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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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해군은 조선 선조의 장남으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강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성격이 난폭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 광해군에 의해 유배되었으며, 이후 살해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었으며,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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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임해군 |
이름 (한자) | 臨海君 |
로마자 표기 | Imhae-gun |
본명 (한글) | 이진 |
본명 (한자) | 李珒 |
로마자 표기 (본명) | Yi Jin |
휘호 (한글) | 이진국 |
휘호 (한자) | 李鎭國 |
로마자 표기 (휘호) | Yi Jinguk |
시호 (한글) | 정민공 |
시호 (한자) | 貞愍公 |
로마자 표기 (시호) | Jeongmin-gong |
신상 정보 | |
출생일 | 1572년 9월 20일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609년 6월 3일 (향년 36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교동군 |
묻힌 곳 | 임해군묘(臨海君墓), 송능리, 진건읍, 남양주시, 경기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선조 |
어머니 | 공빈 김씨 |
배우자 | 군부인 양천 허씨 |
자녀 | 딸 1명, 이태웅, 이준 (양자), 이경 (양자) |
기타 정보 | |
왕가 | 이씨 조선 |
작위 정보 | |
작위 | 왕자 |
2. 생애
이름은 '''진'''(珒), 아명은 진국(鎭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선조의 맏아들이었으나, 성격이 거칠고 난폭하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중 동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21]
임진왜란 때는 왕명을 받아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갔으나, 회령에서 순왜 국경인 등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가[24] 이후 협상을 통해 풀려났다.[25]
전쟁 후에도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각종 전횡과 난폭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아버지 선조의 비호 아래 처벌받지 않았다.[28][34] 그의 난행은 매우 심각하여 재상 유희서를 살해하는 등[28]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동생 광해군이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명나라는 장남인 임해군이 있는데 차남인 광해군이 즉위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책봉을 미루기도 했는데, 이는 광해군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결국 임해군은 사병을 길러 역모를 꾀한다는 북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17] 교동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609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31][14] 향년 38세였다.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폐위된 후, 인조 때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하였다.[32]
2. 1. 초기 생애와 혼인
1572년 (선조 5년) 8월 14일[18], 선조와 공빈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9] 처음 이름은 '''이진국'''이었으나 후에 '''이진'''으로 바꾸었다.[6] 6세 때인 1577년 어머니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6] 동생 광해군과 함께 당시 자녀가 없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에게 맡겨져 자랐다.1585년 (선조 18년), 양천 허씨 허명(許銘)의 딸과 혼인하였다.[20][7] 1591년 (선조 24년)에는 동생 광해군을 비롯하여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2. 2. 임진왜란 시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대신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했기 때문이었다.[21][6] 이 결정은 이후 임해군의 삶과 왕위 계승 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세자 책봉에서 제외된 후, 임해군은 왕명을 받아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지키기 위해 모인 병사)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파견되었다.[22][8] 그러나 1592년 7월 23일,[23] 함경도 회령에서 순왜(順倭,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협력한 조선인)인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순화군과 함께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지는 비극을 겪었다.[24][9][10]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청정(淸正)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재신들을 잡아 적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관남과 관북이 모두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로가 되었으나, 기록에 따르면 의복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제공받았고 예를 갖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 조건 중 하나로 풀려나게 되었다.[25] 한편,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였다.[26][11]
2. 3.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24][25] 이후, 임해군은 왕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는 성격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땅과 집, 노비를 함부로 빼앗았으며,[27] 그가 부리는 시정잡배와 노복들까지 임해군을 믿고 횡포를 부렸다. 임해군은 사소한 원한에도 사람을 죽이거나 무고한 백성을 폭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28]임해군의 대표적인 만행은 다음과 같다.
- 재산 갈취: 궁궐의 노비들을 풀어 남의 산과 연못을 멋대로 차지하고, 재물이 많은 시장 상인에게 거짓 죄를 뒤집어씌워 협박하여 은과 베를 빼앗았다. 또한 양주 백련사(白蓮寺)의 시주물을 강탈하기도 했다.[35]
- 살인 및 폭행: 재상 유희서와 소충한 등을 살해했으며,[28] 남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강제로 자신의 노비와 짝지어 주기도 했다.[35] 시비가 붙으면 상대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노복을 시켜 구타하거나 모욕을 주었다.[34]
- 인륜 파괴: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부인 이씨를 꾸짖고 모욕했으며,[33]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수령을 욕보이는 등[34]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행동을 일삼았다.
임해군의 행동이 이처럼 매우 난폭하고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대간과 삼사, 사헌부 등 조정의 신료들은 그의 죄를 묻고 강력히 처벌할 것을 여러 차례 선조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번번이 묵살하며 임해군을 비호했다.[34] 임해군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정원군, 순화군 등 다른 왕자들도 난폭한 행동으로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 아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특히 임해군이 도적을 시켜 재신 유희서를 살해한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유희서의 고종사촌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은 임해군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선조에게 아뢰었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덕형은 임해군의 죄가 명백함에도 선조가 '사사로운 사랑에 빠져 그의 악행을 알지 못하고 죄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임해군이 더욱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덕형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신으로서의 소신을 지키려 했으나, 선조는 오히려 노여워하며 이덕형을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34] 이는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충언하는 대신을 존중하지 못한 선조의 실책으로 평가된다.
심지어 무뢰배들이 임해군이나 순화군 등 왕자를 사칭하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임해군이 선조 앞에서 자신의 평소 행실에 대해 대죄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선조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사칭한 무리들만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선(善)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惡)이 들러붙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며, 임해군의 행실을 바로잡지 않고 사칭범만 탓하는 선조의 태도가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지적했다.[36]
조정과 민간에서 임해군의 난폭함으로 인한 고통이 극에 달하자, 마침내 선조는 1606년(선조 39년) 임해군이 빼앗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데리고 있던 관기를 돌려보내며, 문제를 일으킨 궁노들을 처벌하게 하는 등 일부 제한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다른 왕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선조의 여섯째 아들인 순화군 역시 재물 갈취, 폭행, 살인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으나, 실록에서는 순화군의 행패가 임해군이나 정원군보다는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어,[37] 임해군의 문제가 당시 왕자들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2. 4. 유배와 죽음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자의 신분으로 평소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임해군에 대한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특히 북인 세력은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꾀한다고 강하게 탄핵하였다.[17] 이로 인해 임해군은 처음 진도에 유배되었다가[29] 곧이어 교동으로 이배되었다.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으며, 양사(사헌부, 사간원)에서는 임해군을 비롯하여 역모에 연루된 기자헌, 이흥로 등을 처형해야 한다고 아홉 차례나 강력히 주장했다.[12][13] 홍문관 역시 임해군의 사형을 요구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광해군은 형을 죽일 수는 없다며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30]
결국 임해군은 1609년(광해군 1년) 4월 30일[31], 유배지인 교동에서 향년 38세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5권, 광해 1년(1609년) 4월 29일(경진)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임해군을 지키던 수장(守將) 이정표가 그에게 독약을 마시도록 강요했으나 임해군이 따르지 않자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전한다.[14] 그러나 당시에는 사망 경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인조 반정 이후 당시 임해군을 돌보던 관비의 증언을 통해 교살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부인 허씨가 관을 열어 확인했을 때 목에 붉은 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6]
사후 처음에는 수원 광교산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양주 천마산 아래 적성동(현재 남양주시 진건읍)으로 이장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후,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하였다.[32][6]
3. 가족 관계
1572년(선조 5년) 8월 14일[18], 선조와 공빈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9]
- '''동생''' : 광해군
3. 1. 부모
3. 2. 배우자와 자녀
4. 평가
임해군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의 성품과 행실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는 선조의 여러 아들 중에서도 특히 난폭하고 방탕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주로 받는다. 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폭행과 살인을 일삼는 등[27][28]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실록 곳곳에 남아있다. 이러한 문제적 행동으로 인해 대간과 사헌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아버지 선조의 비호 아래 처벌을 면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이러한 행실은 선조에게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반면,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려 했던 행적도 기록되어 있다.[22]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왕자로서 국난 극복에 참여하려 했던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함경도 회령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24]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종합적으로 임해군은 왕자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보다는 난폭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며, 이는 그의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17]
4. 1. 부정적 평가
선조의 여러 아들 중 정원군, 순화군 등과 더불어 가장 난폭하고 광패(狂悖)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게 행동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27] 악행을 일삼았다.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조차 주인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으로 사람을 살해하기도 했다.[28] 재신(宰臣) 유희서, 소충한 등이 임해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부인 이씨는 모욕을 당했다.이러한 임해군의 광패한 행동 때문에 대간과 삼사, 사헌부는 여러 차례 그의 죄를 묻고 처벌할 것을 선조에게 강하게 청하였으나, 선조는 번번이 이를 묵살하고 비호하였다.
- 주요 악행 사례:
- 큰어머니(하원군의 부인)를 꾸짖고 모욕함.[33]
- 백성들의 전답과 재산을 갈취하고[33] 노비를 빼앗음.[27]
- 수령을 모욕하고 재신 유희서를 살해함. 유희서 살해 사건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이 진상 규명과 임해군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선조가 듣지 않자 사직함.[34]
- 궁궐의 노비(궁노)를 풀어 남의 산과 연못(산택)을 멋대로 차지함.[35]
- 부유한 시장 상인에게 누명을 씌워 협박하고 은포(銀布)를 갈취함.[35]
- 남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강제로 자신의 노비와 짝지어 입막음함.[35]
- 양주 백련사(白蓮寺)의 시주 재물을 빼앗고, 자신의 집에 산나물과 동물을 바치게 강요함.[35]
- 수천 마리의 거위와 오리를 길러 시장에서 남의 쌀을 쪼아 먹게 하고, 항의하는 사람에게 보복함.[35]
선조수정실록은 이덕형이 임해군의 처벌을 요구하며 올린 차자(箚子)와 그에 대한 선조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선조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임해군 진(珒)은 교만하고 음란한 짓을 멋대로 하여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유희서(柳熙緖)는 재신인데도 도적을 시켜 살해했고, 하원군의 부인은 큰어머니인데도 모욕을 가했으니, 왕법(王法)이 시행되었다면 당연히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묘(宣廟, 선조)의 현명함으로는 사사로운 사랑에 빠져 그의 악행을 알지 못하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신(拷訊)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은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에게 미쳐서 임해군으로 하여금 횡포를 부려도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고 악을 행해도 징계받는 일이 없게 만들었으니, 이는 실로 성조(聖朝, 선조)의 실덕(失德)이다. 덕형은 자신이 수상(首相)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아뢴 것은 대신(大臣)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체통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성상(선조)의 도량이 넓지 못하여 갑자기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이시고 엄한 비답을 내리셨다가 곧바로 재상의 직임에서 체차하셨으니, 자식을 가르치는 도리는 도리대로 어긋나고 대신을 공경하는 예의에 있어서도 끝맺음을 잘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 《선조수정실록》 38권, 선조 37년(1604년) 3월 1일 (신해)
선조실록의 사관(史官) 역시 임해군의 행패와 이를 방관하는 듯한 선조의 태도를 비판했다. 무뢰배들이 임해군과 순화군 등을 사칭하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자 임해군이 선조 앞에서 대죄(待罪)했는데, 선조는 임해군을 꾸짖기보다 사칭하는 무리만 잡으라고 명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선(善)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惡)이 들러붙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임해군의 패망(悖慢)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무뢰배들이 사칭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이때 임해군이 대죄하는 양심(良心)을 보이면 (임금은) 임해군이 평상시에 저지른 패도(敗度)함을 책망함으로써 임해군 스스로 반성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는 않고 단지 사칭하는 무리들만을 징계하여 다스리려고 하였으니, 왕자가 교만 · 횡포하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배반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 《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1603년) 3월 6일 (임술)
임해군의 난폭함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해지자, 선조 말년인 1606년(선조 39년)에는 마침내 선조가 직접 임해군의 잘못을 열거하며 빼앗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데리고 있던 관기(官妓)를 돌려보내며, 위세를 부린 궁노들을 처벌하게 하는 등 일부 시정 조치를 명하기도 했다.[34]
왕자 임해군 이진(李珒)의 방자함이 특히 심하여 경외(京外)가 그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상(선조)이 하교하여 진(珒)의 광패한 행위를 차례로 열거한 뒤 이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빼앗은 노비는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고 데리고 있던 관기(官妓)는 본주에 돌려주게 하며 궁노 가운데 위세를 업고 작란한 자 역시 법부(法府)로 하여금 치죄하여 왕자들에게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40권, 선조 39년(1606년) 9월 1일 (정묘)
동생인 순화군 이보(李𤣰) 역시 재물 갈취, 폭행, 살인 등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는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37] 임해군의 행패가 순화군보다 더 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격렬한 성격과 수많은 범죄 행위 때문에 선조에게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결국 동생인 광해군이 즉위한 후, 북인 세력에 의해 사병 양성 및 반역 모의 혐의로 탄핵받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17]
4. 2. 긍정적 평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해군은 선조의 명을 받아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향했다.[22]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왕명을 받들어 직접 모병 활동에 나선 행보였다. 비록 이후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순화군과 함께 포박되어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지는[24] 등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전쟁 초기 왕자로서 국난 극복에 참여하려 했던 점은 기록되어 있다.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임해군은 조선 시대의 왕족으로, 그의 삶과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 등은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져 왔다. 특히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형으로서 겪는 복잡한 관계와 비극적인 최후는 극적인 소재로 활용되곤 한다.
5. 1. 드라마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우 |
---|---|---|---|
1982년 | 문화방송 | 여인열전 - 서궁마마 | 김무생 |
1985년 ~ 1986년 | 문화방송 | 임진왜란 | 정성모 |
1986년 | 문화방송 | 회천문 | 임정하 |
1995년 | KBS 2TV | 서궁 | 임혁주 |
1995년 | 한국방송공사 | 궁중 여관 김상궁 | 박용기 |
2000년 ~ 2001년 | KBS 2TV | 천둥소리 | 이원발 |
2003년 ~ 2004년 | SBS TV | 왕의 여자 | 김유석 |
2013년 | 문화방송 | 불의 여신 정이 | 이광수, 이인성 |
2014년 ~ 2015년 | KBS 2TV | 왕의 얼굴 | 박주형 |
2015년 | KBS 1TV | 징비록 | 윤홍빈 |
2015년 | 문화방송 | 화정 | 최종환[16] |
5. 2. 영화
5. 3. 소설
- 마풍해협 (아라야마 토루, 쇼덴샤 문고)
5. 4. 만화
참조
[1]
웹사이트
남양주 임해군 묘
https://m.blog.naver[...]
2021-12-06
[2]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6-28
[3]
문서
Chinese calendar
[4]
서적
선원속보
[5]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06
[6]
웹사이트
임해군이야기
https://m.blog.naver[...]
2021-12-06
[7]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06
[8]
서적
선조수정실록
[9]
서적
선조실록
[10]
서적
선조수정실록
[11]
서적
선조수정실록
[12]
서적
광해
[1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06
[14]
웹사이트
이정표가 임해군을 살해하다
https://m.blog.naver[...]
2021-12-06
[15]
문서
Chinese calendar
[16]
웹사이트
'화정' 광해군 차승원 vs 임해군 최종환 일촉즉발 대결 시작됐다
https://www.hankyung[...]
2015-04-14
[17]
서적
광해군일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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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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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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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선조실록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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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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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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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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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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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6]
서적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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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선조실록
[2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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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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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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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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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의 사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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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6]
실록
선조실록 160권
1603-03-06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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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09권
1607-03-18
[38]
일기
승정원일기 89책
1644-10-17
[39]
실록
인조실록 27권
1632-10-16
[40]
실록
인조실록 27권
163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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