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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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기(빈경)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자는 빈경이며 경서에 밝고 재능이 뛰어나 마융의 가문에 장가들었으나 외척을 경멸했다. 관직에 나아가 사공연을 지냈으며, 환관 세력과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은둔 생활을 했다. 맹자장구와 삼보결록을 저술했으며,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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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빈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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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조기 |
원 이름 | 조가 (趙嘉) |
자 | 빈경 (邠卿), 태경 (臺卿) |
출생지 | 시안, 산시 성 |
사망일 | 201년 (90세 이상) |
배우자 | 마융의 조카 |
가족 관계 | 조반 (형) 조무기 (형) 조희 (사촌) |
직업 | 관리, 학자 |
관직 정보 | |
태상 (太常) | 재임 기간 미상, 헌제 시대 |
태복 (太僕) | 재임 기간: 192년 ~ 미상, 헌제 시대 |
의랑 (議郎) | 재임 기간: 191년 ~ 192년, 헌제 시대, 동탁 시대 |
2. 생애
조기는 후한 말기의 관리이자 학자로, 자는 '''빈경'''(賓卿)이다.[7] 경조윤 장릉현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경서에 능통하고 재능이 뛰어났다.[7] 그는 외척 마융의 가문과 혼인했지만, 외척 세력을 경계하여 거리를 두었다.[7]
초기에는 관직에 나아가 강직한 성품으로 활동했으나[7], 부패한 환관 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관직을 버리기도 했다.[8][7] 특히 중상시 당형의 형인 당현을 비판한 일로 인해 연희 원년(158년) 박해를 피해 오랜 기간 도피 및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4] 이 시기 손숭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4]
당씨 일족이 몰락한 후 다시 세상에 나와 병주자사까지 올랐으나, 당고의 금 사건에 연루되어 실각하는 등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4] 황건적의 난 이후 혼란한 시기에 다시 등용되어 동탁 집권기에는 태복을 지냈고[4], 말년에는 헌제의 명으로 유표에게 낙양 수복을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4] 이후 태상에 임명되었으며[4], 건안 6년(201년) 90여 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4]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조기의 자는 '''빈경'''(賓卿)이며, 처음 이름은 조가(趙嘉)였다. 경조윤 장릉현 사람이다.[7] 젊어서부터 경서에 밝고 재능과 기예가 뛰어났으며, 마융의 가문에 장가들어 마종강(마융의 숙부 마돈의 딸[3])과 결혼했다.[7] 그러나 당시 외척 세력이었던 마융을 탐탁지 않게 여겨, 그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피했다.[7]관직에 나아가기 전, 30세 무렵부터 7년간 큰 병을 앓기도 했다.[7] 병이 나은 후, 영흥 2년(154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司空掾)이 되었다.[7] 이때 조기는 지방관이 부모의 상을 치르기 위해 임지를 떠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7] 이후 대장군 양기의 막하에 들어갔으나, 그의 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얼마 후 피씨장(皮氏長)으로 자리를 옮겼다.[7] 당시 하동태수 유우(劉佑)가 떠나고 후임으로 좌승이 부임했는데, 그는 중상시 좌관의 형이었다.[8] 조기는 부패한 환관 집안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8] 그날 바로 관직을 버리고 서쪽으로 돌아갔다.[7] 이후 경조윤 연독(延篤)이 조기를 공조(功曹)로 삼았다.[7]
조기와 그의 일족은 중상시 당형(양기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5명의 환관 중 한 명)의 형인 당현을 자주 비판했는데[4], 이로 인해 연희 원년(158년) 당현이 경조윤으로 부임하자 박해를 피해 경조를 떠나야 했다. 그는 신분을 숨기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손숭(孫嵩)에게 의탁하여 수년간 숨어 지냈다.[4]
당형과 당현 형제가 죽은 뒤에야 경조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병주자사까지 승진했으나, 당고의 금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관직을 잃었다.[4]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혼란한 시국 속에서 다시 등용되었다.[4] 하진의 추천으로 둔황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임지로 가던 중 도적의 습격을 받아 부임하지 못하고 간신히 장안으로 피신했다.[4] 동탁이 헌제를 장안으로 천도시키자, 조기는 태복에 임명되었다.[4]
흥평 원년(194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 조기는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동탁에 의해 파괴된 낙양의 복구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임무를 맡았다.[4] 이후 조기는 형주에 계속 머물렀다. 과거 자신을 숨겨주었던 은인 손숭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조기는 그를 유표에게 추천하여 청주 자사로 삼게 했다.[4] 그 후 조기는 태상에 임명되었다.[4]
건안 6년(201년)에 향년 90여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2. 2. 은둔 생활
과거 중상시 당형의 형인 당현(唐玹)은 부정한 방법으로 경조윤의 호아도위(虎牙都尉) 자리에 올랐다.[4]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멸했으며, 조기와 그의 종형 조습(趙襲) 역시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로 인해 당현은 조기 형제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연희 원년(158년), 당현이 경조윤으로 부임하자 조기는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는 화를 피하기 위해 조카 조전과 함께 경조를 떠나 달아났다.[4] 예상대로 당현은 조기의 집안 사람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법을 적용해 모두 처형하였다.
조기는 신분을 숨기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피신해야 했다. 결국 북해의 시장에 정착하여 떡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때 안구(安丘) 사람 손숭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위험을 무릅쓴 채 여러 해 동안 숨겨주었다.[4]
훗날 당형을 비롯한 당씨 일족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숙청되자, 조기는 비로소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조기의 고된 사연과 그를 도운 손숭의 의로운 행동을 듣고 두 사람 모두를 등용하였다.
2. 3. 후한 말기 활동
젊어서부터 경서에 밝고 재능과 기예가 있었으며, 마융의 가문에 장가들었다.[7] 그러나 조기는 외척이었던 마융을 경멸하여 그와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관직에 나아갔으나 사람됨이 결백하고 강직하여 미움을 받았다. 이후 무거운 병에 걸려 7년 간 병상에 있었으나 치유되었다.
영흥 2년(154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司空掾)이 되었다. 이때 조기는 지방관이 부모의 상을 치르기 위해 임지를 떠나는 것을 허락할 것을 주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후 대장군 양기의 밑에 들어가 간언하였으나, 양기는 듣지 않았다.
이윽고 조기는 피씨장(皮氏長)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하동태수 유우(劉佑)가 군을 떠났는데, 후임으로 좌승이 부임하였다. 좌승은 중상시 좌관의 형으로, 조기는 환관 집안 사람의 부하가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8], 그날 바로 관직을 버리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이후 경조윤 연독(延篤)이 조기를 공조(功曹)로 삼았다.
예전에 중상시 당형(唐衡)의 형 당현(唐玹)은 경조의 호아도위(虎牙都尉)였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때문에 군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경멸했고, 조기와 그의 종형 조습(趙襲) 또한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 당현은 둘을 깊이 미워하였다.[4]
연희 원년(158년), 당현은 경조윤이 되었다. 조기는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조카 조전과 함께 달아났는데, 과연 당현은 조기의 집안 사람들을 잡아 중형에 처해 모두 죽였다.
조기는 결국 사방으로 난을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쳐 다니다가 이름을 숨기고 북해의 시내에서 떡장사를 하며 지냈는데, 이때 안구(安丘) 사람 손숭이 조기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채어 그를 수년간 숨겨 주었다.
훗날 당씨 일족이 주멸된 후 조기는 다시 밖으로 나왔고, 조정에서는 조기와 손숭의 일을 듣고 모두 불러들였다. 이후 병주자사까지 승진했지만, 당고의 금으로 실각했다.
황건적의 난 이후, 다시 등용되었다. 하진의 추천으로 둔황태수에 취임하지만, 부임지로 가는 도중에 도적에게 습격을 받아, 간신히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동탁이 헌제를 장안으로 천도시키자, 조기는 그 태복에 취임했다.
흥평 원년(194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 조기는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동탁이 파괴한 낙양 수복을 의뢰했다. 조기는 그대로 형주에 머물렀다. 과거 은인인 손숭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기에, 조기는 그를 추천하여 청주 자사로 삼았다. 그 후, 조기는 태상에 취임했다.
건안 6년(201년)에 사망했다. 향년 90여 세였다.
3. 저작
조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다음이 있다.
- '''맹자장구''': 『맹자』의 주석서이다.
- '''삼보결록''': 삼보 지역 인물들의 약전을 모은 책이다.
3. 1. 맹자장구
『맹자』의 주석서이며,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어 있다. 주자가 제시한 새로운 주석(신주)에 대비하여, 조기의 주석은 오래된 주석이라는 의미에서 고주(古注)라고 불린다.3. 2. 삼보결록
삼보 지역 인물들의 약전을 모아 엮은 책이다. 훗날 서진 시대의 지우(摯虞)가 주석을 달았다. 현재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흩어진 내용을 모아 엮은 즙일서(輯佚書)가 남아 있다. 서문은 『후한서』의 주석에 인용되어 전해진다.4. 가계
5.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조기(趙岐)는 소설 『삼국지연의』 제7회에 등장한다. 작중에서 동탁(董卓)이 원소와 공손찬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 역할로 나온다. 실제로 마일제와 조기가 원소와 공손찬에게 사자로 갔다는 기록은 역사서 『후한서』에도 남아 있다.
참조
[1]
서적
Houhanshu
[2]
문서
没年と、そのときに数え年で90歳あまりであったという『後漢書』の記述によれば、103年から112年の間に生まれたことになる
[3]
서적
三輔決録
後漢書趙岐伝
[4]
서적
魏略
삼국지 閻温전
[5]
서적
맹자장구
[6]
문서
어사대(御史臺)에서 태어난 것에 기인하여 지었다.
[7]
서적
삼보결록주
후한서
[8]
문서
피씨현은 하동군의 속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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