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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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주목받는 투수였으며, 1983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1997년까지 활약했다. 1986년에는 다승왕,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을 모두 석권하며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고, 1996년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199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으나 부진했고, 이후 대만 프로 야구 연맹(TML)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04년 세이부 라이온스로 돌아와 2군 코치, 감독을 거쳐 2008년 1군 감독으로 취임, 팀을 일본 시리즈 우승과 아시아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구단 시니어 디렉터, 제너럴 매니저를 역임했으며, 2024년 시즌 중 감독 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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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히사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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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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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65년 8월 2일 |
출생지 | 군마현 세타군 니사토촌 (현재의 기류시) |
신장 | 185 |
체중 | 76 |
포지션 | 투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데뷔 (NPB) | 1984년 6월 29일, 세이부 라이온스 |
마지막 경기 (NPB) | 1998년 10월 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
NPB 팀 | 세이부 라이온스 (1984년–1997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1998년) |
TML 팀 | 자이-타이난 루카 (1999년–2001년) |
통산 성적 (NPB) | |
승-패 | 125–110 |
평균 자책점 | 3.67 |
탈삼진 | 1,609 |
감독 및 코치 경력 | |
팀 | 자이-타이난 루카 (1999년–2001년, 코치 겸임) 세이부 라이온스 (2004년–2007년, 코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08년–2013년, 감독)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24년, 감독) |
기타 정보 | |
드래프트 | 1983년 1위 |
고등학교 | 군마현립 마에바시 공업 고등학교 |
별명 | 나베 나베Q 와타나베 히사 |
2. 선수 경력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1984년부터 1997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1998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타이완 리그의 지아난 용스에서 코치 겸 선수로 뛰었다.
세이부 시절, 입단 첫해부터 1군에서 뛰면서 강속구와 포크볼을 주 무기로 활약했다.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 탈삼진, 1988년과 1990년에도 다승왕을 차지하며 히가시오 오사무, 구도 기미야스 등과 함께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1996년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으나, 1997년 부진한 성적으로 방출 통보를 받았다.[9]
1998년 야쿠르트 이적 후 1승에 그치고 방출, 지도자 공부를 위해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지아난 용스에서 코치 겸 선수로 뛰며 1999년 18승을 올리는 등 에이스로 활약하다 2001년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신사토 촌립 신사토 중앙 초등학교, 신사토 촌립 신사토 중학교 출신이다.[2][3] 높이뛰기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1.42m를 기록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군 대회에서 1.75m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8m를 각각 넘었다. 마에바시 공업고등학교 시절부터 빠른 공을 던지는 대형 투수로 기대를 받았다. 중학교 때부터 140km/h에 가까운 속구를 던졌고, 현의 고교 야구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본인은 기류 고등학교를 지망하고 있었다. 당시 기류 고등학교는 아쿠자와 타케시・코구레 히로시의 콤비로 고시엔을 제패한 직후였고, 기류 고등학교 측에서도 차세대 에이스로서의 기대를 담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전속 가정교사를 붙여 입학 시험 공부를 시작했지만, 타고난 공부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3일 만에 수험을 포기하고, 결국 마에바시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4]고등학교 2학년 여름 현 대회는 준결승에서 도노다이 제2 고등학교의 아이 에이지로와 맞붙어 패했다. 3학년 봄은 현 대회에 이어 관동 대회도 우승했다. 여름 현 대회에서는 오타 공업고등학교와의 결승에서 연장 11회에 밀어내기 사구로 사요나라 패를 당했다. 와타나베가 고시엔에 출전한 것은 1학년이었던 여름의 제63회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뿐이며, 준우승한 교토 상업고등학교에 첫 경기에서 사요나라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는 완투했다.
1983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는 다카노 히카루를 1순위 지명했지만 추첨에서 실패했고, 와타나베가 '낙첨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당시 최고 구속은 147km/h였고, 본인은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마키하라 히로미처럼 속구로 밀어붙일 수 있는 투수, 그리고 세이부의 에이스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또한 군마현 출신으로는 첫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선수이다.
2. 2. NPB 시절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1984년부터 1997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1998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세이부 시절에는 입단 첫해부터 1군에서 뛰면서 강속구와 포크볼을 주 무기로 활약했다. 1986년에는 시즌 최다승과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고, 1988년과 1990년에도 다승왕을 차지하며 히가시오 오사무, 구도 기미야스 등과 함께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1996년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팀의 방침에 따라 방출 통보를 받았다.[9]
199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지만, 1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2. 2. 1.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84~1997)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입단 첫 해부터 1군에서 활약하며 강속구와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았다. 1986년에는 시즌 최다승(16승)과 최다 탈삼진(178개)을 기록하며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다.[63] 1988년과 1990년에도 각각 15승과 18승을 올리며 다승왕을 차지하는 등 히가시오 오사무, 구도 기미야스, 궈타이위안, 마쓰누마 히로히사와 함께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1989년 10월 12일, 긴테쓰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 중간 계투로 등판했으나, 랄프 브라이언트에게 결승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는 세이부가 우승을 놓치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5]
1990년 5월 9일, 니혼햄과의 경기에서 9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갔으나, 연장 11회에 오가와 코이치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팀은 연장 12회 초에 득점하며 와타나베는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1년에는 부진으로 인해 개인 첫 4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시즌 패전 수도 처음으로 승리 수보다 많아졌다.
1992년 10월 10일 니혼햄전에서는 타석에 들어서 좌전 안타를 기록했다. 당시에는 교류전이 없었기에, 이는 일본 시리즈를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1994년에는 4년 만에 9승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5연패에 기여했다.[7] 11월 5일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 2억 1000만 엔을 제시받고 만족하며 사인했다.
1995년에는 히가시오 오사무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했다. 시즌 후반에는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선발 투수를 희망했기에 다음 해에도 선발로 시즌을 맞이했다.
1996년 6월 11일, 오릭스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8] 하지만, 오기 아키라 감독은 "당한 것 같지 않은, 데미지가 적은 노히트 노런"이라고 평가했다.
1997년에는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8회에 구원 등판했으나, 후루타 아츠야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하고, 투수 다카쓰 신고에게 적시타를 맞는 등 부진했다. 결국 팀의 젊은 선수 육성 방침에 따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9]
2. 2. 2.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1998)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1997년 시즌 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이적했다.[12]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지휘 아래 부활이 기대되었으나, 거듭되는 부진으로 1승만을 올리는 데 그쳤고, 결국 야쿠르트에서도 방출당했다.[9][10] 이적 이유는 노무라의 ID 야구를 배우고 싶어서였다.[13]2. 3. TML 시절 (1999~2001)
야쿠르트에서 방출된 후, 1999년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지도자 공부를 위해 중화민국으로 건너갔다. 타이완 리그의 지아난 용스 코치로 발탁되었으나, 팀 투수진의 약화와 원활한 의사소통 문제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63]1999년, 첫 시즌에 18승을 올리며 중화민국 야구계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1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2002년부터 TV 아사히, TV 사이타마, 분카 방송, 닛칸 스포츠 등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24] 2008년에는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세이부 라이온스 1군 감독으로 승격, 구로에 토슈를 헤드코치로 임명하고, 오노 카즈요시,[24] 오쿠보 히로모토, 세이케 마사카즈, 쿠마자와 토오루를 코치로 영입하여 팀 전력을 끌어올렸다.[25] 부임 첫 해, 전년도 B클래스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이렇게 운 것은 오구리 캡의 은퇴 레이스(제35회 아리마 기념) 이후 처음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26]
2008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팀을 일본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2008년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하여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이는 모리 마사아키 감독 시대인 1992년 이후 세이부가 시즌 1위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모두 달성한 첫 사례였고, 전년도 B클래스 팀을 신인 감독이 일본 챔피언으로 이끈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2009년에는 구로에 헤드코치 사임, 오쿠보 타격 코치 해임 등으로 선수단을 쇄신했지만, 마무리 투수 알렉스 그라만의 부상 등으로 팀은 4위로 부진했다. 총 14번의 끝내기 패를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최악의 기록을 세웠고, 구단으로부터 연임 요청을 받아 2년 재계약을 맺었다.
2010년에는 브라이언 시코스키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등 계투 패턴을 확립했지만, 9월 16일 1위에서 9월 23일 2위로 하락, 결국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 평균 자책점은 33년 만에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다. 2010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에 패배 후 진퇴서를 제출했지만, 2011년 시즌 연임이 결정되었다.
2011년, 투수진 부진으로 전반기를 최하위로 마감하고, 구단 사상 최대 15개의 패배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다. 후반기에는 마키타 카즈히사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하고,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팀을 재건하여, 9월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3위로 2011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같은 날 구단으로부터 연임 요청을 수락하고 1년 계약을 체결했다.[29]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소프트뱅크에 패배했다.
2013년, 막판까지 2013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경쟁을 벌여 10월 5일 CS 진출을 확정,[30] 9월 29일부터 7연승으로 2위로 시즌을 마쳤다.[31] 그러나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에 패배, 10월 15일 감독 사임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32] 와타나베는 "올해 우승이 라쿠텐으로 결정되었을 때, 감독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혔다.[33]
2013년 10월 17일, 세이부 구단 시니어 디렉터로 취임했다.[34] 2017년 1월 1일, 시니어 디렉터와 겸임으로 편성에 관한 부장으로 취임했다.[35] 2018년 10월 21일, 2019년 1월 1일부로 제너럴 매니저로 취임이 발표되었다.[36]
2024년 5월 26일, 마쓰이 가즈오 감독이 휴양에 들어가면서, 5월 28일 주니치 드래건스전부터 와타나베가 겸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37] 11년 만의 현장 복귀였으며,[38] 등번호는 72번이었다.[39] 감독 대행 취임 후 2경기째인 5월 29일 주니치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41] 교류전은 4승 14패로 최하위에 머물렀다.[42] 취임 회견에서 A클래스 진입을 목표로 했지만, 취임 후 34승 61패 3무로 팀은 최하위가 되었다.[43][44] 10월 9일 시즌 최종전 후, "GM으로서 대부분의 선수의 획득에 관여해 왔다. 결자해지해야 한다. 이 구단에 남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라며 퇴단을 발표했다.[45]
4. 지도자 경력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군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구단 주도로 구로에 토슈를 헤드코치로 임명하고, 오노 카즈요시[24], 오쿠보 히로모토, 세이케 마사카즈, 쿠마자와 토오루를 코치로 영입하여 전년도 B클래스(4~6위) 팀을 부임 1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다.[25] 리그 우승 당시 "오구리 캡의 은퇴 레이스(제35회 아리마 기념) 이후 처음"으로 울었다고 언급했다.[26]
2008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4승 3패로 꺾고 일본 챔피언에 올랐으며, 2008년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하여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전년도 B클래스 팀을 신인 감독이 일본 챔피언으로 이끈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2009년에는 알렉스 그라만의 부상 등으로 팀은 4위에 그쳤고, 14번의 끝내기 패를 기록했다. 구단의 연임 요청으로 2년 계약을 맺었다.
2010년에는 브라이언 시코스키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등 계투 패턴을 확립했으나, 9월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역전 우승을 허용하며 2위로 시즌을 마쳤다. 2010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치바 롯데 마린스에 패배한 후 진퇴서를 제출했으나, 2011년 시즌 연임이 결정되었다.
2011년에는 투수진 부진으로 전반기를 최하위로 마감했으나, 후반기 마키타 카즈히사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하고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팀을 재건하여 3위로 2011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소프트뱅크에 패배했다.
2013년에는 2위로 2013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롯데에 패배한 후 감독 사임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32] 와타나베는 "올해 우승이 라쿠텐으로 결정되었을 때 감독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33]
2024년 5월, 마쓰이 가즈오 감독의 휴양으로 11년 만에 감독 대행으로 현장에 복귀했다.[37][38] 등번호는 '''72'''번.[39] 감독 대행 취임 후 두 번째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41] 교류전 최하위, 최종 성적 34승 61패 3무로 팀은 최하위에 머물렀다.[42][43][44] 시즌 후 퇴단을 발표했다.[45]
4. 1. 세이부 라이온스 2군 (2004~2007)
2004년,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친정팀인 세이부 라이온스로 복귀하여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05년부터는 2군 감독을 겸임했고, 2007년에는 2군 감독을 역임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24]4. 2. 세이부 라이온스 1군 (2008~2013)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2008년부터 세이부 라이온스의 1군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전년도 B클래스(4~6위)에 머물렀던 침체된 팀을 부임 1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구단의 주도로 구로에 유키노부(2008년 시즌 종료 후 퇴단)를 수석 코치로 앉히고, 스스로 오쿠보 히로모토[64], 세이케 마사카즈, 구마자와 도루를 코치로 초빙하는 등 팀 전력을 끌어올렸다.포스트 시즌에서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 4승 2패(어드밴티지를 포함)의 성적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를 꺾고, 일본 시리즈에서는 4승 3패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으며 4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했다. 시즌 종료 후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 우승, 아시아 시리즈 우승 등을 이끈 공로로 일본 야구계 최고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25]
이토 쓰토무 전 감독은 정규 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와 일본 시리즈를 제패했기 때문에, 세이부에서 시즌 1위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모두 달성한 것은 모리 마사아키 감독 시절인 1992년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전년도 B클래스 팀을 부임 첫 해 감독이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은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2009년에는 구로에 수석코치가 사임하고, 오쿠보 타격 코치가 불상사로 해임되면서 선수단에 변화가 있었다. 오이시 요시유키를 치프 코치, 모리 히로유키를 타격 코치, 구로다 테츠시를 타격 코치 보좌로 임명하여 시즌을 맞이했지만, 시즌 초반 마무리 투수 알렉스 그라만이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중간 계투와 마무리 투수진이 부진하며 팀은 4위에 그쳤다. 총 14번의 끝내기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퍼시픽 리그 최악의 기록이었다. 구단으로부터 연임을 요청받아 2년 재계약을 맺었다.
2010년에는 구원진 붕괴를 극복하기 위해 롯데에서 이적해 온 브라이언 시코스키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고, 오카모토 아츠시, 후지타 타이요, 나가타 슈이치로 등을 셋업맨으로 기용하는 계투 패턴을 확립했다. 9월 16일 시점에서는 2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3.5경기 차로 앞선 1위를 달리며 우승 매직넘버 4가 점등되었다. 그러나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소프트뱅크와의 3연전에서 3연패를 당하며 0.5경기 차로 좁혀졌고, 9월 23일 라쿠텐전에서 패배하며 2위로 내려앉았다. 9월 26일 니혼햄전에서 패배하면서 소프트뱅크의 우승이 확정되었고, 감독 3년차는 2위로 마무리되었다. 팀 평균 자책점은 리그 최하위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와 대결했지만, 2경기 연속 연장전 끝에 2연패를 당하며 시즌을 마쳤다.
2011년에는 투수진의 부진으로 전반기를 구단 역사상 15년 만에 최하위로 마감했다. 7월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3연속 3연패를 기록하는 등[27]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후반기에는 신인 마키타 카즈히사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하고, 허밍제와 오카모토 아츠시를 셋업맨으로 기용하는 승리 계투 패턴을 확립하여 투수진을 개편했다.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주장으로 임명하고, 3년차 아사무라 히데토와 신인 아키야마 쇼고 등 젊은 야수들을 기용하며[28] 팀을 재건했다. 9월에는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월간 19승 5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희망을 이어갔다. 10월 18일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29]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니혼햄을 2연승으로 꺾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소프트뱅크에 4연패로 패배했다.
2013년에는 막판까지 소프트뱅크, 롯데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경쟁을 벌였다. 9월 29일부터 7연승을 달리며 10월 5일에 CS 진출을 확정짓고,[30]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8연승으로 2위를 차지했다.[31] 그러나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에 1승 2패로 패배하여 탈락했고, 다음 날인 10월 15일 구단에 감독 사임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32] 와타나베는 기자 회견에서 "올해 우승이 라쿠텐으로 결정되었을 때 감독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혔다.[33]
4. 3. 세이부 감독 대행 (2024)
2024년 5월 26일, 마쓰이 가즈오 감독이 오릭스전을 마지막으로 휴양에 들어가면서,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5월 28일 주니치전부터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37] 11년 만의 현장 복귀였다.[38] 등번호는 '''72'''번을 사용했다.[39] 형식적으로 "코치"로 등록된 후, 5월 27일자로 감독 대행으로 공시되었다.[40]감독 대행 취임 후 두 번째 경기인 5월 29일 주니치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41] 그러나 교류전에서는 4승 14패로 최하위에 머물렀다.[42] 취임 회견에서 A클래스 진입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취임 후 성적은 34승 61패 3무로 팀은 최하위에 그쳤다.[43][44]
10월 9일 시즌 최종전 후, 와타나베는 "GM으로서 대부분의 선수 획득에 관여해 왔다. 결자해지해야 한다. 이 구단에 남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라며 퇴단을 발표했다.[45]
5. 프런트 경력
2002년부터 2003년까지 TV 아사히, TV 사이타마, 분카 방송, 닛칸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24] 2004년부터는 세이부 라이온스 2군 투수 코치(2004년 ~ 2006년)를 거쳐 2군 감독(2007년)을 맡았다.[25] 2008년에는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으로 승격, 오노 카즈요시 등을 코치로 영입하여 팀 전력을 강화했고, 전년도 B클래스 팀을 부임 1년 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26]
리그 우승 당시 "이렇게 운 것은 오구리 캡의 은퇴 레이스(제35회 아리마 기념) 이후 처음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27]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니혼햄을 꺾고 일본 시리즈에 진출, 요미우리를 꺾고 일본 챔피언에 올랐다.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하며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마무리 투수 알렉스 그라만의 부상 등으로 인해 중간 계투진이 부진하며 팀은 4위에 그쳤다. 총 14번의 끝내기 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퍼시픽 리그 최악의 기록이었다. 구단의 연임 요청으로 2년 재계약을 맺었다.
2010년에는 브라이언 시코스키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등 계투 패턴을 확립했지만, 9월 16일 1위에서 9월 23일 2위로 하락했고, 9월 26일 소프트뱅크의 우승이 결정되면서 감독 3년차를 2위로 마쳤다. 팀 평균 자책점은 리그 최하위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에 패배한 후 진퇴서를 제출했지만, 2011년 시즌에도 연임이 결정되었다.
2011년에는 투수진 부진으로 전반기를 최하위로 마감했고, 최대 15개의 패배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다. 후반기에는 마키타 카즈히사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하고,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팀을 재건했다. 아사무라 에이토, 아키야마 쇼고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며 9월에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선전했다. 10월 18일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고, 구단의 연임 요청을 수락하며 1년 계약을 맺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니혼햄을 꺾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소프트뱅크에 패했다.
2013년, 막판까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경쟁을 벌였고, 10월 5일 CS 진출을 확정지었다.[30] 10월 최종전에서 3위 롯데를 꺾고 2위로 시즌을 마쳤다.[31] 하지만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롯데에 패배하여 탈락했고, 다음 날인 10월 15일 감독 사임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32] 와타나베는 "올해 우승이 라쿠텐으로 결정되었을 때, 감독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혔다.[33]
2013년 10월 17일, 세이부 구단 시니어 디렉터로 취임했다.[34] 2017년 1월 1일, 시니어 디렉터와 겸임으로 편성 부장으로 취임했다.[35] 2018년 10월 21일, 2019년 1월 1일부로 제너럴 매니저로 취임한다고 발표했다.[36]
2024년 5월 26일, 마쓰이 가즈오 감독이 휴양에 들어가면서 5월 28일부터 와타나베가 겸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37] 11년 만의 현장 복귀였으며, 등번호는 '''72'''번을 달았다.[38][39] 감독 대행 취임 후 2경기째인 5월 29일 주니치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41] 교류전은 4승 14패로 최하위에 그쳤다.[42] 취임 회견에서 A클래스 진입을 목표로 했지만, 취임 후 34승 61패 3무로 팀은 최하위였다.[43][44] 10월 9일 시즌 최종전 후, 퇴단을 발표했다.[45]
6. 플레이 스타일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빠른 직구와 포크볼을 주 무기로 삼았다. 1984년 프로 1년 차부터 1군에 정착하여, 1985년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43경기에 등판해 11세이브를 기록했고, 1985년 일본 시리즈에도 등판했다.[5] 1986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리그 최다인 16승과 최다 탈삼진을 기록,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69승, 15승 이상 4번을 기록하며 세이부 라이온즈 황금기 중반을 이끌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을 획득하며, 히가시오 오사무, 구도 기미야스, 궈타이위안, 마쓰누마 히로히사 등과 함께 세이부 황금기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198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주니치와의 1차전에서 센트럴 리그 최다승 투수 오노 카즈유키를 상대로 8회 1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0년 5월 9일 니혼햄전에서는 9회까지 노히트 피칭을 이어갔으나, 팀 타선이 시바타 야스미츠에게 막혀 득점하지 못해 연장전에 돌입했다. 10회에도 노히트를 이어갔지만, 11회에 오가와 코이치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노히트 노런 달성에는 실패했다.
1991년에는 부진으로 개인 첫 4점대 방어율과 시즌 패전 기록을 남겼지만, 1991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에는 4시즌 만에 승수를 기록하며 팀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7] 1994년 일본 시리즈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6년 6월 11일 오릭스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8]
구도 기미야스와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27년간 프로 야구 투수로서 최고의 존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구도에 따르면, 와타나베는 뛰어난 소질, 근육, 관절 유연성을 갖췄으며, 폐활량은 7,500cc (일반적인 프로 선수는 6,000cc)에 달했다고 한다.
7. 상세 정보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빠른 직구와 포크볼을 주무기로, 1984년 프로 데뷔 후 1군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43경기에 등판, 11세이브를 기록하며 1985년 일본 시리즈에도 등판했다. 1986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의 핵심으로 리그 최다인 16승을 거두며 최다승 타이틀과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비록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최다 탈삼진 타이틀이 제정되었기에 공식 타이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986년부터 1990년까지 69승, 4번의 15승 이상을 기록하며 세이부 라이온즈 황금기 중반을 이끌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을 기록하며 히가시오 오사무, 구도 기미야스, 궈타이위안, 마쓰누마 히로히사 등과 함께 세이부 황금기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198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차전에서 8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고, 5차전에서는 3회 초 4실점(3자책)했지만 팀은 승리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9년 10월 12일, 긴테쓰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는 랄프 브라이언트에게 결승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팀의 리그 우승 실패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은퇴 기자 회견에서 이 경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으며, "가장 자신 있었던 직구로 승부했지만 보기 좋게 맞았다"고 회상했다.[5]
1990년 5월 9일 니혼햄전에서는 9회까지 노히트 피칭을 이어갔으나, 팀 타선이 시바타 야스미츠에게 막혀 득점하지 못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10회에도 노히트를 이어갔지만, 11회에 오가와 고이치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노히트 노런 달성에는 실패했다. 경기는 12회 초 세이부가 선취점을 얻으며 와타나베는 11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1988년 일본 시리즈에 이어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4연승에 기여했다.
1991년에는 개막전 완투승 이후 부진을 겪으며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지만,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1992년 10월 10일 니혼햄전에서는 타석에 들어서 좌전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일본 시리즈를 대비한 작전이었다.
1994년에는 4년 만에 승수를 기록하며 팀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7]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팀은 일본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1995년에는 히가시오 오사무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선발과 구원을 오갔고, 시즌 후반에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96년 6월 11일 오릭스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8] 1997년에는 부진으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군 무승을 기록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후루타 아쓰야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냈다.
1997년 시즌 후, 세이부는 팀의 젊은 선수 육성을 위해 와타나베를 트레이드하려 했으나, 고액 연봉으로 인해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9] 와타나베는 현역 연장을 희망했고,[10] 여러 구단의 제의를 받은 끝에 1997년 12월 5일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했다.[12] 야쿠르트를 선택한 이유는 "노무라 ID 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13]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선수 시절 및 감독 시절의 상세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연도별 투수 성적 ###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몸맞볼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84년 | 세이부 | 15 | 7 | 2 | 0 | 0 | 1 | 1 | 0 | -- | .500 | 219 | 52.2 | 41 | 7 | 29 | 1 | 2 | 38 | 0 | 0 | 24 | 23 | 3.93 | 1.33 |
1985년 | 43 | 15 | 7 | 0 | 0 | 8 | 8 | 11 | -- | .500 | 644 | 152.0 | 132 | 22 | 72 | 2 | 3 | 121 | 0 | 1 | 59 | 54 | 3.20 | 1.34 | |
1986년 | 39 | 24 | 13 | 1 | 0 | 16 | 6 | 1 | -- | .727 | 907 | 219.1 | 191 | 22 | 76 | 2 | 6 | 178 | 5 | 0 | 79 | 70 | 2.87 | 1.22 | |
1987년 | 30 | 9 | 5 | 1 | 0 | 5 | 3 | 8 | -- | .625 | 434 | 105.2 | 81 | 10 | 42 | 4 | 4 | 74 | 1 | 0 | 43 | 36 | 3.07 | 1.16 | |
1988년 | 28 | 25 | 14 | 3 | 0 | 15 | 7 | 0 | -- | .682 | 754 | 185.0 | 163 | 29 | 59 | 2 | 3 | 123 | 4 | 0 | 79 | 74 | 3.60 | 1.20 | |
1989년 | 29 | 28 | 17 | 4 | 0 | 15 | 11 | 0 | -- | .577 | 956 | 226.2 | 210 | 34 | 86 | 5 | 4 | 174 | 3 | 0 | 93 | 86 | 3.41 | 1.31 | |
1990년 | 30 | 29 | 16 | 2 | 1 | 18 | 10 | 0 | -- | .643 | 944 | 224.1 | 206 | 31 | 84 | 5 | 2 | 172 | 3 | 0 | 77 | 74 | 2.97 | 1.29 | |
1991년 | 25 | 23 | 6 | 1 | 0 | 7 | 10 | 0 | -- | .412 | 658 | 151.1 | 142 | 17 | 68 | 3 | 5 | 127 | 7 | 0 | 79 | 74 | 4.40 | 1.39 | |
1992년 | 28 | 26 | 8 | 2 | 0 | 12 | 12 | 0 | -- | .500 | 777 | 179.1 | 164 | 17 | 84 | 1 | 4 | 141 | 8 | 0 | 83 | 76 | 3.81 | 1.38 | |
1993년 | 26 | 25 | 7 | 1 | 0 | 9 | 14 | 0 | -- | .391 | 692 | 160.0 | 153 | 15 | 70 | 2 | 3 | 143 | 7 | 0 | 72 | 68 | 3.83 | 1.39 | |
1994년 | 25 | 24 | 4 | 0 | 0 | 9 | 8 | 0 | -- | .529 | 653 | 146.1 | 149 | 16 | 73 | 2 | 5 | 97 | 14 | 0 | 79 | 71 | 4.37 | 1.52 | |
1995년 | 20 | 7 | 0 | 0 | 0 | 3 | 4 | 6 | -- | .429 | 216 | 49.1 | 42 | 7 | 29 | 0 | 1 | 43 | 3 | 0 | 31 | 31 | 5.66 | 1.44 | |
1996년 | 20 | 19 | 5 | 2 | 0 | 6 | 9 | 0 | -- | .400 | 509 | 118.1 | 116 | 19 | 50 | 0 | 3 | 92 | 6 | 0 | 66 | 60 | 4.56 | 1.40 | |
1997년 | 12 | 7 | 0 | 0 | 0 | 0 | 2 | 0 | -- | .000 | 193 | 43.1 | 42 | 4 | 25 | 0 | 2 | 37 | 1 | 0 | 25 | 20 | 4.15 | 1.55 | |
1998년 | 야쿠르트 | 19 | 9 | 1 | 0 | 0 | 1 | 5 | 1 | -- | .167 | 267 | 61.2 | 56 | 9 | 36 | 3 | 2 | 49 | 1 | 0 | 30 | 29 | 4.23 | 1.49 |
통산 : 15년 | 389 | 277 | 105 | 17 | 1 | 125 | 110 | 27 | -- | .532 | 8823 | 2075.2 | 1888 | 259 | 883 | 32 | 49 | 1609 | 63 | 1 | 919 | 846 | 3.67 | 1.33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굵은 글씨'''는 리그 1위를 나타낸다.
###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으로 승격, 전년도 B클래스였던 팀을 부임 1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구로에 유키노부를 수석 코치로, 오쿠보 히로모토[64], 세이케 마사카즈, 구마자와 도루를 코치로 초빙하여 팀 전력을 끌어올렸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를 4승 2패(어드벤티지 포함),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4승 3패로 누르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하여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전년도 B클래스 팀을 부임 1년차 감독이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은 사상 최초였다. 부임 1년차 감독의 일본 시리즈 우승은 역대 8번째, 투수 출신 감독으로는 역대 5번째였다.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08년 | 세이부 | 1위 | 144 | 76 | 64 | 4 | .543 | - | 198 | .270 | 3.86 | 43세 |
2009년 | 4위 | 144 | 70 | 70 | 4 | .500 | 11 | 163 | .261 | 4.01 | 44세 | |
2010년 | 2위 | 144 | 78 | 65 | 1 | .545 | 0 | 150 | .271 | 4.19 | 45세 | |
2011년 | 3위 | 144 | 68 | 67 | 9 | .504 | 20.5 | 150 | .253 | 3.15 | 46세 | |
2012년 | 2위 | 144 | 72 | 63 | 9 | .533 | 3 | 78 | .251 | 3.24 | 47세 | |
통산 : 5년 | 720 | 364 | 329 | 27 | .525 | A클래스 : 4회, B클래스 : 1회 |
연도 | 소속 | 경기명 | 상대팀 | 성적 |
---|---|---|---|---|
2008년 | 세이부 |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스테이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퍼시픽 리그 3위) | 4승 2패 = 일본 시리즈 진출 |
일본 시리즈 |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1위) | 4승 3패 = 일본 시리즈 우승 | ||
아시아 시리즈 예선 | 통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톈진 라이온스 | 2승 1패 = 결승 진출 | ||
아시아 시리즈 결승전 | 통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예선 2위) | 1x-0 = 아시아 시리즈 우승 | ||
2010년 |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지바 롯데 마린스(퍼시픽 리그 3위) | 0승 2패 (패전) | |
2011년 |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퍼시픽 리그 2위) | 2승 0패 =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2스테이지는 6경기제이며 먼저 4승을 한 팀은 우승, 리그 우승 팀에게 어드벤티지 1승을 부여함.
-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성적은 어드벤티지의 1승을 포함한다.
7. 1. 수상·타이틀 경력
- NPB(일본 프로 야구)
- * 우승: 3회 (1986, 1988, 1990)
-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 (1990년, 1991년)
-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2008년) ※감독으로서 표창
- TML
- * 다승왕 (1999년)
- * 최우수 방어율 (1999년)
- 기타
- * 신어・유행어 대상 유행어 부문 금상 (1986년, "신인류", 기요하라 가즈히로・구도 기미야스와 공동 수상)
-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특별상 (2008년)[61]
- *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in "프로 야구 부문" (2008년)
- * 기류시 시민 영예상 (2009년 1월)
7. 1. 1. 타이틀 (NPB)
- 다승왕: 3회(1986년, 1988년, 1990년)[4]
- 최고 승률: 1회(1986년)[4]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1회(1986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4]
7. 1. 2. 타이틀 (TML)
도단
위
기
리
전
승부
률
임
차
런
율
어
율
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