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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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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젠 주는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의 일부였던 지역으로, 현재는 폴란드의 일부이다. 지리적으로 평평한 지형을 이루며,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1772년과 1793년 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에 편입된 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 바르샤바 공국에 속했다가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포젠 대공국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독일화를 추진하며 폴란드인과 독일인 간의 민족 갈등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에 편입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병합되었다가 종전 후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포젠 주는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행정 구역은 포젠과 브롬베르크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2. 지리

1910년 포젠의 지형도


포젠 주는 대부분 평평한 지형으로, 북쪽의 노테치 강(독일어: ''Netze'')과 중앙의 바르타 강(''Warthe'')이라는 두 개의 주요 분수계에 의해 물이 빠져나간다. 최후 빙하기의 빙하가 남긴 퇴적구로 인해, 이 지역에는 두 강 중 하나로 흘러 들어가는 수백 개의 "손가락 호수"와 개울이 흩어져 있다.

2. 1. 농업과 산업

이 지역은 대부분 평평하며, 북쪽의 노테치 (독일어: ''Netze'')와 중앙의 바르타 (''Warthe'')라는 두 개의 주요 분수계 시스템에 의해 배수된다. 최후 빙하기의 빙하는 퇴적구를 남겼으며, 이 지역은 두 강 중 하나로 흘러 들어가는 수백 개의 "손가락 호수"와 개울로 흩어져 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호밀, 사탕무, 감자, 기타 곡물류, 담배, 등을 재배하기 위해 삼포식 농법이 사용되었다. 상당한 면적의 삼림은 건축 자재와 장작을 제공했다. 거위를 포함한 소수의 가축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이 사육되었다.

면적은 약 29000km2로, 대폴란드의 역사적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1] 1세기 이상 동안, 나폴레옹 전쟁 기간의 짧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프로이센 분할의 일부였다. 프로이센 통치 당시 봉건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으나, 1810년 프로이센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1864년 콩그레스 폴란드에서는 폐지).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일부 관행은 남아 있었다. 주로 폴란드 농노들은 자유로운 독일 정착민들과 함께 살며 일했는데, 정착민들에게 초기 이점이 주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노들은 귀족 영주를 위해 일했고,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위해 일했지만 영주에게 세금을 납부했다.

일반적으로 영지는 영주 저택과 농가 건물, 폴란드 노동자를 위한 마을, 독일 정착지, 산림 관리인의 거주지로 구성되었다. 영지 소유주(대개 귀족)는 지역 제분소를 소유했으며, 풍차증류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많은 지역의 풍차는 생산성이 없는 늪지를 밭으로 바꾸는 과정을 시작한 초기 정착민인 네덜란드 사람들을 연상시켰다. 이 과정은 늪지뿐 아니라 생산성이 없는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 고용된 독일 정착민들에 의해 완료되었다.

3. 역사

1870년-18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통일과 함께, 포젠 주는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포젠 시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거주 도시로 명명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폴란드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1861년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인들에게 그들이 삶을 포기할 정도로 심하게 타격을 가하라. 나는 그들의 상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을 절멸시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4] 그의 이러한 혐오는 프로이센 정신과 역사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5] 프로이센 내에서 국왕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견해에 동의했기 때문에, 폴란드인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5] 폴란드인들은 프로이센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폴란드 공동체의 정체성과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수많은 억압적인 조치가 시행되었다.[6][7]

이러한 차별과 강제 독일화에 직면하여, 포젠의 폴란드 주민들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랑스 편을 들었다. 프랑스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통치 하의 폴란드인에 대한 지원과 동정심을 표명했다.[8][9] 프로이센-독일의 승리 소식에 대한 시위는 폴란드 독립 감정을 나타냈고, 폴란드 징집병들에게 프로이센군에서 탈영하라는 외침도 있었지만, 이는 거의 무시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슬라브-로마 포위의 조짐이자 통일된 독일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0]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아래에서 경찰력 증강, 식민 위원회, 그리고 ''문화 투쟁''을 포함한 갱신된 독일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독일 동부 변경 지역 협회(Hakata) 압력 단체가 1894년에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폴란드 인구를 상대로 특별 법률이 통과되었다. 1908년의 법률은 폴란드 소유 재산의 몰수를 허용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포젠에서 산업 발전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공국의 경제는 고도의 농업에 지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포젠 주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폴란드 주민들은 이 지역이 새로 독립한 제2 폴란드 공화국에 포함되기를 원했고, 독일 소수 민족은 영토 양보를 거부했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연설 다음 날인 1918년 12월 27일, 대폴란드 봉기가 일어났다.[1] 봉기는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부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성공했고, 포젠 주는 1919년 중반까지 자체 정부, 통화 및 군대를 가진 독립 국가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서명으로, 폴란드 인구가 다수인 지역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주는 폴란드에 할양되어 포즈난 보이보드십으로 개편되었다. 독일인 인구가 다수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은 바비모스트|봄스트de, 브슈바|프라우슈타트de, 즈봉시넥|노이 벤첸de, 미엔지제치|메세리츠de, 트르칠|티르슈티겔de(일부), 스비에르지나|슈베린de, 블레제프|블레젠de, 트르치안카|쇤란케de, 비엘렌|필레네de, 츠워파|슐로페de, 와우치|도이치 크로네de, 투츠노|튀츠de, 피와|슈나이데뮐de, 즈워투프|플라토프de, 야스트로비에|야스트로de, 크라옌카|크로얀케de 였다. 이들 지역은 이전 서프로이센의 서부 잔재와 합병되어 포젠-서프로이센[1]으로 통치되었고, 슈나이데뮐이 수도였다. 이 주는 1938년에 해산되었는데, 그 영토는 인접한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포메라니아 및 브란덴부르크로 분할되었다.

1939년, 이전 포젠 주의 영토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어 제국 대관구 단치히-서프로이센과 제국 대관구 바르테란트(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포젠')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이 지역은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1]

1919년 독일군이 폴란드에 할양된 포젠 영토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하는 문서.


1945년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새로 수립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에 있는 모든 독일 영토는 포츠담 협정에 의해 폴란드 인민 공화국 또는 소련에 넘어갔다. 이 지역의 모든 역사적 부분은 폴란드의 통제를 받았고, 남아있는 독일계 민족은 강제로 추방되었다.[1]

3. 1. 프로이센의 지배와 폴란드 분할 (1772-1806)

대폴란드는 1772년(네체 구)과 1793년(남프로이센)에 1차 및 2차 폴란드 분할 동안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패배한 후, 이 지역은 1807년 프랑스-프로이센의 틸지트 조약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에 합병되었다. 1815년 빈 회의 동안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의 서쪽 3분의 1을 차지했는데, 이는 이전 남프로이센의 약 절반에 해당했다. 프로이센은 이후 이 지역을 반자율적인 포젠 대공국으로 통치했는데, 이 대공국은 1830년 콩그레스 폴란드에서 일어난 11월 봉기 이후 대부분의 특별 지위를 잃었다.[1] 프로이센 당국이 중앙 유럽에서 신성 동맹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폴란드 민족 운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대신 프로이센의 독일화 조치는 에두아르트 하인리히 폰 플로트벨 ''최고 총리'' 아래에서 증가했는데, 그는 공작 총독 안토니 라지비우를 대체했다.

1846년의 첫 번째 대폴란드 봉기는 실패했는데, 카롤 리벨트와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를 중심으로 한 주요 반군들이 프로이센 경찰에 보고되어 반역죄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캄머게리히트'' 법정에서의 재판은 독일 국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 그들 역시 카를스바트 칙령에 의해 억압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1848년 3월 혁명에서 석방되어 거리에서 승리하며 행진했다.

동시에, 폴란드 민족 위원회가 포즈난에 모여 독립을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페터 폰 콜롬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처음에는 물러섰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과 새로운 프로이센 위원 카를 빌헬름 폰 빌리센은 갱신된 자치 지위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독일어 사용 인구와 프로이센 수도 모두에서 반폴란드주의 감정이 일어났다. 지역 포젠(Poznań) 의회는 독일 연방 가입에 반대하는 26 대 17 표를 던졌지만, 1848년 4월 3일[2] 프랑크푸르트 국회는 이 표를 무시하고, 프로이센의 일반적인 주로 지위 변경을 시도하고 독일 연방에 통합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3] 프랑크푸르트 의원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르단은 폴란드 자치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국회는 처음에 포젠 공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려고 시도했다: 독일 인구에게 주어져 새로 창설된 대독일에 합병될 포젠 주와, 폴란드인에게 주어져 독일 외부에 남을 그니에즈노 주. 폴란드 정치인들의 항의로 인해 이 계획은 실패했고 공국의 통합성이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대가 마침내 대폴란드 봉기를 진압했을 때, 일련의 약속 위반 후, 1849년 2월 9일 프로이센 당국은 공국의 이름을 포젠 주로 변경했다. 이 지역은 독일 연방이 해산되고 북독일 연방이 설립될 때까지, 1866년까지 공식적으로 독일 연방 (그리고 따라서 독일) 외부에 남아 있었다. 프로이센 왕들은 빌헬름 2세의 퇴위 이후인 1918년에 독일과 프로이센 군주제가 마침내 만료될 때까지 "포젠 대공"이라는 칭호를 유지했다.

3. 2. 나폴레옹 전쟁과 바르샤바 공국 (1807-1815)

1772년1793년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된 대폴란드 지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패배한 후, 1807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틸지트 조약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에 합병되었다.[1]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의 서쪽 3분의 1을 다시 차지했고, 이곳을 포젠 대공국으로 칭하며 반자치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1830년 11월 봉기 이후, 프로이센 당국은 신성 동맹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폴란드 민족 운동을 우려하여 에두아르트 하인리히 폰 플로트벨 최고 총리 아래에서 독일화 정책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공작 총독 안토니 라지비우는 교체되었다.[1]

1846년 대폴란드 봉기는 카롤 리벨트와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 등 주요 반군들이 프로이센 경찰에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들의 베를린 ''캄머게리히트'' 법정 재판은 카를스바트 칙령에 의해 억압받던 독일 국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1848년 3월 혁명에서 이들은 석방되었다.

이후 포즈난에 모인 폴란드 민족 위원회는 독립을 요구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페터 폰 콜롬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일시적으로 물러섰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과 카를 빌헬름 폰 빌리센 프로이센 위원은 자치 지위 갱신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독일어 사용 인구와 프로이센 수도에서 반폴란드주의 감정이 고조되었다. 포젠(Poznań) 의회는 독일 연방 가입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지만, 1848년 4월 3일[2] 프랑크푸르트 국회는 이를 무시하고 포젠을 프로이센의 일반 주로 편입시키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프랑크푸르트 의원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르단은 폴란드 자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국회는 포젠 공국을 독일인에게 주어질 포젠 주와 폴란드인에게 주어질 그니에즈노 주로 분할하려 했으나, 폴란드 정치인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공국의 통합성은 유지되었다.

결국 프로이센 군대가 대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후, 1849년 2월 9일 프로이센 당국은 공국의 이름을 포젠 주로 변경했다. 이 지역은 독일 연방이 해산되고 북독일 연방이 설립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독일 연방 외부에 남아 있었지만, 프로이센 왕들은 1918년까지 "포젠 대공" 칭호를 유지했다.

3. 3. 포젠 대공국과 프로이센의 재지배 (1815-1848)

1815년 빈 회의 결과,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의 서쪽 3분의 1 (과거 남프로이센의 절반)을 차지하여 포젠 대공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1830년 11월 봉기 이후 포젠 대공국은 대부분의 특별 지위를 잃었다.[1] 프로이센 당국은 신성 동맹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폴란드 민족 운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에두아르트 하인리히 폰 플로트벨 최고 총리 아래에서 독일화 조치가 강화되었다.

1846년 대폴란드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주동자들은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이들의 재판은 독일 국가 자유주의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1848년 3월 혁명 당시 주동자들은 석방되었다.

같은 시기, 포즈난에 폴란드 민족 위원회가 결성되어 독립을 요구했다. 프로이센 군은 일시 후퇴했으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과 프로이센 위원 카를 빌헬름 폰 빌리센은 자치 지위 갱신을 약속했다.

하지만, 독일어 사용 인구와 프로이센 수도에서 반폴란드주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포젠(Poznań) 의회는 독일 연방 가입에 반대했지만, 1848년 4월 3일[2] 프랑크푸르트 국회는 이를 무시하고 포젠을 프로이센의 일반 주로 편입시키려 했다.[3] 프랑크푸르트 의원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르단은 폴란드 자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국회는 포젠 공국을 독일인 지역인 포젠 주와 폴란드인 지역인 그니에즈노 주로 분할하려 했으나, 폴란드 정치인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프로이센 군이 대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후, 1849년 2월 9일 프로이센 당국은 공국의 명칭을 포젠 주로 변경했다. 이 지역은 1866년까지 공식적으로 독일 연방 외부에 남아있었지만, 프로이센 왕들은 1918년까지 "포젠 대공" 칭호를 유지했다.

3. 4. 1848년 혁명과 대폴란드 봉기

1846년의 첫 번째 대폴란드 봉기는 주요 반군들이 프로이센 경찰에 보고되어 반역죄로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1] 그러나 이들의 재판은 1848년 3월 혁명에서 석방되면서 독일 국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같은 시기, 포즈난에서 폴란드 민족 위원회가 모여 독립을 요구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과 프로이센 위원 카를 빌헬름 폰 빌리센은 갱신된 자치 지위를 약속했다.[1]

그러나, 이 지역의 독일어 사용 인구와 프로이센 수도에서는 반폴란드주의 감정이 일어났다. 포젠(Poznań) 지역 의회는 독일 연방 가입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지만, 1848년 4월 3일[2] 프랑크푸르트 국회는 이를 무시하고 포젠 주를 독일 연방에 통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3] 프랑크푸르트 의원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르단은 폴란드 자치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국회는 처음에 포젠 공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폴란드 정치인들의 항의로 인해 이 계획은 실패했고 공국의 통합성은 유지되었다.

프로이센 군대가 대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후, 1849년 2월 9일 프로이센 당국은 공국의 이름을 포젠 주로 변경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1866년까지 공식적으로 독일 연방 외부에 남아 있었다. 프로이센 왕들은 1918년까지 "포젠 대공"이라는 칭호를 유지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통일과 함께, 포젠 주는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포젠 시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거주 도시로 명명되었다.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폴란드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폴란드인들은 프로이센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폴란드 공동체의 정체성과 문화를 근절하기 위한 수많은 억압적인 조치가 시행되었다.[6][7]

차별과 강제 독일화에 직면한 포젠의 폴란드 주민들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랑스 편을 들었다. 프랑스와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통치 하의 폴란드인에 대한 지원과 동정심으로 알려져 있었다.[8][9] 비스마르크는 이를 통일된 독일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0]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아래에서 갱신된 독일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독일 동부 변경 지역 협회 (''Hakata'') 압력 단체가 1894년에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폴란드 인구를 상대로 한 특별 법률이 통과되었다. 1908년의 법률은 폴란드 소유 재산의 몰수를 허용했다.

3. 5. 독일 제국과 문화 투쟁 (1871-1914)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통일과 함께, 포젠 주는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포젠 시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거주 도시로 명명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폴란드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1861년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인들에게 그들이 삶을 포기할 정도로 심하게 타격을 가하라; 나는 그들의 상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을 절멸시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4] 그의 이러한 혐오는 프로이센 정신과 역사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5] 프로이센 내에서는 국왕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견해에 동의했기 때문에, 폴란드인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5] 폴란드인들은 프로이센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폴란드 공동체의 정체성과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수많은 억압적인 조치가 시행되었다.[6][7]

이러한 차별과 강제 독일화에 직면하여, 포젠의 폴란드 주민들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랑스 편을 들었다. 프랑스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통치 하의 폴란드인에 대한 지원과 동정심을 표명했다.[8][9] 프로이센-독일의 승리 소식에 대한 시위는 폴란드 독립 감정을 나타냈고, 폴란드 징집병들에게 프로이센군에서 탈영하라는 외침도 있었지만, 이는 거의 무시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슬라브-로마 포위의 조짐이자 통일된 독일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0]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아래에서 경찰력 증강, 식민 위원회, 그리고 ''문화 투쟁''을 포함한 갱신된 독일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독일 동부 변경 지역 협회(''Hakata'') 압력 단체가 1894년에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폴란드 인구를 상대로 특별 법률이 통과되었다. 1908년의 법률은 폴란드 소유 재산의 몰수를 허용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포젠에서 산업 발전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공국의 경제는 고도의 농업에 지배되었다.

3. 6. 제1차 세계 대전과 폴란드의 독립 (1914-1918)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포젠 주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폴란드 주민들은 이 지역이 새로 독립한 제2 폴란드 공화국에 포함되기를 원했고, 독일 소수 민족은 영토 양보를 거부했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연설 다음 날인 1918년 12월 27일, 대폴란드 봉기가 일어났다.[1] 봉기는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부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성공했고, 포젠 주는 1919년 중반까지 자체 정부, 통화 및 군대를 가진 독립 국가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서명으로, 폴란드 인구가 다수인 지역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주는 폴란드에 할양되어 포즈난 보이보드십으로 개편되었다. 다수 독일인 인구가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 (봄스트de, 프라우슈타트de, 노이 벤첸de, 메세리츠de, 티르슈티겔de (부분적으로), 슈베린de, 블레젠de, 쇤란케de, 필레네de, 슐로페de, 도이치 크로네de, 튀츠de, 슈나이데뮐de, 플라토프de, 야스트로de, 크로얀케de)는 이전 서프로이센의 서부 잔재와 합병되어 포젠-서프로이센[1]으로 통치되었고, 슈나이데뮐이 수도였다. 이 주는 1938년에 해산되었는데, 그 영토는 인접한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포메라니아 및 브란덴부르크로 분할되었다.

3. 7. 베르사유 조약과 포젠 주의 분할 (1919)

1918-19년 대폴란드 봉기는 1918년 12월 27일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연설 다음 날 발생하였다. 이 봉기는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부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봉기 성공 이후, 포젠 주는 1919년 중반까지 자체 정부, 통화 및 군대를 가진 독립 국가였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폴란드 인구가 다수인 지역 대부분이 폴란드에 할양되어 포즈난 보이보드십으로 개편되었다.[1] 독일인 인구가 다수인 나머지 지역 (봄스트, 프라우슈타트, 노이 벤첸, 메세리츠, 티르슈티겔 (부분적), 슈베린, 블레젠, 쇤란케, 필레네, 슐로페, 도이치 크로네, 튀츠, 슈나이데뮐, 플라토프, 야스트로, 크로얀케)은 이전 서프로이센의 서부 잔재와 합병되어 포젠-서프로이센[1]으로 통치되었고, 슈나이데뮐이 수도였다. 이 주는 1938년에 해산되었는데, 그 영토는 인접한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로 분할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와 바이마르 독일 간의 포젠 주 분할
포젠1910년 면적 (km2)영토 점유율1910년 인구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귀속비고
귀속:28,992 km2 [11]100%2,099,831분할:
폴란드26,111 km2 [12]90% [13]93% [13]포즈난주
독일2,881 km210%7%포젠-서프로이센[14]1918년 이후 프로이센 대폴란드의 서쪽 가장자리가 독일에 남았다. 이 지역에는 상당한 폴란드 소수 민족이 거주했다.


3. 8. 제2차 세계 대전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 (1939-1945)

1939년, 이전 포젠 주의 영토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어 제국 대관구 단치히-서프로이센과 제국 대관구 바르테란트(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포젠'')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이 지역은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1]

1945년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새로 수립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에 있는 모든 독일 영토는 포츠담 협정에 의해 폴란드 인민 공화국 또는 소련에 넘어갔다. 이 지역의 모든 역사적 부분은 폴란드의 통제를 받았고, 남아있는 독일계 민족은 강제로 추방되었다.[1]

4. 민족 및 종교 구성

포젠 주는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했고, 독일인유대인 소수 민족, 그리고 소수의 다른 민족들이 거주했다. 거의 모든 폴란드인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대부분의 독일인은 개신교 신자였다. 소수의 유대인은 주로 대규모 공동체에 속해 있었으며, 대부분 숙련된 공예, 지역 상업 및 지역 무역에 종사했다.[24]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른 포젠의 모어(母語)


1905년 포젠 주,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 따른 폴란드어 사용 지역(노란색 표시)


19세기 전반에는 국가가 후원하는 식민지화로 인해 독일인 인구가 증가했다.[15]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Ostflucht와 폴란드인의 높은 출생률로 인해 폴란드인 인구가 점차 증가했다.

프로이센 행정부의 독일 통계와 1918년 이후 폴란드의 추정치 사이에는 상당한 불일치가 있다. 1905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서는 독일어 사용자가 약 38.5%(식민주의자, 주둔 군대, 독일 행정관 포함)였던 반면, 1918년 이후 포젠 주에 해당하는 포즈난 보이보드십의 독일인 수는 7%에 불과했다. 비톨트 야콥치크는 프로이센 당국이 독일계 민족과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소수 민족을 같은 계층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다고 보았다.[24] 제2 폴란드 공화국 수립 후 독일인의 상당수가 탈출했고, 주로 독일인이 거주했던 주의 일부 국경 지역(피와 포함)이 1918년 이후에도 독일에 남았다는 점도 불일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26][27] 폴란드 측 자료에 따르면, 1910년 폴란드인의 실제 비율은 61.5%가 아니라 65%였다.[21]

포젠 주의 민족 언어 구성
연도1815[16]1819[17]1837[18]1846[19]1890[20]1910[21]
총 인구[22]798,000883,9721,158,6081,343,1351,751,6422,099,831
폴란드어 사용 비율(%)7377.065.371.760.161.5 (또는 65)[21]
독일어 사용 비율(%)2517.528.328.339.938.5 (또는 35)[21]


4. 1. 독일화 정책과 민족 갈등

대폴란드는 1772년(네체 구)과 1793년(남프로이센)에 1차 및 2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이 지역을 반자치적인 포젠 대공국으로 통치했으나, 1830년 11월 봉기 이후 폴란드 민족 운동을 우려하여 독일화 정책을 강화했다.[1]

1846년 대폴란드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1848년 3월 혁명으로 석방되었다. 폴란드 민족 위원회는 독립을 요구했으나, 프로이센은 자치 지위 약속을 어기고 프랑크푸르트 국회는 포젠 주의 독일 연방 편입을 시도했다.[2][3]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통일과 함께 포젠 주는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폴란드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문화 투쟁을 포함한 독일화 정책을 추진했다.[4][5][6][7] 포젠의 폴란드 주민들은 차별과 강제 독일화에 직면하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지했으며,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었다.[8][9][10]

독일 동부 변경 지역 협회 (''Hakata'')가 설립되고 폴란드인 대상 특별 법률이 통과되는 등 억압이 강화되었으나, 폴란드인들은 저항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포젠에서 산업 발전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 경제 구조를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폴란드 봉기가 발생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인이 다수인 지역은 폴란드에 할양되어 포즈난 보이보드십이 되었다. 독일인 다수 지역은 포젠-서프로이센 주로 유지되었다가 1938년 해산되었다.[1] 1939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포츠담 협정에 따라 폴란드에 귀속되었고, 독일계 주민들은 추방되었다.

이 지역은 폴란드인이 다수였고, 독일인유대인 소수 민족이 거주했다. 종교적으로는 폴란드인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신자, 독일인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다. 19세기 프로이센의 게르만화 정책으로 독일인 비율이 증가했으나, 이후 폴란드인의 높은 출생률과 Ostflucht로 인해 폴란드인 비율이 다시 증가했다.

문화 투쟁에서 프로이센은 가톨릭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고, 이는 폴란드인 가톨릭 인구가 많은 포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가톨릭 독일인은 폴란드인과 연대하여 반가톨릭 정책에 반대했다. 이후 독일 제국민족주의적 이유로 정착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게르만화 정책을 강화했으나, 폴란드어 사용 금지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포젠 주의 민족 언어 구성
연도1815[16]1819[17]1837[18]1846[19]1890[20]1910[21]
총 인구[22]798,000883,9721,158,6081,343,1351,751,6422,099,831
폴란드어 사용 비율(%)7377.065.371.760.161.5 (또는 65)[21]
독일어 사용 비율(%)2517.528.328.339.938.5 (또는 35)[21]



프로이센의 통계와 1918년 이후 폴란드의 추정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프로이센은 독일계 민족과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함께 분류했고,[24] 독일 제국이 이 지역에 정착시킨 독일인, 군인, 관리와 그 가족이 161,000명에 달했다.[25] 제2 폴란드 공화국 수립 후 독일인의 탈출, 가톨릭 독일인의 폴란드화, 독일인 거주 지역의 일부가 독일에 잔류한 것[26][27] 등이 불일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폴란드 측 자료에 따르면 1910년 실제 폴란드인 비율은 65%였다.[21]

5. 행정 구역

포젠 주 내의 Regierungsbezirke (행정 구역): 포젠 (분홍색), 브롬베르크 (녹색) 및 하위 구획인 Kreise


포젠 주는 프로이센 정부 관할 지역(''Regierungsbezirke'')으로 세분화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관할 지역이 있었다.

  • 포젠 관할 지역 17503km2
  • 브롬베르크 관할 지역 11448km2


이 지역은 다시 ''Kreise'' (군)으로 세분화되었다. 각 도시는 "Stadtkreis"(도시 구역)를 가졌고, 주변 농촌 지역은 도시의 이름을 따서 "Landkreis"(농촌 구역)라고 불렸다. 포젠의 경우, Landkreis는 Landkreis Posen West와 Landkreis Posen East의 두 개로 나뉘었다.

포젠 주의 민족 구성 (1910년 인구 조사)[22]
구역폴란드어 명칭인구독일인%폴란드인%이중 언어 사용자%
포젠 주-2,099,831806,72038.4%1,278,89060.9%11,8230.6%
브롬베르크 관할 지역-763,947379,48849.7%378,83149.6%4,9560.6%
브롬베르크 시비드고슈치57,69646,72081.0%9,35016.2%1,5572.7%
브롬베르크 구비드고슈치96,47358,78360.9%37,04938.4%5900.6%
차르니카우 구차르니쿠프42,28730,01671.0%12,02728.4%1790.4%
필레네 구비엘렌33,65323,50469.8%9,91829.5%2170.6%
그네젠 구그니에즈노56,25021,46138.2%34,64361.6%1290.2%
호헨잘차 구이노브로츠와프77,29428,39436.7%48,59962.9%2580.3%
포젠의 콜마르 구호지에시76,02061,60081.0%13,95718.4%4270.6%
모길노 구모길노49,25314,27429.0%34,65970.4%1940.4%
슈빈 구슈빈48,30421,03543.5%26,79955.5%4030.8%
스트렐노 구스트젤노37,6207,43719.8%30,10980.0%670.2%
비르시츠 구비르지스크67,21934,23550.9%32,44648.3%4950.7%
비트코보 구비트코보29,0944,81416.5%24,16483.1%910.3%
봉그로비츠 구봉그로비에츠52,57416,30931.0%35,95568.4%2160.4%
즈닌 구즈닌40,21010,90627.1%29,15672.5%1330.3%
포젠 관할 지역-1,335,884427,23232.0%900,05967.4%6,8670.5%
아델나우 구오돌라노프36,3064,68112.9%31,53786.9%870.2%
비른바움 구미엔지후트28,88714,06948.7%14,51350.2%2640.9%
봄스트 구바비모스트63,12030,98049.1%31,79450.4%2140.3%
프라우슈타트 구프슈호바28,91419,66368.0%8,90230.8%3321.1%
고스틴고스틴48,3266,52813.5%41,72086.3%700.1%
그라츠그로지스크 비엘코폴스키36,4835,99716.4%30,28083.0%1910.5%
야로친야로친51,6269,23617.9%42,16881.7%1970.4%
켐펜켕프노37,0505,93316.0%30,69782.9%2360.6%
코슈민 구코지민 비엘코폴스키33,5195,71917.1%27,68582.6%580.2%
코스텐코시치안47,3255,14910.9%42,09188.9%500.1%
크로토신 구크로토신46,87415,82233.8%30,70965.5%3240.7%
리사 구레슈노44,57927,45161.6%16,65937.4%4261.0%
메제리츠 구미엔지제츠53,30641,05977.0%12,20722.9%00.0%
노비 토미실 구노비 토미실34,29215,70045.8%18,48153.9%1090.3%
오보르니크 구오보르니키55,88022,45040.2%33,13959.3%2450.4%
오스트로보 구오스트루프 비엘코폴스키43,8879,71322.1%33,97077.4%1650.4%
플레센 구플레셰프37,3626,20016.6%30,96582.9%1280.3%
포젠 시포즈난156,69165,31941.7%89,35157.0%1,3110.8%
포젠 서부 구포즈난, 서.43,1297,37417.1%35,47482.3%2360.5%
포젠 동부 구포즈난, 동.49,11914,10228.7%34,79570.8%1740.4%
라비치 구라비치50,52321,25342.1%29,15057.7%920.2%
잠테르 구샤모투위66,85617,07125.5%49,58974.2%1430.2%
쉴트베르크 구오스트셰슈프37,2905,47014.7%31,10083.4%7181.9%
슈미겔 구시미겔36,3836,62618.2%29,54481.2%2070.6%
슈림 구시렘57,48310,01717.4%47,08881.9%3660.6%
슈로다 구시로다 비엘코폴스카49,1766,20112.6%42,87087.2%920.2%
슈베린 구스크비에지나21,62019,72991.3%1,7228.0%1420.7%
브제슈니 구브제시니아39,8787,72019.4%31,85979.9%2900.7%



독일인 수치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인구가 포함되어 있다.[22]

6. 저명한 인물


  • Stanisław Adamski|스타니스와프 아담스키pl (1875–1967): 폴란드 사제이자, 폴란드 노동자 가톨릭 사회 연합(''Związek Katolickich Towarzystw Robotników Polskichpl'')의 사회 및 정치 활동가. 주간지 '로보트니크'(노동자)의 창립자이자 편집자였다.
  • Leo Baeck|레오 백de (1873–1956): 독일의 랍비, 학자, 신학자.
  • Tomasz Bartkiewicz|토마시 K. 바르트키에비치pl (1865–1931): 폴란드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 싱어 서클 연합(Związek Kół Śpiewackich)의 공동 창립자였다.
  • Wernher von Braun|베르너 폰 브라운de (1912–1977): 독일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설계자. V1, V2 로켓부터 최초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한 새턴 로켓에 이르기까지 로켓 기술 개발의 선구적인 인물로 "로켓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 Czesław Czypicki|체스와프 치피키pl (1855–1926): 코즈민 출신 폴란드 변호사. 가수의 사회 활동가였다.
  • Michał Drzymała|미하우 드르지마와pl (1857–1937): 폴란드 농민.
  • Ferdinand Hansemann|페르디난트 한세만de (1861–1900): 프로이센 정치인. 독일 동부 변경 지역 사회의 공동 창립자.
  • Paul von Hindenburg|파울 폰 힌덴부르크de (1847–1934): 독일 원수이자 정치가. 아돌프 히틀러 이전 독일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 Józef Kościelski|유제프 코시체르스키pl (1845–1911): 폴란드 정치인이자 국회의원. 스트라즈 (경비대) 사회의 공동 창립자.
  • Józef Krzymiński|유제프 크르지민스키pl (1858–1940): 폴란드 의사, 사회 및 정치 활동가, 국회의원.
  • Władysław Marcinkowski|브와디스와프 마르친코프스키pl (1858–1947): 미로스와프에 있는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기념비를 만든 폴란드 조각가.
  • Bernd Freiherr von Maydell|베른트 남작 폰 마이델de (1934–2018): 독일 변호사이자 작가.
  • Władysław Niegolewski|브와디스와프 니에골레프스키pl (1819–85): 폴란드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국회의원. 1846년, 1848년, 1863년의 봉기 가담자. TCL과 CTG의 공동 창립자.
  • Cyryl Ratajski|치릴 라타이스키pl (1875–1942): 1922–34년 포즈난 시장.
  • Arthur Ruppin|아르투르 루핀de (1876–1943): 사회학자, 시오니스트 사상가이자 지도자. 텔아비브의 공동 창립자.
  • Karol Rzepecki|카롤 제페츠키pl (1865–1931): 폴란드 서적상, 사회 및 정치 활동가. 소콜 (매) 잡지의 편집자.
  • Antoni Stychel|안토니 스티헬pl (1859–1935): 폴란드 사제, 국회의원. 폴란드 노동자 가톨릭 사회 연합 (Związek Katolickich Towarzystw Robotników Polskich) 회장.
  • Roman Szymański|로만 쉬만스키pl (1840–1908): 폴란드 정치 활동가, 저술가. ''오렌도브니크'' 잡지의 편집자.
  • Alfred Trzebinski|알프레드 트제빈스키de (1902–1946): 여러 나치 강제 수용소의 SS 의사. 전쟁 범죄로 처형됨.
  • Aniela Tułodziecka|아넬라 투워지에츠카pl (1853–1932): 바르타 사회 (Towarzystwo Przyjaciół Wzajemnego Pouczania się i Opieki nad Dziećmi Warta)의 폴란드 교육 활동가.
  • Piotr Wawrzyniak|표트르 바브지냐크pl (1849–1910): 폴란드 사제, 경제 및 교육 활동가. 수입 및 경제 사회 연합(Związek Spółek Zarobkowych i Gospodarczych)의 후원자.

참조

[1] 서적 Historisches Lexikon der Deutschen Länder: die deutschen Territorien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 C.H.Beck
[2] 서적 Historia Polski 1795-1918 Wydawnictwo Literackie
[3] 서적 Einbürgern und Ausschliessen: die Nationalisierung der Staatsangehörigkeit vom Deutschen Bund bis zur Bundesrepublik Deutschland Vandenhoeck & Ruprecht
[4] 서적 A History of Modern Germany: 1840-1945
[5] 서적 Bismarck Bloomsbury Publishing
[6] 서적 Historia Polski 1795-1918 Wydawnictwo Naukowe PWN
[7] 서적 Historia Polski 1795-1918 Wydawnictwo Literackie
[8] 서적 Bismarck: A Political History
[9] 서적 Zarys dziejów wojskowości polskiej w latach 1864-1939 Wydawn. Ministerstwa Obrony Narodowej
[10] 서적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Gemeindeverzeichnis Deutschland http://www.gemeindev[...]
[12] 서적 Tablice statystyczne Polski: wydanie za rok 1924 [Poland's statistical tables: edition for year 1924] http://cyfrowa.chbp.[...] Instytut Wydawniczy "Bibljoteka Polska"
[13] 간행물 Obszar i ludność b. dzielnicy pruskiej [Area and population of former Prussian district] https://repozytorium[...] AMUR - Adam Mickiewicz University Repository 1921
[14] 웹사이트 Die Grenzmark Posen-Westpreußen Übersichtskarte http://www.gonschior[...]
[15] 문서 Preußische Ansiedlungskommission
[16] 서적 Historia 1789-1871
[17] 서적 Statistischer Umriß der sämmtlichen europäischen und der vornehmsten außereuropäischen Staaten, in Hinsicht ihrer Entwickelung, Größe, Volksmenge, Finanz- und Militärverfassung, tabellarisch dargestellt; Erster Heft: Welcher die beiden großen Mächte Österreich und Preußen und den Deutschen Staatenbund darstellt; Nationalverschiedenheit 1819: Polen - 680,100; Deutsche - 155,000; Juden - 48,700 https://books.google[...] Verlag des Geographischen Instituts Weimar
[18] 간행물 Opisanie historyczno-statystyczne Wielkiego Księstwa Poznańskiego http://www.wbc.pozna[...] Jan N. Bobrowicz, Leipzig
[19] 서적 Sprachliche Minderheiten im preussischen Staat: 1815 - 1914 ; die preußische Sprachenstatistik in Bearbeitung und Kommentar https://opacplus.bsb[...] Herder-Inst. 1998
[20] 서적 Ethno-nationality and property rights in land in Prussian Poland, 1886-1918, Buying the land from under the Poles' feet? https://books.google[...] S. Engerman, Land rights, ethno-nationality and sovereignty in history
[21] 서적 The Poles under Prussian rule https://archive.org/[...] Polish Press Bur.
[22] 웹사이트 Sprachliche Minderheiten im preußischen Staat 1815–1914. http://www.geschicht[...]
[23] 서적 Sprachliche Minderheiten im preußischen Staat 1815–1914
[24] 웹사이트 "Dzieje Wielkopolski" (red. Witold Jakóbczyk) http://www.siodemka.[...]
[25] 서적 Transnationalism in the Prussian East: From National Conflict to Synthesis, 1871–1914 Palgrave Macmillan
[26] 서적 Orphans of Versailles: the Germans in Western Poland, 1918-1939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9-09-05
[27] 서적 The German Question Since 1919: An Analysis with Key Documents Greenwood Publishing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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