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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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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와쿠라 도모미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정치가이다. 1838년 조정에 출사하여, 1860년 우근위권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862년 조정에서 실각하여 칩거했다. 이후 왕정복고 운동에 참여하여 1868년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태정관을 설립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며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했다.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이후 헌법 제정에도 관여했다. 1883년 인두암으로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업적을 기려 일본은행권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었고, 이와쿠라 철도학교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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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
기본 정보
이름이와쿠라 도모미
한자 표기岩倉 具視
로마자 표기Iwakura Tomomi
출생일1825년 10월 26일
출생지교토, 일본
사망일1883년 7월 20일
사망지도쿄, 일본
사망 원인알 수 없음
안장 장소알 수 없음
알려진 업적메이지 유신 주도
이와쿠라 사절단 이끔
직업정치인
학력알 수 없음
작위종1위
정치 경력
직책제2대 외무경
임기 시작일1871년 8월 29일
임기 종료일1871년 12월 15일
가족 관계
배우자이와쿠라 세이코(선처)
이와쿠라 마키코(후처)
자녀이와쿠라 도모요시(장남)
이와쿠라 도모사다(차남)
이와쿠라 도모쓰네(삼남)
이와쿠라 미치토모(사남)
이와쿠라 마스코(장녀)
이와쿠라 이즈코(차녀)
도다 고쿠코(삼녀)
이와쿠라 하루코(사녀)
요시다 시즈코(오녀)
모리 히로코(육녀)
친척 (정치인)하기와라 가즈모토(조부)
가지이데 쓰네야스(조부)
호리카와 야스치카(부친)
호리카와 노리코(여동생)
이와쿠라 도모요시(양부)
이와쿠라 도모쓰나(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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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사위)
이와쿠라 도모하루(손자)
아리마 요리야스(손자)
사메지마 도모스케(손자)
이와쿠라 도모미쓰(손자)
가메이 히사오키(현손)
가야마 유조(현손)
가메이 아키코(내손)
칭호 및 훈장
칭호증 태정대신
작위증 정1위
훈장대훈위국화대수장
기타
이와쿠라 도모미

2. 경력

이와쿠라 도모미는 교토의 하급 공경 호리카와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나, 1838년 이와쿠라 모토야스의 양자가 되면서 '도모미'라는 이름을 얻었다.[2][33] 1853년 간파쿠 다카쓰카사 마사미치의 가도(歌道) 유파에 들어가면서 조정 수뇌부에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11]

이와쿠라는 조정 개혁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가쿠슈인 확대, 인재 육성, 실력주의 등용을 주장했다.[11]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88명의 공경들과 함께 항의하는 조정 신하 88 공경 열참 사건을 주도했다.[5] 또한, 『神州万歳堅策』을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하여, 미일 전쟁 발발 시 방위 및 재정 정책, 유럽 각국 사절 파견, 미국과의 동맹 가능성, 도쿠가와 쇼군가와의 협력 등을 제안했다.[4]

1858년 이이 나오스케안세이 대옥으로 존황양이파가 탄압받자, 이와쿠라는 조정과 막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교토 쇼시다이 등과 회담하며 막부 측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35]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공무합체파가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추진하자, 이와쿠라는 조약 파기를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성사시켰다.[35]

1862년 존황양이운동이 거세지면서 이와쿠라는 사바쿠파로 몰려 실각하고, 5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36] 칩거 중에도 정치 의견서를 작성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사쓰마 번의 동향에 따라 도막파로 입장을 바꾸었다.[37]

1867년 메이지 천황 즉위 후, 왕정복고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신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39] 고고쇼 회의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 반납을 명하는 결정을 이끌어냈고,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신정부 내에서 더욱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38]

메이지 정부 수립 후, 이와쿠라는 오대 칙서 반포, 폐번치현 등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5]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서구 문물을 시찰하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논의는 실패했다.[4] 귀국 후에는 내정 개혁에 힘쓰며, 정한론에 반대하고 자유민권운동에 대응했다.[5]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이후, 이와쿠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헌법 제정 책임자로 선택하고, 1881년 메이지 14년의 정변을 통해 오쿠마 시게노부를 파면했다. 1882년 이토를 유럽에 파견하여 헌법 조사를 진행하게 했다.

1883년 인두암으로 사망했다. 메이지 천황은 어빈 폰 발츠 의사를 파견했지만, 이와쿠라는 회복하지 못하고 입헌정체 수립을 눈앞에 두고 59세로 사망했다.[4] 1883년 7월 25일에 일본 정부 최초로 국장이 거행되었다.[5]

메이지 천황의 병문안을 받은 이와쿠라(기타 렌조, 메이지 기념 사진관)

2. 1. 유년기 및 청년기

이와쿠라 도모미는 교토에서 공경 호리카와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명은 가네마루였지만, 용모나 언동이 구게(公家, 조정 귀족)답지 않아 구게 자녀들 사이에서는 '이와키치'라고 불렸다.[4] 그는 조정 유학자 후세하라 노부하루에게 유학을 배웠는데, 후세하라는 이와쿠라를 '큰 인물'이라 알아보고 이와쿠라 가에 양자 결연을 추천하였다.[4]

1838년(덴포 9년) 8월 8일, 이와쿠라 모토야스의 양자가 되어 도모미라는 이름을 얻었다.[33] 그해 10월 28일 작위를 받았고, 12월 11일에는 관례를 치르고 궁중 정전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33] 이듬해부터 조정에 출사하여 100섬의 수당을 받았다.

이와쿠라 가는 무라카미 겐지 고가 가의 분가로, 신케라 불리는 하급 구게였다.[5] 가계는 대다수의 구게처럼 유복하지 않았다.[34]

1853년(가에이 6년) 1월, 간파쿠 다카쓰카사 마사미치의 가도(歌道) 유파에 들어갔다. 이는 하급 구게였던 이와쿠라가 조정 수뇌부에 발언할 수 있는 큰 전환기가 되었다.

이와쿠라는 조정 개혁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적립금을 가쿠슈인 확대 및 개혁에 사용하고, 인재 육성과 실력주의 등용을 주장했다. 당시 구게 사회는 신분 제도가 엄격하여 가문별로 관위 승진이 고정되어 있었고, 대다수 하급 구게는 조의(朝議)에 출석할 기회조차 희박했다. 다카쓰카사는 의견서에 공감했지만 즉답은 피했다.[11]

1858년(안세이 5년) 1월, 로주 호리타 마사무츠가 미일수호통상조약 칙허를 얻기 위해 상경했다. 간파쿠 구조 다다타카는 칙허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공경들이 이에 반대했다.

이와쿠라 역시 조약 조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오하라 시게토쿠와 함께 반(反) 구조파 공경들을 결집시켜 3월 12일에는 88명의 공경들이 궁궐에 모여 항의했다. (정신 팔십팔경 열참 사건)

이와쿠라는 조약 체결 반대와 더불어, 미일 전쟁 발발 시 방위 및 재정 정책, 유럽 각국 사절 파견, 미국과의 동맹 가능성, 국내 방위를 위한 도쿠가와 쇼군가와의 협력 등을 담은 정치 의견서 『신슈 만세견책』(神州万歳堅策)을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했다.

2. 2. 정치 활동

가에이 6년(1853년) 음력 1월, 이와쿠라 도모미는 간파쿠 다카쓰카사 마사미치의 가도(歌道) 유파에 들어갔다. 이는 하급 구게였던 이와쿠라가 조정 수뇌부에 발언할 수 있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와쿠라는 조정 개혁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 적립금을 가쿠슈인 확대와 개혁에 사용하고 인재 육성과 실력주의 등용을 주장했다. 당시 구게 사회는 신분 제도가 엄격하여 가문별로 관위 승진이 고정되어 있었고, 대다수 하급 구게는 조의(朝議)에 참석할 기회조차 희박했다. 다카쓰카사는 이와쿠라의 의견에 수긍했지만, 즉답은 회피했다.

이후 이와쿠라는 안세이 대옥, 가즈노미야 혼인 등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조정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존황양이 운동이 거세지면서 이와쿠라는 막부와 조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존황양이파의 압력으로 실각하여 칩거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67년 메이지 천황 즉위 후, 이와쿠라는 왕정복고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신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고쇼 회의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 반납을 명하는 결정을 이끌어냈고,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에는 신정부 내에서 더욱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 이와쿠라는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의 요직을 맡으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오대 칙서 반포, 폐번치현 등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했으며,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서구 문물을 시찰하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귀국 후에는 내정 개혁에 힘쓰며, 정한론에 반대하고 자유민권운동에 대응하는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880년대 경 이와쿠라 도모미

2. 2. 1. 88공경 사건 (1858년)

안세이 5년(1858년) 1월, 로주 홋타 마사요시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칙허를 얻기 위해 상경했다. 간파쿠 구조 히사타다는 칙허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공경과 구게들은 이에 반대했다.

이와쿠라도 조약 조인에 반대했으며, 오하라 시게토미와 함께 반 구조파 구게들을 결집하여 3월 12일, 88명의 공경이 입궐하여 항의했다. 구조 간파쿠는 병을 이유로 입궐을 사퇴했지만, 이와쿠라는 구조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신청했다. 가신들은 병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이와쿠라가 면회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자 간파쿠는 다음날 회답하겠다고 했다. 이와쿠라가 구조 저택에서 물러간 것은 오후 10시가 넘어서였다고 한다. ("조정 신하 88 공경 열참 사건")[5]

3월 20일, 홋타는 고고쇼(小御所)에 불려 고메이 천황을 배알했지만, 천황은 ‘후환이 알 수 없다고 많은 신하가 주장하고 있어 산케, 여러 다이묘와 재차 중론한 후에 말하도록’이라고 전했다. 여기서 '많은 신하'는 이와쿠라 등 반대파 공경을 가리키며, 이들의 반대로 칙허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이와쿠라의 첫 정치 운동이자 승리였다.[5]

이틀 후인 3월 14일, 이와쿠라는 정치 의견서 『神州万歳堅策』을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4]

  • 미일화친조약에는 반대 (개항 장소는 한 군데로 하며, 개항 장소 10리 이내의 자유 이동, 크리스트교 포교는 허가하지 않았다.)
  • 조약을 거절하여 미일 전쟁이 될 경우의 방위 정책, 전시 재정 정책
  • 단순 양이는 부정하며, 상대국의 형세, 풍습, 산물을 알기 위해 구미 각국에 사절 파견을 주장한다.
  • 미국은 장래에 동맹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 국내 일치 방어가 필요하니 도쿠가와 가에는 가이에키하지 않을 것을 전하고, 그 뜻에 따를 것.


이와쿠라는 이 의견서를 통해 다테나 시마즈 등의 도자마 유력 번처럼 막부와 대결하는 상태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는 사쓰마 번의 시대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점을 알 수 있다.

2. 2. 2. 안세이 대옥 (1858년)

1858년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고메이 천황은 이에 격노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계속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과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항의한 도쿠가와 나리아키마쓰다이라 슌가쿠 등은 7월 5일 근신 처분을 받았다. 8월 8일 고메이 천황은 미토 번에 이이 나오스케를 규탄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무오년의 밀칙) 이로 인해 10월 18일 미토 번사 우가이 기치자에몬이 참수되는 등 존황양이파와 히토쓰바시 파에 대한 대탄압인 안세이 대옥이 시작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대옥이 황실과 구게(公家)에까지 확대되어 조정과 막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35] 그는 교토 쇼시다이 사카이 다다아키와 후시미 봉행 나이토 마사쓰나 등과 회담하여 천황의 뜻을 전하고, 조정과 막부의 대립은 국가의 큰 과실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이후 이와쿠라와 사카이는 의기투합하여 친해졌고, 이와쿠라는 막부 측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

2. 2. 3. 가즈노미야 혼인 (1861년)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공무합체파가 막부 내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들은 황족인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추진했다. 고메이 천황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과의 약혼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이와쿠라는 '가즈노미야 혼인에 관한 상신서'를 통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35]

이와쿠라는 상신서에서 이번 혼인이 막부의 권위 회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분석하고, 진정으로 황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조정 중심으로 인심을 모아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적 결정은 조정이, 집행은 막부가 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조약 파기를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메이 천황은 이와쿠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0년 6월 20일 조약 파기와 양이를 조건으로 가즈노미야 혼인을 인정했다. 막부는 이를 수용하여 7월 4일, 7~10년 내에 외교 교섭 또는 무력을 통해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약속했다.

1861년 음력 10월 20일, 가즈노미야는 에도로 향했고, 이와쿠라는 칙사로서 동행했다. 이와쿠라는 에도 성에서 로주들과 면담하며 막부가 가즈노미야를 이용해 천황을 폐위하려 한다는 소문의 진위를 묻고, 로주들은 이를 부인하며 사과했다. 이와쿠라는 더 나아가 쇼군 이에모치의 친필 맹세를 요구했고, 결국 받아냈다. 이는 조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12월 14일 이와쿠라는 에도를 떠나 교토로 돌아왔고, 쇼군 이에모치의 맹서는 지쿠사 아리부미가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했다. 고메이 천황은 이와쿠라의 공로를 치하했다.

2. 2. 4. 실각과 칩거 (1862년 ~ 1867년)

1861년(분큐 원년), 조슈번모리 다카치카는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를 통해 『항해원략책』을 고메이 천황에게 건의했다. 조정 주도의 공무합체, 현실적 개국, 장래 양이를 주장한 이 책은 천황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천황은 조슈 번에게 이 책을 막부에게도 전해 공무 주선을 하도록 명했다. 막부에게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12월 30일에는 모리 다카치카가 에도로 와 조슈 번에 공무주선역을 맡게 된다.

1862년(분큐2년) 4월 7일, 고메이 천황은 여러 신하에게 먼저 막부 로주가 연서로 제출한 10년 후의 양이 결행을 행할 맹세를 공표했다. 만약 약속 기일이 와도 막부가 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천황 자신이 구게와 다이묘를 이끌고 친정(親征)을 실시하여 파약, 양이를 행한다고 선언했다.

4월 10일, 조슈 번에게로의 공무 주선 임명에 위기감을 느낀 사쓰마번시마즈 히사미쓰가 가즈노미야 혼인과 안세이 대옥의 탄압으로 인해 천조(天朝)의 위기가 임박하다며 교토로 들어왔다. 히사미쓰는 천황에게서 교토 수호를 명받아, 교토 쇼시다이는 완전히 유명무실화되었다. 그 후 천황은 안세이 대옥에서 처분받은 사람들의 복귀를 막부에게 명하였고, 막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7월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정사총재직으로 복귀시켰다. 7월 6일에는 조슈 번 교토 저택에 대해 모리 다다치카가 고메이 천황의 비원인 파약 양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다해 주선한다는 양이의 입장을 명확하게 번론(藩論)으로 정하자고 가신들에게 선고하였다.

이처럼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존황양이운동은 각지에서 고조되었다. 이와쿠라는 조정 권위의 고양에 힘썼지만, 결과적으로 가즈노미야 혼인에 찬성하고 교토 쇼시다이 사카이와 친했다는 점에서 존황양이파 지사들로부터 사바쿠파로 인식되었다. 결국 존황파는 이와쿠라를 배척하도록 조정에 압력을 넣게 된다. 공경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는 이와쿠라에게 먼저 고메이 천황의 근시(近習)를 그만두도록 권고했고, 이와쿠라는 이에 따라 7월 24일에 근시직을 물러났다. 하지만 이와쿠라 배척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8월 16일 산조 사네토미, 아네가코지 긴토모 등 13명의 공경이 연명하여 이와쿠라 도모미, 고가 다케미치, 지쿠사 아리부미, 도미노코지 히로나오, 이마키 시게코, 호리카와 노리코 6명을 막부에 아첨하는 ‘4간2빈(四奸二嬪)’으로 탄핵하는 문서를 간파쿠 고노에 다다히로에게 제출한다. 고메이 천황까지 친막(親幕)파라고 의심하여 8월 20일에 칩거처분, 관직 사퇴와 출가를 자청하기를 명했다. 이와쿠라는 거역하지 않고 사퇴하여 출가, 조정을 떠났다.

그러나 도사번 무사 다케치 한페이타 등 양이 강행론자는 이와쿠라의 처단이 무르다고 주장하며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와쿠라는 교토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머리를 시조 강가에 효수하겠다는 천벌 예고문까지 받는다. 그로 인해 저택에서 칩거할 수 없게 되어, 먼저 니시가모(西賀茂)의 레이겐지[36]에 몸을 숨겼다. 이와쿠라가 중의 모습이 되어 레이겐지로 숨은 9월 13일 일기에는 ‘무념 절치(切歯)가 끊이질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다음날 일기에도 ‘무념이 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 실제로 꿈인지 현실인지 어렵고, 어떤 숙연(宿緣)의 결과인지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라며 분함을 토로했다. 9월 15일 아버지 도모야스의 조카가 주지로 있는 교토 서쪽의 사이호 사로 옮긴다. 9월 26일 간파쿠 고노에 다다히로는 구조, 고가, 이와쿠라 등을 교토 안에서 살 수 없다는 추방령을 발령했다. 이와쿠라가 이주로 인해 곤란할 때, 10월 4일에 장남 도모쓰나가 교토 북쪽의 이와쿠라 마을에 주거를 허락받아 그곳으로 옮겼다. 이후 교토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된 1867년(게이오3년) 11월까지 이 지역에서 5년간 칩거생활을 보내게 된다.

1864년(겐지 원년) 7월 19일 금문의 변이 발생, 교토의 양이 강행론자가 일소되어 이와쿠라의 무고함이 증명되었지만, 사면(赦免)되지 않고 계속 이와쿠라 마을에서 살았다. 하지만 사쓰마 번이나 조정 내 동지들이 다시 이와쿠라에게 방문하여, 1865년(게이오 원년) 가을 즈음부터 이와쿠라도 『叢裡鳴虫』을 시작으로 정치의견서를 다시 쓰게 되어 조정이나 사쓰마 번의 동지에게 보내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37] 또한, 이 시기에 사쓰마 번의 동향에 호응하는 형태로 종래의 공무합체파에서 도막파로 입장을 변경하였다.

1866년(게이오 2년) 6월 7일부터 시작된 제2차 조슈 정벌은 조슈 군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막부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중, 7월 18일 히로시마번주 아사노 나가미치, 오카야마번주 이케다 모치마사, 도쿠시마번주 하치스카 나리히로 등 도자마 여러 번이 고메이 천황에게 정벌군 해체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했다. 20일에는 사쓰마 번에서도 건백서가 나왔다. 같은 날, 정벌군 대장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서거하였다. 하지만 고메이 천황,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니조 나리유키 등 조정 수뇌는 여전히 정벌군 속행을 주장하였다.

이와쿠라도 사쓰마 번과 마찬가지로 병사 해체 및 조슈 번과의 화해에 찬성하여 일찍이 근왕의 공적을 존중하고 금문의 변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길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정 수뇌부, 특히 나카가와노미야를 도쿠가와 요시노부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천하의 대세를 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와쿠라는 조정의 악습을 고치기 위해 다시 획책했고, 이 의견에 나카미카도 쓰네유키가 찬동하여 사쓰마 번의 이노우에 이시미와 후지이 료세쓰 등이 공작에 참여하였다.[38] 8월 30일, 조정개혁(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 등 간신 추방, 반 막부파 고노에 다다히로의 간파쿠 재임, 다카쓰카사(鷹司)를 시작으로 유폐 상태의 공경들을 사면하여 조의(朝議)에 복귀하는 등)을 내걸고 나카미카도 쓰네유키를 시작으로 22명의 공경이 차례로 입궐하였다.(이와쿠라는 입궐 금지 중) 이것을 보고 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는 사퇴하였다. 천황은 갑자기 신하 두 사람을 잃은 것에 격노하여 나카미카도 등 참가한 공경들에게 집에서 근신할 것을 명하였다.( 조정 22공경 열참 사건)

조슈와의 전쟁은 8월 1일 막부군이 고쿠라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8월 16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입궐하여 전황을 보고, 이미 온갖 수단을 다해도 이길 기회가 없다는 것을 조정 수뇌부에 보고하여 어쩔 수 없이 병사를 풀고, 8월 20일에 이에모치 서거가 공표되어 9월 2일 조슈 번과 막부가 휴전협정을 맺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천연두로 붕어(崩御)했다. 정치 혼란기에 돌연 붕어했기 때문에 이전부터 독살설이 있었고, 이와쿠라가 용의자로 의심되었지만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39]

1867년(게이오 3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15세에 즉위했다. 섭정에는 니조 나리유키가 취임하여 다시 나카미카도와의 2두 체제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 즉위에 따라 대사(大赦)가 이루어져 1월 15일과 25일에 1863년(분큐 3년)의 정변, 금문의 변에 관련된 자들이 사면되었고, 간파쿠 구조 히사타다는 이때 사면되었지만 이와쿠라, 고가, 지쿠사, 도미노코지 등 열참(列参) 관계 공경은 사면되지 않고 11월에 사면되었다.

2. 2. 5. 왕정복고 (1867년 ~ 1868년)

도사 번 무사 다케치 한페이타 등 양이 강행론자들은 이와쿠라의 처벌이 가볍다며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쿠라는 교토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머리를 시조 강가에 효수하겠다는 천벌 예고문까지 받았다. 그로 인해 저택에 칩거할 수 없게 되어, 먼저 니시가모(西賀茂)의 레이겐지[36]에 몸을 숨겼다. 이와쿠라는 중의 모습으로 레이겐지에 숨은 9월 13일 일기에는 ‘무념 절치(切歯)가 끊이질 않는다’라고 적었다. 다음날 일기에도 ‘무념이 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 실제로 꿈인지 현실인지 어렵고, 어떤 숙연(宿緣)의 결과인지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라며 분한 마음을 தொடர்ந்து 적었다. 9월 15일 아버지 도모야스의 조카가 주지로 있는 교토 서쪽의 사이호 사로 옮겼다. 9월 26일 간파쿠 고노에 다다히로는 구조, 고가, 이와쿠라 등을 교토 안에서 살 수 없다는 추방령을 내렸다. 이와쿠라가 이주로 곤란할 때, 10월 4일에 장남 도모쓰나가 교토 북쪽의 이와쿠라 마을에 거주를 허락받아 그곳으로 옮겼다. 이후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된 게이오 3년(1867년) 11월까지 이 지역에서 5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금문의 변이 발생하여 교토의 양이 강행론자들이 일소되었고, 이와쿠라의 무고죄가 증명되었지만 사면되지 않고 계속 이와쿠라 마을에서 살았다. 하지만 사쓰마 번이나 조정 내 동지들이 다시 이와쿠라를 방문했고, 게이오 원년(1865년) 가을 즈음부터 이와쿠라도 『叢裡鳴虫』을 시작으로 정치 의견서를 다시 써서 조정이나 사쓰마 번의 동지에게 보내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37] 또한 이 시기에 사쓰마 번의 동향에 호응하여 종래의 공무합체파 입장에서 도막파로 전환했다.

게이오 2년(1866년) 6월 7일부터 시작된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조슈 군의 결사반공(反攻)으로 막부군이 고전하던 중, 7월 18일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나가미치,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모치마사, 도쿠시마 번주 하치스카 나리히로 등 도자마 여러 번이 고메이 천황에게 정벌군 해체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했다. 20일에는 사쓰마 번에서도 건백서가 나왔다. 같은 날 정벌군 대장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서거했다. 그러나 고메이 천황,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니조 나리유키 등 조정 수뇌부는 여전히 정벌군 속행을 주장했다.

이와쿠라도 사쓰마 번과 마찬가지로 병사 해체 및 조슈 번과의 화해에 찬성하며, 일찍이 근왕의 공적을 존중하여 금문의 변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조정 수뇌부, 특히 나카가와노미야를 도쿠가와 요시노부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천하의 대세를 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와쿠라는 조정의 악습을 고치기 위해 다시 획책했다. 이 의견에 나카미카도 쓰네유키가 찬동했고, 사쓰마 번의 이노우에 이시미와 후지이 료세쓰 등이 공작에 참여했다.[38] 8월 30일, 나카미카도 쓰네유키를 시작으로 22명의 공경이 조정 개혁(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 등 간신 추방, 반막부파 고노에 다다히로의 간파쿠 재임, 다카쓰카사(鷹司)를 시작으로 유폐 상태의 공경들을 사면하여 조의(朝議)에 복귀하는 등)을 내걸고 차례로 입궐했다(이와쿠라는 입궐 금지 중). 이것을 보고 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는 사퇴했다. 천황은 갑자기 신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것에 격노하여 나카미카도 등 참가한 공경들에게 집에서 근신할 것을 명했다.(조정 22공경 열참 사건)

조슈와의 전쟁은 8월 1일 막부군이 고쿠라 전투에서 패전하고, 8월 16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입궐하여 전황을 보고하며 이미 온갖 수단을 다해도 이길 기회가 없음을 조정 수뇌부에 보고하여 어쩔 수 없이 병사를 풀었다. 8월 20일 이에모치 서거가 공표되었고, 9월 2일 조슈 번과 막부가 휴전 협정을 맺으며 종료되었다.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천연두로 붕어(崩御)했다. 정치 혼란기에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독살설이 있었고, 이와쿠라가 용의자로 의심받았지만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39]

게이오 3년(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15세에 즉위했다. 섭정에는 니조 나리유키가 취임하여 다시 나카미카도와 2두 체제가 되었다. 새 황제 즉위에 따라 1월 15일과 25일에 분큐 3년(1863년)의 정변, 금문의 변 관련자가 사면되었고, 간파쿠 구조 히사타다는 이때 사면되었지만 이와쿠라, 고가, 지쿠사, 도미노코지 등 열참(列参) 관계 공경은 11월에 사면되었다. 10월 14일 니조 성에서 대정봉환이 이루어졌고, 다음 날 15일 니조 나리유키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봉환 칙허가 주어져 공식적으로 조정에 정권이 반환되었다.

조정 수뇌부와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배경으로 실질적 권력을 잡게 된 요시노부에게서 실권을 빼앗기 위해 이와쿠라는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 도사의 고토 쇼지로, 공경인 나카미카도, 나카야마 다다야스,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 등과 함께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 반납을 요구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게이오 3년(1867년) 12월 8일부터 다음 날 9일에 걸쳐 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 등 조정 수뇌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등 황족, 시마즈 다다요시, 야마우치 요도, 마쓰다이라 슌가쿠, 도쿠가와 요시카쓰, 아사노 나가코토 등 다이묘와 함께 조의(朝議)가 열렸다. (사전에 이와쿠라 일행의 계획을 파악한 요시노부는 병을 이유로 결석했다.)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이와쿠라 일행은 입궐하여 신정부 인사와 요시노부의 처분을 요구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 안을 아뢰었다. 왕정복고 자체는 이미 결정되었지만, 신정부 인사안을 둘러싸고 마쓰다이라 슌가쿠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논쟁을 벌였다. 최종적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정부 수반인 총재(総裁)로, 마쓰다이라 슌가쿠, 야마우치 요도를 의정(議定), 이와쿠라, 오쿠보를 산요(参与)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요시노부의 처우에 대해서도 요도나 슌가쿠에게서 의견이 나와 고고쇼에서 이와쿠라나 오쿠보와 다시 격론을 벌였다. 하지만 최후에는 이와쿠라가 슌가쿠, 요도를 논파(論破)하여 요시노부에게 관직, 영지 반납을 명하는 것이 결정되었다.(고고쇼 회의)

슌가쿠와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요시노부에게 파견되어 신정부의 결정을 통고했다. 요시노부는 관직과 영지 반납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부하가 진정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이 통고를 받고 ‘막부’의 하타모토나 아이즈 번 과격 세력이 폭주할 듯하여 요시노부는 그들에게 경거망동을 조심하도록 명하고, 13일에는 정부에 순순히 복종할 의사를 나타내기 위해 교토의 니조 성에서 오사카 성으로 퇴거했다. 슌가쿠는 이를 보고 ‘천지에 맹세하여’ 요시노부가 반납을 실행하려 한다는 의견을 총재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오사카 성에 들어간 뒤에도 요시노부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다.

23일과 24일에 걸쳐 정부에서 이 건에 대해 회의가 열렸다. 산요(参与)인 오쿠보는 요시노부의 배신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여 즉시 ‘영지 반납’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슌가쿠는 구 막부 내부 과격 세력이 요시노부를 방해하고 있다고 짐작하여 ‘도쿠가와 가의 영지를 조사하여, 정부에서 회의를 가진 뒤 확정한다’라는 애매한 명령에 그쳤다. 이와쿠라도 슌가쿠의 생각에 찬성하여 다른 정부 구성원도 이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 이 명령으로 결정되었다. 이 명령을 받은 요시노부는 승낙한다는 맹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28일에는 이와쿠라가 산요에서 의정(議定)으로 승진하여 조정 수뇌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원년(1868년), 요시노부가 돌연 사쓰마 정벌을 명목으로 사실상 교토 점령을 목적으로 한 출병을 개시했다.(도바 후시미 전투) 신정부는 긴장하여 1월 3일에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산요인 오쿠보는 구 막부군이 교토로 들어오는 것은 신정부군의 붕괴이며, 천황의 깃발과 도쿠가와 정벌 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의정인 슌가쿠는 사쓰마 번과 구 막부 세력의 사투(私闘)이며 정부와는 무관하다고 여겨 반대했다. 회의는 분규(紛糾)했지만, 의정이 된 이와쿠라가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하면서 회의의 대세가 결정되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토벌군 대장군에 요시아키 친왕을 임명하고, 친왕은 천황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도사 번에 진군하여 이곳을 도쿠가와 추토(追討) 본진으로 정했다. 깃발의 등장에 각 번이 차례로 정부에 원조를 파견했고, 구 막부군은 다카토라를 선두로 하라는 이에야스의 유훈을 받은 도쿠가와 가문의 우방(友邦) 쓰 번마저 배반하여 포격을 받고 패주했다. 6일 저녁,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패배를 깨닫고 측근 몇 명과 함께 몰래 에도에서 도망쳤다. 도쿠가와 정벌에 반대한 슌가쿠의 정부 내 발언력은 약해졌고, 찬성한 이와쿠라의 발언력은 커졌다.

1월 7일, 교토에 있는 여러 다이묘가 고고쇼에 모였고, 이와쿠라 도모미는 그 자리에서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구니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돌아가라. 오사카에 가고 싶은 자는 가라. 근왕의 의사가 있는 자는 그 뜻을 내일까지 맹서로 남겨라.’라고 일갈했고, 여러 다이묘들은 이와쿠라의 박력에 떨며 전원이 맹서를 제출했다.

1월 10일, 애매했던 도쿠가와 영지 문제는 이번 반역으로 몰수로 명확히 선언되어 전부 천조(天朝)의 토지가 되는 것으로 포고되었다. 1월 17일, 정부 수뇌부가 분담 방식의 내각제가 되어 총재를 수반으로 하여 내국사무, 외국사무, 육해군사무, 회계사무, 형벌사무, 제도사무, 사찰사무의 7개 각료가 설치되었다. 이와쿠라는 육해군사무와 회계사무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게 되었다. 명목상 행정 책임자는 총재였지만, 그 지위에 있던 다루히토 친왕은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의정이나 산요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거의 허가했다. 이로 인해 이 인사 구성으로 일본에서는 실질적으로 이와쿠라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탄생했다.

2. 2. 6. 메이지 신정부 활동 (1868년 ~ 1883년)

1867년 12월, 이와쿠라 도모미는 오쿠보 도시미치, 고토 쇼지로 등과 함께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를 반납시키는 계획에 참여했다.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통해 신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와쿠라는 신정부의 주요 직책인 산요(参与)에 임명되었다.

고고쇼 회의에서 요시노부의 처우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이와쿠라는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 반납을 명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요시노부는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결국 신정부의 결정을 따랐다.

1868년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요시노부가 교토 점령을 시도하자, 신정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와쿠라는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하여 회의를 주도했고, 신정부는 요시노부 토벌군을 파견했다. 여러 번이 신정부에 합류하면서 구 막부군은 패배했고, 요시노부는 에도로 도망쳤다. 이 사건으로 이와쿠라는 신정부 내에서 발언권이 더욱 강해졌다.

1월 10일, 도쿠가와 영지는 몰수되어 천황의 토지가 되었다. 1월 17일, 정부는 내각제를 도입했고, 이와쿠라는 육해군사무와 회계사무를 맡게 되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이와쿠라에게 집중되었다.

4월 21일, 정부는 권력 분립형으로 개편되었고, 이와쿠라는 국내 행정 전반과 궁중 서무를 감독하는 보상(輔相)에 취임했다. 이와쿠라는 궁중 개혁을 단행하여 구 귀족층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메이지 유신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우에노 전쟁 후, 메이지 천황은 도쿄로 행차했고, 도쿄 성은 새로운 고쿄가 되었다. 1869년 1월, 이와쿠라는 병을 이유로 보상(補相)에서 사퇴했다.

이와쿠라의 사임 후, 정부는 판적봉환을 검토했다. 이와쿠라는 판적봉환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번주들을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행정관(지사)으로 하고, 지사에게 영지를 관리하게 하되, 토지와 인민은 사유물이 아님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5]

1869년 6월, 판적봉환 후 다시 행정조직이 개편되었고, 이와쿠라는 우다이진 산조 사네토미의 보좌역인 다이나곤에 취임했다.

1870년, 이와쿠라는 『건국책 (建国策)』이라는 의견서를 작성하여, 민정, 재원, 병제, 소송법, 교육의 전국 통일화를 주장했다.

1871년 2월, 정부 수뇌부는 폐번치현에 대비하여 천황 직속의 고신베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7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전 지사를 고쿄로 불러 폐번치현을 선고했고, 이로써 일본은 근대 통일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1873년 8월, 루스 정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조선 파병을 주장하자, 이와쿠라는 내정 우선을 주장하며 정한론에 반대했다. 이와쿠라는 가쓰 가이슈,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함께 정한론을 저지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퇴했다.

1874년 1월 14일, 이와쿠라는 구이치가이의 변으로 불평 사족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사가의 난, 세이난 전쟁 등 불평 사족의 반란이 이어졌다.

1876년 4월 19일, 이와쿠라는 화족 회관 관장이 되어, 화족 통제 정책을 추진했다. 화족징계령을 제정하고, 제15국립은행을 창설하여 화족의 재산을 보호했다. 그러나 무가 출신 화족들의 반발로 1877년 12월 4일 관장에서 사퇴하고, 궁내성에 화족국을 설치하여 화족 통제를 이관했다.

1875년 4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입헌정체의 조서를 발표했지만, 이와쿠라는 국체 변화를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1880년 경부터 자유민권운동이 고조되면서 헌법 제정 논의가 가속화되었고, 1881년 6월, 이와쿠라도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이후, 이와쿠라는 이토 히로부미오쿠마 시게노부 중 이토를 헌법 제정 책임자로 선택했다. 1881년 10월, 이와쿠라는 메이지 14년의 정변을 통해 오쿠마를 파면하고, 1882년 3월, 이토를 유럽에 파견하여 헌법 조사를 진행하게 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 이와쿠라 도모미는 메이지 천황과의 신뢰와 영향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천황의 직접 통치 정부를 주장했고, 1868년 오대칙서의 반포와 한제 폐지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태정관을 설립했으며, 새로운 정치 환경 조성을 위해 천황의 교토에서 도쿄로의 천도를 계획했다. 교토의 일부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을 비판했지만, 그는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추진했다.[5]

1871년 우대신에 임명된 직후, 그는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알려진 2년간의 세계 일주 여행을 이끌고, 미국과 여러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 재협상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정보 수집을 목표로 했다. 미국 신문들은 이와쿠라의 방문이 영국 총리의 방문만큼 중요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대통령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논의에서 실패했다. 미국 대통령은 이와쿠라가 전권위임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이토 히로부미는 3월 24일에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 전권위임장을 받아 6월 17일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시 불평등 조약 개정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4]

여행 중 이와쿠라 도모미는 서구 국가들의 경제 번영에 놀랐고, 특히 철도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종교 문제의 중요성을 배우고, 기독교 금지가 불평등 조약 개정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는 서구화의 장단점을 보고 배우면서 급속한 서구화의 위험성을 느꼈다.[5] 처음 이 여행은 10개월 반으로 계획되었지만, 결국 1년 10개월이 걸렸다.[4] 이와쿠라 사절단 12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1997년 맨체스터와 리버풀에서 열렸다.

2. 3. 사망

1883년 초 인두암 증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쿠라는 5월 25일, 교토 고쇼 보존계획을 위해 교토로 향했지만 여기서 점점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를 들은 메이지 천황은 칙명을 내려 도쿄 대학 의학부 교수인 어빈 폰 발츠 의사를 교토로 파견하였다. 이와쿠라는 배로 도쿄에 돌아왔지만, 발츠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다. (이와쿠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암 선고를 받은 일본인이다.)[4] 메이지 천황은 여러번 위문을 했지만 이와쿠라는 회복하지 못하였고, 천황이 마지막으로 위문한 다음날인 7월 20일 입헌정체수립을 눈앞에 두고 사망했다. 59세.[4] 7월 25일에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이와쿠라는 일본정부에 의한 최초의 국장자이다. 묘소는 도쿄도 시나가와구의 가이안 사이다.[5]

3.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 사절단의 수장은 이와쿠라 도모미였으며, 사진에서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1871년 우대신에 임명된 직후,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여러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 재협상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정보 수집을 목표로 했다.[4] 이 사절단에는 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외에 산기(参議) 기도 다카요시, 오쿠라쿄(大蔵卿) 오쿠보 도시미치, 공부대보(工部大輔) 이토 히로부미가 부사로 참가하여, 1871년 11월에 요코하마 항을 출발, 1년 10개월에 걸쳐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라 1872년 7월 1일까지는 조약 개정 교섭이 불가능했고, 그 시기가 임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일본의 법률과 제도가 ‘만국공법’에 준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등 조약을 유지하려 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구미에 사절단을 보내 일본이 아직 문명개화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각국의 근대화를 시찰한 뒤 귀국하여 문명개화를 이룬 단계에서 조약 교섭을 하도록 요청하여 교섭을 연장하고자 했다. 오쿠마 시게노부 등은 국서에 연기 기한을 3년으로 명시하려 했지만, 이와쿠라는 무제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다.

사절단은 각국 원수와 만나 국서를 전달했지만, 조약 개정의 실마리는 잡지 못했다.[4] 미국 신문들은 이와쿠라의 방문을 영국 총리의 방문만큼 중요하다고 보도했지만, 미국 대통령은 이와쿠라에게 전권위임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불평등 조약 개정 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쿠보 도시미치이토 히로부미는 즉시 귀국하여 전권위임장을 받아왔지만, 미국은 이미 불평등 조약 개정에 관심이 없었다.[4]

이와쿠라는 이 여행을 통해 서구 국가들의 경제 번영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철도에 주목했다. 귀국 후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종교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 금지가 불평등 조약 개정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5] 그는 서구화의 장단점을 모두 경험하며 급속한 서구화의 위험성 또한 인지했다.[5]

4. 평가 및 유산

1876년 4월 19일, 이와쿠라 도모미는 화족 회관 관장이 된다. 메이지 초기 화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계층인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아 독립성이 강했고, 특히 다이묘 출신과 구게 출신 사이에 빈번한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쿠라가 생각하는 화족은 유럽식 귀족이었으며, 그들의 사명은 황실을 보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거의 틀에 갇힌 무의미한 대립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모든 화족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와쿠라는 강력한 화족 통제 정책을 실시한다. 먼저 모든 화족을 조직에 편입시키기 위해 회관에 부장국을 설치하고 자신이 독부장이 되어 출신별로 6부로 나누고 각 부장을 두는 등 조직화를 통해 화족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화족징계령(태정관달)을 제정하여 화족의 품위를 손상시킨 자는 처벌하도록 했다. 이 법령에 의한 처벌 대상은 범죄는 물론이고 스캔들과 재산 낭비까지 포함되었다. 한편 1877년(메이지 10년)에는 화족의 금록공채를 자본금으로 하여 화족은행이라 불린 제15국립은행을 설립하여 화족 재산 보호에도 힘썼다.

화족에게 연대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은행의 보호를 받은 것은 구쿠게 화족이었고, 관장인 이와쿠라 자신도 구쿠게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게 편향적인 정책으로 무가 출신 화족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1877년(메이지 10년) 7월에는 마쓰다이라 하루아케, 다테 무네시게, 모리 모토노리, 시마즈 타다요시 등 유력 무가 화족들이 연서로 부장국(즉 이와쿠라)에 의한 화족 통제 폐지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한다.

이와쿠라는 거부하지 않고 요구대로 11월 15일 부장국을 폐지하고, 12월 4일에는 관장직도 사임한다. 이때 궁내성 안에 화족국을 설치하여 여기에 화족 통제를 넘겨주었다. 이후에도 정부를 통해 화족 통제에 힘쓰면서, 최종적으로 제국의회귀족원이 개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화족의 역할이 명확해지고 구무가와 구쿠게가 동질화되어 화족 간의 대립은 해소되어 간다.


  • 사카이 쇼난: "도량이 넓고, 공경들 중에서도 드문 인물이었다네. 나에게조차 정치적인 일들을 거리낌 없이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지." [29]
  • 이토 히로부미:
  • * "공은 대단히 총명하고 영달한 사람으로, 결단력도 있고, 담력도 있고, 또 실로 명변했다. 명변해서 사태의 시비와 득실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와쿠라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께서 만약 겐코 겐무의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결코 니타, 아시카가를 싸우게 하지 않고, 왕정복고는 200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공은 실로 일세의 호걸이었다." [30]
  • * "공은 엄정하고 또한 잘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러나 스스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검소해서, 우리들은 내각에서 물러날 때 자주 공의 저택에 들렀는데, 공은 언제나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상 앞에 앉아, 술병 하나씩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에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만나서, 의논을 하기도 하고, 잡담을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었다." [30]
  • * "공은 이와쿠라무라에 은거하실 때 학문을 하셔서, 일본과 중국의 학문에는 두루 통달하셨다. 취미는 특별히 없었지만, 바둑은 좋아하셨다." [30]
  • 가가와 케이조: "현대의 인걸이다. 지금, 교토에 공이 있고, 규슈에 산죠 공이 있다. 두 공이 힘을 합쳐 천하를 위해 일어선다면, 곧바로 풍운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31]

5. 가족 관계

이와쿠라 도모미는 세이코(이와쿠라 구케이 딸, 야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장녀 마스코를 두었다. 마스코는 마사나오의 양녀가 되었고, 이후 구쓰나와 결혼하였다. 오녀 시즈코는 미치아키와 결혼했다가 이혼 후 요시아키와 재혼했다.[6]

이와쿠라 도모미는 세이코와 사별 후, 마키코(노구치 타메고로 딸)와 재혼하였다. 처음에는 첩이었으나 후에 정실이 되었다. 마키코와의 사이에서는 차남 구사다(공작, 학습원 원장, 궁내대신), 삼남 구케이(남작, 궁중 고문관), 차녀 이즈코(요절), 삼녀 쿄코(우지토모 부인), 사녀 하루코(요절), 육녀 히로코(요리마사와 이혼 후 아리토모와 재혼)를 두었다.[6]

이와쿠라 도모미는 가내 첩과의 사이에서 장남 구기(남작)를 두었고, 첩 요시다 하나코(요시다 센지로 딸)와의 사이에서는 사남 미치쿠(남작, 귀족원 의원)를 두었다. 양자로는 구쓰나(마사나오의 장남, 마스코의 남편)가 있었다.[6]

손자로는 이와쿠라 구조(공작, 귀족원 의원), 아리마 요리네(정치가, 농림대신, 일본중앙경마회 이사장),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주코(히가시후시미노미야 왕비(후처)), 이와쿠라 구미츠(대장성 비서관, 교토한신급행전철 부사장, 제인사건의 반초카이 설립자), 사메지마 구시게(해군중장), 이와쿠라 구켄(코자쿠라 요코의 아버지), 나카미카도 야스코 등이 있다.[6]

증손자로는 이와쿠라 구에이(영문학자, 법정대학 교수, 이와쿠라 철도학교(현・이와쿠라 고등학교) 총장), 이와쿠라 구지츠(언어학자, 도시샤대학 교수), 이와쿠라 구호(화가), 이와쿠라 야스코(『화족적화사건』으로 체포·기소되었으나 석방 후 자살), 아리마 요리요시(작가, 직목상 수상), 모리 아리마사(철학자), 세키야 아야코(전 일본 YWCA 회장, 원폭의 그림 마루키 미술관 관장), 이와쿠라 구켄(퍼시픽파크 치가사키 호텔 사장), 코자쿠라 요코(여배우) 등이 있다.[6]

현손자로는 이와쿠라 구타다(이탈리아 문학자, 교토대학 교수), 이와쿠라 구보(주식회사 우테나 대표이사 회장), 이와쿠라 구조(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 사무부장, 농업문제 전문가), 이와쿠라 마사에(인재교육·파견근로 회사 "크레센트 스태프" 경영), 이와쿠라 마사히코(IT회사 "락·스토어·하우스 주식회사" 대표이사), 이와쿠라 미즈에(의류 여성복 브랜드 "스포티프" 경영), 도쿠가와 무네히데(타야스 도쿠가와가 11대 가장), 마쓰다이라 무네노리(에치젠 마쓰다이라가 20대 당주), 카메이 히사오키(전 중의원 의원, 국토청장관(제30대)), 가야마 유조(가수, 배우), 키타지마 에이(전 더 랜처스), 키타지마 슈(전 더 랜처스, 음악 프로듀서) 등이 있다.[6]

래손자로는 카메이 아키코(참의원 의원, 전 국민신당 정책조사회장), 키타지마 마이(전 여배우), 야마시타 테츠오(배우), 아즈사 마유코(배우·요리연구가), 이케하타 에미(배우), 마쓰모토 요(디자이너, 여성 브랜드「INDIV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이 있다.[6]

곤손자로는 이와쿠라 마사카즈(변호사, 니시무라 아사히 법률사무소 파트너 변호사)가 있다.[6]

아래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관련된 계보도이다.

이와쿠라 도모미 관련 계보도
무라카미 천황
(생략)
이와쿠라 구케이
도모미
남이와쿠라 구기마스코구쓰나구사다구케이
(계보도2 참조)
쿄코
(계보도3 참조)
요시다 시즈코히로코
(계보도4 참조)
미치쿠
구사다나카미카도 야스코히로하타 아키코남이와쿠라 이오코구토쿠
도후쿠미야 슈코구쇼사이고 토요코미즈노 요네코구타카구켄
(계보도5 참조)
타케이 하나코시마즈 스에코
구에이구지쓰구호마쓰다이라 하쓰코타나카 마사코쓰지 히로코
구츄구보



계보도2: 3남·이와쿠라 구케이의 계보(남작가, 후에 자작가)
이와쿠라 도모미
구케이
구메이구히로나카지마 야치코구코사메지마 구쥬
구쇼아키코하루코키미코쿠니코



계보도3: 3녀·쿄코의 계보
이와쿠라 도모미
쿄코토다 우지토모
호소카와 타카코마쓰다이라 사치코
요네코우지히데토미코
우지시게
이케다 마사히로아이코모토코도쿠가와 타츠나리
아쓰코무네히데무네카타무네히로마쓰다이라 무네노리



계보도4: 5녀·히로코의 계보
이와쿠라 도모미
아리마 요리마사히로코모리 아리토
요리요시아키라
가메이 요리타테마사코요리요시아리마사
히사오키
아키코



계보도5: 손주·구켄의 자손
이와쿠라 도모미
구사다
구켄
구켄구켄구코우에하라 켄
(이케하타 세이료)
미즈에키타지마 오사무가야마 유조
(나오아키)
마이이케하타 노부히로야마시타 테츠오아즈사 마유코이케하타 에미


6. 관련 작품


  • 료마가 간다일본어 (1968년, NHK 대하드라마, 연: 니타니 히데아키)
  • 카츠 카이슈일본어 (1974년, NHK 대하드라마, 연: 하야시 아키오)
  • 카나신일본어 (1977년, NHK 대하드라마, 연: 니시모토 히로유키)
  • 료마가 간다일본어 (1982년, 텔레비 도쿄 12시간 초 와이드 드라마, 연: 스즈키 미즈호)
  • 오오쿠일본어 (1983년, 간사이 텔레비, 연: 시마다 준지)
  • 타하라자카일본어 (1987년, 일본 텔레비 연말 시대극 스페셜, 연: 사토 케이)
  • 쇼부가 고토쿠일본어 (1990년, NHK 대하드라마, 연: 코바야시 닌시타)
  • 카츠 카이슈일본어 (1990년, 일본 텔레비 연말 시대극 스페셜, 연: 하라다 다이지로)
  • 도쿠가와 요시히사일본어 (1998년, NHK 대하드라마, 연: 테라와키 야스후미)
  • 료마가 간다일본어 (2004년, 텔레비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연: 키노시타 호카)
  • 신센구미!일본어 (2004년, NHK 대하드라마, 연: 나카무라 유지)
  • 아츠히메일본어 (2008년, NHK 대하드라마, 연: 카타오카 츠루타로)
  • 야에의 벚꽃일본어 (2013년, NHK 대하드라마, 연: 코사카이 이키)
  • 사이고돈일본어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연: 쇼후쿠테이 츠루베)
  • 아오조라오 츠케일본어 (2021년, NHK 대하드라마, 연: 야마우치 케이야)[32]
  • 코야마 유 아즈미일본어 (쇼가쿠칸 2009년-2014년)
  • 원작: 메무라 신야일본어, 작화: 하시모토 에이지일본어 치루란 신선조 진혼가일본어 (코어믹스 2010년-2023년)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에서 확인)
[2] 백과사전 Iwakura, Tomomi
[3] 백과사전 Iwakura, Tomomi
[4] 서적 Iwakura Tomomi [岩倉具視] Yoshikawa Hirohumi kan
[5] 서적 Iwakura Tomomi[岩倉具視:幕末維新期の調停者] Yamagawa shuppansha
[6] 서적 Iwakura Tomomi kō[岩倉具視公] Minyū sha
[7] 서적 Meiji kokka to Iwakura Tomomi [明治国家と岩倉具視] Shinzansha
[8] 서적 Tōankō[陶庵公] Sōbunkaku
[9] 웹사이트 Iwakura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7-09-11
[10] 일반
[11] 일반
[12] 일반
[13] 일반
[14] 일반
[15] 일반
[16] 서적 岩倉具視文書
[17] 서적 岩倉具視文書
[18] 일반
[19] 서적 孝明天皇は毒殺されたのか
[20] 서적 岩倉公実記 https://dl.ndl.go.jp[...]
[21] 뉴스 靖国神社は昔、競馬場! https://style.nikkei[...] Nikkei Style 2011-12-16
[22] 일반
[23] 서적 岩倉右大臣を喰違外に刺す https://dl.ndl.go.jp[...] 林泉社
[24] 뉴스 賞勲敍任 官報 1883-07-24
[25] 서적 岩倉具視公 https://dl.ndl.go.jp[...] 民友社 2024-05-01
[26] 서적 岩倉具視公 https://dl.ndl.go.jp[...] 民友社 2024-05-01
[27] 웹사이트 沿革・校歌 https://www.tky-iwak[...]
[28] 소셜미디어 【公式】大河ドラマ「青天を衝け」 Twitter https://mobile.twitt[...] 2021-11-28
[29] 서적 海舟全集
[30] 서적 伊藤侯、井上伯、山県侯元勲談
[31] 서적 維新風雲回顧録
[32] 뉴스 大河ドラマ「青天を衝け」に磯村勇斗、深川麻衣、中島歩、板垣李光人ら17名出演 https://natalie.mu/e[...] ナターシャ 2021-01-26
[33] 일반
[34] 일반
[35] 일반
[36] 서술
[37] 서술
[38] 서술
[39]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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