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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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풍대군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다. 그는 홍건적 및 왜구 격퇴에 기여하여 척산군에 봉해졌으며, 위화도 회군 당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회군에 협조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 했던 그는 회군 후 사망했으며, 위화도 회군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후 완풍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묘소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가계로는 개국공신인 아들 이양우, 이천우 등이 있으며, 1872년 완풍대군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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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무신으로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왕위 계승 갈등으로 인해 상왕으로 물러났다. - 조선 환조의 자녀 - 정화공주
정화공주는 고려 말 이자춘의 딸이자 이성계의 누이이며, 조선 건국 후 공주로 추증되었고 조인벽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현재 묘소는 황해북도 장풍군에 있다. - 1330년 출생 -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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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는 원나라 말기 만주 지역에서 심양행성승상을 자칭하며 북원의 대칸과 협력하여 명나라를 압박했으나, 이성계에게 패배 후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에 봉해졌다는 인물이다.
완풍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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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원계(李元桂) |
별명 | 호(號): 불사재(不思齋) |
시호 | 시호(諡號): 양평공(襄平公) |
작위 | 증 척산군(贈 陟山君) |
정당 | 무소속 |
작위2 | 추서 보리공신 삼중대광 증 완산군(贈 完山君) |
작위3 | 증 완산백(贈 完山伯) |
작위4 | 증 완풍대군(贈 完豊大君) |
작위5 | 동지밀직(同知密直) |
출생일 | 1330년 |
사망일 | 1388년 10월 23일(향년 59세) |
사망지 | 고려 함경도 화주에서 자결(음독 자살 순국) |
배우자 | 초배 아내 삼한국대부인 개성 김씨 계배 아내 삼한국대부인 경주 김씨 삼배 아내 삼한국대부인 강성 문씨문익점(추증 강성군)의 삼녀. |
자녀 | 4남 4녀 장남 완원부원군 이양우(초배 부인 개성 김씨 소생.) 차남 완산부원군 이천우(계배 부인 경주 김씨 소생.) 3남 완남평부원군 이조(계배 부인 경주 김씨 소생.) 4남 완령군 원윤 이백온(삼배 부인 강성 문씨 소생.) |
아버지 | 환왕 환조 이자춘 |
어머니 | 환왕 정비 한산 이씨(생모) 환왕 계비 의혜왕후 영흥 최씨(계모) 환왕 측실 정안옹주 김씨(서모) |
친인척 | 도조 이춘(친조부) 경순왕후 문주 박씨(친조모) 영성대군 이천계(이복 서얼 남동생훗날, 이자흥의 양자 출계.) 조선 태조 이성계(이복 적출 남동생) 의안대군 이화(이복 서얼 남동생) 변중량(첫째 사위) 유정현(둘째 사위) 홍노(셋째 사위사위 홍노 선생은, 외자 이름의 두음법칙 사용시에 '홍로'라고도 불리움.) 변처후(막내 사위) 강성군 문익점(삼실 처갓댁 장인) 진양군 정천익(삼실 처갓댁 처외조부) |
가문 | 전주 이씨(완풍대군파 파조) |
작위6 | 양광도순검사(楊廣道巡檢使) |
작위7 | 팔도도통사 조전원수(助戰元帥) |
웹사이트 | 완풍대군 이원계 장군 |
2. 생애
완풍대군 이원계는 고려 말기의 무신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다. 1330년 원나라 쌍성총관부 화령부(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환조 이자춘과 그의 정실 부인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5]
어려서부터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 주목받았으며, 유학 경전에 통달하고 무예에도 능했다. 고려 공민왕 대에 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당시 개경 수복에 기여한 공로 등으로 '''무관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1363년에는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북원의 침입 시도 저지, 왜구 토벌 등 국방에서 활약했으며, 1380년 황산대첩에서는 동생 이성계를 도와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데 기여했다.
1388년 요동정벌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했으나, 압록강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군대를 돌리기로 결정하자 처음에는 고려의 신하로서 반대했다. 그러나 대세를 따라 위화도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회군 이후에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으며, 형제간의 우애와 고려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고뇌하다 결국 회군 약 5개월 뒤인 1388년 10월 23일, 아들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과 절명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 1. 생애 초반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원나라 쌍성총관부 화령부(和寧府, 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 흑석리(黑石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환조 이자춘이고 어머니는 정실 부인인 한산 이씨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전주에 살다가 고조할아버지 이안사 대에 전라도 전주부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4살 때 어머니 한산 이씨를 여의었다.[5] 아버지 이자춘의 계실인 의혜왕후 최씨는 태조 이성계의 생모이다. 조선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어린 시절 이원계는 이복동생인 이성계, 이화 등과 우애가 매우 두터워 항상 함께 지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 기대를 받았다. 그는 유학의 경전(經典)에 통달하고 시(詩)도 잘 지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도 능했다.
2. 2. 홍건적 및 왜구 격퇴
1358년(공민왕 8년)과 1359년(공민왕 9년)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공민왕 재위 기간 중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기여하였다.특히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는 종3품 내부령(內府令)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장군 안우(安祐)의 휘하에 종군하여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안우 등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무관 2등공신'''에 녹선되었다. 1362년에는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하자 이들과 싸워 물리치는 데 기여하였고, 이 공로로 1363년 다시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동시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다.
1366년에는 동생 이성계와 함께 아버지 이자춘을 도와 원나라로부터 쌍성(雙城) 지역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1375년(우왕 1년), 북원의 순제가 충렬왕의 증손인 탈탈불화를 고려 국왕으로 삼으려 보내자, 김의(金義) 등이 내응하여 탈탈불화가 국경을 넘어 신주(信州)까지 들어왔다. 이때 완풍대군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使)로서 원수(元帥)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서북방면으로 침입하려던 탈탈불화의 군대를 국경 밖으로 격퇴하였다.
1377년(우왕 3년)에는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의 지휘 아래 참전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0년(우왕 6년) 3월, 왜구가 다시 광주와 능성(綾城, 현재의 능주), 화순 지역을 침범하자 원수(元帥)로서 최공철(崔公哲)과 함께 전라도 방어 임무를 맡아 이들을 막아냈다. 같은 해, 왜구가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연해 지역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에 임명되어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때 3도 도순찰사였던 동생 이성계를 도와 남원 운봉(雲峰)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3. 위화도 회군과 죽음
1388년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완풍대군 이원계는 팔도총도통사 최영 휘하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했다. 그러나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는 고려의 신하로서 그럴 수 없다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의지가 확고했고 결국 회군이 결정되자, 이원계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위화도 회군 이후에도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회군이 있은 지 약 5개월 뒤인 1388년 10월 23일, 그는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 충효를 다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는 자신의 심경을 담은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겼다.
2. 3. 1. 절명시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가 회군을 결정하자, 이원계는 처음에는 고려의 신하로서 반대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결국 협조하였다. 이 일 때문에 그는 회군 후 공신 책록 과정에서 동생 의안대군 이화보다 낮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고려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고뇌하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였다. 죽기 전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 하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三韓故國身何在 삼한고국신하재)
: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
: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동처휴운재처이)
: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荊蠻不必海桴浮 형만불필해부부)
이 시는 고려에 대한 충절과 이성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 '태백'과 '우중'은 주나라 때 왕위를 조카에게 넘기기 위해 남쪽의 미개척지인 형만(荊蠻)으로 떠난 형제이다. 이원계는 자신을 이들에 빗대면서도, 단순히 자리를 피하는 은둔 대신 죽음을 택함으로써 고려 충신들과 새로운 세력 사이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고자 한 자신의 다른 '마름질(처신)'을 이해해 달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 절명시는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1908년(순종 2년) 그의 18세손 이철재(李鐵載)의 요청으로 정릉 오른쪽에 있던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誌石)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3. 사후
그가 남긴 절명시는 후손들이 철저히 비밀로 하여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현재의 함흥시)에 있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소인 정릉(定陵)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인 이양우와 완산부원군 이천우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사후 고종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를 추존하면서 왕자의 예에 따라 증직을 받지 못했던 그를 1872년(고종 9년) 완풍대군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완풍군, 완산군, 척산군 등은 그의 생전에 사용했던 작위이다.
1901년에는 북청(北靑)의 삼의사(三義祠)에, 1909년에는 함경남도 이원(利原)의 선원사(璿源祠)에 배향되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북한 지역에 있는 그의 묘소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은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마을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인 흥경단을 설치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4. 가계
- '''부''': 환조 이자춘 (1315년 ~ 1361년 6월 3일(음력 4월 30일))
- '''모''': 초배 한산 이씨 (? ~ 1334년)
- '''계모''': 의혜왕후 최씨
- * '''이복 동생''': 태조 이성계
- '''부인 및 자녀'''
- * '''초배''': 삼한국대부인 개성 김씨
- ** '''장남''': 완원부원군 이양우
손자 : 선평군 흥발
손자 : 선성군 흥제
손자 : 선산군 흥로
손자 : 여양군 굉
손자 : 여성군 완
손자 : 여흥군 선
- ** '''장녀''': 전주 이씨
사위 : 이인우 (? ~ 1393년 이전) - 초혼
사위 : 장담 (張湛, ? ~ 1400년 2월 4일) - 재혼, 결성군(結城君), 본래 불교 승려였다가 환속함.
손자 : 여안군 군실
손자 : 여강군 영석
- ** '''딸''': 전주 이씨
사위 : 노신(盧愼)
- ** '''딸''': 신혜택주 이씨 (信惠宅主 李氏)
사위 : 변중량 (卞仲良) - 초혼
사위 : 유정현 (柳廷顯) - 재혼,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공헌현비 권씨 가문의 인척.
- ** '''딸''': 전주 이씨
사위 : 홍로 (洪魯) - 초혼, 이혼
사위 : 변처후 (邊處厚) - 재혼
완풍대군의 딸들은 여러 차례 재혼하였다. 장녀는 이인우와 사별 후 장담에게 재가했고, 신혜택주 이씨로 추정되는 둘째 딸은 변중량과 사별 후 유정현에게 재가했으며, 또 다른 딸은 홍로와 이혼 후 변처후에게 재가하였다.[6] 태종은 재혼한 여성의 자손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복 백부인 이원계의 딸들에게는 예외를 적용하여 자손들의 출사를 허용했다.[6]
5. 평가
이원계는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여러 차례 격퇴하며 무신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그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는 1358년과 1359년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특히 2차 침입 때는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무관 2등공신에 올랐다. 1361년에는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격파했고, 1362년 개경을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쳐 1363년 다시 2등 공신에 책록되며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동생 이성계와 함께 쌍성 지역 회복에 기여하고, 1375년에는 북원의 탈탈불화 군대를 격퇴했으며, 1377년과 1380년에는 강화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범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황산대첩에서는 이성계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동생 이성계가 1388년 요동 정벌 중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 할 때, 고려의 신하로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처음에는 회군을 만류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결국 협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그는 회군 후 공신 책록 과정에서 동생 의안대군 이화보다 낮은 2등 공신에 머물렀다.
이원계의 이러한 행보는 고려 말 격동기 속에서 개인의 신념과 시대적 변화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은 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원칙을 지키려 했던 그의 충절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는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무장의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의 양심과 가치관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그의 선택을 존중할 여지를 남긴다.
그는 1388년 회군 5개월 뒤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들에게는 숙부 이성계를 도와 충효를 다하라고 유언하면서도, 자신은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는 의지를 담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三韓故國身何在 삼한고국신하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동처휴운재처이)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荊蠻不必海桴浮 형만불필해부부)
이 시에서 그는 자신을 주나라 문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남쪽 형만(荊蠻) 땅으로 떠난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에 비유하며, 동생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다른 길(죽음)을 선택했음을 나타냈다. 이는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의 신하로서 생을 마감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후 조선 태조는 그를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襄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인물
문익점의 삼녀
[2]
인물
이자흥의 양자
[3]
인물
홍노(홍로)
[4]
인물
이원계
[5]
문서
환왕정릉신도비명, 이자춘신도비문
[6]
웹사이트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0월 26일 무인 2번째기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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