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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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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질서(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가 수카르노를 축출하고 1966년부터 1998년까지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1965년 9.30 사건 이후 수하르토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반공주의와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다. 신질서는 경제 개발을 통해 빈곤을 감소시키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지만,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인권 탄압, 부정부패 심화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로 인해 경제가 붕괴되면서 수하르토는 사임했고, 신질서는 종말을 맞이했다. 수하르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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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 (인도네시아)
개요
이름신질서 (인도네시아어: Orde Baru)
위치인도네시아
시작1966년
종료1998년
자카르타 메르데카 광장에서 인도네시아 독립 기념일 4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
자카르타 메르데카 광장에서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 4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
이전신질서 전환기
포함수하르토 권한대행
이후수하르토 이후 시대
정치
지도자수하르토
주요 사건
주요 사건인도네시아 대량 학살
수페르세마르 서명
1976년 팔라파 발사
동티모르 점령
동티모르 집단 학살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인도네시아 폭동
수하르토 사임

2. 배경

1945년 인도네시아 공화국 건국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지도하의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점차 독재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그는 나사콤(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 개념을 통해 군부, 이슬람 단체, 그리고 점증하는 세력인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PKI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수카르노의 반제국주의 노선은 소련,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했지만 서방 국가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여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기반 시설이 붕괴하는 등 국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수카르노 정부는 경제 문제 해결에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고, 말레이시아와의 군사적 대치인 ''콘프론타시''를 강행하고 유엔에서 탈퇴하는 등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2]

1965년경 냉전의 긴장 속에서 PKI는 정부 각 부문에 깊숙이 침투하며 군부와의 갈등을 격화시켰다.[2] PKI의 토지 몰수 정책은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무장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제5부대' 창설 시도는 군부의 강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3] 이러한 국내외적 불안정과 정치 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신질서 체제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2]

2. 1. 수카르노 시대의 정치적 혼란

수카르노는 1945년 공화국 건국 이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1955년 제1차 총선 결과 불안정한 의회가 구성되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수카르노의 통치는 그의 "지도하의 민주주의" 이념 아래 점점 더 독재적으로 변해갔다. 위대한 "달랑"(꼭두각시 조종자)으로 묘사된 수카르노의 권력은 나사콤(Nasakom, 민족주의-종교-공산주의)이라는 개념에 기반했는데, 이를 통해 그는 경쟁 관계에 있는 인도네시아 군부, 이슬람 단체, 그리고 점차 강력해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다. 군부와 이슬람 단체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한 PKI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수카르노의 반제국주의 이념은 인도네시아를 소비에트 연방 및 중국과 가깝게 만들었으나, 이는 서방 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정부는 공공 부문 보조금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연간 인플레이션은 최대 1,000%까지 치솟았다. 수출 수입은 감소하고 사회 기반 시설은 붕괴했으며, 공장들은 최소한의 가동률로 운영되었고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카르노 정부는 국민들을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할 실질적인 경제 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점점 더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를 말레이시아와의 군사적 대치인 ''콘프론타시''로 이끌었고, 유엔에서 탈퇴했으며, 혁명적이고 반서구적인 선동을 강화했다.[2]

1965년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PKI는 정부의 모든 부문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수카르노와 공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PKI는 군부를 견제하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는 군부의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2] 또한, 많은 지주였던 이슬람 성직자들은 PKI가 농촌 지역에서 벌이는 토지 몰수 활동에 위협을 느꼈다. 군부는 수카르노가 PKI의 무장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이른바 "제5의 부대" 창설 계획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3] 이러한 계획은 PKI가 CBS 뉴스 기자를 통해 처음 공개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서방 국가들이 PKI가 지원하는 좌익 세력에 맞서 우익 세력을 지원하면서 군 내부의 분열이 조장되기도 했다.[2]

2. 2. 경제적 어려움과 대외 관계

수카르노 정부는 경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공공 부문 보조금을 폐지해야 했으며, 연간 인플레이션은 최대 1,000%까지 치솟았다. 수출 수입은 줄어들고 기반 시설은 무너졌으며, 공장들은 최소한의 가동률로 운영되고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국민들을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할 실질적인 경제 시스템을 제공하지 못했다.

한편, 수카르노반제국주의 이념은 인도네시아를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고, 이는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를 말레이시아와의 군사적 대립인 ''콘프론타시''로 이끌었으며, 유엔에서도 탈퇴하였다. 또한 혁명적이고 반서구적인 선동을 강화했다.[2]

2. 3. 9.30 사건과 수하르토의 등장

1965년 9월 30일, 스스로를 9월 30일 운동이라 칭한 단체가 대통령 암살을 위한 우익 정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명의 장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하르토 장군은 이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곧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군은 대대적인 반공주의 숙청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4][5]

수카르노 대통령이 9월 30일 사건의 전개 과정을 알고 있었거나 관련자들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의혹, 그리고 군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한 좌익 및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가미(KAMI)와 같은 학생 단체들은 군부를 지지하며 수카르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966년 3월, 수하르토는 안보 유지를 명분으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대통령령, 이른바 수페르세마르를 확보했다. 수하르토는 이 명령을 근거로 1966년 3월 PKI를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해산시켰다. 또한 의회(MPRS), 정부, 군부 내에서 수카르노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 자리를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웠다. 숙청 대상자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 동조자로 지목되었다.[6]

숙청 이후 새롭게 구성된 의회는 1966년 6월 회기에서 여러 중요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들은 수카르노 대통령이 번복할 수 없는 효력을 지녔으며, PKI 금지를 공식화하고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결의안 설명 메모에 따르면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등이 가르친 투쟁의 기본 원리와 전술을 포함하도록 명시적으로 정의됨)의 전파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수페르세마르 자체를 의회 결의안으로 격상시켜 수카르노가 이를 철회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수카르노의 종신 대통령 지위도 박탈하는 다른 결의안도 공포했다.

1966년 8월에서 9월 사이, 수카르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신질서 정부는 말레이시아와의 대립 정책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UN에 다시 가입했다.

1967년 3월, 의회는 수카르노에 대한 탄핵 절차를 개시했다. 탄핵 사유로는 9월 30일 운동에 대한 명백한 관용적 태도, PKI의 국제 공산주의 활동 지원, 경제 정책 실패, 그리고 개인적인 여성 편력을 통한 국가적 '도덕적 타락' 조장 등이 제기되었다. 결국 같은 해 3월, MPRS는 수카르노의 남은 권력을 모두 박탈하고 수하르토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

수카르노는 보고르 궁전가택 연금되었고,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차단된 상태로 지내다 1970년 6월 사망했다. 1968년 3월, MPRS는 수하르토를 임기 5년의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수하르토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3. 수카르토의 권력 장악과 신질서

1965년 9월 30일 운동 진압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수하르토 장군은 군부를 동원해 대규모 반공 숙청을 주도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4][5] 그는 학생 운동과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1966년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안보 유지를 명목으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대통령령(수페르세마르)을 받아내 사실상 통치권을 확보했다.[6] 이후 의회와 정부, 군부 내 수카르노 지지 세력을 숙청하고 점진적으로 수카르노의 권력을 박탈하여, 1967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30년 이상 지속된 신질서 시대가 시작되었다.

수하르토 장군. 신질서 체제를 이끌었다.


1968년 3월 27일 수하르토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수하르토 정권은 이전 수카르노 시대를 "구질서"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신질서"라 칭하며 차별성을 강조했다. 국가 이념으로는 판차실라를 내세워 모든 조직이 이를 유일 원칙으로 따르도록 강제했으며[7], 군부가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드위풍시(이중 기능) 정책을 통해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3. 1. 수카르노 축출 과정

1965년 9월 30일, 자신들을 9월 30일 운동이라 칭하는 단체가 대통령 암살을 위한 우익 음모가 있다며 6명의 장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하르토 장군은 이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곧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군은 대대적인 반공주의 숙청을 주도하여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4][5]

9월 30일 사건에 대해 수카르노 대통령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군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한 좌익 및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수카르노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가미(KAMI)와 같은 학생 단체들은 군부를 지지하며 수카르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1966년 3월, 수하르토는 안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대통령령, 이른바 수페르세마르를 확보했다. 이 명령을 근거로, 1966년 3월 PKI는 금지되었고 의회(MPRS), 정부 및 군부 내에서 수카르노 지지자들(그중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 동조자로 고발됨)이 숙청되고 수하르토 지지자들로 대체되었다.[6]

숙청된 의회는 6월 회기에서 수카르노가 취소할 수 없는 의회 결의안(''Tap MPRS no. XXV/MPRS/1966'')을 공포했는데, 이는 수하르토의 PKI 금지와 동시에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sic''; 결의안의 관련 설명 메모에서 "…스탈린, 마오쩌둥 등이 가르친 투쟁의 기본 원리와 전술"을 포함하도록 명시적으로 정의됨)를 금지했으며, 수페르세마르를 수카르노가 취소할 수 없는 의회 결의안으로 격상시키고 수카르노의 종신 대통령직을 박탈하는 다른 결의안도 공포했다. 1966년 8월~9월, 수카르노의 의사에 반하여 신질서는 말레이시아와의 대립을 종식하고 국제연합에 재가입했다. 1967년 3월, 의회는 9월 30일 운동에 대한 명백한 관용과 PKI의 국제 공산주의 의제 추진, 경제 방치, 여성 편력을 통한 국가적 "도덕적 타락" 조장 등을 이유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진행했다. 1967년 3월, MPRS는 수카르노의 남은 권력을 박탈했고 수하르토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수카르노는 보고르 궁전가택 연금되었고, 이후 그의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1970년 6월 사망했다. 1968년 3월, MPRS는 수하르토를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첫 임명했다.

3. 2. 신질서 체제 구축

"신질서(Orde Baru)"는 수카르노의 "구질서(Orde Lama)"와 차별화하고 스스로를 "더 나은" 질서로 규정하기 위해 사용된 명칭이다. 국가 이념으로는 판차실라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힌두교나 이슬람 같은 외래 종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도네시아 고유의 이념으로 선전되었다.[7] 수하르토는 1978년 의회 결의(Tap MPR No. II/1978)를 통해 인도네시아 내 모든 조직이 판차실라를 기본 원칙으로 삼도록 의무화했다. 더 나아가 1983년에는 의회 결의(Tap MPR No. II/1983)를 통해 판차실라 외 다른 어떤 원칙도 따르는 것을 금지하는 "판차실라 유일 원칙"(asas tunggal Pancasilaid)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모든 인도네시아인을 대상으로 판차실라 주입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다.[7] 원래 1945년 수카르노가 제정한 다소 모호하고 일반적인 원칙들의 집합이었던 판차실라는, 인도네시아 국민의 고대 지혜를 대표하는 신성한 국가 이념으로 적극 홍보되었다. 1982년 7월 연설에서 자바 신앙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수하르토는 판차실라를 신과 인류와의 조화로운 완벽한 삶(''ilmu kasampurnaning hurip'')의 열쇠로 찬양했다.[7] 그러나 실제로는 판차실라의 모호성을 이용하여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반대자들을 "반판차실라"로 규정하며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7]

드위풍시(Dwifungsi, "이중 기능" 정책)는 군부가 인도네시아 정부,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3. 3. 내부 반대 세력 탄압

수하르토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 세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측근인 군 장교들, 특히 알리 무르토포와 같은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경쟁자들을 비밀리에 견제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들에게는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1968년 임시국민협의회(MPRS) 의장이었던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장군이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수하르토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1969년 나수티온을 MPRS 의장직에서 해임했으며 1972년에는 군에서도 조기 퇴역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1967년에는 HR 다르소노, 케말 이드리스, 사르보 에디 위보보 등 소위 "신질서 급진파"로 불리던 장군들이 서구식 2당제 도입을 주장하며 수하르토의 정당 정책에 반대하자, 이들을 각각 해외 대사나 외딴 지역의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학생 운동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학생 운동(''Angkatan 66'') 지도부 상당수는 정권에 포섭되었지만, 1970년대 들어 학생들은 1971년 선거의 정당성 문제, 타만 미니 인도네시아 인다 테마파크 건설의 막대한 비용(1972년), 외국 자본의 경제 지배 심화(말라리 사건, 1974년), 수하르토 대통령의 종신 집권 가능성(1978년) 등에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질서 정권은 시위 주동 학생들을 투옥하고 1978년에는 반둥 공과대학교 캠퍼스에 군대를 투입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같은 해 4월, 수하르토는 "캠퍼스 생활 정상화"(NKK) 법령을 통해 학문 외적인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하며 학생들의 저항을 억눌렀다.

1980년에는 나수티온을 비롯한 군 원로, 정치인, 지식인 등 50명의 저명인사들이 50인의 청원Petisi 50id에 서명하며 수하르토가 판차실라 이념을 비판 세력을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들의 문제 제기를 완전히 무시했으며, 서명자 중 일부는 투옥되거나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등 탄압을 받았다.

4. 신질서의 정책



"신질서(New Order)"는 수카르노의 "구질서(Old Order)"와 차별성을 부각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시기 정부는 판차실라를 국가의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다. 판차실라는 힌두교나 이슬람과 같은 외래 종교 유입 이전부터 존재한 고유 이념으로 선전되었으며[7], 사회 모든 조직의 기본 원칙으로 강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7]

또한 드위풍시(Dwifungsi, "이중 기능") 정책을 통해 군부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4. 1. 정치: 탈정치화와 권위주의 통치

민간 정치인들이 1966년과 1967년 인민협의회(MPRS) 결의안을 통해 선거 실시를 요구하자, 수하르토 정부는 장기간의 협상 끝에 1969년 11월 MPRS에서 선거 및 의회 구조와 의무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 선출 권한을 가진 인민협의회(MPR)를 규정했으며, MPR은 하원인 인민대표평의회(DPR)와 지역 및 기능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DPR 의석 460석 중 100석은 군부의 정치·사회 참여를 의미하는 '드위풍시(Dwifungsi)' 원칙에 따라 정부가 직접 임명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군(ABRI, 주로 인도네시아 육군 소속) 군인들에게 할당되었다. 나머지 의석은 총선 결과에 따라 정당에 배분되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정부가 입법 활동, 특히 대통령 임명 과정에서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선거 참여를 위해 수하르토는 정당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수카르노의 옛 정당인 인도네시아 민족당(PNI)과의 연대를 고려했으나, 1969년 군부가 주도하던 NGO 연합체 골카르(Golkar, "기능 그룹")를 장악하고 오른팔 알리 무르토포의 지휘 아래 자신의 선거 조직으로 전환했다. 첫 총선은 1971년 7월 3일에 실시되었으며, 골카르 외에 4개의 이슬람 정당과 5개의 민족주의 및 기독교 정당이 참여했다. 골카르는 '개발'이라는 비이념적 구호와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 그리고 미묘한 협박 전술에 힘입어 62.8%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1973년 3월 MPR 총회는 수하르토를 두 번째 임기 대통령으로, 술탄 하멩쿠부워노 9세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정치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1973년 1월 5일, 4개의 이슬람 정당을 강제로 통합개발당(PPP, ''Partai Persatuan Pembangunan'')으로 통합시키고, 5개의 비이슬람 정당은 인도네시아 민주당(PDI, ''Partai Demokrasi Indonesia'')으로 합병했다. 정부는 이들 정당의 지도부를 장악하여 효과적인 반대 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했고, 정부에 비판적인 의원들을 의석에서 제거하기 위한 '소환(recall)'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러한 체제는 '판차실라 민주주의'로 불렸으며, 이를 통해 골카르는 1977년, 1982년, 1987년, 1992년, 1997년 총선에서 연이어 압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구성된 MPR은 1978년, 1983년, 1988년, 1993년, 1998년에 만장일치로 수하르토를 대통령으로 재선출하며 그의 장기 집권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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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개발'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지지하는, 정치적으로 동원되지 않는 '부유하는 대중(floating mass)'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사회 공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기능주의(corporatism)와 유사한 개념으로, 정부는 다양한 시민 사회 단체를 조직하여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를 동원하고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1971년 11월 모든 공무원과 국영 및 지방 정부 소유 기업 직원, 그리고 인도네시아 중앙은행(Bank Indonesia) 직원들이 코르프리(KORPRI)(인도네시아 공화국 직원단)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여 이들의 충성심을 확보했다. 1973년 2월에는 코르프리 회원이 아닌 노동자들을 위한 유일한 합법 노동조합으로 FBSI(''Federasi Buruh Seluruh Indonesia'', 1985년 전인도네시아노동자연맹(SPSI/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로 개명)를 조직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삼자주의(tripartism) 원칙과 '판차실라 산업 관계'라는 명분 아래 설립되었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만을 강화했다. 또한 1975년에는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울레마 협의회(MUI)(Majelis Ulama Indonesia)를 설립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영향력 있는 화교 인도네시아인의 동화를 촉진하기 위해 수하르토 정부는 소위 '중국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군부가 통제하는 중국어 간행물 하나만 계속 허용되었고, 모든 중국 문화 및 종교적 표현(중국어 문자 표시 포함)은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으며, 중국 학교는 단계적으로 폐교되었다.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장려되었으며, 교육기관 입학, 여권 발급, 선거 등록, 결혼 시 시민권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1968년 수하르토는 인구 증가율을 억제하고 1인당 소득을 높이기 위해 매우 성공적인 가족계획(family planning) 프로그램(''Keluarga Berentjana''/KB)을 시작했다. 또한 이 시대의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1972년 8월 17일 수하르토가 공포한 인도네시아어의 철자 개혁이다.

4. 2. 경제: 개발 독재와 경제 성장

1970년 서독을 방문하여 경제 협력을 모색하는 수하르토. 신질서 정부는 외국 자본 유치를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버클리 마피아"로 불린 경제 관료들'''

수하르토는 경제 정책 수립을 위해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도네시아 경제학자 그룹인 이른바 '버클리 마피아'를 등용했다. 이들은 정부 보조금과 부채를 삭감하고 환율 제도를 개혁하는 등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여, 1966년 660%에 달했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1969년 19% 수준까지 낮추는 데 기여했다.[18]

국내 자본과 기술 부족을 인지한 수하르토 정부는 수카르노 시대의 자급자족 경제 노선을 폐기하고 외국 자본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7년 1월,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하여 세금 감면 혜택과 자유로운 자금 이동을 보장하며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유인했다. 수하르토는 직접 서유럽과 일본을 순방하며 천연자원 부문을 중심으로 투자를 유치했다. 광산 기업인 프리포트-맥모란과 인터내셔널 니켈 컴퍼니(International Nickel Company)가 초기에 인도네시아에 재진출했으며, 이후 일본, 한국, 대만 기업들의 투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립 당시 국유화되었던 유니레버나 로열 더치/쉘의 영국 자산 등은 다시 민영화되었지만,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 국유화된 네덜란드 기업 자산(홀란드세 베톤 그룹, NILLMIJ, 로열 더치/쉘의 네덜란드 부문 등)은 민족주의적 정서를 고려하여 국유화 상태를 유지했다.[19] 또한, 1967년부터는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서방 10개국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 정부 간 그룹'''(IGGI, Inter-Governmental Group on Indonesia)으로부터 저금리 외국 원조를 확보했다.

외국 자본 유치와 더불어 국내 자본주의 육성에도 힘썼다. 1968년 6월 국내 투자법을 제정하여 기존 국영 기업을 보완할 민간 기업의 성장을 장려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주로 인도네시아 중국인들이 아스트라 그룹과 살림 그룹 같은 대기업을 일구며 수입 대체 경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IGGI의 외국 원조와 1973년 석유 위기 이후 급증한 석유 수출 수입을 바탕으로, 정부는 1969년부터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인 'REPELITA'(''Rencana Pembangunan Lima Tahun'')를 연속적으로 추진하며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단행했다. 이 계획들은 농업 생산성 향상(녹색 혁명)을 통한 식량 안보 확보, 도로·항만 등 사회 기반 시설 확충, 수출 지향적 산업 육성 등을 목표로 했다.

계획기간주요 목표
REPELITA I1969년 ~ 1974년녹색 혁명을 통한 농업 개선 및 식량 안보 확보
REPELITA II1974년 ~ 1979년자바섬 외곽 지역 인프라 및 1차 산업 성장
REPELITA III1979년 ~ 1984년식량 자급자족 달성, 수출 지향 노동 집약적 산업 성장
REPELITA IV1984년 ~ 1989년자본재 제조업 성장
REPELITA V1989년 ~ 1994년통신, 교육, 교통 인프라 성장
REPELITA VI1994년 ~ 1998년 (미완성)외국인 투자 및 자유 무역 지원 인프라 구축

[20][21]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 정책은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동반했다. 수하르토는 군과 자신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광범위한 자선 재단('야야산', ''yayasan'') 네트워크를 통해 국내외 기업들로부터 정부의 지원과 허가를 대가로 '기부금'을 받았다. 이 자금 중 일부는 병원 건설과 같은 공익적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은 수하르토의 정치적 동맹을 관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20][22]

1975년 2월에는 국영 석유 회사인 페르타미나가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경영진의 부패로 인해 150억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채무 불이행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페르타미나 사장이었던 이브누 수토워 장군(수하르토의 측근)은 유가 상승으로 얻은 막대한 수입을 해운, 철강, 건설, 부동산, 병원 등 본업과 무관한 여러 사업에 투자했으나, 이는 부실 경영과 부패로 이어졌다. 결국 정부가 구제에 나섰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 부채가 거의 두 배로 증가하는 등 큰 대가를 치렀으며 이브누 수토워는 해임되었다. 이처럼 수하르토 시대의 '개발 독재'는 외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부패가 만연하고 소수 재벌에게 부가 집중되는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3. 사회: '국가 이부이즘'과 사회 통제

수하르토 정권은 인도네시아 사회를 "개발"이라는 국가 목표를 지지하는 정치색이 없는 "부유하는 대중"으로 만들려는 사회 공학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는 코퍼러티즘과 유사한 개념으로, 정부는 다양한 시민 사회 단체를 조직하여 정부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고자 했다.

  • 코르프리(KORPRI): 1971년 11월, 모든 공무원, 국영 및 지방 정부 소유 기업 직원,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직원의 가입을 의무화하여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했다.
  • 노동조합 통제: 1973년 2월, 코르프리 회원이 아닌 노동자들을 위해 유일하게 합법적인 노동조합인 FBSI(''Federasi Buruh Seluruh Indonesia'', 1985년 전인도네시아노동자연맹(SPSI)으로 개명)를 조직했다. 이는 삼자주의 원칙과 '판차실라 산업 관계'라는 명목 아래 설립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 종교 단체 통제: 1975년,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울레마 협의회(MUI)를 설립했다.


1966년부터 1967년 사이, 정부는 영향력 있는 화교 인도네시아인의 동화를 목표로 소위 "중국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이 정책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 군부가 통제하는 단 하나의 중국어 간행물만 허용되었다.
  • 중국 문화 및 종교적 표현(중국어 문자 사용 포함)이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다.
  • 중국 학교는 단계적으로 폐쇄되었다.
  •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되었다.
  • 교육기관 입학, 여권 발급, 선거 등록, 결혼 시 시민권 증명서 제출이 의무화되었다.


1968년, 수하르토는 인구 증가율을 억제하고 1인당 소득을 높이기 위해 가족계획(KB)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972년 8월 17일에는 인도네시아어의 철자 개혁을 공포했다.

신질서 정권은 자바 문화(Kejawèn)의 프리야이(priyayi) 계층의 영향을 받아 반여성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가족주의"(kekeluargaan)로 포장되었다.

  • 다르마 와니타(Dharma Wanita): 1974년, 공무원 부인들을 대상으로 "여성의 다르마 5계명"(판차다르마 와니타)이라는 가부장적 교리에 기반한 조직을 설립했다. 이는 여성을 가정 내 역할에 한정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 PKK(펨비나안 케세자테라안 켈루아르가): 1957년 보고르에서 열린 가정 경제학 회의에서 시작된 "가족 복지 훈련" 프로그램으로, 1972년부터 특히 농촌 지역 여성들에게 의무화되었다. 이 역시 여성을 전통적인 역할에 국한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주의 운동은 1980년대 이후 안니사 산티 재단(야산티)과 같은 단체들이 설립되면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이슬람 정치 세력은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독실한 무슬림들은 정부의 면밀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레오나르두스 벤야민 무르다니와 같은 기독교 출신 장군들은 군대 내에서 종교적인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는데, 이들의 승진을 막고 병영 내 기도를 금지했으며, 심지어 "아스살라무 알레이쿰"과 같은 이슬람식 인사조차 금지했다. 수하르토 자신은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정치 세력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반이슬람 정책을 용인하거나 지지했다.[9][10][11][12] 기독교 출신 장군 테오 샤페이는 이슬람 정치 세력의 집권에 반대하며 코란과 이슬람 자체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3][14][15][16] 또한,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국립학교에서는 히잡 착용이 금지되었다.[17]

4. 4. 외교: 반공 친서방 외교와 지역 협력

수하르토가 1970년 잠비아 루사카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회의에 참석하다.


수하르토 정권은 집권 후 냉전 구도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립 정책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인도네시아 경제 회복을 위한 지원 확보를 목표로 서방 진영(일본, 한국 포함)과 긴밀히 협력했다. 수하르토의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은 서방 국가들의 호감을 샀고, 이들은 신속하게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이러한 반공 노선은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과는 9·30사건에 중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1967년 10월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양국 관계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복원되었다. 소련 역시 수하르토 정권의 PKI 탄압에 대한 반발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군사 장비 판매를 중단했다. 다만, 1967년부터 1970년 사이 외무장관 아담 말릭은 전임 수카르노 정권 시절 소련 및 동유럽 공산 국가들로부터 빌린 막대한 부채를 재조정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역 내에서는 관계 개선과 협력 강화에 힘썼다. 1966년 8월, 말레이시아와의 대립 관계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이듬해인 1967년 8월에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창설을 주도하며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ASEAN은 당시 격화되던 베트남 전쟁과 같은 역내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관계 구축을 목표로 했다.[20]

한편, 1974년 이웃한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는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식민 당국이 철수하면서 내전이 발생했고, 좌익 성향의 독립운동 단체인 프레틸린(Frente Revolucionária de Timor-Leste Independentept)이 승기를 잡았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우려했으며, 미국 대통령 제럴드 R. 포드와 호주 총리 고프 휘틀럼 등 서방 지도자들의 설득 혹은 묵인 하에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티모르 내 반공 그룹인 UDT와 APODETI에 대한 비밀 지원이 실패로 돌아가자, 수하르토 정권은 1975년 12월 7일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이후 1976년 7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인 동티모르 주로 공식 병합했다.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병합 이후에도 프레틸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 저항은 계속되었다. 인도네시아군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대규모 "포위 및 소탕" 작전을 벌여 프레틸린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저항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1999년 동티모르 독립 투표 결과에 따라 철수할 때까지 동티모르에 강력한 군사력을 주둔시켜야 했다. 인도네시아 점령기(1974~1999) 동안 동티모르에서는 분쟁과 관련된 사망자가 최소 90,800명에서 최대 213,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에는 직접적인 살해(17,600~19,600명)뿐만 아니라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73,200~194,000명)도 포함되며, 인도네시아군은 폭력적 살인의 약 70%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23] 이는 수하르토 정권의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는 주요 사례 중 하나이다.

5. 권력의 정점과 몰락

1980년대에 들어 수하르토의 권력은 시민 사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 조작된 선거, 군의 강압적인 힘 사용, 그리고 경제 성장에 힘입어 매우 공고해졌다.[31] 그는 군 지휘 체계를 개편하여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켰고, 사회 안정을 해친다는 명분 아래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대표적인 예로 군 소속 암살단이 활동한 "페트루스 사건"(Petrus Killings)이나 탄중프리옥 학살 등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인도네시아가 상당한 성장을 이루어 수하르토는 "개발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으나, 그 이면에는 부패, 결탁, 족벌주의(KKN)가 만연했다. 특히 수하르토의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정부 계약 독점과 각종 특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국민적 비판이 높아졌다.[20][22][29][30]

냉전 종식 이후 국제 사회의 시선이 인권 문제로 향하면서,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산타 크루즈 학살(1991) 등 수하르토 정권의 인권 탄압 문제가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32][33] 국내적으로도 수하르토 가족의 탐욕과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이 군부 내에서조차 제기되었으며, 중산층을 중심으로 30년간 지속된 신질서 체제에 대한 "개혁"(Reformasi|레포르마시ind) 요구가 커져갔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이러한 개혁 요구의 상징으로 부상하자, 정권은 1996년 7월 27일 사건과 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를 억압하려 했다.

정권의 몰락을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였다.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는 인도네시아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고, 루피아 가치는 폭락했으며 수많은 기업이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과정에서 요구된 강도 높은 개혁 조치들은 수하르토 가족의 이권과 충돌하며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는 정권에 대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34][20]

경제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 1998년, 정부의 연료 가격 인상 결정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5월 12일 트리삭티 총격 사건으로 학생 시위대가 사망하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자카르타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폭동과 약탈이 발생했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국회 건물을 점거하고 수하르토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했으며, 정치적 동맹들마저 등을 돌리자 결국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그의 신질서 시대는 막을 내리고 부통령 B. J. 하비비가 권력을 승계했다.[20]

5. 1. 권위주의 통치 강화와 인권 탄압

수하르토는 군대를 동원하여 국내 안보를 유지했는데, 특히 코프캄팁(Kopkamtib, 안보 질서 회복 작전 사령부)과 바킨(BAKIN, 국가 정보 조정 기관)이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군의 영향력을 마을 단위까지 확대하기 위해 군의 영토 시스템을 활용했으며, 군의 "이중 기능"(Dwifungsi) 원칙에 따라 군 장교들을 지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1969년에는 인도네시아 주지사의 70% 이상, 지역 수장의 절반 이상이 현역 군 장교일 정도로 군부의 행정 장악력이 강화되었다. 수하르토는 블리타르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도하던 PKI 잔당을 소탕하기 위한 "트리술라 작전"(Operasi Trisula|오프라시 트리술라ind, 1968)을 승인했고, 서 칼리만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반군(PGRS-Paraku)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1967~1972)도 지시했다. 또한, 1977년 하산 디 티로가 이끄는 아체 자유 운동(GAM)이 분리주의 활동을 시작하자 특수 부대를 투입해 관련자들을 사살하거나 해외로 몰아냈다. 1981년 3월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일으킨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206편 납치 사건 당시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의 특수 부대 투입 작전을 승인하여 성공적으로 인질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서 이리안(West Irian, 현 서파푸아)의 인도네시아 통합 문제는 1962년 뉴욕 협정에 따라 1969년 말까지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하르토 정부는 1969년 7~8월에 "자유 선택 행위"(PEPERA, Act of Free Choice)라는 이름의 투표를 준비했다. 사르워 에디 위보워가 지휘하는 RPKAD 특수 부대는 인도네시아 점령(1963) 이후 정글에 숨어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민병대(파푸아 자원 봉사단, Papoea Vrijwilligers Korpsnld) 잔존 세력을 소탕했고, 유수프 와난디가 이끄는 가톨릭 자원봉사자들은 물품을 배포하며 친인도네시아 여론을 조성했다. 결국 1969년 3월, 물류 문제와 주민들의 정치적 이해 부족을 이유로 1,025명의 부족장들이 주민들을 대표하여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투표 결과는 만장일치로 인도네시아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고, 이는 1969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수하르토와 미 국방장관 윌리엄 코헨(William Cohen), 1998년 1월 14일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하르토의 권력은 매우 공고해졌다. 이는 시민 사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 조작된 선거, 군의 강압적인 힘 사용, 그리고 경제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31] 1976년 군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후, 수하르토는 군 지휘 체계를 개편하여 군 사령관보다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1983년 3월, 그는 레오나르두스 벤자민 무르다니 장군을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무르다니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수하르토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수하르토 정권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어떠한 요소도 용납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83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급증하는 범죄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군 소속 암살단이 활동하며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범죄 용의자를 사살하는 사건, 이른바 "페트루스 사건"(Petrus Killings)이 발생했다. 수하르토가 빤짜실라를 국가의 유일 사상으로 강제하려 하자,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보수 이슬람 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1984년 9월, 자카르타의 탄중프리옥 지역에서 보수 무슬림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군은 시위대에 발포하여 최대 100명을 학살하는 탄중프리옥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규모 폭탄 테러가 잇따랐는데, 대표적으로 1985년 1월 보로부두르 사원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A. M. 팟와(훗날 국회의원)부터 급진 성직자 아부 바카르 바시르(테러 조직 자마아 이슬라미야 창설자)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보수 이슬람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 1989년,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재기한 아체 자유 운동이 경찰을 공격하자, 인도네시아 군은 "오프라시 자링 메라"(Operasi Jaring Merah|오프라시 자링 메라ind, 붉은 그물 작전)라는 잔혹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1992년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부분 민간인인 최대 1만 2천 명이 사망했다. 또한 수하르토 정부는 언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984년 언론 운영 허가(SIUPP) 제도를 도입하여 정보부가 언제든 언론사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서방 세계의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완화되자, 수하르토 정권의 인권 탄압 문제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91년 11월 동티모르 딜리에서 발생한 산타 크루즈 학살은 큰 충격을 주었고,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 군에 대한 IMET(국제 군사 교육 및 훈련) 지원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수하르토는 1997년 미국의 F-16 전투기 구매 계획을 취소하며 맞대응했다.[32][33] 네덜란드가 산타 크루즈 학살을 비판하자, 수하르토는 1992년 3월 네덜란드를 IGGI(대인도네시아 정부간 그룹)에서 추방하고, 조직 명칭을 인도네시아 자문 그룹(CGI)으로 변경했다. CGI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조를 계속 늘려나갔다. 이러한 국제적 압박 속에서 수하르토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 개발을 명분으로 외교 관계 다변화를 모색했다. 1992년에는 비동맹 운동 의장국이 되었고, 1989년 APEC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했으며, 1994년에는 보고르에서 APEC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국내적으로는 수하르토 가족의 부패와 탐욕이 심화되면서 권력과 이권에서 소외된 군부 내에서 불만이 커져갔다. 1988년 3월 인민협의회(MPR) 회의에서는 군부 출신 의원들이 수하르토의 측근인 수다르모노의 부통령 지명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무르다니 장군이 수하르토 가족의 부패 문제를 제기하자, 수하르토는 그를 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수하르토는 점진적으로 정권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키려 했고, 1988년 9월에는 강력한 권력 기구였던 Kopkamtib을 해체하고 자신의 충성파들을 주요 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군부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권력 기반을 다변화하기 위해 수하르토는 이슬람 세력의 지지를 얻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1991년 대규모 하지 순례에 참여하고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회 전반에 이슬람 가치를 장려하고 이슬람 성향의 장군들(소위 "녹색 장군")을 등용했다. 또한 중국계 인도네시아 자본가들의 경제 지배력에 반감을 가진 신흥 무슬림 기업가 집단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90년 11월 인도네시아 무슬림 지식인 협회(ICMI)를 창설하고, 자신의 오랜 측근이자 연구기술부 장관이었던 B. J. 하비비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 포용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4년 메단 폭동을 시작으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을 겨냥한 인종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수하르토 정부는 B. J. 하비비, 하르모코(Harmoko), 기난자르 카르타사스미타(Ginandjar Kartasasmita), 악바르 탄중(Akbar Tanjung) 등 수하르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민간 정치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하비비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994년 6월 21일 발생한 언론 탄압 사건이다. 당시 유력 시사 주간지였던 ''템포'', ''DeTIK'', ''에디터(Editor)''가 하비비가 주도한 옛 동독 해군 함대 도입 사업(대부분 고철 값어치밖에 없는 함선들을 비싸게 사들였다는 비판)을 비판하자, 수하르토는 이들 언론이 "내각 내 갈등을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폐간시켜 버렸다. 이 사건 이후 폐간된 언론사 기자들은 독립 언론인 연합을 결성했고, ''템포''는 인터넷 매체 ''템포인터악티프''(현 ''tempo.co'')를 통해 활동을 이어갔으며, ''DeTIK''의 소유주는 ''DeTAK''이라는 새로운 잡지를 창간했다.

한편, 수하르토 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성장한 인도네시아 중산층 사이에서는 그의 오랜 독재와 가족들의 노골적인 부패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져갔다. 30년간 지속된 신질서 체제에 대한 "개혁"(Reformasi|레포르마시ind) 요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96년경,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딸이자 당시까지 비교적 온건했던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의 의장이었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이러한 개혁 요구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하르토는 수르야디가 이끄는 PDI 내 친정부 파벌을 지원하여 메가와티를 의장직에서 축출하도록 사주했다. 1996년 7월 27일, 메가와티 지지자들이 자카르타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자, 수티요소 중장이 지휘하는 군 병력과 용병들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유혈 충돌과 약탈이 벌어졌고, 사건 이후 약 200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이 중 23명은 수하르토의 사위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소장이 이끄는 군 특수부대 '팀 마와르'(Tim Mawar|팀 마와르ind, 장미 팀)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일부는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97년 중반까지 수하르토의 권력은 여전히 견고해 보였다. 이는 충성파들이 장악한 군부, 억압된 반대 세력, 그리고 호황을 누리던 경제 덕분이었다.

5. 2. 경제 성장과 부정부패 심화

1980년대 자카르타


수하르토를 "개발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신질서에 의해 설정된 진보를 보여주는 인도네시아 선전화


1970년대를 거치며 인도네시아 경제는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 1975년 국영 석유 회사 페르타미나(Pertamina)가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부패로 인해 150억달러 규모의 채무 불이행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정부 개입으로 수습되었다. 이후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REPELITA)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1966년부터 1997년까지 인도네시아는 연평균 5.03%의 실질 GDP 성장률을 기록했고, 1인당 실질 GDP는 806USD에서 4114USD로 증가했다. 제조업 부문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66년 10% 미만에서 1997년 25%로 늘어났으며, 수출의 53%가 제조품이었다. 정부는 팔라파 통신위성 발사 등 대규모 인프라 개발에 투자하여 1990년대 중반에는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성과를 바탕으로 수하르토는 1983년 MPR로부터 "개발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사회 지표도 개선되어, 기대 수명은 1966년 47세에서 1997년 67세로 늘었고, 유아 사망률은 60% 이상 감소했다. 정부의 초등학교 건설 지원 프로그램(Bantuan Pembangunan Sekolah Dasar, 일명 SD Inpres)으로 1983년까지 초등학교 취학률이 90%에 달했고 남녀 간 교육 격차도 거의 해소되었다. 농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으로 인도네시아는 1984년에 쌀 자급 자족을 달성했으며, 이는 전례 없는 업적으로 1985년 11월 FAO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다만, 빈곤율 감소에 대해서는 정부 발표(1970년 45% → 1996년 11%)와 달리 실제 빈곤율은 훨씬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24][25][26]

1980년대 초, 1980년대 석유 과잉 공급으로 유가가 하락하자 수하르토 정부는 경제 구조를 수출 지향적 노동 집약적 제조업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산업화는 주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기업가들이 주도했으며, 이들은 살림 그룹, 시나르 마스 그룹, 아스트라 그룹, 리포 그룹, 바리토 퍼시픽 그룹, 누삼바 그룹 등 거대한 기업 연합으로 성장하여 국가 경제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하르토는 이들 소수 중국계 기업 연합이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도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들의 기술과 자본을 활용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그 대가로 기업 연합들은 수하르토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 관계를 맺었다.[27]

1980년대 후반, 정부는 국내 저축을 장려하고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 부문의 규제를 완화하는 "1988년 10월 패키지"(PAKTO 88)를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은행 설립 요건이 완화되면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은행 수가 50%나 급증했다.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정부는 국민들에게 국가 개발 저축(Tabungan Pembangunan Nasional, TABANAS)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1977년 재개장했던 자카르타 증권거래소는 1990년 규제 완화 이후 국내 기업들의 IPO 급증과 외국 자본 유입으로 활황을 맞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신용 팽창과 금융 부문의 취약한 규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28]

경제 성장 이면에서는 부패, 결탁, 족벌주의(인도네시아어: Korupsi, Kolusi, dan Nepotisme, 약칭 KKN)가 만연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수하르토의 자녀들인 시티 하르디얀티 루크마나(투투트), 후토모 만달라 푸트라(토미), 밤방 트리아트모조 등이 노골적으로 부패 행위에 연루되었다. 이들의 회사는 정부 계약을 독점하고 각종 특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투투트가 대주주였던 자카르타 내부 순환도로 건설 사업, 밤방과 토미가 각각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합작하여 추진했던 국가 자동차 프로젝트, 토미가 관여한 정향 독점 유통 기구(Badan Penyangga dan Pemasaran Cengkeh, BPPC), 수하르토의 사촌 수드위카트모노가 소유한 영화관 체인 21시네플렉스의 영화 수입 독점 등이 있다. 수하르토 일가는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방대한 부동산(약 36000km2)을 소유하고, 1,251개에 달하는 주요 기업의 주식을 무상으로 취득했으며, 외국 기업들에게 자신들의 회사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도록 강요했다. 또한 수하르토 일가가 운영하는 수많은 자선 재단("야야산", ''yayasan'')은 기업과 대중으로부터 매년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정치 자금으로 유용하거나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20][22][29][30]

5. 3.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와 정권 붕괴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는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인도네시아로 확산되었다. 외국 투기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달러 유동성이 고갈되었고, 이는 인도네시아 루피아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초래했다. 당시 많은 인도네시아 기업들은 낮은 이자율의 미국 달러로 대규모 차입을 했으나, 수입은 대부분 루피아로 발생했다. 달러 가치가 상승하자 기업들의 부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고, 많은 기업이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이들 기업이 루피아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면서 루피아 가치는 1997년 8월 달러당 2,600 루피아에서 1998년 1월에는 달러당 14,800 루피아 이상으로 폭락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달러 매각을 통해 관리 변동 환율제를 방어하려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외환 보유고만 고갈시켰다. 결국 정부는 통화의 자유 변동을 허용하고 IMF에 유동성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34]

IMF는 430억달러 규모의 유동성 지원을 대가로 인도네시아 정부에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1997년 10월부터 1998년 4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IMF와 의향서(LOI)에 서명해야 했다. 이 의향서에는 1997년 11월부터 수하르토 가족 및 측근들이 소유한 은행들을 폐쇄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부실 은행 폐쇄 계획은 오히려 예금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뱅크런)를 유발했다. 예금자들은 인도네시아 은행들의 부실한 규제와 위험 수준의 관계사 대출 실태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1998년 1월 정부는 긴급 유동성 지원(BLBI)을 제공하고, 은행 예금 전액 보증을 발표했으며, 부실 은행 관리를 위한 인도네시아 은행 구조조정 기구를 설립해야 했다. 또한 IMF 권고에 따라 정부는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1998년 2월 기준 금리를 70%까지 인상했지만, 이는 기업 부문의 자금 조달 길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자녀들의 사업과 관련된 IMF 개혁 요구 이행을 미루면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더욱 하락했다.[20] 당시 수하르토의 초청으로 통화위원회 시스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던 미국 경제학자 스티브 한케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IMF 총재 미셸 캉드쉬가 수하르토의 사임을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 위기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케는 캉드쉬가 "우리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도록 조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35]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인도네시아 사회 곳곳에서 정치적,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시투본도(1996), 타식말라야(1996), 반자르마신(1997), 마카사르(1997) 등지에서 반(反)중국계 폭동이 발생했으며, 1997년에는 중부 칼리만탄에서 다야크족과 마두라족 이주민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집권 여당 골카르는 논란 속에 치러진 1997년 5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새로 구성된 MPR은 1998년 3월 만장일치로 수하르토를 7번째 임기의 대통령으로 재선출했으며, 수하르토는 자신의 측근인 B. J. 하비비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내각에 자신의 가족과 사업 파트너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의 딸 투투트는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실인사는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1998년 5월 4일, 정부가 연료 가격을 70% 인상하기로 결정하자 메단에서는 또다시 반중국계 폭동이 발생했다. 국가적 위기의 책임이 수하르토에게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아미엔 라이스와 같은 저명한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1998년 1월부터 대학생들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1998년 5월 21일 메르데카 궁전에서 사임 연설을 하는 수하르토. 왼쪽에는 부통령이자 후임자인 B. J. 하비비가 서 있다.


정권의 위기는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이집트를 국빈 방문 중일 때 최고조에 달했다. 5월 12일, 자카르타의 트리삭티 대학교 앞에서 시위하던 학생 4명이 군경의 발포로 사망하는 트리삭티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자카르타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반중국계 폭동과 약탈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 폭동으로 수천 채의 건물이 파괴되고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을 겨냥한 폭력 사태의 배후에 대해서는 군 최고 사령관 위란토와 당시 코스트라드 사령관이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수하르토의 사위) 사이의 권력 다툼이 있었다는 설과, 수하르토가 위기의 책임을 중국계에게 돌리고 학생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폭동을 조장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다.

5월 16일,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국회 건물을 점거하고 수하르토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했다. 이집트에서 급히 귀국한 수하르토는 2003년에 사임하고 내각을 개편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으며 권좌를 지키려 했으나, 그의 오랜 정치적 동맹자들마저 새 내각 참여를 거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군 최고 사령관 위란토에 따르면, 5월 18일 수하르토는 치안 회복을 위해 군에 전권을 부여하는 법령(1966년 수페르세마르와 유사) 발표를 지시했으나, 위란토는 시민들과의 대규모 충돌을 우려하여 이를 시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모든 정치적 기반을 상실한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고, 헌법에 따라 부통령 B. J. 하비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20] 이로써 32년간 지속된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는 막을 내렸다.

6. 유산과 평가

수하르토 신질서 체제 종식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르며 변화했다.[40][39] 초기에는 권위주의, 인권 탄압, 부패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으나,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함께 거론되면서 엇갈린 평가가 공존하게 되었다.[40][41][42] 이러한 복합적인 유산과 상반된 기억은 현대 인도네시아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43][44][45]

6. 1. 엇갈린 평가

수하르토의 신질서가 종식된 직후, 그는 대체로 비난과 매도의 대상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민주 개혁이 진전되면서 수하르토 시대의 권위주의적 정책 상당수가 폐기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인도네시아인들은 정치 영역을 넘어 개인 생활에서 다양한 자유(kebebasan|크브바산id)를 누리기 시작했다.[40][39]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하르토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대는 치명적인 탄압, 권위주의 통치, 만연한 부정부패로 얼룩졌다는 비판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안정, 상당한 경제 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생활 수준 향상을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공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식은 2008년 수하르토 사망 후 군사 의전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것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대중적 지지가 일부 회복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0][41][42]

수하르토를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은 그의 사후 꾸준히 논의되었다. 일부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수하르토 통치 시기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난 배경에는 현대 정치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신질서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증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2024년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과거 신질서 시대의 장군이었던 프라보보 수비안토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수하르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로 여겨진다. 프라보보는 당선 연설에서 수하르토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여론 조사 결과 그의 당선에는 젊은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43][44][45]

6. 2. 현대 인도네시아에 미친 영향

수하르토의 신질서 체제가 무너진 직후, 그는 대체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민주 개혁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면서 수하르토 시대의 권위주의적 정책 상당수가 폐기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인도네시아 사회는 정치 영역을 넘어 개인의 삶에서 다양한 자유(kebebasan|크브바산id)를 누리기 시작했다.[40][39]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하르토 통치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의 시대는 극심한 인권 탄압, 권위주의 통치, 심각한 수준의 개인적 부패로 얼룩졌지만, 동시에 정부의 안정, 상당한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을 이룩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이러한 엇갈린 인식은 수하르토와 신질서 체제에 대한 상반된 기억을 만들어냈다. 2008년 수하르토가 사망했을 때, 정부는 군사 의전까지 갖춘 장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일부 회복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0][41][42]

수하르토 사후, 그를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일부 인도네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수하르토 통치 시기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신질서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의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2024년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과거 신질서 체제의 군 장성 출신인 프라보보 수비안토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건은 수하르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프라보보는 당선 연설에서 수하르토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여론 조사 결과 그의 당선에는 젊은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43][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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