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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야마 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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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야마 혼간지는 1496년 렌뇨가 오사카에 건설을 시작한 요새화된 사찰로, 이후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 파괴된 후 본산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쇼뇨 시대에 요새화된 성곽 도시 형태를 갖추었으며, 겐뇨 시대에는 서일본과 호쿠리쿠 지역의 잇코슈 신도 세력이 확대되었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시야마 전투는 11년간 지속되었으며, 1580년 고요제이 천황의 칙령에 따라 화의가 성립되면서 겐뇨가 퇴거하고 사찰 도시가 불타 없어졌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해자, 토루, 담 등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으며, 오사카 평야의 사찰 도시 네트워크인 "오사카나미" 체제를 통해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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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카시의 절 - 시텐노지
    시텐노지는 쇼토쿠 태자가 6세기에 창건한 오사카의 불교 사찰로, 소가씨와 모노베씨 갈등 설화와 함께 재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사천왕사식 가람 배치, 국보 및 문화재, 사가원 운영, 만등 공양 등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이시야마 혼간지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이시야마 혼간지 (石山本願寺)
다른 이름오사카 혼간지 (大坂本願寺)
이시야마 혼간지 성 (石山本願寺城)
오사카 고보 (大坂御坊)
이시야마 고보 (石山御坊)
이시야마 혼간지의 모형. 현재 오사카 성이 이 위치에 서 있다.
이시야마 혼간지의 모형. 현재 오사카 성이 이 위치에 서 있다.
위치오사카
좌표34.684295, 135.524889
종류일본의 요새화된 불교 사원
소속잇코잇키
상태현존하지 않음
건축 시기1496년
건축가잇코 종파
사용 기간1532년 - 1580년
재료나무, 돌
철거1580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전투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1576년-1580년)
과거 사령관렌뇨 (창건자), 고사 (마지막 주지)
상세 정보
소재지셋쓰국히가시나리 군 이쿠타마 쇼 오사카
종지정토진종
종파정토진종 혼간지파, 신슈 오타니파
사격본산
창건 연도덴분 2년 (1533년)
개산쇼뇨

2. 연혁

우에노마치 대지 북단에 위치한 이시야마 혼간지는 요도강과 옛 야마토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세토나이카이의 수운과 스미요시, 사카이, 기슈로 향하는 육상교통의 기점인 와타나베 나루가 형성되어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 렌뇨의 처소에서 시작된 이시야마 혼간지는 점차 확장되어 사원 안 마을을 형성했고, 이 마을은 나지막한 고개에 위치하여 고사카(小坂)로 불리다가 나중에 오사카(大坂)로 불리게 되었다. 1498년부터 오사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렌뇨를 숭배하는 신도들이 몰려들면서 야마시나 혼간지의 권위가 위축되자, 1504년 렌뇨의 후계자 지쓰뇨는 이시야마 신도를 탄압했다. 이를 '오사카이치란(大坂一乱)' 또는 '가와치노쿠니사쿠란(河内国錯乱)'이라고 한다.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 롯카쿠 씨와 법화종 신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이시야마 혼간지는 본산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센고쿠 시대 말기에는 성벽을 둘러 요새화되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이시야마 전투에서는 농성전을 벌였다. 1580년 주지 겐뇨가 노부나가와 화친했지만, 겐뇨의 장남 교뇨는 농성을 계속했다. 결국 오기마치 천왕의 칙령에 따라 기이 사기노모리 베쓰인(鷺森別院)으로 거처를 옮겼고,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이시야마 혼간지 건립 이전에는 고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 1. 오사카 고보 시대

1496년 렌뇨가 오사카에 오사카 고보(大坂御坊, 오사카 어당)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497년, 사카이 등 각지의 문도(門徒)들의 원조를 받아 상량식을 거행하고, 총돌담 문어문(惣石垣の門)이 완성되어 요새화된 사원이 되었다. 오사카라는 지명은 149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7] 렌뇨를 숭배하는 신도가 많이 몰려들어 야마시나 혼간지의 권위가 위축되었다.

1504년, 렌뇨의 후계자 지쓰뇨는 이시야마 신도를 탄압했다. 이를 「오사카이치란(大坂一乱)」또는 이시야마 신도 중에 가와치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가와치노쿠니사쿠란(河内国錯乱)」이라고 한다.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 롯카쿠 씨와 법화종 신도들에 의해 파괴된 후, 이시야마 혼간지가 본산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된다.

2. 2. 이시야마 혼간지 시대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 롯카쿠 씨와 법화종 신도들에 의해 파괴된 후, 이시야마 혼간지는 본산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덴분 2년(1533년), 야마시나 혼간지에서 조상(祖像)을 옮겨와 진좌(鎭座)하면서 이시야마 혼간지 시대가 시작되었다.[7]

이 기간 동안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혼간지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기자와 나가마사나 미요시 나가요시 등이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에 가담했다. 혼간지에서는 보관인 시모쓰마 요리모리가 지휘를 맡아 기이의 잇코 문도들에게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다. 덴분 4년(1535년), 야마시나 혼간지 전투 후 약 4년 만에 화의가 성립되었고, 시모쓰마 요리모리는 잇키(一揆)를 선동한 죄로 추방된 후 암살당했다.

혼간지는 사령을 확대하고 성곽 기술자를 모아 해자, 도이[5], 담 등을 설치하여 사찰 도시(寺内町)로서 방비를 강화했다. 쇼뇨(証如) 시대에 이미 요새화된 성곽 도시 형태를 갖추었다.

혼간지는 매년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말사전을 지불하고, 호안지로부터 부지를 매입할 때는 호안사에 금전을 지불했다. 혼간지 경내 자체가 쇼코쿠지 탑두 료온인(鹿苑院)의 소유였으므로, 호안사를 통해 료온인에 지자전을 지불했다.

쇼뇨에서 겐뇨 시대로 넘어가면서 서일본, 호쿠리쿠 지방의 잇코슈 신도의 세력과 부의 축적이 확대되었다. 예수회 소속 가스파르 빌레라는 1561년 8월의 편지에서 혼간지가 다수의 문도와 그들이 가져다주는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했다.[10][11]

쇼뇨는 중앙 권문, 전국 다이묘 가문과의 외교를 전개했다. 천황, 공가에 접근을 강화하고, 다케다 가문[12], 호조 우지야스호조 우지마사[13] 부자와 친교를 맺었다. 산조 긴요리의 셋째 딸 교코인 뇨슌니를 롯카쿠 요시카타의 양녀로 한 뒤 겐뇨의 정실로 맞아들여 전국 다이묘와 동맹을 맺었다.

2. 3. 이시야마 전투와 폐성

오다 노부나가1568년 혼간지에 야센(矢銭) 5천 관을 요구하고, 1570년 정월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겐뇨는 전국의 문도들에게 이시야마 혼간지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들고 오사카에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1570년 9월 12일, 미요시 산닌슈 군과 오다 군의 전투 중 노부나가 타도를 위해 결기하면서 이시야마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11년간 이시야마 혼간지와 오다 노부나가의 전투는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이시야마 전투 그림 두루마리 제1폭 (세이소지 소장)


이시야마 전투도(모사) (와카야마시립박물관 소장)


1580년 겐뇨가 노부나가와 화친했으나, 겐뇨의 장남 교뇨는 시모즈마 라이류와 함께 농성을 계속했다. 하지만,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에 따른 퇴거를 명받아 기이 사기노모리 베쓰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2. 3. 1. 오다 노부나가의 잇키 평정과 혼간지의 고립

오다 노부나가1573년 8월 20일 이치조다니 성 전투에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9월 1일 오다니 성 전투에서 아사이 나가마사를 멸망시켰다.[14] 이로써 혼간지는 동맹 세력을 잃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잇코 잇키에 대한 섬멸전을 시작하여, 1574년 나가시마 잇코 잇키를, 1575년 에치젠 잇코 잇키를 평정하였다.[14] 이로 인해 혼간지는 점차 궁지에 몰렸고, 같은 해 10월 겐뇨는 노부나가와 일시적으로 화목하였다.[14]

2. 3. 2. 혼간지의 저항과 몰락

오다 노부나가1568년 혼간지에 야센(矢銭) 5천 관을 요구하고, 1570년에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겐뇨는 전국의 문도들에게 이시야마 혼간지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들고 오사카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며 1570년 9월 12일, 노부나가 타도를 외치며 봉기했다. 이로써 이시야마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후 11년간 이시야마 혼간지와 오다 노부나가의 싸움은 전투와 화목을 반복하며 이어졌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사이 나가마사를 멸망시키고, 1574년에는 나가시마 잇코 잇키를, 1575년에는 에치젠 잇코 잇키를 평정하며 혼간지를 압박했다. 1576년 10월, 겐뇨는 일시적으로 노부나가와 화친했으나, 곧 각지의 문도들에게 격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며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14][15]

1576년 5월 7일, 덴노지 요새 전투에서 노부나가 군을 몰아냈지만 패배한 겐뇨는, 노부나가가 오사카 주변에 10개의 부성을 구축하여 병량 공세에 들어가자, 모리구치, 노에, 난바, 키츠 등에 출성(出城)을 구축하고 농성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각지 문도들의 원조가 줄어들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14]

교뇨(教如) 영상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겐뇨의 장남 교뇨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를 통해 모리 데루모토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1576년 7월, 모리 수군은 사이카 슈와 합류하여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에 병량 반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1577년 사이카 슈가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1578년에는 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구키 수군에게 패배하면서 보급로가 끊겨 혹독한 농성전을 치르게 되었다.[14]

고요제이 천황이 명한 칙명 강화


1580년 윤3월 5일, 고요제이 천황의 칙령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4월 9일 겐뇨는 사기모리 별원으로 퇴거했다. 8월 2일, 이시야마 혼간지를 넘겨주고 사이카로 향했다. 겐뇨의 장남 교뇨가 퇴거한 직후 당사(堂舎)와 사찰 도시는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 군의 장기간 공격에도 무력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자리에 오사카 성을 축성했다.

3. 구조

이시야마 혼간지는 해자, 토루, 담 등으로 둘러싸인 환호 성곽 도시였다. 1927년 발행된 『오사카시사(大阪市史)』에는 이시야마 혼간지가 오사카성 혼마루 주변에 있었다고 기록되었으나, 1953년 발행된 『오사카성의 연구(大坂城の研究)』[18]에서는 호엔자카 조성설이 제시되었다. 1977년 발행된 『이시야마 혼간지와 호안사(石山本願寺と法安寺)』에서는 혼마루, 니노마루 주변 설을 확고히 하였고, 『일본 성곽 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소재지 논쟁에 일단락이 지어졌다고 결론 내렸다.[5]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 롯카쿠 씨와 법화종 신도들에 의해 파괴된 후, 이시야마 혼간지는 본산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센고쿠 시대 말기에는 성에 견줄 만큼 견고한 성벽을 둘러 요새화하였으며, 오다 노부나가와의 이시야마 전투에서는 사찰 안에서 농성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시야마 혼간지 추정지 비(오사카성 니노마루)


"요새의 땅을 차지하고,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해자와 토루로 둘러싸여 있어, 과연 당당한 성곽이었다"고 평가받는다.[17]

3. 1. 입지

요도가와하구의 요항 와타나베쓰에 가까운 경승지이자 요충지였다. 북쪽은 요도가와, 동쪽은 야마토 강에 둘러싸인 작은 언덕이었다. 렌뇨의 열 번째 아들 지쓰고가 쓴 『슈슈키(拾麈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다른 테라마치의 예에서도 건설 전의 오사카 고보는 통치되지 않는 한촌 이하의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3. 2. 규모

이시야마 혼간지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오사카 성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三の丸) 정도, 혹은 오사카 성의 80% 정도라는 모호한 표현도 있지만, 사료에 따라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기도 한다.

『노부나가 공기』에는 "사방 8정(약 872m)"이라는 기록이 있다.[13] 반면, 『우노 주스이 일기(宇野主水日記)』에는 "7정(약 545m) × 5정(약 763m)"이라는 기록이[14] 전해진다. 『셋쓰 이시야마 혼간지 사찰 마을의 구성(摂津石山本願寺 寺町の構成)』에서는 『우노 주스이 일기』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성곽 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도 "7정 × 5정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이시야마 혼간지의 추정지는 현재 오사카 성의 니노마루 주변으로 여겨진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보고[15]와 『오사카 이야기』[16]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 성은 이시야마 혼간지의 요새를 답습했다고 한다. 최근 발굴 조사에 따르면, 니노마루 오테몬(大手門) 부근 지표는 거의 성토되지 않고 도요토미 씨 오사카 성의 것을 부분적으로 개수하여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시야마 혼간지의 외호도 어떤 형태로든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시야마 혼간지의 실제 규모를 나타내는 사료는 현존하지 않지만, 『셋쓰 이시야마 혼간지 사찰 마을의 구성』에서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사방 5정여의 규모로 가정했을 때, 『우노 주스이 일기』의 조건을 충족하고, 도쿠가와 시대의 니노마루, 현재의 외호 안쪽의 면적에 거의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3. 3. 사찰 도시 (데라나이마치)

덴분 초기에 시미즈 정(清水町), 기타 정(北町), 니시 정(西町), 미나미 정(南町), 신야시키(新屋敷)의 6개 마을이 있었다. 1535년경에는 히노키야 정(檜物屋町), 아오야 정(青屋町)이, 1541년경에는 조사쿠 정(苧作町), 요코 정(横町)이 추가되었다. 최전성기에는 10개의 마을이 사찰 도시를 이루어 사역(寺域)을 포함한 완전한 영주권을 확보하고, 전국 다이묘에 필적하는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오사카성 북동쪽의 아오야구치(青屋口)・아오야몬(青屋門)은 아오야 정의 흔적이다.[8][9]

이시야마 혼간지는 렌뇨의 처소에서 점차 확장되어, 사원 안 마을을 형성하여 상공업자 등이 자생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 사원 안 마을이 대지의 나지막한 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고사카(小坂)로 불렸고, 나중에 오사카(大坂)로 불리게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과의 항쟁 속에서 혼간지는 사령을 확대하고, 성곽 기술자를 모아 주변에 해자나 토루를 쌓고, 담, 울타리를 둘러 "데라나이마치(寺内町)"로서 방비를 굳혀갔다. 이처럼 이시야마 혼간지는 쇼뇨 시대에 이미 요새화된 성곽 도시로 발전하였다.

석산(石山) 혼간지(本願寺)의 방위군이자 일상적인 경비를 위해 교대로 근무하는 문도는 "번중(番衆)"이라고 불렸다. 번중은 야마시나 혼간지(山科本願寺) 시대부터 제도화되었으며, 석산 혼간지 시대에 더욱 충실해졌다. 당사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어당번중(御堂番衆)"도 있었지만, 경비는 번중이 담당했으며, 석산 혼간지의 "대고번옥(大鼓番屋)" (북)이라고 불리는 장소에 배치되어 평시에도 300명 전후의 병사가 상주했다. 번중은 종주로부터 정초에 인사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며, 활을 가진 활지중(弓持衆), 창을 가진 창지중(鑓持衆), 짐을 진 짐지중(荷持衆)으로 나뉘어 있었다. 평시의 번중은, "사찰 내 마을"이나 근처의 호안사(法安寺)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중재하거나, 토목 공사에도 종사했다.

번중(番衆) 중에는 출신지에서 돈이 송금되어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무기, 무구, 식량 등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사찰 내 마을은 그러한 수요에도 부응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남북조 시대에 미쿠니강(현: 칸자키강)과 오카와(현: 구 요도가와) 사이 지역(나카지마)에는 도검 생산지가 있었으며,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덴노지 주변으로 이주하여 시텐노지에 공사전을 납입했던 기록이 있다. 이들 도공 집단은 이시야마 혼간지와도 유착 관계가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야마 혼간지에 칼과 창을 공급했던 도공 집단은 이시야마 혼간지 멸망과 함께 흩어졌다.

3. 4. 방비

이시야마 혼간지는 농성전이 본격화되면서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울타리와 오중의 역모기를 설치하고 그 안쪽에는 해자, 그 외부에는 총해자(総堀)를 팠으며, 망루를 세워 철포대를 배치했다.[17] 『천문일기』에 따르면, 1541년에는 망루가 상당수 존재하여, 이시야마 혼간지가 성곽으로서의 기초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17]

또한, 이시야마 혼간지는 51개에 달하는 지성을 배치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노부나가 공기』와 『음덕태평기』에는 고즈 성, 마루야마 성, 히로시바 성, 쇼잔 성, 모리구치오모테 성, 다이카이 성, 이마치 성, 나카마무라 성, 시기노 성, 노에 성, 로노키시 성, 쇼만 성, 키즈 성, 나니와 성, 혼조 성이 기록되어 있다. 미쓰데라요새, 에타자키 요새, 덴노지 요새, 소가코 성, 신보리 성 등도 51개 성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51개 성의 전체적인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4. 일상

이시야마 혼간지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과의 항쟁 속에서 사령(寺領)을 확대하고, 성곽 기술자를 모아 주변에 해자와 토루를 쌓는 등 "데라나이마치(寺内町)"로서 방비를 굳혀갔다. 쇼뇨 시대에 이미 견고한 성곽 도시 형태를 갖추었으며,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말사전을 지불하고, 호안지로부터 절 부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현여 시대에는 서일본, 호쿠리쿠 지역의 잇코슈 신도 세력과 부의 축적이 확대되었다.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빌레라는 영록 4년(1561년) 편지에서 "일본의 부의 대부분은 이 승려(혼간지)의 소유"라고 기록할 정도로 많은 문도와 재력을 보유했다.[10]

쇼뇨 시기에는 중앙 권문, 전국 다이묘 가문과의 외교도 활발했다. 천황, 공가와 교류하고, 다케다 가문[12], 호조 우지야스호조 우지마사[13] 부자와 친교를 맺었다. 산조 킨요리의 딸 교코인 뇨슌니를 현여의 정실로 맞아들여 동맹을 강화했다.

철포는 덴분 20년(1551년)에 처음 등장하는데, 쇼뇨의 측근이 기러기 사냥에 사용한 기록이 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사카이나 사이카슈를 통해 철포를 쉽게 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승총 (니신 박물관 소장)

4. 1. 번중 (반슈)

이시야마 전투 배진도(石山合戦配陣図)의 혼간지 부분 확대도/와카야마 시립 박물관 소장


이시야마 혼간지의 방위군이자 일상적인 경비를 위해 교대로 근무하는 문도(門徒)는 "번중(番衆)"이라고 불렸다. 이 제도는 야마시나 혼간지 시대부터 제도화되었으며, 이시야마 혼간지 시대에 더욱 충실해졌다. 당사(堂舎)의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어당번중(御堂番衆)"도 있었지만, 경비는 번중이 담당했으며, 이시야마 혼간지의 "대고번옥(大鼓番屋)" (북)에 배치되어 평시에도 300명 전후의 병사가 상주했다. "북"이라는 명칭에서 사찰 도시의 신호나 시각을 알리는 것도 이들의 임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 창 등의 무기는 스스로 준비하고, 식량도 자비하는 "자병량중(自兵粮衆)", "자반미중(自飯米衆)"이라고 불렸다. 번중은 종주로부터 정초에 인사를 받았으며, 활지중(弓持衆), 창지중(鑓持衆), 짐지중(荷持衆)으로 구분되었다. 가가국(加賀国)에서는 군 규모로 조를 편성하여 교대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가 10인조중(加賀十人組衆)", "가가 이시카와군 요네토미(加賀石川郡米富)", "가와라 10인중(河原十人衆)"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평시의 번중은 사찰 도시나 근처 호안지(法安寺)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중재하거나, 토목 공사에도 종사했다.[8]

4. 2. 칼 장인 집단

칼장인


번중(番衆) 전원이 무기, 무구, 식량을 자급자족한 것은 아니다. 출신지에서 을 송금받아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사찰 내 마을은 이러한 수요에 부응했다. 나카지마 주변에는 남북조 시대에 도검 생산지가 있었으며,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덴노지 주변으로 이주하여 매년 시텐노지에 공사전을 납입했다. 이들 도공 집단은 이시야마 혼간지와도 유착 관계가 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와치국 북부에도 도공 집단이 있었다. 사카이와 그 주변의 도공 집단이 특히 유착 관계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현존하는 작품도 많으며, 작지만 정교하게 단련되어 "마리시텐"이라고 조각된 작품도 있다. 기술적으로는 "야마토 물", "야마시로 물"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시야마 혼간지에 칼과 창을 공급했던 도공 집단은 이시야마 혼간지 멸망과 함께 흩어졌으며, 신도를 전하는 전통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4. 3. 철포 (뎃포)



이시야마 혼간지는 철포를 병기로서 다수 사용했는데, 문헌상 첫 등장은 덴분 20년(1551년) 12월 6일이다. 쇼뇨의 측근이 기러기를 철포로 쏘아 쇼뇨에게 헌상했고, 이시야마 혼간지의 북전에서 기러기국이 제공되었다고 『사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사냥 도구로서 사용된 것이지만, 이시야마 혼간지는 이 시대부터 철포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사카이나 사이카슈를 통해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오사카나미 (大坂並)

이시야마 혼간지는 셋쓰(摂津), 가와치(河内), 이즈미(和泉)의 사찰 도시(寺内町) 네트워크인 "오사카나미(大坂並)" 체제를 통해 지지받았다. 돈다바야시 사찰 도시는 하타케야마 씨 가신(家臣) 야스미 무네후사의 금제(禁制)로 특권이 부여되었는데, 이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사찰 도시와 같은 대우를 인정받은 것이다.

야스미 무네후사의 금제(교토 대학 소장 스기야마 가문 문서)에 따르면, '미사카노카미'는 야스미 무네후사를 가리키며, 금제의 내용은 수호가 부과하는 세금 면제, 상인에 대한 영업세 면제, 채권 채무 무효화 금지, 채권 회수 시스템 보장 등이었다. 이러한 특권은 각 지역의 무가 권력으로부터 획득했으며, 막대한 례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규모 사찰 문전 마을만이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톤다바야시 사내 마을은 규모가 작았지만 "오사카나미"로 이시야마 혼간지와 같은 대우를 인정받아 충실한 특권을 획득했다.

돈다바야시 외에 오사카나미로 불리는 사찰 도시는 다음과 같다.

사찰 도시현재 위치
오토모톤다바야시 시
오오케츠카 사내 마을카난초
츠카구치아마가사키 시
묘지니시노미야 시
코하마다카라즈카 시
톤다타카츠키 시
히라카타히라카타 시
쇼다이히라카타 시
큐호지야오 시
카이즈카카이즈카 시



이들은 현재의 오사카부 아래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위성 사내 마을" 군이었으며, 대부분 톤다바야시 사내 마을과 동등한 특권을 획득했다. 전국 시대에는 오사카 평야에 사내 마을 네트워크가 펼쳐져 정치, 군사, 경제, 종교가 일체화된 사회 체제였다.

이시야마 전투 당시 나가시마 잇코 잇키 무리와 사이카슈 등이 혼간지를 지원했지만, 실제로 병력을 동원한 오사카나미는 에코지와 가이즈카뿐이었다. 돈다바야시 사찰 도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혼간지에 가담하지 않아 특권을 유지했다.

5. 1. 이시야마 전투 이전

렌뇨는 법주를 지츠뇨에게 양보하고 야마시나 혼간지에서 은거했지만, 포교 활동은 계속 활발하게 했다. 1496년에는 오사카에 방사(오사카 어당)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가 되었다. 건설은 사카이의 마치슈, 셋츠, 카와치, 이즈미 등의 문도들의 원조를 받아 이듬해 상량식을 하고, 돌담의 문어문이 완성되어 요새와 같은 사원이 되었다. 렌뇨는 여러 방사를 건설했지만, 그 중에서도 오사카 어당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사찰 주변에 건설된 사내 마을은 현재 오사카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

이곳이 "이시야마"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렌뇨의 손자인 켄세이의 기록에 따르면, 초석으로 사용할 수 있는 큰 돌이 땅 속에 많이 있었다는 불가사의한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후년의 발굴 조사 결과, 오사카성 터 일대는 난바노미야의 비정지이기도 하다.

요시이 카츠노부는 "이시야마"라는 명칭은 이시야마 혼간지가 없어진 후인 에도 시대 이후의 표현이며, "오사카 혼간지"가 당시 사용되던 명칭이라고 주장하는 설[8]을 제창했고, 이를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이시야마 전쟁"을 "오사카 혼간지 전쟁"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9]

렌뇨의 후계자 지츠뇨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하타케야마 요시토요 간의 싸움에서 호소카와 마사모토로부터 참전 요구를 받았다. 1506년 지츠뇨는 문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간지로서 처음으로 참전했다. 이후 혼간지는 무장화되어 무사 세력과의 항쟁이 시작된다.

1532년 카와치 수호대 키자와 나가마사가 수호직을 빼앗으려 하자, 카와치 수호인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이모리야마성을 공격했다. 지츠뇨의 후계 법주 쇼뇨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구원 요청에 응해 오사카 어당에서 문도 2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포위군을 퇴산시켰다(이모리 성의 전투). 잇코잇키는 미요시 모토나가사카이까지 몰아붙여 자결하게 했다. 그러나 하루모토는 잇코잇키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껴 혼간지의 말사와 오사카 어당을 공격했다. 법화 일키 무리와 오미 수호 로쿠카쿠 사다요리에 의해 야마시나 혼간지는 불태워졌다(야마시나 혼간지의 전투).

이때 쇼뇨는 오사카에 있었고, 1533년 조상을 옮겨와 이시야마 혼간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해가 축성 연도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안에도 하루모토와 혼간지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미요시 나가요시 등이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에 가담했다. 혼간지에서는 시모마 요리모리가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기이의 잇코 문도들에게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1535년 양측에서 화의가 성립된다. 시모마 요리모리는 잇키를 선동한 죄로 추방되어 암살당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과의 항쟁 속에서 혼간지는 사령을 확대하고, 성곽 기술자를 모아 주변에 해자나 토루를 쌓고, 담, 울타리를 둘러 "테라나이마치(寺内町)"로서 방비를 굳혀갔다. 이처럼 이시야마 혼간지는 쇼뇨 시대에 이미 요새와 같은 성곽 도시가 되었다. 혼간지는 매년 히에이 산엔랴쿠사에 말사전을 지불하고, 인접한 호안사로부터 절의 부지를 매입했을 때는 호안사에 금전을 지불했다. 혼간지 경내 자체는 쇼코쿠사 탑두 료온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혼간지는 호안사를 통해 료온인에 지자전을 지불했다.

쇼뇨에서 현여의 시대가 되면서, 서일본, 호쿠리쿠 지역의 잇코슈 신도의 세력과 부의 축적도 확대되었다. 예수회 소속 가스파르 빌레라는 1561년 편지에서 "일본의 부의 대부분은 이 승려의 소유"라고 보고할 정도로 혼간지는 많은 문도와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쇼뇨기에는 중앙 권문이나 전국 다이묘 가문으로의 외교도 전개되었다. 천황, 공가에 접근을 강화하고, 다케다 가문[12], 호조 우지야스호조 우지마사[13] 부자와 친교를 맺었다. 산조 킨요리의 셋째 딸 교코인 뇨슌니를 롯카쿠 요시카타,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양녀로 한 뒤 현여의 정실로 맞아들여, 전국 다이묘와 동맹을 맺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셋쓰(摂津), 가와치(河内), 이즈미(和泉)의 사찰 도시(寺内町) 네트워크인 "오사카나미(大坂並)" 체제를 통해 지지받았다. 돈다바야시 사찰 도시는 하타케야마 씨 가신(家臣) 야스미 무네후사의 금제(禁制)로 특권이 부여되었다. 오사카나미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사찰 도시와 같은 대우를 인정받았다.

야스미 무네후사의 금제(교토 대학 소장 스기야마 가문 문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미사카노카미'는 야스미 무네후사를 가리킨다. 금제의 내용은 수호가 부과하는 세금 면제, 상인에 대한 영업세 면제, 채권 채무 무효화 금지, 채권 회수 시스템 보장 등이었다. 이러한 특권은 각 지역의 무가 권력으로부터 획득했으며, 막대한 례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규모 사찰 문전 마을만이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톤다바야시 사내 마을은 규모가 작았지만 "오사카 보통"으로 이시야마 혼간지와 같은 대우를 인정받아 충실한 특권을 획득했다.

돈다바야시 외에 오사카나미로 불리는 사찰 도시는 다음과 같다.

사찰 도시현재 위치
오토모톤다바야시 시
오오케츠카 사내 마을카난초
츠카구치아마가사키 시
묘지니시노미야 시
코하마다카라즈카 시
톤다타카츠키 시
히라카타히라카타 시
쇼다이히라카타 시
큐호지야오 시
카이즈카카이즈카 시



이들은 현재의 오사카부 아래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위성 사내 마을" 군이었으며, 대부분 톤다바야시 사내 마을과 동등한 특권을 획득했다. 전국 시대에는 오사카 평야에 사내 마을 네트워크가 펼쳐져 정치, 군사, 경제, 종교가 일체화된 사회 체제였다.

5. 2. 이시야마 전투 이후

이시야마 전투는 11년간 지속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간의 화목과 전투가 반복되었다. 1573년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사이 나가마사가 멸망하면서 혼간지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잇코 잇키에 대한 섬멸전을 시작하여 나가시마 잇코 잇키(1574년)와 에치젠 잇코 잇키(1575년)를 평정했다. 1576년 겐뇨는 각지의 문도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임전 태세를 갖추었으나,[14][15] 덴노지 요새 전투에서 패배했다. 노부나가는 오사카 주변에 10개의 부성을 축성하여 병량 공세에 들어갔고, 혼간지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14]

교뇨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모리 수군은 사이카 슈와 합류하여 병량 반입에 성공했으나(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 1578년 구키 요시타카의 구키 수군에게 패배하면서(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 보급로가 끊겼다.[14]

1580년 고요제이 천황의 칙령으로 화의가 성립되었고, 겐뇨는 사기모리 별원으로 퇴거했다. 사이카로 퇴거한 직후, 교뇨가 당사와 사찰 도시를 불태웠다는 견해가 다몬인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16] 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 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개성되지 않았는데, 이는 성곽 자체가 난공불락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자리에 오사카 성을 축성하여 이시야마 혼간지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셋쓰, 가와치, 이즈미 국의 사찰 도시들과 "오사카 보통" 체제를 이루며 상호 지지했다. 돈다바야시 사찰 도시는 야스미 무네후사의 금제로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오사카 보통"으로 이시야마 혼간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사카 보통"에 속했던 사찰 도시로는 오토모, 오오케츠카 사찰 도시(가난초), 츠카구치(아마가사키 시), 묘지(니시노미야 시), 고하마(다카라즈카 시), 돈다(타카츠키 시), 히라카타(히라카타 시), 쇼다이(히라카타 시), 규호지(야오 시), 가이즈카(가이즈카 시) 등이 있다. 이들은 오사카 평야에서 정치, 군사, 경제, 종교가 일체화된 사회 체제를 이루었다.

이시야마 전투 당시 나가시마 잇코 잇키 무리와 사이카슈 등이 혼간지를 지원했지만, 실제로 병력을 동원한 오사카나미는 에코지와 가이즈카뿐이었다. 돈다바야시 사찰 도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혼간지에 가담하지 않아 특권을 유지했다.

6. 사원 터 접근

오사카 메트로(다니마치선주오선) 다니마치욘초메역에서 도보 약 15분 거리에 있다. 한신 고속도로 히가시오사카선 호엔자카 출입구를 통해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으며, 오사카성 유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2] 문서 摂津国東成郡生玉荘大坂
[3] 사전 石山本願寺 広辞苑
[4] 논문 戦国・中近世移行期における大坂本願寺の呼称-『石山』表現をめぐって- 法蔵館
[5] 웹사이트 土居 https://kotobank.jp/[...] 大辞林 第三版
[6] 서적 教如上人と東本願寺創立 教学研究所
[7] 문서 大坂の初見 1497-11-25
[8] 논문 戦国・中近世移行期における大坂本願寺の呼称-『石山』表現をめぐって- 法蔵館
[9] 논문 大坂本願寺戦争をめぐる一揆と地域社会 清文堂出版
[10] 문서 祭りとは法会のこと
[11] 서적 教如上人と東本願寺創立 教学研究所
[12] 논문 本山系大寺院外交 校倉書房
[13] 문서 甲相同盟
[14] 서적 教如上人と東本願寺創立 教学研究所
[15] 서적 日本城郭大系
[16] 문서 多聞院日記 三教書院
[17] 서적 新修 大阪市史
[18] 서적 大坂城の研究 大阪市立大学大阪城址研究会
[19] 서적 大坂城の研究 大阪市立大学大阪城址研究会
[20] 웹사이트 中島(中世) https://jlogos.com/d[...]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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