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상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상림은 후한 말, 조위 시대의 인물로, 7세 때 아버지의 자를 함부로 부른 손님을 지적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하내 태수 왕광의 횡포를 막고, 상당에서 농사를 지으며 백성을 도왔다. 이후 현령, 박릉 태수, 유주 자사 등을 역임하며 조비의 공조가 되었고, 조비가 즉위한 후 소부, 대사농 등을 거쳐 광록훈, 태상이 되었다. 만년에 삼공으로 추천되었으나 사퇴하고 광록대부가 되었으며, 83세에 사망하여 표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위의 정치인 - 정무
    정무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정사 삼국지에는 정욱의 아들로 조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으로 촉한의 제1차 북벌 때 조운을 상대로 계책을 내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묘사되지만, 관흥과 장포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남안으로 퇴각한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조위의 정치인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상림

2. 행적

상림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총명함으로 주목받았다. 후한 말 혼란기에는 하내 태수 왕광의 횡포로부터 숙부를 구하고, 상당에서는 장양의 위협으로부터 지역 유력 가문을 보호하는 등 의로운 행보를 보였다.

이후 병주 자사 양습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가 현령을 시작으로 박릉태수, 유주자사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일 때 그의 공조(功曹)가 되어 보좌했으며, 위나라 건국 후에는 상서, 소부, 대사농, 광록훈, 태상 등 중앙 정부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문제명제 시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상림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말년에는 삼공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노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광록대부로 은퇴하였다. 83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표기장군으로 추증되고 시호(貞)으로 내려졌다.

2. 1. 후한 말

7살 때 아버지의 친구가 아버지의 를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고 예의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여 어릴 때부터 명성을 얻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손님이 아버지의 자를 부르자 배례하지 않고 그 이유를 당당히 밝혀 평판이 높아졌다고도 한다.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타인의 도움 없이 태학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며 직접 농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위략』). 아내가 늘 상림에게 직접 도시락을 가져다주었고, 상림 역시 아내를 손님처럼 존중하며 대했다고 한다(『위략』).

하내 태수 왕광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면서, 현의 관리와 백성들을 염탐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 재물로 속죄하지 않으면 일족을 몰살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이때 상림의 숙부가 식객을 때린 일이 왕광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자, 상림은 같은 현 출신인 호모표(胡母彪)를 찾아가 왕광의 부당함을 설명하며 중재를 요청했다. 호모표가 상림을 위해 왕광에게 편지를 보내 꾸짖자, 왕광은 상림의 숙부를 풀어주었다.

이후 상당으로 피신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다. 당시 병충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입었으나 유독 상림의 밭만 풍작을 이루자, 그는 수확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상당태수 장양이 대대로 관리를 지낸 지역 유지 진씨(秦氏)와 풍씨(馮氏) 집안의 부녀자와 재물을 탐내자, 상림은 계책을 세워 이들을 보호했고, 60여일 간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켜냈다.

후에 병주 자사였던 고간이 상림을 기도위로 추천했으나 사양했다. 그러나 이후 조조가 임명한 병주자사 양습양준, 왕릉, 왕상, 순위 등과 함께 상림을 다시 추천하자 이번에는 받아들여 현령이 되었다. 남화현(南和縣)을 다스리며 훌륭한 치적을 쌓았고, 이후 박릉태수와 유주자사로 승진하며 계속해서 공적을 세웠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그의 공조(功曹)로 임명되었다. 조조가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와 기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조비가 직접 토벌에 나서려 했다. 이때 상림은 조비에게 직접 나서지 말고 부하 장수를 보내 토벌하도록 간언했고, 조비는 이를 받아들여 장수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외직으로 나가 평원태수와 위군 동부도위를 지냈고,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상부 동조속(東曹屬)이 되었다.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상서에 임명되었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황제에 오르자 소부로 승진하고 악양정후(樂陽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부로 재직할 당시 작은 잘못을 한 관리들을 자주 매질했는데, 관청이 마주보고 있던 대홍려 최림에게 이 일로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위략』).

명제가 즉위하자 고양향후(高陽鄕侯)로 봉작이 올랐는데, 이는 노육의 추천에 따른 것이라고도 한다. 이후 광록훈태상을 역임했다. 당시 고관이었던 사마의 역시 동향 선배인 상림을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 상림의 절조와 청렴함을 높이 사 삼공으로 추천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상림은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광록대부 자리를 받았다.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표기장군으로 추증되고 시호(貞)으로 내려졌다. 장례는 의 예우로 치러졌다.

아들 상시(常時)가 뒤를 이었으나, 제갈탄의 반란 때 병을 핑계로 출진 명령에 따르지 않아 사마소에게 처형당했다. 이후 상시의 동생 상정(常靜)이 후사를 이었다.

2. 2. 조위

별부사마 영 병주자사 양습양준·왕릉·왕상·순위 등 주 안의 명사들과 함께 상림을 추천하였다. 이전에 병주자사였던 고간의 추천은 사양했으나, 조조가 임명한 양습의 추천은 받아들여 현장이 되어 남화(南和)를 다스렸고, 훌륭한 치적을 올렸다. 이후 박릉 태수와 유주 자사로 승진하며 공적을 이어갔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그의 공조로 임명되었다. 조조가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기주가 소란해지자, 조비는 직접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상림은 조비에게 친정하지 말고 대신 장수를 보내 토벌하도록 간언하였고, 조비는 이를 받아들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외직인 평원 태수와 위군 동부도위를 거쳐,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부의 동조속을 지냈다.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상서가 되었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소부로 승진하고 악양정후에 봉해졌다. 이때 작은 관리를 자주 매질하여 맞은편 관청에 있던 대홍려 최림에게 책망을 받고 부끄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후에 대사농으로 옮겼다.

명제가 즉위하자 노육 등의 추천으로 고양향후로 봉작이 올랐으며, 광록훈태상을 역임했다. 당시 고관이었던 사마의도 동향 선배인 상림을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상림은 절조 있고 청렴하다는 평판이 있어 삼공으로 삼으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스스로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은퇴하여 광록대부가 되었다.

83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표기장군으로 추증되고 의 예우로 장례가 치러졌다. 시호(貞)으로 내려졌다.

아들 상시가 뒤를 이었으나, 제갈탄의 난 때 병을 핑계로 출병하지 않아 사마소에게 처형되었다. 이후 상시의 동생 상정이 뒤를 이었다.

3. 일화

상림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7세 때, 아버지의 자(字)를 부른 손님에게 배례하지 않고, 이유를 묻자 당당하게 답하여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성장한 후에도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태학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농사일을 했다. 그의 아내는 늘 직접 도시락을 가져다주었고, 상림 또한 아내를 손님처럼 존중하며 대했다고 한다.

하내태수 왕광이 동탁 타도를 위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는 현에 서생들을 보내 관민들의 죄를 조사하게 했다. 죄가 드러나면 재산을 몰수하고, 즉시 따르지 않으면 일족을 몰살하는 형벌로 위엄을 세우려 했다. 이때 상림의 숙부가 식객을 매질한 일로 왕광에게 체포되자, 상림은 왕광과 같은 현 출신인 호무표를 찾아가 이치에 맞게 설득하여 중재를 부탁했다. 호무표가 왕광에게 편지를 보내 간언하자 왕광은 상림의 숙부를 풀어주었다.

이후 상림은 상당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가뭄과 황충 피해 속에서도 상림의 밭만은 풍작을 이루자, 그는 수확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현지의 진씨와 풍씨가 장양의 압박을 받자, 상림은 그들을 위해 계책을 세워 장양의 침략을 막아냈다.

훗날 병주자사였던 고간이 그를 기도위로 추천했지만 상림은 사양했다. 그러나 이후 조조가 임명한 병주 자사 양습의 추천은 받아들여 현장(縣長)이 되어 남화(南和)를 다스리며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이 공로로 박릉 태수와 유주 자사로 승진하여 계속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상림을 공조에 임명했다. 조조가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전은과 소백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와 기주를 위협하자, 조비는 직접 토벌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상림은 조비에게 직접 나서는 대신 부하 장수에게 토벌을 맡기도록 간언했고, 조비는 이를 받아들여 전은 등을 진압했다.

이후 상림은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평원 태수, 위군 동부도위를 거쳐 승상 동조속이 되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상서에 임명되었다.

문제가 즉위하자 소부로 승진하고, 낙양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제가 즉위하자 고양향후가 되었는데, 이때 노육의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광록훈태상을 역임했다.

만년에 상림을 삼공에 추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는 중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표기장군으로 추증되고 정공(靖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상시는 작위를 이어받아 태산 태수까지 올랐으나, 제갈탄의 반란 때 병을 핑계로 출병 명령에 따르지 않아 사마소에게 처형되었다. 상시 사후에는 그의 동생 상정이 뒤를 이었다.

3. 1. 최림과의 일화

상림이 소부 시절 관리를 엄하게 다스렸다. 당시 소부의 관사는 대홍려 관청과 이웃해 있었기에, 대홍려 최림은 상림이 관리를 매질하는 소리를 매번 들었다. 상림은 주로 밤에 관리들을 매질했는데, 관리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해가 뜨도록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최림은 문을 나서다가 상림을 만나자 "듣기에 경께서는 정위가 되셨다는데, 정말입니까?"라고 물으며 조롱했다. 상림은 최림의 속셈을 모르고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최림은 "경께서는 정위도 아니면서 어젯밤에 죄수를 문초하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말을 들은 상림은 매우 부끄러워했으나, 매질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3. 2. 사마의와의 일화

동향 사람인 사마의는 상림을 덕망 높은 고향 어른으로 여겨 항상 그에게 절을 했다. 어떤 이가 상림에게 사마의는 신분이 높은 귀인이니 이제 그만 절을 받으라고 권유했지만, 상림은 어른과 젊은이 사이의 예의와 순서(장유유서)를 지키는 것이 옳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사마의가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에도 상림은 동향 선배로서 여전히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4. 가계

상림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위략』).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자(字)를 함부로 부른 손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그 이유를 당당히 밝혀 주변의 평판을 얻었다.

성장 후에도 가난했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태학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며 농사일을 병행했다. 그의 아내는 손수 도시락을 가져다주었고, 상림 역시 아내를 손님처럼 존중하며 대했다고 한다(『위략』). 또한 하내 태수 왕광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가혹한 정치를 펼칠 때, 죄를 뒤집어쓴 숙부가 체포되자 같은 현 출신인 호무표를 설득하여 숙부를 구출하기도 했다.

자녀
이름설명
상시(常時)장남.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고 태산 태수까지 올랐으나, 제갈탄의 반란 당시 병을 핑계로 출진하지 않아 사마소에게 처형되었다.
상정(常靜)차남. 형 상시가 처형된 후 뒤를 이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