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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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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호는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서예가로, 자는 경필, 호는 석봉이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뛰어난 필체로 명성을 얻었으며, 왕희지에 비견되기도 했다. 선조는 그의 글씨를 벽에 걸어 감상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제독들이 그에게 글씨를 부탁하기도 했다. 해서, 행서, 초서 등 모든 서체에 능했으며, 독창적인 석봉 서체를 만들어 조선 서예 발전에 기여했다. 1605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선무·호성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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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호
원어명韓濩
다른 이름자: 경홍
호: 석봉, 청사
로마자 표기Han Ho, Han Seok-bong
출생1543년 11월 15일, 조선 경기도 개성부
사망1605년 7월 1일 (향년 63세), 조선 경기도 가평군
국적조선
직업서예가, 외교관, 시인
가족
배우자강릉 최씨 부인
자녀장남 한민정(韓敏政)
부모부: 한언공(韓彦恭)
모: 백인당 홍주 백씨 부인(白仁堂 洪州 白氏 夫人)
친척조부 한세관(韓世寬)
관직 정보
직책경기도 가평군수
임기1600년 2월 29일 ~ 1604년 2월 29일
군주조선 선조 이연
직책 2경기도 흡곡현령
임기 21604년 2월 29일 ~ 1604년 3월 18일
군주 2조선 선조 이연
학력
학력1567년 과거(진사시)에 급제
기타 정보
소속 정당무소속
웹사이트알 수 없음

2. 생애

한호는 후세에 서예의 명인으로 불렸으며, 명나라의 명필가 주지향(朱之香)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평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1]

한호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갈 때마다 연석에서 특유의 정교한 필법으로 글씨를 써서 동방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았으며, 명나라 고위 관료들로부터 왕희지와 비교하는 평판을 받았다. 공조형조의 현판, 대성전(大成殿)의 판액을 쓰기도 했다.

선조는 한호의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마귀(麻貴) 등도 한호에게 친필을 부탁하여 얻어 갔다고 전해진다.

이덕형(李德泂)의 수필집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따르면, 그의 글씨를 탐내는 이들이 많아 그의 아들, 형제 중 그의 필적을 가진 자가 있으면 타인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사후 증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해도 금천군 안신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석봉산 해좌원에 매장되었다. 묘비문은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이진검(李眞儉)이 썼는데 현재 존재하는 비석은 1716년(숙종 42년)에 세워진 것이며 6대손 한탁의 글씨로 썼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나무꾼으로 일하면서 문자를 읽고 썼던 유명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석봉의 석상을 세운 학교가 있다.

2. 1. 생애 초반

1543년 11월 15일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변 혹은 삼화(三和)이며, 는 경홍(景洪), 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아버지는 한언공이고 어머니는 백인당(白忍堂) 백씨(白氏)이며, 할아버지는 병조정랑 한세관이다.[8] 아버지는 생전에 관직이 없었고, 사후 한석봉이 원종공신에 녹훈된 공로로 증 호조참판의금부동지사추증되었다.

한석봉이 태어나자 한 점술가가 "옥토끼가 동방에 태어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가격이 높아지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 글을 배웠으나 15세에 조부마저 여의었다. 이후 집안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다. 반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한호는 어려서 왕희지에게서 글씨를 선물받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한호의 묘비문에는 왕희지가 나타나 그에게 필법을 전수해주는 꿈을 두 번 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로 글씨 연습을 계속하였다. 12세에 영계 신희남(瀯溪 愼喜男)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9]

나중에 신희남은 한호를 자신의 스승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에게 추천하여, 성수침백인걸의 문하에서 20세까지 글과 성리학 학문을 배웠다.

그는 인척인 최립(崔岦)과 가까이 지냈는데, 최립의 문집 간이집에는 한호와 주고받은 글, 편지, 시 등이 일부 실려 있다. 한호는 사람이 중후하고 술을 잘 마셨으며, 이정귀에 의하면 술을 마시면 도도한 주흥(酒興)에 겨워 자적하며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적어 남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2. 2. 관료 생활

1567년(명종 22) 25세 때 식년과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와서별제, 사헌부감찰, 호조, 형조, 공조정랑 등을 역임했다.[1]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될 때에도 수행원으로 명나라 사신을 접견했다.[1] 1583년(선조 16)에는 통례원 인의(引儀), 사포서사포(司圃), 북부 사도(北部司䆃), 사재감 주부, 한성부 판관, 종친부 전부(典簿), 찬의(贊儀) 등을 역임했다.[2] 글씨를 잘 써서 미암 유희춘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2]

1572년(선조 5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원접사(遠接使)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3] 1581년 주청사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선조 15년) 율곡 이이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다시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연경을 다녀왔다.[4]

1588년 주부(主簿)를 지냈고, 1591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원접사의 사자관(寫字官)이 되어 이들을 접견했다.[5] 같은 해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5]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는 선조파천을 수행하며 사보로 왕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문서 관련 일을 맡았다. 그해 8월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1593년 11월 10일 명나라에 주청사로 파견되는 최립의 수행원이 되어 연경을 방문, 이듬해 초 귀국하였다.[5] 1599년(선조 32년) 천거로 세자익위사 사어(司禦)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가평군수(加平君守)가 되었다.[5]

한호는 사자관(寫字官)으로서 국가의 주요 문서 및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며, 그 동안 사신을 따라 몇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6]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과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사후 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1]

2. 3. 생애 후반

1601년 차역(差役)과 세금 징수를 잘 처리하지 못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가 추고하고 무마시켰다. 1601년 명나라동지사가 파견될 때, 서장관 이정귀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흡곡현령(谷縣縣令)으로 부임했으며, 1604년 공신 녹권(錄券)을 필사할 때 한성부로 소환되어 녹권 필사를 맡았으나,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고의로 글씨를 잘못 썼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해 11월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이 되어 존숭도감(尊崇都監)의 글씨를 필사한 공로로 아마(어린 말) 1필을 선물로 받았다.[1]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같은 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605년 7월 1일에 사망하였다.[1]

3. 석봉 서체의 특징 및 평가

한호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엄주(弇州) 왕세정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의 8자를 써 주었다.

그는 안평대군, 김구, 양사언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 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한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 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4. 일화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천재에다 피나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해·행·진·초(楷行眞草)의 각체가 모두 묘경에 이르렀다. 그는 돈이 없어서 서당은커녕 먹과 종이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항아리나 돌 위에 손에 물을 찍어서 글씨 연습을 하였으며, 매일같이 꾸준히 연습하자 글씨를 쓰는 솜씨가 차츰 나아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에 그 어머니는 한호를 유명한 절로 들여보내 공부하게 하였는데, 한호의 스승인 승려는 한호를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가는 그의 글 솜씨에 감탄했다.

절에 들어가 공부한 지 3년 후, 어느 날 한호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절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찾아왔다. 돌아와서 이미 공부를 많이 해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한호를 불을 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자신은 칼로 떡을 썰고 한호는 붓으로 글씨를 쓰게 하여 둘의 솜씨를 비교해 보자고 하였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크기나 두께가 모두 똑같아 보기가 좋았는데, 한호가 쓴 글씨는 서로 크기가 제각각이고 모양이 비뚤비뚤하여 보기가 흉했다. 이에 어머니는 한호를 엄하게 질책하며 자신의 떡처럼 눈을 감고도 글씨를 고르게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하여 한호를 다시 돌려보내 공부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한석봉과 어머니를 주제로 한 수묵화 (타타오 캘리아트 제작)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나무꾼으로 일하면서 문자를 읽고 썼던 유명한 위인"으로서, 한석봉의 석상을 세운 학교가 있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한세관(韓世寬)1486년 ~ 1557년 12월 21일
할머니통천 최씨? ~ 1538년 11월 11일
아버지한언공(韓彦恭)1524년 ~ 1546년 12월 29일
어머니홍주 백씨? ~ 1575년 1월 25일, 장사랑 화담 백옥근(白玉根)의 딸
한부(韓溥)1539년 ~ ?
동생한제(韓濟)1547년 ~ 1635년
동생한택(韓澤)
동생한연(韓演)
부인강릉 최씨? ~ 1633년 6월 12일, 최담(崔湛)의 딸
장남한민정(韓敏政)1567년 ~ 1637년 1월 7일
며느리교하 노씨? ~ 1679년 5월 7일, 노수복(盧壽福)의 딸
손자한장(韓樟)
손자한기(韓杞)1596년 ~ 1673년 11월 27일
손자한재(韓榟)
손녀사위조석지(趙錫之)
손녀사위전찬(田穳)
한씨
사위임정민(林廷敏)
장인최담(崔湛)
장모초계 정씨정현(鄭賢)의 딸


6. 관련 인물

7. 관련 작품 및 문화재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한석봉을 "나무꾼으로 일하면서 문자를 읽고 썼던 유명한 위인"으로 기려, 그의 석상을 세운 학교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Film Archive http://www.koreafilm[...]
[2] 뉴스 "Korea for the World, the World for Korea." http://www.arirang.c[...] Arirang
[3] 웹사이트 (10)청주 한씨(淸州韓氏)-642,992명 http://www.seoulecon[...] 2014-07-06
[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PPL_6JOb_A1543_1_0014357
[5] 서적 월사집
[6] 서적 간이집
[7] 서적 약산만고
[8] 문서
[9] 서적 본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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