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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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영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963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사법시험 합격 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00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6대부터 18대까지,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0년 인천광역시장에 당선되었으며, 2021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를 역임했다. 2022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23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소나무당을 창당하여 2024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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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정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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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송영길 |
로마자 표기 | Song Yeonggil |
한자 표기 | 宋永吉 |
출생일 | 1963년 3월 21일 (양력) |
음력 생일 | 1963년 2월 26일 |
출생지 | 전라남도 고흥군 |
배우자 | 남영신 |
자녀 | 1남 1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명: 김대건 안드레아) |
학력 | 연세대학교 |
정당 | |
소속 정당 | 소나무당 |
과거 소속 정당 |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 민주통합당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
국회의원 | |
선거구 | 인천광역시 계양구 (2000~2004) 인천광역시 계양구 을 (2004~2010, 2016~) |
선수 | 5선 |
당선 횟수 | 5회 |
재임 기간 | 2000년 5월 30일 ~ 2010년 4월 26일 2016년 5월 30일 ~ 2022년 4월 29일 |
국회 상임위원회 |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간사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
인천광역시장 | |
재임 기간 |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
직위 | 제5대 인천광역시장 |
더불어민주당 | |
직위 | 당대표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회 위원장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 탄소중립특별위원회 위원장 상임고문 민주연구원 이사장 |
당대표 재임 기간 | 2021년 5월 2일 ~ 2022년 3월 10일 |
기타 경력 | |
주요 경력 | 참여연대 회원 대우자동차 고문변호사 연세대학교 초대 총학생회장 새천년민주당 노동특별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시민사회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전자정당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열린정책연구원 수석부원장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대통합민주신당 인천광역시당 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인천유나이티드 FC 구단주 대통령비서실 러시아 특사 초대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명예 부산광역시민 |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재임 기간 | 2017년 8월 25일 ~ 2018년 7월 24일 |
웹사이트 | |
개인 웹사이트 | 송영길 홈페이지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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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송영길은 1963년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에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63년 3월 21일이지만, 실제로는 1963년 4월 14일에 태어났다고 한다.[50] 이순신 장군을 모셨던 전라좌수사 송희립 장군의 직계 후손이다. 본관은 려산 송씨이며, 가톨릭 신자이다.[19]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1985년 인천 대우자동차 르망공장에 배관 용접공으로 입사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이후에도 노동 상담 및 택시 노동조합 활동 등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 정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인천광역시 계양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광역시장 선거에 야당 통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시장 취임 직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의 교류 협력 사업을 즉시 재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히는 등 남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0]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자유한국당) 후보 유정복에게 패하여 재선에는 실패했다.[21]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계양구 을에서 출마하여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22] 2021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나,[23] 2022년 202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후보가 패배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26]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으나,[27][28] 현직 오세훈 후보에게 패했다.[29]
2023년, 2021년 당 대표 선거 당시 돈 봉투 살포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30] 증거인멸 우려로 구속되었다.[31] 2024년 검찰에 의해 정식 기소되었으며,[32] 구속 상태에서 소나무당을 창당하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광역시 서구 출마를 선언했다.[33][34][35]
2. 1. 어린 시절과 학생운동
송영길은 1963년 3월 2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가난한 공무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려산 송씨이다.[19] 시골에서 자란 그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980년 5월, 고등학생이던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격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1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반독재 운동에 참여했다.1984년, 송영길은 고려대학교 김영춘, 서울대학교 이정우 등과 함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총학생회장을 학생들이 직선으로 선출하도록 고쳤다. 연세대학교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반군사독재학생운동을 주도하다 1985년 구속, 수감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사면 복권되어 대학교를 졸업했다.[51]
1984년 12월 서울역, 종로 등에서 반정부시위와 민정당사 점거 농성으로 구속되었다 1985년 석방된 그는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 르망공장 건설현장에서 배관용접공으로 일했다. 이후 장갑 공장, 가구 공장 등에서 일했고, 1987년 독일 인권재단의 도움으로 인천 부평에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열어 노동자 인권 관련 활동을 했다.
1987년부터 운수노조 노보 상담실장을 하며 택시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1991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택시, 버스, 화물자동차 운전기사 등 운수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했다.[52][53]
2. 2. 노동운동
송영길은 1984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고, 연세대학교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반군사독재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1985년 구속, 수감되어 학교에서 제적되었다.[51] 1987년 6월 항쟁으로 사면 복권되어 대학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51]1985년 석방된 후, 송영길은 인천 부평에 있는 한국지엠(당시 대우자동차) 르망공장 건설현장에서 배관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51] 그 외에도 장갑 공장, 가구 공장 등에서 일했고, 1987년 독일 인권재단의 도움으로 인천 부평에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노동자 인권 관련 법률상담, 구제활동, 노동조합 관련 교육 및 법적 지원활동을 했다.
1987년부터 운수노조 노보 상담실장을 맡아 택시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52] 1991년에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택시, 버스, 화물자동차 운전기사 등 운수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52][53]
2. 3. 변호사 활동
1990년대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송영길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의 노동자들이 학출 노동운동가들의 바람과 달리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갈등을 지켜보고 변화를 겪는다. 1991년 동유럽으로 한 달 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다녀온 송영길은 공산주의 진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인천지역 노동운동가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가족과 아내의 권유로 1992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택시노련에서는 송영길의 결심에 대한 찬반표결을 결정할 정도로 그의 당시 영향력은 컸다고 전해진다.[54] 노동운동 활동보다 변호사 자격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역설을 겪은 송영길은 재야 노동운동보다 제도 내 개혁에 뛰어들게 된다.송영길은 2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1994년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1997년에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가 변호사로서 지역 운동에 투신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했고, 전국민주택시노련 고문변호사, 인천 계양구 건축분쟁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55][56]
2. 4. 정치 활동
송영길은 1999년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변호사 시절부터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등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회 차원의 일본교과서왜곡시정대책특위 활동을 통해 결의안을 내고,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61]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서는 미국에 대한 독자적인 의원 외교 필요성을 주장하며, 이라크 현지 조사단을 꾸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전달했다.[64][65][66][67]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광역시장에 당선되어,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도 2014년 아시안 게임 규모 축소, 공무원 수당 삭감 등 재정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71][72]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인천에 유치하고, 녹색기후기금을 송도국제도시에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75][40][41]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 도전했으나 예비 경선에서 탈락했다.[91][92][93]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경선 캠프에서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95]
2021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나,[14] 2022년 202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26]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27][29]
2023년에는 2021년 당 대표 선거 당시 돈 봉투 살포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증거인멸 우려로 구속되었다.[30][31] 2024년에는 구속 상태에서 소나무당을 창당하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광역시 서구 출마를 선언했다.[33][34][35]
2. 4. 1. 국회의원 활동 (16대 ~ 18대)
임기 | 직함 | 정당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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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2004.05 | 제16대 국회의원 (인천 계양구) | 새천년민주당→무소속→열린우리당 | 초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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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008.05 | 제17대 국회의원 (인천 계양구 을) |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 | 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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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010.04 | 제18대 국회의원 (인천 계양구 을) | 통합민주당→민주당 | 3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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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은 변호사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 생활과 인권 관련 법안 처리를 위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지원했다. 몽골에서 열린 동북아 5개국 인권·의회회의에 참석한 국회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회의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연설을 하고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법안을 제안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민주당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부 및 서울시와 지연된 보상 및 장례 문제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시기의 사건들은 수십 년 동안 곤란한 문제(thorny issues)였는데,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상 문제, 일본 교과서에 나타나는 왜곡된 역사, 그리고 독도의 명칭 및 영토권 문제 등이 포함된다. 송영길은 다른 의원들과 함께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과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관한 결의안을 제안하고, 한국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2001년에는 특별위원회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정보가 담긴 CD를 해외 600개 기관에 보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고 다른 국가들의 지지를 요청했다. 또한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것 외에도, 한일 국회의원 연맹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파트너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방안을 모색하는 성명서를 제안했다. 이처럼 송영길은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강조하고 미래 지향적인 파트너십에 기여했다.[2]
2. 4. 2. 인천광역시장
2010년 4월 12일, 송영길은 인천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승리를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수도권 3곳(서울, 경기, 인천) 중 서울과 경기의 민주당 승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천에서 승리하여 수도권 전체 승리의 바람을 일으키고 정권 교체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68] 그는 중소기업 육성, 구도심과 신도심의 균형 발전, 복지 서비스 확충, 교육 경쟁력 강화, 친환경 무상급식 실시 등을 통해 인천을 대한민국 경제수도로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69]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를 8.3% 차이로 누르고 인천시장에 당선되었다.
당선 후, 송영길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인천시의 실질적인 부채는 11조 7,300억 원에 달했다.[70] 2010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7조 5천억 원 규모로 알려졌으나, 회계 방식 변경과 감사원 감사 결과 숨겨진 부채가 추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송영길은 재정난 해결을 위해 아시안게임 규모 축소(6,358억 원 감축)[71], 공무원 수당 삭감[72]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또한, 인천터미널 부지를 9천억 원에 매각하고[73], AG 선수촌 및 미디어 선수촌 건설 예산을 구월 보금자리주택으로 대체하여 1조 6천억 원의 자금 동원 부담을 줄였다. 도시철도 2호선 계약 방식 변경으로 444억 원을 절감하는 등 재정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0조 원 규모의 16개 개발 사업을 취소 또는 축소하고, 송도파크호텔, 영종보금자리, 검단산업단지 등 자산 매각을 실시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13년에는 4,506억 원의 부채를 줄이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부채 감소와 800억 원 흑자 전환을 달성했다. 인천시는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부채가 21조 원에 달했을 것이라고 밝혔다.[74]
2011년 2월에는 삼성바이오 합작사를 인천에 유치했다.[75] 삼성그룹은 5대 신수종 사업 중 하나로 바이오신약 개발을 목표로 삼고, 인천 송도에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전담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76] 총 2조 원(플랜트 건설 1조 원, 바이오시밀러 개발 1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76] 송영길은 송도가 바이오테크놀로지(BT)의 메카가 될 것이라는 청사진과 기반 시설을 제시하며 삼성을 설득하여 유치를 이끌어냈다.[77]
인천광역시는 3대 핵심 사업(Child・Edu・Job Care)을 선정하여 추진했으며, 그중에서도 Job Care(일자리 창출·창업 지원)에 힘썼다.[36] 문제가 많았던 공기업을 4개에서 2개로 통폐합했고,[37] 인천광역시 예산에서 토목 건설 관련 예산을 줄이고 교육·복지 예산을 확대했다.[38]
또한 2014년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한 준비에 힘썼으며,[39] 2012년에는 환경 분야의 세계은행이라 불리는 국제연합의 Green Climate Fund|녹색기후기금영어을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에 유치했다.[40][41]

2. 4. 3. 국회의원 활동 (20대 ~ 21대)
2016년 3월 1일, 송영길은 자신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구 을 출마를 선언했다. 험지 출마를 고려하였으나, 송영길의 만류에도 최원식 의원이 탈당하자 계양을 지역 출마를 결심했다. 출마선언에서 총선 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 도전할 것을 천명하고, 인천 전체 선거에 무한책임을 지며, 인천 정치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91] 2016년 4월 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 계양을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윤형선 후보를 12% 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이로써 2010년 인천시장 출마 이후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2016년 7월 24일 "강한 야당을 만들어 정권교체에 헌신하겠다"며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92] 당초 유력 후보로 분류되었으나, 예비 경선에서 탈락했다. 범주류 후보로 선두 그룹으로 분류되던 송영길 후보의 예비경선 탈락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93] 당내에서는 송 후보의 컷오프 이유로 크게 친노(친노무현) 표 분산과 비주류 대표주자를 자처한 이종걸 의원의 막판 출마로 인한 비노(비노무현) 진영 결집, 역선택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94]
2017년 2월 8일 문재인 대선 경선 후보의 경선 사령탑인 총괄선대본부장에 임명됐다. 문재인 전 대표가 삼고초려를 통해 송영길 의원을 영입했다고 알려졌으며, 송 의원은 "경선 출마 여부도 고민했지만 문 후보를 통해 정권교체의 희망을 이루는데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며 "문 후보를 도와 대한민국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95]
이후 2018년에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해 이해찬, 김진표 후보와 함께 본선에 진출했다.
21대 총선을 앞둔 2020년 1월에 한국지엠에서 소형 SUV 트레일블레이저의 출시 및 부평공장 생산을 확정 짓자, 인천 지역 경제 살리기의 일환으로 트레일블레이저 1대를 구입하여 화제가 됐다.[96]
2. 4. 4.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2021년 5월 2일, 송영길은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14] 그는 35.60%의 득표율을 얻어 홍영표를 0.59%p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14]2022년 3월 7일, 202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틀 전, 송영길은 신촌에서 대통령 후보 이재명을 위한 유세 중 공격을 받았다.[15][16] 그는 즉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고, 다행히 안전한 것으로 알려졌다.[15][16] 용의자가 더불어민주당에 우호적인 유튜버였다는 보도에도 불구하고, 여러 민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을 "극우 테러"로 규정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7][18]
2022년 3월 10일, 전날 치러진 202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이 패배한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26]
2. 4. 5. 서울특별시장 선거
2022년 4월 1일, 송영길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27] 민주당 경선에서 김진애 전 의원을 누르고 민주당 후보가 되었으나, 본선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패했다.[29]3. 논란
송영길은 여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았다.[104] 대법원은 2006년 11월 23일 원심을 확정했다.[105]
- 18대 총선에서는 홍보책자에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경력만 적고 절도 및 공문서변조 전과를 누락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공문서 위조나 악의적 누락이 아니라 경찰 공무원의 착오로 인한 것이라 판단하여 벌금 50만 원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107]
- 20대 총선에서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벌금 90만 원을 선고받았다.[108] 송영길은 2016년 3월 3일, 선거사무소 자원봉사자 등과 함께 인천도시철도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 개찰구 앞 등지에서 명함 605장을 유권자들에게 나눠준 혐의로 기소되었다.
- 2000년 5·18 전야제 술파티 파문 당시 광주광역시에 있는 '새천년NHK' 가라오케 룸에서 술자리에 참석하여 논란이 되었다.[110] 임수경은 송영길이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불렀다고 증언했다.[111] 송영길은 계획된 자리가 아니었다며 유감을 표했다.[112]
- 2010년에는 송영길이 베트남에서 17세 소녀에게 성 접대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113] 법원은 해당 의혹이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했다.[117]
- 송영길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효석 전 인천시 서울사무소장은 건설회사로부터 5억원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징역 7년, 벌금 5억원, 추징금 5억원을 선고받았다.[120]
- 2023년 12월, 2021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보궐선거에서 당선을 위해 뇌물을 살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109], 12월 19일 구속되었다. 송영길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4. 기타 활동
송영길은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대 후반 버마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펼쳤다.[141] 또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으며, 서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안 발의에도 힘썼다.[148][149][150]
4. 1. 버마 민주화 운동 지지
2007년, 송영길은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노력했던 동료 의원 13명과 함께 버마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공동 발의하고, 성금을 모아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에 전달했다.[141] 2008년 10월, 민주당을 중심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13년째 연금 상황에 처해있는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 촉구와 불의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버마 민주시민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국회의원 35명의 명의로 반기문 UN사무총장과 버마 군사정부에 민주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141] 인천광역시장으로 당선된 후인 2011년에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민주주의를 향한 헌신과 정복되지 않는 고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2014년 아시안 게임 방문을 요청했다.[142]4. 2. 남북 교류 및 협력 추진
송영길은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북핵문제 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지속적인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북한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북한 경제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등 북한 내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143]송영길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이자 북한의 자발적 경제 자생, 그리고 한반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개성공단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국 중소기업의 활로 개척에 구심점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업 관계자 및 정부 측과 함께 토론회를 개최하여 북측에 더 많은 기업이 진출하여 북한의 자발적인 개혁, 개방을 유도하면서 함께 상생․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144]
현 정부의 대북 강경책으로 인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송영길과 민주당은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145] 6.15, 10.4 공동선언 이행을 정부에 촉구하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와 6자회담이 동북아 안보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변국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추진해야 함을 주장하는 등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146]
2010년 인천광역시장으로 당선된 후 남북 화해와 교류, 평화와 통일의 전진기지 역할을 자임해온 송영길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서해 5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남북평화재단과의 협약을 통해 북한 평양산원의 산모, 영유아들에게 물품을 지원함으로써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단절된 대북 지원 사업의 물꼬를 텄다.[147]
4. 3. 서민경제 활성화
송영길은 일부 기업 및 재벌 중심 정책이 아닌, 다수의 서민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민생법안들을 발의했다. 특히 재래시장 상인들의 임대료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법안[148], 대형마트로 인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재래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안[149], 과대한 임대료 인상 방지와 세입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안을 발의했다.[150]송영길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6년간 활동하면서, 한국 경제의 주요 원동력이 전체 기업의 8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이들 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008년, 많은 중소 수출 기업들이 환율 변동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키코(KIKO)라는 외환옵션 상품을 매입했다.[5] 그러나 정부의 부적절한 환율 정책으로 인해 이들 기업들은 다시 몰락 위기에 처했지만, 정부는 중소기업 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송영길은 더불어민주당에 이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해결책 모색을 촉구했다.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십 차례의 중소기업 간담회를 개최하고, 청문회를 통해 의견 차이를 줄이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 결과, 정부로부터 우수 중소기업에 대한 신속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5. 소속 정당
정당 | 기간 |
---|---|
새정치국민회의 | 1997년 ~ 2000년 |
새천년민주당 | 2000년 ~ 2003년 |
무소속 | 2003년 |
열린우리당 | 2003년 ~ 2007년 |
대통합민주신당 → 통합민주당, 민주당 → 민주통합당,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2007년 ~ 2016년 |
더불어민주당 | 2016년 ~ 2023년 |
무소속 | 2023년 ~ 2024년 |
(가칭)검찰해체당 | 2024년 |
소나무당 | 2024년 ~ |
6. 학력
- 1976년 광주중흥초등학교 졸업
- 1979년 광주북성중학교 졸업
- 1981년 광주대동고등학교 졸업
- 1988년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 2005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 학사
- 2009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 4학년 (휴학)
- 2013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 학사
; 명예 박사 학위
- 2018년 조선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19]
7. 수상
연세대학교 자랑스러운 연세인상 수상
러시아 연방 우호훈장(орден Дружбы) 수훈
우수 국회 연구단체 선정
*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원 연구 모임 Forum to better the livelihood of the people of Republic of Korea (공동대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Officier)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