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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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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재완은 선조의 후손으로,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갑신정변 당시 병조 판서를 지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내부대신, 한성은행 은행장을 역임하고, 1905년 일본에 보빙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후작에 봉해졌으며,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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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재완 (1910년, 《조선귀족열전》에서)
이재완 (1910년, 《조선귀족열전》에서)
이름이재완
초휘이을경
순칠
아호석호
본관전주 이씨
출생함풍 5년 12월 5일 ((1856년1월 22일))
출생지경기도 양주군 와공면
사망다이쇼 11년 (1922년) 8월 11일 ()
사망지경기도 경성부
묘소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금대산
작위완순군 (1899년 ~ 1910년)
작위2후작 (1910년 ~ 1922년)
후임자이달용
아버지 (생부)이신응
아버지 (양부)이정응
친척조선 고종 (종제), 이재곤 (동생)
배우자정경부인 서씨
자녀이달용

2. 생애

이재완은 선조의 아홉째 아들 경창군 이주의 9대손으로,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 되었다. 187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7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880년 이조참판을 거쳐 1884년 갑신정변독립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지냈고, 1885년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제학, 이조판서 등을 거쳐 1899년 궁내부 내대신이 되었고, 완순군에 봉해졌다.

1903년 공립 한성은행|한성은행한국어(현 조흥은행)을 설립하여 1912년까지 은행장을 지냈다. 1905년 보빙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907년 육군 중장 부장 및 승녕부 총관을 역임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910년 조선 귀족으로서 후작에 봉해졌다.

2. 1. 초기 생애

1855년(철종 6년) 조선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9대손이자 음서로 현령을 지내고 증직 좌찬성추증된 이신응(李愼應)[2]의 다섯째 아들로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에서 태어났다. 1864년 고종의 지시로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를 선발할 때, 양자로 낙점되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교관(敎官)을 지냈다.

1873년(고종 10) 7월 23일 동몽교관이 되고 1875년 흥완군의 환갑을 기념하여 특별히 이재완에게 과거 시험에 직부(直赴)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이재완은 선조의 아홉째 아들인 경창군|경창군한국어 이주(李珘)의 9대손으로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으며, 흥완군|흥완군한국어 이정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양자가 되었다.

2. 2. 관료 생활

1875년(고종 12년) 4월 문과에 급제하여[3] 5월 20일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6월 20일 다시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2월 8일 분가주서에 임명되고 1876년 1월 한림에 들었다.

1876년(고종 13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선발되어 6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였다. 1877년(고종 14년) 정3품으로 승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878년 곡산부사로 나갔다. 1879년(고종 16년) 종2품으로 승진, 10월 승정원도승지가 되고, 12월 의약청 부제조가 되었다. 1880년(고종 17년) 2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고,[4] 5월 18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5] 1882년(고종 19년)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7월 산릉도감 서사관(書寫官)에 차출되었다. 그해 가을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했다가[6]승정원승지에 임명되어 돌아왔다.[7]

1884년(고종 21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開化黨) 내각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8]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서재필, 김옥균, 이규완 등은 망명하고 홍영식 등은 사살되었다. 그러나 이재완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며, 개화당원이 아니라 하여 처벌받지는 않았다.

1885년(고종 22년) 정2품으로 승진, 형조판서와[9]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10] 1886년(고종 23년)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과[11] 시강원 좌부빈객,[12] 예문관 제학,[13] 한성부 판윤을 제수받았다.[14] 1887년 신칙하라는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재원과 함께 경기도 연해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890년(고종 27년) 한성부 판윤, 다시 형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 1891년(고종 28년)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2년(고종 29년) 종1품으로 승진, 12월 판의금부사, 1894년(고종 31년) 5월 20일 공조판서, 5월 29일 판의금부사, 6월 13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역임했다.

2. 3. 대한제국 시기 활동

1895년(고종 32년) 5월 5일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에 서임되었다. 1896년(건양 1년) 1월 1일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 10월 빈전 제조, 1897년(건양 2년) 산릉도감 제조를 역임했다.

1897년(광무 원년)에 한성은행을 설립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8년 홍문관 학사, 궁내부 특진관, 1899년(광무 3년)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에 4대 승습의 예에 따라 완순군(完順君)에 봉작되었으며,[15]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일본과 열강이 대한제국 국내에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하자, 이재완은 이규환(李圭桓), 박기종(朴琪淙), 윤기영, 이준호, 서오순 등과 함께 철도경영만은 우리 손으로 해야 된다며 나섰으며,[16] 1899년 대한철도회사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903년(광무 7년)에 한성은행이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이재완은 은행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 보빙대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2월에 귀국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4월 27일에 육군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승녕부(承寧府) 총관을 제수받았다.

1909년 7월 28일 한성은행 주주총회에서 이재완은 두취로부터 고문으로 밀려나고 이윤용이 두취로 취임할 것을 결의했다.[17]

2. 4. 생애 후반

1910년 10월 2일에 대한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며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에 봉작되었고, 은사공채 336000JPY을 하사받았다.[18]

1912년에 한성은행 은행장을 사퇴하였다. 1912년 9월 9일 흥친왕 이재면이 죽자 장례식을 회피, 외면하려던 영선군 이준용을 달래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흥친왕의 빈소에서 이준용은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완순군은 영선군 이준용을 질책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18] 영선군은 자신의 암살위협과 폭력, 김학우 암살 사건 당시 죽음의 위기, 일본으로 침투한 조선 자객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원망을 품은 그는 오히려 가족과 친척들이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반발했다.[18] 그 뒤 3년상을 거행하였지만 형식적이었고, 소상과 대상 때 고종과 덕수궁(순종) 등이 비용과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지만 그는 형식적으로 응답하였다.

9월 9일 오후 이태왕이 된 고종이 이재면의 빈소를 찾았을 때, 영선군 이준용은 자리를 피하였다. 고종의 문상 정보를 미리 전해들은 그는 자리를 피했고 신경전을 피하였다. 이재완은 이준용을 달래가며 흥친왕의 장례식을 마쳤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찬의의 자리를 제안하였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22년 8월 11일 오전에 사망하였고, 8월 18일 경성부 자운동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후작의 작위를 아들 이달용이 상속하였다.

3. 사후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 금대산(金臺山)의 갓무봉 흥완군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완순군의 묘 아래에는 그의 아들 이달용의 묘가 있다. 묘비는 없고 상석과 석물만이 세워져 있다. 임종할 무렵 그는 한일합방 조약에 대한 수치심으로,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하여 후손들은 비석을 세우지 않고, 상석 뒷편에 그의 이름만 남겼다 한다.

흥녕군과 이재완의 묘소 근처에는 이재완의 아들 이달용의 저택이 있었다. 이재완 묘소 근처의 우물은 한때 승지를 지냈던 이달용이 항상 그 물을 길어다 마셨다 하여 승지물 이라고 불렸고, 그 근처를 승지물마을이라 불렸다. 흥녕군과 이재완 묘소 근처에는 이달용의 큰 기와 저택이 있었고, 논이 많았다. 완순군 묘 근처에는 이달용의 묘가 있다.

2002년에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양아버지이정응1814년 ~ 1848년
양어머니대구 서씨1810년 2월 23일 ~ 1834년 2월 28일, 군수 서탁수(徐鐸修)의 딸, 사후 정경부인 추증
순천 박씨1818년 2월 3일 ~ 1888년 8월 7일, 박해익(朴海翊)의 딸, 정경부인 봉작
생부이신응(李愼應)
동생이재곤1859년 ~ 1943년
부인정경부인 서씨(貞敬夫人 徐氏)? ~ 1923년
아들이달용1883년 ~ 1948년
며느리안동 김씨1883년 3월 4일 ~ ?, 진사 김회근(金會根)의 딸
아들이규용1888년 6월 13일 ~ ?, 참봉
며느리풍산 홍씨문과 비서원승 홍순구(洪淳九)의 딸
첩며느리이경수1893년 ~ 1968년 1월 18일, 원불교 법명 이동진화(李東震華), 법호 육타원(六陀圓), 이규용의 첩
이씨
사위김병협비서원승 역임, 도사 김면근(金冕根)의 아들
손녀이씨
손자이해선1905년 ~ 1983년, 화가
손자이해명1911년 ~ ?, 흥친왕의 차남 이문용의 양자로 출계
손자이해상1913년 ~ 1985년
증손녀이남주피아니스트, 전 성심여대 교수
손녀이길영1916년 ~ ?
손녀이우영1920년 ~ 1938년 1월 28일
손자이해영1925년 ~ 1979년 11월 18일, 대학 교수


5. 평가

이재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2002년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1] 2007년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 2009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1]

6. 상훈

참조

[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9-05-24
[2] 문서 경창군의 장남인 창원군(昌原君)의 8대 종손(宗孫)
[3] 웹인용 과거 및 취재, 이재완(李載完) https://web.archive.[...] 2012-09-05
[4] 웹인용 이최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0-02-11
[5] 웹인용 이재완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0-05-09
[6] 서적 영변지
[7] 서적 영변지
[8] 웹인용 서광범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4-10-18
[9] 웹인용 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5-04-07
[10] 웹인용 이병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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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인용 이재완을 시강원 좌부빈객에 임명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6-02-11
[13] 웹인용 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6-03-06
[14] 웹인용 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86-04-11
[15] 웹인용 장종 대왕을 추숭하는 것과 관련하여 승습한 사람들에게 법전대로 봉작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899-09-21
[16] 뉴스 "財界山脈 近世 100年產業과 人物 <36> 鐵道·海運特許 (3)" 매일경제 1981-06-08
[17] 뉴스 "財界山脈 近世 100年 産業과 人物 <90> 民族銀行 創業 (8)" 매일경제 1981-08-10
[18]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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