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겐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토 겐료는 189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난 일본 육군 군인으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육군성에서 근무하며 국가총동원법 심의에서 "입 다물어"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태평양 전쟁 중에는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전쟁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6년 석방되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태평양 전쟁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1975년 바둑 대국 중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극동국제군사재판 기결수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극동국제군사재판 기결수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A급 전범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A급 전범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토 겐료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사토 겐료 |
출생 | 1895년 6월 1일 |
출생지 | 이시카와현 가호쿠군 하나조노촌 (현 가나자와시) |
사망지 | 알 수 없음 |
별칭 | 알 수 없음 |
군사 경력 | |
소속 조직 |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0px]] 대일본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7년 - 1945년 |
최종 계급 | [[File:帝國陸軍の階級―襟章―中将.svg|40px]] 육군 중장 |
제대 후 활동 | |
활동 |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가 |
기타 정보 | |
묘소 | 알 수 없음 |
2. 생애
사토 겐료는 1895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나 191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92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일본의 군인이다. 미국 주재 경험 후 육군성 군무과 국내반장을 지냈으며,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심의 과정에서 국회의원에게 "입 다물어라!"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었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육군성 군무과장, 군무국장 등 요직을 거쳤다. 그는 도조의 측근 그룹인 "삼간사우(三奸四愚)"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전쟁 수행에 깊이 관여했다.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했을 때,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이유로 국장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 패전 후에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A급 전범 중 가장 마지막까지 복역하다 1956년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기업(도큐관재, 현 도쿄 퍼실리티 서비스) 사장을 지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망 직전까지 태평양 전쟁을 '성전'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보를 보였다. 1975년 사망했다.
그의 장남은 육군을 거쳐 전후 항공자위대에서 소장까지 지냈고, 차남은 간사이 전력에서 근무했으며, 삼남은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교수를 지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사토 겐료는 1895년 6월 1일, 이시카와현 호쿠리쿠군 하나조노촌(花園村, 현 가나자와시 이마마치)에서 태어났다.[1] 1914년에는 가나자와 제1중학교를 졸업했는데, 해군 소장 나카도 가네에(해병 44기)와 해군 대좌 다치바나 마사오(해병 45기)가 중학교 동기였다.[1]같은 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5월, 제29기로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536명 중 257등이었다. 그의 동기생 중에는 이후 쇼와 시대 일본 육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가와무라 산로(중장, 제224사단장), 아리마쓰 세이조(중장, 참모본부 제2부장), 고토 미쓰조(중장, 제1총군 참모 부장), 가마다 겐이치(중장, 제2야전철도사령관), 이나다 마사즈미(중장, 제16방면군 참모장 겸 서부군관구 참모장), 누카다 히라시(중장, 육군성 인사국장) 등이 있다.
1917년 12월 25일, 사토는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야포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920년 11월 26일에는 육군포공학교 고등과(26기)를 졸업했고, 1921년 4월에는 중위로 승진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육군대학교 제37기를 졸업했다. 육군대학교 재학 중 병학 교관이었던 도조 히데키 보병 중좌(육사 17기)의 눈에 들어 그의 측근이 되었다.
1926년 3월에는 대위로 승진했으며, 1930년 5월부터는 미국에 주재하며 미 야포병 제12연대에 배속되었다. 텍사스주에서 포병대 장교로 근무한 경험 때문에 육군 내에서는 미국에 대해 잘 아는 '지미파'(知米派)로 분류되기도 했다. 미국 주재 후에는 일본 육군성 군무과 국내반장을 맡았다.
1938년 3월, 국가총동원법 심의 과정에서 사토는 육군성 설명원으로 참석했다. 그는 법안 마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섞어 장시간 연설했는데, 이에 반발한 다른 의원이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하자 "입 다물어라!"라고 소리쳤다. 이 발언은 큰 문제가 되어 위원회가 해산되고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가 사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정작 사토 본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2. 2. "입 다물어" 사건
1938년 3월 3일, 육군성 군무과 국내반장이었던 사토는 중의원의 국가총동원법 위원회에 육군성 설명위원으로 출석하였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사토는 법안 설명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 등을 섞어 장시간 연설을 이어갔다. 이에 대해 다른 위원들(사토의 육군사관학교 시절 교관이기도 했던 입헌정우회 소속 미야와키 쵸키치[2] 등)이 "그만둬라", "토론이 아니다" 등의 야유를 보내며 제지하려 하자, 사토는 이들을 향해 '''"닥쳐!"'''라고 고함을 쳤다.정부 측 설명위원에 불과한 인물이 국회의원에게 폭언을 한 이 사건은 이타노 토모조 등에 의해 즉각 문제시되었다. 하지만 사토가 자리를 박차고 퇴장하면서 위원회는 결국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산회되었다. 이후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12기)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사토에게는 어떠한 처분도 내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군부의 오만한 태도와 의회 경시 풍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작가 반도 가즈토시에 따르면, 사토는 전후 인터뷰에서 "국방에 종사하는 자는 끊임없이 강인한 대비 없는 평화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대비 없는 평화 따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저 총동원법이 필요했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다고 한다.
2. 3. 태평양 전쟁
1940년 2월 10일, 사토는 남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마츠오카·앙리 협정에 따라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진행했는데, 현지에서의 세부 협정이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 23일 일본군이 월경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군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토미나가 쿄지 참모본부 제1부장과의 모의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건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자 토미나가 소장은 동부군 사령부 부속으로 좌천되었다.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 감시 단장으로 교섭을 담당했던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은 육군 차관 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군의) 통솔이 문란해져 신뢰를 국내외에서 잃었다"고 비판했다. 니시하라 기관 소속이었던 코이케 류지 대좌는 훗날 사토에 대해 "이틀 밤낮 밤샘하며 담판을 벌였지만, 이쪽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논적이지만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음험했던 토미나가 소장과는 다른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2]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토의 상사였던 안도 리키치 남지나 방면군 사령관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1941년 3월 1일, 사토는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장에 취임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삼간사우"라고 불리던 도조 측근 4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나머지 3명은 기무라 헤이타로, 사나다 죠이치로, 아카마츠 사다오). 군무과장으로서 그는 쇼와 천황의 뜻에 따라 개전을 피하려던 도조 총리 겸 육상이나, 개전에 신중했던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보다 다나카 신이치 참모본부 제1부장을 비롯한 개전 적극파 참모본부를 지지했다. 사토 자신도 도조 앞에서 미일 교섭에 소극적인 의견을 내놓았다가 오히려 질책을 받기도 했다. 당시 육군성 중추부의 활동과 미일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갈등은 호사카 마사야스의 저서 『육군성 군무국과 미일 개전』(이후 "저 전쟁은 무엇이었나, 미일 개전과 도조 히데키"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에서 다루어졌다.
1941년 10월 15일, 사토는 육군성령의 임시 특례에 따라 이례적으로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군무과장직을 계속 수행했으며[3], 같은 해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1942년 4월 20일, 사토는 육군대신의 군정에 관한 최고 참모인 육군성 군무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과달카날 증원을 둘러싼 선박 징용 문제에 관여했다. 이 방면 작전에 소극적이었던 도조 총리의 뜻을 받아 민간 선박 징용을 요구하는 참모본부와 교섭을 벌였으나, 12월 5일에는 다나카 신이치 제1부장과 난투극을 벌이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다음 날 다나카 부장은 총리 관저에서 도조 총리를 면박하다 파면되었다.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했을 때, 사토는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거론하며 "국장으로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도조 총리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도조는 육군과 해군의 협조를 우선시하여 이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으로 도조 내각이 위기에 처하자, 도조는 내각 개조를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했고 사토도 이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개조는 좌절되었고 도조는 결국 퇴진했다. 도조의 실각 후 사토는 중앙에서 밀려나 중국 파견군 총참모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육총감에서 육군대신으로 자리를 옮긴 스기야마 겐에게 장제스와의 평화 교섭을 모색하도록 건의했지만, 현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44년 9월 5일, 육해 기술 운용 위원회가 설치되자 사토는 해군 군무국장과 함께 부위원장을 맡아, 특수 기습 병기 개발을 위한 육해민의 과학 기술 통합을 추진했다.[4] 같은 해 12월 14일 중국 파견군 총참모 부장직을 유지했으며, 1945년 4월에는 친임관인 제3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2. 4. 전후
1945년 8월 15일 종전 이후, 같은 해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사토의 체포를 명령했다.[5] 그는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다.사토는 최연소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중에는 도조 히데키와 함께 군복 착용을 고수했으며(최소 1947년 8월까지, 도조는 깃을 세운 옷 형태였으나 사토는 칼라 셔츠 형태였다)[6],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A급 전범 중 가장 오랫동안 복역하였고, 1956년 3월 31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도큐관재(현 도큐 시설 서비스) 사장을 지냈다.
또한 자신의 반미 체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공산당은 무리지만 사회당 공청회에는 불러주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5년 8월에는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베평련) 토론 집회에 강사로 참석하여 미국을 비판하는 연설로 박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의 강경 자세가 "중소 분쟁의 틈을 노리는 것"이라고 분석하며, 공산당 대표인 우에다 코이치로에게 "중소 대립을 멈추도록 일본 공산당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촉구했다.[7]
사토는 개전 당시 육군 중추에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에 가장 열성적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으며, 사망 직전까지 면담자들에게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이 성전이었다고 주장했다. 1963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나의 유죄는 평시에 타국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범죄라는 논리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에 방공을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있지 않은가. 도쿄 재판의 정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며 재판의 정당성을 비판했다.
신장은 169cm였다.[8] 바둑을 즐겼으며, 오카 게이준 해군 중장과는 바둑 친구였다. 1975년 바둑 대국 도중 사망했다.
장남은 육군 출신으로 전후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공장보까지 승진했고, 차남은 간사이 전력에서 근무했으며, 삼남은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교수였다.
2. 5. 사망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3. 연보
wikitext
연도 | 날짜 | 내용 |
---|---|---|
1895년 | 6월 1일 | 이시카와현 호쿠리쿠군 하나조노촌 자 이마마치(현 가나자와시 이마마치)에서 출생. |
1914년 | 4월 | 가나자와 제1중학교 졸업[1] 후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7년 | 5월 25일 | 육군사관학교 졸업 (육사 29기, 257등/536명). |
12월 25일 | 포병 소위 임관, 야포병 제1연대 부속. | |
1920년 | 11월 26일 | 육군포공학교 고등과 졸업 (26기). |
1921년 | 4월 | 포병 중위 승진. |
1925년 | 11월 27일 | 육군대학교 졸업 (육대 37기). |
1926년 | 3월 | 포병 대위 승진. |
12월 | 정비국 부속 근무 (통제과). | |
1928년 | 3월 | 정비국 과원. |
1930년 | 5월 | 미국 주재, 미 야포병 제12연대 부속 (~1932년 7월). |
1932년 | 8월 | 포병 소령 승진, 야전중포병 제6연대 대대장. |
1933년 | 8월 | 정비국 과원 (통제과). |
1935년 | 8월 1일 | 육군대학교 병학 교관. |
1936년 | 8월 1일 | 군무국 과원 (군무과 국내반장). |
1937년 | 3월 | 포병 중령 승진. |
8월 | 항공병 중령 임명. | |
1938년 | 3월 3일 | 국회 국가총동원법 위원회에서 야당 의원에게 "닥쳐!"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킴("닥쳐!" 발언 사건).[2] |
7월 15일 | 항공병 대령 승진, 신문반장 겸 대본영 보도부장. | |
12월 10일 | 하마마츠 육군 비행학교 부속. | |
1939년 | 3월 9일 | 제21군 참모 부장. |
1940년 | 2월 10일 | 남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강행에 관여) |
1941년 | 3월 1일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장.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 기무라 헤이타로, 사나다 죠이치로, 아카마츠 사다오와 함께 삼간사우 중 한 명으로 불림) |
10월 15일 | 소장 승진 (육군성령 임시 특례에 따른 이례적 승진).[3] | |
1942년 | 4월 20일 | 육군성 군무국장 취임. (과달카날 전투 증원 문제 및 선박 징용 문제, 다나카 신이치 참모본부 제1부장과의 난투극 등에 관여) |
1944년 | 9월 5일 | 육해 기술 운용 위원회 부위원장 (해군 군무국장과 공동).[4] |
12월 14일 | 지나 파견군 총참모 부장. (사이판 전투 함락 후 도조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중앙에서 좌천됨) | |
1945년 | 3월 1일 | 중장 승진. |
4월 7일 | 제37사단장 취임. | |
12월 | 예비역 편입. (일본 패전 후) | |
1948년 | 1월 31일 | 공직 추방 가처분 받음.[9] |
1975년 | 2월 6일 | 사망. |
4. 평가 및 비판
사토 겐료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의 주요 인물로, 강경한 군국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전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는 등 비판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과 인물상에 대한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1940년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당시, 현지에서 교섭을 담당했던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 기관의 코이케 류지 대좌는 사토에 대해 "이쪽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논적이지만 남자다운,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직권을 내세우며 음험했다고 평가받는 토미나가 쿄지 소장과는 다른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했을 때, 사토는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이유로 들어 국장(國葬)으로 치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진언했으나, 육해군 협조를 우선한 도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1944년 말 중국 파견군 총참모 부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스기야마 겐 육군대신에게 장제스와의 평화 교섭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당시 전황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육해 기술 운용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특수 기습 병기 개발 등 군사 기술 통합에 관여하기도 했다.[4]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6년 석방된 후에는 도큐 관재 사장을 역임했다. 신장은 169cm였다.[8] 바둑을 즐겨 오카 케이준 해군 중장과 교류했으며, 1975년 바둑 대국 중에 사망했다.
4. 1. 부정적 평가
1938년 3월 3일, 사토는 군무과 국내반장으로서 중의원의 국가총동원법 위원회에 육군성 설명위원으로 출석하여 이른바 ‘침묵 사건’을 일으켰다. 국회 심의 중 사토가 법안 설명과 자신의 신념 등을 장시간 연설하자, 다른 위원들(사토의 육사 시절 교관이었던 입헌정우회 소속 미야와키 쵸키치[2] 등)로부터 “그만둬라”, “토론이 아니다”라는 야유가 나왔다. 이에 사토는 '''“닥쳐!”'''라고 고함을 질렀다. 정부 측 설명원의 지위에 불과한 인물이 국회의원에게 폭언을 한 이 사건은 이타노 토모조 등에 의해 문제시되었으나, 사토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위원회는 파행되었다. 이후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이 사과했지만, 사토에 대한 특별한 처분은 없었다. 작가 반도 가즈토시에 따르면, 사토는 전후 인터뷰에서 "국방에 종사하는 자는 끊임없이 강인한 대비 없는 평화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비 없는 평화 따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저 총동원법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940년 2월 10일, 남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으로 부임한 후, 마츠오카·앙리 협정에 따른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진행했다. 그러나 현지 세부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 23일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군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토미나가 쿄지 참모본부 제1부장과의 공모에 의한 것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으며 토미나가는 좌천되었다.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 감시단장으로 교섭을 담당했던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은 육군 차관 등에게 보낸 전문에서 “통솔이 문란해져 신뢰를 국내외에서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사토의 상사였던 안도 리키치 남지나 방면군 사령관도 책임을 지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41년 3월 1일,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장에 취임한 사토는 도조 히데키의 측근 그룹인 "삼간사우"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는 군무과장으로서 쇼와 천황의 뜻에 따라 개전을 피하려던 도조 총리 겸 육상이나 신중론자인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보다, 다나카 신이치 참모본부 제1부장을 중심으로 한 개전 적극파 참모본부를 지지했다. 사토는 도조 앞에서도 미일 교섭에 소극적인 의견을 피력하다가 오히려 질책을 받기도 했다.
1942년 12월 5일, 과달카날 증원을 위한 선박 징발 문제로 다나카 신이치와 격렬한 언쟁 끝에 난투극을 벌이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작전에 소극적이던 도조의 의향을 따르던 사토와 민간 선박 증발을 강하게 요구하던 참모본부 측 다나카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 다음 날 다나카는 총리 관저에서 도조를 면박하다 파면되었다.
1945년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의 명령으로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사토는 최연소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중 도조 히데키와 함께 계속해서 군복을 착용했으며[6],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A급 전범 중 가장 늦게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1956년 3월 31일 석방되었다.
전후에도 사토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이는 자신의 반미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1965년 8월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베평련) 토론 집회에서는 미국을 규탄하며 중소 분쟁을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일본 공산당 대표에게 중소 대립 해소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7] 개전 당시 육군 중추에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에 가장 열성적이었다고 자평했으며, 사망 직전까지 면담자에게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은 성전이었다고 주장했다. 1963년에는 도쿄 재판에 대해 "나의 유죄를 결정한 것은 평시에 타국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범죄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에 방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있지 않은가. 도쿄 재판의 정체란 이런 것"이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5. 저서
참조
[1]
문서
第21回生、同期には海軍少将中堂観恵・海軍兵学校卒業生一覧 (日本)#44期、海兵44期、海軍大佐橘正雄・海軍兵学校卒業生一覧 (日本)#45期、海兵45期がいる。
[2]
서적
時刻表昭和史
宮脇俊三の実父
[3]
뉴스
東部軍司令官に田中静壱中将
東京日日新聞
1941-10-16
[4]
서적
戦史叢書87 陸軍航空兵器の開発・生産・補給
[5]
뉴스
梨本宮・平沼・平田ら五十九人に逮捕命令
毎日新聞(東京)
1945-12-04
[6]
뉴스
表情にあきらめ やせても小まめな東條
朝日新聞
1947-08-05
[7]
간행물
文芸
1965-09
[8]
서적
陸軍省軍務局と日米開戦
中公文庫
[9]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0]
문서
法廷証第122号: 佐藤賢了關スル人事局履歴書
NDLDC|10273422
[11]
웹사이트
畑俊六外七十二名
https://www.jacar.a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