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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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은문은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1407년(태종 7년) 모화루로 시작하여, 1539년(중종 34년) 영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사대 외교를 상징하는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6년(선조 39년)에 재건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면서, 1897년 독립 협회에 의해 철거되고 독립문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 현재는 영은문의 주춧돌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독립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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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다른 이름 | 영조문 연주문 연은문 |
위치 | 의주로 일대 (오늘날의 독립문역사거리 부근) |
건축 정보 | |
종류 | 문 |
완공 | 1537년 (1539년에 개칭) |
철거 | 1895년 2월 |
용도 | 상징적 관문 |
역사 | |
건립 | 1537년 (중종 32년) |
개칭 | 1539년 (중종 34년) |
파괴 | 임진왜란 무렵 |
재건 | 1606년 |
철거 | 1895년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영은문 |
한자 | 迎恩門 |
로마자 표기 | Yeongeunmun |
일본어 이름 | |
히라가나 | げいおんもん |
가타카나 | ヨンウン=ムン |
로마자 표기 | Yeongeunmun |
영어 이름 | |
영어 | Yeongeunmun Gate |
2. 역사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에 대해 ''사대''(事大) 외교 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1636년 청의 조선 침략 이후 청나라에 의해 강요된 관계였다.[1] 영은문은 이러한 조선의 사대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영은문은 한성의 서대문(돈의문) 바로 바깥, 의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세워졌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이 문을 사용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조선이 이탈하면서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독립협회는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같은 장소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 1. 조선 초기: 모화루와 모화관
1407년(태종 7년) 조선 태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영빈관인 모화루(慕華樓)를 세웠고,[9] 1430년(세종대왕 12년) 세종대왕은 이를 개축하여 모화관(慕華館)이라 이름지었다.[10]2. 2. 영조문과 영은문
1537년(중종 32년), 조선 중종은 홍살문에 기와지붕을 덮는 등 격식을 갖춘 형태로 증축하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편액을 달도록 하였다.[12] 영조문은 문자 그대로 "중국의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문"을 의미했다.[4] 1539년 중종은 중국 사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이름을 영은문으로 바꾸었다.[13] 중국 사신들은 단순히 조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 오는 은혜를 맞이하는 문"을 의미하는 영은문으로 개칭되었다.[5]중종 때 건축된 영은문은 1칸 규모로,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 지붕을 얹었으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13] 이 영은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6년 조선 선조 때 재건되었으며, 그 후로 철거될 때까지 같은 건축물로 이어져 왔다.[14]
2. 3. 조선의 대중국 외교와 영은문
1407년(조선 태종 7년) 조선 태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영빈관인 모화루(慕華樓)를 세웠고,[9] 1430년(세종대왕 12년) 세종대왕이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축했다.[10] 세종대왕은 1408년(세종 1년) 즉위 때부터 모화루 주변에 홍살문을 세워 중국 사신을 맞이했는데,[11] 1537년(조선 중종 32년) 조선 중종이 홍살문에 기와지붕을 덮는 등 격식을 갖춘 형태로 증축하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12] 1539년 중종은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은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6년 조선 선조 때 재건되어 철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14]
영은문은 모화관에 부속된 상징적 관문이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조선 국왕은 직접 영은문으로 나가 사신을 맞이하고 인사를 했다.[15] 이러한 관행은 조선의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6]
오랫동안 조선 왕조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외교 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청의 조선 침략 이후 청나라에 의해 강요된 관계였다.[1] 영은문은 이러한 조선의 사대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조선의 역대 왕은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영은문을 사용했다. 1536년 김안로의 건의로 "영조문"을 세웠으나,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지적에 따라 "영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영은문 편액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8]
조선 국왕은 만주족 사절을 영은문에서 직접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황태자는 모화관에서 만주족 칙사에게 술을 따르는 예를 행했다.
3. 철거
1895년 2월,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영은문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홍집 내각은 이러한 주장에 따라 영은문을 철거하고, 모화관은 명칭을 변경하여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17]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이탈하면서 영은문 철거는 더욱 힘을 얻었다.
3. 1. 독립문 건립
1895년 3월,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은 철거된 영은문의 잔해를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극복했다는 상징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18] 독립협회는 국민 성금을 모아 영은문 주춧돌 앞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주변을 독립공원으로 조성하는 운동을 펼쳤다.[18]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독립문이 세워졌다.4. 유적
1963년 철거된 영은문의 주춧돌은 영은문 주초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8] 1979년 성산대로 건설 과정에서 독립문과 함께 현재 위치(독립공원 내)로 이전되었다.[18] 영은문 주초는 조선 시대 사대 외교의 상징이자, 독립문 건립의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18]
5. 갤러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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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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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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