)에게 주는 작위로 정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부인 정씨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영조 대에 숙빈 최씨 추숭 논의 과정에서 비롯된 혼동과 후대에 부대부인 작위가 정착된 영향으로 보인다.[9][10][11][12]
참조
[1]
서적
《당육전》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5월 10일(갑인) 1번째기사
1393-05-10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9월 12일(갑자) 1번째기사
1417-09-12
[4]
서적
《대명률》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세종 55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월 16일(병자) 4번째기사
1432-01-16
[6]
문서
실제로 《경국대전》과 《대전회통》 이전(吏典)에는 부대부인의 작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세종 55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2월 1일(경인) 1번째기사
1432-02-01
[8]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연주부부인
http://sjw.history.g[...]
[9]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
1724-09-21
[1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
1722-07-17
[11]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하동부부인, 하동부대부인, 대원군부인
[1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
1771-08-09
[1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철종 1권, 즉위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17일(계미) 1번째기사
1849-06-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