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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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책과학연구소는 1978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이끌던 파벌이 개칭한 이름으로, 일본 자유민주당 내의 정치 단체였다. 고노 이치로가 세운 춘추회가 기원이며,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대신이 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와타나베 미치오가 회장을 맡았으나, 리더십 약화와 파벌 내 갈등으로 인해 1998년 야마자키 다쿠 그룹의 이탈을 겪었다. 이후 무라카미 마사쿠니가 회장을 맡았지만, 1999년 지수회로 흡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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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은 1984년 11월 1일부터 1985년 12월 28일까지 존속한 일본 내각으로, 각 부처 대신, 정무 차관, 내각 관방부장관, 내각법제국 장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책과학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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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과학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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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종류 | 재단법인 |
설립일 | 1984년 5월 16일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7-1 삼보빌딩 601호 |
주요 내용 | |
주요 사업 | 정책 연구 및 개발 정책 개발을 위한 조사, 분석, 평가 정책 개발 관련 교육 및 홍보 |
운영 자금 | 국가정보원 예산 지원 |
관련 법규 | 민법 제32조 |
2. 역사
하토야마 이치로의 측근이었던 고노 이치로가 만든 춘추회가 정책과학연구소의 기원이다. 1966년 사토 에이사쿠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춘추회가 분열되었는데, 반(反) 사토 그룹이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중심으로 뭉쳐 신정동지회(나카소네파)를 결성했다. 초기에는 나카소네, 나카무라 우메키치, 노다 다케오 등의 집단 지도 체제였으나, 1968년 12월 나카소네가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고, 그 사이 나카소네파는 사토 지지로 선회하여 주류파가 되었다.
나카소네파는 하토야마 민주당 내 반(反) 기시 노부스케 세력이 중심이어서 다른 파벌에 비해 영수의 구심력이 약하고,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적 성격이 강했다.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를, 1974년 미키 다케오 내각을 지지했다. 1976년 미키 끌어내리기에도 미키를 지지했고, 1979년 40일 항쟁 때는 비주류파였으나 1980년 해프닝 해산 때 주류파로 복귀하는 등 '풍향계'라는 비판 속에서도 당내 정치 흐름을 읽고 1982년 나카소네가 총리대신이 되었다.
1978년 파벌 이름을 정책과학연구소로 개칭했다. 나카소네 총리 재임 시절, 와타나베 미치오계와 후지나미 다카오계가 활발히 활동, 와타나베와 후지나미가 후계자 경쟁을 벌였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후지나미가 실각하고 나카소네도 파벌에서 이탈했다. 와타나베 근신 중 우노 소스케가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참의원 선거 패배로 단명했다. 1990년 사쿠라우치 요시오로부터 선양받는 형식으로 와타나베가 새 회장이 되었다. 이후 와타나베파, 무라카미파를 거쳐 1999년 지수회로 흡수되며 해체되었다.
2. 1. 나카소네파 (1966년~1990년)

하토야마 이치로의 측근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춘추회가 기원이다.
1966년 사토 에이사쿠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춘추회가 분열했는데, 반(反)사토 그룹이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중심으로 뭉쳐 신정동지회를 결성했다. 처음에는 나카소네, 나카무라 우메키치, 노다 다케오 등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됐지만, 1968년 12월 나카소네가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나카소네파는 사토 지지로 선회하여 주류파가 되었다.
나카소네파는 하토야마 민주당 내 반(反) 기시 노부스케 세력이 중심이 되어 탄생했기에 다른 파벌에 비해 영수의 구심력이 약했고,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으며, 1974년 미키 다케오 내각을 지지했다. 1976년 미키 끌어내리기 때에도 미키를 지지했고, 1979년 40일 항쟁 때는 비주류파였으나 1980년 해프닝 해산 때는 주류파로 복귀하는 등 '풍향계'라는 비판 속에서도 당내 정치 흐름을 읽고 1982년 나카소네가 총리대신이 되었다.
1978년 파벌 이름을 정책과학연구소로 개칭했다. 나카소네 총리 재임 시절, 와타나베 미치오계(무토 가분, 야마사키 다쿠, 오치 이헤이 등)와 후지나미 다카오계(노다 다케시, 사토 분세이)가 활발히 활동, 와타나베와 후지나미가 후계자 경쟁을 벌였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후지나미가 실각하고 나카소네도 파벌에서 이탈했다. 와타나베 근신 중 우노 소스케가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참의원 선거 패배로 단명했다. 1990년 사쿠라우치 요시오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와타나베가 새 회장이 되었다.
2. 2. 와타나베파 (1990년~1998년)

와타나베 미치오는 사쿠라우치 요시오로부터 파벌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파벌에 대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중견·소장파 의원들은 와타나베를 지지했지만, 사토 고고, 나카오 에이이치, 마쓰나가 히카루 등 파벌 간부들은 와타나베와 동격 의식이 강했고, 에도 다카미는 자신이 와타나베의 부하가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 나카소네가 자민당에 복당한 뒤 파벌 최고고문이 되자, 와타나베도 나카소네를 무시할 수 없었다. 와타나베는 1991년과 1993년 총재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1993년 총선 이후 자민당이 야당이 되면서 와타나베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안 표결에서 야마구치 도시오, 오이시 센파치, 이시바 시게루, 사사가와 다카시가 찬성표를 던졌고, 총선 후 이시바, 사사가와, 오이시 마사미쓰가 자민당을 탈당했다. 1994년에는 가키자와 고지, 사토 시즈오, 아라이 쇼케이 등 와타나베가 후원하던 소장파 의원들이 잇따라 자민당을 탈당하거나 파벌을 이탈하면서 와타나베의 리더십은 타격을 입었다.
와타나베는 총리대신이 되기 위해 오자와 이치로와 손을 잡으려 했으나, 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 생명에 악영향을 미쳤다. 1996년 자민당-사회당 연립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출범 당시 나카소네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를 지지했으나 실패했고, 이 무렵 나카소네의 파벌 내 영향력도 약해졌다.
와타나베는 1995년 9월 15일에 병사했다. 와타나베 사후 나카소네는 최고고문(회장 대행)을 맡았고, 사토, 나카오, 무토 등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가 되었다. 1998년 야마자키 다쿠 그룹 37명이 파벌을 이탈하여 근미래정치연구회를 결성했다.
2. 3. 무라카미파 (1998년~1999년)

야마사키가 37명을 이끌고 파벌을 이탈하면서 정책과학연구소는 순식간에 소규모 파벌로 전락했다. 이에 참의원의 실력자였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를 새 회장으로 추대하여 전환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참의원 의원이 자민당 파벌의 영수가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1998년 9월 청화회를 이탈한 가메이 시즈카가 이끄는 그룹과 1999년 3월 합병하여 지수회를 결성했다. 이로써 정책과학연구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주요 인물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나카소네파의 창립자이자 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풍향계'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정세 판단에 능했다. 와타나베 미치오는 나카소네의 후계자로 파벌을 이끌었으나, 파벌 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참의원 의원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자민당 파벌 영수가 되었다.
그 외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지수회 주요 인물 | ||||
---|---|---|---|---|
구분 | 이름 | 지역구 | 당선 횟수 | 비고 |
중의원 의원 | 하라 겐자부로 | 비례 긴키 | 20선 |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비례 기타칸토 | 19선 | ||
사쿠라우치 요시오 | 비례 주고쿠 | 18선 | ||
사토 다카유키 | 비례 홋카이도 | 11선 | ||
중의원 의원 | 나카오 에이이치 | 야마나시 1구 | 11선 | ||
마쓰나가 히카루 | 사이타마 1구 | 10선 | ||
무토 가몬 | 기후 3구 | 10선 | ||
키베 요시아키 | 시즈오카 7구 | 10선 | ||
오치 이헤이 | 비례 시코쿠 | 10선 | ||
나카야마 마사키 | 비례 긴키 | 9선 | ||
중의원 의원 | 에토 다카미 | 미야자키 2구 | 9선 | ||
타니 요이치 | 효고 5구 | 8선 | ||
요사노 가오루 | 도쿄 1구 | 7선 | ||
시마무라 요시노부 | 도쿄 16구 | 7선 | ||
이나가키 미오 | 비례 도카이 | 7선 | ||
마키노 타카모리 | 후쿠이 2구 | 5선 | ||
중의원 의원 | 이부키 분메이 | 교토 1구 | 5선 | ||
사토 시즈오 | 홋카이도 4구 | 3선 | ||
에토 세이이치 | 비례 규슈 | 3선 | ||
요네다 겐조 | 비례 미나미칸토 | 2선 | ||
중의원 의원 | 하기야마 쿄겐 | 비례 호쿠리쿠 신에쓰 | 2선 | ||
야나기모토 타쿠지 | 비례 긴키 | 2선 | ||
니시카와 코야 | 토치기 2구 | 1선 | ||
와타나베 요시미 | 토치기 3구 | 1선 | ||
중의원 의원 | 요시다 로쿠자에몬 | 니가타 1구 | 1선 | ||
사카가미 요시히데 | 비례 긴키 | 1선 | ||
노세 카즈코 | 비례 주고쿠 | 1선 | ||
무라카미 세이호 | 비례구 | 4선 | ||
참의원 의원 | 나카소네 히로후미 | 군마현 | 3선 | ||
야노 테츠로 | 토치기현 | 2선 | ||
이시와타 키요모토 | 가나가와현 | 2선 | ||
참의원 의원 | 가토 노리후미 | 오카야마현 | 2선 | ||
코야마 타카오 | 비례구 | 1선 | ||
요다 토모하루 | 비례구 | 1선 |
지수회 탈퇴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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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탈퇴 시기 | 탈퇴 후 행보 | 비고 |
야마나카 사다노리 | 1974년, 1998년 | 1978년 복귀, 1999년 지수회 복귀 | |
고노 요헤이 | 1976년 | 신자유클럽 참여 | |
오이시 다케카즈 | 1976년 | 신자유클럽 참여 | |
나카니시 게이스케 | 불명 | 목요클럽 이적 | |
사와다 잇세이 | 1989년 | 미쓰카파 이적 | |
노스에 친페이 | 1993년 | 신생당 참여 | |
고사카 겐지 | 1993년 | 신생당 참여 | |
오이시 마사미쓰 | 1993년 | 개혁의 회 참여 | |
이시바 시게루 | 1993년 | 개혁의 회 참여 | |
사사카와 다카시 | 1993년 | 개혁의 회 참여 | |
야마구치 도시오 | 1993년 | ||
호시노 토모이치 | 1994년 | 신생당 참여 | |
노다 다케시 | 1994년 | 고시회 참여 후 복당, 근미래정치연구회 합류 | |
아라이 마사카게 | 1994년 | 자유당 참여 후 복당, 세이와 정책 연구회 합류 | |
가키자와 고지 | 1994년 | 자유당 참여 후 복당, 근미래정치연구회 합류 | |
히라이 다쿠시 | 1995년 | ||
이나바 야마토 | 1997년 | 근미래정치연구회 합류 | |
야마자키 타쿠, 아마리 아키라 등 | 1998년 12월 | 근미래정치연구회 합류 | |
사쿠라이 이쿠조, 하마다 야스카즈, 야마구치 슌이치 | 1998년 12월 |
지수회 기타 인물 | ||||
---|---|---|---|---|
3. 1.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나카소네파의 창립자이자 총리대신을 지냈다. 파벌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풍향계'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정세 판단에 능했다.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고, 1974년 미키 다케오 내각을 지지하여 주류파에 합류했다. 40일 항쟁 때는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와 함께 비주류파 연합을 형성했지만, 1980년 해프닝 해산에서는 막바지에 비주류파를 이탈하여 주류파에 합류했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를 통해 1982년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1978년 자민당 내 파벌 해소 움직임에 따라 파벌 명칭을 정책과학연구소로 변경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후지나미 다카오가 실각하자, 나카소네도 파벌에서 이탈했다.
3. 2. 와타나베 미치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후계자로 파벌을 이끌었던 와타나베 미치오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파벌 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중견·소장파 의원들은 와타나베를 지지했지만, 사토 고고, 나카오 에이이치, 마쓰나가 히카루 등 파벌 간부들은 와타나베와 동격으로 여겼고, 에도 다카미는 자신이 와타나베의 부하가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나카소네가 자민당에 복당하여 파벌 최고고문이 되자 와타나베는 나카소네의 의향대로 파벌을 운영해야 했다. 와타나베는 1991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1993년 총선 이후 자민당이 야당이 되면서 와타나베의 입장은 더욱 어려워졌다.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에 야마구치 도시오, 오이시 센파치, 이시바 시게루, 사사가와 다카시가 찬성표를 던졌고, 총선 후 이시바, 사사가와, 오이시가 자민당을 탈당했다. 1994년에도 가키자와 고지, 사토 시즈오, 아라이 쇼케이 등 와타나베가 후원했던 소장파 의원들이 잇따라 자민당을 탈당하면서 와타나베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받았다.
와타나베는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낙마한 뒤 오자와 이치로에게 소속 의원 50명을 데려오면 총리대신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소속 의원들이 자민당 탈당을 원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와타나베가 오자와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점은 그의 정치 생명에 악영향을 미쳤다. 1996년 하타 쓰토무가 총리대신직을 내려놓고 자민당이 일본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지지하며 여당에 복귀할 때, 와타나베는 나카소네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를 지지했지만 실패했다. 이 무렵에는 와타나베뿐 아니라 나카소네의 파벌 내 영향력도 약해져 있었다.
총리대신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와타나베는 1995년 9월 병사했다. 와타나베 사후 후임 회장을 선임하지 않은 채 나카소네가 최고고문 자리를 유지하고 사토, 나카오, 무토 가분 등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됐다. 파벌의 통칭은 구 와타나베파가 되었다.
3. 3. 무라카미 마사쿠니
야마사키가 37명을 이끌고 파벌을 이탈하면서 정책과학연구소는 순식간에 소규모 파벌로 전락했다. 이에 참의원의 실력자였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를 새 회장으로 추대하여 전환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참의원 의원이 자민당 파벌의 영수가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1998년 9월 청화회를 이탈한 가메이 시즈카가 이끄는 그룹과 1999년 3월 합병하여 지수회를 결성했다. 이로써 정책과학연구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4. 그 외 주요 인물
지수회 주요 인물 | ||||
---|---|---|---|---|
구분 | 이름 | 지역구 | 당선 횟수 | 비고 |
중의원 의원 | 하라 겐자부로 | 비례 긴키 | 20선 |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비례 기타칸토 | 19선 | ||
사쿠라우치 요시오 | 비례 주고쿠 | 18선 | ||
사토 다카유키 | 비례 홋카이도 | 11선 | ||
중의원 의원 | 나카오 에이이치 | 야마나시 1구 | 11선 | ||
마쓰나가 히카루 | 사이타마 1구 | 10선 | ||
무토 가몬 | 기후 3구 | 10선 | ||
키베 요시아키 | 시즈오카 7구 | 10선 | ||
오치 이헤이 | 비례 시코쿠 | 10선 | ||
나카야마 마사키 | 비례 긴키 | 9선 | ||
중의원 의원 | 에토 다카미 | 미야자키 2구 | 9선 | ||
타니 요이치 | 효고 5구 | 8선 | ||
요사노 가오루 | 도쿄 1구 | 7선 | ||
시마무라 요시노부 | 도쿄 16구 | 7선 | ||
이나가키 미오 | 비례 도카이 | 7선 | ||
마키노 타카모리 | 후쿠이 2구 | 5선 | ||
중의원 의원 | 이부키 분메이 | 교토 1구 | 5선 | ||
사토 시즈오 | 홋카이도 4구 | 3선 | ||
에토 세이이치 | 비례 규슈 | 3선 | ||
요네다 겐조 | 비례 미나미칸토 | 2선 | ||
중의원 의원 | 하기야마 쿄겐 | 비례 호쿠리쿠 신에쓰 | 2선 | ||
야나기모토 타쿠지 | 비례 긴키 | 2선 | ||
니시카와 코야 | 토치기 2구 | 1선 | ||
와타나베 요시미 | 토치기 3구 | 1선 | ||
중의원 의원 | 요시다 로쿠자에몬 | 니가타 1구 | 1선 | ||
사카가미 요시히데 | 비례 긴키 | 1선 | ||
노세 카즈코 | 비례 주고쿠 | 1선 | ||
무라카미 세이호 | 비례구 | 4선 | ||
참의원 의원 | 나카소네 히로후미 | 군마현 | 3선 | ||
야노 테츠로 | 토치기현 | 2선 | ||
이시와타 키요모토 | 가나가와현 | 2선 | ||
참의원 의원 | 가토 노리후미 | 오카야마현 | 2선 | ||
코야마 타카오 | 비례구 | 1선 | ||
요다 토모하루 | 비례구 | 1선 |
- 야마나카 사다노리는 1974년에 탈퇴했다가 1978년에 복귀, 1998년에 근미래정치연구회에 참여했다가 1999년에 다시 지수회로 돌아왔다.
- 고노 요헤이와 오이시 다케카즈는 1976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자유클럽에 참여했다.
- 나카니시 게이스케는 목요클럽으로 이적했다.
- 사와다 잇세이는 1989년 자민당 탈당 후 복당하여 미쓰카파로 옮겼다.
- 노스에 친페이는 1993년 자민당 탈당 후 신생당에 참여했다.
- 고사카 겐지는 1993년 자민당 탈당 후 신생당 결성에 참여했다.
- 오이시 마사미쓰, 이시바 시게루, 사사카와 다카시는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개혁의 회에 참여했다.
- 야마구치 도시오는 1993년에 자민당을 탈당했다.
- 호시노 토모이치는 1994년 자민당 탈당 후 신생당에 참여했다.
- 노다 다케시는 1994년 자민당 탈당 후 고시회에 참여했다가 복당 후 근미래정치연구회에 들어갔다.
- 아라이 마사카게는 1994년 자민당 탈당 후 자유당 결성에 참여했다가 자민당 복당 후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들어갔다.
- 가키자와 고지는 1994년 자민당 탈당 후 자유당 결성에 참여했다가 자민당에 복당했다가 다시 탈퇴하여 근미래정치연구회 발기에 참여했다.
- 히라이 다쿠시는 1995년에 자민당을 탈당했다.
- 이나바 야마토는 1997년에 탈퇴하여 근미래정치연구회 발기에 참여했다.
- 1998년 12월에는 야마자키 타쿠, 아마리 아키라 등 여러 의원들이 근미래정치연구회 발기에 참여했다.
- 같은 해 12월, 사쿠라이 이쿠조, 하마다 야스카즈, 야마구치 슌이치는 지수회를 탈퇴했다.
지수회 기타 인물 | ||||
---|---|---|---|---|
4. 역대 회장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출신 정당 | 주요 경력 및 비고 |
---|---|---|---|---|---|
1 | -- | 1968년 12월 ~ 1990년 2월 | 자유민주당 | 하토야마 이치로의 측근 고노 이치로의 파벌에서 분리, 1982년 총리 취임. 리크루트 사건으로 탈당. | |
2 | -- | 1990년 2월 ~ 1995년 9월 15일 | 자유민주당 |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후계자. 총재 선거 출마, 자민당 야당 전락,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조반 등 당내 혼란 주도. 재임 중 사망. | |
3 | -- | 1998년 12월 ~ 1999년 3월 18일 | 자유민주당 | 참의원 의원 출신 첫 자민당 파벌 영수. 카메이 시즈카 그룹과 합병하여 지스이카이 결성, 정책과학연구소 소멸. |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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