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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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정회는 1916년 입헌동지회, 중정회, 공우구락부의 합당으로 창당된 일본의 정당이다. 가토 다카아키가 이끌었으며,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에 반대하며 입헌정우회와 대립했다. 1924년 제2차 호헌 운동을 주도하여 제1당이 되었고, 가토 다카아키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1927년 정우본당과 합당하여 입헌민정당으로 흡수,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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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정우회는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일본 정당으로, 게이엔 시대를 거치며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하고 하라 다카시 시대에는 정당 내각을 구성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분열과 군부 영향력 확대로 1940년 해산되었다.
헌정회 | |
---|---|
기본 정보 | |
이름 | 헌정회 |
원어 이름 | 憲政会 |
로마자 표기 | Gensei Kai |
약칭 | 해당 없음 |
언어 | 해당 없음 |
당수 | 해당 없음 |
대표 | 해당 없음 |
의장 | 해당 없음 |
총재 | 해당 없음 |
총비서 | 해당 없음 |
원내대표 | 해당 없음 |
원내총무 | 해당 없음 |
창준위원장 | 해당 없음 |
초대대표 | 해당 없음 |
지도자 직함 | 해당 없음 |
지도자 이름 | 해당 없음 |
표어 | 해당 없음 |
창당일 | 1916년 10월 10일 |
등록 취소일 | 1927년 6월 27일 |
피병합 | 해당 없음 |
분당전 | 해당 없음 |
선행 조직 | 해당 없음 |
통합 정당 | 해당 없음 |
후계 정당 | 입헌민정당 |
이전 당명 | 해당 없음 |
중앙 당사 | 도쿄 |
정책 연구소 | 해당 없음 |
신문 | 해당 없음 |
학생 조직 | 해당 없음 |
청년 조직 | 해당 없음 |
부문 조직 제목 | 해당 없음 |
부문 조직 | 해당 없음 |
재정 지원 | 해당 없음 |
재정 연도 | 해당 없음 |
당원 | 해당 없음 |
당원 연도 | 해당 없음 |
이념 | 해당 없음 |
스펙트럼 | 해당 없음 |
종교 | 해당 없음 |
선거 연합 | 해당 없음 |
자매 정당 | 해당 없음 |
교섭 단체 | 해당 없음 |
국제 | 해당 없음 |
유럽 | 해당 없음 |
유럽 의회 | 해당 없음 |
가입 조직 제목 | 해당 없음 |
가입 조직 | 해당 없음 |
상징색 | 해당 없음 |
의회 의석 | 해당 없음 |
의회 의석 정수 | 해당 없음 |
지방 의회 | 해당 없음 |
지방 의회 정수 | 해당 없음 |
상원 의석 | 해당 없음 |
상원 의석 정수 | 해당 없음 |
하원 의석 | 해당 없음 |
하원 의석 정수 | 해당 없음 |
유럽 의회 의석 | 해당 없음 |
유럽 의회 의석 정수 | 해당 없음 |
의석 제목 | 해당 없음 |
의석 수 | 해당 없음 |
의석 정수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창립 및 해산 | |
창립일 | 1916년 10월 10일 |
해산일 | 1927년 6월 1일 |
해산 사유 | 신당 이행 때문 |
후신 | 입헌민정당 |
합병 대상 | 입헌동지회 중정회 공우구락부 |
정치적 입장 | |
정치적 이념 | 보수주의 |
정치적 입장 | 정치 혁신 |
관련 정보 | |
기관지 | 『헌정』 |
지도부 | |
지도자 |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
2. 역사
1916년 10월 10일, 입헌동지회(가토 다카아키 총재), 중정회(오자키 유키오 총무), 공우구락부가 합당하여 헌정회가 창당되었다.[1] 가토 다카아키가 총재를 맡았고, 오자키 유키오, 하마구치 오사치, 아다치 겐조 등 주요 인물들이 당을 이끌었다. 헌정회는 미쓰비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가토 다카아키와 미쓰비시 가문의 관계 때문이었다. 창당 당시 헌정회는 일본 중의원에서 198석을 확보하여 과반수를 차지하는 제1당이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에 반대하여 불신임 결의안을 발의했으나 중의원 해산으로 이어졌고, 이후 약 10년간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1] 이 시기 동안 헌정회는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노동조합의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
1924년 총선에서 헌정회는 원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하여, 입헌정우회, 혁신구락부와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1] 이를 호헌 삼파 내각이라고 부르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당 연립 정부였다. 이들은 메이지 헌법하의 통치를 추진하고, 보통선거법으로 이어지는 보편적 남성 선거권과 노동법, 그리고 농민들의 경제 상황 개선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1]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1]
가토 다카아키 수상이 사망하면서, 와카츠키 레이지로가 헌정회 후임 총재로 취임했고,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이 성립되어 헌정회 정권이 이어졌다. 그러나 쇼와 금융 공황에 대한 대처 실패로 인해 결국 내각이 붕괴되었다.
1927년 6월, 헌정회는 정우본당과 합당하여 입헌민정당을 결성했다.[1]
2. 1. 창당 배경 (1916년 이전)
제2차 오쿠마 내각은 중의원 제1당인 입헌정우회(총재 하라 타카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연합하여 성립되었다.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 번벌, 입헌동지회 등이 서로 반목하면서 1916년 10월 내각이 총사퇴하게 되었다.같은 해 10월 9일, 번벌 출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이 내각을 조직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10일, 입헌동지회(가토 다카아키 총재), 중정회(오자키 유키오 총무), 공우구락부 등 비(非)입헌정우회 세력을 중심으로 '''헌정회'''가 창당되었다. 가토 다카아키가 총재를 맡았고, 오자키 유키오, 타케토미 토시미츠, 타카다 사나에, 와카츠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아다치 겐조, 카타오카 나오하루 7명이 총무로서 그를 보좌했다. 헌정회는 창당 당시 198석을 확보하여 중의원 제1당이 되었다.[1]
데라우치 내각은 의회 대책으로 임시외교조사회를 설치하고 주요 정당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헌정회는 정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우려하여 참가를 거부했다. 반면 입헌정우회의 하라 총재는 이에 참여했고, 데라우치 내각은 입헌정우회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게 되었다. 1917년 4월 20일 제1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가 제1당으로 복귀했고, 헌정회는 제2당으로 밀려났다. 1918년 9월 29일,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퇴하고 하라가 수상이 되면서 하라 내각이 성립되었다. 1920년 5월 10일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입헌정우회가 압승을 거두었다. 헌정회는 원로의 부인, 시베리아 출병 반대, 노동조합 공인, 헌정의 상도에 따른 정권 교체를 주장했지만, 하라의 권력과 민중의 지지 앞에 장기간 하락세를 겪으며 "고난의 10년"을 보내게 되었다.[1]
2. 2. 창당과 초기 활동 (1916년 ~ 1924년)
1916년 10월 10일, 헌정회는 입헌동지회 (가토 다카아키가 이끔), 중정회 (오자키 유키오가 이끔), 공우구락부의 합당으로 창당되었다.[1] 가토 다카아키가 초대 총재를 맡았으며, 하마구치 오사치, 아다치 겐조 등이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헌정회는 미쓰비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가토 다카아키와 미쓰비시 가문의 관계 때문이었다.헌정회는 창당 초기부터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과 대립했다. 원로의 추천으로 총리가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 반발하여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이는 중의원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후 헌정회는 약 10년간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1]
이 시기 동안 헌정회는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노동조합의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
2. 3. 제2차 호헌 운동과 연립 내각 참여 (1924년 ~ 1927년)
1924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헌정회는 150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1당이 되었다.[1] 그러나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100석의 입헌정우회(다카하시 고레키요 총재), 30석의 혁신구락부(이누카이 쓰요시 총재)와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1] 이 3당 연립(호헌 삼파)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당 연립 정부였으며, 과반수를 바탕으로 국내 정치 개혁과 온건 외교 정책 추진에 주력했다.[1]1924년 총선 직후, 기요우라 내각이 중의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성립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제2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정우회는 기요우라 내각에 대한 찬반 문제로 내부분열을 겪었고, 당의 과반수가 이탈하여 정우본당을 결성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정회가 입헌정우회, 혁신구락부와 함께 호헌 삼파를 결성하여 호헌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총선 결과에 따라 1924년 6월 11일,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1] 이 내각은 보통선거법 제정 등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1925년 7월, 정우회가 내각 불일치를 이유로 내각 타도를 시도했으나,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는 정우회의 계략에 의한 정권 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겨 헌정회 단독 내각으로 정권이 유지되었다.
가토 다카아키 내각은 메이지 헌법 하의 통치를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원로의 영향력이나 통제를 받지 않았다.[1] 또한, 보통선거법으로 이어지는 보편적 남성 선거권과 노동법, 그리고 농민들의 경제 상황 개선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1]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1]
1926년 1월 28일, 가토 다카아키 수상이 사망하면서 와카츠키 레이지로가 헌정회 후임 총재로 취임했고,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이 성립되어 헌정회 정권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우회, 정우본당과의 3당 정립 하에서 단독 내각이었기 때문에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쇼와 금융 공황에 대한 대처 실패로 인해 결국 내각이 붕괴되었다.
2. 4. 해산과 입헌민정당으로의 통합 (1927년)
1927년, 헌정회는 정우본당과 합당하여 입헌민정당을 결성한다.[1] 이는 쇼와 금융 공황으로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이 붕괴하고,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발족한 직후의 일이었다. 헌정회와 정우본당은 모두 야당이었기 때문에, 양당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입헌민정당이 탄생하게 되었다.5·15 사건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입헌민정당과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한 양당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기능하였다.
3. 정책 및 이념
헌정회는 입헌 동지회, 중정회, 공우구락부의 합병으로 창당되었으며, 집권 입헌 정우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1] 미쓰비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하마구치 오사치, 아다치 겐조 등이 지도자로 있었다.[1]
메이지 헌법 하의 통치를 강화하고 원로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이념을 가졌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1]
3. 1. 주요 정책
헌정회는 야당 시절 시베리아 출병에 강력히 반대하고 노동 조합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할 것을 촉구했다.[1]1924년 일본 총선에서 헌정회는 150석을 확보하여 중의원 내 최대 정당이 되었지만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다. 가토 다카아키는 입헌 정우회(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이끔) 및 혁신구락부(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끔)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 연립 정부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당 연립 정부였으며, 과반수를 이용하여 국내 정치 개혁과 온건한 외교 정책에 집중했다.
연립 정부는 메이지 헌법 하의 통치를 강력히 추진했으며, 원로의 영향력이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또한 보편적 남성 선거권 (보통선거법으로 이어짐)과 노동법, 그리고 일본 제국 농업의 농부들의 경제 상황에 대한 절실히 필요한 개혁을 옹호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연립 정부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다.
3. 2. 이념적 지향점
헌정회는 입헌 동지회, 중정회, 공우구락부의 합병으로 창당되어, 메이지 헌법 하의 통치를 강화하고 원로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이념적 지향점을 가졌다.[1] 미쓰비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헌정회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헌정회는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노동 조합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24년 일본 총선 이후 입헌 정우회, 혁신구락부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보편적 남성 선거권 (보통선거법으로 이어짐), 노동법, 그리고 일본 제국 농업 농민들의 경제 상황에 대한 개혁을 옹호했다. 그러나 연립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1]
4. 역대 지도부
1916년 10월 10일, 입헌 동지회(가토 다카아키가 이끔), 중정회(오자키 유키오가 이끔) 및 소규모 야당인 공우구락부의 합병으로 헌정회가 창당되었다. 가토 다카아키가 이끄는 신당은 집권 입헌 정우회(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총리대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정당은 미쓰비시 재벌(zaibatsu)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하마구치 오사치, 아다치 겐조 등이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1]
1924년 일본 총선에서 헌정회는 150석을 확보하여 일본 중의원 내 최대 정당이 되었지만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가토 다카아키는 입헌 정우회(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이끔) 및 혁신구락부(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끔)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가토 다카아키 사후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당을 이끌었지만,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붕괴하였다. 이후 헌정회는 1927년 6월 정우 본당과 합당하여 입헌 민정당을 결성했다.[1]
4. 1. 역대 총재
대 | 총재 | 재임 기간 | |
---|---|---|---|
1 | ![]() | 가토 다카아키 | 1916년 (다이쇼 5년) 10월 10일 - 1926년 (다이쇼 15년) 1월 28일 |
2 | ![]() | 와카쓰키 레이지로 | 1926년 (다이쇼 15년) 1월 29일 - 1927년 (쇼와 2년) 6월 1일 |
가토 다카아키는 입헌 동지회, 중정회, 공우구락부를 합병하여 헌정회를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1] 1924년 총선에서 헌정회는 일본 중의원 내 최대 정당이 되었고, 입헌 정우회, 혁신구락부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메이지 헌법 하의 통치를 추진하고, 보통선거법 제정, 치안유지법 통과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1]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가토 다카아키 총재 사후 헌정회 총재가 되었으나, 그의 내각은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다.[1] 이후 헌정회는 정우 본당과 합당하여 입헌 민정당을 결성했다.[1]
4. 2. 간사장 및 총무위원
이름 | 재임 기간 |
---|---|
토미타 코지로 | 다이쇼 5년 10월 10일 - 다이쇼 8년 1월 20일 |
코이즈미 마타지로 | 다이쇼 10년 1월 20일 - 다이쇼 11년 1월 19일 |
타노모기 케이키치 | 다이쇼 11년 1월 19일 - 다이쇼 12년 1월 21일 |
코야마 쇼주 | 다이쇼 12년 1월 21일 - 다이쇼 13년 1월 21일 |
미키 타케시 | 다이쇼 13년 1월 21일 - 다이쇼 13년 6월 11일 |
야마미치 죠이치 | 다이쇼 13년 8월 13일 - 다이쇼 14년 1월 20일 |
야나미 타케지 | 다이쇼 14년 1월 20일 - 다이쇼 14년 8월 10일 |
요코야마 카츠타로 | 다이쇼 14년 8월 12일 - 쇼와 2년 1월 16일 |
나카하라 토쿠타로 | 쇼와 2년 1월 16일 - 쇼와 2년 5월 31일[3] |
5. 선거 결과
선거 연도 | 득표 | 의석 | 변동 | |
---|---|---|---|---|
득표수 | 득표율(%) | |||
1917년 | 467,518 | 36.0 | 121 / 381 | |
1920년 | 715,500 | 27.5 | 110 / 464 | |
1924년 | 872,533 | 29.3 | 151 / 464 |
1917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헌정회는 36.0%의 득표율로 381석 중 121석을 얻었으나, 1920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득표율이 27.5%로 감소하고 의석도 464석 중 110석으로 줄었다.[1] 1924년 일본 총선에서는 29.3%의 득표율로 464석 중 151석을 확보하여 중의원 내 최대 정당이 되었지만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헌정회는 입헌 정우회, 혁신구락부와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1]
참조
[1]
서적
The State and Labor in Modern Japan
[2]
웹사이트
汚職会
https://kotobank.jp/[...]
2019-04-06
[3]
서적
日本官僚事典 1868-2000
東京大学出版会
2001
[4]
서적
昭和の政党
岩波書店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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