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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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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도영은 근대 초기에 활동한 화가로, 15세에 동전 제조 관련 기술을 배우며 그림에 입문했다. 조석진, 안중식에게 그림을 배우고 보성중학교 도화 교사, 관립공업전습소 기수를 역임했다. 대한협회 교육부원으로 활동하며 이해조와 교류했고, 《대한민보》에 시사만평을 연재했다. 조선서화미술회 회원,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장승업의 영향을 받아 전통 회화 기풍을 이어받았으며, 딱지본 소설 표지 및 삽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한국 출판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 작품으로는 추산도와 연화백로도가 있다.

2. 생애

이도영은 안중식조석진의 예술을 집약한 근대 초기 화가로 평가받는다. 장승업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기명화, 절지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 전통 회화의 기풍을 이어받았으며, 서예는 행서와 예서의 정제되고 아름다운 미감을 보여준다.[1]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 회원과 1918년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0년 일본 미술계를 6개월 동안 시찰하고, 1921년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다.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다.

2. 1. 초기 활동

이도영은 15세 때부터 전환국에서 동전 제조에 관한 금속 성분을 연구하다가 그곳에서 설계 도안을 가르치던 조석진을 만나 석판 기술과 도안술을 배우면서 그림에 관한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1]

1903년 안중식의 개인 화숙인 경묵당(耕墨堂)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1905년 11월부터 대한국민교육회에서 준비 중인 교과서 편찬 업무에 관여했다. 1906년 10월 4책 8권으로 발행된 『초등소학』의 목판화 도상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2] 또한 휘문의숙에서 같은 해 11월에 발행한 『고등소학독본』의 목판화 도상 제작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3]

1906년에는 이용익이 설립한 사립보성중학교의 도화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양기훈, 김유탁 등과 함께 전문 미술 교육 기관인 교육서화관 발기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 공예학교인 관립공업전습소가 만들어지자 기수(技手)가 되었다. 1908년 3월에는 학부에서 발행한 『도화임본(圖畵臨本)』 4권을 저술했다.[4]

1907년 오세창천도교 대표들이 만든 대한협회에서 교육부원으로 일했고, 거기서 교육부장을 맡았던 이해조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후에 이해조가 『옥중화』, 『홍도화』 등 딱지본 소설을 낼 때 이도영이 표지화와 본문 삽화를 맡는 등 공동 작업으로 이어졌다.

1909년 6월 2일 오세창이 설립한 일간지 《대한민보》 창간호부터 1910년 8월 31일 폐간 때까지 목판화로 제작한 시사만평을 연재했다.

2. 2. 미술 교육 활동

이도영은 15세 때 전환국에서 동전 제조에 관한 금속 성분을 연구하다가 그곳에서 설계 도안을 가르치던 조석진을 만나 석판 기술과 도안술을 배우면서 그림에 관한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1]

1903년 안중식의 개인 화숙인 경묵당(耕墨堂)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1905년 11월부터 대한국민교육회에서 준비 중인 교과서 편찬 업무에 관여했다. 1906년 10월 4책 8권으로 발행된 『초등소학』의 목판화 도상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2] 또한 휘문의숙에서 같은 해 11월에 발행한 『고등소학독본』의 목판화 도상 제작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3]

1906년 이용익이 설립한 사립보성중학교의 도화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양기훈, 김유탁 등과 함께 전문 미술 교육 기관인 교육서화관 발기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 관립공업전습소가 만들어지자 기수(技手)가 되었다. 1908년 3월에는 학부에서 발행한 『도화임본(圖畵臨本)』 4권을 저술했다.[4]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 회원, 1918년 서화협회 발기인이 되었다.

2. 3. 언론 활동과 시사만화

이도영은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신문 ‘대한민보’에 1909년 6월 2일 창간호부터 1910년 8월 31일 폐간될 때까지 1년 2개월 남짓 대한제국 최초로 시사 삽화를 그렸다. 1909년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화는 한국 시사만화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5]

이도영은 18세 때 조선왕조 최후의 화가였던 조석진안중식의 문하생이 되어 인물, 동물,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전통적 기법에 다양한 소재를 접목시켜 자유로운 화법을 구사했다. 수묵화를 바탕으로 한학적 소양을 갖춘 깊이와 예리하게 번뜩이는 풍자로, 국운이 쇠해 갔던 당대에 대한 통렬한 비평을 했다.[5]

2. 4. 서화협회 활동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 회원으로, 1918년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1] 1920년 일본 미술계를 6개월 동안 시찰했으며, 1921년 열린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다.

3. 표지 화가 및 삽화가로서의 활동

이도영은 딱지본 소설의 표지 그림과 삽화를 다수 제작했다. 특히 『옥중가인』, 『옥중화』 등에 실린 목판 삽화에서는 조영석, 김득신, 신윤복, 김홍도 등 조선 후기 풍속화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계승한 섬세한 필치를 보여주었다.[8]

3. 1. 딱지본 소설 삽화

이도영은 근대기 교과서 삽화와 잡지 표지 등을 활발하게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홍도화』를 비롯하여 『옥중가인』, 『옥중화』 등 1910년대 딱지본 소설책의 표지들을 다수 그렸다.[6] 이도영의 낙관과 전서체 표지, 화조화가 어울려 아취를 풍기는 『옥중가인』은 근대 초기의 고급스러운 문화상품이었다.[7] 이도영의 활동은 한국 출판사에서 근대 표지 디자인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옥중가인』, 『옥중화』 등에 실린 목판화 삽화에서 이도영은 인물 배치와 자세, 배경 풍경 등에서 가늘고 섬세한 필치로 조영석, 김득신, 신윤복, 김홍도 등 조선 후기 풍속화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담은 전통적 화풍을 계승해 보여 준다.[8]

4. 작품


  • 추산도
  • 연화백로도

참조

[1] 논문 『옥중화』에 나타난 이도영의 목판화 도상 연구 소명출판
[2] 서적 한국근대미술사 시공사
[3] 논문
[4] 논문
[5] 뉴스 계몽·풍자 그리고 ‘날 선’ 비판 일제강점기 ‘들었다 놨다 ~’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3-12-15
[6] 논문 딱지본 소설책의 표지 디자인
[7] 논문
[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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