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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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부는 신라 지증왕 때부터 진흥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로,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고 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512년 이찬의 지위로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복속시켰으며, 541년에는 병부령을 역임하며 군정을 총괄했다. 562년에는 가야를 정벌하여 가야 연맹을 종식시켰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4세손으로,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가계에 대한 기록이 다르다. 그의 업적을 기려 대한민국 해양 연구 선박의 기함인 이사부호가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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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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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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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이사부 |
한자 | 異斯夫 |
로마자 표기 | Isabu |
인물 정보 | |
시대 | 삼국 시대 |
다른 이름 | 이질부례지, 태종(苔宗), 이종(伊宗) |
관직 | 관등: 이찬(伊湌), 상대등 |
직책 | 실직주군주, 하슬라주군주(何瑟羅州軍主), 병부령 |
주군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가문 | 김씨(혹은 박씨) |
부모 | 소지 마립간+벽아부인 |
배우자 | 지소태후 |
2. 이름
이사부(異斯夫)와 태종(苔宗)이라는 이름은 실제로는 '잇부' 또는 '잇보'와 같이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 '사'(斯)는 사이시옷을 표기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글자이다. '태'(苔)는 '이끼'를 뜻하며 당시 발음인 '잇기'를 통해 우리말 '잇'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종'(宗)은 '울보', '먹보' 등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 '-보' 또는 '-부'를 나타내기 위해 쓰인 글자이다. 또한, '질'(叱) 역시 거의 항상 사이시옷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종'(伊宗)이라는 표기는 '잇보'에서 사이시옷 발음이 약해져 사라진 형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지증왕 6년(505년) 처음 설치된 군주(軍主)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512년에는 이찬(2등 관등)의 지위로 하슬라주(현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 법흥왕 대에는 529년 탁순국 웅천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531년 구례모라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가야 지역에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532년 금관국 병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0]
3. 생애
541년 3월에는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어 신라의 군사 업무 전반을 총괄하였다. 군사적 업적 외에도 545년 7월에는 진흥왕에게 국사 편찬을 건의하여 거칠부 등이 신라 최초의 국사를 편찬하는 데 기여하는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공헌하였다.
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다투던 도살성(현 충청북도 괴산군)과 금현성(현 충청북도 진천군)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신라의 영토를 넓혔고, 이후 고구려 군대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562년 9월에는 신라에 반기를 든 대가야를 토벌하는 군대의 총지휘관(주장)이 되어 부장 사다함과 함께 이를 진압하고 가야를 완전히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3. 1. 가계 배경
그의 가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사서 간의 기록이 달라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는 그가 내물왕의 4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의 성을 박(朴)씨로 기록하고 있다. 사서마다 성씨가 다르게 기록된 또 다른 인물로는 신라의 충신 제상(堤上)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박씨, 《삼국유사》는 김씨로 기록한다. 이는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성씨를 중국식 단성(單姓)으로 표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 이름은 한반도 고유의 방식으로 '이질부례지간기'였을 수 있으며, 박씨나 김씨 같은 단성으로 바꾸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 신라 왕의 성이 단성으로 기록된 것은 진평왕이 최초이다.[11]
한편, 《화랑세기》에는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31805810001&print=Y 아버지가 아진종, 어머니가 보옥공주]로 나온다. 보옥공주는 백제 개로왕의 딸이다.
이사부는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숙명공주를 낳았다. 숙명공주는 진흥왕의 후비가 되었으나, 풍월주 이화랑과 사통하여 궁을 떠났다. 숙명공주는 이화랑과의 사이에서 아들 원광법사와 보리, 딸 화명과 옥명을 낳았다. 궁에 있을 때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정숙은 태자로 봉해졌다가 폐위되었다.
경주김씨 세보(世譜)에 따르면, 이사부는 자비 마립간의 아들이자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 하여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12] 이 역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시기에는 중국식 단성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질부례지간기'라는 본래 이름 대신 김씨로 기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밀양이씨 족보에서는 이사부를 고시조(古始祖)로 삼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과 교류한 수창장군 이재(異載) 역시 성을 '이(異)'로 쓰고 있다.
3. 2. 우산국 정벌 (512년)
지증왕 6년(505년) 실직주(삼척시) 군주(軍主)를 거쳐[13],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강릉시 일대)의 군주가 되었다.[14][4] 당시 우산국(울릉도)은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믿고 신라에 복속되지 않고 있었으며, 때로는 신라 해안 지역을 침범하기도 했다.[4]
하슬라주 군주가 된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고 거칠지만, 지략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무력보다는 계책을 써서 항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나무로 사자상을 많이 만들어 여러 배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으로 가서, "만약 너희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5]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기와 열전 이사부전에 따르면, 우산국 사람들은 이전에 본 적 없는 나무 사자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껴 곧바로 항복하였다.[5][6][7] 이로써 우산국은 512년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한편, 『삼국유사』 기이 지철로왕조(지증왕)에는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14], 이 정벌의 공으로 하슬라주 군주가 되었다고 하여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인다.
3. 3. 가야 정벌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법흥왕 16년(529년)에 이사부는 탁순국(卓淳國)의 웅천(熊川)을 공격하여 가야(가락국) 부흥을 지원하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가 이끄는 왜군을 물리쳤다.[15] 또한 법흥왕 18년(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金官國)은 신라에 항복하며 합병되었다.[17]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는 지증왕 대에 군주(軍主)가 된 이사부가 거도(居道)의 계략을 사용하여 가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10] 거도는 과거 탈해 이사금 시절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정벌할 때, 매년 많은 말을 모아 마상재(馬上才) 훈련을 벌여 이웃 나라 사람들이 신라군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방심하게 만든 뒤 기습하는 계책을 사용한 인물이다. 이사부가 이와 같은 기만술을 응용하여 가야 정벌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흥왕 23년(562년) 9월, 대가야(大伽倻)가 신라에 반기를 들자 이사부는 토벌군의 총지휘관(주장)이 되어 참전하였다. 이때 부장 사다함(斯多含) 등의 활약에 힘입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대가야를 완전히 신라 영토로 편입시켰다.[18] 이 정벌로 가야 연맹은 종식되었다.[8]
3. 4. 고구려와의 전쟁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 지역인 도살성(충청북도 괴산군)과 금현성(충청북도 진천군)을 두고 서로 싸우며 힘이 빠진 틈을 타, 이사부는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두 성을 모두 점령하였다. 그는 점령한 성을 더 튼튼하게 쌓고 갑사(甲士) 1천여 명을 주둔시켜 방어를 강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 군대가 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해왔지만, 이사부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습하여 고구려군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한편, 단양 신라 적성비에 따르면, 이사부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파진찬(波珍飡) 두미(豆彌), 아찬(阿飡) 비차부(比次夫), 김무력(金武力) 등과 함께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여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세력권이었던 지역으로 신라가 영토를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3. 5. 가야 정벌 관련 논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가 부장인 사다함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18] 그러나 이사부는 이미 지증왕 6년(505년)부터 활동하며 512년에는 우산국을 복속시켰고, 법흥왕 19년(532년)에는 금관국(금관가야)을 멸망(병합)시킨 기록도 존재한다.[10] 만약 지증왕 때 이미 가야의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이 신라에 복속되었다면, 532년까지 금관국이 존속했다는 점이나 562년에 다시 가야(대가야)가 신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시기적으로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불일치는 이사부가 562년에 정벌한 대상이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금관국과는 다른 세력, 즉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 세력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신라는 여러 가야 소국들을 단계적으로 복속시켜 나갔으며, 562년의 정벌은 그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지증왕 시기 이사부의 활동은 가야 연맹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에 대한 군사적 성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19]
한편, 일본서기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 10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시기를 56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20] 여기서 언급된 임나 10국은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인데, 이들 국가의 구체적인 위치는 현재 명확히 비정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신라의 가야 지역 정벌 활동을 일본 측의 관점에서 '임나'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자비 마립간 | |
어머니 | 희도부인(希道夫人) | |
부인 | 지소태후 | |
아들 | 세종 | 지소태후 소생 |
며느리 | 미실 | 세종의 부인 |
딸 | 숙명공주 | 지소태후 소생 |
사위 | 진흥왕 | 숙명공주의 첫 번째 남편, 이사부에게는 이부오빠 |
외손자 | 정숙태자 | 진흥왕과 숙명공주의 아들, 폐태자 |
사위 | 이화랑 | 숙명공주의 두 번째 남편 |
외손자 | 원광법사 | 이화랑과 숙명공주의 아들 |
외손자 | 보리공 | 이화랑과 숙명공주의 아들 |
외손녀 | 화명 | 이화랑과 숙명공주의 딸 |
외손녀 | 옥명 | 이화랑과 숙명공주의 딸 |
5. 이사부가 등장한 작품
6. 기타
대한민국의 해양 연구 선박 기함인 '이사부'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이름 때문에 일본 정부는 자국 국립해사연구소 연구원들에게 해당 선박과 관련된 협력이나 항해 참여를 금지하도록 지시했다.[9]
참조
[1]
서적
신라 중고기의 장수 이사부고
삼척시·강원도민일보·(재)해양문화재단
2008
[2]
논문
A Study on the Legality of the Conquest over Usanguk by General Isabu of Shilla in International Law
2010
[3]
문서
Isabu
[4]
논문
Biography of Isabu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his activities
2010
[5]
논문
Biography of Isabu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his activities
2010
[6]
논문
A Study on the Legality of the Conquest over Usanguk by General Isabu of Shilla in International Law
2010
[7]
뉴스
General Isabu of Silla Kingdom Incorporated Dokdo into Korean History
https://world.kbs.co[...]
2011-12-29
[8]
논문
Biography of Isabu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his activities
2010
[9]
웹사이트
Marine scientists allege Japan has blocked researchers from joining South Korean ship
http://www.nature.co[...]
2017-09-19
[10]
문서
異斯夫が伽耶を滅ぼした記事について、『三国史記』列伝・異斯夫伝では[[智証麻立干]]時代(在位:500年 - 514年)のことと記しているが、新羅本紀・法興王紀には[[法興王]]19年([[532年]])に[[伽耶#金官国(駕洛国)|金官国]]の王[[金仇亥]]が新羅に投降してきたとしている。
[11]
문서
《책부원귀(冊府元龜)》는 법흥왕의 이름을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기록한다.《구당서》 권1 본기 제1 고조 7년(624), "봄 정월 기유(己酉)에 고려왕 고무(高武)를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백제왕 부여장(扶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하였다(七年春正月己酉 封高麗王高武爲遼東郡王 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 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
[12]
문서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면 내물왕의 3세손이 된다.
[13]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6년(505), "봄 2월 왕이 친히 나라안의 주와 군,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六年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
[14]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로 조공하였다. 우산국은 명주(하슬라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험준한 지형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엄으로 오게 만들기는 어렵고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무로 허수아비 [[산예|사자]]를 여럿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장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十三年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15]
문서
《일본서기》 계체 23년(529), "이에 신라는 상신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이사부)로 바꾸어 보냈는데 (신라에서는 대신을 상신이라고 한다) (어떤 책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도 한다) 3천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毛野臣: 오미노 케누)이 병사 수천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웅천에서 나와 임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다다라 평야에 머물며 삼가 석 달을 기다려 칙을 듣고자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병졸들이 취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모야신의 종자 하내마사수어수(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어수는 다른 문에 들어가 숨어 걸식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멀리서 주먹을 날렸다. 걸식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을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보이려 하지 않고 칙지를 들으려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상신을 죽이고자 함이로다.라 하였다. 그리고 본 바를 낱낱이 상신에게 알렸다. 상신은 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 4개 마을을 약탈했다. 어떤 책은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 4개 마을이라 한다(由是 新羅 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 新羅以大臣爲上臣 一本云 伊叱夫禮知奈末 率衆三千 來請聽勅 毛野臣 遙見兵仗圍繞衆數千人 自熊川入任那己叱己利城 伊叱夫禮智干岐 次于多々羅原 不敬歸待三月 頻請聞勅 終不肯宣 伊叱夫禮智所將士卒等 於聚落乞食 相過毛野臣傔人河內馬飼首御狩 御狩 入隱他門 待乞者過 捲手遙擊 乞者見云 謹待三月 佇聞勅旨 尚不肯宣 惱聽勅使 乃知欺誑誅戮上臣矣 乃以所見 具述上臣 上臣抄掠四村 金官 背伐 安多 委陀 是爲四村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爲四村也)."
[16]
문서
《삼국사기》 열전 제 4 이사부, "이사부는 태종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김씨고 내물왕 4세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시절 변경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居道)의 계략을 답습하여 마희(말馬놀이)로써 가야국을 속여 취하였다(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國取之)."
[17]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첫째 노종, 둘째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18]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토벌케 하고 사다함이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인솔해 도착하니 일시에 항복하였다(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
[19]
서적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
문서
《일본서기》 흠명 23년(562),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요, 개별적으로는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으로 모두 열 나라이다(卄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合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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