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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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산보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거, 호는 명곡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그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명나라 군대를 참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기근 시기에는 백성 구휼에 헌신하다가 과로로 사망하였으며, 사후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충절과 백성을 위한 헌신은 후대에 높이 평가받아 화암서원과 건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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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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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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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평창 이씨 |
자 | 돈숙(敦叔) |
호 | 묵재(默齋) 동강(東岡) 우휴옹(又休翁) |
출생 | 1416년(태종 16년) |
사망 | 1468년 9월 27일 (음력 9월 9일)(예종 즉위년) |
관력 | |
주요 관직 | 집현전 학사 사헌부 감찰 성균관 주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변(李忭) |
어머니 | 정부인 남양 홍씨 |
부인 | 정부인 안동 김씨 |
아들 | 이종준(李宗準) |
사후 | |
증직 | 이조판서 |
시호 | 문정(文靖) |
문묘 배향 | 평창군 노론 선현 향사 |
2. 이력
1539년(중종 34)부터 1594년(선조 27)까지 생존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해미현감, 사간원 정언, 성균관 전적 등을 지내고 북도 순안어사로 파견되었다.[1] 그 뒤 홍문관 직책을 지내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고 종부시정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와 대사간 등을 지냈다.
1585년(선조 18) 이이·정철을 논박한 부제학 김우옹을 반박하여 선조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 되었다.[1] 그러나 이이·정철·박순 등의 공을 논하다가 경상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 (기축옥사)을 대사간으로서 다스렸고, 1590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건저문제)로 동인과 서인 간 분쟁이 일어나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자,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연루되어 파직되었다.[1]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군량 조달을 위해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로 나갔다.[1] 좌참찬을 거쳐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다 사망했다.[1]
1604년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한흥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14년(광해군 6)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 1. 가문 및 출생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이다. 이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다. 어머니는 김제군수 구승유(능성 구씨 낭장공파)의 딸이다.[1]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출신으로,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고만산에 묘역이 있다.2. 2. 관직 생활 초기 (1568년 ~ 1589년)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해미현감, 사간원 정언,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북도 순안어사로 파견되어 북도를 순찰하고 돌아왔다.[1] 이후 수찬, 교리, 지평, 헌납,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1577년 양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인, 집의, 사간, 응교, 직제학 등을 지냈다.[1]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종부시정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하였고, 이어 동부승지, 대사간, 우승지를 지냈다.[1]
1585년 부제학 김우옹이 이이, 정철이 행한 일을 논박하는 것을 반박하자, 선조는 그의 충절을 크게 칭찬하여 대사헌으로 특진시켰다.[1] 뒤에 이이, 박순, 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경상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1]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였다.[1]
2. 3. 기축옥사 (1589년)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산보는 대사간으로서 사건 수습을 맡았다.[1] 그는 선비로서 과격하고 변심이 많은 정여립을 비판하고, 그의 모의를 사전에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정여립은 전라도 선비로, 처음에는 이율곡 문하에서 명망을 얻었으나, 이이가 죽은 후 동인 편에 붙어 이이를 비난하며 출세를 꾀했다. 선조는 정여립의 행실을 알고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정여립은 전주에 은거하며 조정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진안 죽도에서 자살했다.2. 4. 명나라 파견 (1590년)
1589년 기축옥사를 수습한 뒤, 1590년 이산보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1]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이었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산보는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1]2. 5. 건저문제와 파직 (1591년)
1591년(선조 24년) 조선 선조 때 왕세자 책봉 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게 되었는데, 당시 황해도관찰사였던 이산보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1] 그는 파직된 후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2. 6.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1592년 ~ 1594년)
1591년 정여립 모반 사건과 정철 등 서인이 연루된 건저문제로 황해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다.[1]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1] 이후 이조참판에 제수되었고, 곧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1]명나라 군대가 요동에 머물며 진군하지 않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설득하여 조선으로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이후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가 되어 군량 조달에 힘썼으며,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군량 조달을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다.[1]
2. 7. 최후 (1594년)
명나라 군대가 요동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이산보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설득하여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군량 조달을 위해 북도와 삼남지방의 도검찰사로 나갔는데, 과거 이산보의 선정에 감복한 도민들이 적극 협조하여 무사히 해결하였다.[1]1594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동궁(왕세자)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백성 구휼에 힘썼다. 이산보는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살자"라는 신념으로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했고, 쌀을 땅속에 파묻어 두었던 사람들까지 곡식을 꺼내 나누어 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이산보 자신은 과로로 쓰러져 병사하였고, 한 나라의 판서가 가뭄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가 애통해했다.[1]
3. 사후 추증 및 평가
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1604년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한흥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1614년에는 위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소박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이익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데 힘썼다. 나라의 정치의 옳고 그름은 백성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며, 강한 군대와 훌륭한 정치가 있어도 백성이 굶주리면 잘못된 정치라고 강조했다.
는 가난을 타고난 사람은 없다고 말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으며, 임진왜란과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다 과로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그의 헌신은 백성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사후 보령의 화암서원, 서천의 건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의 묘역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고만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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