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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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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격보병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해 개발된 독일군의 특수 부대이다.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의 등장으로 밀집 대형 전술이 무력화되면서, 각국은 분산 대형으로의 변화를 모색했고, 충격보병은 이러한 전술 변화의 일환으로 등장했다. 독일군은 참호전에 대응하기 위해 돌격 대대와 특공대를 편성했으며, 윌리 로어 대위의 지휘 아래 수류탄과 중화기를 활용하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충격보병은 1918년 미카엘 작전 등에서 활약했지만, 지형, 보급, 인플루엔자 유행 등의 요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충격보병의 경험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준 군사 조직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서도 유사한 부대가 운용되었다. 충격보병은 훈련, 화기, 야전 장비 등에서 일반 보병과 차별화되었으며, 침투 전술을 활용하여 참호 돌파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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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보병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MP 18과 루거 권총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당시 충격보병(프랑스, 1918). 1914년 부츠를 대체하기 위해 팔꿈치와 무릎에 보강 패치와 끈이 있는 변형된 유니폼인 슈탈헬름을 입고 있다.
MP 18과 루거 권총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충격보병 (프랑스, 1918년). 1914년 부츠를 대체하기 위해 팔꿈치와 무릎에 보강 패치가 있는 변형된 유니폼인 슈탈헬름을 착용하고 있다.
명칭 (독일어)Sturmtruppen (슈투름트루펜)
종류충격 보병
활동 기간1916년 - 1918년
국가독일 제국
소속독일 제국 육군
역할대전차전
포병 관측병
근접전
지뢰 제거
직접 행동
백병전
기동전
정찰
기습
정찰
충격 전술
참호전
규모17개 대대 (1917년 기준)
색상녹색, 회색
장비MP 18
Karabiner 98a
루거 권총
슈탈헬름
Stielhandgranate
참전 전투서부 전선
주요 지휘관에른스트 윙거
빌리 로어
상세 정보
추가 역할기존 보병이 실패할 때 투입되어 보병의 길을 열어주고 특수 작전(가스 공격, 참호 습격, 전선 습격)을 수행
관련 링크
Stormtrooper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First World War (WW1)
Military Developments of World War I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First World War (WW1)

2. 역사

후장식 소총, 기관총, 그리고 신형 포병의 등장은 19세기 말부터 기존의 밀집 대형 보병 전술에 큰 변화를 요구했다. 각국 군대는 분산된 대형으로 접근 후 돌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화력의 발전은 이러한 시도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제2차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이 보여준 분산과 신속 기동 중심의 전술은 미래 보병 전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참호전의 교착 상태가 심화되자,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돌파 전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기존의 대규모 포격 후 밀집 돌격 방식은 막대한 희생만 낳았을 뿐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독일 제국 육군을 중심으로 적 방어선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소규모 정예 부대 운용 개념, 즉 충격보병 전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는 참호 돌파를 위한 새로운 시도였으며, 이후 현대 보병 전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후장식 소총이 도입된 이후, 밀집 대형을 이용한 보병 돌격의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인식이 점차 커져갔다. 19세기 말까지 각국 군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산된 대형으로 적에게 접근하다가 마지막 짧은 거리만을 돌격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군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59)에서, 프로이센군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에서, 그리고 이후 독일군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이러한 전술 변화를 보여주었다.

기관총의 등장과 유압식 반동 기구를 갖춘 신형 포병의 도입은 기존의 밀집 대형 전술에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당시 영국군에 맞서 싸운 보어인들의 전술은 큰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보어 전술'은 단순히 마지막 백병전 돌격을 준비하기보다는, 화력 우위를 확보하고 적의 사격이 효과적이지 않을 때 빠르게 이동하는 데 중점을 둔 분산 대형 전술이었다. 이는 향후 보병 전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후장식 소총의 도입과 기관총, 유압식 반동 기구를 갖춘 포병의 등장은 기존의 밀집 보병 전술에 큰 변화를 요구했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59),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등을 거치며 군대는 분산된 대형으로 접근 후 마지막에 돌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화력의 발전은 이러한 시도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에서 보어인들이 보여준 전술은 분산과 신속 기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초기 참호 공격은 전선에 걸쳐 장시간 포격을 가한 뒤, 보병이 밀집 대형으로 돌격하여 남은 방어선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아주 짧은 거리를 확보하는 데 그쳤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켜 결국 양측 군대를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에 빠뜨렸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특히 독일 제국 육군을 중심으로 참호 돌파를 위한 새로운 전술 개발과 특수 부대 편성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2. 2. 1. 전술 개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참호에 대한 공격은 전선을 따라 긴 포격을 가한 뒤 보병이 밀집 대형으로 돌격하여 수비 병력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방식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짧은 전진에 그쳤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가져왔다.[28]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 유압식 반동 기구를 채택한 포병의 등장은 이러한 밀집 대형 돌격의 효용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프로이센, 독일 등은 분산 대형으로 접근 후 마지막에 돌격하는 방식을 시도했으며,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에서 보어인들이 보여준 전술은 화력 우위를 확보하고 신속하게 이동하는 분산 전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빌리 로어 대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 전술 개발에 앞장섰다. 1915년 봄, 독일 제국 육군은 최초의 실험적 돌격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공병 출신인 칼소 소령이 창설하여 '칼소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슈투름압타일룽 칼소de)'로 불렸으며, 이후 빌리 로어 대위가 지휘를 맡아 개선했다.[4] 이들은 기존 프로이센의 전술을 발전시켜 독일식 침투 전술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Stoßtruppen|슈토스트루펜de(돌격 부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크루프사에서 개발한 37mm 경포를 운용했으나, 발사 시 발생하는 섬광 때문에 쉽게 위치가 노출되어 프랑스군의 포격 목표가 되는 등 실전에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돌격 기회를 엿보는 특공대 (1917년)


1916년 5월 27일, 빌리 로어 대위는 '돌격대대 배치 지침서'를 통해 기존 돌격 부대를 대체할 Stoßtrupp|슈토스트루프de(특공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 특공대는 하사관의 지휘 아래 4~8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무인지대를 통과하고 철조망을 넘어 참호에 침투하며, 수류탄과 지원 화기를 이용해 벙커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 로어 대위의 제안은 1916년판 보병 교범에 반영되었고,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의해 공식 전술로 채택되었다. 이는 신병들을 빠르게 참호전에 투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독일군 돌격대의 세당구 훈련, 프랑스 (1917).


한편, 연합국 측에서도 새로운 전술이 모색되었다. 프랑스 육군의 앙드레 라파르크 대위는 1915년 자신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참호전에서의 공격'이라는 문서를 출간했다.[5] 그는 첫 공격 부대가 적 방어선의 취약점을 식별하고, 후속 부대가 그곳을 집중 공격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프랑스 군 당국은 이 문서를 정보용으로 출판했지만 실제 전술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대영 제국 군대는 이 문서를 번역하지 않았고, 비록 비공식적으로 일부 내용이 채택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화력 중심의 전술을 고수했다. 미국에서는 1916년 ''보병 저널''을 통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29][6] 독일군은 1916년에 라파르크의 문서를 입수하여 번역하고 부대에 배포했지만,[30][7] 이미 그보다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더 정교한 침투 전술을 개발하고 있었다.[31][32][33][34][8][9][10][11] 라파르크의 전술은 높은 사상자를 감수하더라도 보병의 연속적인 돌파(wave)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독일군의 전술과 차이가 있었다.[35][12]

영국 육군은 1917년 2월, 매뉴얼 SS 143을 발표하며 전술 변화를 꾀했다. 이전과 달리 소대를 기본 전술 단위로 삼고, 소대를 루이스 경기관총, 총류탄, 수류탄, 소총 등 4개 분과로 나누어 조직했다. 이는 솜 전투 이후 충분히 보급된 참호전 장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영국군은 정교한 포병 섬광 탐지 및 음향 측정 기술로 돌격 부대를 지원했지만, 독일군은 보다 정확한 측정 장비를 갖춘 청음 방식에 더 의존했다.[36][14]

이러한 충격보병 전술과 유사한 개념은 이전에도 제기된 바 있다. N. R. 맥마흔은 1909년에 병과 합동 전술, 특히 경기관총의 활용과 분산된 화력 통제 및 전술 지휘 체계(Auftragstaktik)의 중요성을 주장했는데, 이는 6년 후 독일군이 채택한 Stoßtrupptaktik|슈토스트루프탁티크de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였다.[13]

1918년 독일의 훈련 지도 규정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구상에 따라 모든 보병을 돌격 부대 수준으로 훈련시키려는 목표가 제시되었으나, 실제 병사들의 훈련 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해 완전한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3. 독일의 충격보병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 육군은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전술과 부대 편성을 모색했다. 특히 참호전의 강력한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큰 과제였으며, 이를 위해 공병 부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1915년 3월, 제18공병대대장 칼소(Calsow) 소령은 최초의 공식적인 돌격 부대인 '칼소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de)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참호 돌파를 위해 특별히 편성되었으나, 초기 운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참호 돌파 시 가장 큰 위협이었던 적 기관총 진지를 제압하기 위해 개발된 크루프사의 37mm 경포는 실전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군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독일 육군은 참호 돌파를 위한 특수 부대인 '''돌격 대대'''(Sturmbataillonde)를 17개 대대와 2개 독립 중대 규모로 편성했다. 이들은 주로 새로운 전술을 연구하고 다른 부대를 훈련시키는 교도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어려운 전투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또한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특공대'''(Stoßtruppende)라는 개념의 부대도 운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군의 충격보병 운용 경험은 이후 전술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1. 칼소(Calsow) 돌격대

충격보병이라는 개념은 1915년 3월 독일 전쟁부가 제8군에 Sturmabteilung Calsow|슈름압타일룽 칼소de (칼소 돌격대) 창설을 지시하면서 처음 등장했다.[27][1] 이 부대는 사령부와 두 개의 공병 중대, 37mm 포(Sturmkanone|슈름카노네de) 포대로 구성되었으며,[1] 공격 시 보호 수단으로 무거운 방패와 방탄복을 사용할 예정이었다.[27][1]

그러나 칼소 돌격대는 본래 의도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27][1] 대신 연합국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프랑스 전선에 긴급 증원군으로 투입되었다.[1] 그 결과, 1915년 6월까지 부대 병력의 절반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27][1] 칼소 소령은 부대가 의도한 대로 사용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지만, 이 일로 해임되었다.[1]

3. 2. 로어 돌격대대



제5돌격대대 "로어" 깃발 (1917-1918)


1915년 봄 칼소 소령이 창설한 독일 최초의 실험적 돌격 부대는 1915년 9월 8일부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전 근위소총대대 사령관이었던 빌리 로어 Hauptmann|하우프트만de(대위)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부대는 그의 지휘 아래 개선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1][15][16][27] 로어 대위는 부임 직후 부대 편제를 강화하여 기관총 소대화염방사기 소대를 추가했다. 기존의 보병 지원포는 무거워서 전장에서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획한 러시아제 76.2mm 요새포를 기반으로 개량한 신형 포를 개발하여 지급받았다.[1][15][16][27][37][38]

로어 대위는 병사들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방탄복과 방패 도입을 실험했지만, 참호 돌파에는 신속한 기동성이 방어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유일하게 채택된 방어 장비는 새로운 형태의 강철 투구인 Stahlhelm이었는데,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후 모든 독일 부대의 표준 장비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사용되었다.[1][27]

로어 대위는 자신의 이전 전선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격 전술을 개발했다. 이 전술의 핵심은 분대 규모의 작은 돌격대(Sturmtruppen|슈투름트루펜de 또는 Stoßtruppen|슈토스트루펜de)가 다수의 중(重)지원 화기와 야포의 긴밀한 지원 아래, 수류탄을 주무기로 활용하여 적 참호를 신속하게 돌파하고 소탕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하위 제대 수준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강조했다.[1][27] 이 새로운 전술은 1915년 10월, 보주산맥에 위치한 프랑스군 진지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을 통해 처음으로 실전에서 효과를 입증했다.[1]

1915년 12월부터 돌격대는 다른 독일 부대 병사들에게 새로운 돌격 전술을 가르치는 훈련 부대의 역할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돌격대의 장비 역시 새로운 전술에 맞춰 개선되었다. 더 가벼운 군화를 지급받았고, 포복 시 마모되기 쉬운 무릎과 팔꿈치 부분에는 가죽 덧댐이 추가된 군복이 보급되었다. 수류탄을 효율적으로 휴대하기 위한 특수 가방이 기존의 탄약 주머니를 대체했으며, 표준 게베어 98 소총 대신 기병들이 사용하던 더 가볍고 짧은 카라비너 98a 소총으로 교체되었다. 근접 전투 시 화력을 높이기 위해 32발들이 드럼 탄창을 장착한 9mm 랑게 08 권총이 지급되기도 했다. 길고 거추장스러웠던 기존 총검 대신 짧은 총검이 보급되었고, 참호 칼, 곤봉 등 다양한 근접전 무기들이 추가되었다.[1][27]

로어 대위가 이끄는 돌격대가 주도한 첫 번째 주요 공세는 1916년 2월 베르됭 전투의 시작을 알린 독일군의 초기 공격이었다. 돌격대는 공격의 선봉(첫 번째 웨이브)에 서서, 포격이 끝나자마자 즉시 프랑스군 참호로 돌격하여 일부 지역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2월 25일,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두오몽 요새를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전술의 위력을 보여주었다.[1][27]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16년 4월 1일, 부대는 공식적으로 '로어 돌격대대'(Sturmbataillon Rohr|슈투름바타일리온 로어de)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부대 규모도 기존 2개 중대에서 4개 중대로 확장되었으며, 동시에 여러 예거 대대들이 로어 돌격대대의 편제와 전술을 따르도록 재훈련되기 시작했다.[1][17][27][39] 로어 대위는 나중에 소령으로 진급했다.[1] 1916년 5월 27일, 로어 대위는 "돌격대대 배치 지침서"를 작성하여, 하사관이 지휘하는 4~8명 규모의 소규모 특공대(Stoßtrupp|슈토스트룹de)를 편성하고 운용하는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 지침서에는 특공대가 무인지대 통과, 철조망 돌파, 참호 침투, 수류탄 투척, 지원 화기를 이용한 벙커 및 기관총 진지 파괴 등 구체적인 전술 수행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 제안은 1916년판 보병 교범에 채택되어 독일 육군의 공식 전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3. 후티어와 독일군 마지막 공세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8군 사령관이었던 오스카 폰 후티어 장군은 새로운 보병 침투 전술의 대표적인 옹호자였으며, 이 전술은 연합군 사이에서 후티어 전술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티어는 기존의 공격 방식과 새로운 시도를 결합한 복합적인 전략을 제안했다.[40][18]

후티어 전술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되었다.

# '''짧고 격렬한 포격''': 적 전선을 완전히 파괴하기보다는 무력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 위해 다수의 독가스탄과 고폭탄을 혼합하여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포격한다.

# '''돌격대의 침투''': 포격 지원 아래, 특수 훈련을 받은 ''돌격대''(Stoßtruppen|슈토스트루펜de)가 분산된 형태로 전진한다. 이들은 가능한 한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며, 사전에 파악된 적 방어선의 취약 지점을 통해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지휘소나 포병 진지를 파괴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후속 보병 부대의 공격''': 경기관총, 박격포, 화염방사기 등으로 무장한 보병 대대가 돌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적의 거점을 공격한다. 필요시 박격포와 야전포가 추가 지원 사격을 하여 돌파 속도를 높인다.

# '''정규 보병의 소탕''': 마지막 단계로, 일반 보병 부대가 투입되어 남아있는 적 저항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점령 지역을 확보한다.

이 새로운 전술의 핵심은 소규모 그룹 단위의 기동과 엄호 사격에 있었다. 병사들은 가능한 모든 엄폐물을 활용하여 소그룹으로 나뉘어 돌진하고, 다른 그룹이 전진하는 동안 서로 엄호 사격을 제공했다. 또한, 멀리 떨어진 사령부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거대하고 상세한 작전 계획 대신, 임무형 전술을 도입하여 현장의 초급 장교나 하급 지휘관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상황에 맞게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했다. 돌격대가 우회한 적의 강력한 방어 거점은 후속 부대가 처리하도록 맡겼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독일은 동부 전선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대거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확보된 병력으로 기존 부대를 후방으로 빼내 충격보병으로 재훈련할 시간을 벌었다.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새롭게 정비된 충격보병과 후티어 전술을 활용하여 대규모 공세인 미하엘 작전을 개시했다. 이 공세를 포함한 총 다섯 차례의 독일군 공세는 4년간 지속된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은 연합군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는 이르지 못했고, 결국 7월부터 연합군의 대규모 반격인 백일 공세가 시작되었다.

3. 3. 1. 공격 실패 이유

충격보병을 활용한 독일군의 공세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지적된다.

  • 초기 공격이 하필 가장 강력하게 방어된 영국군 구역을 상대로 이루어졌다.[19]
  • 선두 부대가 교대되거나 작전에서 제외되지 않아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1]
  • 작전 지역의 지형에 강, 마을, 숲, 운하 등이 많아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1]
  •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확산 역시 전투력 약화에 영향을 미쳤다.[20]
  •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보급품 중 대량의 주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예상치 못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 기록은 "독일군의 투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술이 너무 풍부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1]

3. 4.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군 외 돌격부대

제3 돌격 중대와 제46 돌격 중대는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다른 부대들과 함께 이집트 원정군에 대한 반격에 참여했다. 이들은 1918년 3월 말 암만 제1차 전투 당시 암만에 대한 제1차 트랜스요르단 공격에 투입되었으나, 공격군은 요르단 강으로 후퇴해야 했다.[22]

한편, 제23 보병 사단의 돌격 부대는 제병 협동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보병 중대 1개(약 100명), 공병 소대 1개(장교 1명, 부사관 4명, 사병 30명), 경기관총 분대 7개로 구성되었다. 부대원들은 사단 내에서 선발되었으며, 독일식 돌격대 전술에 대한 4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이 돌격 부대는 나중에 돌격 대대로 확대되어 사단의 전투력을 강화했다.[23]

제24 돌격 중대(제24 보병 사단 소속)는 1918년 4월 말, 에스 살트에서 벌어진 슌넷 님린과 에스 살트에 대한 제2차 트란스요르단 공격 당시 다른 부대들과 협력하여 이집트 원정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22] 이 돌격 중대는 에스 살트 공격 동안 암만에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22]

가스 공격 속에서 돌격하는 독일군 부대

4. 바이마르 공화국에 미친 영향

로버트 G.L. 웨이트의 ''나치즘의 선봉''과 클라우스 테베라이트의 ''남성적 환상''에 따르면, 충격보병으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일부 심리적, 사회적 측면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모든 정당의 준군사 조직으로 이어졌다. 이 조직들은 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와 그들이 훈련시킨 젊은 신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기존 군대 문화와 다른 특징을 보였는데, 예를 들어 장교와 사병 사이의 공식적인 장벽이 상당 부분 허물어지고 그 자리를 강한 동료애와 충성심이 대신했다. 또한 참호전의 독특하고 극심한 폭력 상황은 병사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잔혹화" 과정을 겪게 만들었다.

충격보병의 경험과 특징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여러 준군사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는 군주제주의 성향의 ''슈탈헬름'', 독일 공산당(KPD)의 준군사 조직인 로터 프론트캠퍼분트(RFB), 그리고 나치당(NSDAP)이 자체 준군사 조직을 위해 이름을 차용한 ''돌격대''(SA) 등이 있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돌격 부대

1914년부터 1915년 겨울 사이, 동부 전선의 많은 지역이 참호전 양상으로 변했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다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연대들은 자발적으로 야크트코만도라고 불리는 보병 분대를 구성했다. 이 분대의 이름은 1886년에 창설된 러시아군의 특수 훈련 부대에서 따온 것으로, 주로 매복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정찰 임무를 수행하며, 무인지대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역할을 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최고 육군 지휘부(Armeeoberkommandodeu, AOK)는 이러한 특수 부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독일군의 경험을 참고하기로 결정했다. 1916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120명의 장교와 300명의 부사관이 프랑스 동코르 마을 근처에 위치한 독일 훈련 지역인 보빌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새롭게 창설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돌격 대대의 핵심 간부로 배치되었으며, 이전에 활동하던 야크트코만도 부대들은 이 새로운 돌격 대대에 통합되었다.

6. 오스만 제국의 돌격 부대

1917년, 오스만 제국의 국방부 장관 엔베르 파샤는 돌격대대 창설을 명령했다. 그해 5월, 장교와 부사관으로 구성된 간부들은 우크라이나의 두블리아니에서 돌격 전술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은 수도 근처 말테페에서 7월 1일 "콘스탄티노플 돌격 대대"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훈련을 위해 처음 도착한 병사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맨발인 경우가 많아, 다른 부대에서 더 적합한 병사들을 다시 선발해야 했다. 독일 교관의 도움으로 병사들은 화염 방사기(터키인들에게는 "지옥불 기계"로 알려짐)와 7.58 cm 미넨베르퍼 박격포 같은 무기 사용법을 익혔다. 오스만 군대는 자체적인 강철 헬멧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M1916 헬멧을 주문했지만, 야전에서 명령을 듣기 어렵게 만든다는 이유로 바이저와 목 보호대는 제거되었다.[24]

이 돌격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동 전역, 특히 시나이 및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디림 육군 집단의 일부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최신 서부 전선 침투 전술과 근접전 장비를 사용했으며, 포병과 기관총의 집중 사격 지원을 받았다.[25] 이 부대가 참여한 주목할 만한 작전으로는 1917년 12월 1일의 엘 부르즈 전투가 있다. 당시 오스만 돌격대대는 능선에서 호주 기병대 2개 중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영국군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저지당하고 고립되었다.[26]

7. 돌격대의 훈련

세당 인근의 충격 부대에 의한 훈련 (1917년)


돌격대의 훈련 내용은 일반 보병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새로운 훈련 방식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제도와 달리, 병사가 장교를 따르는 상의하달 체제가 아니었다. 대신 개인의 특성을 억압하지 않고 개인의 특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발휘시키도록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훈련의 대부분은 육체 단련에 할애되었으며, 일부 연병장에서는 축구, 달리기, 체조와 같은 유희적인 운동도 성행하여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독일의 작가이자 돌격대원으로 참전했던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는 그의 저서 《강철 폭풍 속에서》에서 훈련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0일간에 걸쳐, 우리는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고, 적의 목표를 재현한 방어 진지에 대한 돌격을 여러 차례 실시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병사들의 과격한 열광이 수 차례에 걸친 산탄적인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은, 실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 훈련과는 별도로, 우리는 다른 지역에 파견되었고 [...] 9월 22일, 밤, 숙소가 있는 제2선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야만족 집단의 선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이 녀석들은 매우 잘 조직되어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전술 훈련과 수류탄 투척법과 같은 다양한 기술적인 측면을 훈련받았다. 그 외에도 철조망 돌파, 참호 소탕, 화염 방사기 부대와의 연계 작전, 탄막 사격 하에서의 전진 등 다양한 전투 훈련을 실시했다. 이러한 격렬한 훈련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특공대의 장시간에 걸친 훈련은 일반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훈련 시간을 줄이는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다.

8. 돌격대의 화기

제1차 세계 대전 중 등장한 독일 제국의 충격보병은 참호 돌파와 같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화기를 운용했다. 초기에는 일반 보병과 같이 Gew98 소총을 사용했으나, 참호 환경에 더 적합하도록 길이가 짧은 Karabiner 98a가 점차 보급되었다.

참호 내 근접 전투를 위해 MP18 기관단총, 루거 P08 권총, 그리고 다량의 수류탄과 같은 무기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MP18은 충격보병의 상징적인 무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돌격 작전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MG08/15와 같은 경기관총, 박격포, 화염 방사기 등 다양한 지원 화기가 운용되었으며, 때로는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7.62cm 보병포와 같은 야포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특화된 무기 체계는 충격보병 전술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8. 1. 초기 장비

충격보병의 초기 표준 화기였던 게베어 98


1914년경 특공대를 시작으로 하는 충격보병의 초기 표준 화기는 게베어 98(Gewehr 98) 소총이었다. 이 소총은 일반적인 전투 상황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본격화된 참호전 환경에서는 긴 총신 길이 때문에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15년부터는 총신 길이를 줄인 카라비너 98a가 "제5 충격 대대(Sturmbataillon Rohr)"를 시작으로 보급되었다. 카라비너 98a는 기존 게베어 98과 다른 종류의 소총이었기에 관리상의 복잡함은 있었지만, 참호와 같이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에 더 적합했고, 정확성과 위력 면에서도 우수하여 서부 전선에서 충격보병 부대의 표준 병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8. 2. 근접 무기

드럼 탄창형 MP18 기관단총


루거 P0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개발된 1924년식 자루 수류탄의 복제품


독일군의 제안으로 베르크만 무기 제조사에서 개발한 MP18 기관단총은 1918년에 제식화되어 충격보병의 핵심 무기가 되었다. 1918년 시점에 약 3만 정이 공급되었으며, 이미 1917년부터 특공대의 표준 장비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에는 전 세계에 수출되어 국민당군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MP18 기관단총과 P08 권총을 든 충격보병 (1918년)


참호에서의 근접 전투나 백병전에서는 32발 스네일형 탄창을 장착한 루거 P08 권총이 다용되었다.

1915년에 채택된 1915년형 자루 수류탄은 1916년 베르됭 전투 이후 충격대대의 기본 장비가 되었다. 특공대는 일반 보병보다 더 많은 수류탄을 휴대하기 위해 양 어깨에 맨 삼태기에 수류탄을 넣어 다녔다. 자루 수류탄 외에 1917년형 알 수류탄도 함께 장비되었다.

8. 3. 지원 화기

수레로 운반되는 MG08/15 경기관총. 실제 사용 시에는 사수가 직접 휴대했다.


충격보병이 운용한 것으로 보이는 와 운용 병사들 (1918년 10월)


충격보병 부대는 개인 소화기 외에 별도의 지원 부대를 운용했다. 이 지원 부대에는 적진을 향해 신속하게 기동할 수 있는 병사들이 배치되었으며, 수류탄 외에도 화력 지원을 위한 새로운 병기가 요구되었다. 특히 참호전 환경에서는 기존의 무거운 MG08 중기관총(62kg)을 대체할 '경량 기관총'의 필요성이 커졌다.

독일은 1915년부터 경량 기관총 개발을 시도했다. 초기에는 자동 권총을 완전 자동으로 개조하거나, MG08 중기관총을 18kg까지 경량화하여 3명이 운반 가능하게 만든 MG08/15 등이 검토되었으나, 무게나 성능 면에서 충격보병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1917년까지도 실용적인 경량 기관총은 개발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규모 공세를 앞두고 경량 기관총의 실용화가 시급해지자, 독일군은 MG08을 공랭식으로 개량하여 무게를 15kg까지 줄인 MG08/18을 개발했다. 이와 동시에, 근접전에서 권총탄을 완전 자동으로 발사하여 강력한 제압 화력을 제공할 수 있는 단기관총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무기도 고안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실제 완성품이 없었지만, 후방에서 MG08/18이 지원 사격을 하는 동안 돌격 보병이 적진에 접근하여 단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제압한다는 전술적 구상이 이루어졌다. 구조가 단순하다면 단기간에 대량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실제 충격보병의 기관총 부대에는 주로 MG08/15가 배치되었으며, 영국군 등으로부터 노획한 루이스 경기관총과 같은 노획 병기도 활용되었다. 박격포 부대에서는 화염 방사기(Flammenwerfer)가 주력으로 사용되어 참호 소탕 등에 효과를 보였다. 또한, 적의 견고한 기관총 진지를 돌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7.62 cm Infanteriegeschütz L/16.5|7.62cm 보병포de가 현장에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9. 돌격대의 야전 장비

손잡이 수류탄이 든 천 가방을 목에서 양 옆으로 늘어뜨리고 소총, 삽, 방독면 케이스를 멘 돌격대 병사. 탄창 주머니 휴대 여부는 불분명하다.


1915년 시점의 돌격대는 일반 보병과 마찬가지로 표준형 야전복을 착용했다. 하지만 헬멧은 가장 먼저 픽켈하우베에서 1916년형 철모로 교체되었다. 또한 1915년부터 화학 무기가 사용됨에 따라, 고무 재질의 안면 마스크와 교체 가능한 예비 필터가 포함된 방독면이 지급되었다.

돌격대를 다른 일반 병사와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1916년 초에 도입된 강철판 덮개가 달린 헬멧이었다. 이는 독일군이 1915년부터 시험 개발해 온 여러 방호 장비 중 하나로, 무게 1.2kg의 니켈-실리콘 강철로 제작되어 당시 연합군의 헬멧보다 우수한 방호력을 제공했다.

돌격대는 신속한 기동을 위해 일반 병사와 달리 장비를 지탱하는 가죽 서스펜더 벨트를 사용하지 않고 경무장을 선호했다. 소총 탄약 휴대에는 가죽 탄입대 외에도 70발 분량의 탄약을 넣을 수 있는 천으로 된 탄띠가 사용되었다. 수류탄 역시 어깨에 메는 마대 자루에 넣어 휴대했다.

10. 돌격대의 편성 (예시)


  • 소대 본부 (Führungstrupp|퓌룽스트룹deu)
  • 소대장 - 특공대장 겸임
  • 전령
  • 무선 통신병 - 본부와의 무선 연락 담당
  • 특공 분대 (Stoßelement|슈토스엘레멘트deu) - 각 1개 또는 2개의 분대로 구성된다.
  • 기관단총(MP18)과 수류탄(자루 수류탄)을 장비한 3명으로 구성된 돌격 분대
  • 기습으로 적과의 근접 거리에서 백병전(침투 전술)을 감행하는 3명으로 구성된 돌격 분대 - 소대장은 통상 이 분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
  • 폭발물 취급 담당 2명으로 구성된 반 - 경우에 따라 양쪽 돌격 분대에 1명만 배치
  • 부소대장이 이끄는 지원 부대 (Deckungsgruppe|데쿵스그루페deu)
  • 저격수 1명, 저격용 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2명
  • 접근하는 적을 막고 좌우로부터의 침투를 방지하는 2명으로 구성된 기관총(MG08/18) 반
  • 폭약 및 탄약 보급 및 운반병 1 - 2명
  • 군의관 1명
  • 전차 파괴 부대 - 대전차 방어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편성되었다.

11. 돌격대의 전술

돌격 보병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침투 전술을 수행하는 부대로서 편성되었다.

전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침투 전술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 명칭

돌격보병이라는 명칭은 독일어 Stoßtruppedeu (복수형 Stoßtruppendeu)를 번역한 말로,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충격 부대를 의미한다. 독일어 단어 Stoßdeu는 원래 '충격'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독일군 교본에서는 "공격은 운동, 사격, 충격(Stoßdeu) 및 이것이 지향하는 방향에 의해 효과를 발휘한다"고 정의하며, 사격과 운동 개념과 함께 충격을 중요하게 여겼다. 영어권에서도 이를 shock troopseng로 번역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Stoßdeu를 '돌격'으로 번역하여 정착시켰고,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돌격보병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충격부대'라는 번역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대신 '특공대'나 '돌진대' 같은 번역어가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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