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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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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활동한 배우로, 연극과 영화, 라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10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성장했으며,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연극에 입문했다. 그는 극단 고협의 대표를 역임하며, 친일 연극에 참여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좌익 연극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김두한에게 피습당하기도 했다. 1947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나, 1971년 숙청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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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 (배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심재설(沈載卨)
출생일1910년 9월 3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관전리 구 철원관아 객사
사망일1971년 7월 24일 (사인은 미상)
다른 이름靑木 沈影(아오키 진에이, 창씨개명)
활동 기간1922년 ~ 1971년
부모심완섭(부), 강릉 김씨 부인(모)
배우자초배 이씨 부인(李氏 夫人, 이름 본관 미상)
계배 리명히(李明嬉, 이명히)
로마자 표기
일본어Aoki Jinei (아오키 진에이)
한국어 표기
한자沈影
가타카나시무 욘
히라가나신 에이
조선글심영

2. 생애

심영은 1910년 9월 3일 강원도 철원군 군청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경성부에서 성장했다. 1909년생설, 1908년생설도 있다. 증조부와 조부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지만, 아버지 심완섭은 서자였으며 생애 초기에는 인부로 일했다. 심영이 태어났을 때 심완섭은 강원도 철원군수를 역임하고 있었다. 심영은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무용에 관심을 가졌으나, 학교 허가 없이 연극 및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토월회(土月會) 연구생으로 연극계에 입문하였다. 춘향전에서는 황철이 이몽룡 역, 심영이 방자 역을 맡았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심영이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 황철이 홍도의 형 역을 연기하였다.[2] 1939년에는 극단 ‘고협’(高協)의 대표로 활동하였다.[3]

1945년 일본 패전 후, 미군정 시기에 혁명극장을 창립하고 주로 좌익 단체인 연극연맹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광통교에서 김두한에게 총격을 받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었다.[4]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백병원으로 옮겨졌다. 1947년 대구 지역 순회 공연 중에도 김두한 일파와 한국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습격과 총격을 받았다.

1947년 12월부터 1948년 4월 사이에 북한으로 밀입북하였다.

1951년 영화인연맹 위원장[5], 1952년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평양연극극장 배우, 1959년 조선연극인동맹 부위원장, 1961년 조선영화연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화대표단 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이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촬영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사를 역임하였고, 1957년 공훈배우 칭호, 1964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71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숙청되었다. 사망 시기는 불명확하며 1971년 사망설과 1973년 사망설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10년 9월 3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관전리 구 철원관아 객사에서, 철원군수를 지낸 심완섭과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6] 서울특별시 재동이 출생지이다. 1909년생, 1908년생 설도 있으나, 1910년생 설이 통설이다. 증조부 심경택과 조부 심상학(沈相學)은 과거 급제자로, 각각 판서와 한성부판윤, 참판(차관급)을 역임했다. 그러나 아버지 심완섭은 서자였기에 어린 시절 품팔이꾼을 전전했다.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제이고보 입학 전인 의정부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1922년)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2. 2. 무용과 연극 데뷔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무용에 관심을 가졌으나, 학교의 승인 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1929년 11월 14일부터 11월 16일까지 경성부 조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간난이의 설움》에 출연하였다. 《춘향전》에서는 황철이 이몽룡 역을, 심영이 방자 역을 맡았으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심영이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황철이 홍도의 오빠 역을 맡았다.[9] 다시 복학하여 1930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미국인 무용가 A. C 그라운드에게서 무용 지도를 받았고, 그의 딸이 가까이에서 도와주며 1년간 무용 연습을 했지만 그만두고 1931년부터는 영화 배우도 겸하게 되었다.

2. 3. 연극, 영화배우 활동

1932년 조선영화제작소 창립에 참여했다.[10] 12월 태양극단 소속으로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부탁으로 박제행(朴齊行) 등과 드라마 '인도의 달'을 촬영해 비디오로 녹화했으나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1932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생 후, 태양극단은 만주 동포 위문 공연을 추진했고 심영도 여기에 참여했다.

1930년대 초 동양극장에 소속되었다가 탈퇴했다. 일본에서 잠시 구두닦이를 하며 구두 수선 기술을 익힌 그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36년 무렵까지 연극 활동 외에 경성부 종로구 한청빌딩에서 구두 수선 가게를 운영하며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6일 동양극장 출신 송영, 서월영 등의 주도로 극단 중앙무대가 설립되자 여기에 참여했다. 1939년 극단 고협의 대표로 활동했다.[11]

1941년 8월 1일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에 따라 영화배우로 등록되었다. 1941년 9월 촬영, 1942년 개봉한 학도병 주제의 일본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에 출연했다. 1941년 12월 22일 경성부 부민관 중강당에서 열린 조선연극협회 조직에 참여, 감사로 선출되었다.

1943년 친일 선전 영화 망루의 결사대(원제: 望樓の決死隊)에 출연했다. 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열린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일어극 부문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2. 4. 광복 이후, 피격과 구속

1945년 9월 심영은 박제행, 박창환, 박춘명, 김양춘, 박영호 등과 함께 혁명극장을 창립하고 극장장이 되었으나, 여러 번 피습당한 끝에 극장 문을 닫았다.[15][16] 해방 이후 군정기에는 심영이라는 예명 외에 원래 예명과 비슷한 심장(沈彰)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김두한이 기억에 착오가 있었거나 혹은 정확하게 기억했을 수도 있는 심형일 역시 그의 다른 가명이나 예명일 가능성이 있다.

1946년 3월 14일 오후 8시 30분경, 극작가 박영호의 《님》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광통교에서 괴한에게 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외과 김성진(金晟鎭) 외과에 입원했다.[15][16] 서울신문은 당시 상황을 ‘다리 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런 바바리코트와 회색 모자를 쓴 괴한이 나타나 권총을 발사했다’고 묘사했다.[17] 이때 그는 하복부(아랫배 주변)를 관통상 당했다.

심영에게 을 쏜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김두한1969년 동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심영에게 총을 쐈으며 이후에 백병원을 찾아가 심영을 죽이려고 했지만,[18] 심영의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18] 그러나 김두한이 심영을 ‘심형일’이라고 부르고 있고 극장과 병원 이름이 당시 기사와 모두 일치하지 않아 일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7월 26일 문화공작대를 이끌고 대구에서 공연 도중,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연극이 중단되었다.[21] 1947년 파업 선동 혐의로 미 군정 경찰에 검거되었다.[22]

2. 5. 월북 이후

1948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국 연기과장,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5] 1948년 4월 19일~4월 30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남북협상에는 문화예술인 대표자로 협상을 지지하였다. 1948년 6월 29일의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6월 29일 한국 전쟁 당시 리승엽조선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상륙, 영화배우, 연극배우, 탤런트, 가수, 희극인들에게 같이 북한으로 갈 것을 권고하거나 꾀거나 강제로 수십여 명을 데려가기도 했다. 연예인 뿐만 아니라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인 백인제 박사도 데려갔다.

전쟁으로 남북 경계선이 한반도 군사 분계선으로 대체되면서 실향민이 되었다.

월북 이후 1952년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 연극극장 배우, 연극극장장을 역임했고, 1959년 조선연극인동맹 부총장을 맡았다. 1961년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인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화대표단 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 공훈배우 칭호, 1964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6년부터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출연 작품으로는 《내고향》(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이 있다.

1971년 숙청되어 중앙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에는 심영이 1971년 7월 24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1971년 숙청되어 평양직할시 인근의 삼석구역 삼신탄광에서 노역을 하다가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23] 그가 왜 숙청되었는가의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3. 친일 행적 논란

심영은 일제 강점기에 극단 고협의 대표로 활동하였다.[11] 여러 연극 단체들이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했을 때 간부를 맡았으며, 고협은 태평양 전쟁임선규의 《빙하》, 《상아탑에서》, 송영의 《해당화 피는 섬》, 김태진의 《아름다운 고향》 등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1941년 8월 1일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에 따라 영화배우로 등록되었고, 1943년에는 친일 선전 영화 망루의 결사대(원제: 望樓の決死隊)와 《너와 나》를 비롯한 몇몇 관변 영화에 출연하면서 친일 연기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열린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일어극 부문 개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심영을 문예봉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배우로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주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12]

4. 작품

심영은 해방 이전에는 주로 연극과 영화에서 활동했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영화에 출연하는등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영화 ===

제목참여년도비고
아름다운 희성1935년금강시네마 제작
바다여 말하라1936년청도영화사 제작, 주연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6년금강시네마 제작
지복만리1938년함경북도 무산 촬영
君と僕일본어1941년1942년 상영, 학도병 주제의 일본 영화
망루의 결사대1943년친일 선전 영화
너와 나1943년친일 영화[12]
내 고향1949년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년
정찰병1953년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년
두만강1960년
다시 찾은 이름1963년



=== 드라마 ===


  • 라디오 드라마, 《인도의 달》 (1932)

4. 1. 연극

이후 극단에 들어가 극단 태양극단(太陽劇團)에서 활동했고 연출부도 담당하다가, 극단 동경(東京)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 연극 인삼(仁三)에서 단역으로 젊은 청년 역을 했으며,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 어둠에서에서 처음 주인공 역을 맡았다. 그는 주인공 역과 악역 등을 번갈아 가면서 맡게 되었다. 1936년 《춘향전》에서도 방자 역을 맡았고, 삼남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왔다.[10]

1937년 6월 6일 동양극장 출신 송영, 서월영 등의 주도로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가 설립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4. 2. 영화

제목참여년도비고
아름다운 희성1935년금강시네마 제작
바다여 말하라1936년청도영화사 제작, 주연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6년금강시네마 제작
지복만리1938년함경북도 무산 촬영
君と僕일본어1941년1942년 상영, 학도병 주제의 일본 영화
망루의 결사대1943년친일 선전 영화
너와 나1943년친일 영화[12]
내 고향1949년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년
정찰병1953년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년
두만강1960년
다시 찾은 이름1963년


4. 3. 드라마

1932년 대경영화양행에서 제작한 이수일과 심순애, 신흥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방아타령에 참여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영화제작소(朝鮮映畵製作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태양극단 소속으로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부탁으로 박제행(朴齊行) 등과 인도의 달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해서 비디오로 녹화하였으나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10] 1935년 금강시네마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희성, 1936년 청도영화사 제작 바다여 말하라의 주연, 금강시네마의 은하에 흐르는 정열 등에 참여하였다. 1937년 6월 6일 동양극장 출신 송영, 서월영 등의 주도로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를 설립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1938년 11월 함경북도 무산에서 영화 지복만리(福地萬里) 촬영에 출연하였다.

  • 라디오 드라마, 《인도의 달》 (1932)

4. 4. 기타

1934년 여름, 경상, 전라, 충청 삼남지방에 수해가 발생하자 그는 수재 의연품으로 의복을 두 번 기증하였다.[10] 의류의 종류나 개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8년 8월 1일 잡지 삼천리 제10권 8호에서 현대 여성의 악취미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할 때 참여하여, 격에 맞지 않은 양장을 입고,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파마를 한 것, 젊은 여자들의 담배 유행병, 길에서 츄잉껌을 씹으며 다니는 것 등을 현대 여성의 악취미로 꼽았다.

심영은 한국 전쟁 중 남한의 영화 및 연극 배우, 희극인들을 납치하거나 월북하도록 권고, 속임수를 썼으므로 휴전 후 한동안 금기대상이 되었다. 1971년부터 한국의 인명사전, 백과사전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죽음은 1970년대 중반쯤 탈북자에 의해 알려졌다. 그러나 심영의 사망 장소, 사망년도, 사망 날짜에 대한 것은 다소 정확하지 못하다.

5. 수상 경력

6. 가족 관계

증조부 심경택(沈敬澤)과 조부 심상학(沈相學)은 과거 급제자로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나, 아버지 심완섭(沈琬燮)은 서자였다. 아버지 심완섭은 철원군수를 지냈다.[6] 부인 이명희(李明嬉)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심경택(沈敬澤)1833년 문과 급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역임
조부심상학(沈相學)1873년 문과 급제, 이조참의, 예조참판 역임
아버지심완섭(沈琬燮)철원군수 역임, 심상학의 서자
어머니강릉 김씨군수 김병섭(金秉燮)의 딸
부인이씨(李氏)본관과 이름 미상, 사별 또는 이혼 여부 불명
부인이명희(李明嬉)1947년 심영 피격 당시 생존


7. 기타

1936년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심영이 좋아하는 색상은 파란 하늘색이고, 좋아하는 꽃은 장미라고 밝혔다. 그는 유행가요는 싫어하지만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작품의 주제곡은 좋아한다고 하였다.[2]

삼천리, 개벽 등의 잡지나 언론에 심영이 스스로 공개한 취미로는 댄스와 무용, 검도가 있었는데, 1936년 무렵 검도 초단을 취득하였다. 작고 덩치있는 체구였지만 그는 무용과 발레를 할 줄 알았다.[2]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심영은 '고자라니' 패러디로 유명해지면서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넷상에서 큰 화제가 된 인물이다.

8. 등장한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심영(沈影) http://encykorea.aks[...] 2022-08-22
[2] 뉴스 천부적 재능의 조선 최고의 스타 황철 http://star.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1-29
[3] 서적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4] 웹사이트 http://dbs.donga.com[...]
[5] 서적 한국·북한 인명사전 세계정경조사회 1966-06-20
[6] 문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7] 뉴스 奇山度 等을 煽動하야 동아일보 1922-07-03
[8] 뉴스 假金徹은 警察密偵 동아일보 1922-08-26
[9] 뉴스 천부적 재능의 조선 최고의 스타 황철 - [한국영화스타 8-①] 영화배우 황철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1-29
[10] 뉴스 三南水災義捐金品 동아일보 1934-08-03
[11] 서적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02-25
[12] 서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13] 뉴스 每日新報 1944-03-17
[14] 뉴스 每日新報 1944-01-29
[15] 뉴스 『高協』沈影氏 拳銃怪漢에게被襲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6-03-16
[16] 뉴스 沈影씨 피격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6-03-16
[17] 뉴스 안개ᄭᅵᆫ밤거리의悲劇 - “革命劇場”의俳優沈影氏被襲 서울신문 1946-03-16
[18] 뉴스 제30화 국립극장에서 배우 `심영` 피격 http://dbs.donga.com[...] 동아방송 1969-11-16
[19] 뉴스 연맹 서울지부 결성 자유신문 1946-12-27
[20] 뉴스 문화공작 제2·제4대도 출발 자유신문 1947-07-21
[21] 뉴스 대구서도 피습 자유신문 1947-07-26
[22] 문서 드라마 야인시대 관련 내용
[23] 뉴스 ‘고추절단기’를 생산하는 심영산업? http://weekly.khan.c[...] 주간경향 2014-03
[24] 문서 친고조할머니의 아버지
[25] 문서 친증조할머니의 아버지
[26] 문서 친증조할머니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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