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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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릉 대전은 222년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손권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유비는 촉한 황제로 즉위한 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으나, 육손의 지휘 아래 화공에 패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백제성으로 도주했다. 이 전투로 촉한은 형주를 완전히 상실하고 국력이 약화되었으며, 유비는 이듬해 백제성에서 사망했다. 이릉 대전은 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촉한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삼국 간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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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년 중국 - 조비의 남정
조비의 남정은 222년부터 224년까지 위나라 황제 조비가 손권에게 항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와 오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여러 차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오나라 군의 방어와 위나라 군의 질병, 손소의 기습과 오군의 화공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난 군사 작전이다.
이릉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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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갈등 | 삼국 시대의 전쟁 |
![]() | |
날짜 | 221년 8월경 – 222년 10월경 |
장소 | 이릉 및 효정 (후베이성 이창 시 이두 현 서부와 창양 현 동부의 합류점]); 마안산 (창양 현 동쪽) |
결과 | 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오 |
교전 2 | 촉한; 무릉의 부족 군대 |
지휘관 및 지도자 | |
오 | 육손 한당 정봉 주연 서성 반장 낙통 송겸 |
촉한 | 유비 사마가† 황권 풍습 장남 마량 부융 정기 오반 요화 상총 진식 왕보 |
병력 규모 | |
오 | 약 50,000명 |
촉한 | 40,000–60,000명 |
피해 규모 | |
오 | 불명 |
촉한 | 불명 |
2. 배경
219년 말, 손권 휘하의 장군 여몽은 군대를 이끌고 유비의 형주 남부 영토를 침략했다. 당시 형주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관우는 번성 전투에 참전 중이었는데, 번성에서 승리했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후에야 침략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우는 마성(호북성 당양시)에서 손권 군대에 포위되었고, 포위망을 뚫으려다 매복에 걸려 사로잡혔으며, 결국 임저(현재의 호북성 남장현)에서 처형되었다.[4]
220년 11월 25일, 헌제는 조비에게 선위하여 후한을 멸망시켰고, 같은 해 12월 11일, 조비는 조위를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5] 221년 5월 10일, 유비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6][7] 조비의 황제 칭호에 반박, 촉한을 건국했다. 같은 시기, 손권은 수도를 공안현에서 악주로 옮기고 "무창"(武昌중국어)으로 개명했다.[8] 221년 9월 23일, 손권은 조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위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며, 조비는 손권에게 "오왕"() 칭호를 수여했다.[9]
221년 여름, 유비는 제갈량을 성도에, 조운을 강주에 주둔시켜 후방을 맡기고, 직접 수만 병력을 이끌고 손권을 공격했다.
정사 오서(吳書)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은 215년에 사망하여 이릉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는 삼국지연의의 창작이다.
2. 1. 형주를 둘러싼 갈등
적벽 대전 이후, 형주는 유비, 손권, 조조 세력 간의 분쟁 지역이었다. 주유 사후, 손권은 유비에게 남군을 임대했으나, 양측은 형주 소유권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손권 측은 적벽 대전의 공로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고, 유비가 자신들의 묵인 하에 형주 남부를 점거했으므로 형주 전체를 유비에게 임대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유비 측은 적벽 대전은 공동 작전이었으며, 형주 남부는 자력으로 획득한 것으로 여겼다.[4]215년, 익주 점령 후, 손권과 유비는 형주 반환 문제로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장사, 강하, 계양 3군을 손권에게 반환하고, 강릉, 무릉, 영릉은 유비의 영지로 삼는 협약을 맺었다.[4]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할 때, 관우가 북상하여 조조를 공격했다. 관우는 우금과 그 수하 병력들을 포로로 잡았으나, 식량 부족으로 손권 영지의 상관에서 군량을 노략질했다. 이는 손권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손권은 조조와 손을 잡게 되었다. 관우는 조조와 손권의 협공으로 패전하여 마충에게 생포된 후 처형되었다.[4]
손권이 관우를 미워한 원인 중 하나는, 관우가 손권의 아들과 자신의 딸과의 혼인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우는 손권의 원군이 늦어진 것에 분노하여 손권을 욕했고, 손권은 이를 듣고 관우가 자신을 경시한다고 생각했다.[86]
2. 2. 관우의 죽음과 유비의 복수심
219년 관우는 북상하여 조조를 공격, 우금과 그 수하 병력들을 포로로 잡았으나 식량 부족에 직면했다. 이에 관우는 손권의 영지인 상관에서 군량을 노략질했다. 이는 손권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손권은 조조와 손을 잡게 되었다.[84] 관우는 조조와 손권에게 협공받아 패전하고, 마충에게 생포된 후 처형되었다.[4]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갈량, 조운 등 다수의 중신들이 보복전에 반대했으나, 유비는 장비와 회견한 후 손권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심했다.[10][11] 전쟁 준비 중 장비는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 달아나 유비의 적의는 더욱 강해졌다.[13] 손권은 유비의 침공을 예상하고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종하며 전쟁에 대비했다.[9]
2. 3. 한국의 관점
夷陵之戰|이릉 대전중국어은 동아시아 삼국시대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한국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릉 대전의 결과로 촉한과 오나라가 약화되면서 위나라의 동방 진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더불어민주당은 이릉 대전을 유비의 과도한 복수심과 전략적 판단 착오로 인해 발생한 비극으로 평가하며, 외교적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우선시한 것을 비판한다. 특히,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조운, 진밀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하고, 장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점을 강조한다. 또한, 제갈근의 평화 회담 제안을 거절하고 전쟁을 지속한 것은 촉한의 멸망을 앞당기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3. 전쟁의 경과
221년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로 진격하여 육손, 이이, 유아 등이 지키는 무성(巫城)과 자귀성(秭歸城)을 함락시켰다. 222년 정월, 유비는 자귀에 본영을 설치하고 오반, 진식 등에게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진격하게 했다. 유비는 본대를 이끌고 육로로 진군하려 했으나, 손권에게서 전군을 위임받은 육손이 이를 간파하여 작전은 무산되었다.[87]
222년 봄, 유비는 다시 공세를 펼쳤다. 황권은 형주 깊숙이 들어가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후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유비에게 전선 지휘를 자신에게 맡기고 후방에 머무르도록 권했으나, 유비는 이를 기각했다.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 북안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게 한 후, 자신은 이도(夷道)를 따라 진군해 손환을 이릉성에 포위했다. 손환의 구원 요청에 육손은 "내게 촉군을 물리칠 계략이 있으니 참으라"며 묵살했다.[24]
당시 육손은 촉군에 밀려 삼협 내 모든 거점을 잃고 강릉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많은 장수들이 육손의 군사적 재능을 불신하여, 육손은 손권에게서 받은 검을 내보이며 권위를 세워야 했다.
유비는 효정으로 진군하며 마량을 무릉에 보내 이민족을 회유했고, 사마가 등이 호응했다. 그러나 육손이 요새화한 진영에서 수비로 일관하며 도발에 응하지 않자 전선은 교착되고 촉군의 사기는 떨어졌다.[25][26]
유비는 전선 주변에 50여 개 진을 일(一)자 모양으로 나열했는데, 조비는 이를 두고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며 패배를 예측했다. 육손도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 유비가 교만하고 병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3. 1. 촉한의 초기 공세
221년 유비는 황제로 즉위한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삼아 육손, 이이, 유아 등이 방어하던 무성(巫城)과 자귀성(秭歸城)을 함락시켰다.[87]222년 유비는 다시 공세를 펼쳤다. 황권은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후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병사의 지휘를 맡을 테니 유비는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진언했지만, 유비는 이를 기각했다. 유비는 장강 북안의 전선을 황권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도(夷道)를 따라 진군해 손환을 이릉성으로 몰아넣고 성을 포위했다.[24]
유비는 승세를 타고 효정으로 진군하면서 마량을 무릉에 파견하여 이민족을 회유했으며, 이에 사마가 등이 호응했다.
이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개 가까운 진영을 일(一)자 모양으로 나열해 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했다.
3. 2. 육손의 등장과 대치 국면
221년 8월, 유비는 오반과 풍습을 보내 오협의 오나라 방어선을 공격하게 했다. 이이와 유아가 지키고 있던 이 방어선을 오반과 풍습이 격파하자, 촉군은 4만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자귀로 진격했다.[17][18]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고 5만 명의 군사를 주어 촉군에 맞서게 했다. 육손은 주연,[38] 반장,[39] 송겸,[40] 한당,[20] 서성,[21] 선우단, 손환 등을 휘하에 두었다.[22][23][46]222년 2월, 유비는 자귀현에서 형주 탈환을 위해 진격하려 했다. 황권은 오나라 군대가 강하고 양쯔강을 이용한다는 점을 들어 유비에게 자신이 선봉을 맡고 후방 지원을 맡으라고 제안했으나, 유비는 듣지 않고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임명, 별도의 군대를 주어 북쪽 측면(양쯔강 북쪽 강둑)을 위나라 군대로부터 방어하게 했다. 유비는 주력군을 이끌고 양쯔강 남쪽 강둑을 따라 이동했다.[24]
유비는 오반과 진식에게 촉나라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진격하게 하고, 마량을 무릉군 부족들에게 보내 지지를 얻으려 했다.[25][26] 사마가 등이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육손은 요새화된 진영에서 수비하며 촉군의 도발에 응하지 않아 전선은 교착되고 촉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오나라 장수들이 공격을 건의하자, 육손은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으며, 그의 군대는 사기가 매우 높습니다. 게다가 그의 군대는 높고 산악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기 어렵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오나라 장수들은 육손이 적을 두려워한다고 불만을 품었다.[30]
유비는 오반에게 몇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탄한 지형에 진지를 구축하여 오군을 유도하려 했다.[32] 오나라 장수들이 공격하려 하자, 육손은 "이것은 계략일 것이다. 먼저 관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33] 육손의 의심대로 8,000명의 촉군이 계곡에 매복해 있었다. 오군이 도발에 응하지 않자 유비는 매복 계획을 포기하고 병사들에게 계곡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육손은 "적을 공격하자는 여러분의 제안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34]
3. 3. 이릉 전투와 촉한의 패배
222년 6월, 육손은 소규모 병력으로 촉군 진영을 공격하여 촉군이 분산된 진영에서 서로 연계하는 방식을 파악했다. 당시 촉군은 더위를 피해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육손은 이를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화공을 감행했다.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고,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 주변에 불을 지른 후 맹공을 가했다.[37]촉군은 혼란에 빠졌고, 각개격파식으로 무너졌다. 전황이 위급해지자 유비는 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수군은 육상군의 대패로 퇴로가 끊기자 지휘관 황권이 위에 항복했고, 손권군은 수많은 군선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40여 개 이상의 촉군 진영이 함락되었고, 유비는 백제성으로 후퇴했다. 풍습, 장남, 부동 등 다수의 무장들과 왕보, 마량 등의 문관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인력을 잃었다. 촉한 편에 섰던 호왕 사마가도 전사했다.[42][43][25][41]
4. 전후
이릉 대전의 대패 이후, 촉한은 멸망할 때까지 형주 지역으로 다시는 세력을 뻗치지 못했다. 유비는 의형제들의 죽음과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 허탈함으로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번민하다가 223년에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했다.[45][46][47][48][49][11]
손환은 이도에서 촉군에 포위되었을 때 육손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육손은 "손환은 부하들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기지가 잘 방어되어 있고, 충분한 물자를 가지고 있다. 내 계획이 실행되면,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아도 포위는 자동적으로 풀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정 전투에서 오나라가 승리한 후, 손환은 육손에게 "이전에 당신이 나를 돕는 것을 거절했을 때 원망했지만, 이제 승리 후에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50]
4. 1. 촉한의 국력 약화와 유비의 죽음
이릉 대전의 패배로 촉한은 형주를 완전히 상실하고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유비는 의형제들의 죽음과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 슬픔, 허탈함이 겹쳐 성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번민하다가 223년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했다.[45][46][47][48][49][11]유비는 흩어진 군대를 재정비하고 어부현으로 이동하여 "영안"(永安)으로 개명했다. 조운이 강주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영안에 나타나자, 추격하던 오나라 군대는 이미 스스로 물러갔다.[11]
유비는 223년 4월에 위독해졌고, 6월 10일에 사망하기 전에 아들 유선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갈량과 이엄을 유선을 보좌하는 섭정으로 임명했다.[64] 제갈량은 권력을 장악한 후 오나라와 평화를 맺고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오-촉 동맹을 재건했다.[65]
위나라는 오나라에 대한 원군을 자처하며 대군을 남하시켰지만, 오나라는 이를 자국 영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익주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위군에 대비했다. 위나라는 오나라에 인질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삼면에서 오나라를 공격했다(유수구 전투). 유비는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촉나라에서 강릉으로 원군을 보내는 것을 제안했지만, 육손은 오나라와 촉나라의 국교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촉군은 패배로 지쳐 국력 회복에 힘써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며 이를 거절했다.[89] 그러나 이로 인해 오나라와 촉나라의 동맹 관계는 회복되었고, 유비 사후 위나라에 대한 동맹 관계가 재개되었다.
223년에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하고, 그 뒤를 유선이 계승했으며, 국사는 제갈량에게 모두 위임되었다.
4. 2. 오나라와 촉한의 동맹 재건
유비는 223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했다.[64] 유비 사후, 제갈량은 권력을 장악하여 오나라와 평화를 맺고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오-촉 동맹을 재건했다.[65] 등지를 사신으로 보내 오나라와 다시 국교를 수복하였다.한편, 손권이 역으로 촉을 침공할 것으로 예상한 조비는 손권과의 우호를 일방적으로 깨고 조인, 조휴, 조진, 하후상 등에게 명령해 손권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촉군을 대파한 뒤 본국으로 되돌아와 이미 위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손권에게 오히려 역습당해 패배했다. 위나라의 침공은 후에 손권의 오나라가 촉과 제휴하는 데에만 일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릉 대전을 끝으로 오나라와 촉한은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촉한이 멸망할 때 오나라에서 정봉을 파견해 촉한의 멸망을 막으려고 했지만 정봉이 촉한의 수도인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촉한은 이미 멸망한 이후였다. 이릉 전투로 확정된 오와 촉 양국의 경계는 263년 촉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4. 3. 위나라의 오나라 침공
223년, 조비는 손권이 촉을 침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손권과의 우호를 일방적으로 깨고 조인, 조휴, 조진, 하후상 등에게 명령해 손권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촉군을 대파한 뒤 본국으로 돌아와 이미 위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손권에게 오히려 역습당해 패배했다. 조휴는 서성에게, 조진과 하후상은 반장에게 각각 패했다.[89]위나라의 침공은 훗날 손권의 오나라가 촉과 제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유선이 촉한의 제2대 황제가 되었으며, 사신 등지를 보내 손권이 세운 오나라와 다시 국교를 수복하였다.
5. 양군의 전력
육손전(陸遜傳)에는 이 전투에 참가한 손권의 병력이 5만 명, 촉군은 "대군"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23] 위서 문제기(魏書 文帝記)의 주(註)에 나오는 222년 2월 8일자 손권의 상소문에 의하면 "유비는 4만 병력과 2천-3천 군마를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선주전(先主傳)에는 "222년 정월, 유비는 자귀에 주둔하고, 오반과 진식 등은 수군을 이끌고 이릉에 진을 쳤다", "2월에 선주(先主)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자귀를 떠나 효정으로 진격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촉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오주전(吳主傳)에는 "죽거나 투항한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고 적혀 있고 육손전에도 촉군 전사자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유엽전(劉曄傳)의 주(註) 부자(傅子)에는 "육의(陸議, 육손)의 군사는 8만여 명을 죽였다"라고 나와 있다.[23]
정사 삼국지 위서(魏書)에는 촉한 정규군 병력 규모를 4만 2~3천, 오서(吳書)에서는 4만 6천이라 적고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4만여 명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황권이 거느렸던 '부장급 장수만 100명이 넘는' 대병단(大兵團)과 오반, 진식의 수군(水軍)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유비 본대의 숫자만을 파악한 규모'이므로 이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와 동시대 인물인 서진(西晉)의 학자 부현(傅玄)이 저술한 부자(傅子)에서는 이릉 대전(효정 전투) 당시 사망한 촉한군의 규모를 8만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 수천에서 1만 이상에 달하는 형주 호족 군세와 수만 명에 달하는 오계(웅계, 만계, 유계, 무계, 진계)의 무릉만이 같은 비정규 군세까지 합치면 촉한이 스스로 10만 대군이라고 자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규모가 된다.
중국 삼국시대 당시 10만 이상의 병력 동원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5. 1. 촉한군
군의 총병력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2] 유비 본대 외에도 황권이 지휘하는 별동대와 오반, 진식의 수군 등이 있었다.[26][24][59] 형주 호족 군세와 무릉만이 등 비정규 군세도 참전했다.정사 삼국지 위서(魏書)에는 촉한 정규군 병력 규모를 4만 2~3천,[32] 오서(吳書)에서는 4만 6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에서는 4만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황권이 거느렸던 '부장급 장수만 100명이 넘는' 대병단(大兵團)과 오반, 진식의 수군(水軍)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유비 본대의 숫자만을 파악한 규모' 이니 이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부자(傅子)에서는 이릉 대전 당시 사망한 촉한군의 규모를 8만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 수천에서 1만 이상에 달하는 형주 호족 군세와 수만 명에 달하는 오계(웅계, 만계, 유계, 무계, 진계)의 무릉만이 같은 비정규 군세까지 합치면 촉한이 스스로 10만 대군이라고 자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규모가 된다. 중국 삼국시대 당시 10만 이상의 병력 동원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직책 | 이름 | 비고 |
---|---|---|
촉한 황제 | 유비 | [32] |
대도독 | 풍습 | 전사[54] |
선봉 | 장남 | 전사[54] |
별독 | 부광 | [32] |
별독 | 조융 () | [32] |
별독 | 요화 | [19] |
별독 | 부융 | 전사[54] |
시중 | 마량 | 전사[25] |
아문장 | 상총 (向寵중국어) | [44] |
별가종사 | 이초 | [69] |
종사제주 | 정기 | 전사[55] |
오반 | [26] | |
진식 | [26] | |
왕부 | 전사[41] | |
두로 (杜路중국어) | ||
유녕 () | -- 항복[42] | |
북방을 지키는 장군 | 황권 | [24][59] |
본부 사무실 보좌관 | 방림 | [60] |
5. 2. 오나라군
육손에 따르면 이 전투에 참가한 손권의 병력은 5만 명이었다.[23] 이릉 대전에 참전한 오나라 장수 목록은 다음과 같다.직책 | 이름 |
---|---|
대도독 | 육손[23] |
소무장군 | 주연[38] |
진위장군 | 반장[39] |
편장군 | 한당[20] |
건무장군 | 서성[21] |
안동중랑장 | 손환[46] |
건충중랑장 | 낙통[66] |
송겸[40] | |
선우단[23] | |
이이[48] | |
유아[48] | |
강이[67] |
221년 7월, 유비는 형주를 되찾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유비와 화친을 시도했지만, 유비는 분노하여 거절했다. 이에 손권은 관우 토벌에 공을 세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전군 지휘와 방어를 맡겼다.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하여 육손, 이이, 유아 등이 방어하던 무성과 자귀성을 연이어 공격하여 격파하고, 단기간에 자귀현까지 점령했다.[87]
오나라 장수들은 육손이 실전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의심했지만, 육손은 형주 남부 점령에서 여몽을 대신하여 실무를 담당한 경험이 있었다. 유비는 본대를 지휘하여 자귀에 주둔하고, 오반과 진식에게 수군 지휘를 맡겨 이릉으로 먼저 보냈다. 이 수군은 미끼였고, 유비는 육지로 진격했지만, 육손은 이 계략을 간파했다.
222년, 유비는 더욱 병력을 진격시켰다. 황권은 후퇴가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병사 지휘를 맡고 유비는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지만, 유비는 장강 북안 전선을 황권에게 맡기고 수군을 철수시켜 장강을 건너 선봉은 이도까지 진격하여 손환을 포위했다. 손환은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육손은 "촉군을 격파할 계략이 있으니 참아야 한다"며 구원을 보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육손의 본대는 삼협 내 모든 거점을 잃고 강릉만 남아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유비는 효정까지 진격하고, 마량을 무릉에 파견하여 이민족을 회유했으며, 이에 무릉만 사마가 등이 호응했다.
같은 해 6월, 육손은 촉군 진영이 화공에 취약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한밤중에 수상을 급행하여 총공격을 개시, 40개 이상의 진영을 함락시켰다. 오나라 장수들은 처음에는 육손을 불신했지만, 이 승리로 인해 육손을 신뢰하게 되었고, 궁지에서 벗어난 손환도 육손의 지략에 감탄했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이릉 전투
221년 유비가 촉한의 황제에 오른 후, 장비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제갈량과 조운 등 여러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유비는 손권 공격을 강행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실제로는 이릉 대전 이전에 사망한 황충, 감녕 등의 장수들이 이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예를 들어 황충은 마충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사망하고, 감녕은 만왕 사마가의 화살에 맞아 숨지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관흥, 장포 등 젊은 장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관흥은 반장을 죽이고 청룡언월도를 되찾고, 장포는 장비를 살해한 범강과 장달을 참살한다.
미방과 부사인이 마충을 죽이고 항복하지만, 유비의 분노로 처형당한다.
육손은 제갈량이 설치한 팔진도에 갇혔다가 황승언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유비가 지휘하는 촉나라 군대의 병력은 75만으로 묘사되어 있다.[56][57][58]
7. 기타
이릉 대전이 벌어진 이릉의 장강은 현재 싼샤 댐이 세워진 곳이며 이 댐은 중국에서 가장 큰 댐이다.[1]
참조
[1]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https://digitalcolle[...]
Faculty of Asian Studi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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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书》:癸亥,孙权上书,说:"刘备支党四万人,马二三千匹,)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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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wyer, p. 20
[4]
문서
(權已據江陵,盡虜羽士衆妻子,羽軍遂散。權遣將逆擊羽,斬羽及子平于臨沮。) ''Sanguozhi'' vol. 36.
[5]
문서
(冬,十月,乙卯,漢帝告祠高廟,使行御史大夫張音持節奉璽綬詔冊,禪位于魏。王三上書辭讓,乃為壇於繁陽,辛未,升壇受璽綬,卽皇帝位,燎祭天地、嶽瀆,改元,大赦。) ''Zizhi Tongjian'' vol. 69.
[6]
문서
(夏,四月,丙午,漢中王卽皇帝位於武擔之南,大赦,改元章武。以諸葛亮為丞相,許靖為司徒。) ''Zizhi Tongjian'' vol. 6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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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安二十五年]冬,魏嗣王稱尊號,改元為黃初。二年四月,劉備稱帝於蜀。) ''Sanguozhi'' vol. 47.
[8]
문서
(孫權自公安徙都鄂,更名鄂曰武昌。) ''Zizhi Tongjian'' vol. 69.
[9]
문서
(八月,孫權遣使稱臣,卑辭奉章,幷送于禁等還。 ... 丁巳,遣太常邢貞奉策卽拜孫權為吳王,加九錫。) ''Zizhi Tongjian'' vol. 69.
[10]
문서
(漢主恥關羽之沒,將擊孫權。) ''Zizhi Tongjian'' vol. 69.
[11]
문서
(孫權襲荊州,先主大怒,欲討權。雲諫曰:「國賊是曹操,非孫權也,且先滅魏,則吳自服。操身雖斃,子丕篡盜,當因衆心,早圖關中,居河、渭上流以討凶逆,關東義士必裹糧策馬以迎王師。不應置魏,先與吳戰;兵勢一交,不得卒解也。」 ... 先主不聽,遂東征,留雲督江州。先主失利於秭歸,雲進兵至永安,吳軍已退。) ''Zhao Yun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6.
[12]
문서
(益州辟宓為從事祭酒。先主旣稱尊號,將東征吳,宓陳天時必無其利,坐下獄幽閉,然後貸出。) ''Sanguozhi'' vol. 38.
[13]
문서
(先主伐吳,飛當率兵萬人,自閬中會江州。臨發,其帳下將張達、范彊殺飛,持其首,順流而奔孫權。飛營都督表報先主,先主聞飛都督之有表也,曰:「噫!飛死矣。」) ''Sanguozhi'' vol. 36.
[14]
문서
(秋,七月,漢主自率諸軍擊孫權,權遣使求和於漢。) ''Zizhi Tongjian'' vol. 69.
[15]
문서
(瑾與備牋曰:「奄聞旗鼓來至白帝,或恐議臣以吳王侵取此州,危害關羽,怨深禍大,不宜荅和,此用心於小,未留意於大者也。試為陛下論其輕重,及其大小。陛下若抑威損忿,蹔省瑾言者,計可立決,不復咨之於羣后也。陛下以關羽之親何如先帝?荊州大小孰與海內?俱應仇疾,誰當先後?若審此數,易於反掌。」) ''Sanguozhi'' vol. 52.
[16]
문서
(漢主不聽。) ''Zizhi Tongjian'' vol. 69.
[17]
문서
([秋,七月, ...] 漢主遣將軍吳班、馮習攻破權將李異、劉阿等於巫,進兵秭歸,兵四萬餘人。武陵蠻夷皆遣使往請兵。) ''Zizhi Tongjian'' vol. 69.
[18]
문서
(初,先主忿孫權之襲關羽,將東征,秋七月,遂帥諸軍伐吳。孫權遣書請和,先主盛怒不許,吳將陸議、李異、劉阿等屯巫、秭歸;將軍吳班、馮習自巫攻破異等,軍次秭歸,武陵五谿蠻夷遣使請兵。) ''Sanguozhi'' vol. 32.
[19]
문서
(為前將軍關羽主簿,羽敗,屬吳。思歸先主,乃詐死,時人謂為信然,因携持老母晝夜西行。會先主東征,遇於秭歸。先主大恱,以化為宜都太守。) ''Sanguozhi'' vol. 45.
[20]
문서
(... 遷偏將軍,領永昌太守。宜都之役,與陸遜、朱然等共攻蜀軍於涿鄉,大破之,徙威烈將軍,封都亭侯。) ''Sanguozhi'' vol. 55.
[21]
문서
(後遷建武將軍,封都亭侯,領廬江太守,賜臨城縣為奉邑。劉備次西陵,盛攻取諸屯,所向有功。) ''Sanguozhi'' vol. 55.
[22]
문서
([秋,七月, ...] 權以鎮西將軍陸遜為大都督、假節,督將軍朱然、潘璋、宋謙、韓當、徐盛、鮮于丹、孫桓等五萬人拒之。) ''Zizhi Tongjian'' vol. 69.
[23]
문서
(黃武元年,劉備率大衆來向西界,權命遜為大都督、假節,督朱然、潘璋、宋謙、韓當、徐盛、鮮于丹、孫桓等五萬人拒之。) ''Sanguozhi'' vol. 58.
[24]
문서
(及稱尊號,將東伐吳,權諫曰:「吳人悍戰,又水軍順流,進易退難,臣請為先驅以甞寇,陛下宜為後鎮。」先主不從,以權為鎮北將軍,督江北軍以防魏師;先主自在江南。) ''Sanguozhi'' vol. 43.
[25]
문서
(先主稱尊號,以良為侍中。及東征吳,遣良入武陵招納五溪蠻夷,蠻夷渠帥皆受印號,咸如意指。會先主敗績於夷陵,良亦遇害。) ''Sanguozhi'' vol. 39.
[26]
문서
(二年春正月,先主軍還秭歸,將軍吳班、陳式水軍屯夷陵,夾江東西岸。二月,先主自秭歸率諸將進軍,緣山截嶺,於夷道猇亭駐營,自佷山通武陵,遣侍中馬良安慰五谿蠻夷,咸相率響應。) ''Sanguozhi'' vol. 32.
[27]
문서
(隲因承制遣使宣恩撫納,是加拜平戎將軍,封廣信侯。 ... 會劉備東下,武陵蠻夷蠢動,權遂命隲上益陽。備旣敗績,而零、桂諸郡猶相驚擾,處處阻兵;隲周旋征討,皆平之。) ''Sanguozhi'' vol. 52.
[28]
문서
(吳書曰:諸將並欲迎擊備, ...)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8.
[29]
문서
(... 遜以為不可,曰:「備舉軍東下,銳氣始盛,且乘高守險,難可卒攻,攻之縱下,猶難盡克,若有不利,損我大勢,非小故也。今但且獎厲將士,廣施方略,以觀其變。若此間是平原曠野,當恐有顛沛交馳之憂,今緣山行軍,勢不得展,自當罷於木石之間,徐制其弊耳。」)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8.
[30]
문서
(諸將不解,以為遜畏之,各懷憤恨。)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8.
[31]
문서
(漢人自巫峽建平連營至夷陵界,立數十屯,以馮習為大督,張南為前部督,自正月與吳相拒,至六月不決。) ''Zizhi Tongjian'' vol. 69.
[32]
문서
(備從巫峽、建平、連平、連圍至夷陵界,立數十屯,以金錦爵賞誘動諸夷,使將軍馮習為大督,張南為前部,輔匡、趙融、廖淳、傅肜等各為別督,先遣吳班將數千人於平地立營,欲以挑戰。) ''Sanguozhi'' vol. 58.
[33]
문서
(諸將皆欲擊之,遜曰:「此必有譎,且觀之。」) ''Sanguozhi'' vol. 58.
[34]
문서
(備知其計不可,乃引伏兵八千,從谷中出。遜曰:「所以不聽諸君擊班者,揣之必有巧故也。」遜上疏曰:「夷陵要害,國之關限,雖為易得,亦復易失。失之非徒損一郡之地,荊州可憂。今日爭之,當令必諧。備干天常,不守窟穴,而敢自送。臣雖不材,憑奉威靈,以順討逆,破壞在近。尋備前後行軍,多敗少成,推此論之,不足為戚。臣初嫌之,水陸俱進,今反舍船就步,處處結營,察其布置,必無他變。伏願至尊高枕,不以為念也。」) ''Sanguozhi'' vol.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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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將並曰:「攻備當在初,今乃令入五六百里,相銜持經七八月,其諸要害皆以固守,擊之必無利矣。」) ''Sanguozhi'' vol.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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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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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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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蜀書 関羽伝、『典略』
[87]
서적
삼국지 蜀書 先主伝 呉将陸議・李異・劉阿等屯巫・秭帰、将軍呉班・馮習自巫攻破異等
[88]
문서
益陽市の市史・伝承によれば、馬良は帰順した異民族を率いて主戦場に向かう途中の益陽県城付近で[[歩騭]]・[[甘寧]]の軍と遭遇し、異民族軍は呉軍に勝利したものの死亡したとされる。この伝承に従えば、馬良は劉備・[[陸遜]]たちの主戦場とは別の場所で死亡したことになる。益陽市の資陽区には「馬良村」「馬良湖(馬良村土地湾組)」など馬良の名を冠する地名が残っている。
[89]
서적
呉録
[90]
문서
부자(傅子)에 사망한 촉한군만 8만 여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91]
문서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릉대전 당시 주력군 4~5만은 대부분 유비가 입촉할 당시 형주에서 데려온 그의 정예병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나머지 사서에 언급되지 않은 4만명(황권이 거느린 '부장급 장수만 100명이 넘는' 대병단, 오반·진식의 수군)은 한중을 제외한 파촉(성도, 재동, 파)에서 새로이 징발한 병력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릉대전(효정 전투) 당시 촉한 정규군 규모는 최소 8만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92]
문서
삼국지 유엽전 배송지주에 촉나라 군사 8만 여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는 수만 명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93]
서적
부자(傅子) - 삼국지|정사(正史) 유엽전(劉曄傳) 배송지주(裴松之註)
[94]
서적
삼국지(正史) 오서(吳書) 육손전(陸遜傳)에는 수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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