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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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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영실은 조선 세종 시대의 과학 기술자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 출신이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동래의 관노 신분이었으나 세종의 재능 인정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 등 다양한 과학 기기를 제작하는 데 기여했다. 가마 제작 실패로 처벌받은 후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구글 두들로 기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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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영실 동상
장영실 동상 (천안아산역 소재)
한글장영실
한자蔣英實
로마자 표기Jang Yeongsil
분야과학
천문학
기술
직업조선 시대 기술자 겸 관료
생애
출생1385년? 또는 1393년?
출생지고려 경상도 동래
사망일미상
본관아산(牙山)
가족부친: 장성휘
모친: 동래구의 노비
이복 누이동생 1명
업적
주요 업적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
갑인자

2. 생애

장영실은 조선 초기 세종 시대에 활동한 뛰어난 기술자이자 과학자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원나라 출신이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으며, 장영실 본인은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다.[35][22][23] 그의 본관아산이다.[20]

관노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태종 때 발탁되었고, 실용주의를 중시한 세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다양한 과학 기구를 발명하며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423년 면천(免賤)되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으며,[24][30] 이후 상의원 별좌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 등과 함께 천문 기구 제작에 참여하여 자격루(1434년), 옥루(1438년)와 같은 자동 물시계를 비롯해 앙부일구, 현주일구, 일성정시의 등 다수의 해시계와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로 1433년 정4품 호군(護軍)에 제수되는 등 관직도 점차 높아져 최종적으로 종3품 상호군에 이르렀다.[26] 또한 1434년에는 금속활자인 갑인자 주조에도 참여하여 인쇄 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1442년 자신이 감독하여 제작한 세종어가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31][32] 의금부에서는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세종이 형벌을 감해주었다.[27] 이 사건 이후 장영실은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33]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그의 가묘가 있다.

2. 1. 출신과 초기 생애

장영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주로 《세종실록》과 아산 장씨 가문의 족보에 의존한다.[2][3][4]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출신으로 소주·항주 사람이며,[35]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다. 그의 아버지 장성휘는 아산 장씨 8대손으로,[5][6] 그의 가문은 고려 시대에 고위 관직을 지냈으나[21],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에 의해 박해를 받아 몰락하였고 천민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22][23] 이로 인해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본관아산이다.[20]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張胥)의 묘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假墓)가 조성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은 뛰어난 기술자로서의 재능을 태종에게 인정받아 궁중 기술자로 발탁되었다. 세종실용주의를 중시하여 신분보다는 장영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부왕 태종의 뜻을 이어 그를 중용하였다. 1421년(세종 4년), 세종은 장영실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 명나라에 파견하여 선진 천문기기의 기술과 모양을 배워오도록 하였다.[25]

중국에서 돌아온 후,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 제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면천(免賤)되었다.[24] 세종이 그에게 관직을 주려 하자 일부 신하들은 그의 관노 출신을 문제 삼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의 재능을 아껴 신하들과의 논의를 거쳐 그를 종5품 상의원 별좌(別坐)에 임명하였다.[30] 이후 1424년(세종 6년) 5월에는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종의 명을 받아 갱점지기(更点之器)를 연구하여 조선 최초의 자동 물시계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2. 2. 세종 시대의 활동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관노였으나 기술자로서의 재능을 태종에게 인정받아 발탁되었다. 세종실용주의를 중시하여 장영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의 솜씨와 기술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가 궁궐에서 기술관으로 일하도록 허락했으며, 집현전에서 다른 재능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게 했다.[8]

1421년(세종 3년), 세종은 장영실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30][24] 1424년(세종 6년) 5월,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하였고, 세종의 명으로 갱점지기(更点之器)라는 첫 물시계를 만들었다.

이후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총괄 아래 대규모 천문 기구 제작 사업에 참여하였다. 1434년 6월에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여 경복궁 남쪽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했으며, 이는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되었다.[25] 1438년에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의 모형을 통해 시간, 계절, 천체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옥루(玉漏, 또는 흠경각루)를 만들었다. 세종은 흠경각(欽敬閣)이라는 전각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할 정도로 장영실을 총애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주요 천문 기구로는 천문 관측 기기인 대간의(大簡儀)와 소간의(小簡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 측정 기능이 있는 정남일구(定南日晷), 종묘 앞과 혜정교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절기를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최종적으로 종3품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다.[26]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에도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字本)이 흐트러지지 않고 인쇄 상태가 깨끗할 정도로 정교했다.

1442년, 장영실이 감독하여 만든 세종의 어가(御駕)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했다.[31][32]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세종이 형벌을 2등급 감해주었다.[27] 이후 장영실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33]

2. 3. 말년

1434년 갑인자 주조에 참여하는 등 기술 관료로서 활동하던 장영실은 1442년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세종이 탈 어가(御駕) 제작의 감독을 맡았으나, 완성된 어가가 시험 운행 중 부서지는 일이 발생했다.[31][32]

이 사건을 두고 조정 신료들은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며 장영실에게 불경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영실은 뛰어난 업적으로 세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관노 출신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에 대해 일부 관료들의 시기와 견제를 받기도 했다. 의금부에서는 장영실에게 곤장 80대를 구형했으나,[27] 세종은 그의 공로를 참작하여 형벌을 2단계 감면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장영실은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33] 사망 시기 역시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제7대 왕인 세조 (재위 1455년 ~ 1468년) 재위 기간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張胥)의 묘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3. 주요 업적

동래현관노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태종 때 발탁되었고, 실용주의자였던 세종 대에 이르러 크게 중용되었다. 세종은 1421년(세종 4년) 장영실을 중국에 보내 선진 천문 기술을 배우게 했으며, 귀국 후 1423년(세종 5년) 천문기기 제작의 공을 인정받아 관노 신분에서 면천되고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30]

이후 장영실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을 이끄는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감독 하에 다양한 천문 기기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천문 기기들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발명품으로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1434년)와 옥루(1438년)가 있으며, 이 외에도 혼천의, 앙부일구 등 다수의 천문 관측 기기와 시계를 제작하여 조선의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이러한 공로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받았다.

또한, 장영실은 1434년(세종 16년)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금속활자 갑인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하여 인쇄술 발전에 기여했다. 갑인자는 기존 활자보다 훨씬 정교하고 견고하여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글자 틀이 흐트러지지 않아 인쇄 효율을 크게 높였다.

3. 1. 천문 기기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관노 신분에서 면천되었고, 이후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30]

세종의 명에 따라 장영실은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 하에 여러 천문 기구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주요 천문 기구들은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혼천의와 규표 ===

장영실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천체 의상 제작을 맡았다. 당시 참고할 수 있었던 아랍과 중국 서적의 지침은 불완전했는데, 이는 천문 기기가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 두 달간의 연구 끝에 장영실은 중간 정도의 정확도를 가진 구형 장치를 만들었다. 첫 시도 1년 후인 1433년, 장영실은 혼천의(渾天儀)한국어를 완성했다. 혼천의는 물의 힘(수력)으로 내부 구체를 회전시켜 시간을 나타냈으며, 낮과 밤에 관계없이 해, 달, 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규표한국어는 계절 변화에 따른 시간의 변화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기들은 경복궁경회루 주변에 설치되어 천문학자들이 사용했다.[9]

===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 ===

삼국 시대부터 물시계가 사용되었으나,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람이 계속 지켜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세종은 외국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영실 등에게 이를 제작하도록 명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다양한 물시계 설계를 연구한 후, 1434년(세종 16년) 김조,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자동 시보 물시계인 자격루(자격루한국어)를 완성했다. 자격루는 정해진 시간마다 종, 징, 북을 자동으로 울려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로, 조선 시대 표준 시계 역할을 했다. 자격루는 시간마다 12지신 인형이 나타나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 장치와 물의 흐름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자격루는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국보 제229호로 지정된 것은 중종 때 개량된 것이다.

1438년(세종 20년), 장영실은 또 다른 자동 물시계인 옥루(옥루한국어)를 만들었다. 옥루는 해의 움직임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하며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천상시계(天象時計)였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게 했고, 천체의 시간과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였다.

=== 해시계: 앙부일구 ===

장영실이 조선 시대에 처음 만든 한국의 해시계로, 경복궁에 전시되어 있다.


물시계는 제작 비용이 비싸고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더 저렴하고 사용하기 쉬운 해시계의 개발이 필요했다. 장영실은 이천, 김조 등과 함께 1434년(세종 16년) 이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바라보는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오목한 반구형 그릇 모양에 시간을 나타내는 눈금과 절기를 나타내는 선들이 새겨져 있다. 해 그림자의 위치를 통해 시간을 알 수 있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을 그려 넣어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13] 앙부일구는 종묘 앞이나 혜정교 등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설치되어 공중 시계 역할을 했다.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보물 제845호로 지정된 것은 18세기에 제작된 휴대용 앙부일구이다.

=== 기타 천문 기기 ===

장영실은 이 외에도 다양한 천문 관측 기기와 시계를 제작했다.

기기 종류주요 기기설명
천문 관측 기기대간의, 소간의천체의 위치와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구
일성정시의낮에는 해, 밤에는 별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
해시계현주일구휴대용 해시계
천평일구수평을 맞추어 사용하는 해시계
정남일구남쪽 방향을 가리키는 해시계
앙부일구공중용 해시계 (오목 해시계)
물시계경점기시간을 알리는 기구
자격루자동 시보 물시계
옥루자동 물시계 겸 천상시계 (흠경각루)



이러한 천문 기기들의 개발은 조선의 천문학 수준을 크게 발전시켰다. 1442년에는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칠정산한국어)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 기기를 이용한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칠정산은 일식, 월식 등 주요 천문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10] 장영실의 이러한 공로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3. 2. 기타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35]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의 기생이었다.

장영실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나, 천문 기구 제작과 갑인자 주조 등이 끝난 후 관료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종이 탈 어가가 부서지는 사건[31][32]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의금부에서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받았으나, 세종이 형벌을 2등 감해주었다. 장영실은 이 사건 이후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33]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張胥)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일설에 따르면 측우기 개발에도 관여했다고 한다.[28]

4. 가계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35] 원나라 출신으로 소주·항주 사람이며,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라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장영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이들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의 8세손인 '''장성휘(蔣成暉)'''로, 고려전서(典書)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35]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되는 혼란기에 장영실의 어머니와 장영실이 관기 및 관노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산 장씨 측은 장영실의 이름 '영(英)'자가 당시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과 일치한다는 점[36]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당시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이름을 짓고 족보에 올리는 것은 유교적 정서상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36]

장영실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으며, 사촌 여동생은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전해진다.[37]

아산 장씨 족보에 기록된 장영실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장균(蔣均)판도판서(版圖判書)
조부장자방(蔣自芳)삼사부사(三司副使)
백부장성길(蔣成吉)평장사(平章事)
종형장영우(蔣英雨)장성길의 아들
백부장성발(蔣成發)전공전서(典工典書)
종형장을유(蔣乙濡)장성발의 아들, 중문지후(中門祗侯)
종형장을충(蔣乙忠)장성발의 아들
아버지장성휘(蔣成暉)전서(典書)
숙부장성미(蔣成美)전법전서(典法典書)
종제장계무(蔣繼茂)장성미의 아들
종제장계생(蔣繼生)장성미의 아들
종제장계손(蔣繼孫)장성미의 아들
숙부장성우(蔣成祐)공조전서(工曹典書)
종제장영무(蔣英茂)장성우의 아들, 군기소감(軍器少監)
종제장영시(蔣英時)장성우의 아들



장영실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는 1385년경에서 1390년 (우왕 11년~공양왕 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마련되어 있다.

5. 평가 및 현대적 의의

세종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장영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중용하였다.[35] 장영실은 이러한 세종의 신뢰 아래 자격루, 옥루, 앙부일구 등 수많은 과학 기기를 제작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비록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었으나,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면천되고 관직에 나아가 최종적으로 정3품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종의 어가가 부서지는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곤장을 맞고 파직된 이후[31][32] 그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은 이순지, 이천 등과 더불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받는다.[34]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18년 5월 19일에는 세계적인 기업 구글(Google)이 구글 두들(Google Doodle)을 통해 장영실을 기념하기도 했다.[19]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張胥)의 묘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마련되어 있다.

6. 대중 문화

참조

[1] 웹사이트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https://sillok.histo[...]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 서적 The genealogy of A-san Jang-si 牙山蔣氏世譜卷之一黃 1872
[3] 간행물 Kook-Jo-In-Mool-Ji 國朝人物志 1909
[4] 문서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King Sejong Section 1433-09-16
[5] 문서 Dae-Dong-Woon-Boo-Goon-Ok 1587
[6] 서적 Explorations in the History of Machines and Mechanisms: Proceedings of HMM2012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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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Korean History Project http://www.koreanhis[...] 2007-09-27
[9] 웹사이트 Indiana University Resources http://www.indiana.e[...] 2006-06-22
[10]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the Folk Museum http://www.nfm.go.kr[...] 2007-03-13
[11] 웹사이트 Glossary of Korean Studies http://www.aks.ac.kr[...] 2006-06-22
[12] 웹사이트 Federation of Busan and Technology http://www.fobst.org[...] 2007-10-21
[13] 웹사이트 똑딱똑딱 소리없는 시계-자격루와 양부일구 (Silent clock tick - jagyeokru adoptive father and one ) http://www.kaeri.re.[...] Kaeri Web Magazine (Korean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2002-03
[14] 문서 The Culture and Civilization of Ancient India in Historical Outline 1982
[15] 웹사이트 Visit Busan Museum Guide http://visit.busan.k[...]
[16] 웹사이트 American Meteorological Society press http://ams.allenp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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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서 『科学史技術史事典』468頁
[21] 뉴스 장영실 蔣英實,?~? https://www.doopedia[...] 2022-04-16
[22] 서적 『牙山蒋氏世譜』卷之一 1872
[23] 간행물 『国朝人物志』第1巻 1909-03
[24] 문서 『科学史技術史事典』468頁
[25] 웹사이트 〈人物で見る朝鮮科学史-43〉世宗とその時代2 http://eigyou.korea-[...] 朝鮮新報 2022-10-02
[26] 문서 『科学史技術史事典』468頁
[27] 웹사이트 〈人物で見る朝鮮科学史-44〉世宗とその時代3 http://eigyou.korea-[...] 朝鮮新報 2022-10-02
[28] 학술지 朝鮮科学史の隆盛 測雨器と気象学 2009-12
[29] 문서 철종 8년(1858년) [[창경궁]]의 화재로 주자소가 소실되어 이듬해인 동왕 9년(1859년) 재건되었을 때 내건 현판에 주자소의 역대 담당 관원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는데, 이 중 갑인자를 담당한 관원의 이름으로 김돈과 김빈 다음으로 '호군 장영실 실보 계유 경주인'(護軍蔣英實實甫季酉慶州人)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계유를 계유년 즉 1393년으로 볼 경우 이 해가 장영실의 태어난 해가 된다. 다만 해당 현판은 장영실의 당대에서 3백여 년이나 후대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함께 기록된 관련 인물들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실록》 및 《등과록》, 《국조방목》 등 기록과의 비교 대조 결과 착오가 발견되고 있어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30] 문서 《연려실기술》에는 세종 7년에 면천하여 실첨지를 제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1442년 3월 16일 http://sillok.histor[...]
[32] 문서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명로 세종이 온천으로 갈 때 쓰는 가마를 만들었는데, 세자가 가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3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5월 3일 http://sillok.histor[...]
[34] 뉴스 장영실만 있나?… 이순지-이천도 있다 http://www.donga.com[...] 2008-01-11
[35] 서적 《아산장씨족보》
[36] 문서 아산 장씨 http://ijokbo.com/ys[...]
[37] 서적 한국의 과학자들 책과함께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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