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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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우동은 조선 시대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유명했으나 간통죄로 처형된 여성이다.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태강수 이통과 결혼했으나 남편의 냉대와 간통 혐의로 인해 쫓겨났다. 이후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었고, 1480년 간통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어우동 사건은 조선 사회의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상을 반영하며, 사후에도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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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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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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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박구마 |
이명 | 어우동, 어을우동 |
직업 | 시인, 서예가, 작가, 사상가, 화가, 무용가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음죽 |
사망일 | 1480년 10월 18일 (향년 41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사사됨 |
종교 | 유학, 성리학 |
배우자 | 태강수 이동 (이혼) |
자녀 | 이번좌 (딸) |
부모 | 박윤창(부), 정귀덕(모) |
친척 | 박성근(오라비) |
2. 생애
음성 박씨 박윤창의 딸로 태어난 어우동의 본명은 '''박구마'''(朴丘麻)이다.[3]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仝)[4]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남편이 기생 연경비를 총애하고[3] 다른 남자와 밀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이후 기생으로 위장하여 왕족, 관리, 노비 등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었고, 이 소문이 왕궁까지 퍼지면서 성종과 의금부의 심문을 받았다. 1480년 10월 18일, 성종은 어우동에게 풍기를 문란하게 한 죄[5]로 교수형을 내렸으나, 어우동과 간통한 남성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무죄였다.[6][7]
어우동은 뛰어난 미모, 춤, 노래, 시, 재치, 매력, 지성을 겸비했으며, 시문과 가야금, 춤에 능하여 여러 문사들이 그녀를 찾아왔고, 일부와는 시문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14]
2. 1. 생애 초반
본관은 음성 박씨이며, 아버지는 승문원(현재의 외교부에 해당) 지사를 지낸 박윤창이다. 본명은 '''박구마'''(朴丘麻)로 알려져 있다[3].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仝)[4]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남편이 기생 연경비를 총애하고[3], 다른 남자와 밀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2. 1. 1. 출생과 가계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서 충청북도 음성군 음죽현 출신이다.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본명은 박구마로, 어우동 또는 어을우동 등으로 불렸다. 용재총화에는 어우동(於于同),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으며, 송계만록(松溪漫錄)과 대동시선, 해동시선, 연려실기술 등에는 어우동이라고 하였다.아버지 박윤창은 음보로 관직에 올랐으며 세종 11년 동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사예[11] 등을 지내고 승문원지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음성 박씨이며, 아버지는 승문원(현재의 외교부에 해당) 지사를 지낸 박윤창이다. 본명은 '''구마'''(朴丘麻)로 알려져 있다[3].
종실인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에게 출가해 외명부의 품계인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다.[12] 그러나 그 후 어우동의 이름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친정어머니 정씨 역시 친정과 시댁의 족보에서 삭제되었으며, 어우동, 정씨, 박성근 사건 등으로 인해 박윤창 역시 족보에서 삭제되어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있지 않다.
2. 1. 2. 결혼과 이혼
태종의 서증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결혼하여 딸 번좌를 낳았다. 이동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 영천군의 서자였다. 태강수와 결혼 후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1명 두었기에, 어우동은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견뎌야 했다. 그러던 중, 어우동은 딸 번좌와 함께 버려졌다.어우동이 축출된 배경으로는 연경비라는 기생 또는 첩을 사랑해서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냈다는 설과, 어우동이 집에 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은장이와 간통을 해서 이동이 쫓아냈다는 설[9]이 있다. 그러나 성종이 내린 판결에 따르면 이때 어우동의 간통사건은 무죄였고, 기생을 사랑한 남편 이동의 잘못으로 여겨져 이혼은 무효화되었다. 태강수 이동은 기생 또는 첩에게 빠져서 함부로 부인을 버린 죄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부인과 재결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종친이었던 이동은 몇 개월 뒤 관직을 되찾았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태강수의 부인이었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되었다.
2. 2. 자유 연애 활동
어우동은 과거 급제자를 희롱한 일로 소문이 퍼지자, 더욱 대담하게 자유 연애 활동을 시작했다.[9]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遊街)를 하는 홍찬을[9] 보고 먼저 유혹하여 관계를 맺기도 했다.[16]어우동의 연애 상대는 양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리(書吏) 감의향은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 희롱하며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가 간통했고, 어우동을 사랑하여 등판에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16]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활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져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16]
1480년, 어우동은 간통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왕족, 궁정 관리, 노비 등 여러 남성과 간통한 혐의였다.[1]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적 성 역할 분리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고, 간통, 특히 귀족 여성의 간통은 더욱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유감동, 금엄동, 동자, 이구지 등이 비슷한 사례로 처벌받았지만, 어우동 사건은 고위층 남성 여러 명이 연루된 스캔들이었기에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결국 어우동의 유죄 판결과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여성 간통에 대한 사형은 1513년 중종 때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1]
2. 2. 1. 작품, 문필 활동
어우동은 시문과 가야금, 춤에 능하여 여러 문사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기생, 내금위의 첩, 혹은 과부 등으로 소개하며 이들과 교류하였다. 모든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한 것은 아니었고, 일부와는 시문과 서신만을 주고받기도 했다.[14]어우동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도전한 인물이었다.[15] 기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당시 여성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자유로운 문예 활동을 펼쳤다.[15] 사대부들은 여성이, 그것도 기생이 글을 쓰고 서예를 하는 것을 비웃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림과 서예 실력을 꾸준히 연마하여 사람들을 탄복시킬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2. 2. 2. 과거 급제자 희롱
그 뒤 어우동은 딸과 종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으나 아버지 박윤창이 받아주지 않아 길가에 집을 마련하고 거처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자 한 계집종이 그를 위로하였다.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의 관리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만 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오겠습니다.[9]"라고 했다.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우동이 이를 맞이하였다.[9] 그러나 나중에 오종년과도 결별하였다. 남편 이동에게 이혼당한 뒤 그는 오히려 수십 명의 선비, 조관 및 유생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그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이후 그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가 된다.
그 뒤 여종과 함께 기생 행세를 하며 기방에 출입하던 중 남편의 6촌인 세종의 서손자로 계양군의 서자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을 만나 사귀게 된다. 방산수는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넷째 서자로 어우동은 춤과 시, 재색에 능했는데 이난은 어우동의 재색에 매료되어 이후 그녀를 자주 찾았다. 이난은 자신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다.[13] 그 정이 매우 두터웠던 나머지 이난은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새겼다.[9]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한 인물은 방산수 이난이었다.
2. 2. 3. 자유 연애 편력
이동에게 이혼당한 뒤, 어우동은 수십 명의 선비, 조관 및 유생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그 당시 스캔들의 자세한 내용은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9] 그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가 되었다.어우동은 딸과 종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으나 아버지 박윤창이 받아주지 않아 길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다.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던 중, 한 계집종이 그를 위로하며 오종년을 소개했다. 계집종의 주선으로 오종년을 만나게 되었으나,[9] 나중에 오종년과도 헤어졌다.
그 뒤 여종과 함께 기생 행세를 하며 기방에 출입하던 중 남편의 6촌인 세종의 서손자이자 계양군의 서자인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을 만나 사귀게 된다. 방산수 이난은 자신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다.[13] 정이 매우 깊었던 이난은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새겼다.[9] 이후 어우동이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한 인물은 방산수 이난이었다.
어느 과거 급제자를 희롱한 일로 소문이 퍼지자, 더 이상 꺼리낄 것이 없던 어우동은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9] 한번은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遊街)를 하는 홍찬을[9] 보고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16] 그 후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고, 이에 홍찬이 그녀의 집으로 가 정을 통하기도 했다.[16]
어우동의 상대는 양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書吏) 감의향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 희롱하며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했다. 감의향은 어우동을 사랑하여 등판에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16]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활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16]
그 뒤 남편의 8촌이자 정종의 아홉째 아들 석보군의 서손자인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를 만나 간통하게 된다. 이기는 그의 미모에 혹하여 어우동의 몸종을 불러 누구의 딸이나 아내인가를 물었고, 여종은 내금위(內禁衛)의 첩이라고 하자, 이기를 불러들였다.
어우동은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감의향(甘義享), 서리 오종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양인(良人) 이근지(李謹之)·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17])와 간통하였다.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 등도 거론되었고, 방산수 이난은 “어유소는 일찍이 어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期約)하여 옥가락지[玉環]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情)을 통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지만,[13] 방산수 이난은 스스로 이것이 무고(誣告)였음을 밝혔다.[18]
김휘는 어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을 통하였다.[13] 그러나 그녀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된 승정원도승지 김계창의 추적과 줄기찬 탄핵으로 공론화되었다.
어우동은 자신의 마음에 든 사내에게는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도록 강요했다.[12]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넣게 되었고,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다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새겨넣기도 했다.[12] 또한 어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다가 그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9]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당시 스캔들의 자세한 내용이 《용재총화》, 《성종실록》[19], 《대동야승》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1480년(성종 11) 어우동의 연애 스캔들이 한성부내에 소문이 돌면서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었다. 김종직과 그가 이끄는 사림파 출신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들과 훈구파에 의해 집중공격,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끌려갔다.
2. 3. 생애 후반
1480년 어우동은 왕족, 궁정 관리, 노비 등 여러 남성과 간통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1] 당시 조선은 유교적 성 역할 분리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고, 간통, 특히 귀족 여성에 대한 처벌이 가혹해졌다. 유감동, 금엄동, 동자, 이구지 등이 그러한 사례였다. 어우동 사건은 고위층 남성 여러 명이 관련된 유명한 스캔들로, 유죄 판결과 처형으로 이어졌다. 여성 간통에 대한 사형은 1513년 중종 때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1]어우동은 음성 박씨로,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를 지낸 박윤창이다. 본명은 '''구마'''(丘未)로 알려져 있다.[3]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4]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남편에게 밀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이후 기생으로 위장하여 왕족, 관리, 노비와 관계를 맺었고, 이 소문은 왕궁까지 전해져 성종과 의금부의 심문을 받았다.
1480년 10월 18일, 성종은 어우동에게 풍기를 문란하게 한 죄[5]로 교수형을 내렸다. 그러나 어우동과 간통한 남성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무죄였다.[6][7]
2. 3. 1. 체포와 투옥
어우동의 처벌 문제를 놓고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또한, 그가 어떤 사람들과 간통했는지도 관심사였다.[16] 성종은 이 문제를 불문에 부치려 했으나, 신진 사림파 언관들은 매일 어우동의 이름을 언급하며 공론화했다.어우동은 풍기문란 혐의로 문초를 받았으나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다. 옥중에는 양반, 중인, 유생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수감되었다. 어우동의 집에 한 번이라도 출입한 경력이 있으면 모두 체포되었고, 이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옥중에 있던 방산수 이난은 어우동에게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로 인해 중죄를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16] 이에 어우동은 관계를 맺은 간부들의 이름을 털어놓았고, 문초를 받은 관계자만 수십 명에 달했다.[16] 이난은 자신도 혐의가 있었으나, 상소를 올려 성종에게 어우동의 재주가 아까움을 들어 석방을 건의하기도 했다.
방산수 이난의 권고로 어우동은 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모두 고했지만,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 사대부 고관들은 혐의를 부인했다. 중인 박강창, 홍찬 등과 생원, 진사 등은 하옥되었다. 성종은 유배, 투옥, 관비 정속 등의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으나, 김종직, 사헌부, 사간원 등은 어우동의 행적을 문제 삼아 계속 공론화했다. 국문장에 함께 나타난 남성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어우동은 내금위 구전, 학유 홍찬, 생원 이승언, 서리 감의향, 서리 오종련·감의형, 생도 박강창, 양인 이근지, 사노 지거비,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의 이름을 댔고, 방산수 이난 역시 같은 인물들을 지목했다. 혐의를 받은 남성들 대부분은 부인했고, 방산수 이난만이 인정했으며, 어우동을 변호하고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를 지목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어우동의 집에 한 번이라도 출입한 경력이 있는 선비, 성균관 유생, 부녀자들까지 모두 체포되어 의금부, 한성부, 형조 등에서 국문을 받았다. 사사로이 시문을 주고받거나, 그의 가야금, 거문고, 그림 재주를 보고 출입했던 이들조차 간통범으로 의심받고 지탄당했다. 1480년, 어우동은 간통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왕족, 궁정 관리, 노비 등 여러 남성과 간통한 혐의를 받았다.[1]
2. 3. 2. 기성 관료들의 공격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 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성종은 귀양이나 유배로 형을 정하고 불문율에 부치려 하였으나, 어우동을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 여론과 탄핵이 계속되었다.심회는 "어을우동의 죄는 율을 상고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극형을 주장했다.[16] 윤필상도 "어을우동은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淫風)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정나라·위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이 여자를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라고 했다.[16]
행사헌부집의 이덕숭(李德崇) 역시 어우동을 공격하며, 사건과 연관된 이난(李灡)·어유소(魚有沼) 등을 탄핵해 유배할 것을 요구했고, 어우동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김종직과 사림파 역시 그녀를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연일 어우동에 대한 공격 여론을 조성하였다.
2. 3. 3. 최후
방산수 이난과 친어머니 정씨 등 소수의 인물만이 어우동을 변호하였다. 김국광과 강희맹 등은 사형은 과하다며 유배 정도로 족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우동의 시, 거문고, 가야금, 춤 재주가 뛰어나 죽이기에는 아깝다는 동정 여론도 있었다.[12]그러나 동부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 등 탄핵은 계속되었다. 조정에서는 사형과 유배로 의견이 나뉘었으나, 결국 1480년(성종 11년) 10월 18일 성종은 승정원과 양사의 탄핵을 받아들여 어우동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군기감 앞에서 교수형을 내렸다.[12] 그해 11월 13일에는 종부시의 상언으로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 어우동의 이름이 삭제되었다.[21]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은 가벼운 벌만 받거나 무죄를 받았고, 어우동이 죽은 뒤 모두 사면되거나 실직에 복귀하였다.[6][7] 어우동은 시문에도 뛰어났으나, 그녀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사라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적 성 역할 분리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고, 간통, 특히 귀족 여성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해졌다. 유감동, 금엄동, 동자, 이구지 등이 그러한 사례였다. 어우동 사건은 고위층 남성 여러 명이 관련된 유명한 스캔들로, 그녀의 유죄 판결과 처형으로 끝났다. 여성 간통에 대한 사형은 1513년 중종 때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1]
3. 사후
어우동은 사후 유감동,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와 함께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음녀의 대명사로 매도당하였다. 그녀의 시, 거문고, 가야금, 춤 등의 재주는 잊혀졌고, 다만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처럼 구전되어 왔다. 이후 야담과 소설 및 연극의 주인공으로 구전되거나 극화되었으며, 1897년(고종 34년) 광무 개혁 이후부터 연극과 구전 문학, 희곡, 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융희 4년) 조선 멸망 이후부터 동정이나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어을우동과 간통한 혐의가 있던 남자들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실제로 문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가 면해졌다.[20] 1482년 8월 8일 성종 13년의 실록에 의하면, 어을우동과 간통한 자들은 이미 모두 석방되었다.[20]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몇 수의 시조가 전한다. 권응인은 자신의 저서 《송계만록》에 익명으로 언급된 어우동의 시로 여겨지는 부여회고시를 소개하면서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시적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폄하하였다.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하찮게 취급되다가 실전되었다.
4. 평가 및 관점
어우동은 불륜과 간통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주장과 성리학적 도덕주의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23] 1910년 조선 멸망 이후부터는 다양한 희극, 영화 등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조선 멸망 직후부터 어우동이 먼저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에 대한 동정 여론이 나타났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녀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성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된 어우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사관들은 그 내용의 등재를 꺼렸다고 한다.
어우동은 규범을 거부한 조선 여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3] 또한 체제의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녀의 시는 작품성이 높이 평가되었지만, 음란하고 부덕을 어긴 여성으로 지목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송계만록》에 전하는 시에는 익명으로 등재하여 비난을 피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여회고〉라는 시가 있는데, 일설에는 어우동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동시선》에도 〈부여회고〉가 실려 있으며, 《송계만록》의 글을 소개하면서 "호서의 창녀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못하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혼했지만 '왕족의 아내'였던 어우동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유교 윤리를 표방하던 조선 사회가 그녀를 포용할 수 없었다는 시각도 있다.[20]
1480년, 어우동은 간통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왕족, 궁정 관리, 노비 등 여러 남성과 간통한 혐의였다.[1] 이 시기 조선에서는 유교적 성 역할 분리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고, 간통, 특히 귀족 여성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가혹해졌다. 이러한 사례로는 노비가 된 유감동, 친족 남자와 간통한 혐의로 처벌받은 귀족 여성 금엄동과 동자, 간통을 저지른 이구지 등이 있다. 그러나 어우동 사건은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었으며, 고위층 남성 여러 명이 관련된 유명한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은 어우동의 유죄 판결과 처형으로 끝났다. 여성 간통에 대한 사형은 1513년 중종에 의해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1]
5. 가족 관계
6. 대중 문화
조선 멸망 후, 1910년 이후부터 어우동은 문학,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에서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들이 많이 나왔다.
대한민국에서는 방기환, 신봉승, 황충기, 김경민 등이 어우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썼다. 1985년에는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영화 《어우동》이, 1987년에는 김기현 감독, 김문희 주연의 《요화 어을우동》이 개봉하였다. 2007년에는 SBS에서 드라마 《왕과 나》가 방영되었으며, 김사랑이 어우동 역을 맡았다.
6. 1. 어우동을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서적
Women in Korean History 한국 역사 속의 여성들
https://books.google[...]
[2]
웹사이트
어우동(於于同)
https://encykorea.ak[...]
2023-08-03
[3]
웹사이트
"(사람이름) 감동·어루동 / 최범영"
https://www.hani.co.[...]
2008-03-17
[4]
웹사이트
於于同 - note
https://archive.ph/2[...]
[5]
뉴스
〈朝鮮史を駆け抜けた女性たち④〉於于同
http://korea-np.co.j[...]
2022-01-31
[6]
신동아일보
朝鮮史上最大のスキャンダル
https://shindonga.do[...]
[7]
ohmynews
於于同と姦通した男性の最後
http://www.ohmynews.[...]
[8]
한겨레
"<연산군일기>를 보면 어우동을 구마(丘麻)로도 부르고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http://www.hani.co.k[...]
[9]
서적
클릭 조선왕조실록
다할미디어
2008
[10]
문서
문정왕후의 외할아버지이다.
[11]
과거 입격자 정보
박윤창:과거 입격자 정보
http://koreandb.nate[...]
[12]
서적
통과의례와 성
평단문화사
2000
[13]
문서
성종실록 122권, 성종11년(1480 경자년) 10월 18일(갑자) 5번째기사
[14]
문서
그러나 외간 남자와 서신을 주고받는 것 조차 문제가 되었다.
[15]
한겨레21
심청이보다는 뺑덕어멈으로!
http://h21.hani.co.k[...]
2003-01-30
[16]
서적
클릭 조선왕조실록
다할미디어
2008
[17]
문서
지거비는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종으로, 밀성군은 태강수에게 이복 삼촌이 된다.
[18]
서적
성종실록 122권, 성종11년(1480 경자년) 8월 7일(갑) "헌납 김성경이 어을우동과 간통한 방산수ㆍ어유소 등을 국문하도록 아뢰다"
[19]
어우동
어우동
http://100.naver.com[...]
[20]
서적
클릭 조선왕조실록
다할미디어
2008
[21]
문서
성종 실록 123권, 성종 11년(1480 경자년) 11월 13일(기축) 1번째기사
[22]
문서
일설에는 그의 시가 아니라 방산수 이난의 시라는 설도 있다.
[23]
서적
통과의례와 성
평단문화사
2000
[24]
문서
의금부에 악처 행 호군 박윤창의 아내를 석방할 것을 명하다
[25]
문서
태강수 이동의 아들은 아님
[26]
문서
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1512 임신) 10월 16일(병진) 1번째기사
[27]
문서
박성근이 어미를 살해한 죄와 노비들이 공모한 죄를 조율하라 이르다
[28]
갈읍리
갈읍리
http://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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