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외교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외교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고대에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상업을 통해 국제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중세를 거치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근세에는 신대륙 발견, 식민지 경쟁, 노예 무역 등을 통해 국제관계가 확대되었고, 근대에는 자유주의의 확산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상호의존 및 경쟁, 제국주의의 충돌이 나타났다. 현대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고, 지역 경제 통합과 동아시아 경제권의 부상이 주요 특징으로 나타났다. 외교사 연구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시작으로, 20세기 전반의 외교 정책 우선주의, 피셔 논쟁과 내부 정치 우선주의의 부상, 프랑스 학파의 심층적 힘 연구,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의 영향, 최근의 문화, 젠더, 인종사 연구 등 다양한 경향을 보여왔다.

2. 고대 및 중세의 국제관계

국제관계는 먼저 고대의 중근동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이라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고대 지중해 주변에서는 페니키아의 상업 형태로 국제관계의 맹아(싹)가 나타났다. 로마 시대에는 군사적 팽창과 로마법 체계의 팽창이 함께 진행되었다. 이는 군사적 제국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가 결합된 최초의 형태였다. 중세에는 카톨릭이라는 언어가 보편적인 의미를 가졌던 것처럼, 로마교회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국제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문화와 상업의 국제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3. 근세의 국제관계

십자군은 서양이 동양의 문화와 접촉하는 큰 기회를 주었으며,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가 번영하는 기회도 되었다. 신대륙 발견이나 인도 항로의 발견 등은 국제관계를 넓고 깊게 하였다. 포르투갈, 스페인의 자원 약탈형 식민지 영유 경쟁이 시작되었고, 해외로부터의 귀금속 유입은 유럽에 물가 혁명을 가져왔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를 암흑의 대륙으로 만들었으며, 중상주의는 국가들 간의 부와 힘의 균형이나 우열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 기운을 높였다.

4. 근대의 국제관계

자유주의는 국제관계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에는 외국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보았지만, 산업형 사회에서는 외국을 경쟁해야 할 라이벌로 보는 견해가 확립되었다. 자유주의 이념은 외국과의 상호의존과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견해를 포함했는데, 이는 자국의 손실이 외국의 이득이라는 중상주의 사상과 비교할 때 크게 발전한 것이었다. 고전학파 사람들은 식민지 영유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기도 했다.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은 국제 간 정의, 관용, 우애를 확립하려는 움직임과 일치했다. 그러나 이 이념은 그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국제관계가 확대되고 상호 의존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면도 있었지만, 불평등한 조건하에서의 자유 경쟁은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고 후진국의 경제적 내셔널리즘자유주의에 대한 보호주의를 유발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자유주의의 황금시대는 경제적 식민주의 확대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국 측의 국제분업 확대와 이익 누적은 인도 측에서는 낡은 체제 파괴와 종속화, 착취와 부정의(不正義)의 횡행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국제적인 조직망으로 인류는 넓고 강한 단일시장을 가지게 되었고, 금본위제라는 하나의 기준과 선진국 간 최혜국 대우에 따른 통상조약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영국과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영국 측에서의 이민과 자금 유입, 그리고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측에서의 농업 생산물 수출이라는 형태로 확대된 국제경제 밸런스가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4. 1.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충돌

자유주의는 국제관계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에는 외국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보았지만, 산업형 사회에서는 외국을 경쟁해야 할 라이벌로 보는 견해가 확립되었다. 자유주의 이념은 외국과의 상호의존과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견해를 포함했는데, 이는 자국의 손실이 외국의 이득이라는 중상주의 사상과 비교할 때 크게 발전한 것이었다. 고전학파 사람들은 이러한 이론에 따라 식민지 영유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기도 했다.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은 법률 분야에서 국제 간 정의, 관용, 우애를 확립하려는 움직임과 일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그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국제관계가 확대되고 상호 의존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면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한 조건하에서의 자유 경쟁이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고 후진국의 경제적 내셔널리즘자유주의에 대한 보호주의를 유발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자유주의의 황금시대는 경제적 식민주의 확대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국 측에서는 국제분업의 확대와 그에 따른 이익의 누적으로 보였던 것이, 인도 측에서는 낡은 체제의 파괴와 종속화, 착취와 부정의(不正義)의 횡행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국제적인 조직망으로 인류는 넓고 강한 단일시장을 가지게 되었고, 금본위제라는 하나의 기준과 선진국 간 최혜국 대우에 따른 통상조약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영국과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영국 측에서의 이민과 자금 유입, 그리고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측에서의 농업 생산물 수출이라는 형태로 확대된 국제경제 밸런스가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4. 2. 식민 지배의 영향

야만문명을 구별한다면, 자유주의는 적어도 그 이념(理念)에서는 국제관계를 야만의 단계에서 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에는 외국을 적(敵)과 같이 여겨 정복하고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신도 그것을 허락한다는 견해가 강했다. 그러나 산업형 사회에서는 외국을 일정한 규칙 아래 경쟁하는 라이벌로 보는 견해가 확립되었으며, 이는 군사형 사회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에는 외국과 분업을 통해 상호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상호의존 '''·''' 상호이익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자국의 손실은 외국의 이득, 자국의 이득은 외국의 손실이라는 편협한 중상주의 사상과 비교할 때 크게 발전한 견해였다. 고전학파 사람들은 이러한 이론에 따라 식민지 영유(領有)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기도 했다. 경제면에서의 자유주의 사상은 법률 분야에서 국제 간 정의 '''·''' 관용 '''·''' 우애 등을 확립하려는 움직임과 일치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이념은 그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국제관계의 그물망이 확대 심화되고 상호 의존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한 조건하에서의 자유 경쟁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져, 자유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고 후진국의 경제적 내셔널리즘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보호주의를 유발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자유주의의 황금시대는 경제적 식민주의의 확대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 입장에서 국제 분업의 확대와 그에 따른 이익의 누적으로 보이는 것이, 인도 입장에서는 낡은 체제의 파괴, 종속화, 착취, 부정의(不正義)의 횡행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국제적인 조직망 덕분에 인류는 이전에는 없던 넓고 강한 단일 시장을 가지게 되었다. 금본위제라는 하나의 기준이 있었고, 적어도 선진국 간에는 최혜국(最惠國) 대우에 따른 통상조약(通商條約)이 있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여러 자원의 생산적 전용(轉用)에 기여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 영국과 캐나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영국 측의 이민(인적 자원 이동), 자금 유입(사회 자본 건설), 그리고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측의 농업 생산물 수출이라는 형태로 일정 수준의 확대된 국제 경제 균형이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5. 현대의 국제관계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은 금본위제와 최혜국 대우라는 두 가지 국제 질서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1917년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은 세계 시장을 둘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동서 냉전으로 인해 자유주의권과의 경제 교류는 감소했다. 반면, 반식민주의 흐름과 남북 문제, 미국 및 소련 중심의 경제권 형성과 같은 지역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유럽공동체(EC)를 거쳐 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여 유럽의 경제, 정치적 통합을 추구했다. 반면 소련 경제권은 소련 해체로 약화되었고, 최근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경제권이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어떻게 구축하고, 정의, 관용, 우애를 바탕으로 상호 교류와 이익을 추구하며 국제 관계의 균형을 이룰 것인가가 현대의 과제이다.[22]

5. 1. 냉전과 탈식민지화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의 대공황은 금본위와 최혜국 대우라는 두 가지 기둥을 무너뜨렸다. 1917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하나의 세계 시장이 아닌 두 개의 세계 시장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동서 대립의 영향으로 자유주의권과의 경제적 교류가 줄어들었다. 반면, 반식민주의 조류와 남북 문제의 긴급성, 그리고 미국 경제권, 소련 경제권과 같은 지역화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유럽공동체(EC) 단계를 거쳐, 1993년 1월 1일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여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결합과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했다. 한편, 소련 경제권은 소련의 해체로 유명무실해졌으며, 최근에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권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어떻게 만들고, 정의, 관용, 우애를 바탕으로 상호 교류와 이익을 추구하며 국제 관계의 균형을 달성할 것인가가 현대의 과제이다.

냉전과 탈식민지화는 세계적인 외교사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수정주의 학파 부상을 이끌었다. 가브리엘 콜코,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와 같은 미국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외교사 대신, 미국 국내 정치의 영향력과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이 외교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광범위하게 검토하는 '내부 정치 우선'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미국 냉전 수정주의자들은 1940년대 냉전의 기원과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냉전 사학 내에서는 보이테크 마스트니와 같이 냉전을 소련의 침략으로 보는 "정통" 학파와, 냉전을 미국의 침략으로 보는 "수정주의" 학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존 루이스 개디스를 중심으로 미국이 냉전에 대한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만, 주된 책임은 소련에 있다는 "신정통" 학파가 등장했다.

5. 2. 지역 경제 통합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의 대공황은 금본위제와 최혜국 대우라는 두 가지 원칙을 무너뜨렸다. 1917년에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하면서 세계 시장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동서 냉전의 영향으로 자유주의권과의 경제 교류가 줄어들었다. 반(反) 식민지주의의 흐름과 남북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미국 경제권, 소련 경제권과 같은 지역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유럽공동체(EC) 단계를 거쳐 1993년 1월 1일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결합과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유럽연합(EU)으로 발전했다. 한편, 소련 경제권은 소련의 해체로 유명무실해졌으며, 최근에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권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정의, 관용, 우애를 바탕으로 상호 교류와 상호 이익의 이상을 실현하며 국제 관계의 균형을 달성해 나갈 것인지가 현대의 과제이다.

5. 3. 동아시아 경제권의 부상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의 대공황은 금본위제와 최혜국 대우라는 두 가지 기둥을 무너뜨렸다. 1917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하면서 하나의 세계 시장이 아닌 두 개의 세계 시장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동서 대립의 영향으로 자유주의권과의 경제 교류가 줄어들었다. 반(反) 식민지주의의 흐름과 남북 문제의 긴급성, 그리고 미국 경제권, 소련 경제권과 같은 지역화가 큰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유럽공동체(EC) 단계를 거쳐 1993년 1월 1일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연합(EU)으로 발전했다. 한편 소련 경제권은 소련의 해체로 유명무실해졌으며, 최근에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권이 급부상하고 있다.[22]

6. 국제관계사 연구

국제관계사 연구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에 의해 현대적인 형태가 정립되었다. 랑케는 유럽 열강,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 문서를 사용하여 "실제로 일어난 대로"의 근세 유럽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외교 우선주의"(''Primat der Aussenpolitik'')를 주장하며, 국제 관계가 국가 내부 발전을 이끈다고 보았다. 랑케는 역사가는 자료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

20세기 초,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같은 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 관련 기록을 공개하면서 연구에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베르사유 조약의 전쟁 책임 조항은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많은 저술을 촉발했다.[3] 전간기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1914년의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렸다.[4] 역사학자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피에르 르누뱅과 그의 제자들은 1950년대에 'forces profondes|포르스 프로퐁드|심층적 힘프랑스어'이라고 부른, 국내 정치의 프랑스 외교 정책에 대한 영향력 같은 요소를 고려하는 새로운 유형의 국제 역사를 시작했다.

1961년 독일 역사가 프리츠 피셔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독일에 있다고 주장하여 "피셔 논쟁"을 일으켰다.[11] 이 논쟁으로 외교사 연구자들은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11] 1970년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한스-울리히 벨러와 ''외부 정치 우선주의''(Primat der Aussenpolitik)와 ''내부 정치 우선주의''(Primat der Innenpolitik) 학파의 장점을 놓고 논쟁했다.[12]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내부 정치 우선주의적 접근 방식의 영향으로 외교사 연구자들은 사회 과학 모델을 차용하기 시작했다.[11]

냉전과 탈식민지화는 더욱 세계적인 외교사로의 경향을 강화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수정주의 학파의 부상을 이끌었는데, 가브리엘 콜코와 같은 역사가들은 미국 국내 정치의 영향력과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이 외교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내부 정치 우선''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외교사가 학계 주류 역사 연구와 통합되었다. 국내 및 국제 세력 간 상호 작용을 탐구하며, 문화와 정체성 연구, 외교에 적용되는 정치 이데올로기 탐구가 중요해졌다. 오리엔탈리즘, 글로벌리즘, 젠더 및 인종사, 인권사 등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 영향을 미쳤다.[23][24]

6. 1. 랑케와 실증주의 역사학

19세기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는 외교사의 현대적 형식을 정립했다. 랑케는 유럽 열강(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 문서를 사용하여 "실제로 일어난 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ist'') 근세 유럽 역사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데 주력했다. 랑케는 "외교 우선주의"(''Primat der Aussenpolitik'')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외교사가 가장 중요한 역사 유형이라고 보았으며, 국제 관계의 관심사가 국가의 내부 발전을 이끈다고 주장했다. 랑케의 외교사에 대한 이해는 현대 서구 정부가 생산한 많은 양의 공식 문서를 자료로 활용하는 데 의존했으며, 그는 역사가가 이러한 자료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신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2. 20세기 전반의 외교사 연구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버나도트 에벌리 슈미트와 같은 저명한 외교사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에 집중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출판하기 시작하면서 외교사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베르사유 조약 (1919)의 전쟁 책임 조항은 독일을 비난하였는데, 이는 랑케의 접근 방식과 결합되어 여러 언어로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자극했다.[3] 1918년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동맹국의 주요 비밀 문서를 출판했고, 다른 정부들은 소장하고 있는 주요 문서들을 신중하게 편집한 다권본 컬렉션을 위촉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전쟁의 기원에 대한 다권본 역사를 저술했다. 전간기 동안, 대부분의 외교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1914년의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으며, 전쟁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초기의 연구들은 랑케가 강조한 ''외교 정책(Aussenpolitik)''에 비교적 잘 부합했다.[4]

역사학자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로서 헌법사를 대체하며, 역사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확하며, 정교한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20세기 전반 동안, ''외교 정책 우선(Primat der Aussenpolitik)'' 접근 방식의 좁은 틀 안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외교사는 광범위한 역사적 힘에 거의 언급 없이 외교 정책 결정 엘리트와 매우 좁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예외는 영국에서는 A. J. P. 테일러와 윌리엄 메들리코트,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르누뱅, 미국에서는 윌리엄 L. 랭거로, 경제 및 국내 정치 세력을 연구했다.[1]

6. 3.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한 논쟁

20세기 초,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버나도트 에벌리 슈미트와 같은 저명한 외교사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에 집중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출판하기 시작하면서 외교사 연구에 주목할 만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베르사유 조약(1919)의 전쟁 책임 조항은 독일을 비난하였는데, 이는 랑케의 접근 방식과 결합되어 여러 언어로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자극했다.[3] 1918년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동맹국의 주요 비밀 문서를 출판했고, 다른 정부들은 소장하고 있는 주요 문서들을 신중하게 편집한 다권본 컬렉션을 위촉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전쟁의 기원에 대한 다권본 역사를 저술했다. 전간기 동안, 대부분의 외교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1914년의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으며, 전쟁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초기의 연구들은 랑케가 강조한 ''외교 정책(Aussenpolitik)''에 비교적 잘 부합했다.[4]

역사학자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로서 헌법사를 대체하며, 역사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확하며, 정교한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6. 4. 프랑스 학파의 '심층적 힘' 연구

피에르 르누뱅(1893–1974)과 그의 제자인 장-밥티스트 뒤로젤 및 모리스 보몽|Maurice Beaumont|v=sup프랑스어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역사학자 그룹은 1950년대에 르누뱅이 'forces profondes|포르스 프로퐁드|심층적 힘프랑스어'이라고 부른, 국내 정치의 프랑스 외교 정책에 대한 영향력과 같은 요소를 고려하는 새로운 유형의 국제 역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르누뱅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la décadence|라 데카당스프랑스어''의 개념을 따랐으며, 르누뱅은 제3공화국 하의 프랑스 사회가 "주도력과 역동성이 심각하게 부족했다"고 주장했고, 보몽은 프랑스 정치인들이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어떤 의식"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1979년, 뒤로젤의 저서 《La Décadence》는 제3공화국 전체를 나약하고 비겁하며 타락했다고 전면적으로 비난했다.

6. 5. 피셔 논쟁과 내부 정치 우선주의

1961년 독일 역사가 프리츠 피셔는 저서 ''세계 제패를 향한 발걸음''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독일에 있다고 주장하여 서독 역사학계에 격렬한 "피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1] 이 논쟁의 결과 중 하나는 ''내부 정치 우선주의''(Primat der Innenpolitik) 접근 방식의 부상이었다.[11] 이러한 학파의 부상으로 외교사 연구자들은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11]

1970년대 보수적인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측근 클라우스 힐데브란트와 함께 좌파 성향의 한스-울리히 벨러와 ''외부 정치 우선주의''(Primat der Aussenpolitik)와 ''내부 정치 우선주의'' 학파의 장점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12] 힐그루버와 힐데브란트는 외교부 기록과 외교 정책 결정 엘리트 연구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인 ''외부 정치 우선주의'' 접근 방식을 옹호했다.[13] 반면 벨러는 ''내부 정치 우선주의'' 접근 방식을 지지하며, 외교사가 사회사의 하위 분야로 취급되어야 하고, 이론에 기반한 연구가 필요하며, 실제 초점은 해당 사회 연구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4]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내부 정치 우선주의적 접근 방식의 영향으로 외교사 연구자들은 사회 과학 모델을 차용하기 시작했다.[11]

"내부 정치의 우선성" 접근 방식의 주목할 만한 예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사회적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변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티머시 메이슨의 주장이었다.[15] 메이슨은 "나치 독일은 ''언젠가는'' 주요 확장 전쟁을 벌이려 했다"고 주장했다.[16] 그러나 전쟁 시기는 국내 정치적 압력, 특히 실패한 경제와 관련하여 결정되었으며, 히틀러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16]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외교 정책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히틀러의 "의지"나 "의도"가 아니라 독일 경제 상황이었다.[17]

메이슨은 나치 지도자들이 1918년 독일 11월 혁명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고, 또 다른 혁명을 우려하여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 하락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7] 1939년까지 재무장으로 인한 독일 경제 "과열", 숙련 노동자 부족으로 인한 재무장 계획 실패, 사회 정책 붕괴로 인한 산업 불안, 노동자 계급 생활 수준 급락으로 인해 히틀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기와 장소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18] 나치 지도부는 심각한 사회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여, 독일의 생활 수준을 지원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약탈할 수 있는 동유럽 영토를 점령하는 "파괴적 약탈" 외교 정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9]

히틀러에게 강요된 "전쟁으로의 도피"라는 메이슨의 이론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1980년대에 경제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와 일련의 토론을 벌였다. 오버리는 폴란드 공격 결정이 구조적 경제 문제 때문이 아니라 히틀러가 특정 시점에 국지전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오버리는 메이슨 주장의 문제점으로 기록되지 않은 방식으로 독일 경제 문제 정보가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는 가정을 꼽았다.[20] 4개년 계획 문제로 인한 경제적 압력과 4개년 계획 가속화를 위해 인접 국가의 원자재, 산업, 외환 보유고를 강탈하려는 경제적 동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21] 오버리는 국내 불만을 처리하는 독일 국가의 억압 능력이 메이슨에 의해 과소평가되었다고 주장했다.[20]

6. 6.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한 논쟁

20세기 초,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등 저명한 외교사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에 집중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 관련 기록을 공개하면서 외교사 연구에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베르사유 조약(1919)의 전쟁 책임 조항은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촉발했다.[3]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는 동맹국의 주요 비밀 문서를 공개했고, 다른 정부들도 주요 문서들을 편집한 컬렉션을 출판했다. 전간기 대부분의 외교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1914년의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으며, 전쟁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4]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그러나 1945년 이후 정치, 지성, 사회사가 외교사를 대체하며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었다.

20세기 전반, 대부분의 외교사는 외교 정책 결정 엘리트와 좁게 관련되어 있었고, 광범위한 역사적 힘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A. J. P. 테일러, 피에르 르누뱅, 윌리엄 L. 랭거는 경제 및 국내 정치 세력을 연구했다.[1]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 대전''은 아돌프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 때문에 전쟁이 발생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A. J. P. 테일러의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히틀러에게 세계 정복 계획이 없었고, 1939년 폴란드에서의 전쟁 발발은 외교적 오판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처칠의 관점에 도전했다. D.C. 와트, 폴 케네디 등은 유화 정책이 여러 구조적, 경제적, 군사적 요인에서 비롯된 영국의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퍼 손 등은 개별 지도자에서 벗어나 사회적 영향과 외교 관계에 대한 정보 등을 논의했다.[7][8]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티머시 메이슨은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사회적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변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그는 독일 경제 상황이 히틀러의 외교 정책 결정에 중요했으며, 나치 지도자들은 독일 11월 혁명을 우려하여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 하락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7] 1939년, 경제 문제, 산업 불안, 생활 수준 급락으로 히틀러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18]

리처드 오버리는 폴란드 공격 결정이 히틀러가 국지전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4개년 계획 문제로 인한 경제적 압력과 인접 국가의 자원을 빼앗으려는 경제적 동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21]

6. 7. 냉전과 베트남 전쟁의 영향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등 저명한 외교사학자들의 연구는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에 집중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 관련 기록을 출판하면서 외교사 연구에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랑케의 접근 방식은 베르사유 조약 (1919)의 전쟁 책임 조항의 영향과 결합되어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촉발했다.[3] 1918년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동맹국의 주요 비밀 문서를 출판했고, 다른 정부들은 주요 문서들을 편집한 다권본 컬렉션을 위촉했다. 전간기 동안, 대부분의 외교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1914년의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다.[4]

역사학자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로서 헌법사를 대체하며 가장 중요하고 정교한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그러나 1945년 이후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 정치, 지성, 사회사가 외교사를 대체하게 되었다.

냉전과 탈식민지화는 더욱 세계적인 외교사로의 경향을 강화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수정주의 학파의 부상을 이끌었는데, 가브리엘 콜코와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외교사를 거부하고 미국 국내 정치의 영향력과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이 외교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내부 정치 우선''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1940년대 냉전의 기원과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초점을 맞추었다. 1960년대부터 냉전 사학 내에서는 냉전을 소련의 침략으로 보는 "정통" 학파와 미국의 침략으로 보는 "수정주의" 학파 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존 루이스 개디스를 중심으로 미국이 냉전에 대한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만, 대부분은 소련에 있다는 "신정통" 학파가 등장했다.

6. 8. 최근의 연구 경향

20세기 초, 찰스 웹스터, 해럴드 템퍼리 등 저명한 외교사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사건, 특히 전쟁과 평화 회담에 집중했다. 1910년 프랑스 정부가 1870년 전쟁 관련 기록을 출판하면서 외교사 연구에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 베르사유 조약의 전쟁 책임 조항은 1914년 전쟁의 기원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촉발했다.[3] 전간기 대부분의 외교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 모든 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다.[4]

머리엘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가 역사 연구의 주력 분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5] 그러나 1945년 이후 정치, 지성, 사회사가 외교사를 대체하며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었다.

20세기 전반, 대부분의 외교사는 외교 정책 결정 엘리트와 매우 좁게 관련되어 있었다. A. J. P. 테일러, 피에르 르누뱅, 윌리엄 L. 랭거는 예외적으로 경제 및 국내 정치 세력을 연구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외교사학자들은 미일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세계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22] 이안 니시, 이리에 아키라와 같은 아시아 전문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냉전과 탈식민지화는 세계적인 외교사 경향을 강화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수정주의 학파 부상을 이끌었고, 가브리엘 콜코 등은 '내부 정치 우선'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냉전 사학 내에서는 "정통"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존 루이스 개디스가 대표적인 "신정통" 학파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책임을 돌렸다.

유럽에서는 냉전 말기에 외교사가 쇠퇴했지만, 1989-91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부활했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정치학, 사회학, 정신사, 문화사의 관점을 통합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외교사가 학계 주류 역사 연구와 통합되었다. 국내 및 국제 세력 간 상호 작용을 탐구하며, 문화와 정체성 연구, 외교에 적용되는 정치 이데올로기 탐구가 중요해졌다. 오리엔탈리즘, 글로벌리즘, 젠더 및 인종사, 인권사 등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 영향을 미쳤다.[23][24]

1980년대 초, 제프리 킴볼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외교사학자의 53%는 자유주의자, 10%는 보수주의자였다.[25]

참조

[1] 서적 Diplomatic History
[2] 논문 Doing historical research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Leopold Ranke, the archive policy, and the relazioni of the Venetian Republic https://www.academia[...]
[3] 논문 Historiography and war guilt https://www.jstor.or[...]
[4] 서적 Writing the Great War: The Historiography of World War I from 1918 to the Present https://www.berghahn[...]
[5] 서적 Pax Britannica'? British Foreign Policy 1789-1914
[6] 서적 Political leaders of contemporary Western Europe: a biographical dictionary Greenwood
[7] 논문 The romance of decline: The historiography of appeasement and British national identity http://sas-space.sas[...]
[8] 서적 The historiography of appeasement
[9] 논문 Post-War Politics and the Historiography of French Strategy and Diplomacy Before the Second World War
[10] 서적 Some Twentieth-Century Historians
[11] 서적 Diplomatic History
[12] 서적 The Nazi Dictatorship Arnold
[13] 서적 The Nazi Dictatorship Arnold
[14] 서적 The Nazi Dictatorship
[15] 서적 Fascist Ideology Routledge
[16] 서적 Fascist Ideology Routledge
[17] 서적 The Nazi Dictatorship Arnold
[18] 서적 Fascist Ideology Routledge
[19] 서적 Fascist Ideology Routledge
[20] 서적 Debate: Germany, `domestic crisis’ and the war in 1939 Edward Arnold
[21] 서적 Germany, ‘Domestic Crisis’ and War in 1939 Blackwell
[22] 서적 Diplomatic History
[23] 논문 The Diplomatic History Bandwagon: A State of the Field
[24] 서적 The history of human rights: From ancient times to the globalization era https://edocs.uis.ed[...]
[25] 논문 The Influence of Ideology on Interpretive Disagreement: A Report on a Survey of Diplomatic, Military and Peace Historians on the Causes of 20th Century U. S. Wars https://www.jstor.or[...]
[26] 서적 Diplomatic History
[27] 논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