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라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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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스 라미레스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한 야구인이다. 1998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2001년 일본 야구계에 진출,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에서 뛰면서 통산 2,017안타를 기록했다. 2008년과 2009년 NPB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감독을 맡아 팀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2023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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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라미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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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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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더 라몬 라미레스 키뇨네스 |
원어 이름 | Alexander Ramón Ramírez Quiñónez (스페인어) |
별칭 | 라미짱 () |
국적 | 일본헤이세이 31년 법무성 고시 제11호, 『관보』 헤이세이 31년 1월 23일 본지 제7432호 "좌기자의 신청에 관한 일본국에 귀화의 건은, 이것을 허가한다. 헤이세이 31년 1월 23일 법무대신 야마시타 다카시 (중략) 주소 (생략) 라미레스・카프리레스・알렉산더・라몬 쇼와 49년 10월 3일생" |
출생지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
생년월일 | 1974년 10월 3일 |
신장 | 180cm |
체중 | 100kg |
포지션 | 외야수 / 감독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년도 | 1991년 |
드래프트 순위 | 아마추어 FA |
첫 출장 (MLB) | 1998년 9월 19일 |
첫 출장 (NPB) | 2001년 3월 30일 |
마지막 출장 (MLB) | 2000년 9월 27일 |
마지막 출장 (NPB) | 2013년 10월 8일 |
선수 경력 | |
MLB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8년–200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2000년) |
NPB | 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01년–200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8년–2011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2년–2013년) |
기타 |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2014년)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코치 |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2014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6년–2020년) |
수상 내역 | |
NPB | 2× 센트럴 리그 MVP (2008년-2009년) 8× NPB 올스타 (2002년–2003년, 2007년–2012년) 2× 일본 시리즈 우승 (2001년, 2009년) 2008년 CLCS MVP 4× 베스트 나인 (2003년, 2007년–2009년) 센트럴 리그 타격왕 (2009년) 3× 센트럴 리그 타점왕 (2003년, 2007년, 2008년) 센트럴 리그 홈런왕 (2003년) |
MLB 통계 | |
타율 | .259 |
안타 | 86 |
홈런 | 12 |
타점 | 48 |
NPB 통계 | |
타율 | .301 |
안타 | 2,017 |
홈런 | 380 |
타점 | 1,272 |
명예의 전당 | |
종류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2023년 |
득표율 | 81.7% (355표 중 290표) |
헌액 방식 | 경기자 부문 |
유튜브 채널 (라미짱 패밀리) | |
채널 이름 | Ramichan Family |
채널 URL | Ramichan Family 유튜브 채널 |
활동 기간 | 2020년 4월 3일 - |
장르 | 블로그 |
구독자 수 | 2070명 |
조회수 | 31,931회 |
통계 업데이트 | 2022년 7월 26일 |
실버 버튼 | 예 |
실버 버튼 획득 년도 | 2020년 |
유튜브 채널 (라미레스 공식) | |
채널 이름 | [라미레스 공식] 라미짱 채널 |
채널 URL | [라미레스 공식] 라미짱 채널 유튜브 채널 |
채널 표시 이름 | 라미짱 채널 |
활동 기간 | 2020년 11월 14일 - |
장르 | 야구 |
구독자 수 | 약 21.9만 명 |
조회수 | 약 1326만 회 |
통계 업데이트 | 2022년 7월 26일 |
2. 프로 야구 경력
1992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했다.[2] 1998년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2] 2000년 시즌 도중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이적했는데 그 해에는 부상 슬럼프가 많았지만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4번 타자로도 경험하였다.[2] 2001년 일본 프로 야구계에 진출하면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했다.[5]
2002년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로 6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2003년 시즌 타율 3할 3푼 3리, 40홈런, 124타점을 기록하면서도 타격 부문 3관왕은 놓쳤지만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남겼다.[31]
2006년 9월 16일의 경기에서 프로 야구 역대 5번째인 4년 연속 100타점을 기록했다.
2007년
- 4월 21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외국인 선수로서는 구단 역사상 최초인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33]
- 7월부터 9월까지 연속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고 3개월 연속은 프로 야구 사상 최초 기록이었다.
- 8월 1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가네토 노리히토로부터 솔로 홈런을 때려내 외국인 선수로서는 구단 역사상 최초인 200호 홈런을 달성했다.
- 9월 1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야마구치 슌으로부터 2점 적시타를 때려내 역대 세 번째이자 외국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5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했다.[33]
- 9월 2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473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는데 이것은 외국인 선수로서는 역대 1위의 기록이다.
- 9월 27일, 히로시마전에서 시즌 24번째의 맹타상을 기록, 마에다 도모노리가 가지고 있던 센트럴 리그의 시즌 최다 맹타상 기록을 경신했고 이 경기에서 안타 개수를 195개까지 늘려 로버트 로즈가 갖고 있던 시즌 우타자 최다 안타 기록도 경신했다.
- 10월 4일, 요코하마전에서 미쓰하시 나오키로부터 3루를 강습한 내야 안타를 때려내 이것은 역대 세 번째의 기록이며 외국인 선수의 우타자로서는 사상 최초인 시즌 200안타를 기록했다.[33]
- 10월 8일, 요코하마전에서 아오키 노리치카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경신하는 시즌 203안타를 기록, 다음날인 히로시마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1개의 안타를 추가해 204개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위타자 타이틀은 그 해까지 팀 동료인 아오키가 차지했고 200안타를 날리면서 수위 타자를 놓친 것은 양대 리그를 통틀어 처음이었다.[34]
2008년
- 3월 28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1차전)에서 전체 구단을 상대로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 5월 3일, 야쿠르트전에서부터 6월 4일의 오릭스 버펄로스전까지 요미우리 구단으로서는 역대 2위이자 외국인 범위 선수로서 구단 신기록이 되는 27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 5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도쿄 돔)에서 좌중간을 향해 홈런성 타구를 쳤지만 한신 측 응원석에 어느 팬이 펜스 앞에 손으로 때리면서 떨어뜨렸기 때문에 2루타로 판정되었다.
- 5월 8일, 한신전에서 일본 진출 이후 8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 이 경기에서 때린 홈런에 대해 “오늘은 한신 팬이 없는 곳(백 스크린)에 때렸다”라고 발언했다.
- 9월 3일, 히로시마전에서 오 사다하루 이후 프로 야구 역대 두 번째인 6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했다.
- 9월 17일, 요코하마전에서 프로 야구 53번째인 통산 250홈런을 달성했다.
- 9월 21일, 한신전에서 스캇 애치슨으로부터 통산 1338번째의 안타를 때려내 요나미네 가나메가 기록한 센트럴 리그의 외국인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
- 10월 25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vs 주니치)에서는 동점인 상황에서 주니치의 다카하시 아키후미로부터 결승 2점 홈런을 때려내 6대 2로 요미우리가 주니치 드래건스를 누르고 승리,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한 3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본인으로서는 2001년 이후 일본 시리즈 출전이 이뤄지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MVP로 선정되었다.
- 총 7경기를 치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개인 최다인 병살 4개를 기록하는 등의 부진을 겪었지만 2차전에서는 끝내기 홈런을 때려내는 등의 활약을 보여 일본 시리즈 감투 선수상을 수상했다.
- 정규 시즌을 통해서 개인 최다 홈런을 포함한 타점, 출루율, 장타율, OPS를 기록했고 일본 진출한 이후 처음이 되는 삼진 개수가 두 자릿수 줄어들면서 안정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9년
- 8월 26일, 주니치전에서 가와이 유다이로부터 1500번째의 안타를 기록했다.
- 8월 30일, 한신전에서 시모야나기 쓰요시로부터 시즌 150번째의 안타를 기록, 이 안타에 의해서 8년 연속 150안타라는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
- 9월 30일, 주니치전에서 7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 이것은 오 사다하루와 대등한 성적을 남겨 일본 프로 야구의 타이 기록을 세웠다.
2010년
- 8월 26일, 주니치전에서 8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 이 기록은 오 사다하루를 제치고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38]
- 10월 9일, 시즌 최종전인 야쿠르트전에서 개인 최다인 49호 홈런을 때려냄, 센트럴 리그에서는 2002년 마쓰이 히데키가 기록한 50호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49홈런과 129타점을 기록하며 2003년 이후 통산 두 번째의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 9년연속 150안타 신기록 수립.
2011년
- 5월 1일, 요코하마전에서는 4번 타자로서 416경기 연속 선발 출전 기록을 세워 요미우리 구단 신기록을 달성했다.[38]
- 10월 31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가 종료된 후 요미우리에서 퇴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40]
- 12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라미레스의 영입을 발표하면서 요코하마 DeNA에 정식으로 입단했다.[41]
2012년 7월 5일,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2013년
- 4월 6일, 외국인 선수 최초로 일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44]
- 7월 18일, 2군 강등.
- 10월 2일, 구단 측이 2014년 시즌은 계약하지 않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46]
2. 1. 미국 마이너 리그 시절
1991년 7월 1일,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고 프로에 입문했다.[2] 이후 오랫동안 마이너 리그 생활을 하다가 1998년 9월 19일 메이저 리그 첫 경기를 갖는다. 199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 리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루 부드로 상을 수상했다.[2][3] 2000년 7월 2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엔리케 윌슨과 함께 트레이드 되었다. 메이저 리그에서의 3년 동안 135경기에 출장하여 통산 2할 5푼 9리의 타율에 12개의 홈런, 48타점, 38득점, 2루타 17개, 3루타 3개, 도루 3개를 기록했다.[2] 2000년 11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여 일본 프로 야구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2]알렉스 라미레스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근교의 작은 마을인 "피냔고 데 자레"에서 태어났다. 인구는 약 200명이며, 그 중 4분의 3 정도가 라미레스 일족이라고 한다.[20] 5살 때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으며, 8살에 지역 리틀 리그 감독에게 스카우트되어 팀에 소속되었다. 15세가 되자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를 목표로 학교를 중퇴했다. 당시에는 주로 투수를 맡았다.
2. 2. 메이저 리그 시절
1991년 7월 1일,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고 프로에 입문했다.[4] 18세에[21] 베네수엘라 국내 선수권에 출전했을 때 외야수로 경기에 출전한 것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스카우트 눈에 띄어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22] 1994년 2월에 결혼[23]을 했고, 1995년에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장의 파업의 영향으로 메이저 리그 스프링 트레이닝에 대체 선수로 참가하여, 파업 파괴를 한 보복 조치로서 메이저 리그 선수회 가입을 인정받지 못했다.[24]이후 오랫동안 마이너 리그 생활을 하다가 1998년 9월 19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첫 경기를 가졌다.[4] 당시 AAA급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121경기에 출전하여 34홈런 103타점 6도루, 타율 .299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라미레스는 같은 날 메이저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수비력 부족으로 수비 강화 선수를 우선적으로 메이저에 승격시키고 싶어 했던 감독과 방침이 맞지 않아, 메이저 승격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28]
1999년에는 6월에 메이저에 재승격하면서, 매니 라미레스의 백업 우익수로 활약하며, 48경기에서 타율 .299를 기록했다. 2000년에는 처음으로 개막 로스터에 합류하였고, 매니 라미레스 휴양 시 대타 등으로 7월 하순까지 4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86의 성적을 거두었다.
2000년 7월 28일 윌 코르데로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엔리케 윌슨과 함께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했다.[4] 그러나 이적 전의 좋은 컨디션은 사라지고 타율은 점차 하락하여 선발 출장에서 제외되었다. 라미레스에 따르면 "타격 코치(로이드 맥클렌던)가 타석에서의 스탠스를 바꾸도록 지시했고, 그에 따랐더니 슬럼프에 빠져 코치에게 '스탠스를 원래대로 돌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다음 날부터 선발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25] 9월에 들어서면서 4번 타자로 기용되었지만[26], 2할 8푼대였던 타율은 최종적으로 .247까지 떨어졌다(이적 후에는 .209).
메이저 리그에서의 3년 동안 135경기에 출장하여 통산 2할 5푼 9리의 타율에 12개의 홈런, 48타점, 38득점, 2루타 17개, 3루타 3개, 도루 3개를 기록했다.[4] 2000년 11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여 일본 프로 야구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2. 3. 일본 프로 야구 시절
200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현재 팀명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이후 팀의 중심 타선에서 클린업 히터 역할을 맡았다. 입단 첫 해인 2000년 타율 2할 8푼에 29홈런, 88타점을 기록했으며, 등번호 3번을 달았다.[27]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집과 차를 구매하여 대출금 상환이 남아있어, "1년만 일본에서 돈을 벌고 돌아가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7] 오카자키 이쿠와의 2023년 대담에서는 처음에는 일본 야구를 얕보며 "내가 야구를 가르쳐주겠다" 정도의 생각이었다고 한다.[28]2001년에는 138경기에 출전, 타율 .280, 29홈런, 88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5]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끈기 있게 기용한 덕분에 이러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겸손해하며, 만약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더라면 곧바로 2군으로 강등되어 몇 달 후에는 집에 돌아갔을 것이라고 2023년 오카자키 이쿠와의 대담에서 회고했다.[28] 처음 계약에서는 "5번 타자・우익수"로 출전을 약속받았지만, 캠프 첫날 이나바 아츠노리의 수비를 보고 좌익수로 전향했다.[29] 일본 야구의 많은 훈련량에 당황했고, 처음 3개월 동안은 포크볼을 전혀 칠 수 없어 삼진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야에가시 유키오 1군 타격 코치의 지도를 통해 일본 야구에 적응할 수 있었다.[30]
2002년에는 139경기에 출전하여 3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했지만, 리그 최다인 146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4번 타자를 맡아 140경기에 모두 출전,[31] 타율 .333, 40홈런, 124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타점왕, 홈런왕,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일본 진출 3년 만에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달성했으며, 같은 해 349루타는 헤이세이 시대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2004년 8월 21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트레이 호지스를 상대로 런닝 홈런을 쳤다. 이 해에는 부상으로 인해 결장하는 경기가 있어 야쿠르트 시절 중 가장 적은 129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305, 31홈런, 110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후반 콜로라도 로키스 등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32] 본인의 희망에 따라 잔류했다.
2005년에는 타율 3할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팀의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2006년에는 26홈런, 112타점을 기록했지만, 선구안 부족으로 출루율 .289를 기록하며 양 리그 최저를 기록했다.
2007년 10월 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2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외국인 선수, 우타자로서 사상 최초로 시즌 200안타를 달성'''했으며,[33] 타율 .343, 204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 측에서 라미레스에게 잔류를 요청했으나, 제시된 조건은 계약 기간 1년, 추정 연봉 4억 엔으로 라미레스 측의 희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라미레스는 구단 측이 복수년 계약을 인정한다면 야쿠르트에 잔류하는 선택도 고려하고 있었고, "현상 유지를 위한 2년 계약 제시가 있었다면 잔류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34] 그러나 구단 측은 복수년 계약을 제시하지 않아 계약 협상이 결렬, 야쿠르트에서 퇴단하게 되었고, 11월 30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007년 12월 29일, 우타 거포를 찾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팔로스가 라미레스 영입을 검토했지만, 오릭스가 알렉스 카브레라 영입을 발표하면서 요미우리가 라미레스를 영입했다. 입단 회견은 요미우리 구단 최초로 비디오 레터로 진행되었으며, "이 팀(요미우리)에 부족한 것을 더하러 왔다"고 말했다. 추정 연봉은 5억 엔(계약 연수 2년, 총액 10억 엔)이었다. 등번호는 '''3'''이 나가시마 시게오의 영구 결번이어서 '''5'''번을 달았다. 라미레스는 이전부터 "요미우리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힘든 경험을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요미우리를 가장 가고 싶지 않은 팀으로 꼽았지만,[35] 요미우리가 라미레스가 원했던 복수년 계약을 제시했고,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지휘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요미우리 입단을 결정했다고 한다.[36]
개막부터 5번 타자로 시즌을 맞이했지만, 이승엽・다카하시 요시노부의 부진으로 주로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높은 타율과 장타력을 보여주며 45홈런, 125타점으로 2년 연속이자 통산 3번째 타점왕을 차지했지만, 홈런왕은 1개 차이로 무라타 슈이치에게 내줬다. 그러나 팀의 리그 2연패에 크게 기여하며 2008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교류전에서는 퍼시픽 리그 팀 주최 경기가 지명 타자 제도였기 때문에 주로 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CS 2차 스테이지 4차전에서는 8회에 역전 2점 홈런을 쳐 6년 만의 일본 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지명 타자로 출전했고, 4・5차전에서는 아베 신노스케가 부상으로 지명 타자로 출전하면서 좌익수로 출전했다. 7차전에서 마지막 타자로 유격수 땅볼에 그쳐 일본 제일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차전 팀 유일의 득점인 적시타, 2차전 끝내기 홈런, 3차전 솔로 홈런, 5차전 역전의 발판을 만드는 2루타 등 맹활약하며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취득하여 2009년부터 외국인 선수 쿼터에서 제외되었다.
에는 144경기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하여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타율 .322로 생애 첫 수위 타자와 3번째 최다 안타를 획득했고, 3할 30홈런 100타점을 달성하며 팀의 3연패에 기여, 2년 연속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내내 기복이 적었고, 6월을 제외한 월간 타율은 모두 3할 이상이었다. 요미우리 우타자가 수위 타자를 차지한 것은 의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38년 만이었다. 일본 시리즈 관전 중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딸에게 파울볼을 맞혔지만, 다음 날 "미안해요"라고 적힌 사인볼을 오가사와라에게 전달했다.[37] 같은 시리즈 4차전 7점 차 뒤진 상황에서 카나모리 타카유키에게 3점 홈런을 쳤지만 팀은 패했다. 그러나 5・6차전에서 승리하며 요미우리 소속으로 일본 제일을 경험했다.
4월, 손자 D.J. 라미레스가 탄생했다(부인의 의붓아들인 알렉스 라미레스 주니어의 아들). 이전 2년과 달리 시즌 초반에는 저조한 타율에 고전했지만, 득점권에서 강한 타격을 보여주며 홈런과 타점을 양산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컨디션이 급격히 좋아져 타율도 상승했고, 최종적으로 타율 .304, 49홈런, 129타점으로 홈런・타점 2관왕을 차지했다. 49홈런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우타자 1시즌 최다 홈런이자 요미우리 외국인 타자 최다 홈런 기록이다. 또한 2003년부터 이어온 시즌 100타점을 8년 연속으로 기록하며, 오 사다하루의 7년 연속(1963년~1969년)을 넘어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수위 타자 아오키 노리치카(야쿠르트), 시즌 MVP 와다 가즈히로 (주니치), 시즌 안타 수 일본 신기록을 세운 매트 머튼(한신)에 밀려 베스트 나인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타격 2관왕을 차지하고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지 못한 것은 의 후지무라 토미오, 의 후지모토 카츠미, 의 토니 솔레이타에 이어 4번째였다. 그리고 이 시즌에 자신의 4번째 연간 120타점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마츠나카 노리히코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5월 1일, 4번 타자 연속 선발 출장 기록을 416경기로 늘리며 마쓰이 히데키의 415경기 구단 신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7월 13일 한신전에서 사구를 맞아 7월 14일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나가노 히사시가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면서 기록은 469경기로 중단되었다. 대타로 출전하여 연속 경기 출장은 이어갔지만, 다음 날 경기에서는 출전 기회가 없어 연속 경기 출장은 985경기로 멈췄다. 이 기록은 외국인 선수 역대 최장 기록이다.[38] 8월 5일, 3회 초 내야 안타로 NPB 통산 1793안타를 기록, 타피 로즈의 1792안타를 넘어 역대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안타 신기록을 세웠다.[39] 시즌 성적은 137경기, 타율(.279)이 요미우리 입단 후 처음으로 3할을 넘지 못했고, 타점(73)은 연속 100타점이 8년 만에 끊기며 일본 진출 이후 최저였다. 홈런(23)도 일본 진출 이후 가장 적었지만 리그 2위이자 팀 내 1위였다. "반발력이 낮은 공"(통일구) 도입으로 센트럴 리그 전체 홈런 수가 감소했기 때문에 홈런 수 자체는 부진했다고 보기 어렵다(최다는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31개). 10월 31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 스테이지 종료 후 퇴단을 표명했다. 통일구 도입으로 홈런이 감소하여 대량 득점이 어려워지면서 수비로 실점을 막는 것이 중요해졌고, 라미레스의 수비는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칭찬받을 만한 수비는 아니었고, 후반에는 타순 강등뿐 아니라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기도 있었다. 라미레스는 타격으로 팀에 기여하고 싶었지만, 팀은 수비를 중시하는 방침으로 바뀌면서 라미레스는 팀에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40]
2011년 12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라미레스 영입을 발표하고 입단 회견을 가졌다.[41] 등번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과 같은 '''3'''이다.
2012년에는 시범 경기에서 근육 파열로 인해 개막전 선발 출장은 놓쳤지만, 4월 4일부터 신 팀의 4번 타자로 정착했다. 한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시기가 이어졌지만, 점차 컨디션을 끌어올리면서 7월 5일에는 NPB/MLB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MLB에서 86안타·NPB에서 1914안타). 7월 14일, 외국인 선수 최고 기록인 1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7월에는 DeNA 이적 후 처음이자 통산 9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3개 구단에서 월간 MVP를 수상한 것은 사상 최초이다.[42] 전년과 같은 13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은 3할을 기록했지만, 규정 타석을 채운 해에서는 처음으로 홈런이 20개 미만으로 19개에 그쳤다. 그러나 5월 20일 롯데전에서 비디오 판독 끝에 파울 판정이 난 홈런성 타구를 날렸다. 7분이나 걸린 비디오 판독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홈런으로 인정되었다면 20홈런을 달성했을 것이다.[43]
2013년에는 토니 블랑코의 입단으로 5번 타순으로 이동했고, 4월 6일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6회초에 전 팀 동료인 이시카와 마사노리를 상대로 좌익수석으로 날아가는 홈런을 날려, '''외국인 선수로 입단한 선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NPB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44]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 퇴단의 요인이 되었던 수비 난이 현저해진 데다가, 특히 2000안타를 달성한 이후에는 타격 면에서도 부진하여 4월 25일 요미우리전을 마지막으로 선발 출장에서 제외되었다. 이후에는 대타 또는 교류전에서의 지명 타자로 출전했지만, 대타에 익숙하지 않아 결과를 내지 못했고, 6월 2일 니혼햄전에서 홈런을 날린 것을 마지막으로 22타석 연속 범타로, 전반기 종료 후인 7월 18일에 일본 진출 13년 만에 처음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결국, 일본 진출 1년차부터 12년 연속으로 이어오던 시즌 100경기 출전·규정 타석 달성·시즌 100안타·시즌 두 자릿수 홈런이 모두 끊어졌다. 9월 27일,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5] 10월 2일, 구단 측은 2014년 시즌에는 계약하지 않기로 공식 발표했다.[46] 이 해에는 일본 진출 후 최저 출전 경기 수 56경기, 타율 .185, 2홈런, 14타점으로 마무리했다.
2. 3. 1. 야쿠르트 스왈로스 (2001-2007)
200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현재 팀명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이후 팀의 중심 타선에서 클린업 히터 역할을 맡았다. 입단 첫 해인 2000년 타율 2할 8푼에 29홈런, 88타점을 기록했으며, 등번호 3번을 달았다.[27]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집과 차를 구매하여 대출금 상환이 남아있어, "1년만 일본에서 돈을 벌고 돌아가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7] 오카자키 이쿠와의 2023년 대담에서는 처음에는 일본 야구를 얕보며 "내가 야구를 가르쳐주겠다" 정도의 생각이었다고 한다.[28]2001년에는 138경기에 출전, 타율 .280, 29홈런, 88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5]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끈기 있게 기용한 덕분에 이러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겸손해하며, 만약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더라면 곧바로 2군으로 강등되어 몇 달 후에는 집에 돌아갔을 것이라고 2023년 오카자키 이쿠와의 대담에서 회고했다.[28] 처음 계약에서는 "5번 타자・우익수"로 출전을 약속받았지만, 캠프 첫날 이나바 아츠노리의 수비를 보고 좌익수로 전향했다.[29] 일본 야구의 많은 훈련량에 당황했고, 처음 3개월 동안은 포크볼을 전혀 칠 수 없어 삼진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야에가시 유키오 1군 타격 코치의 지도를 통해 일본 야구에 적응할 수 있었다.[30]
2002년에는 139경기에 출전하여 3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했지만, 리그 최다인 146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4번 타자를 맡아 140경기에 모두 출전,[31] 타율 .333, 40홈런, 124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타점왕, 홈런왕,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일본 진출 3년 만에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달성했으며, 같은 해 349루타는 헤이세이 시대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2004년 8월 21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트레이 호지스를 상대로 런닝 홈런을 쳤다. 이 해에는 부상으로 인해 결장하는 경기가 있어 야쿠르트 시절 중 가장 적은 129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305, 31홈런, 110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후반 콜로라도 로키스 등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32] 본인의 희망에 따라 잔류했다.
2005년에는 타율 3할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팀의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2006년에는 26홈런, 112타점을 기록했지만, 선구안 부족으로 출루율 .289를 기록하며 양 리그 최저를 기록했다.
2007년 10월 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2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외국인 선수, 우타자로서 사상 최초로 시즌 200안타를 달성'''했으며,[33] 타율 .343, 204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 측에서 라미레스에게 잔류를 요청했으나, 제시된 조건은 계약 기간 1년, 추정 연봉 4억 엔으로 라미레스 측의 희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라미레스는 구단 측이 복수년 계약을 인정한다면 야쿠르트에 잔류하는 선택도 고려하고 있었고, "현상 유지를 위한 2년 계약 제시가 있었다면 잔류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34] 그러나 구단 측은 복수년 계약을 제시하지 않아 계약 협상이 결렬, 야쿠르트에서 퇴단하게 되었고, 11월 30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 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8-2011)
2007년 12월 29일, 우타 거포를 찾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팔로스가 라미레스 영입을 검토했지만, 오릭스가 알렉스 카브레라 영입을 발표하면서 요미우리가 라미레스를 영입했다. 입단 회견은 요미우리 구단 최초로 비디오 레터로 진행되었으며, "이 팀(요미우리)에 부족한 것을 더하러 왔다"고 말했다. 추정 연봉은 5억 엔(계약 연수 2년, 총액 10억 엔)이었다. 등번호는 '''3'''이 나가시마 시게오의 영구 결번이어서 '''5'''번을 달았다. 라미레스는 이전부터 "요미우리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힘든 경험을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요미우리를 가장 가고 싶지 않은 팀으로 꼽았지만,[35] 요미우리가 라미레스가 원했던 복수년 계약을 제시했고,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지휘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요미우리 입단을 결정했다고 한다.[36]개막부터 5번 타자로 시즌을 맞이했지만, 이승엽・다카하시 요시노부의 부진으로 주로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높은 타율과 장타력을 보여주며 45홈런, 125타점으로 2년 연속이자 통산 3번째 타점왕을 차지했지만, 홈런왕은 1개 차이로 무라타 슈이치에게 내줬다. 그러나 팀의 리그 2연패에 크게 기여하며 2008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교류전에서는 퍼시픽 리그 팀 주최 경기가 지명 타자 제도였기 때문에 주로 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CS 2차 스테이지 4차전에서는 8회에 역전 2점 홈런을 쳐 6년 만의 일본 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지명 타자로 출전했고, 4・5차전에서는 아베 신노스케가 부상으로 지명 타자로 출전하면서 좌익수로 출전했다. 7차전에서 마지막 타자로 유격수 땅볼에 그쳐 일본 제일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차전 팀 유일의 득점인 적시타, 2차전 끝내기 홈런, 3차전 솔로 홈런, 5차전 역전의 발판을 만드는 2루타 등 맹활약하며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취득하여 2009년부터 외국인 선수 쿼터에서 제외되었다.
에는 144경기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하여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타율 .322로 생애 첫 수위 타자와 3번째 최다 안타를 획득했고, 3할 30홈런 100타점을 달성하며 팀의 3연패에 기여, 2년 연속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내내 기복이 적었고, 6월을 제외한 월간 타율은 모두 3할 이상이었다. 요미우리 우타자가 수위 타자를 차지한 것은 의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38년 만이었다. 일본 시리즈 관전 중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딸에게 파울볼을 맞혔지만, 다음 날 "미안해요"라고 적힌 사인볼을 오가사와라에게 전달했다.[37] 같은 시리즈 4차전 7점 차 뒤진 상황에서 카나모리 타카유키에게 3점 홈런을 쳤지만 팀은 패했다. 그러나 5・6차전에서 승리하며 요미우리 소속으로 일본 제일을 경험했다.
4월, 손자 D.J. 라미레스가 탄생했다(부인의 의붓아들인 알렉스 라미레스 주니어의 아들). 이전 2년과 달리 시즌 초반에는 저조한 타율에 고전했지만, 득점권에서 강한 타격을 보여주며 홈런과 타점을 양산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컨디션이 급격히 좋아져 타율도 상승했고, 최종적으로 타율 .304, 49홈런, 129타점으로 홈런・타점 2관왕을 차지했다. 49홈런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우타자 1시즌 최다 홈런이자 요미우리 외국인 타자 최다 홈런 기록이다. 또한 2003년부터 이어온 시즌 100타점을 8년 연속으로 기록하며, 오 사다하루의 7년 연속(1963년~1969년)을 넘어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수위 타자 아오키 노리치카(야쿠르트), 시즌 MVP 와다 가즈히로 (주니치), 시즌 안타 수 일본 신기록을 세운 매트 머튼(한신)에 밀려 베스트 나인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타격 2관왕을 차지하고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지 못한 것은 의 후지무라 토미오, 의 후지모토 카츠미, 의 토니 솔레이타에 이어 4번째였다. 그리고 이 시즌에 자신의 4번째 연간 120타점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마츠나카 노리히코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5월 1일, 4번 타자 연속 선발 출장 기록을 416경기로 늘리며 마쓰이 히데키의 415경기 구단 신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7월 13일 한신전에서 사구를 맞아 7월 14일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나가노 히사시가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면서 기록은 469경기로 중단되었다. 대타로 출전하여 연속 경기 출장은 이어갔지만, 다음 날 경기에서는 출전 기회가 없어 연속 경기 출장은 985경기로 멈췄다. 이 기록은 외국인 선수 역대 최장 기록이다.[38] 8월 5일, 3회 초 내야 안타로 NPB 통산 1793안타를 기록, 타피 로즈의 1792안타를 넘어 역대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안타 신기록을 세웠다.[39] 시즌 성적은 137경기, 타율(.279)이 요미우리 입단 후 처음으로 3할을 넘지 못했고, 타점(73)은 연속 100타점이 8년 만에 끊기며 일본 진출 이후 최저였다. 홈런(23)도 일본 진출 이후 가장 적었지만 리그 2위이자 팀 내 1위였다. "반발력이 낮은 공"(통일구) 도입으로 센트럴 리그 전체 홈런 수가 감소했기 때문에 홈런 수 자체는 부진했다고 보기 어렵다(최다는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31개). 10월 31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 스테이지 종료 후 퇴단을 표명했다. 통일구 도입으로 홈런이 감소하여 대량 득점이 어려워지면서 수비로 실점을 막는 것이 중요해졌고, 라미레스의 수비는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칭찬받을 만한 수비는 아니었고, 후반에는 타순 강등뿐 아니라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기도 있었다. 라미레스는 타격으로 팀에 기여하고 싶었지만, 팀은 수비를 중시하는 방침으로 바뀌면서 라미레스는 팀에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40]
2. 3. 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2-2013)
2011년 12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라미레스 영입을 발표하고 입단 회견을 가졌다.[41] 등번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과 같은 '''3'''이다.2012년에는 시범 경기에서 근육 파열로 인해 개막전 선발 출장은 놓쳤지만, 4월 4일부터 신 팀의 4번 타자로 정착했다. 한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시기가 이어졌지만, 점차 컨디션을 끌어올리면서 7월 5일에는 NPB/MLB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MLB에서 86안타·NPB에서 1914안타). 7월 14일, 외국인 선수 최고 기록인 1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7월에는 DeNA 이적 후 처음이자 통산 9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3개 구단에서 월간 MVP를 수상한 것은 사상 최초이다.[42] 전년과 같은 13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은 3할을 기록했지만, 규정 타석을 채운 해에서는 처음으로 홈런이 20개 미만으로 19개에 그쳤다. 그러나 5월 20일 롯데전에서 비디오 판독 끝에 파울 판정이 난 홈런성 타구를 날렸다. 7분이나 걸린 비디오 판독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홈런으로 인정되었다면 20홈런을 달성했을 것이다.[43]
2013년에는 토니 블랑코의 입단으로 5번 타순으로 이동했고, 4월 6일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6회초에 전 팀 동료인 이시카와 마사노리를 상대로 좌익수석으로 날아가는 홈런을 날려, '''외국인 선수로 입단한 선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NPB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44]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 퇴단의 요인이 되었던 수비 난이 현저해진 데다가, 특히 2000안타를 달성한 이후에는 타격 면에서도 부진하여 4월 25일 요미우리전을 마지막으로 선발 출장에서 제외되었다. 이후에는 대타 또는 교류전에서의 지명 타자로 출전했지만, 대타에 익숙하지 않아 결과를 내지 못했고, 6월 2일 니혼햄전에서 홈런을 날린 것을 마지막으로 22타석 연속 범타로, 전반기 종료 후인 7월 18일에 일본 진출 13년 만에 처음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결국, 일본 진출 1년차부터 12년 연속으로 이어오던 시즌 100경기 출전·규정 타석 달성·시즌 100안타·시즌 두 자릿수 홈런이 모두 끊어졌다. 9월 27일,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5] 10월 2일, 구단 측은 2014년 시즌에는 계약하지 않기로 공식 발표했다.[46] 이 해에는 일본 진출 후 최저 출전 경기 수 56경기, 타율 .185, 2홈런, 14타점으로 마무리했다.
2. 4. 독립 리그 시절
DeNA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은 후에도 일본 프로 야구의 다른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희망했다. 좋아하는 탄산 음료를 끊는 등 예년 이상으로 절제와 자체 교육에 노력함으로써 다른 구단의 제안에 대비하고 있었다.[48] 12월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수비에 띄지 않는 지명 타자 요원으로 라미레스의 획득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일부 보도했지만 획득에는 이르지 않았다.2014년 2월 13일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가 라미레즈를 타격 코치 겸임의 외야수로 입단하는 것을 발표했다.[49] 등번호는 야쿠르트, DeNA시절과 같은 '''3'''번으로 배정되었다.[50] 또한 타격 코치 비용을 포함한 추정 연봉은 요미우리 시절의 최고 금액 (5억 엔)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 엔 (선수로 월급은 리그 규정 상한액의 40만 엔을 적용)이었다.[51] 또한 라미레스는 일본 프로 야구 복귀 의향이 강하기 때문에 군마와의 계약은 "시즌 도중에 일본 프로 야구 구단에서 (라미레스) 획득이 타진된 경우에는 계약을 해제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부대 조항 이 곁들여진 계약을 했다.
입단 한 군마는 4번 · 지명 타자로서 5번 프란시스코 카라바이요와 함께 강력한 클린업을 형성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또 다시 세이부가 획득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지만[52] 계약은 보류되었다.[53] 6월 23일에 구단이 라미레스의 긴급 귀국을 발표,[54] 귀국하게 된 경위는 "가족의 병 요양을 보살피기 위해"였다. 이후 팀에 다시 합류해 7월 11일 경기에 한번 복귀 했지만[55][56] 비슷한 이유로 9월 4일에 구단이 두 번째 긴급 귀국을 발표했다.[57] 두 번째 귀국 후에는 복귀하지 않고 시즌을 마쳤다.
2014년 군마에서의 성적은 45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5, 7홈런, 38타점이었다.[8]
2. 5. 은퇴
10월 14일, 구단을 통해 은퇴를 밝혔다. 그러던 2015년 시즌 후 나카하타 기요시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하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감독을 역임했다.3. 은퇴 이후
2020년 11월 14일, DeNA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치러진 후, 유튜버로서 첫 번째 영상이 공개되었다.[83] 소속 사무소는 사이버에이전트 그룹의 주식회사 CV Project이며, 연예인 활동도 한다.[84]
2022년 12월 9일 아시아 리그 아이스하키의 요코하마 GRITS의 공동 대표로 취임했다.[85]
2023년 1월 13일, 플레이어 부문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NPB에서 외국인 선수 쿼터로 입단한 선수로서는 전문가 부문에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랜디 버스와 함께 최초의 사례이다. 또한, BC 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로서는 전년에 플레이어 부문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다카쓰 신고에 이어 두 번째이다. 7월 28일부터 Prime Video에서 방송되는 『아이세키 식당 Prime Video SP 만약 유명 감독이 아이세키 식당의 디렉터였다면』에서, 야구 감독이 아닌 처음으로 프로그램 디렉터로서 연출을 맡았다.[86] 9월, 일본 아이스하키 연맹 이사·홍보 위원장에 취임[87][88]
3. 1. 지도자 경력
2015년 중반, 라미레스는 오릭스 버팔로스에 어드바이저로 합류하여 젊은 선수들을 지도했다.[10] 2014년 10월 29일부터 군마 시니어 디렉터로 취임했으며,[59] 취임 후 11월 9일 제1회 트라이아웃을 시찰[60]하여, 연내로 DeNA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전 팀 동료 이토 타쿠로를 군마에 입단시키는 등[61], 편성 면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2015년 6월 22일부터 오릭스 버팔로즈와 3개월간의 계약을 맺고, 같은 구단의 순회 어드바이저를 겸임했다. 군마에서 지도하던 프란시스코 카라바요와 요헬민 차베스가 잇따라 오릭스로 이적한 것[63]에 따른 취임으로, 외국인 선수의 지원을 중심으로, 한 달에 몇 차례의 페이스로 1, 2군을 지도했다.[64] 오릭스는 2015년 10월 5일에, 라미레스와 순회 어드바이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음을 발표했다.[65]2015년 10월, 그는 2015 시즌 종료 후 팀의 부진한 성적으로 사임한 나카하타 기요시를 대신하여 2016 시즌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 DeNA 구단의 감독에 외국인이 취임하는 것은 전신인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대를 포함해서도 처음이다.[66][67] 현역 시절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및 전신 구단에 재적했던 인물이 DeNA 구단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은 2004년에 퇴임한 야마시타 다이스케 이후로, DeNA 구단의 OB로서 감독에 취임하는 것은 구단 사상 처음이다. 현역 시절부터 "일본 프로야구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다"[68]고 소원했으며, 취임 당시 12개 구단 중 유일하게 CS 출전 실적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80승을 기원하며 등번호를 80번으로 정하고 "내년 우승에 필요한 숫자"라고 말했다.
2016년 시즌은 5월 3일 시점에서 빚 11로 부진했지만, 거기에서 15승 4패 1무의 놀라운 반전을 보여 5월 28일에 빚을 모두 청산했고[69], 시즌 3위로 구단 사상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1st 스테이지에서 2위 요미우리에 2승 1패로 승리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지만, 시즌 1위 히로시마에 1승 4패(히로시마에 1승 어드밴티지 포함)로 패배하여 일본 시리즈 진출은 실패했다.
2017년 시즌도 3위로 리그전을 마쳐,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또한, 구단으로서 16년 만에 2년 연속 A클래스를 달성했다. 3위가 확정된 것은 10월 1일 히로시마전(요코하마 스타디움, 13 - 7로 승리)으로, 이 날 1년 계약으로 2018년 시즌의 속행이 결정되었다[70]。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st 스테이지에서 2위 한신에 2승 1패로 승리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 시즌 1위 히로시마에 4승 2패(히로시마에 1승 어드밴티지 포함)로 승리하여 구단으로서 19년 만에 일본 시리즈 진출을 달성했다. 이로 인해, 2010년대에 세 리그는 모든 팀이 한 번은 일본 시리즈를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세 리그에서 외국인 감독의 일본 시리즈 출장은 1987년 오 사다하루 이후 30년 만이었다[71]。 일본 시리즈에서는 소프트뱅크와 싸워 2승 4패로 끝났다[72]。
2018년 시즌은 선발 투수진의 부진 등 오산으로 우승 경쟁에서 일찍 탈락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경쟁에도 패배하여 4위로 끝나, 취임 3년 만에 처음으로 A클래스 진입에 실패했다. 고전한 시즌이었지만, 득실점 -70으로 4위를 유지했고, 라미레스 감독의 역량을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73][74] 같은 시즌부터 감독으로 취임한 요미우리의 감독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한신의 감독 가네모토 도모노리는 성적 부진으로 3년 만에 사임했지만, 라미레스는 4년째도 속행이 결정되었다.[75][76]
2019년은 개막 카드를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2승 1패로 승리했지만, 4월 16일 주니치전부터 28일 요미우리전까지 2015년 이후 10연패, 5월 3일 한신전부터 8일 요미우리전까지 5연패를 기록하는 등 초반에 크게 부진했다. 그러나 매년 험난한 세・파 교류전을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10승 7패 1무로 승리하는 등 회복세를 보이며, 전반전을 선두 요미우리와 9.5게임 차 2위로 마쳤다. 후반기에 들어서도 7월 19일 주니치전부터 무승부 1개를 포함하여 7연승을 거두는 등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8월 2일부터 선두 요미우리와의 직접 대결에서 3연승을 거두어, 최대 10.5였던 게임 차를 0.5까지 좁혔다. 마지막까지 우승 경쟁에 참여했지만, 9월 21일 직접 대결에서 요미우리에 패배하여 우승을 놓쳤다. 같은 달 24일 주니치전에 승리하여 시즌 2위를 확정하고, 2년 만에 A클래스&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결정되었다. 2위 이상을 기록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우승한 1998년 이후로, 2위 자체는 1997년 이후 22년 만이었다. 또한, 구단 사상 처음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홈에서 개최하게 되었다(이로써 12개 구단 모두가 홈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주최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3위 한신과 대결했지만, 제1전에서 6점 차를 역전당해 패배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제2전에서 오토사카 사토시의 끝내기 2점 홈런으로 승리했지만 제3전에서는 타선이 침묵하여 1점밖에 얻지 못하고, 1승 2패로 패퇴했다. DeNA가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패배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난바 도모코 구단주로부터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이끌어준 점은 평가하고 싶다"는 평가를 받아, 이듬해인 2020년의 속행이 결정되었다.[77]
2020년은 MLB로 이적한 쓰쓰고 요시토모를 대신하여 캡틴 및 4번 타자로 지명한 사노 게이타가 두각을 나타내며, 빚 1자릿수를 유지하면서 선두 요미우리를 추격했다. 8월 5일에는 구단 사상 3번째로 감독 통산 300승을 달성했지만[78], 직후 선발 투수진의 중심이었던 이마나가 쇼타와 히라타 겐타로가 각각 장기 이탈. 게다가 9월 3일에는 스펜서 패튼을 오프너로 선발 기용했지만 2회 도중 9실점으로 부진[79]하여, 요미우리에 3연전을 내준 이후 우승 경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승률 5할 전후를 유지했지만, 10월 23일에 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자, 경기 후에 미하라 이즈카즈 구단 대표에게 사임을 신청하여, 다음 날 24일에 시즌 종료까지의 퇴임이 발표되었다.[80] 11월 5일 주니치전에 패배하여 2년 만에 B클래스가 확정되었고[81], 같은 달 14일 시즌 최종전은 끝내기 승리로 마무리하여, 56승 58패 6무의 4위로 마쳤다.[82]
3. 2. 기타 활동
알렉스 라미레스는 2009년 8월에 일본 프로 생활 경험담을 담은 ‘일본에서 성공하는 방법’이라는 책을 출간했다.[198] 이는 일본 국적이 아닌 외국인 선수가 일본에서 책을 내는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198] 은퇴 후 일본에서 야구 감독이 되려는 목표를 위해 현역 은퇴 후 활동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199]2013년 2월에는 아내, 아들과 함께 도쿄에 '라미찬 카페(Ramichan Cafe)'를 열어 푸에르토리코 요리를 제공했다.[11] 이 식당은 현재 문을 닫았다.[11] 2014년 9월에 폐점했다.[170]
신앙에 대해 "하느님은 이미 나에게 이 직업을 축복하셨고, 하느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12]
2019년 1월,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13] 일본 국적 취득을 위해 귀화 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는 보도가 2018년 1월 22일에 있었고,[185] 서류 미비로 늦어졌지만 2019년 1월 23일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14][15]
2014년 10월 29일부터 군마 시니어 디렉터로 취임했다.[59] 2015년 6월 22일부터 오릭스 버팔로즈와 3개월 계약으로 순회 어드바이저를 겸임했다.[64] 2015년 10월 5일, 오릭스는 라미레스와 순회 어드바이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음을 발표했다.[65]
2020년 11월 14일, DeNA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치러진 후, 유튜버로서 첫 번째 영상이 공개되었다.[83] 사이버에이전트 그룹의 주식회사 CV Project 소속으로 연예인 활동도 한다.[84]
2022년 12월 9일 아시아 리그 아이스하키의 요코하마 GRITS의 공동 대표로 취임했다.[85] 2023년 9월, 일본 아이스하키 연맹 이사·홍보 위원장에 취임했다.[87][88]
2023년 1월 13일, 플레이어 부문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86] 7월 28일부터 Prime Video에서 방송되는 『아이세키 식당 Prime Video SP 만약 유명 감독이 아이세키 식당의 디렉터였다면』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서 연출을 맡았다.[86]
애칭은 '''"라미짱"'''[156]이며, 좌우명은 "어쩔 수 없다"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모국어는 스페인어 (베네수엘라 스페인어)이지만, 언론 인터뷰에서는 통역을 통해 영어로 답변한다. 일본어는 선수와의 소통이 가능하다.[159]
턱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수염이 금지되어 깎았다. 요코하마 DeNA 이적 후 다시 수염을 기르지 않았지만, 감독 취임 후 2020년 시즌부터 다시 기르고 있다.
"경기를 지배하는 요소의 70%는 멘탈리티, 나머지 30%는 피지컬"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162]
2010년대 이후에는, 구단을 가리지 않고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하고 있다.
존경하는 인물로 와카마츠 츠토무, 하라 타츠노리, 후루타 아츠야를 꼽았다.[175][176][124]
2015년 4월 23일에 7살 연하의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180] 2016년 초에 재혼 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다운 증후군임을 공표했다.[181] 2021년 10월 19일, "이쿠멘 오브 더 이어 2021"의 이쿠멘 스포츠 레전드 부문을 수상했다.[184]
골프를 즐기고 있다.[187]
현역 시절 홈런을 쳤을 때나 히어로 인터뷰 때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4. 야구 스타일
(2012년 3월 18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대 후루타 아쓰야와 와타라이 히로부미에게 지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 시절 부상이 적어 장기 이탈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2004년 8월 8일 이후 2011년 7월 15일에 결장할 때까지 전 경기에 출전했다. 일본 외국인 선수 연속 출장 경기 기록(985경기 연속 출장), 일본인 선수까지 포함해도 역대 8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4. 1. 타격
알렉스 라미레스는 수위 타자 1회, 홈런왕 2회, 타점왕 4회, 최다 안타 3회를 획득하는 등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였다.[89] 빠른 타격을 하는 경향이 있어[89] 2007년에는 초구 타율이 5할을 넘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사사구가 매우 적었다.[90]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에는 삼진이 많아 7년 연속 100삼진 이상을 기록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후에는 출장 경기가 많았음에도 모든 시즌에서 100개를 밑돌았다.오치아이 히로미쓰는 라미레스의 홈런을 인정하면서도, "홈런을 노리지 않고 조심하면서 하는 것처럼 보였다"라며 신중한 플레이를 했다고 평가했다.[91]
일본 진출 초기에는 전형적인 풀 히터였지만, 2008년 전후에는 공을 손까지 불러들여 바깥쪽 공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92] 몰리면 우측으로 밀어치는 유연함도 갖추었으며,[93] 구종적인 약점도 적었다.[94]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이후 2010년까지 통산 득점권 타율 .347, 통산 좌투수 상대 타율 .337을 기록하는 등 찬스와 좌투수에게 강한 면모를 보였다.
역 방향 타격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후 더욱 성숙해졌고, 변화구가 꺾이기 전에 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은퇴 후 에가와 스구루와의 대담에서 에가와는 라미레스의 연구에 감탄했다.[30]
명구회에 들어간 타자 중 유일하게 희생타를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다 (메이저 리그에서는 통산 2희생타).
라미레스는 타피 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맷 머튼, 로베르토 페타지니보다 야구 능력은 떨어지지만, 일본 야구에 대한 존경심과 그라운드 밖에서의 자세 덕분에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고 감독까지 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95]
홈런을 치거나 경기 종료 후 히어로 인터뷰를 할 때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구사했다. 홈런을 친 후 어웨이 경기에서는 단독으로, 홈 경기에서는 팀의 마스코트와 함께하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일본 진출 후 매년 액션 형태에 변화를 주었으며, 일본 코미디언들의 연기를 퍼포먼스의 출처로 삼았다. 구단이 직접 퍼포먼스 아이디어를 야구팬들로부터 모집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으며, 유명인들이 홍보 목적으로 자신들의 퍼포먼스 차용을 직접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퍼포먼스의 기본 형태는 몇 개의 퍼포먼스를 조합하여 연속으로 보여준 뒤 화면 옆으로 퇴장하는 형식이다. 일본 진출 초기에는 1개의 퍼포먼스만 구사했으나, 이후 2 ~ 4개를 연속으로 조합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2008시즌 요미우리로 온 뒤에는 상대 팀에게 지고 있을 때와 이기고 있을 때의 퍼포먼스를 따로 만들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대 후루타 아쓰야와 와타라이 히로부미에게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2. 수비 및 주루
주로 좌익수를 맡는 기회가 많았지만, 수비 범위는 매우 좁았고, 2010년에는 득점 환산에서 양 리그 최하위였다[96]。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인 2009년 시즌 오프에 감독 하라 다쓰노리로부터 1루로의 도전을 제안받거나[97], DeNA로 이적한 직후에도 감독 나카하타 기요시가 "라미레스에게 외야를 맡긴다는 고정 관념은 없다. 1루도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등[98], 수비 부담이 경감되는 1루로의 컨버트하는 안도 종종 나왔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DeNA 시절에는 수비의 쇠퇴에 대한 혹평이 잇따랐지만, 사토자키 토모야는 "계속 타격을 했기 때문에 수비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지만, 수비는 계속 똑같아요?"라고 말하며, 라미레스의 원래 수비력을 부정했고, 야수의 수비력 평가는 타격에 부수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99]。
주루 면에서는 시도 횟수를 포함해 도루 수가 적고, 베이스 러닝에서 손을 빼는 경우가 많지만, 우타자임에도 1루 도달 4.2초대 초반을 기록하는 등 주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200안타를 달성한 2007년에는 내야 안타 22개를 기록했고, 200번째 안타는 3루로의 내야 안타였다. 후년의 둔족 이미지와는 달리, 2001년 무렵에는 꽤나 준족으로 내야 안타를 양산했다[30]。
5. 감독 스타일
알렉스 라미레스 감독은 선수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며, 적극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감독이다.[101] 감독은 선수보다 유명해져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으며,[102] '범사철저'(기본적인 것을 철저히 하는 것),[103] '어떻게 시작하느냐보다 어떻게 끝나느냐가 중요',[104] 'Tomorrow is Another Day',[105] 'Cross the Line' 등 긍정적인 메시지를 통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다.[105]
팀의 일체감을 중요시하고, 기본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여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이끌었다.[105] 이러한 노력으로 2016년에는 DeNA를 구단 사상 최초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시켰다.[105]
데이터 기반의 정밀한 "분석 야구"를 추구하면서도, "정이 많은" 면모를 보였다.[108][105] 미우라 다이스케의 은퇴 경기에서 7회 초까지 등판[112][113][114][115]시켰고, 부진한 선수라도 믿고 기용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118] 사노 케이타와 같이 잠재력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능력도 보여주었다.[121]
공격 면에서는 도루나 희생타를 시도했지만, 강타자 위주의 팀 구성을 고려하여 스몰 베이스볼을 포기했다.[128] 투수를 8번, 야수를 9번에 배치하는 독특한 타순을 구성하여 득점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130]
포수 기용에 대한 고집이 강하며, 경기 중 배구를 직접 지시하거나,[136][137] 경기 초반에 포수를 교체하는 경우도 있었다.[138][139] "배터리별 방어율"을 중시하여 포수를 기용하는 경향을 보였다.[140]
선발 투수에게는 100구 이상 던지게 하지 않고, 5회까지 확실히 던지면 합격이라는 기준을 적용했다.[142] 구원 투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머신건 계투"를 통해 경기를 운영했다.[147] 신고 고의사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150][151]
2018년 시즌 종료 후에는 코칭 스태프와의 소통 부족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도 했다.[109] 아오야마 미치오는 라미레스 감독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선수들을 강하게 신뢰하는 감독이라고 평가했다.[110]
감독 통산 성적은 692경기 336승 337패 19무(승률 .499)이며, 3번의 A클래스 진출을 기록했다.[152][153]
6. 수상 및 기록
일본 프로 야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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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선수:2회(2008년, 2009년) 2년 연속 수상 기록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기록 | ||||||||||||||||
베스트 나인:4회(외야수 부문:2003년, 2007년, 2008년, 2009년) | ||||||||||||||||
월간 MVP:9회(야수 부문:2003년 4월, 2004년 9월, 2007년 7월 - 9월, 2008년 5월, 2009년 8월, 2010년 5월, 2012년 7월) 역대 3위, 센트럴 리그 최다 | ||||||||||||||||
올스타전 MVP:1회(2007년 제1전) | ||||||||||||||||
올스타전 베스트 배터상:1회(2009년 제1전) | ||||||||||||||||
홈런 더비 우승:1회(2008년 제2전) | ||||||||||||||||
센트럴 리그클라이맥스 시리즈 MVP:1회(2008년) | ||||||||||||||||
일본 시리즈 감투 선수상:1회(2008년) | ||||||||||||||||
도쿄 돔 MVP:1회(2010년) | ||||||||||||||||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표창:1회(연맹 특별상:2010년) |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1회(2007년) | ||||||||||||||||
우수JCB・MEP 상:1회(2007년) | ||||||||||||||||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 상 in 「프로 야구 부문」(2009년) | ||||||||||||||||
야구 명예의 전당 플레이어 표창(2023년) |
6. 1. 타이틀 (NPB)
일본 프로 야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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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나이 | 팀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타율 |
2001 | 27 | 야쿠르트 | 138 | 510 | 60 | 143 | 23 | 0 | 29 | 253 | 88 | 1 | .280 |
2002 | 28 | 야쿠르트 | 139 | 539 | 65 | 159 | 25 | 0 | 24 | 256 | 92 | 0 | .295 |
2003 | 29 | 야쿠르트 | 140 | 567 | 105 | 189 | 34 | 3 | 40 | 349 | 124 | 4 | .333 |
2004 | 30 | 야쿠르트 | 129 | 525 | 79 | 160 | 30 | 2 | 31 | 287 | 110 | 2 | .305 |
2005 | 31 | 야쿠르트 | 146 | 596 | 70 | 168 | 19 | 1 | 32 | 285 | 104 | 5 | .282 |
2006 | 32 | 야쿠르트 | 146 | 603 | 79 | 161 | 28 | 2 | 26 | 271 | 112 | 0 | .267 |
2007 | 33 | 야쿠르트 | 144 | 594 | 80 | 204 | 41 | 3 | 29 | 338 | 122 | 0 | .343 |
2008 | 34 | 요미우리 | 144 | 548 | 84 | 175 | 28 | 0 | 45 | 338 | 125 | 1 | .319 |
2009 | 35 | 요미우리 | 144 | 577 | 66 | 186 | 35 | 0 | 31 | 314 | 103 | 4 | .322 |
2010 | 36 | 요미우리 | 144 | 566 | 93 | 172 | 28 | 0 | 49 | 347 | 129 | 1 | .304 |
2011 | 37 | 요미우리 | 137 | 477 | 39 | 133 | 12 | 1 | 23 | 216 | 73 | 2 | .279 |
2012 | 38 | DeNA | 137 | 476 | 40 | 143 | 25 | 0 | 19 | 225 | 76 | 0 | .300 |
2013 | 39 | DeNA | 56 | 130 | 6 | 24 | 0 | 0 | 2 | 30 | 14 | 0 | .185 |
총합 | 1,744 | 6,708 | 866 | 2,017 | 330 | 12 | 380 | 3,709 | 1,272 | 20 |
''2014년 11월 21일 기준 통계''
- 수위 타자:1회(2009년)
- 홈런왕:2회(2003년、2010년)
- 타점왕:4회(2003년、2007년、2008년、2010년)
- 최다 안타:3회(2003년、2007년、2009년)
6. 2. 수상 (NPB)
일본 프로 야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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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선수:2회(2008년, 2009년) 2년 연속 수상 기록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기록[192] | ||||||||||||||||
베스트 나인:4회(외야수 부문:2003년, 2007년, 2008년, 2009년) | ||||||||||||||||
월간 MVP:9회(야수 부문:2003년 4월, 2004년 9월, 2007년 7월 - 9월, 2008년 5월, 2009년 8월, 2010년 5월, 2012년 7월) 역대 3위, 센트럴 리그 최다 | ||||||||||||||||
올스타전 MVP:1회(2007년 제1전) | ||||||||||||||||
올스타전 베스트 배터상:1회(2009년 제1전) | ||||||||||||||||
홈런 더비 우승:1회(2008년 제2전) | ||||||||||||||||
센트럴 리그클라이맥스 시리즈 MVP:1회(2008년) | ||||||||||||||||
일본 시리즈 감투 선수상:1회(2008년) | ||||||||||||||||
도쿄 돔 MVP:1회(2010년) | ||||||||||||||||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표창:1회(연맹 특별상:2010년) |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1회(2007년) | ||||||||||||||||
우수JCB・MEP 상:1회(2007년) | ||||||||||||||||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 상 in 「프로 야구 부문」(2009년) | ||||||||||||||||
야구 명예의 전당 플레이어 표창(2023년[193][194]) |
6. 3. 개인 기록 (NPB)
알렉스 라미레스의 일본 프로 야구(NPB) 개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하 기록들은 일본에서의 기록만을 다루고 있으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기록은 합산하지 않았다.일본 프로 야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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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나이 | 팀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타율 |
2001 | 27 | 야쿠르트 | 138 | 510 | 60 | 143 | 23 | 0 | 29 | 253 | 88 | 1 | .280 |
2002 | 28 | 야쿠르트 | 139 | 539 | 65 | 159 | 25 | 0 | 24 | 256 | 92 | 0 | .295 |
2003 | 29 | 야쿠르트 | 140 | 567 | 105 | 189 | 34 | 3 | 40 | 349 | 124 | 4 | .333 |
2004 | 30 | 야쿠르트 | 129 | 525 | 79 | 160 | 30 | 2 | 31 | 287 | 110 | 2 | .305 |
2005 | 31 | 야쿠르트 | 146 | 596 | 70 | 168 | 19 | 1 | 32 | 285 | 104 | 5 | .282 |
2006 | 32 | 야쿠르트 | 146 | 603 | 79 | 161 | 28 | 2 | 26 | 271 | 112 | 0 | .267 |
2007 | 33 | 야쿠르트 | 144 | 594 | 80 | 204 | 41 | 3 | 29 | 338 | 122 | 0 | .343 |
2008 | 34 | 요미우리 | 144 | 548 | 84 | 175 | 28 | 0 | 45 | 338 | 125 | 1 | .319 |
2009 | 35 | 요미우리 | 144 | 577 | 66 | 186 | 35 | 0 | 31 | 314 | 103 | 4 | .322 |
2010 | 36 | 요미우리 | 144 | 566 | 93 | 172 | 28 | 0 | 49 | 347 | 129 | 1 | .304 |
2011 | 37 | 요미우리 | 137 | 477 | 39 | 133 | 12 | 1 | 23 | 216 | 73 | 2 | .279 |
2012 | 38 | DeNA | 137 | 476 | 40 | 143 | 25 | 0 | 19 | 225 | 76 | 0 | .300 |
2013 | 39 | DeNA | 56 | 130 | 6 | 24 | 0 | 0 | 2 | 30 | 14 | 0 | .185 |
총합 | 1,744 | 6,708 | 866 | 2,017 | 330 | 12 | 380 | 3,709 | 1,272 | 20 |
''2014년 11월 21일 기준 통계''
; 주요 기록
- 100홈런: 2004년 6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0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말 오카지마 히데키를 상대로 좌중간 넘기는 2점 홈런. ※역대 234번째
- 150홈런: 2005년 8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5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말 시모야나기 고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 ※역대 137번째
- 1000안타: 2007년 4월 21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5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말 요시미 카즈키를 상대로 좌전 안타. ※역대 244번째
- 200홈런: 2007년 8월 1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8차전 (도쿄 돔), 4회초 카네하 토모히토를 상대로 중월 솔로 홈런. ※역대 89번째
- 1000경기 출장: 2008년 4월 1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425번째
- 250홈런: 2008년 9월 1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22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3회초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우월 솔로 홈런. ※역대 53번째
- 1500안타: 2009년 8월 26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17차전 (나고야 돔), 5회초 카와이 유타를 상대로 중전 안타. ※역대 104번째
- 1000삼진: 2009년 9월 20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2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2회초 요시노리로부터. ※역대 47번째
- 1000타점: 2010년 4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2차전 (도쿄 돔), 8회말 스즈키 요시히로로부터 좌월 만루 홈런. ※역대 37번째
- 300홈런: 2010년 5월 15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1차전 (도쿄 돔), 5회말 나루세 요시히사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36번째
- 2010년 4월 1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2회초 스티븐 랜돌프를 상대로 좌월 만루 홈런
- 3000루타: 2010년 9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2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4회초 후쿠하라 시노부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70번째
- 1500경기 출장: 2011년 8월 1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5차전 (도쿄 돔), 4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170번째
- 350홈런: 2011년 8월 2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7차전 (도쿄 돔), 4회말 노미 아츠시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 ※역대 26번째
- 2011년 4월 15일,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 1차전, 1회초 디오니 소리아노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
- 2000안타: 2013년 4월 6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초 이시카와 마사노리를 상대로 좌월 솔로 홈런. ※역대 42번째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입단한 선수로서는 최초)
- 2012년 7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8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말 디키 곤잘레스를 상대로 우중간 2루타
- 3500루타: 2013년 5월 17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9회초 쓰루오카 카즈나리의 대타로 출장, 다케다 히사시를 상대로 우전 안타. ※역대 27번째
; 기타 기록
- 시즌 200안타 이상: 1회 (2007년) ※역대 3번째, 외국인 선수・우타자로는 역대 최초
- 시즌 204안타 (2007년) ※역대 6위
- 9년 연속 시즌 150안타 이상 (2002년 - 2010년) ※NPB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9회 (2002년 - 2010년) ※역대 3위
- 8년 연속 시즌 100타점 이상 (2003년 - 2010년) ※NPB 기록
- 시즌 100타점 이상: 8회 (2003년 - 2010년) ※역대 2위
- 시즌 120타점 이상: 4회 (2003년, 2007년, 2008년, 2010년) ※NPB 타이 기록
- 통산 0 희생타 ※역대 2번째로 많은 통산 7152타석 기록[195]
- 올스타전 출장: 8회 (2002년, 2003년, 2007년 - 2012년)
6. 4. 기타
알렉스 라미레스의 일본 프로 야구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일본 프로 야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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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나이 | 팀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타율 | |||
2001 | 27 | 야쿠르트 | 138 | 510 | 60 | 143 | 23 | 0 | 29 | 253 | 88 | 1 | .280 | |||
2002 | 28 | 야쿠르트 | 139 | 539 | 65 | 159 | 25 | 0 | 24 | 256 | 92 | 0 | .295 | |||
2003 | 29 | 야쿠르트 | 140 | 567 | 105 | 189 | 34 | 3 | 40 | 349 | 124 | 4 | .333 | |||
2004 | 30 | 야쿠르트 | 129 | 525 | 79 | 160 | 30 | 2 | 31 | 287 | 110 | 2 | .305 | |||
2005 | 31 | 야쿠르트 | 146 | 596 | 70 | 168 | 19 | 1 | 32 | 285 | 104 | 5 | .282 | |||
2006 | 32 | 야쿠르트 | 146 | 603 | 79 | 161 | 28 | 2 | 26 | 271 | 112 | 0 | .267 | |||
2007 | 33 | 야쿠르트 | 144 | 594 | 80 | 204 | 41 | 3 | 29 | 338 | 122 | 0 | .343 | |||
2008 | 34 | 요미우리 | 144 | 548 | 84 | 175 | 28 | 0 | 45 | 338 | 125 | 1 | .319 | |||
2009 | 35 | 요미우리 | 144 | 577 | 66 | 186 | 35 | 0 | 31 | 314 | 103 | 4 | .322 | |||
2010 | 36 | 요미우리 | 144 | 566 | 93 | 172 | 28 | 0 | 49 | 347 | 129 | 1 | .304 | |||
2011 | 37 | 요미우리 | 137 | 477 | 39 | 133 | 12 | 1 | 23 | 216 | 73 | 2 | .279 | |||
2012 | 38 | DeNA | 137 | 476 | 40 | 143 | 25 | 0 | 19 | 225 | 76 | 0 | .300 | |||
2013 | 39 | DeNA | 56 | 130 | 6 | 24 | 0 | 0 | 2 | 30 | 14 | 0 | .185 | |||
총합 | 1,744 | 6,708 | 866 | 2,017 | 330 | 12 | 380 | 3,709 | 1,272 | 20 |
2010년 4월 1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2회초 스티븐 랜돌프를 상대로 좌월 만루 홈런을 쳐 300홈런을 달성했다. 2011년 4월 15일,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1회초 디오니 소리아노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을 쳐 350홈런을 달성했다. 2012년 7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5회말 디키 곤잘레스를 상대로 우중간 2루타를 쳐 2000안타를 달성했다.
2021년에 이크멘 오브 더 이어 2021 이크멘 스포츠 레전드 부문을 수상했고,[184] 2022년에는 외무대신 표창을 받았다.[196]
7. 연도별 타격 성적
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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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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